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발머리의 독일할배 – 카라얀

길건너 아파트형 공장 식당가에 전주콩나물국밥집이 있는 걸 봤다.
한 번도 간 적이 없어 오늘은 아버지와 콩나물국밥을 먹으러 갔다.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 나오고 있었다. 93.9 강석우의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곡이 끝나자 아버지가 베토벤인 줄 알았다 한다.

나는 며칠 전 임헌정이 지휘하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들었다 했고 예전에 부천필에 있었다가 지금 코리아심포니로 옮겨간 임헌정은 말러열풍을 불러온 주역이라 전했다.
– 우리나라 최초 오케스트라가 서울시향이지?
– 모르겠는데.
– 서울시향일거야. 내 기억은 그래.

검색을 해봤다.
1945년 고려교향악단이 있었다. 1948년 서울관현악단은 해군 정훈음악대에 모여 정기공연을 열었고, 1960년에 서울시향이 되었다. 육군악대는 1956년에 KBS 교향악단으로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내용을 읽었다.

– 해군교향악단이 있었는데.
– 그게 서울관현악단인가봐. 해군 정훈음악대에서 공연했으니 해군교향악단으로 보였겠어.
– 그 옛날 지휘자중에 김만복이라고 있어.
– 몰라.
– 찾아봐. 그 양반이 그때도 나이가 많았어.

지휘자 김만복. 1925년 대구 출생으로 서울대 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전공을 지휘로 바꾼 사람. 이 분은 61년부터 서울시향을 이끌고 1965년 사상처음 해외공연인 일본 도쿄에서 공연을 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 그 양반을 조금 알아. 예전에 아빠 느이 엄마랑 명동서 가게 했을 때 자주 왔었어.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부모님은 명동에서 액자가게를 했다. 당시는 저작권이 없던 시절이라 무단복사가 가능했고 엄마는 르느와르나 모딜리아니, 밀레의 그림을 좋아해 그걸 액자로 많이 만들었고 아버지는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그때 독일에 계시던 큰아버지가 어떤 지휘자의 사진과 LP판을 보내오면서 액자로 하면 근사할 거 같다고 전했다. 아버지가 보기에도 지휘자의 얼굴이나 선, 사진 자체가 매우 훌륭해 히트 좀 치겠다는 예감이 들어 복제를 해서 액자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것만큼 그 사진은 잘 팔렸고 아버지는 이어서 비엔나필, 뉴욕 필의 전체 공연 장면이나 주빈 메타, 게오르그 솔티, 레너드 번스타인등의 사진을 액자로 만들었다. 명동을 지나다 봤을까. 김만복 선생이 가게로 와서 이 사진을 어디서 구했냐 물으며 이야기를 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번스타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며 “웨스트사이드스토리”작곡자라고 말했다. 누구냐고 빨리 이름을 대라고 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검색을 했다.
– 그 분이 오면 미도파 커피집에서 커피 한 잔 하고 음악얘기 하고 헤어지고 그랬어. 그 양반은 내가 음악에 대한 사진을 대중에게 보급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나는 그냥 장사한건데 말야.

어릴 때부터 질리게 봐 온 사진이 헤르베르트 본 카랴얀의 바로 이 사진이다. 이후로 이 사진은 여러 곳에서 복제해 전국에 흩어졌고, 큰아버지는 독일에서 간간히 자켓이 멋진 LP판과 북클릿을 챙겨주었다. 저작권이 없던 시절이라 내 부모는 이때 꽤 괜찮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나는 무단복제의 상업적 성공으로 특수한 혜택을 받았다. 크고 나서 좀처럼 카랴안을 듣지 않는다. 그 사람의 수많은 낭설들도 못 들은 척 한다. 카라얀은 비주얼로 내 유년을 완전히 압도해버렸다. 더 이상 보탤수도 뺄 수도 없는, 세상에 지휘자라는 사람들이 있고, 저리도 고독한 옆모습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사람. 그래서 저 사람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알고 싶은 것도 없다. 그냥 내가 기억이 있을 때부터 우리 집에 늘 있던 잘생긴 독일영감님. 은발머리에 대한 로망은 분명 저 카라얀 때문에 생긴 게 틀림없다.

콩나물 국밥이 나오고 그리그의 페르귄트가 흘렀다. 아버지가 페르귄트가 맞냐고 물었다. 나는 김윤희의 “잃어버린 너”를 생각했고, 그 책을 읽으며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울던 내 나이또래의 엄마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모를, 1989년의 어느 오후.

아버지는 펄펄 끓는 콩나물 국밥을 바라보며 말했다.
– 요즘은 곡명이 잘 생각이 안나.
– 그거 외워서 뭐해?
나는 종업원이 가져다 준 김을 쪼개 넣으며 아버지도 김 넣어드셔. 라고 말했다.

한국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
https://news.samsung.com/…/%ED%88%AC%EB%AA%A8%EB%A1%9C%EC%9…

지휘자 고 김만복 선생 타계 소식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

지나가는 길

긴 터널을 지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웃었다.
모든 게 좋다고
모든 게 순조롭다고
늙어가는 어깨를 보며 혼자 말했다.

도로마다 움푹 패인 곳이 있다.
차가 덜컹거리는 길이 있고
바람이 심해 작은 나의 차가 흔들리는 구간도 있다.
고속도로도 있고. 속도제한 구역도 있다.

언젠가
그가 나에게 길에서 삶을 배운다고 말한 적 있다.
귀밑머리가 희끗해지는
또 한 명의 늙어가는 아비가 서 있다.

지금 나는 천천히 국도를 달리는 중.

모든 것은 지나가고
기억이 되고 풍경이 된다.

이루었다는 마음이 남는다.
그리하여 더 이상의 미련을 지울 수 있을 것이다.

가라앉아 어딘가에 숨어있는 나의 감정들이 언젠가 봇물처럼 터져나오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우리는 긴 터널을 이미 지나왔으므로.

-15년 만에 만난 아버지와 다시 송별하고 돌아오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