동화로 쓰는 생애사 – 9월 4일의 기록

“나 고등학교 때” + 화난 얼굴 행복한 얼굴
수업 10분전, 대부분의 학우들은 그 정도 시간에 들어온다. 담당 복지사도 10분 전에 와서 오늘 결석자를 알려준다. 복지사 선생님과 한 청년이 같이 들어왔다. 건강하고 잘 생긴 청년이다. 자원봉사 선생님이라고 복지사샘이 알려주니 갑자기 교실에 환호성이 터졌다. 20대로 보이는 청년이 쑥스럽게 웃으며 자리에 앉자마자 갑자기 상민 씨가 일어나서 자기 소개를 하고 싶다고 했다. 편한대로 해도 된댔더니 춤으로 자기 소개를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휴대폰을 열어서 승민 씨가 원하는 노래를 틀어줬다. 씨스타의 Ma Boy라는 노래였다. 승민 씨의 춤은 동작이 조밀하지 않다. 전체적인 동작을 크게 확장하여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데 미세한 움직임은 잘 표현하지 못해도 충분히 흥이 났다는 것을 알릴 수 있다. 오히려 육감적인 동작을 표현하지 않아서 보는 나도 덜 쑥스러웠다. 승민 씨가 춤을 추고 나자 수정 씨도 춤으로 자기 소개를 하겠다고 나섰다. 수영 씨가 자기 노래를 부르고, 채영 씨는 어린이 찬양인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라는 노래를 불렀다. 혜은 씨는 다들 노래를 한 소절씩 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내가 혜은 씨도 노래 하겠냐고 물었더니 가스펠 곡 하나를 골라서 말해주었다. 나는 유투브와 음악 스트리밍 앱을 번갈아 열어가며 노래를 틀었다.
수영 씨가 작곡한 곡중에 “봄바람”이라는 곡이 있는데 나는 이 곡이 참 좋다. 재능 있는 누군가 수영 씨의 곡을 유명하게 만들어주면 좋겠는데 그게 또 좋은 일일까 싶기도 하고. 아무튼 여기 저기 알려보고 있다.
새로 온 자원봉사 청년에게 자기 소개를 하겠다는 의미는 채영 씨 차례에서 무색해졌다. 누군가를 위한 소개가 아니라 장기자랑을 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면 어떤가. 글 쓰기 시간이라고 글만 써야 하는 건 아니다. 노래도 괜찮고 그림도 괜찮다. 울고 웃으며 수다를 떨며 한 시간을 보내도 상관없다. 생애사 쓰기의 의미를 나는 자기 표현하기라고 본다.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글쓰기로 넘어가기 위해선 마음의 고갱이를 깊이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게다가 여러 명이 같이 한다면 서로를 표현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학우들이 춤으로 노래로 자기 표현을 하는 걸 보니 흐뭇했다.
지난 주에 썼던 글은 중학교때 이야기, 오늘은 고등학교때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했다. 다른 생애사쓰기는 생애주기별로 하나씩 훑어 나가지만 여기는 이야기의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게 약간 어려워서 단편적으로 끊어서 진행한다. 옛 기억을 꺼내는 것에 능숙하지 못한 면이 있다. 비장애인들이나 언어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자기 기억을 재구성해 이미 스토리로 만들어 머릿속에 저장해둔다. 수시로 그 에피소드를 꺼내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주목을 끄는데 익숙하다. 인터뷰를 많이 해 본 사람들이 가진 특성이 이런 것인데 자기 서사가 확실해 오히려 그 안에서 한계가 생기는 경우다. 여기서 한 얘기를 다른 데 가서도 하기 때문에 우물처럼 고여버린 서사가 있다. 그 틀을 깨는 질문을 던지면 당황하고 그럴 때 자기 세계의 균열이 일어나는데 어떤 이들은 균열을 두려워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진지하게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기 위한 고민을 하기도 한다.
자폐와 지적장애의 특성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어렵지만 여기도 분명 자기 서사가 있다. 고정된 서사를 깨는데 비장애보다 어려운 면이 있다. 자폐가 있는 학우들은 자기 틀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고 내가 그 틀을 깨려고 망치를 들고 덤빌 일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다른 흐름을 타는 정도면 충분하다. 수영 씨가 바로 그런 케이스인데 평소에 해보지 않은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최선규 아나운서나 90살이 되어도 더 멋진 노래를 만들거에요, 최선규 아나운서와 듀엣을 할거예요. 라는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이다. 은혜 씨는 수현 씨와 다른 서사를 보이는데 은혜 씨의 서사는 다 독립적이다. 본인이 겪었던 불쾌한 정서가 모든 서사를 관통한다. 반짝이는 흰 바지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
학우들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혜은 씨도 비슷하다. 각자 일종의 테마를 가진 셈인데 혜은 씨는 “기분이 좋아 방긋방긋 웃어.”, “기분이 안 좋아 아침에 울었어.”가 자신의 테마다. 매번 이 문장이 들어가고 아마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다고 추측할 뿐이다. 혜은 씨에게는 불안이 느껴진다. 세상만물이 끊임없이 작동하고 움직이는 것에 대한 불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모든 것들이 쉴 새없이 변화한다는 것은.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나 역시 쉬지 않고 움직이는 건 아닐까. 작동하기 위해서. 지구가 뱅글뱅글 돈다는 것 자체만으로 인간은 불안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갈 수 밖에 없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기현 씨는 자원봉사선생님이 딱 붙어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이어나가게 도우니 긴 글을 쓸 수 있었다. 계속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 그랬냐고 추궁하는 것이 아니고. 자원봉사자들은 대부분 사회복지학과 전공학생이거나 자원봉사를 오래 해 본 청년들인데 숙달된 경험이 있어서 나도 많이 배운다. 자원봉사자들도 사실 글쓰기 교육이 필요한 경우가 보이긴 하지만, 타인의 마음의 문을 열어 열쇠 하나씩 꺼내는 것 같은 작업은 능숙하게 잘 해낸다. 비장애인 생애사 쓰기에도 이런 역할을 서로 해 보는 게 괜찮을 것 같다.
승민 씨는 요즘 모든 글의 마무리에 “사랑해”를 넣는다. 친구들아 사랑해, 동진아 사랑해, 우리 좋은 친구 되자, 은혜언니 사랑해. 사랑이 넘치는 승민 씨는 오늘도 열심히 글을 쓰려고 최선을 다한다.
수정 씨가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을 좋아한다고 적었다. 청년들이 왜 내 시대의 대중문화를 잘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부모님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부모님들은 아마 나보다 10살 정도 많을텐데, 수영 씨만 해도 홍학표, 장철웅, 최선규 아나운서를 말하고 혜은 씨는 자꾸 김병세 이야기를 한다. 지금도 활동하는 연예인과 방송인들이지만 9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이들이다. 어디서 봤냐고 물으면 TV에서 봤다고 대답을 하는데 누군가 90년대 취향을 가진 사람이 집안에서 TV를 틀어놨을 것이고 어릴 때부터 그 문화에 익숙하게 파고들었다는 이야기다. 지금 시대의 대중문화는 아이돌 음악에 집중되어 있다. 또래의 비장애인에 비해 20년전 대중문화에 모두 익숙해져 있는 게 특이하다. 나는 기억하는 이들이지만 20대 후반의 미술선생님은 잘 모를 이야기들인데 스물 네 살의 수 씨가 탤런트 홍학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웃음이 나올 뿐.
이날은 지난 주에 이어서 얼굴 그리기의 채색을 했다. 얼굴을 그려서 종이에 반절만 붙인다. 떨어져 있는 종이를 넘기면 얼굴이 두 개가 되는데 기분 좋을 때의 내 표정과 기분 나쁠 때의 내 표정을 그리고 색으로 표현했다. 은혜 씨는 기차와 전철을 탈 때 행복했다는 걸 표현하며 행복하면 얼굴이 초록색이 되고 화가 나면 주황색이 된다고 했다. 신종인플루엔자 주사를 맞을 때 기분이 나빴다고 하는데 지난 주에도 신종인플루엔자 주사 얘기를 했다. 무척 아팠던 모양이다. 수영 씨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그렸는데 “컵라면만 먹고 싸우고” 라는 말을 했다. 중고등학교때 음악학원 다닐 때 이야기인 것 같은데 학원에서 받은 교육이 좀 혹독했던 모양이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음악교육을 받다가 고등학교 졸업때쯤 그만두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수정 씨는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했는데 “미안하구나 얘야.”라는 할머니의 말을 말풍선에 그려 넣었다. 자기 얼굴에는 “할머니 가지마”라는 말을 적었다. 20대 쯤 되면 대부분 아무리 슬펐던 일이라도 자기 검열에 걸려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정 씨는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감정을 잘 표현한다.
승민 씨는 화가 나면 초록색, 칭찬을 받으면 하늘색이 된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반장이 뭐라고 했던 걸 기억해서 말했는데 행복한 건 “선”, 불쾌한 건 “악”이라고 말했다. 이분법과 대립은 가장 쉬운 학습법이라는 얘기가 떠올랐다.
혜은 씨는 화나면 보라색이 되고 기분이 좋으면 연두색인데, 연두색은 메로나 색깔이다. 혜은 씨는 대부분의 그림에 메로나 색깔인 연두색을 주로 칠한다. 화가 난 얼굴에 보라색을 칠하고 “엄마 혼나” 라고 적었다. 혜은 씨는 조사를 많이 쓰지 않는다.
채영 씨는 기분이 좋으면 살색, 화가 나면 까만색. 기현 씨는 재밌으면 살색, 화가 나면 파란 색이 된다. AOA에 초아가 탈퇴해서 이제 AOA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발달장애인들이 파란 색에 집착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그 역시도 낭설인 것 같다. 세상엔 얼마나 많은 낭설이 있나. 익숙하지 않고 낯선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쉽게 일반론을 찾아내려고 한다. 다양성을 이해한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어떤 규칙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사실을 구겨넣으려는 이분법적 사고는 세상을 편협하게 만든다. 자폐는 세상밖으로 나가기 어렵고 자기만의 세상에 산다고들 말한다. 과연 자폐자만 그럴까. 비장애라는 사람들 중에 자폐보다 더 편협하고 더 좁은 자기 만의 세상에 스스로를 가두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2018년 9월 4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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