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던 마을, 일곱 살의 샘내


1981년쯤이었을거다.
서울에서 살던 우리는 가산을 홀랑 말아먹고 트럭 한 대에 남은 세간을 싣고 북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당신이 군복무를 했던 곳 근처에 살만한 곳이 있을 거라 했다. 엄마는 그 마을의 입구에 표지판처럼 나란히 두 개의 가게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마을의 이름은 샘내였다. 맑은 샘에서 물이 솟아 마을을 가로지른다고 해서 샘내라 불렀다. 당장 입에 풀칠할 것도 없는데 낭만은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샘내상회(지금도 샘내상회 간판을 달고 있는 듯 하다. 당시에는 도로쪽을 바라보는 가게가 두 개 있었다.) 에서 사이다 한 병을 사 마시며 엄마는 살 집을 구한다고 말했다. 가게주인(장미빌라 2차 주변으로 추정 / 흰 대문이 있는 집 평화로 1257번길 62-5)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마을 한 복판에 넓은 마당이 있는 집에 도착했다. 그 집은 뒤채가 있었는데 거기 셋방을 얻었다. 작은 방 한 칸이었지만 앞마당이 넓었다. 담장도 명확치 않았지만 대문은 있었고 늘 열려 있는 대문 밖에 마을광장처럼 펼쳐진 공터가 있었다. 집은 샘내의 개천에 딱 붙어 있었는데 개천과 집 사이에 거대한 바위와 소나무가 개천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우리집은 서울에서 액자공장과 거기서 만든 액자를 파는 가게를 했다. 빈손이 되어 샘내로 갔지만 배운 도둑질이라고, 엄마 아빠는 액자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 갓난아이가 누워있는 단칸방에서 액자를 만들 수 없어, 샘내상회 바로 뒤에 작은 작업장을 얻었다. 아빠는 덩치가 큰 사람이라 몸 한 번 돌리기도 쉽지 않은 좁은 자리에 작업대를 놓고 러닝셔츠만 입고 액자를 만들었다. 엄마는 아빠가 만든 액자를 머리에 이고 39번 영종여객 버스를 타고 의정부에 갔다. 성화를 파는 서점에 한 두 개씩 액자를 납품해 생활을 이어갔다.
어릴 때 나는 피부가 유난히 흰 편이었다. “서울에서 온 백혈병 걸린 아이”라는 소문이 났다. 내가 집 앞마당에 나와 작대기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놀면 아이들이 나를 빙 둘러싸고 구경하기도 했다. 구경거리로 지낸 시간은 아주 짧다. 금세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천방지축으로 뛰어놀기 시작했다. 샘내상회에서부터 우리집 위쪽까지 또래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놀았다. 엄마는 가끔 나를 데리고 산마루 너머 어디를 가야 했다. 엄마를 따라 산길을 걷기도 했다. 봄이면 논바닥에 들어가 올챙이를 잡았다. 뒷다리가 나온 개구리를 보고 어쩐지 그만둬야 할 것 같아서 사이다병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산마루를 넘을 때 할미꽃을 꺾어와 냉장고 위에 올려두었다. 엄마는 할미꽃 함부로 꺾으면 나쁜 일이 생긴다고 하면서도, 할미꽃을 자꾸 꺾어다 두었다. 반딧불이도 많아서 몇 마리 잡아 유리병에 담아온 적도 있다. 할미꽃 옆에서 반딧불이가 밝은 빛을 냈다. 그날밤은 반짝이는 반딧불이 때문에 할미꽃이랑 자꾸 눈이 마주쳤다.
겨울에는 샘내가 꽝꽝 얼어붙어 그 위에서 썰매를 탔다. 엄마는 썰매타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보던 내가 안스러웠는지 서울을 다녀오는 길에 옛 영화를 못 이기고 빨간 스케이트를 사왔다. 아이들이 딱히 부러워하지 않아서, 뽐내려는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소나무가 있던 집에 살다가 월세를 밀렸다고 했는지, 큰 길 건너로 이사를 했다.
샘내상회앞에는 영종여객 39번 버스가 다니는 큰 길(* 평화로)이 있고 그 길이 남으로는 의정부, 북으로는 동두천으로 이어진다. 이 길을 건너면 또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마을의 느낌이 조금 달랐다.
길 건너 동네(* 현재의 개발지구 – 평화로와 철도 사이)에는 커다란 소가죽 공장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소가죽의 시큼한 냄새가 밀려왔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냄새였다. 냄새를 따라가면 색이 다 빠진 소가죽이 아기 기저귀빨래처럼 넓은 벌판에 널려 있었다. 소가죽은 무거워도 가끔 흔들렸다. 우리는 소가죽을 널어놓은 곳에 들어가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새로 이사한 집의 주인집엔 내 또래 아이들이 있었다. 주인아줌마는 소가죽 공장에 다녔다. 주인아줌마는 해지기 전에 집에 들어오곤 했는데 언제나 파란색 장화를 신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주인집에 들어가 그집 아이들과 넋 놓고 티비를 보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주인아줌마가 “너는 맨날 여기 와서 티비 보냐?”라고 꾸지람을 했다. 벽 너머로 그 소리를 들은 엄마가 주인집에 놀러가지 말라고 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월세를 밀렸던가, 우리는 처음 살던 집보다 조금 더 안쪽으로 이사를 했다. 처음 살던 마당이 넓은 집은 마을의 갈래길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그 집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들어가면 넓은 파밭이 있고 그 다음에 산길을 따라 집이 몇 개 있었다. 우리는 제일 끝집(* 평화로 1257번길 91-47로 추정- 인근에 묘지가 있었는데 로드뷰로 봤을 때 비슷해보임)으로 이사했는데 나와 동갑인 여자아이가 살았다. 집주인 딸의 이름은 신애였다. 신애네 집은 젖소도 키우고 돼지도 키웠다. 집의 뒤켠으로 가면 젖소 우리가 있었다. 너댓마리의 젖소가 느리게 돌아다니며 꼴을 먹었다. 아침마다 덕계리에 있는 서울우유 공장에서 우유를 받으러 왔다. 먹으면 크게 배탈이 난다고 절대 젖소의 젖을 먹으면 안된다고 했다.
우리가 세를 든 곳은 신애네 마당 오른쪽에 있는 돼지막사에 붙어 있는 가건물이었다. 돼지막사에서는 돼지를 꽤 많이 키웠는데 ‘꽤 많이’라고 해봤자 100여두 정도였을 것이다. 가끔 신애가 꼬마돼지들을 이끌고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신애는 작대기를 하나 들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돼지들을 몰고 다녔다. 커다란 어미돼지들은 파란 트럭에 실려가기도 했다. 돼지들이 차에 오를 때마다 꽥꽥대며 울었고 엉덩이에 붙은 더러운 똥과 진흙이 마구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는 차에 탈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소리 내어 울었다. 신애네 집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는 작은 집이 바깥 마당에 당근을 엄청 심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당근을 많이 심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집 아줌마는 우리들을 보고 아무 때나 당근을 뽑아다 먹으라고 했다. 매일 한 소쿠리씩 당근을 얻어다 먹었을 때는 바람이 서늘했던 것 같다.
그집은 화장실이 한참 밖에 있어 밤이 되면 휴지를 들고 뛰어갔다. 돼지막사 옆이라 쥐들이 들락거렸다. 독일에서 돌아온 큰 아빠가 귀국선물로 눕히면 눈을 감고 일으키면 눈을 뜨는 인형을 사왔다. 신기한 그 인형을 깜빡 잊고 마루에 놓고 잤다가 쥐들이 볼을 파먹기도 했다. 우리 집 바로 뒤에는 양봉장이 있었다. 그것도 신애네서 키우는 벌들이었다. 한번은 동생이 양봉통앞에 멍하니 서서 수십 방을 쏘이기도 했다. 서너 살인 동생은 늘 집안에 갇혀 있어서 말을 잘 하지 못했다.
신애하고는 싸우기도 했고 잘 놀기도 했다. 주인집 딸이라고 유세를 좀 부렸고, 나는 신애가 못하는 것을 뽐내면서 기싸움을 했다. 한번은 집 뒤에 언덕과 무덤가에서 불이 났다. 아빠가 소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몸으로 불을 껐다. 화상을 입어 밤새 끙끙대고 앓았지만 상처가 남을 정도는 아니었다.
신애네 집에서 산길로 돌아가면 옆 마을(평화로 1233번길 부근)로 갈 수 있었다. 그 길이 더 빠른 것 같진 않지만 큰차도로 다니면 위험하다고 엄마는 숲속 오솔길로 다니는 걸 좋아했다. 마을입구 큰도로에서는 사망사고가 자주 있었다. 숲길에는 까투리가 알을 품고 있는 걸 흔하게 봤다. 길 사이로 뱀이 스르륵 지나갔다. 뱀딸기와 산딸기가 지천으로 열렸다. 우리는 그 산길을 넘어 어떤 아이의 집에 다녔는데 엄마가 거길 왜 가끔 갔는지는 모르겠다. 나와 동갑내기인 딸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지적장애가 있었다. 엄마가 그 집 엄마한테 돈을 꾸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나중에 우리가 잠깐 키우던 메리라는 강아지가 큰 개가 되었을 때, 그 집에 주었다. 마을입구에 있는 샘물교회( 지금의 샘물교회)에서 선교원을 열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바로 전 해였다. 선교원에 몇 달 다녔는데 어느 날은 엄마가 수돗가에서 내일부터 선교원에 가지 말라고 했다. 돈이 없어서 못 보낸다고 했다. 신애는 노란 모자를 쓰고 선교원에 갔지만, 딱히 부럽지는 않았다. 나는 늘 내가 신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선교원을 다 다니진 못했지만 졸업식에는 오라고 해서, 교회에서 열리는 선교원 졸업식에 갔었다. 학사모 비슷한 걸 쓰고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서울 살 때는 사진이 많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파는 물건은 피아노나 카메라니까. 샘내에 살던 시절엔 카메라가 없었다.
이듬해 나는 덕산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는 두 정거장 북쪽에 있었는데 학교가 멀어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다. 샘내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매일 두 번씩 버스를 탈 만큼 돈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샘내에도 군부대가 있고 주변이 온통 군부대 천지인지라, 장갑차와 탱크와 서울우유 냉장차까지 지나다니는 길이라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 “모여서 걸어가라”는 것이었다. 가난한 부모들의 묘책이었다.
아침 8시에 샘물상회 앞에서 샘내에 사는 모든 덕산초등학교 아이들이 모인다. 이 시간에 늦으면 혼자 학교를 가야 한다. 6학년 1반 오빠가 맨 앞에 서고 학년별로 둘씩 짝 지어 줄을 섰다. 6학년들과 5학년들이 앞뒤로 나누어 동생들을 안으로 배치했다. 모두 모인 것이 확인되면 6학년 1반 반장 오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왼편에 산을 두고 오른쪽엔 큰 도로를 따라 학교로 걸어갔다. 가면서 봄에는 진달래꽃을 따먹었다. 걸음이 쳐지면 언니들에게 야단을 맞았다. 얼마쯤 걷는지 모른다. 고갯마루를 올라갔다가 조금 내려갈 때 서울우유 공장입구가 나타난다. 그쯤이면 학교에 거의 다 온 것이다. 한국일보에서 그림그리기 대회를 한다고 해서 이 장면을 그려 냈다. 1학년 때 상을 받아서 2학년 때도 똑같은 그림을 그렸는데 상을 또 받았다. 똑같은 걸 그려내도 상을 준다니 바보같이 느껴졌다.
담임선생님은 매일 네 바닥씩 글씨 쓰는 숙제를 내줬는데 동네 엄마들은 공책 값 든다고 불만이 많았다. 어떤 아이들은 공책 값을 아끼느라 지우개로 쓴 것을 다 지우고 새로 쓰기도 했다. 한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개천이 넘친 적 있다. 그때는 다리가 없이 징검다리만 있을 때라 학교를 가지 못했다. 학교를 다니기 직전이었던가, 엄마가 피아노를 배우라고 해서 어느 기와집에 다니기도 했다. 그 피아노학원 원장님이 선교원 원장이었으니, 마을의 유일한 사교육 전문가였달까.
나는 엄마가 결혼 전에 입던 바지를 잘라 입고 학교를 갔다. 그 동네에서 2학년이 된 뒤 신애네 집에도 월세를 밀렸던가. 아마 신애 엄마가 집을 빼라고 했는데 엄마가 버텼겠지 싶다. 비 오는 날 군인가족이 이사를 들어왔고 우리는 파란 트럭에 짐을 급하게 실어 의정부로 이사를 나갔다. 엄마는 신애엄마가 자기를 쫓아냈다고 저주를 퍼부었다.
우리는 의정부에 살다가 점점 남진했다. 엄마의 원대로 의정부에서 도봉구를 거쳐 서울의 성북구, 길음동 지나 삼선교까지 내려갔다. 엄마의 소원은 사대문 안으로 안착하는 것이었지만, 내가 고2가 되었을 때 다시 샘내로 들어갔다. 샘내 끝에 신애네 집 근처에 큰 빌라(* 천보빌라, 현재까지도 이름 그대로 유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엄마는 평수도 넓고 엄청 좋다고 말하면서 “신애네 집이 내려다보일 것”이라고 했다. 막상 이사를 들어가니 샘내의 물이 죄다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살던 빌라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옛날처럼 동네 위로 올라가 가재를 잡고 송사리를 잡으며 즐거워했다. 그 빌라는 내가 알던 샘내와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지나치게 호화로웠다. 그 집에서 2년 정도 살다가 엄마가 하던 일이 부도가 났고 우리는 다시 서울로 이사를 나왔다.
샘내에서 살았던 일곱 살 무렵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가난했던 때다. 하지만 그때의 샘내는 모든 것이 반짝였다. 햇빛을 받고 있는 파꽃이나,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 그 위에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잠자리떼, 처음 이사한 집에 커다란 소나무, 나무를 타고 놀던 동네 언니의 이마에 내려앉는 노을과,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던 소가죽까지. 샘물상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오면 모두 녹아내렸던 그 여름의 오솔길도, 모두가 찬란하게 빛났다. 가난하다는 건 충분히 슬픈 일인데, 알록달록한 지붕들 때문이었는지, 겨울에도 반짝이며 흐르던 냇물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2019년. 당시의 마을지형을 생각하며 적었던 글.

커피 한 잔 하러 와

멀리서 날아온 친한 동생을 만나기 위해 남산에 있는 모호텔에 갔다. 비행기 도착하고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그런 거 없이 그냥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방에 들어가 차 한 잔을 마시는데 그 비싸고 유명한 호텔방이 얼마나 클래식하던지.. 1980년쯤 되는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남산타워로 수십년을 버티는 호텔임이 분명했다.
걸어서 남산을 돌아 명동까지 내려가 아주 오랜만에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노점을 기웃거리며 뭔가를 주섬주섬 사기도 했다. 각자의 기억에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는 커피집에 들어가 커피도 한 잔 마셨다. 음악이 사라진 명동에서 우리가 다시 잡은 세월은 아마 12년이 넘었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온 동생은 만날 사람이 있어 거기서 헤어지고 나는 가방을 호텔 로비에 맡겨두었기 때문에 다시 택시를 타고 호텔로 올라갔다. 가방을 찾으면서 투숙객이 아니라 하니 찾아가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달라고 한다. 이름을 적고 전화번호를 적은 다음 주차권을 내밀어 동생방 호수로 얹어달라고 했다. 직원이 다섯 시간 무료주차 도장을 쾅 찍어주었다. 돌아서서 묵직해진 가방을 들고 주차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방향을 찾아보고 있는데 누가 어정쩡한 자리에서 나를 자꾸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정복을 입은 호텔 직원인데, 아까 가방을 찾는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고 회전문 앞에 서 있을 일은 없는데 가방 찾는 데스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나를 보고 있으니 뭔가 이상해보였다. 가만히 쳐다보니 어디선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최근 들어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이름도 자꾸 잊는 통에 한 10초 정도, 정말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연두색 등산점퍼에 주황색 가방을 거의 둘러메다시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 사람은, 1995년부터 1997년경까지 내가 살던 서울역 뒤 동자동의 장학고시원에서 그 시절을 같이 보낸 사람이었다. 나보다 늦게 고시원에 들어와 나보다 일찍 고시원을 떠났다. 그 때 그의 나이는 스물 여덟 정도 되었고, 고시원을 나가 고시원 바로 앞에 쪽방을 하나 얻어 살다가 차근차근 돈을 모아 월세방으로 나갔다는 것까지만 안다. 곱상한 얼굴이고 피부가 참 흰 사람이었데 그 당시에 그 호텔에서 벨보이를 하고 있었다.
“어머. 웬일이야. 세상에 아직도 여기에 있어?” 나는 반갑게 그의 팔을 툭 치며 인사를 했다.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서로 묻는 것은 뻔했다. 잘 살지? 결혼은 했지? 애 몇 살이야? 와 우리 몇 년만이지? 한 15년 됐나? 그래 15년 된 거 같다고 이야기하고 돌아나오니 15년도 더 된 일이었다.
“우리는 여기 오래 있어. 25년 30년까지도 근속을 하니까. 오래된 사람들은 잘 안나가.”
평덕이오빠. 전라도 어디메에서 올라왔었다. 느릿하고 구수한 사투리를 쓰던 그는 말투는 조금 빨라졌고 머리숱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가 본 나는 피부가 매우 거칠어졌고 살이 많이 쪘겠지. 알아보기 어려웠을거다. 내가 가방을 찾으며 이름을 적지 않았으면 그는 알아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여기 있으니까, 커피 마시러 와.”
오빠가 그렇게 말했다. 반갑다고 하면서 또 보자고 하고 돌아나왔지만 나는 그에게 가방에 있는 명함을 건네지도 않았고 전화번호를 주고 받지도 않았다.

그런 시절이 있다. 나에게는.
내가 힘껏 밀며 버티는 거대한 벽. 고통과 가난이 가득한 영혼들이 아우성치며 나를 잡아채가려고 하는 거대한 검은 벽. 무너지면 절대 안된다고 내 등뒤로 힘껏 밀어대며 사람들 앞에서 하하호호 웃고 있는 거대한 벽. 그 시절의 사람들을 만나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그 벽이 다시 내 등을 후려치며 와르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벽.

많이들, 변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며 사는데 나 혼자 너무 멀리 도망온 것 같은 느낌. 죄책감은 아닌데, 내가 누군가를 배신한 것만 같고, 내가 너무 동떨어져 온 것 같고, 어딘가 모르게 빚을 진 것 같은 느낌.

말하자면, 가만히 서 있는 기차에서 혼자 내려 뚜벅뚜벅 걸었다가 운 좋게 누군가의 승용차에 무임승차를 한 것 같은 느낌. 절대로 나는 무임승차 하며 살지 않았는데 자꾸만 그렇게 느껴지는 불편함. 그리고, 내가 앞서 달려왔다는, 내가 남들보다 무언가를 더 얻었다는 오만함도 외면할 수 없는 불편함. 더불어 밀려오는 불길함. 그 벽이 무너질까봐. 다시 그 때로 돌아갈까봐.

6층이나 되는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호텔뒤의 골목으로 우회전과 좌회전을 해서 맞딱뜨린 곳은 다시 그 서울역, 벽산빌딩 앞이었다.
아무리 돌고 돌아도, 과거는 다시 오고 또 재현되고 골목어귀에 숨어 있다가 어깨를 툭툭 친다. 낙엽 하나 떨어지는 무게에 놀라 죽을 수도 있고, 그것 참 곱다 하며 책갈피에 끼울 수도 있을텐데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 호텔에 전화를 하여, 오늘 그 사람이 근무하는 날이냐 묻고 커피 한 잔 하러 가겠다고 그래서 “추억”이라는 걸 나눴을 때 내 벽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2014. 10. 25. 141025_iphone5s 1093

어떤 택시의 기억

늘 다니던 길이었다.
택시가 빙 돌아 먼 길로 우회하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다니는 길이고 이미 한 달 반이 되어가던 길이다.

나는 흰색 면 블라우스를 입고 멜방이 달린 길다란 검정 치마를 입고 있었다. 화장은 하지 않았지만 머리는 적당히 길었고 콘택트렌즈도 끼고 있었다.

나에겐 500원도, 1000원도 매우 귀중한 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택시를 탔느냐 하면, 지하철 역에서 그 곳까지는 버스 노선이 없었기 때문이다. 혐오시설. 분명 서울시내에 있었으나 그 곳으로 가는 버스는 없었다. 그 곳의 주변까지 가는 버스는 있었으나 나에게는 500원만큼 시간도 중요했다. 시급 1000원짜리 아르바이트에 늦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구치소앞에서 택시를 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붉어진 얼굴에 질질 짜고 나온 눈물 때문에 이 자가 나를 우습게 본 게 틀림없었다.

지하철역에 다다르자 뒷좌석에 앉았던 나는 기사에게 말했다.
길을 돌아오셨다고.
원래 여기까지 2800원이면 충분하다고. 지금 4000원이 넘게 나왔다고.

기사는 룸미러로 나를 슬쩍 보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원래 내는 요금대로만 드리겠다고 했다.
“그래?”
택시 정차장에 닿은 기사가 속도를 올렸다.
“내가 못 내려주겠다면?”

택시는 서지 않고 속도를 내어 다시 어디론가 달려갈 기세였다. 지하철역 근처 승강장은 반원형으로 되어 있어 돌아나가게 되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은 목소리로 긴 한숨과 함께

알겠어요. 다 드릴테니 그냥 세워주세요. 라고 말했다.

기사는 반대편 승강장에 차를 세웠다. 나는 천원짜리 네 장을 던지듯 내었다. 그 새 요금이 100원 올라 있었다. 나는 동전 몇 개를 더 꺼내 기사에게 쥐어주고 차 문을 세게 닫았다.

택시를 탈 때마다는 아니다. 가끔 아무 일도 없을 때 이 생각이 난다. 그 날 내가 택시에서 내리지 못했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등골이 서늘해질 때가 있다.

그 때 나는 열일곱살이었다.

2014. 8. 13.

일기쓰기

나의 담임선생님은 환갑쯤 된 남자 선생님이셨다. 이름은 곽동희. 서글서글한 눈매와 진한 눈썹, 그리고 대머리, 인상이 참 좋았다. 1학년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앞에 놓고 율동도 하고 손유희도 해야되는데 학부형들이 와서 구경하면 얼마나 쑥쓰러워 하셨는지 얼굴이 빨개지셨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우리 엄마는 늙은 영감이 1학년 선생을 할려니 죽을 맛이겠다며 혼자 깔깔대고 웃었다.

 

나는 한글읽기를 다 떼고 학교에 들어갔다. 교과서를 받은 건 예비소집일이었는데 날씨가 무척 추웠고, 우리 엄마는 예의 그렇듯이 가죽코트에 가죽장갑을 끼고 나타나 선생님들 옆에 서서 아이들에게 교과서를 나눠주었다. 나는 우리 엄마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엄마는 나에게 자기가 제일 많이 배운 사람이고, 니네 선생들보다 엄마가 더 많이 배운 사람이고, 엄마도 예전엔 고등학교 대학교 선생님을 했기 때문에 한 수 가르쳐 주려고 그랬다고 했다. 그건 우리 집에서 매우 정당화된 일상이었다. 엄마는 세상의 모든 선생들보다 한 수 위라는 것. 한 수 위인 엄마 아래서 자식은 당연히 월등해야 했다. 나는 교과서를 받아 온 날부터 국어책을 읽어 내려갔고 입학식 때쯤엔 통째로 외워버렸다.

파란 하늘 파란 하늘에 우리 태극기로 시작되는 국어책은 그 때 “바른 생활”이라고 적혀 있었다. 숫자가 마구 적힌 것은 “슬기로운 생활”이고 음표와 그림이 있는 것은 “즐거운 생활”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 이름들은 꽤 괜찮다.

즐거운 생활은 7살 때부터 간간히 다닌 피아노학원에서 배운 것을 생각하며 악보를 보고 멜로디언으로 불어보기도 하고 노래도 불러봤지만, 슬기로운 생활은 덮어놓고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학교에 들어가 바른생활을 다 외운 나는 동네에 천재가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다. 글자가 몇 개나 됐겠는가. 읽을거리는 다 떨어졌고 새로운 판형의 책이 신기했을 뿐이다.

 

서글서글한 대머리 선생님은 우리에게 매일 네 바닥씩 바른 생활 써오기를 시켰는데 나는 한창 동네 아이들과 들로 산으로 놀러 다니는 재미에 흠뻑 빠진 때라 이 숙제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오자마자 가방에서 바로 공책을 꺼내 네 바닥을 휘리릭 쓰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딱지치기로 온 동네를 휩쓸자 엄마는 사내놈처럼 그게 뭐냐고 동네 창피하다고 야단이었다. 조만간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살게 되실 건데 할머니는 많이 배운 분이라 네가 그러고 다니면 엄마를 욕할 거라고 했다. 나는 딱지치기를 자중하고, 대신 이상한 말을 만들어 씨부리고 다녔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에게 이게 영어라며 거짓말을 해댔다. 그 동네는 가운데 큰 길이 있고 그 길을 가로질러 냇물이 흘렀다. 네 바닥의 쓰기 숙제는 부모들에게 공책이 빨리 닳아 불만이었다. 어떤 부모들은 선생님께 항의도 하지만 이 숙제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담임선생님이 강조하셨다. 그 동네의 부모들은 멀리 고개 넘어 우유공장에 다니거나 우리 집과 큰 길을 사이에 둔 건넛마을의 소가죽 공장에 다녔다. 논은 몇 마지기 안됬고 다들 밭농사나 조금 일구고 살거나 우리 주인집처럼 돼지를 길러 내다팔거나 젖소를 키워 우유공장에 납품을 했다.

 

많이 배운 엄마는 공책이나 책값은 아끼는 것이 아니라 했고, 엄마만큼 많이 배운 할머니는 매일 모로 누워 AFKN을 보다가 동네 노인대학에 가서 기묘한 율동을 배워야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글씨를 쓰고 문장을 만들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 학교에서 독후감 숙제를 내주었다. 나는 집에 있던 스물 네 권짜리 위인전은 이미 독파한 상태라 그 중에 세종대왕을 골라 독후감을 썼다. 200자 원고지 다섯 장의 독후감을 받아든 담임선생님은 감격하여 손을 부르르 떨었다. 이 양반은 나에게 장래 노벨문학상감이 나의 제자가 되었다며 격양된 목소리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마 그 때쯤이었을 거다. 일기쓰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그림을 전공한 엄마의 자식으로서, 집안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림일기를 그렸다. 나는 매일 매일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단 하루도 잊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썼다. 그리고 어느 샌가 나는 일기를 쓰면서 훗날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이 일기가 증거가 될 것이라고 믿으며 열심히 일기를 썼다. 최불암의 “수사반장”을 열심히 봤던 탓이 아닐까 싶다. 일기는 나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해 줄 것이라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그림이 없는 일기를 썼다. 그림이 없는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에겐 자꾸 억울한 일이 생겼다. 울면서 일기를 쓰기도 했고 일부러 눈물을 일기장에 떨구기도 했다. 정확하게 조준해서 목표한 글자에 떨어뜨려 여울지게도 했다.

 

5학년 때까지의 일기장은 서른 번이 넘는 이사도중 아마 스무 번째 이사쯤에서 잃어버렸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2학년 때까지 썼던 일기는 짝사랑에 너무 괴로워 3학년 때 학교 난로에 넣고 불태워 버렸다. 그 다음부터의 일기는, 고스란히 지금 내 방 장롱에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다이어리를 쓰면서 촘촘하게 작은 글씨로 별의 별 이야기를 다 썼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테이블에 전화기가 놓인 창 넓은 커피집에 앉아 눈썹을 그리느라 두 시간이나 걸리는 친구년을 기다리며 일기를 썼다. 나는 그 때 작가처럼 개똥폼을 잡는 것으로 만족했다. 다이어리를 펼치고 5만 원짜리 파이롯트 만년필로 담배를 벅벅 피워가며 커피집에 앉아 맹물 같은 콜롬비아를 마시며 한 두 시간씩 뭔가를 써 제꼈다. 완성된 글은 없었고 그저 주절거림이었다. 생각나는 것들, 눈에 보이는 것들을 계속해서 써댔다. 당시 종각역에 파이롯트 대리점이 있었고 나는 간간히 그 대리점에 들러 역시나 개똥폼을 잡으며 만년필 구경을 했다. 워터맨이나 몽블랑 같은 만년필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내 한 달 월급보다 훨씬 비싼 것들도 많았지만 3만원이나 5만원짜리 만년필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20대 후반이 되면서 때로 드문드문 썼다. 매일 매일 쓰지 않는 날도 많았고, 가계부로 대신한 적도 있다. 억울한 일이 적어져서 알리바이를 만들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일기를 쓰는 대신 술로 뇌를 씻는 일이 더 많아서였다. 외로울 때는 일기의 양이 많아졌다. 하룻저녁에 예닐곱장을 쓰는 일도 많았다. 결혼 후 아이를 가졌을 때 미치도록 닭살스러운 육아일기를 쓰다가 실패했다. 신혼 때 우리는 복층으로 된 월세집에 살았다. 2층은 작업실과 내 서재로 사용했는데 어느 날 낮잠을 퍼질러지게 자고 일어났더니 남편이 2층에서 씩 웃으며 내려왔다.

“내가 너의 일기를 모두 읽었다! ” 라고 호기롭게 말하며 크게 웃었다.

그 때 내가 친정에서 가져온 일기는 스물 서너살부터 쓴 일기장이었는데 무려 7여년의 일기를 모조리 읽었다는 것이다. 거기는 옛날 남자친구의 글씨도 있고 그가 써준 메모도 붙여놨었는데 이 남자의 몰지각한 행태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만큼의 관심이려니 생각하고 인권침해라 여기지 않았다. 때로, 누군가 이 일기를 봐줬으면 하고 쓸 때도 있었다. 일부러 남편 눈에 띄는 곳에 일기장을 놓아두기도 했다. 그와 갈등이 심할 때 내 일기를 봤는지는 모르겠다. 남편이 일기를 봐주기를 바라지 않아도 되는 지금, 나는 삶을 다시 살고 있다.

 

매년 한 권 이상의 일기장은 남았다. 지금은 스프링노트를 쓰기도 하고 큰 맘 먹고 몰스킨을 사기도 하고 단행본 크기만 한 노트에 매일 한 장이상의 일기를 쓰기 위해 노력한다. 시간이 늦었으면, “너무 졸린 관계로 이만” 이라고도 적는다. 나의 기록은 다이어리에, SNS에, 회사 업무일지에 남는다. 나에게 일기는 하루의 기록이 아니라, 일기장을 펼쳤을 때의 생각과 감정뿐이라 때로 어떤 기록도 없다. 누군가 고은시인의 일기장 얘기를 했었다. 고은의 일기가 출판되어 나왔는데 이 양반은 대취를 한 날에도 대취했다고 일기를 쓰더라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졸린 날은 몰라도, 술을 누구랑 누구랑 마셨는데 누가 뭔소리를 했고, 이런 거는 적을 수가 없다. 쓰러져 자야되니까. 라기 보다, 귀찮으니까.

 

일기를 쓰는 일은 그저 하루에 하나씩 돌탑을 쌓는 기분이다. 누군가 와서 한 번에 허물어 버릴 수도 있지만, 그냥 하는거다. 일기를 다시 성실하게 쓰고 나서부터 잠을 잘 잔다. 내 머릿속엔 매일 매일 어떤 요란스러운 새가 날아와 이상하고 기괴한 집을 짓고 가기 때문에, 일기에다가 오늘 이 요란한 새가 지은 집에 대해서 대충이라도 털어놓고 자면, 머리가 무겁지 않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구구절절한 일기에 대한 글을 쓰고도, 나를 증명할 어떤 알리바이가 필요하지 않더라도, 일기를 쓰고 잘 것이다.

 2013. 11. 27.

외로운 곁

“글자를 어떻게 배웠나요?”

배운 게 아니고, 혼자 뗀 셈인데요. 4살 지나서 엄마가 디즈니 명작만화 전집을 사주셨어요. 처음 읽은 책이 신데렐라. 엄마가 그걸 읽어줬는데, 제 기억으로는 한 번이거든요. 아마 몇 번 더 읽어줬겠죠. 하루는 다시 읽어달라고 했더니, 엄마가 피곤해서 자야된다고. 아, 그 때 4살쯤 맞아요. 엄마가 임신중이었어요. 뱃속에 동생이 있었으니까. 저보고 읽어준 이야기를 기억해서 이야기를 맞춰보라고 하고 주무셨어요. 그래서 혼자 이야기를 만들고 다시 지어서 읽고 하다가 글자를 뗀 거 같아요. 그 때 그 책을 다 읽었고.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엄마가 금성출판사 위인전집을 사줬는데, 24권짜리였거든요. 1권에 두 명씩 붙어 있는, 한 300페이지 조금 안되는 책이었어요. 그 책을 학교 들어가기 전에 읽기 시작해서 다 읽었어요. 그 전에는 큰 집에서 안 본다고 버린다는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백과사전을 얻어왔는데, 백과사전이 원래 검색기능이잖아요. 근데 저는 그걸 읽는 책인 줄 알고 다 읽은거예요.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학교 들어가서는 교과서를 다 외워서 다녔구요.

“책을 읽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어린 아이가 그렇게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은, 버려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거든요. 방치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어떤가요?”

아 맞아요. 4살이 되기 전엔 소꿉장난을 가지고 밖에 나가서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걸 싫어했어요. 제 장난감에 흙이 묻잖아요. 아이들은 풀을 뽑아다 빻고 찧고 하면서 노는데 장난감에 물이 드니까. 그래서 밖에서 안 놀았어요.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가 20원을 주는데, 그걸 가지고 언덕길을 내려가서 문방구에 가서 종이인형을 사요. 그리고 하루종일 그걸 오려요. 다 오리고 가지고 놀면 해가 져요. 그 종이인형은 박스로 들어가죠. 그럼 그걸로 유효기간은 끝난거예요.

“혼자 있었네요.”

예. 그러니까 집안이 폭삭 망해서 시골로 내려갔을 때, 그 동네에 아이들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 아이들하고 못 어울렸어요. 그러니까, 제가 구경거리였거든요. 일단 제가 어릴 때 피부가 많이 희고, 엄마가 옷을 무척 중요시하니까, 무척 튀는 옷,고급스럽고 예쁜 옷을 입었을 거예요. 그 동네로 이사간 지 얼마 안되서 동네에 공유되는 마당이 있었는데, 거기서 흙 위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거든요. 눈을 들어보니까 동네 아이들이 저를 삥 둘러싸고 구경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얼굴은 하얗고 옷도 깨끗한 걸 입고, 그 동네 아이들하고 너무 다른 아이였던거예요. 그 때는 피부가 희면 무슨 병자처럼 생각해서, 마치 황순원 소나기의 여주인공같은 취급을 받았어요. 어디 아프냐고 묻고 사람들이. 학교에서도 백혈병 환자라고 소문나고 그랬어요. 그 동네에 아이들이 많았는데. 친구가 없었네요.

하루종일 혼자 있던 유년기에 대해서 생각한다.

왜 나는 늘 혼자였던 걸까.

기억나는 친구도 없다.

초등학교 1학년때 안수련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1학년 2학기때 전학을 갔다. 그 친구가 한국일보 미술대회에서 받은 상을 내가 대신 받아 간직했었다. 아주 오랫동안. 모든 짐을 처분해야 할 때가 되기 전까지. 그 친구를 다시 만날 줄 알았다.

생각해보면, 내가 어릴 때는 늘 아이들이 많았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 같은 아파트 맞은편에는 지혜가 살고 있었고, 그 친구와 가끔 놀았지만, 지혜야 종이인형 사러 가자. 라고 그 집 문을 두드리다가 목사님인 지혜 아빠가 “너는 어떻게 매일 종이인형을 사러 가니??”라고 윽박질렀을 때, 그 날로 나는 지혜를 찾아가지 않았다.

특별한 아이로 길러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너는 너무나 특별해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필요가 없고, 그 아이들은 모두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늘 혼자였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듯 했고, 반장도 줄곧 했지만, 누군가를 기다려 같이 학교를 가거나 하교길에 누군가를 기다렸다가 같이 집에 오는 건 초등학교 5학년때쯤 되어서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그 많은 아이들 중에, 절친이라고 할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4학년때는 오후반일 때 용태라는 녀석과 매일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는 겨루기 시합을 했다. 언젠가 학교 앞에 빚쟁이가 찾아온 이후로 부리나케 집으로 가는 습관이 잠깐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5학년 때 따돌림을 극복하고, 그 아이들에게서 사과를 받아낼 때쯤에, 아마 그 때부터 집에 누군가와 같이 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길에서 소란스럽게 떠드는 6학년 남자애와 시비가 붙어 격렬하게 몸싸움을 했고 피 터지게 싸워서 동네가 뒤집히는 일도 있었는데, 그건 결국 그 싸움의 끝에 엄마가 야구배트를 들고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때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중, 다시 한 번 패거리에서 내몰리는 따돌림을 당했고, 나는 교회와 학생회 일에 충실했다. 친구는 없는데, 늘 반장이었고, 따돌림을 당했는데도 학생회 간부를 맡았다. 중학교때 가장 친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내몰린 이후로, 중학교 때 친구들은 고등학교때부터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두 번의 따돌림 이후에 나는 언제나 커다란 그룹에 속해 있었다. 무리를 이끌고 10명이 넘는 모임을 주도했으며, 언제나 그 자리에서 분위기 메이커였다. 사람들은 내가 모두 즐겁고 명랑하고 쾌활하고 화끈하다고 생각했으나 미치도록 떠들고 난 공허함은 술 외에 다른 걸로 채울 수가 없었다. 언젠가 내가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는데, 그건 아마 누구에게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며, 몇 번의 배신을 경험한 것 가지고 마음을 굳게 닫아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내 사진속에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게 불과 몇 년전이다. 그리고 사진속에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그걸 깨달은 지 몇 년이 지나서였다. 요즘은, 사진속에 사람이 있거나, 사람들의 웃는 얼굴을 찍기도 한다.

그 시절이 슬펐다거나, 참혹하다거나, 아프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저 그랬구나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은 다 지나갔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오랫동안 참으로 외로웠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내가 정말 누군가에게 내 곁을 내어줄 줄 아는 인간인지 의심스럽다.

아마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크게 실망하는 일은 없을 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배신도, 누군가의 실망스러운 행동도, ‘그래 너는 그 정도의 인간이었구나’라고 생각할테니.

더 나아지고 싶은 생각도, 과연 무엇이 더 나아지는 것인지 규정할 수 없기에 바라고 싶지 않다. 행복하고 싶다는 생각도 간절하지 않다. 인간의 삶은 행복으로 도배될 수 없다는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저 이렇다는 것. 그저 이렇게 흘러왔고, 지금 여기 있다는 것 뿐이다.

외로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다.

그러나 외로움에 익숙해 질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외로움에 익숙한 사람은 익숙해졌던 그 시간만큼 사람과의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에 서툴러서, 혼자 있는 시간이 편안해서, 좋다고 느끼는 것 뿐일게다.

문제는 외로운 것에 익숙한 사람의 곁은, 언제나 춥다는 것이다. 외로운 사람의 주변에 맴도는 외롭지 않은 사람들도 금새 차갑게 식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2013. 5. 22.

날씨는 왜 좋고 지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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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었어. 아기 기저귀에 쓰는 노란고무줄이 있었어. 그걸로 가속페달을 묶어놓은 버스를 상상해봤어? 내가 학교 다닐 때 타고 다니던 마을버스는 그런 버스였어. 그 버스가 기울어질 정도로 아이들이 많이 탔어. 그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가던 길에 시비가 붙으면 버스기사 아저씨가 창문을 열고 욕을 했어.

“씨발 내가 너 따위 죽이고 깜빵 한 번 더 가면 돼”

똑같은 교복을 입고 깔깔대던 열일곱 열여덟 아이들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순간이었지. 그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이었어. 순수했고 착했어. 순조롭게 살아갈 수 있는 아이들이었고, 청천벽력같은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안정된 성품의 부모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다수였어. 모험심이 많거나, 책임감이 적은, 바람같은 사람들과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보다 그 반대편이 사는 데는 훨씬 수월했겠지. 몰아치는 폭풍을 헤치고 나갈 에너지를 잘 모아두었다가 자기를 가꾸는 데 쓸 수 있거든.

바다에 배가 가는데, 자꾸 폭풍이 몰아치면 무슨 기운으로 고기를 잡겠어. 근데, 날씨가 계속 좋으면.. 고기도 잡을 수 있고, 하늘도 볼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 할 수도 있거든. 폭풍만 만나면서 살면, 그런 여유는 없지. 하루 하루 버티고 견디는 게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그래서 가정 환경이 안정적이어야 공부를 잘한다고 말하기도 하는거야. 맨날 집에 뭐가 박살나는데 뭔 정신으로 책을 들여다보나. 그런 집구석에서 아이들은 하루하루 숨죽이며 버티는 거거든. 그 와중에 공부를 하는 애들은, 유별난 독종이라고들 하는데, 뭐 꼭 그게 독종이라 그러겠어? 그건 그냥 그 아이가 버티는 방법인데 사회에서 좀 좋아하는 방법을 고른 것 뿐이잖아. 책에다 코 박고 있으면 집중이 잘 되는 뇌를 가지고 태어났나보지. 그게 뭐 꼭 훌륭하다고 말하긴 어려운 거 아니겠냐고.

그렇게 폭풍이 쉴 새 없이 불던 날이 있었어. 이번엔 정말 큰 건이 터진거야. 그 때 내가 열일곱살이었는데. 와 정말 살다 살다 결국 이런 일도 터지는구나. 싶더라고. 욕이 절로 나와. 씨발 이게 뭐지.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되지? 내가 뭘 잘못 했는데? 난 하라는대로 다 하고 살았잖아. 내가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짓을 했냐, 집에서 하지 말라는 짓을 했냐. 열일곱의 나는.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고 지각도 안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어. 게다가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성경을 세 번이나 읽었다고. 그 때 욥의 심정이 뭔가 생각했어. 와 정말 좆같겠구나. 씨발.

내 생일이 8월 말인데.

그 날 학교에 자퇴서를 쓰러 갔지. 담임선생님이 무슨 일인지 다 알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학교에서 인정받는 아이였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내년에 만나자고 힘내라고 다 격려를 해줬어.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에 그 마을버스를 탔어. 나는 사복을 입고 있었지. 나는 학교에 소속된 아이가 아니니까. 사복을 입고 싶었어.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아니라고 완강하게 외치고 싶었던 거 같애. 내가 이만저만한 그지같은 일이 생겨서 학교에 못 다니게 됬다구요!! 라고 나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원망을 퍼붓고 싶어서. 내가 뭘 잘못했냐고! 난 아무것도 잘 못 한 게 없는데! 내가 왜 자퇴서를 써야 되냐고!!

그건 지금 생각해도 충분히 억울할 만한 일이거든.

그래 그 마을버스를 타고 오는데.. 버스 안에 아이들이 하나도 없는거야. 자리가 비었더라고. 애들은 다 학교에 있었거든. 게다가 내 생일인데 말야. 날씨가 겁나게 좋은거야. 진짜 허벌나게 좋더라고. 햇빛이 막 미치게 내려쬐고 말야. 8월 말, 내 생일 즈음엔 주로 태풍이 오지. 그게 참 이 엿같은 팔자를 반영한다고 생각하던 나이였는데. 와 .. 날씨는 왜 좋고 지랄. 약올려?

날씨 좋으면 놀러가고 싶잖아. 사람들의 표정도 좋잖아. 길에 웃는 사람들도 많잖아. 나는 미치겠는데 말야. 내 세상은 무너졌는데 햇빛이 짱짱해. 태양이 비웃는 거 같은거지.

그건 니 문제야. 나는 멀쩡하단다.

슬펐지. 그래서 그 날 어디 쪼그리고 앉아서 뭘 적었을 거야.

내 세상이 무너지는 날, 누군가는 빨래를 널고 세탁소에 옷을 맡긴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누군가가 태어나고 누군가가 죽기도 한다. 일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은 회사에 가고 시장에 가서 고등어를 사겠지. 수박을 사오는 누군가의 엄마도 있을 것이고 아이스크림을 베어먹으며 골목을 뛰어노는 아이들도 있다. 내 세상은 무너졌는데, 그건 내 세상만 무너진 일이었다.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간다. 비록 내가 사라진다 해도, 세상은 아무 일 없이 돌아갈 거다.

뭐 대충 그런 내용이었어..

비참하지. 나 없이도 조직이나, 세상이나, 내가 속했던 사회가 돌아간다는 게 진짜 짜증나잖아. 그게 얼마나 슬퍼. 나 없으면 죽을 거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인간은 그냥 그렇게 먼지같은 존재야. 근데 그걸 깨달았는데도, 그 때 한 생각은. 아 나는 정말 무용지물. 여기서 끝났거든.

근데..나는 무용지물이다 – 에서 모든 인간은 다 그렇지만 그래도, 무용지물은 아니다. 이런 고차원적인 생각으로 발전하는데.. 20년이 걸린 거 같애. 뭘 억지로 해서 티비에 나오는 인물이 되고 싶다는 그 경박한 욕심을 버리는데 말야. 왜 그렇게 오래 걸린 걸까. 한심한가? 근데 또 그것도 아니거든. 뭐가 한심해. 인간은 원래 다 한심해.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래. 더 한심한 인간도 다 잘 살아. 밥 잘 먹고 잘 자고 똥만 잘 싸고 잘 살아.

날씨를 뭐 어떻게 할꺼야.

날씨 좋다고 하늘에 돌 던지면 나빠지나.

아니면 돈이 많아서. 내 기분이 맞는 날씨를 찾아 비행기를 타고 가나? 갔는데 거기 날씨가 바뀌면? 그럼 말짱 꽝이잖아.

기분이 나빠. 날씨 좋아서 더 나빠. 날씨가 나빴으면 좋겠어. 비가 주룩주룩 왔으면 좋겠어. 그럼 뭐..기다려야지. 비 오는 날까지. 뭘 어떻게 하겠어. 그리고 오늘은 집에 가서 적는거야.

와..오늘은 정말 좆같은 날이었습니다. 씨발. 오늘을 최악의 개같은 날로 정하면, 내일은 덜 개같겠지요. 하하하. 잠이 오나. 잠이 안 오겠지. 안 오면 뭐 못 자는거지 뭘 어떻게 하나. 꼭 자야되나. 하루 안 잔다고 죽지 않아. 그냥 내일 좀 피곤할 뿐이야. 세상에 .. 그렇게 큰 일은 없어. 다 어떻게 보면 그냥 먼지같은 일이야. 할매들한테 어떻게 사셨나요? 물어봐봐. 그 새털같이 많은, 개털보다 많은 날들이 한 줄이 되거든. 그 해에는 애를 낳았지. 2년이 넘어가고 그 해에는 둘째를 낳았지. 아마 큰 애가 아팠던가.. 안 죽었으면 다 별 일 아닌거가 되는 거 같애.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도 않잖아. 안 죽으면 됐지. 뭐. 살아있으면 언젠가 억울하다고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혹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살려두는 게 나을 거 같애. 언젠가 붙잡고 말해줘야지. 너 때매 뒈져버리는 줄 알았어. 알고는 있냐? 라고.

2013. 3. 15.

 

근데 그 때 그렇게 억울했는데 말야.

그 때 내가 꼭 그렇게 억울해하지 않을 수도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게 뭔지 알아? 자퇴서를 안 쓰는거야. 버티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거든. 근데 나는 내가 더 비참해지는 방법을 택한거지. 누가 알아줄까봐. 그냥 훈장 하나 달고 싶었던거야. 그래서 훈장을 달았지. 트라우마. 내 트라우마. 내가 골라서 내 가슴속에 새긴거야. 그냥 학교 버티고 다녔으면.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의 위로를 받으면서 혹시 알아. 학교에서 장학금을 줬을 수도 있어. 그 일은 생각보다 무척 금방 해결됬거든.

그렇다고 해서 그 때 왜 자퇴서를 썼나.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 그냥 내가 그런 인간이구나. 깨달은 걸로 만족이야. 어쨌거나 쉬는 동안 공부를 좀 해서 성적을 올리고 다음 해에 당당히 재입학을 했고 학교도 잘 다녔으니까. 그게 막 가슴아파할 일은 아닌거 같애. 내가 그냥.. 모르는 길이 있으면 일단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지랄같은 성격때문이겠지 뭐. 내 트라우마, 내 상처ㅡ 그런 거 말야. 뭐든지, 일단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 왔을 때, 결국 어느 방의 문을 여는가는. 내가 선택하는 거더라고. 등 떠밀려 들어갔어도, 나올라면 나오는거지 뭐.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아닌 이상.

순대국을 먹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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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대국은 언제나 혼자 먹는 음식이다.
한 고비를 넘어가야 할 때, 그 순간을 넘겨야 할 때, 나는 돼지의 잡고기로 만든 냄새나는 순대국을 먹으러 간다.

그 때는 언제나 남들은 모두 배부른 시간
늘어져 있던 앞치마들이 나 때매 다시 일어나는 시간. 오후 3시라든가, 밤 9시라든가. 아침 10시 반이라든가.

어쩔 수 없는 누린내가 나는 국에 들깨를 넣고 다대기를 풀고 맵고 짜게 한 그릇을 들이켜면 언덕을 내려갈 힘이 난다고 스스로를 속이기가 쉬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빈그릇을 바라보며 다시 최영미의 혼자라는 건 을 떠올리곤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 나에게 같이 순대국을 먹자고 할 때, 뛸 듯이 기뻐하지 못하고 아 이 것은 내 외로움의 음식인데.. 라고 주저하는 것이다.

겨울밤, 미친 몸뚱이에 질퍽한 순대국을 먹고 돌아오다.

특별한 계절

셀프주유소에서 카드를 긁고 있는데 (순서상 카드 먼저 긁고 주유) 주유소 아저씨가 다가오신다.
아저씨가 주유총을 잡으시고 물으신다.
할 줄 알아요?
아저씨 라기엔 연세가 많으신 편.
아버지 뻘도 더 되신 듯 하다.
네! 잘 합니다! 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저씨는 총을 잡다가 놓고 한 번 해보랜다.
익숙하게 걸쇠를 딱 받쳐놓으니 어 정말 할 줄 아시네 하신다.
예전에 알바도 했었습니다. 오래전에요.
아저씨가 씩 웃으신다. 그러냐고.
한 16년전쯤이죠. 라고 했더니 그 때도 셀프주유소가 있었냐고 물으신다.
아니요.
순간, 경유차와 휘발유차를 구별하고 차종마나 주유구가 달랐던 걸 기억하느라 종종걸음치던 그 겨울이 떠올랐다.

아저씨가 다시 물으신다.
그럼 한 서른 대여섯됬나?
서른 여덟입니다.
아 그럼 토끼띠인가? 하셔서 네!
하니 아저씨 아들이 토끼띠라 잘 아신다 하신다.
우리 아들은 토끼띠 6월 생인데..
저는 음력으로는 7월입니다.
한 달 늦게 나왔구만 하던 아저씨의 주름진 얼굴 위로 다시 한 문장이 지나간다.

그 해 여름은 진짜 더웠지..
애엄마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

37년전 여름, 더웠던 것을 기억하는 노년의 남자는, 당시 젊은 아빠로 아내가 만삭으로 힘겹게 땀을 흘리던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정말 더웠다고 말했던 엄마가 떠오른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산같이 쌓인 머슴밥을 막던 겨울의 공기가 코끝에 스치던 그 계절도 떠오른다.

한여름의 열기를 기억한 늙어가는 남자와
한겨울의 공기를 기억하는 내가 주유소에서 노란 노즐을 잡고 섰다.

지금은 봄,
이 역시 또 누군가에겐 특별한, 아주 특별한, 40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그런 공기겠지..

2012. 4. 28.

썩지 않는 사과

⒞Hana Lee_120424 @Gwanyangdong

봄빛은 찬란한데 당신 마음은 여전히 지옥이구나
누군가에게 갖고 있는 욕심들이 그대를 지옥에 몰아넣는구나

내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인정받고 싶고, 숭앙받고 싶은 당신의 노력들을
매일 매일 입으로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이로구나

내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따듯한 눈빛으로 안아주길
수고했다고 어깨를 쓰다듬어 주길
따스한 밥상을 함께 하길
당신이 원하는 것들은 그리 큰 것들이 아닐 것이다.

내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리하여 마음 한 켠에 미안함이 있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고
고맙다고 말할 시간을 놓쳤고
수고했다고 말할 시간을 놓쳤다.

놓쳐버린 시간이 너무 가슴아파 술에 취해 울고 있는 것이지.
눈물은 수치라서
화를 내고 있는 거지.

내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언제나 나는 이 자리에서 당신을 응원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당신이 보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대를 일으켜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일어나는 것은 그대 스스로 해야한다.
내가 일으켜 주는 것은 언젠가 당신이 다시 무너질 수 있음을 말한다.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깨우치지 못하면
다음 번에 쓰러졌을 때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때 당신은 일어날 수 없으므로.

당신의 마음을 봐야만 한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슬퍼도 아무리 버겨워도
조금이라도 기운이 있을 때 마음을 사랑하라.

모든 것이 다 그대만의 잘못은 아닐진대
그리하여 나는 오늘 이렇게 억울함을 조금 가라앉히는 것이다.

2012. 4. 27.

_ 블로그에 이렇게 줄바꿈을 해서 쓰는 것은 가독성과 쉽게 쓰기 위한 블로그 작성의 특유한 글쓰기 입니다. 詩라고 오인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혼으로 글을 쓰는 詩人들을 모독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버리는 것 버려지는 것

전복을 먹어봐야 전복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것은 아니다.
소고기를 먹는다고 내가 도축을 하는 것은 아니므로.
내가 먹는 먹거리들에 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먹는 콩나물이 어떻게 길러지는지, 내가 먹는 시금치가 어디서 왔는지, 비가 잦아서 작년 시금치 농사가 나빴다는데, 수퍼와 마트엔 어떻게 줄줄이 시금치가 나와 있는지.
규격을 맞추기 위해 비닐봉투 안에서 자라는 애호박을 보며 간혹 참담함을 느낀다. 마치 고등학교 시절에 추운 날 잿빛 교복을 어쩔 수 없이 입고 베개만한 쿠션을 끌어안고 강당으로 줄줄이 걸어가던, 거세된 젊음이 자꾸 생각난다.

누군가에게 힘이 될 음식을 만들기 위해 세일하는 전복을 샀다가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전복은 나에게 오기 전에 푸른 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살았겠지. 어린 아기의 새끼손톱보다 작은 빨판으로 뭔가를 먹으며 몸을 키웠을테고 내가 잘라내 버린 빨간 입으로 바다의
파도를 마셨을것이다.
전복의 사이사이에 낀 검정들을 깨끗하게 씻어내며 그간 찾아뵙지 못한 아쉬움과 죄책감을 함께 씻는다.. 라고 적어도 괜찮겠다.

무언가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고등어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 있고, 갈치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오래전엔 그 떠오르는 사람들이 헤어진 옛 애인이거나, 지금은 연락조차 되지 않아 마음 한 켠이 무거워지는 슬픈 사연의 어떤 여인..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 기억의 연상의 대상들은 세월이 지나고 내 삶의 변화에 발맞추어 다른 대상으로 변해왔다.
이제는 갈치를 보면 생각나던, 파출부 다니며 일수써서 까르띠에 가방을 사던 너무나 무거운 삶을 살던 정아언니가 아니고, 갈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내 아들이다.
샤브샤브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은 육수를 기가 막히게 만드는 시동생이고, 고등어를 더 이상 못 먹게 된 남편이 생각나고, 계란을 보면 계란하나로 대여섯가지의 요리를 만드는 열여덟살 딸아이다.

그리고 이제 전복은 나에게 시어머니를 부른다. 시어머니의 부엌 씽크대엔 전복껍데기가 있다. 그리고 그 위엔 날긋한 초록색수세미가 있다.
“너무 고와서 버리기가 아깝잖니” 하시는 어머님을 생각하며 전복죽을 끓인다.
그리고 나도 전복껍데기에 붙은, 내가 미처 떼어내지 못한 살점들을 뜯어낸다.

묻는다.
무엇이 되겠느냐.
너희들의 살점은 병든 육신에 큰 힘이 되길 기원하니, 너희들의 고운 껍데기는 누군가에게 칠보가 되어, 장롱이 되기도 하고, 미술품이 되기도 하고, 화장대가 되기도 하고, 귀중한 것들이 된다고.

나는 칠보를 만들 줄 모르니, 수세미라도 올려놓고 너희를 기억하려고.
그리고 그 고운 빛 볼 때마다..
지나간 젊은 어느 날, 담양의 대나무숲에서 바람 맞고 앉았을 내 딸래미만한 열여덟의 어느 처녀를 생각하며.
전복껍데기를 보며, 너무 예뻐서 버리기가 아깝다는 시들지 않은 젊음을 꼭 기억하리.

2012. 4.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