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6.17.

어쩌다 노인복지관 수업을 맡게 되어 5주차의 강의를 끝냈다.
사실 강의라고 하기도 애매한 것이 내가 이 어르신들에게 뭘 가르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고 그 분들도 뭘 배울 형편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하는 일은 한 시간 가량 그 분들이 하나라도 기억을 살려내고 그 기억을 말로 표현하실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첫 시간에는 다른 사람의 말이 길어지는 것을 기다리지도 못하시던 분들이 차츰 차츰 순서대로 이야기도 하시고 남의 얘기도 듣기도 하시고 적당한 추임새를 넣게도 되셨다.
담당 사회복지사는 놀랍다고 했고 나 역시 빠르게 적응하시는 어르신들에게 가능성을 보았다.
처음엔 11시부터 40분 남짓 진행되다가 식사하러 가야된다고 자리를 떠버리시는 분들이셨는데 우리 한 시간 일찍 시작합시다 라는 어르신들의 제안에 10시에 시작에 30분은 워밍업으로 간단한 신체놀이를 하고 (이 부분은 다른 분께서 진행) 나머지 1시간 1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라는 질문에 글쎄요. 하고 어르신들이 말문이 터지던 순간의 몇 가지 사례를 들었더니 듣던 분께서 “자랑할 수 있는 걸 끄집어내셨군요.” 라고 하셨다.

오늘은 내가 맡은 강의의 마지막 날이었다.
어제 오후까지도 대체 내일은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되나 고민을 하다가
“자랑할 수 있는 걸 말할 기회” 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오늘 내가 준비한 것들은 사라진 직업에 대한 것이었고 “제가 잘 모르니 얘기해주세요” 라며 하나씩 하나씩 물어나갔다. 사실 정말로 몰랐다. 내가 똥지게가 뭐고 물지게가 뭔지, 신기료 장수가 뭐며, 가마니를 어떻게 짜는지 알게 뭐겠나.

오늘은 11시 40분이 될 때까지 이야기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한 아버님은 노래 한 자락 해주겠다며 해방때쯤의 가사로 추정되는 노래를 불러주시고 자리를 뜨셨다.
이가 거의 없어 가사를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지만 후반부의 가사는 이런 것이었다.

재주 좋은 제트기랑 (중략)
한시바삐 한국땅에서 주저앉고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자유의 평화를 이제 볼까

193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과의 괴리는 엄청났다.
세월의 차이뿐 아니라 문화적 차이도 엄청났다.
동시대를 살아온 나의 할머니와 무척이나 다른 분들이셨다.

집에 돌아와 나에게 “자랑할 수 있는 걸 말할 기회” 라는 힌트를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좋은 강사는 앉아서 수업을 듣는 사람을 ‘높이고, 그들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며, 그들의 숨은 가능성을 스스로 찾아내게 하는’ 사람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강의를 주로 할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자세로 임하면 실수가 적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듣자하니 거슬리고 거북했던 강의들의 원인이 무엇인가도 알아낼 수 있었다. 그저 칭찬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나를 보고 있는 당신이 나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재촉하는 것. 그런 자세는 마음에 든다.

혼자 전담했던 첫 강좌의 소회다.

하늘만 보고 땅만 보고 – 노인생애사

결혼은 아버지가 소개해 준 사람이랑 했다. 막상 결혼해서 시댁에 가보니 너무 가난했다. 집이란 게 기어들어가고 기어나갈 형편이었다.

서울에 정착하기로 했다. 서대문 앞에 살았다. 거기서 아이들 사남매를 키웠다. 홍제동 꼭대기에서 아침에 밥을 먹고 출발하면 서대문 독립문 앞에서 수돗물을 받을 수 있었다. 물지게를 지고 가서 물을 길어서 집까지 걸어오면 점심시간이 넘은 오후 2, 3시였다. 매일 매일 사는 게 너무 고단했다.

돈을 벌어야 하니 아들을 업고 학교 옆 축대 옆에서 주전부리를 파는 장사를 했다. 그때만 해도 남편이 보수적이라 내가 밖에 나가 장사하는 걸 알리지 못했다. 나는 장사해서 번 돈으로 시골에 소를 한 마리 샀다. 소가 커서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커서 또 소를 팔면 큰 재산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막내딸이 돌도 안 되었는데 애 아빠가 병이 들었다.

입원을 해서 2년간 병원생활을 하니 샀던 소도 팔아야 했다. 막내는 퇴원해서 돌아온 제 아빠를 못 알아보고 아저씨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동네에 이집 저집 놀러 다니며 “우리아빠는 몸이 아파서 집에 있어요.”라고 말하고 다녔다.

남편은 이후로도 일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을 굶겨 죽일까봐 매일 매일이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 하늘만 보고 땅만 보고 살았다. 힘들어도 힘들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학교 앞에 애를 업고 쭈그리고 앉아 장사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엄두도 안 난다. 아이들이 학교를 못 가게 되는 게 제일 무서운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다 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은 10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다가 하늘나라로 먼저 갔다. 남은 건 빚뿐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돈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넷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생선도 팔고, 파출부도 다니고, 청소일도 했다. 돈 버는 일은 다 했다.

*서울 모복지관 강모노인의 생애사 중의 한 토막.

이 분은 한글을 뗀지 얼마 안되어 글자가 많이 틀렸지만 수업 중에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내가 재구성하고 있다. 아이들이 굶어죽을까봐, 학교 못 갈까봐. 그게 제일 두려운 일이었다는 말, 하늘만 보고 땅만 보고 살았다는 말이, 가슴에 오래 남았다.

월요일엔 생애사쓰기

 

바늘을 가지고 하는 짓이니 바늘질이라고 썼을 뿐이다.
않다, 에 왜 ㅎ이 붙는지도 이해할 수 없고, 돼와 되는 왜 꼭 그렇게 다른지. ㅋㅌㅍㅎ은 별로 발음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데, ㅋ이 붙으면 어렵다. 부억은 왜 부엌이라고 쓰는가, 갔다, 왔다, 했다에는 꼭 쌍 시옷인가.
나는 휴대폰을 열어 “한국인이 잘 헛갈리는 맞춤법”을 찾아 왠지, 웬지, 돼, 되, 않고, 습니다, 읍니다, 를 설명해나갔다.

“한국어는 주어와 서술어로 되어 있지만, 주어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아요.
했어. 라고 해도 알아듣죠. 하지만 내가. 라고 말하면 상대방이 묻죠. “왜 말을 하다 말아?””
할매들이 웃었다.

선생님, 이라고 불렀더니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지청구를 들은 다음 나는 그냥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다. 학생여러분, 이라고 하면 활짝 웃는다. 월요일 생애사쓰기 수업시간. 초등학교 과정을 마친 수강생들은 한 문장을 구성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힘들어했다. 글쓰기가 어려워서라기 보다, 나는 목울대까지 꽉 차오른 이야기들이 아우성이라 그렇다고 느낀다. 말 나올 곳은 한 곳인데 수백가지 것들이 튀어나오려 겨룬다. 나는 송창식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아 에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너무 많은데. 할매들이 웃는다.

그새 혼자 부지런히 글을 써 온 사람들이 노트를 내민다. 한 분은 일기장이라며 초등학생 노트 네 권을 비닐에 담아왔다. 나는 이번 주에 이 글을 읽을 예정이다.

살아온 이야기들이 대부분 비슷하다.
이 교실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저학력의 여성노인들은 비슷하게 살았다.

어릴 때 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부모가 보내주지 않았다.
집에서 동생을 보거나 조카를 돌봤다.
오빠가 장가를 들면서 올케언니를 데리고 들어왔는데 조카를 줄줄이 낳고 올케언니를 도와야 한다고 막내인 나를 학교 보내지 않았다. 혹은, 전쟁통에 아버지는 죽고 엄마는 유복자를 낳았는데 엄마가 일을 하러 가야 하니 막내를 업고 혼자 울었다.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나무를 하고 나물을 캤고, 목화솜다래를 뜯어먹었다.
참외나 복숭아서리도 했지만 늘 배가 고팠다.

집에는 늘 어쩔 수 없는 가족이 있었고 스무살이 갓 넘어 결혼을 한다.
얼굴 한 번 안 본 사내의 집으로 간다. 결혼 전에는 시집만 가면 팔자 펼 것처럼 어른들이 얘기했지만 다 쓰러져 가는 집에 사는 장남이거나, 참전용사다. 집안에는 상이군인이 있거나 알콜중독자가 있다.
시어머니나, 시아버지는 폭력을 휘두르거나, 고의적으로 사람을 괴롭히거나, 물건을 부수거나 술을 마신다. 식구가 많으면 열 둘 정도 되고, 아침에 일어나 새벽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면 점심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농사일을 하고 나면 저녁을 차려야 한다.
남편은 잘 지내다가 어딘가에 몰입한다. 밖으로 나도는 남자들은 도박을 하거나 여자를 찾아 다닌다. 집안에 머무는 남편들은 이유가 있어서 때리고 이유가 없어서 때리거나, 집안에서 술을 마신다.
그 와중에 꼬박꼬박 아이는 들어서는데, 한 둘쯤 뱃속에서 죽거나, 태어나서 죽는다.

살자고 집을 나오거나 살자고 남편과 헤어진다. 또는 술에 쩔은 남편이 먼저 죽기도 한다.
아이들과 살다가 연탄가스 중독 사고를 겪고, 아이들 중 한 둘은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살아보려고 갖은 일을 다 한다. 파출부도 해보고 행상도 해보고, 청소일도 해본다. 직장을 구하면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하고 도시락을 대여섯개씩 싸고 버스를 타고 새벽일을 나갔다.

다 늙을 때까지 같이 사는 남편이 있으면, 그 남편은 이제서야 빨래도 좀 하고, 밥도 가끔 한다.
아이들은 대부분 제 밥벌이 하며 살고 손주들도 잘 자란다. 속에 있는 말을 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옛날보다 훨씬 낫다고 자부한다.

패턴이다.
목화솜다래, 어린 동생을 업어 키우는 일, 학교를 못 가는 일, 배가 고팠던 것, 억울하게 죽은 가족, 폭력을 휘두르는 가족, 알콜중독, 도박중독, 연탄가스, 파출부, 행상, 내 가게.

일할 곳이 없던 여성들이 세월을 견뎌온 일.
그나마 어찌저찌 집 한 칸 마련하고 지금은 공부하러 다니니 좋을 것 같지만 공부하러 오는 것도 매번 부끄럽다.

저기에 가면 국문을 깨쳐준다는데, 이 동네에서 30년을 살아서 내가 글자를 모르는 걸 아무도 모르는데, 다들 내가 여고 나온 줄 아는데 행여 나 때문에 아이들이 망신당하지 않을까, 아직도 쩡쩡한 시댁식구들이 창피스럽다고 하지 않을까.

“말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 말할 수는 없어. 그런데 말하고는 싶어. 그러니까, 선생님만 보셔. 내가 다음 주까지 써올테니까.”
“저는 비밀을 많이 간직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시간이 있다면 한 사람마다 10시간씩 이야기를 들어도 부족할 판이지만, 글쓰기 수업이니까, 어떻게든 한 문장이라도 써보자고 한다.
힘들다고 얼굴이 울상이 되고, 손이 떨려서 쓸 수가 없다고 해도, 다 괜찮으니까 한 번만 써보자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선생님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이런 것도 써보네요.”라고 맨 앞줄에 앉은 분이 말했다.
“저도 많이 배워요. 그리고 저는 돈도 버는 걸요.” 라고 말했다.

학교를 못 가고, 공부를 못 한게, 억울하다면 모를까.
왜 자꾸 부끄럽다는 걸까. 속이 터진다.

 

2019.7.2.

[생애사쓰기] 목화솜 다래

– 나는, 아버지 어머니 잘 몰라요.
어려서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해서, 그냥 사방 팔방으로 떠돌아 다니느라. 그래도 잠깐 우리 집에서 살 때가 있긴 했지. 나는 그나마 우리 큰 이모하고 좀 친했고. 식구들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요.

– 우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도 없고, 그래서 사촌집으로 갔는데 우리 사촌 오빠가 그렇게 나를 때렸어요. 뭐 달라고 해서 안 해준다면 때리고 그렇게 걸핏하면 나를 때렸어요. 오빠한테 맞으면 이웃집 언니한테 갔는데 그 언니가 나한테 참 잘 해줬어요. 언니네 집에 뒷방이 하나 있어요. 거기 숨어 있으라고 하지. 그러면 언니가 고구마 같은 거 삶아 주고 그랬어요. 그러다 그 언니 엄마한테 걸려서 욕 먹고 그랬죠. 왜 자꾸 쟤 받아주냐고. 언제까지 그럴거냐고.
그래서 열 한살에 제주도를 나왔어요. 나와서 내내 남의 집 살이하고.

– 전쟁이 전쟁이.. 우리 엄마가 막내를 전쟁통에 낳았어요. 내가 그 때 여덟 살이었고. 우리 엄마는 산후조리고 뭐고 없었어요. 그냥 한달만에 일을 나간 거예요. 그러니 애기를 어떻게 해. 내가 봐야지. 내가 애를 업고 다니느라, 나도 앤데, 여덟 살짜리가 애를 업고 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여기 손가락 가운데 마디가 퍼렇게 멍이 들어. 깍지를 하도 껴서. 포대기고 뭐고 애기띠도 없죠. 내가 그때는 엄마 원망을 많이 했는데, 나도 이제 우리 엄마 돌아가실 때 나이가 됐단 말이죠. 이제 나도 곧 엄마를 만나러 가겠지. 그러면 내가 가서 엄마하고 또 잘 살아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 나는 우리 집이 그렇게 못 살지도 않았어요. 가끔 쌀밥도 먹었단 말이죠. 그런데 왜 나를 학교를 안 보내줬을까.
위로 우리 오빠가 하나 있고 언니가 둘이고 내가 막내딸인데, 우리 아버지가 난봉꾼이라 내가 두 살때부터도 집에 없었어요. 계속 딴살림을 했어요. 언니는 둘 다 여우고 오빠가 이제 장가를 가서 집에 들어왔어요. 올케언니랑 오빠랑 나랑 우리 엄마랑 사는데, 오빠네 조카가 여덟이예요. 애기들을 볼 사람이 없다고 나보고 애를 보라고 했어요. 내가 조카들을 키우느라 학교를 못 간 거예요. 나도 학교를 보내달라고 했더니 우리 오빠가 했던 말이 너무 가슴에 남아서.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요.
학교 가고 싶으면 니 아버지한테 가서 얘기하라고. 그 말이 나는 너무 슬펐어. 왜 나한테 그랬는지.

– 우리 언니는 수단이 좋았어. 어려서부터 자꾸 어디서 그렇게 쌀을 퍼와. 그럼 그거 가지고 엿 바꿔먹으러 가지. 쌀뿐이 아니야.아무튼 뭘 그렇게 어디서 가지고 왔어.
나중에도 잘 사셨겠어요.
어 잘 살았어요. 그 딸들도 잘 살고요.
지금도 계세요?
우리 언니 치매걸렸지.

자꾸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들 한다. 글이 맥락이 안 맞는다고 답답해했다. 모두들 쓰다가 학교 못 간 억울한 이야기로 빠져나간다. 복숭아 서리, 수박 서리, 먹고 살만한 제일 부잣집 밭에서 한 두개쯤 가져와도 괜찮던 시절이라는 건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얹어주는 공유의 개념일지도 모르겠다. 목화솜이 되기 전에 먹으면 아주 맛나다고 했다. 내가 아카시아 진달래 사루비아는 먹어봤다 했더니 그런 거보다 훨씬 맛나다고 했다.

수업을 하면서 나는 눈가가 자꾸 뿌얘졌다.
목울대까지 차오른 학교 못다닌 서러움을 언제 풀어야 할까.
가계도를 그리고 생물학적 가족사를 풀어낼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남의 집 살이”를 했다는 사람이 다섯 명 정도 되었고 “애보개” 하느라 자기 집에서도 살림살이를 했던 사람도 서넛이었다.

“글만 쓰면 눈물이 나.”
어쩌면 그건 글의 내용이나 지나온 세월에 묻힌 많은 이야기와 동시에, 한 글자 두 글자 꾹꾹 눌러 적으며 “내 이야기”를 써보는 것에 대한 애닮픔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2019. 6. 10.

[생애사쓰기]성수종합사회복지관 수업을 시작하며

내일부터 성수종합사회복지관에서 초등문해교육을 마친 어르신들과 생애사쓰기 수업을 시작한다.
초등문해교육을 마친 분들과의 수업은 처음이라, PPT를 손 보다가 접었다. 대신 다음과 같은 프린트물을 만들었다.
<나에게 보내는 편지>는 복지관에서 붙인 프로그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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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보내는 편지>> 수업에 함께 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글쓰는 사람 이하나라고 합니다.
앞으로 열 번, 여러분과 만나게 됩니다.

저는 2013년부터 어르신들 뿐 아니라, 중년층, 장애인가족들과 함께 생애사쓰기 수업을 해왔습니다. 생애사라는 것은 나의 삶을 돌아보는 역사를 뜻합니다. 이 수업을 할 때마다 많은 분들이 울고 웃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한 순간도 어렵지 않은 날들이 없었고 쉽게 지나간 시절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생을 열심히 살았는데 이룬 게 없다.”
“내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다.”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모두 허무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한 성공한 삶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가난은 왜 부끄러웠을까?
우리는 역사에서 늘 비껴나 있었을까?

우리 모두는 열심히, 정직하게 살았다고 믿습니다.
특히 자기 삶을 쓰겠다고 모이시는 분들은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 매 순간을 꽃을 키우듯 일궈오신 분들이었습니다. 이제 열 번의 수업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우리 삶의 아름다운 고갱이들을 캐내 보겠습니다. 생애사쓰기 수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19.6.3.

[생애사쓰기]가난이 부끄러워서

“노조활동 한 적 없어요. 어용이었어요.”

수요일 생애사쓰기에 참여한 60대 여성의 말이다. 써온 목차에 “노조활동”이라 써 있어서 무슨 내용인지 물었을 때였다.

“무슨 노조를 했겠어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일자리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나는 바닷가에서 자랐어요. 재첩 따고 다시마 걷으면서 살았어요. 그게 너무 고되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공장이 얼마나 좋았는데요. 앉아서 손가락만 까딱까딱하면 돈이 나오는데요. 왜 노조를 합니까. 짤리면 방법이 없어요. 돈 벌 데가 없는데요. 거기 사무실 가면 회의한다고 빵도 주고 음료수도 줘요. 그냥 앉아있다가 오는 거예요. 쉬고 좋잖아요? 그렇게 지냈어요. 어용노조하면서. “

이 사람의 글은 서늘하다.
세상을 뒤에서 바라보는 습관이 묻어났다. 한 발 뒤에서, 언제나 객관화해야 한다는 삶의 강박이 있었다. 그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혀 온 흔적이다.

… 선생님, 이렇게, 누구 편을 들어서 같이 화내주고, 불합리하지만 내 사람이라 편들고, 뭐 그런 거 잘 못하시죠?

이 수업의 수강생들은 자꾸 나보고 점쟁이같다고 한다. “어머 다 들켰네.”라는 게 이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내 질문을 받은, 재첩 따는 게 힘들었다는 그 분은
“맞아요. 저는 끊임없이 저 자신을 담금질하며 살았어요. 그래서, 얼마 전에 아들에게 크게 혼이 났네요. 제가 편을 안 들어줬어요. 엄마는 왜 매번 그런 식이냐고. 아주 그냥.. 아주 크게 혼쭐이 났어요. 안 그러려고 노력해요. 잘 안되네요.”

네, 선생님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요. 저도 좀 그런 편이거든요.

나는 수업을 마무리하며 김은화 씨의 책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의 표지 뒷 면을 읽어내려갔다.

“이건 책을 만들 때 투자한 사람들에게 먼저 보내주는 건데요. 음.. 이런 내용입니다.
공장노동자부터 요양보호사까지, 40년간 가족을 먹여 살린 어머니의 삶을 딸이 인터뷰하다, 라고 써 있어요. 그런 내용이고요. 제가 좀 읽어볼게요.

‘엄마는 마치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새벽 6시면 일어나 할아버지 밥상부터 오빠 도시락까지 하루 열 끼를 챙겼다. 아침 9시에 집 앞의 물류 회사로 출근, 저녁 6시에 돌아오면 밥 먹고 설거지하느라 바빴고, 새벽에는 근육통으로 끙끙 앓았다. 주말에는 빨래하고 장 보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런 엄마가 육십을 넘겨 말했다. 자기는 인생에서 이룬 게 없다고. 도대체 엄마의 노동은 무엇이었을까? ‘ “

재첩이 지겨웠던 그 분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모두들, 지금은 평촌에 집 한 채씩 가지고 있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글에서 “가난의 부끄러움”을 매번 느꼈다.

이날은 내가 질문을 했다.

“그런데요. 가난이, 왜 부끄럽죠?
우리는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몇 주째, 선생님들이 써 오신 글을 보면 공통된 게 있는데요, 가난이 부끄러웠다. 가난해서 부끄러웠다, 거든요. 근데,이 가난이, 누구를 속이거나 남의 것을 훔치거나, 내가 도박이나 술에 빠져 가족들이 일궈놓은 것을 하루 아침에 날렸거나, 그래서 생긴 가난이 아니잖아요? 어린 데도 일을 했고, 모든 식구가 나가서 일했는데도 가난했던 거잖아요?
그러면, 음… 부끄럽기 보다 ‘화가 난다’면 모르겠는데, 대체 이게 왜 부끄럽죠? 우리는 왜, 언제부터,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했을까요? 왜죠?

저도 가난했을 때가 있었는데요.
저는 화가 났거든요. 선택에 제한을 받으니까.
부끄럽진 않았어요. 어쩌라고, 열심히 하는데. 하루종일 일을 하는데도 가난한걸.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 때문에 가난한데 어쩌라고. 그런 마음이었거든요.”

부끄러울 수도 있지.
굳이 내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 부끄러움이 죄책감이 되거나,자기 삶을 비하하는 일이 되지 않길 바라서였다.

눈물을 싹 닫고 일어선 재첩 이야기의 그 분은 서*이 씨. 글 뭉치를 나에게 내밀며 원고를 좀 봐달라고 했다.

이 수업의 내 강사비는 두 시간에 7만원.
담당자에게는 첨삭지도를 절대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어쩌겠는가.
서*이 씨의 이야기는 안 읽어볼 수가 없는 걸.

*
수업 전후 준비와 지도에 10시간이 넘게 드는 이 수업은 평촌도서관에서 주관한다. 안양시 평생교육원 기준으로 강사비를 책정하며, 경력과 저서에 무관하게 시간당 30,000원으로 책정했다. 내가 초등학교 수업보다 강사비가 형편없다 했더니 담당자는 시간당 30,000원인데 그보다 높지 않냐며 매우 당당하게 말했다.

여름이 낮아질 때 – 성수종합복지관 첫 수업 기록

– 선생님, 이제 우리 가르치려면 큰 일 났어요.
– 아주 속이 터지실거예요.

어르신들이 킥킥대고 웃었다.
– 아이고 선생님이 엄청 젊으네.

팀장이 지원서류와 저작권동의서를 묶은 종이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나는 빠르게 지원서류를 훑었다. 1931년생부터 1952년생까지, 무려 20년이나 차이나는 사람들이 “어르신”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노인 수업을 할 때마다 이런 것들이 꺼림칙하다.

베트남 참전용사가 자유총연맹을 가면 625참전용사들과 세대차이가 나서 너무 힘들다고 했던 얘기를 기억한다.
1931년생이면 해방 때 이미 알 거 다 알고 기억할 거 다 기억하던 사람이고, 1952년생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만 기억할터였다.

모두 얼마 전에 초등교육과정을 마쳤다고 했다.
준비해 간 오늘의 교육자료를 나누자 모두들 입을 달삭이며 소리내어 읽었다. 참가자들은 오전 10시부터 모여 2시간동안 한글교실 수업을 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점심도 굶고 연달아 4시간 수업을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초등교육과정을 끝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하며 정말 훌륭하십니다, 라고 말하다가 코끝이 찡해졌다.
주책없이 솟구치는 것들이 있다.

PPT에 담았던 내용을 모두 입으로 풀었다.
– 그렇게 하면 선생님이 너무 힘드실텐데.
맨 앞에 앉은 분이 말씀하셨다.
– 저를 좀 보세요. 에너지를 좀 써야할 것 같지 않으신가요?
할매들이 와르르 웃었다.

더듬 더듬 글을 읽는 사람들의 출석도 부를 겸 내가 써 간 글을 한 문장씩 돌아가며 읽었다. 더러 더듬거렸고 더러 틀렸다. 어느 정도의 문해력인지, 어느 정도의 글쓰기가 가능한지 알아야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글 잘 쓰는 사람은 종이를 앞에 두면 마구 휘갈겨 써내려 갈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조선 – 기록의 나라에서 시작해, 민간의 기록이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시니어들의 삶의 노하우가 축적되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대통령의 재임순서를 나열하자 받아 적는 분도 있었다.
나는 원고지를 나눠주고 자신에게 편지를 써보자고 권했다. 30분 정도 걸렸는데 대부분 원고지 1매를 못 채웠다. 기본 글쓰기의 순서가 전혀 안 잡혀 있었다.

– 자, 선생님들, 저를 보세요.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시자고요.
누구나 종이를 받으면 당황해요. 하루종일 소설을 쓰거나 글을 쓰는 작가들도 빈 종이만 보면 도망치고 싶습니다. 한 번에 후다닥 글을 써내려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직 못 봤어요. 맞춤법, 띄어쓰기, 작가들도 모두 힘들어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뭐죠? 틀려도 된다. 맞춤법 틀리면 어떻게 할까요? 네. 고치면 돼요. 띄어쓰기 틀리면 어떻게 할까요? 네, 고치면 됩니다. 대신,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는 연습을 해봐요.
일단 생각을 먼저 하는 거예요.
상상을 해보시죠.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모두 받아줄 수 있는 사람, 우리 엄마도 안 해줬던 거, 우리 아버지도 못해줬던 거, 내 동생, 내 자매, 내 자식, 남편, 아무도 못해줬던 거, 다 이해하고 받아주는 친구 한 명.

자리에 앉은 참가자들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없어. 라는 뇌까림도 들렸다.

네 없어요. 없죠. 그런 사람은 없죠.
그러니까 상상의 인물을 하나 만들어봐요. 다 되는 사람 딱 하나 있다고.
“글을 쓰면 되겠네요.” 한 사람이 말했다.

– 네,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보자구요. 그래서 하나씩 이야기의 순서를 정해보는거예요. 어떤 이야기부터 할까? 일단 자초지종을 설명해야겠죠? 이야기의 순서를 잡아보죠. 메모를 하는 게 좋은데, 꼭 글자로 메모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림도 되고, 기호도 괜찮아요. 나만 알아보면 돼요. 그리고 그 순서에 따라서 한 문장씩 쓰는 겁니다.

그런 사람 없지.
그런 사람이 어딨나.
그 말이 귀에 남았다.
엄마 또래인 참가자들이 “선생님 강의가 정말 정말 재미있네요. 아주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라고 환히 웃어주었다. 나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고개를 꾸벅 숙여 맞절을 했다.

수업 시간마다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어려웠다. 평촌도서관부터 나는 수강생들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기로 했다. 중국에서는 Mr의 의미로 선생을 붙인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선배라는 말보다는 그 말이 좋다. 여성노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어머니인 것은 아니다. 혹시 자식을 먼저 보냈으면, 뼈 아플 말이기도 하다.

– 글쓰기를 하시다가, 어느 날 도저히 못 쓰겠고, 눈물이 그치지 않거든, 여기 복지관 선생님께 이야기해서 상담을 받으셔야 해요. 누구나, 그런 거 하나쯤 있잖아요. 평생을 두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거. 있으시죠? 한 두 개쯤 있으실거예요. 기억이 안 나는 것도 있어요. 그런데 글을 쓰시다보면 그게 떠오를 거예요. 정신력이 강하고 나약하고가 아닙니다. 그냥 내가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잘 봐야 해요.
겨우 빠져나온 웅덩이가 있어요. 동굴이 있고, 무시무시한 바위가 있었어요. 잘 피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글을 쓰다가 어느 날 그게 떡 하니 내 길을 막을 거예요. 그 이야기가 내 뺨을 막 때릴 거예요. 그럴 때는 잠깐 쉬고, 그 동굴을, 바위를 가만히 보세요. 내가 이걸 다시 잘 볼 수 있나. 생각하셔야 해요. 내가 중간에 그만두면 선생님한테 미안하니까, 복지관에 미안하니까. 아뇨. 그런 생각은 절대 하지 마세요. 여기서 두 시간동안은 오로지 나 자신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기 이 자리에 와 있는 나 자신만 생각하세요. 이기적으로 하세요. 숙제 안 해서 선생님한테 미안하다,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쉬는 시간에는 오십이 넘도록, 육십년을 살도록, 글자를 쓰지 못해서 남편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살았노라고, 은행도 피해다니고 관공서도 피해다녔다고, 멋지게 생긴 참가자가 말했다.

나는 칠판에 글을 네 줄 썼다. 이런 식으로 써보시죠 오늘은.
땡땡아,
그동안 수고 많았다.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그렇게 잘 헤쳐왔니. 나는 내가 너무 기특하고 예쁘다. 고맙다. 땡땡아. 이제 여기서 내가 얼마나 잘 살아왔는지 글로 한 번 써보자!

나는 참가자들이 쓴 원고지를 모두 걷어 집으로 가져왔다. 10회의 수업이 끝나는 날 돌려드리겠다고 했다. 10번은 충분하지 않지만, 태양이 더 뜨겁고 낮게 내려오는 이 여름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하지 못했던 사람들과 시원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곯아떨어졌다.
수 십년을 글자를 쓰지못하고 읽지 못한 삶의 무게를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문맹율이 기록적으로 낮은 나라에서 이 사람들은 수 십년을 모른 채로 버텼다. 반지하 방의 푸념따위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다.

– 성수종합복지관 첫 수업.

지금도 개가 무섭다

순천에서 태어나 자랐다.

형제가 열 둘이었다. 열 두 형제 중에 유일한 딸이었다. 막내 남동생이 하나 있었고, 위로 오빠가 열이 있었다.
아버지는 소작농 관리를 했고 먹고 살만 했다. 1948년, 열 한 살이었다.

여순사건이 났다. 하늘에선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땅에선 군인들이 총을 들고 눈에 띄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인민군인지 국군인지 가늠하지도 못했다.

집에 논이 다섯 마지기가 있었다. 밭도 몇 마지기 있었다. 위에서 쏴대고 아래서 쏴대고 그저 눈에 띄면 죽여 댈 뿐이었다. 당숙모는 말하라는 걸 말하지 않아 방에 갇혀 총에 맞아 죽었다. 아버지의 논에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처럼 흘러 몇 년 동안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한 살이라도 젊은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떠났다. 동네 노인들은 살만큼 살았으니 집을 지킨다며 남았다. 집에는 늙은 할머니가 있었다. 노인들이 떠난 마을에 시체만 쌓였다. 주인 잃은 개들이 마을을 헤매 다녔다. 논과 밭에 늘어진 시체를 굶주린 개들이 뜯어먹었다. 송장을 뜯어먹은 개의 입가에 피가 흥건했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개가 무섭다.

아홉 명의 오빠가 모조리 죽어버렸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정신을 놓았다. 맨발로 산을 계속 오르며 죽은 자식의 이름 열 개를 부르며 헤매고 다녔다. 아버지가 나일론 줄을 구해와 어머니를 묶었다. 밤이 되면 엄마를 가운데 두고 온 식구가 나란히 잤다. 새벽이 되면 엄마가 없었다. 이로 물어뜯었는지 줄을 끊고 달아나 산으로 헤매며 죽은 자식들의 이름을 불렀다. 오빠와 등불을 들고 산으로 들로 엄마를 찾아다녔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에게 옥도정기를 발라주었다. 발과 다리가 다 찢어졌는데 아프다 소리도 안 했다. 엄마는 죽은 자식들의 이름만 불렀다. 엄마는 말라갔다. 허리가 두 손으로 잡힐 지경이었다. 한 번 넋을 놓은 엄마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럴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나는 연로하신 할머니에 미쳐버린 엄마를 돌보느라 학교를 가지 못했다. 위로 오빠가 하나 남았고 아래 남동생도 하나 남았다. 남동생이 친구들과 어디를 다녀오는 길에 미친 개에게 물렸다. 개에게 물린 아이는 셋이었는데, 사내애 둘은 죽고, 가이나 하나는 살았다. 살아남은 가이나는 아직도 고향에 살고 있다. 남동생도 그렇게 가버렸다. 그러니 나는 여전히 개가 무섭다.

화가 치민 아버지는 목소리를 잃었다. 목이 쉬어버리더니 죽는 날까지 말을 똑바로 하지 못했다. 사람이 울화가 치밀면 그렇게도 되는가보다.

위로 오빠만 하나 남았다. 오빠는 학교를 다녀서 한양대까지 나왔다. 나는 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가 아이들을 모두 공부시키려고 했는데,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다. 엄마는 미쳐버리고, 아버지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그렇게 살았다.

어디 길을 가다가도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을 보면 엄마가 보인다. 염을 할 때 보니 온 다리가 멍투성이였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


※ 전라도 순천 출신 백할머니의 이야기다. 눈물을 숨기느라 애썼다. 어머니와 아버지, 노할머니가 돌아가신 나이가 뒤죽박죽이었는데 아마 어머니는 집에서 염을 했다는 얘기가 나온 걸로 보아 일찍 돌아가셨던 것 같고, 오래 살았다는 얘기는 노할머니의 사망시점과 헛갈리신 것 같다.
막내아들까지 잃은 아버지가 갑자기 목이 쉬었다고 하는 걸 들었을 때 나는 자살기도가 있었을거라 생각했다. 농약을 좀 마셨다가 뱉었거나, 기도나 성대에 손상이 와서 목소리를 잃는 경우가 있다. 아마 백 할머니는 그런 상상을, 했어도 한 적 없다고 부정하며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여순 사건은 아직도 원인과 진상규명이 명확하지 않다. 할머니가 살던 마을에서 사람을 죽인 무리가 반란군인지 진압군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저 무고한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죽어버렸다는 것 뿐. 반란이 무엇이고, 좌익과 우익이 누구이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따져 묻지도 못한 채, 70년이 지났다. 희생자의 가족들이 모두 이 땅에서 사라지면, 누가 왜 사람을 죽였느냐고 물을 수 있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는 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죽어버린 아홉 명의 오빠에 대해, 미쳐버린 어머니에 대해, 죽을 떄까지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한 아버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겠지.

 

2017년 1월 18일

독립문 평화의 집에서.

박근혜양은!

“내 담주에 교회 댕겨오니라 늦을끄야. 그래도 좀 봐둬.” 라고 지난 주에 미리 얘기하고 글쓰기 수업에 늦게 오신 84세 갑순씨,
앉자 마자 분통을 터뜨리신다.

“나라가 나라가, 나라가 이게 뭔 꼴이고.
내는 막 미쳐버리겠다.”
고 하신다.

갑순씨는 박근혜를 ‘박근혜양’이라고 칭하셨다.

“이게 뭐꼬 이게.
이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을 벌려놓고 말이다.
내사 마 내가 그 광화문에 나도 나가서 막 미치고 싶다 안카나.
내도 막 소리지르고 막 그 위에 드러누버버리꼬 싶다.
내가 나이만 더 젊었으믄 거 나가서 나도 소리 지르고 그러고 싶다.
박근혜양은 무릎꿇고 빌어야 된다.
잘못했다고 말해야한다.
아이고 내가 마.. 이게 뭐꼬 이게.”

내가 1번 찍으신 어르신들이 더 배신감이 큰 거 같다 했더니
“거럼. 배신이지. 배신이다. 우째 이리 망쳐놓을 수가 있나.
우리가 전쟁 다 겪고 진짜 배곪아 가며 이래 만들어 놓은 나라다.
그래도 나는 새마을운동 때문에 나무 껍질 벗겨먹던 시절 벗어났다고 그래도 박대통령 존경했다. 근데 이게 뭐꼬 이게.
어매 내가 막 밤에 잠이 안 온다.
내는 죽는 것도 안 무섭다. 내가 막 매달려 죽어부리고 싶다.
내 좀 보라고. 내 고생한 게 다 뭐냐고 응 이 말이야아.”

안동출신 갑순씨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앞에 앉은 서울태생 춘예씨는 눈이 벌겋다.
“아 그만 얘기해요 형님.
난 눈물이 나.”

춘예씨 옆에 고흥사람 연례씨가 날 보며 말한다.
“어. 여긴 계속 울었어. 울드라고. 서럽다고.
그러게 내가 뭐라 그랬어. 1번은 안된다 했잖아. 걔들은 안돼.
그거 이제 돈 해먹은 거 다 받아내야지. 전부 다 받아내야돼.”

부산싸나이 영석씨도 한마디 한다.
“그 최태민이가 목사 아이가. 그라믄 그래도 좋은 점만 배우면 될낀데 우째 그래 못된 거만 배워처먹었나 모르겠다.”

네 사람은 한참동안 분통을 터뜨리며 얘기했다.
배신이다 배신.

평생 1번만 찍고 산 사람들이 느끼는 배신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어르신들을 만나다 보면,
어버이연합 알바 나가는 분도 만나고, 민주평통 행사 나가시는 분들도 만나게 된다. 이분들은 조국을 위한 “봉사”라고 생각하고 나가시는 분들이다. 추선희 같은 사람의 입담에 끄덕끄덕 할 수도 있다.
1번은 좋은 거니 1번만 찍는다는 분들도 있다. 정의당이 1번이거나, 노동당이 1번이라해도 그래도 1번을 찍을 분들이다.

이들이 겪은 공포, 이들이 겪은 가난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놀다가 폭탄이 떨어져 반쯤 날아가버린 집을 바라보던 열 살남짓의 어린아이, 배가 고파 나무뿌리를 캐다가 푹푹 삶아먹던 어린아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 어느 날 갑자기 총살당한 삼촌, 날 버리고 도망간 엄마, 널부러진 시체의 산, 의붓동생을 업어 키우느라 학교를 포기했던 어린이, 피난 길에 부모를 잃은 어린이, 자고 일어나면 피난민 천막이 산을 메워버린 풍경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제발 생각 좀 하고 사세요.”라고 그렇게 쉽게 말해도 될까.

나는 흥분한 어르신들에게 이 얘기를 마무리하자며 부탁했다.

“그러니까 어머님 아버님, 다음에는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찍어주세요. 젊은 사람들한테 인기 많은 사람 찍어주시면, 저희가 잘 해볼께요. 잘 감시해볼께요.
2016년 12월.
(기록해놓고 업로드를 안 해 이제 올림)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나 우리 아버지 얘기 할 거 있어.
 
(1936년생, 여, 전남 구례 출생)
 
우리 아버지는 서른 여덟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열 세 살 때 돌아가셨는데,
그때 내가 태어나기는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는데.
왜정때니까
아버지가 징용을 피해서
어릴 때니까
엄마한테 자세히 알아놓을 걸 안 들어놓은 게 한이 돼.
옛날엔 도라꾸(트럭)라 그랬어요.
인부들을 싣고 아버지가 객지로 막 다녔어요.
징용에 안 갈라고.
시골에서 농사짓고,
서당 열고,
한문 한글 다 하고,
밖에 나가서 일 하고.
집에 잘 안 오고 그랬는데.
 
함경도로 평안도로 객지로만 다녔을 때.
내가 9살 때까지.
내가 아홉 살 때.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우리 아버지가 교육열이 강한 분이라,
나를 초등학교 입학 시켜놓고
또 객지로 돈 거야.
나는 그 때는 어린 마음에
엄마가 나 놓고, 아버지랑 객지 다니러 가는데
엄마한테 가지 말라고 치마자락 붙잡고 막 따라 가고
울었던 생각이 나.
엄마가 여기서 학교 잘 다니고 있으면
열심히 다니면
꼭 온다 한 거야.
 
815 해방 됐는데,
어렴풋이 그게 음력 칠월칠석날일거여.
저녁에 우리 친구 하나가,
우리 놀러가자 하고
그 같이 놀던 동네 언니하고 나하고
둘이를 떼어놓고 간다 해서
그럼 우리도 놀러가자 하고 갔는데,
우리 안 가 그러는데
그러니까 실갱이를 한 거지.
근데 그때,
언니 친구가
나를 보고, 이래 돌아보더니
순이야 순이야
니 엄마 아버지 오셨다 해서
어메 나, 지금도 머리가 막 쭈삣쭈삣 설라고 그러네.
열 살 조금 넘었을 때니까.
그때가.
 
그래가지고
아이고 지금도 목 매어서 얘기 못하겠네.
학교 댕긴다고 1년을 떨어져 살았어.
 
거기서 그러고
이제 해방도 되얏고, 징용 갈 일이 없으니까,
세간살이도 사고 아버지 월급도 받고
대충 뭐가 생각이 나는데
9살 때는 엄마 아빠만 갔으니까 모르지.
(그 세간살이도 사고 이래가지고)
도라꾸에 실어가지고
도라꾸를 먼저 고향으로 보냈는데
도라꾸 기사가 사기를 치고
사라져버린거야.
응. 도라꾸랑 같이. 그렇지.
엄마 아버지랑 기차 타고 가고
이제 차만 먼저 보냈는데.
그리 돼 버린 거야.
살림을 홀딱.
 
그래도 사람이 무사히 들어와서 다행이다 하고
응 우리 엄마 아버지가 그리 말하드라고.
참말 행복하게 살았지.
 
 
여수 반란사건 났잖아.
무지한 백성들 그냥 막 갖다가
처단하고
눈만, 눈만 껌뻑거려도 잡아가고 그러던 때.
그런 때여 그때가.
여기서 안 죽이면 저기서 죽이고.
그때 우리 아버지가 돌아 가신 거지.
육이오 사변 나기 전 해.
그리고 육이오 나고.
 
 
▶옆 자리 할머니가 말을 보탰다.
▶징용을 안 가셨는데 돌아가셨네.
 
 
징용 안 갈라 했는데 그렇죠잉.
나도 태어나기만 거기서 태어났지
객지로 객지로 다녀서.
친구가 없어요.
 
아버지는 열세 살에 돌아가시고
형제는 오남매인데, 남동생 하나 먼저 죽었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 아버지가 건설업, 감독정도 되는 거지.
내가 어릴 때 따라다닐 때 보며는,
함경도 갔던 생각이 나는데
여섯 살, 다섯 살인가.
지금도 이북애들 보면 집들 나오는 거 보면
그때 내가 봤던 집 그대로 나오는 게 있어.
일자 집인데, 일자 집 여기 이렇게 나란히 있어.
한 세대씩 줘서 거기서 인제 몇 세대가 사는데,
어리니까 데리고 다닌 거지 이리 저리 다녀야 하니까.
어떤 때는 기차도 타고 다니고.
 
우리 증조 할아버지부터 벼슬아치 집안이라는데
자식도 딸 둘 아들 하나 삼남매 중에 우리 엄마가,
몸종까지 일 봐주는 사람까지 다 대동해서 시집을 보내서
일을 할 줄 몰라.
당췌 일을 할 줄 몰라.
그러니 시골에서는 이리 저리 벌어먹을라면
품이라도 팔아야 하는데
뭐 할 줄 아는 게 있어.
김도 못 매고 아무 것도 못하는거야.
품팔이도 못 한거야.
일을 할 줄 몰라서.
그래서 우리가 엄청 고생했어.
18살 때까지 살다가 인제 거기 살다가 연천으로 갔어.
소개를 해서 고모할머니가.
거기 살만한 집이 있다 해서.
연천이 제 2고향이 되어버렸어.
 
제가 1936년생인데.
그때 연천이 종전 막 되고 난 다음이니까
머 아주 하꼬방에 판자집에 뭐 움막에 그냥 난리도 아니고
거기가 그니까 휴전선 바로 아래 니까 아주 그냥 머.
 
그래서 내가 이제 컸으니까
빵 만드는 집에 취직하고, 돈 벌고
결혼해가지고 살림 놓고 살았지.
그래서 그때부터는 고생을 덜 했어.
 
우리 어머니가 재주가 없어가지고
고생을 많이 했어.
우리 어머니는 몇 년도 돌아가셨는지 모르겠는데
일흔 아홉에 에 부산서 돌아가셨어.
 
왜정때 징용 피해 이리 저리 객지로 돌아
여순반란 나서 아버지 죽어
전쟁 나고 구례 사는데 지리산으로 패잔병 숨어들고,
밤이면 밤마다 이 빨치산들 와서 있는 대로 다 집어가.
트럭 사기 당했지.
빨갱이들한테 밤마다 털리지
어머니는 능력이 없지.
오남매가 고생을 많이 했지.
 
우리 엄니가 그때는,
참 어떻게 저렇게 자식들한테 저럴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가 그때 서른 넷 다섯인데.
 
자기 집에서 아씨 아씨 하던 사람이,
얼마나 황당했겠어.
 
재가는 무슨,
양반집이라 재가도 못하고
재가 하면 그 동네에서 쫓겨나지. 난리나.
우리 어머니도 대단하고,
우리 아버지도 참 대단한 분이야.
그때는 딸들은 안 가르쳤어요.
아들 딸 안 가리고 능력대로 가르치겠다고 우리아버지가.
나를 가지고 그렇게..
내가 조금 똑똑했는지,
공부 잘 하면 대학까지 꼭 보내주마 했는데
돌아가셨어.
엊그제 같어. 그게.
나는 아버지 얘기만 하면
이렇게 지금도
눈물 나와.
눈물이 나서……
 
 
2017년 1월 16일.
서울, 동대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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