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보다 유능했던 대통령

 

첫 번째.
나같은 범인들은, 아침이 되면 아무리 내가 프리랜서라도, 남들이 모두 출근할 시간이라는 걸 아니까. 진동으로 해 놓은 휴대폰에 알람이 울리면 잠결이라도 한 번은 들춰보기 마련이다.
게다가 계속 울리는 전화가 있다면, 내가 늦잠을 자는 건 내 사정이니까, 잠결에 잠긴 목소리 티 안 내려고 애쓰며 정중하게 받곤 한다.
특히 아침 8시 반 이후면, 내 사정이 어쨌든간에 전화는 받는다. 단지 생계가 연관되지 않았더라도.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전화를 하는 경우라면, 널널한 일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
게다가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자마자, 혹은 출근하는 길에 나를 찾는다면, 그 사람은 밤새, 혹은 출근길에도 나에게 전화할 걸 생각했다는 이야기다. 월요일 오전이라면, 쉬는 주말동안 나와의 통화를 기다렸을 거다.

두 번째는,
나이를 먹을 수록 아침잠이 없어진다 하고, 마흔을 넘기며 나도 겪고 있는데 칠순이 다 된 노인이. 오전 10시가 넘어서.
귀마개를 하거나 암막커튼에 완벽한 방음장치를 한 방에 있거나.

세 번째는, 눈 뜬지 20분이 지나 의료용 가글을, 그것도 타인의 손을 빌려 받아 써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20분이면 세수도 하고 이도 닦을 수 있는 시간인데 매일 의료용 가글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독특한 습관이라도 있는 건가.
그래, 그건 그나마, 개인의 취향이니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 이해받기 어려운 습관은 하나씩 있는 법이니까.

네 번째는, 미용사에게 급하다고, 전화도 아닌 문자를 보낸 윤전추. 그리고, 강남에 있는 미용사 자매를 기다리느라 두 시간을 보낸 노인. 물론, 이 두 시간동안, 노인은 자신의 멘토, 아니 분신보다 더 소중한, 자신의 결정권자를 기다리며 두 손을 모으고 안절부절 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절대적으로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멍청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매우 영리하고, 진심으로 눈물을 흘릴 줄도 안다.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만.

박근혜가 일찍 일어났다면, 아이들이 살았겠냐고, 그들은 그저 무능했고 담당자들은 소심했을 뿐이라는 주장을 보았다. 물론, 박근혜가 문제가 아니라 전체 시스템의 문제라는 이야기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무능하다는 건 사전 그대로 능력이 없음을 말한다. 능력이 없다는 것은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무능하다고 한다.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을 때 우리는 개인의 태도를 들여다 보게 된다.
권력을 쥔 자가 아닌 한 인간의 태도로 보건데, 자신을 급박하게 찾을 사람들이 때때로 있고, 국가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는 자는 무능할 수 없다. 그는 말 한마디로 많은 것을 결정할 수 있고 국가를 움직일 수 있다. 말 실수로 외교의 단절을 가져올 수 있고, 말 한 마디로 한 사람의 밥줄을 끊을 수 있다.
그가 탄핵된 이후, 우리는 그가 얼마나 많은 그의 능력을 발휘해 왔는지 보았다. 그는 공무원 한 사람의 생계를 끊었고,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검사를 밀쳐냈으며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의 생계를 끊었다.

그의 썰렁한 농담에도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배를 잡고 웃었으며, 그의 결정으로 개성공단의 수많은 이들이 길바닥에 나와 물건을 팔았다. 아직도 그들이 놓고 온 물건과 집기는 개성에 남아있다.

그는 무능하지 않다. 누가 그를 무능하다 하는가. 그는 유능했다. 자신의 권력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모든 권력을 총동원해 스스로의 보위를 지켰다.

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룰 줄 알았기 때문에, 이전의 대통령들은 할 수 있어도 하지 못했던 권력을 휘두를 줄 알았기 때문에, 그의 수하에 있던 이들은 감히, 잠에서 깨지 못하는 그의 침실문을 박차고 들어가지 못했고, 감히, 그에게 말로 설명하지 못했으며, 감히, 그에게 배가 모두 침몰했다고, 아이들이 죽을 것 같다고, 아무도 살아나오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하지 못해서, 감히, 그에게 자신의 판단을 말했다가 “나쁜 사람”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할 무능한 인간이 될까 두려워서, 배가 뒤집어지는 그 장면을 보면서도 영상을 찍고, 전화를 하고, 보고서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결단코, 박근혜의 무능때문이 아니다.

그는 유능했다. 오로지 그 자신에게만.

그는 권력이 있었고, 역대 그 어떤 대통령보다 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다만,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썼을 뿐이다.

박근혜의 권력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했다.
이명박의 권력이 오로지 자신의 돈을 위해 존재했듯이.

 

2018년 3월 38일

박근혜의 세월호 7시간이 검찰수사에 의해 밝혀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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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후, 4월의 바다

꿈은 기억 위에 돋아난다.
상상했던 모든 것들은 과거에서 온다.
들었거나 읽었거나 봤거나 느껴봤던 것들.
기억 속에 숨어있거나 그 밖에서 혼자 울고 있었더라도.
꿈꾸지 않았던 일들은 늘 일어나고 만다. 다시 과거가 된다.
바다를 바라보고 산철쭉이 혼자 섰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 분홍옥매와 꽃잔디와 뜬금없는 난까지.
바다앞에서 나를 잊지 말라 했던가.
바다는 예전의 바다가 아니다.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으라 했던가. 그건 방향제로 악취를 덮는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덮는다고 덮어질까. 눈이 녹으면 벌겋게 드러나는 황토처럼, 꽃이 지면 질퍽해진 목련그늘 아래처럼.
기억이 기억을 덮고, 세월이 세월을 덮으면,
바다는 다시 예전의 그 바다가 될까.
살아있는 자의 손을 꼭 잡는다.
바다 앞에서 우리는 모두 속수무책이므로.
그림자가 길다.
3년 후, 4월의 바다170416_iphone6+ 215

더 많은 내부고발자

 

외부충격이다, 음모론이다,

잠수함이다, 암초다.

믿고 싶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이유를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그 커다란 배가 어찌 그렇게 넘어갔으며, 모두가 살아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당연해보였던 예상을 뒤엎고 너무 많은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생중계로 봤기 때문이다.

그날 해가 지던 순간을 기억하는가.

청문회에 나와 마이크 앞에 앉은 자들은 모두 그날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헌법재판소에서는 “그날은 일반 국민들도 자기가 뭘 했는지 기억할 수 밖에 없는 날”이라고 했다.

2014년 4월 16일, 해가 지던 순간을 기억하는가.

목이 메이고 눈물을 참으려고 눈알이 벌개지도록, 당신도, 나도 TV 화면을 바라보며 옥죄어드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으니까.

해가 진다,

해가 진다,

해가 지면 안 되는데,

해가 지면 안 되는데.

그날 아침 8시 49분, 세월호가 침몰했고, 뉴스 속보가 떴다.

진도 앞바다 여객선 침몰. 이라는 속보를 보고 앞바다라니 별 일 없을거라 생각했다. 비어 있는 큰 아이의 방문을 닫다가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 젖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교복을 입은 아이가, 큰 아이의 방에 잠시 섰다가 사라졌다. 아이의 머리는 길었고 앞머리가 단정했다. 그 교복은 하복이었다. 살아남은 아이들이 나중에 학교로 돌아올 때 입었던 그 교복의 형태. 반팔의 흰 셔츠로 되어 있는, 짧은 치마와 흰 양말이 흐릿한 형체.

팔에 돋는 소름을 거두고 서울 서초에서 볼일을 보고 나올 때 전원구조라는 속보가 떴다. 그리고 나는 제암리에 있었다. 제암리교회에 도착해 기념관을 둘러보고 자목련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바람이 적당히 불었고, 공기가 텁텁했다. 봄마다 오는 그런 날이었다. 갑자기 대기가 묵지근해지고 바람엔 먼지와 모래가 섞여 있는 듯 하고, 멀리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자꾸 아른아른하고 몽롱하게 들리는, 햇빛은 나지만 찬란하지 않은, 조금 걸으면 몸이 더워져서 겉옷을 벗어들게 되는, 화창하지 않은, 그런 날이었다.

바람이 불어 자목련 잎사귀가 마구 떨어지는 것을 영상으로 찍으며, 전원구조가 오보였다는 걸 알았다. 나는 왜, 지금, 왜 하필이면 여기 제암리에 있는가, 참담했다.

별 일 없을 거라 믿었다. 침몰했다는 여객선은 거대했고, 쉽게 넘어갈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며, 진도 앞바다라 어민들도, 해경도, 모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녁이 되면 아이들이 오돌오돌 떨며 담요를 뒤집어쓰고 엄마아빠에게 안겨 실컷 울다가 저주받은 수학여행이라 운수가 나빴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저녁이 되면, 전 국민이 뉴스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대참사를 피해가는 과정에 등장한 시민영웅이 한두 명쯤 나와 인터뷰를 할 것이라고, 믿었다.

당연하게 펼쳐질 거라 생각했던 뉴스는 없었다. 진도에는 비가 왔고, 아이들은 바다에서 나오지 못했고, 아이들이 왜 나오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비 오는 진도에서 비옷을 입고 청와대로 가겠다는 길이 막혔고, 우리의 모든 소망이 그때부터 가로막혔다.

이후로 우리는 바다, 침몰, 여객선 같은 단어를 쓰기 어렵다. 노란색, 배, 고래, 리본을 보면 가슴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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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일, 안양 범계역

자로의 세월X는 돌을 던진 셈이다.

그는 동영상 시작부분에서 “개인적 견해”라는 점을 밝혔다. 이렇게 2년간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지 궁금해 한 사람이 있다고, 그게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모든 것을 원점에서 재수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정유라가 독일에 있고 독일검찰이 수사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한 네티즌이 썼던 댓글을 잊지 못한다. “독일이 어떤 나란데. 과거를 청산한 나라다.”

오늘은 자로의 세월X가 업로드되었고 언론에 조명을 받았다. K스포츠재단의 내부고발자가 한 명 더 나타나 이제 K스포츠재단내의 내부고발자가 세 명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의인”이라 칭함은 옳지 않으나 “내부고발자”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과거를 청산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죄를 인정하고 처벌을 감수하되 개인의 사익을 위해서라도 더 많은 공익을 위해 위험을 감내할 각오를 보였다. 지금 여기엔 더 많은 내부고발자가 필요하다. 세월호를 잊고 싶던 개인의 내면, 유가족들에게 가졌던 불편한 마음의 내면, 고통을 응시하지 못했던 비겁한 내면, 때로는 잊히길 바랐던 이기적인 내면, 그 모든 내부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 다시 끄집어내고 이 모든 것을 전부 다 바로 세워야 한다고 말하는 각자의 내면의 고발이 필요하다.

그날 아침부터 모두들 해가 지기 전에

아이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그 하룻동안, 박근혜는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일정이 없는 날이니 느즈막이 일어나 드라마를 보거나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며 쉬었을 것이다. 배가 가라앉았는다는데 해경은 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냐고 질책하며, 본인은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을 굳게 확신하며 머리를 올리고 화장을 한 뒤 중대본으로 갔을 것이다. 책임자들이 제대로 구조하지 않은 것에 분개하며, 자신의 임무에 집중했을 것이다. 박근혜가 알고 있는 자신의 책임은 오로지 의전뿐이니까.

그런 자를 대통령으로 뽑아 앉힌 자들이 내 이웃에 있다. 어떤 기관의 보안손님이고 싶었던 내 내면에 최순실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더 많은 내부고발자가 필요하다.

왜 그랬을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작은 욕망들이 뒤틀려 기괴한 모습으로 갑작스럽게 튀어나올 때 일어난다. 왜 그랬는지. 세월호의 진실은 아무리 파헤쳐도 우리가 죽는 날까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을 왜 구하지 못했는지 왜 구하지 않았는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진실도 살아남은 자들을 설득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끊임없이 의심하는 일. 지치지 말고 진실을 파헤치는 일, 끝까지, 책임을 묻고 스스로 내부고발자가 되어 이 모든 과거를 청산하는 일.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다.

2016년 12월 26일

그날, 2014년 4월 16일, 화성 제암리

가만히 있지 않는 아이들을 길러야 한다 – 경기도 민주시민교육

교육청 주관으로 민주시민교육 교과서연구와 활용방안에 대한 교원연수를 진행중이다.

오늘은 관내 모 중학교 교원연수를 진행했다.
중학교는 연수 시작 가능시간이 3시 30분이후인데 퇴근이 4시 40분이라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좋다.
사전에 학교측에서 2시간 꽉 채워 해달라는 경우도 있겠으나 퇴근시간이 중요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건 학교 분위기에 따라 판단한다.
학교 분위기는 섭외를 담당한 교사의 태도와 연수장소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선생님들의 태도에서 한 방에 느낄 수 있다.
어떤 학교는 2시간이 넘어도 무관하다는 분위기가 있고 어떤 학교는 어찌 되었든 시간은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나는 퇴근시간을 꼭 초과해서라도 진행할 생각은 없다. 그건 받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니까.
민주시민교육 교원연수는
협의체가 구성된 과정을 학교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이며 10개에 걸친 전문분야를 현직교사들이 교육현장에서 어떤 방법으로 적용할까를 먼저 말한다.
민주시민교육 교과서는 경기도교육청에서 집필했는데 그 분야가 초등의 경우, 자치, 선거, 평화, 인권, 다양성, 노동, 미디어, 연대, 정의, 안전으로 되어 있고
중학교의 경우 시민, 민주주의, 선거, 자유, 평등, 연대, 복지, 노동, 경제, 미디어, 다문화, 평화로 구성되었다. 중학교가 분야 분류어가 조금 더 관념적이다. 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교과내용은 학력에 따라 계속 심층적으로 무거워진다.
한 가지 분야를 심층적으로 파고 드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한 명의 교사가 전 분야를 섭렵하는 건 내 판단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분야 중 자신있는 것을 선택하고 교내에서 연구모임을 만들어 각 년간 순차적으로 적용해보길 권한다.
교과서 구성과 교과서 집필의도, 교육현장에서의 추구할 목적을 얘기하다가 내가 몰아가는 핵심주제는 “학교는 민주적인가”, 그리고 “나는 민주적인가”이다.
이 교과는 결론을 낼 필요 없고, 내지 않는 것이 좋다.
교사가 가르치려 들지 말 것,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에 충실할 것,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만들어 아이들이 모두 고르게 의견을 말할 수 있게 하되 정답이 없다는 걸 염두에 두고 교사 먼저 틀을 깨서 자유롭고 여유있게 진행하도록 해달라는 것이 내가 진행하는 연수의 요점이다.
오늘 수업을 진행한 학교는 중산층 이상의 주민이 모여 사는 곳인데 실제 수업을 적용해 본 한 교사는 노동의 경우 아이들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대신 경제 분야에서 윤리적 소비, 공정무역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조금 더 수월했다고 전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지역의 아이들은 본인들의 노동 효용성에 대해 아직 절감하지 못하며 소비를 더 가깝게 느낀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은 우치다 타다루 선생의 “하류지향”에서 말하는 논점과 일치한다.
최근 박근혜게이트와 촛불집회로 인해 민주시민교육은 더없이 좋은 시기를 만났다. 학교에서 서슴없이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이 열린 것이다. 이는 정치가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이며, 헌법과 대한민국 존립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의 교사들은 언제나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뒷감당에 자신 있느냐가 문제가 된다. 학부모의 민원제기, 교육청이 비협조적이거나, 학교가 민주주의를 거론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면 그 학교의 아이들은 “노동”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못한 채 졸업을 해야 한다.
오늘 연수가 끝나고 어려운 점을 들어봤다.
한 선생님은, 자기가 가르친 아이들이 이제 20대 중반이 되었는데 모두가 비정규직이 되었다. 왜 아이들의 미래가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로 인해 오는 현실과의 괴리감이 너무 큰데 어떻게 사회참여를 할 수 있을지, 자기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고 했다.
두 번째 선생님은, 사회교과담당인데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것을 어디까지 개입해서 전할 수 있느냐가 늘 고민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자꾸 자기 검열에 걸려 넘어진다는 것이다.
다른 선생님은, 촛불집회 참여하는 것도 좋은 공부라고 얘기했다가 민원제기를 받았다고 했다. 민원은 학부모로부터 온 게 아니라 아이가 불만스러워한다고 부모의 입을 빌려 들어온 것이며, 중산층 이상, 고학력자가 사는 마을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솔직히 잘 이해가 안된다고 전했다.
나는 잦은 토론, 싸워보고 화해해보고 대면해서 말로 갈등을 풀어본 경험이 적은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적어도 이 교과를 최대한 활용해서 교실내 민주주의를 먼저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는데, 사실 중학교에서 이런 도전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대신 허망한 토론에 그치지 말고 실제로 학교에서 자치회에 적용을 시키거나 아이들이 의견을 모아 학생회에 안건을 상정하고 교사들과 협의를 하여 교칙을 바꿔나가는 성공의 경험을 안겨줄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올 해 해결하지 못한 것은, 다음해에 후배들이 해결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가이드가 되어주시면 된다고 강조했다.
노동이나 인권에 대한 이야기, 선거와 정당, 정치이야기를 했을 때 자기검열에 걸려 넘어지는 선생님들에게도 방패가 생겼다. 그게 바로 경기도교육청의 더불어 사는 민주 시민 교과서인 셈이다. 교과서 안에 이미 노동3권에 대한 명시가 분명히 되어 있고 노사교섭에 대한 토론, 모의 정당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교과내용을 진행한 것으로 뒷감당을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민원을 받은 교사의 경우도 경기도교육청에서 내려온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지침이 있기 때문에 교사들이 더 힘을 받아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현장에서 진행할 수 있다.
가는 곳마다 선생님들의 의견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이 시기에 대한 절망감이 엄청나고, 교실 안에서 일어나는 아이들의 수많은 의견에 선생님들이 당황할 지경이다.
일례로 한 선생님이 “촛불집회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라고 했을 때 아이들은 주저하지 않고 “인성쓰레기” 라는 단어를 뱉으며, 이 체제를 바꿔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는 것이다. 유사이래, 전국민이 지금 이것은 아니라고 외치는 기회, 학교 현장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장을 넓게 펼칠 수 있다.
민주주의가 뭔지 단 한 번도 성찰해 보지 않은 자가 오천만과 싸우고 있다. 학교 안에서 사회적경제와, 주거복지,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을 비교해서 볼 수 있는 교육이 좀 더 확대될 필요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근혜가 그 길을 크게 열어주었다. 끝까지 싸워 이겨야 할 필요는 보탤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바다를 보고, 배를 볼 때마다 세월호를 떠올리며, 내가 수학여행을 가서 살아돌아올 수 있을까 궁금해한다.
이 아이들이 커서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말할 것이다. 그때 우리가 교실에서 대통령을 욕하기 시작했고 엄마 아빠를 따라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고.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민주주의는 싸워서 이기는 것이라고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어른들이 할 일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는 일이다. 중년이 넘어서는 청년들을 가르치려 들지 말고 듣고 따를 일이다.
세월호 이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만히 있지 않는 아이들”을 길러내는 일이다.
2016년 11월 29일

1994년 10월 21일

집안 사정으로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닌 탓에 한 살 어린 친구들과 동급생이었다. 학교를 4년 다니다 보니 유명해져서, 나름대로 편하게 살았다. 술담배를 하거나 일탈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교사를 어려워하지 않았고, 한 살 많은 나에게 선생님들도 나름대로의 대접을 해 준 셈이다. 고 3 때, 아침 7시 50분까지 등교를 해야 했는데, 학교는 월계동이고 우리집은 경기도 양주라서 새벽차를 타고 나가야 했다. 가을이 되어 급기야 담임에게 도저히 시간을 못 맞추겠으니 아침 자율학습을 빼달라고 통보했다. 나는 그런 애였다. 사정하는 게 아니고, 못 나오겠으니 처리는 당신이 맘대로 하시라고 선언하고 뒤돌아 나가버리는 애였다.

2학기에 들어서는 졸려서 살 수가 없었다. 야간 자율학습은 밤 11시에 끝나는데 새아버지가 매번 나를 데리러 운동장에 차를 대놓고 기다렸다. 11시에 월계동에서 출발하여 잽싸게 밟으면 집에 12시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씻고 야식먹고 공부를 조금 더 하다 보면 2시가 넘어 잠들었고 아침에는 5시에 일어나야 학교를 갈 수 있으니, 나는 6시에 일어나 아침자율학습을 째기로 한거다.

그 날은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잘 못 일어나는 사람들이 우리집 여자들인지라, 그 날은 모두 다 늦잠을 잤다. 유달리 일찍 일어나는 새아버지도 그 날은 늦잠을 잤다. 새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나도 동생도 같이 차에 탔다. 동생의 학교가 더 가까워 동생을 먼저 내려주고 차가 창동으로 들어설 때쯤, 아버지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한강다리가 무너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다리가 무너졌다고?”

조수석에 앉은 엄마가 라디오 소리를 크게 올렸다. 강북에 살아 강건너 가는 일이 드문 나에게 한강다리는 혜은이의 제 3한강교가 끝이었다. 그렇게 많은 다리가 있는줄도, 다리마다 이름이 다른 줄도 잘 모르고 지냈다.
8시가 넘어 학교에 도착하니 아침자습이 끝난 시간이었다. 나는 지각한 것은 생각도 안하고 교실로 마구 뛰어 올라가 한강 다리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호들갑 떨며 아이들에게 전했다. 내가 시끄럽게 라디오 뉴스를 전하고 있는데 덩치 큰 국어선생이 들어와 내 뒤통수를 갈겼다.

“야. 이하나. 지각했으면 가만히 있어야지 뭐 이렇게 시끄러워 아침부터.”
“아 그게 아니고 지금 한강다리가 무너졌다니까요오!!” 나에게 그 뉴스는, 희생자를 생각하지 않는, 일종의 쑈같았다. 걸프전의 생중계를 고스란히 본 나에게 재난과 사건사고소식에 사람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건 마치 게임 시뮬레이션 화면 같은 것이었으니까. 걸프전을 CNN으로 보면서 느꼈던 것. 폭탄이 떨어질 때 참 아름다웠으니까. 광활한 사막에 떨어지는 불꽃놀이, 나에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은 언제나 죽고 어디서나 죽게 마련이니.
“이 새끼가, 지각한 거 무마할라고 수 쓰고 있어.” 국어선생은 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아니었으나 어떻게든 나를 자리에 앉히려고 다그쳤다.
“아 진짜라니까요.”

고 3쯤 되면, 선생과 인간 대 인간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지경이 되지 않나, 나는 앞자리에 앉은 아이에게 빨리 티비를 틀어보라고 했다. 교실에는 뒤통수가 뚱뚱한 브라운관 티비가 있었다. 티비 아래 서 있던 아이가 손을 뻗어 MBC를 틀었다. 비오는 한강에, 다리 상판이 아래로 뚝, 썰어낸 듯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쉬는 시간동안 티비를 틀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아무 일 없는 듯 자율학습을 했다. 누군가는, “저 중에 고3이 있었다면, 좋겠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죽음은 교실에 언제나 가득했다. 우리는 햇빛 한 번 못 보고 매일 매일 도시락을 싸러 집에 다녀오곤 했으니까. 타인의 죽음과 또래가 학교 가던 길에 무참하게 아무 이유없이 생명을 잃은 일에 대해서 우리는 분개할 시간도, 울 정신도 없었다. 우리에겐 수능이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고, 이미 중간고사를 끝내고 내신성적을 정리할 때였을 뿐이다. 그 다음 해, 우리중 많은 아이들이 대학에 가고, 내가 명동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안타깝다거나, 슬프다거나, 억울하다거나, 누군가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도, 하나의 쑈처럼 보였다. 나는 일주일 내내 그 뉴스쇼를 지켜보았고 전혀 슬프지 않았다. 잠을 설치긴 했고, 뉴스를 끄지 못했으나, 같이 울거나 뭐가 문제라거나,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렇게 보낸 20년의 세월을 지나, 20년만에, 세월호가, 그 세월을 관통해 다시 침몰했다.

도대체 배 이름은 왜 세월호라 지은 것인가.

묻어두었던 긴 세월동안의 공감하지 못했던 타인의 죽음과 고통이, 굽이쳐 휘돌아 거대한 해일이 되어 몰려오는 오늘이다. 성수대교 붕괴 후 20년, 2014년 10월 21일이 방금 지나갔다.

2014. 10. 21.

생존자

1. 아이들이 바다에 갇혀 사그라지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했지.
그리고 19분 전 화요일이 되어서 참사 후 112일째다.

2. 아이들이 아이들을 괴롭혔다. 죽도록 때리고 죽고 싶을 만큼 놀렸다.
성인이 된 한 아이는, 총을 들고 세상을 향해 울었고 가해자가 되었다.
또 다른 아이는, 맞아서. 죽었다.

또 어떤 아이가. 불타 알아볼 수 없게 된 채. 죽었다.

3. 눈이 녹지 않아서였다고 했다. 겨울에도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4. 파도가 갑자기 몰아쳐서 그랬다 했다. 심신을 단련하러 간 아이들이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5.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마지막으로 살아나온 사람은 청년이었다. 콜라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꽃다운 청춘들이 계산을 받고 점포를 지키다가 탈출 지시를 받지 못하고 무너지는 건물 아래 깔려 죽었다.

6. 부실공사 때문이라고 했다. 등교길에 암시롱도 않게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가던 아이들이 갑자기 버스와, 다리 상판과 함께 강물속에 처박혔다.

7.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문을 잠궜다 했다. 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수많은 아이들이, 아니 아기들이. 불타 죽었다.

8. 수없이 많은 아이들이 죽고 죽이고 죽음으로 내몰린다.
쉬지 않고 끊임없이.
가자의 아이들도, 이 곳의 아이들도 또 다른 곳의 아이들도.

9. 아디다스 월드컵 축구공을 사달라는 걸 한사코 거절했다. 그 공을 누가 만드는 지 아느냐고 말해주지 않았다.
태극무늬가 들어간 축구공을 산 아이는 코를 골며 자고, 스무살의 반짝이는 아이들은 친구의 방에 모여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신다.

10. 지금 이 집에 있는 누구 하나. 생존자 아닌 이가 없다.
생존하라.
그저 산다고 살아지는 게 아니다. 살아남으라. 살아남아, 살아남아, 욕이라도 하라.

눈 뜨는 순간부터 눈 감은 시간까지, 웃고 떠드는 찰라 사이 사이에 뼈가 저리다.

지옥이다.
여기가. 바로.
우리는 지옥에서 살아남아 뚜벅뚜벅 걷는 처절한 인생들.

절반의 부모 절반의 아이

부모님의 생애사를 쓰겠다는 사람들이 모여 강좌신청을 했다. 8주간의 강좌는 생애사쓰기에 대해 소논문을 작성하신 수리장애인복지관 이형진관장님이 특강으로 마무리했다. 엄마를 이야기하며 눈물짓는 선한 사람과, 아버지의 처절했던 삶의 투쟁에 대해 울먹이는 사람이 있다. 나에겐 둘 다 생경스러운 풍경이다. 몇 년전이었다면 배알이 뒤틀리거나 기분이 착찹했을 것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태초부터 없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몇 개월전 중요한 저녁 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남편은 그 날 급하게 직원회식을 해야 했고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작은 아이를 데려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큰 아이도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수원에서 돌아오는 고속도로에 해가 지고 있었다. 비참했다. 가슴에 불이 오르는데 태풍같은 파도가 넘실거렸다. 한 방에 쓸려나갈 듯, 운전대를 쥐고 있는 날이면 어디든 들이받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 저녁 노을은 더욱 나를 괴롭혔다. 고등학교 1학년, 자퇴서를 쓰고 돌아오던 날 마을버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더없이 평화롭고 화창했다. 내 세상은 무너지는데 누군가는 빨래를 널고 아이를 낳고 학교에 가고 돈을 벌고 밥을 먹었다. 그 날 나는 세상과 완전히 격리되어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를 봐 줄 사람이 없어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태초부터 그 딴 것은 없었다고 말할 것이었으면 바라지도 말아야 옳지 않은가. 세상이 그러하고 삶이 그러하듯 내 마음도 부조리했다.

더 유치할 때는 차라리 고아인 채로 보육원에서 자랐으면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한 적 있다. 더 많은 동정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동정은 때로 돈도 되고 후원도 되고 사람이 되어 나를 밀어줬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큰아버지의 손을 잡을 때 세상의 모든 고아들에게 죄스러웠다.

 

부모가 부모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모가 아니다 라는 명제를 머릿속에 깊이 박았다. 시간이 더 지난 다음에서야 세상의 모든 부모가 “부모다워야 하는가”에 대해 다시 질문했다. 그저 나는 그런 삶을 받았을 뿐이다. 엄마가 만든 성에 갇혀 아무 것도 저항하지 않으며 산다해도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 성문을 깨부수고 나온 것은 나였다. 성문을 모두 망가뜨려놓고 왜 저 성이 저 따위로 생겨먹었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염병을 던지는 꼴이었다. 아버지는 성밖 숲으로 도망쳤다. 화가 나서 도망쳤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꼴뵈기 싫어 그림자가 없는 어둠으로 숨었다. 나중엔 해가 중천에 떠서 그림자를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짧아지는 매일 매일 화창한 곳으로 옮겨갔다. 나는 계속 그림자를 보고 살았다. 성 안에서 쪼그려앉아 그림만 그리고 있는 동생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살았다.

성에서 나왔으니 됐어.

거울 앞에 앉아 스스로에게 그 말을 해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부모님의 생애사를 쓰겠다는 사람들과 앉아 밀면을 먹었다. 부산과 대구의 음식이야기를 하다가 이북음식 이야기로 옮겨갔다. 엄마가 담궜던 동태가 들은 김장김치와 손바닥만한 왕만두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인지 굳이 알고 싶지 않다. 엄마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 것은 하루 종일 마음에 남는다.

 

오후엔 어린아이를 같이 돌보고 키워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 역시 엄마이고 그 아이들이 더 어렸을 때가 있었다. 아이교육에 대해 열을 내지 않는다.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하고 적당히 적응하고 타협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길 바랐다. 어미가 일일이 개입해서 해결될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내가 원하는 교육과 아이가 원하는 교육이 동일할거라고 자만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보기보다 훨씬 강인하고 어른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유연하다. 아이들이 겪는 모든 고통을 어른들에게 던져준다면 그 어떤 어른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가진 생명력을 모조리 살아가는데 집중하여 쓴다. 타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그림자를 만들지 않고 지나치게 계산하거나 예측하지 않아 어른들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지닌다.

남들의 교육관을 듣는 동안 내 아이는 집에서 좋게 말해 자유롭게 나쁘게 말해 방치된 채 동네 형들과 게임을 하고 시간을 보냈다. 배가 고프다고 칭얼댄 것은 몇 시간전부터이다. 전화가 연속해서 오지 않는 것은 뭔가 재미난 것을 찾았다는 뜻이며, 전화를 계속 걸어대는 것은 아무 자극이 없는 정적을 참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아이는 스스로 저녁까지 해결했고 나가서 뛰어놀았다. 아이와 함께 아파트 지하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 바람은 선선하여 기분이 좋았고 우리 앞 동에서는 누군가 첼로 연습을 하고 있다. 첼로 소리를 들은 지 보름이 넘었는데 매일 비슷한 시간에 첼로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음이 넉넉해지는 순간에 세월호 생존자 아이들이 도보행진을 하며 안양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들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었으나 내 눈앞에 알짱대는 내 아이를 더 먼저 돌봐야 했다.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은 광화문과 여의도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있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죽은 친구의 부모들을 만나러 도시를 가로질러 행군을 한다.

 

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가 하룻 밤 땀에 삭아질 수 있을까. 평생을 지배할 아이들의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엿볼 수 있어서 두려움이 가득하다. 아이들의 손을 잡아줄 수 있을까, 만난다 한 들 내가 안아 줄 수나 있을까. 내가 가진 용기는 먼발치에서 보고 눈물 흘리다 돌아오는 게 전부일거다. 아이들이 걷는 모습을 인터넷 생중계로 본다.

어쩌다 세상은 이렇게 부모와 아이들로만 이루어졌나.

아이를 지키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 하는 부모들과 어쩔 수 없었다고 깔깔대며 웃는 엄마의 모습이 겹쳐져도 이제는 화가 나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다르고, 매우 특별한 사람이 나를 낳은 것 뿐이다.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2014. 7. 16.

세월호 사건일지

노후한 배가 있었다. 
정부정책이 바뀌어 사용기한을 늘려주었다. 
불법 증축과 개조를 했다. 
화물을 3배나 더 실었다. 
그 화물을 결박하지도 않았다. 
안개가 많이 낀 날이었다. 
그러나 출항했다. 
수학여행을 가는 아이들이 탑승했다. 
탑승자 정보가 정확하지 않았다. 

배가 기울어지면서 침몰했다.
선장와 선원들이 먼저 탈출했다.
구명정이 펴지지 않았다.
배가 급속도로 기울었다.
안내 방송은 없었다.
해경은 40분이 지나 도착했다.
신고한 아이에게 GPS 위치를 물었다. 아이는 GPS를 몰랐다. 

해경의 구명정은 선장과 선원을 구출하고 더 구조작업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구한 것은 민간인과 어업지도선이었다.
중대본부가 꾸려지지 않았다.
기자들이 몰려왔다.
친구가 죽은 걸 알고 있냐고 살아남은 아이에게 물었다.
안행부 장관이 와서 참모들과 치킨을 시켜먹었다.
밤이 되었다.
구출된 선장과 선원들은 해경의 개인소유 아파트에서 첫 날밤을 보냈다.

민간잠수사들이 몰려 왔으나 지휘체계가 잡히지 않아 내려갈 수 없었다.
선주와 해경이 계약한 업체가 독점업무를 수행하게 되어 있었다.
민간잠수사들은 “독점계약”에 가로 막혀 수중진입에 실패한다.
업체와 자원봉사, 그 사이의 해경은 타협하지 못한다.
한 쪽은 사람의 목숨을 우선시 하는데 한 쪽은 실적과 계약, 윗선의 눈치를 중시하니 타협점은 없다.
교육부 장관이 내려와서 사발면을 먹었다.
총리가 내려와서 물병을 맞았다.
대통령이 내려왔다. 어떤 부모들이 무릎꿇고 빌었다. 책임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천명하고 돌아갔다.
해경 대변인이 발표를 하던 중에 예비역 중령이 나타나 왜 입수를 방해했느냐고 따진다.
구조가 지지부진하자 부모들이 행진을 시작한다.
경찰 수백명이 나타나 잽싸게 가로막는다.

분향소가 차려진다.
정부주도 분향소의 이전 사실을 죽은 아이들의 단체카톡방에 통지한다.
대통령이 조문을 했다.
신원미상의 조문객이 대통령의 등뒤에서 접근했으나 안전사고는 없었다.

알바생의 장례비는 지원할 수 없다는 발표가 있었다.
구조작업중이던 잠수사의 바지선에 해경선박이 충돌했다.

한 번도 실종된 적 없이 갇혀 있던 아이들이 시신이 되어 4km 밖에서 발견되었다.
사고가 난 지, 17일이 지났다.

– 가만히 있으라, 기다리라고 말했다.
사고 발생 17일째 되는 날, 지하철이 부딪히는 사고가 있었다. 승객들은 안내방송을 기다리지 않고 침착하게 빠져나와 스스로를 구했다.
이제 그 어떤 재난이 닥쳐도 그 누구도 안내방송을 믿지 않을 터이다.
내가 살고자 한다면 가만히 있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 이게 국가를 바꿀 것이다.

믿음의 메뉴얼

이 나라에 털어서 먼지 안나는 인간 없다는 옛 말이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그 말은 인간은 모두 거기서 거기다, 완벽할 수는 없다. 라고 받아들여도 되지만, 약간 꼬아서 보면 –
아무리 잘난 척 해봤자 너도 분명히 꼬투리 잡힐 게 있다라는 협박이기도 하고 더 깊고 넓게 보면 이 나라의 구조는 예로부터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게 살 수 없는 체제가 몇 백년간 곤고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대참사가 일어나면 이 나라의 권력자들이 하는 메뉴얼이 있다.
피해 규모가 엄청나도 그 구조가 단순하면 타겟을 하나 잡는다. 모든 화살과 책임을 한 개인에게 몰아간다. 물론 그 개인은 사건의 주범이기도 하고 극악무도한 짓도 저질렀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까지 인간이하의 짓거리를 할 때까지 국가와 정부, 사회안전망이 여태 아무 기능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도록, 국가는 최선을 다해 악마를 만들어 낸다.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도록 사회안전망은 무얼했으며, 재범 가능한 성범죄자의 관리는 어찌 되었으며, 초동수사가 잘 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며, 희생자가 발생하게 된 치안은 어디에 있었는가.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은 개인의 악마성을 낱낱이 까발리는 것이다. 얼굴도 공개하고 세상에 널리 알리며 9시 뉴스의 절반을 이 인간이 얼마나 악마인지! 강조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심지어 인육을 먹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거면 모든 책임소재 추궁의 게임 끝난다. 악마라도 인간인데 개인 하나 감당하지 못할 부실한 정책과 정부는 범죄자가 “너무 악마라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조금 더 복잡한 사안의 경우, 혹은 언론통제에 실패할 경우, 고구마 줄기를 캐서 적당한 선에서 조직을 작살낸다. 정당도 없애고, 간첩도 만들고, 기업도 날리고, 기업주를 단두대에 세우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기업주는 죄수복을 입고 플래시세례를 받는다. 그렇게 조직을 일망타진하고 나면, 권력은 고요히 제자리로 돌아간다.

예상컨대, 언론통제에 실패한, 나쁜 짓도 똑바로 하지 못한 멍청하디 멍청한 이번에는 아마 한 종교집단을 날리고, 몇 개의 기업을 날리고, 몇 몇 관공서 책임자가 옷을 벗고.

오늘도 하늘색 화사한 자켓을 입은 그 사람이, 회전의자를 돌려 창밖을 보며 슬며시 웃을 거 같다.

소름끼치네.

• 덧붙여 나는, 이 모든 타겟화와 언론플레이가 누군가 지능적으로 계획하여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말 그렇게 믿는 것이다. 부실한 국가 시스템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국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충성만 강요 받으며 환갑을 넘긴 사람들은, 정말 한 마리의 악마가 이 모든 일을 저질렀다고 굳게 믿는다.

2014. 4. 24.

용서하지 말아라

일주일간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책이 한 권 있다.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한 소년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살인범이다. 7년 전의 일이다. 7년 전의 그 밤이 갑자기 소년에게 밀려온다. 작가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을을 정확하게 설계했다. 책의 앞부분엔 이 마을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물론 가상의 마을이다. 이 마을의 중심은 저수지다. 소년은 저수지 근처의 삶을 살았다. 파도치지 않는 잔잔한 저수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모두 인간과 기계에 의해 통제되는 곳, 움직이지 않는 것은 썩기 마련일진대 소년은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보냈고 살인범의 아들로 살았다. 소년은 잠수를 했다. 검은 물결 속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소설은 내내 어두운 밤이었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밤만 가득했다. 검은 밤, 검푸른 물, 외로운 달 하나, 소름끼치는 누군가의 실루엣, 소년이 말하던 물의 이미지, 작가가 전해준 그 물의 기억은, 잔인한 마녀의 길고 더러운 손톱같았다.

 

진도는 아름다운 섬이다. 그 앞바다는 눈부셨다.

거센 풍랑과 파도가 그치고 바다는 길고 더러운 손톱을 감췄다. 비웃고 싶을 만큼 찬란한 햇살 아래 여유롭게 넘실대는 잔잔한 물결,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얼굴을 싹 바꾼 바다는 반짝이는 물살 위로 아이들을 하나씩 꾸역꾸역 토해냈다.

욕지기가 올라온다. 잔인한, 참혹한, 비참한, 무서운, 역겨운, 모든 것들이 저 배에 가득했다. 더러운 배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름답고, 생기발랄하고, 뽀얀 젊음의 곱디 고운 아이들은 그 배에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아이들은 물결에 휩쓸려 아름다운 땅 진도로 돌아오고 있다. 바다는 수천가지의 얼굴을 가졌는가보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다 잡아 삼키지만, 돌려주고 싶은 것들이 있었을 거다. 그렇게 믿고 싶다.

 

문득,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 처음 갖는 구체적인 생각이다.

호탕하게 웃고, 힘차게 걸으며, 술에 취한 듯 아무데서나 춤추고 노래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졌다. 빛나는 햇살을 보며 바다를 떠올린다.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려면, 눈을 감아야 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 누군가의 통곡,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도 따위, 눈 감고 귀 막고 안 보고 안 들으며, 오로지 오늘은 햇살이 좋아서 웃고, 내일은 비가 오니 시원해서 좋다고. 눈 꾹 감고 외면하면 가능한 일이겠다.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심은 고이 접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숨겨놓기로 했다. 매일 밤 꺼내서 한 번씩 읊어야 한다.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러나 사물이 명료하게 보이는 빛이 있는 한, 두 눈 똑바로 뜨고 두 귀를 번쩍 열고, 슬픔이 가득한 이 도시에 두 다리로 꼿꼿이 걸어야겠다. 잊지 말아야 한다. 깊은 곳에 숨겨둔 쪽지를 매일 꺼내 읽으리라.

 

우리를 용서하지 말아라. 나도 나를 용서하지 않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