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상장례에 관하여
강의 윤여빈(경기문화재단 생활문화팀 전통의례 고증 전문가, 前 성균관 의례부장
정리 이하나
하늘의 도(道)는 옳으냐 그르냐 天道是非也
사마천의 사기는 「본기(本紀)」 12권, 「표(表)」10권, 「서(書)」8권, 「세가(世家)」30권, 「열전(列傳)」70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이다. 이 중, 일반적으로 본기와 열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본기(本紀)는 천자(天子)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평민이 두 사람 등장한다. 그 중 하나가 공자이다. 포의(布衣)입은 평민이지만 모든 왕의 스승이 되었다 하여 본기에 수록되었고, 초패왕 항우(項羽)는 전쟁을 할 때 기습전을 하지 않고 정공법을 사용했다 하여 천자의 반열에 올랐다. 본기의 기본정신은 포폄(褒貶)이다. 포폄은 춘추전국시대의 정신으로 볼 수 있다.
열전(列傳)은 총 70편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는 백이(伯夷)숙제(叔弟)의 이야기이고, 마지막은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의 자서전이다. 맨 마지막 태사공 사마천에는 자신이 왜 대대로 역사를 공부하고 궁형을 당해 비루한 처지가 되었는지 나타나있고 사실상 마지막 편과 다름없는 제 69편에는 화식(貨殖)열전(列傳), 화(貨)는 돈을 말하고 식(殖)은 불어난다는 뜻으로 재산을 불리는 법, 돈을 버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 69편의 주제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뭐냐고 묻는다. 강남의 상인이 사막을 뚫고 가서 물건을 사 나르고, 강북의 물건이 남쪽까지 가 닿고 바다를 건너고 험한 길을 넘어 물건이 유통되는 이유는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이익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현시대에도 와 닿는 이야기다.
열전의 첫 이야기인 백이숙제(伯夷叔弟)편에는 이런 질문이 있다.
“하늘의 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언제나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 백이와 숙제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했어도 굶어 죽었다. (중략)
최근 사례를 살펴보면 하는 행동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만일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라면 옳은가? 그른가?
사마천의 이 질문은 전통상장례와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화두가 된다.
프랑스의 배우 알랑 드롱은 전세계 최고의 미남자로 손꼽혔다. 그의 전성기때 프랑스정부에서는 프랑스의 음식문화를 해외에 홍보하고자 그를 모델로 영상을 촬영했다. 완성된 영상은 수차례의 정부관료들의 회의를 거쳐 세상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사장되었다. 왜 그랬던 것일까.
1935년생인 알랑 드롱은 17세에 알제리에 군인으로 파병되었고 세계 각지를 방랑하다 파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의 첫 영화는 1957년이었고,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린 것은 1960년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 였다. 신이 만들어낸 최고의 얼굴을 가진 그의 개인사에는 품위가 깃들 겨를이 없없다. 그가 프랑스 음식을 먹는 장면에는 외형의 조형미로 가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품위는 이렇듯 하루아침에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살아온 역사가 그 사람의 품위를 결정지을 수 있다. 전통의례의 기본은 바로 이 품위에 있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예비를 할 수 있으나, 인간이 죽는 것은 예비를 할 수 없다. 선한 인간이나 악한 인간이다, 부귀영화를 막론하고 모두 다 죽는다. 인간의 끝은 동일하다. 그러나 죽음의 품격은 인간마다 다르다. 죽음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며,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죽을 때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모든 인간이 단 한 번, 처음으로 겪는 것이 바로 이 죽음이다.
노련한 장의사들은 주검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을 추정할 수 있다. 사람의 몸은 그 사람의 일생을 의식보다 더 많이 기억한다. 삶의 흔적은 고스란히 몸에 남는다. 이 사람의 마지막 살아있는 모습이 평화로웠는지 아닌지도 주검이 말해준다.
전통장례에 관해서는 유교에 입각하여 기술한다.
기본적으로 유교에서는 영혼을 믿지 않고 사자의 의식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유교에서는 신이 있다는 걸 믿지 않고 기록되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유교는 철저히 인본주의다.
품위는 인간이 스스로 충분히 가꿀 수 있다. 어느 영화배우에게 여태 같이 일한 여배우 중 최고의 미인이 누구냐 물으니, 그가 말하길 진선미(眞善美)를 뛰어넘는 것은 귀(貴)라고 했다. 위에 말한 알랑드롱처럼 눈으로 보는 조형미를 넘는 품위를 바로 귀(貴)라고 표현한 것이다.
백범 김구선생은 젊은 시절 동학운동에 투신하였다가 동주 태화산 나복사로 피난을 갔다. 은신중에 운명에 관한 공부를 하는데 자기 얼굴은 아무리 뜯어봐도 도둑의 상이었다. 그 때 그가 깨달은 공부는 관상 좋은 것보다 몸 좋은 게 좋고, 몸 좋은 것보다 심상(心相)좋은 게 최고라는 거였다. 관상(觀相)은 불여심상(不如心相)이다. 도둑의 상이었던 김구의 얼굴은 해방 후 환국하기 전 평범한 한국인의 얼굴이 되었고 오히려 그 얼굴에 기품이 묻어났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수양을 하면 사람의 얼굴도 변한다는 것이다. 타고난 걸 고치는 일은 쉽지 않다. 아무리 억누르려고 자각을 해도 타고난 성질이나 기질을 억누르기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인체의 중심은 어디일까?
인중(人中)이 인체의 중심이라 말한다. 한자로도 사람 인(人)에 가운데 중(中)을 쓴다. 사람의 가운데라는 뜻이다. 이를 다른 말로 말이을 이(而)라고도 한다. 콧물이 흐르는 선이 아니라 말 이을 이(而)를 쓰는 의미가 있다.
인중의 위쪽은 생각을 하는 이성적인 부분, 인중의 아래쪽은 땅에서 나는 걸 먹고 배설하는 본능의 부분이라 생각한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중심이 인중의 위에 있다는 것이다. 순자가 본 성악설은 인간의 중심이 인간의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순자나 맹자나, 두 사상가의 핵심은 교육이다. 본성을 자제하고 희노애락을 억누르기 위해, 혹은 타고난 본성인 “이성적 사고”를 잘 지키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중 성리학은 인중의 윗부분을 인간의 본성으로 본다.
퇴계 이황은 김유신의 말을 이야기하며 주인이 정신을 잘 차리면 말은 바른 길을 갈 것이고 술 마시고 졸면 말이 알아서 천관녀의 집으로 간다고 했다. 이것이 성리학의 본질이다.
율곡 이이는 또한 하늘은 폭포의 물과 같고, 사람은 그 물을 담는 그릇과 같다고 했다. 하늘에 있는 진리와 내 안에 있는 진리가 같다는 말이다. 물을 얼마나 담을 수 있는지, 그릇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는 것이다. 인중의 위쪽을 본 게 이(理), 인중의 아래를 본 게 기(氣)가 되어 이기설(理氣說)이 시작되었다. 형이상학은 인중의 위를, 형이하학은 인중의 아래를 말한다. 이 상하(上下)를 합치 시키는 것이 바로 인(仁)이며, 그것이 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가 닿아야 할 덕목이다. 몸을 잘 못 움직이는 병을 불인지병(不仁之病)이라 한다. 참기 어려운 병이라는 것이다. 인을 이루기 힘들다는 뜻이다.
생명이 어디서 나고 어디서 끊어지느냐가 인간의 출생과 사망을 규정하는 기준이 된다. 생명은 인중에서 끊어진다. 숨이 막힌다, 숨이 끊어진다고 표현하는 데 이 숨이 끊어지고 막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곳이 인중이다. 사람이 죽은 것을 확인할 때 숨이 끊어지는가를 보는데 호흡이 끊어지는가를 확인할 때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인중에 손을 대고 호흡을 확인한다. 바로 인중이 기식(氣息)이 끊어지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가 된다.
매일 죽겠다고 말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농담으로 한국사람은 매일 죽는다고 하지만, 기실 전통 상장례에서 한국인은 환갑에 죽는다고 본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엇일까. 이는 우리의 오랜 농담에도 숨어있다.
흔히들 병풍 뒤에서 향내 맡는다는 표현으로 죽은다는 것을 표현한다. 여기에 나오는 병풍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말한다. 병풍 앞에 있으면 산 것이요, 병풍 뒤에 있으면 죽은 것이다. 벽도 경계를 나타내지만 줄어들었다 늘어났다 할 수 있는 병풍은 생사경계의 상징을 더 많이 내포한다.
예(禮)의 주체를 주례(主禮)라고 한다. 흔히 결혼식장에서 쓰는 주례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지금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주례는 정확하게 주빈(主賓), 큰 손님이 되고 혼인식의 주례는 신랑신부가 된다.
우리가 흔히 보는 환갑잔치를 생각해보자.
회갑때는 잔치자리에 병풍(屛風)(평풍(平風)이라고도 함)을 펴놓고 그 앞에 고임상을 차린다. 죽음의 방향은 서쪽이라 위패는 서쪽에 놓는다. 아버지는 왼쪽에 앉고 어머니는 오른쪽에 앉는다. 돗자리를 펴놓고 음식을 차리고 잔을 올리는데 언뜻 보면 제사지내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그리하여 이를 다른 말로 산제사라고 한다.
일련의 사회생활에서 은퇴하여 노인들이 모이는 경로당에 나갈 준비를 하고, 안방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사랑으로 넘어간다. 재산도 물려주고, 곳간열쇠도 넘겨준다. 이것이 농경시대의 은퇴이며, 죽음의 의례 중의 하나이다.
회갑잔치는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속하지 않는 효도잔치의 한 가지가 되는데, 이 것이 바로 죽음의 준비단계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회갑을 넘긴 사람은 손자들을 데리고 나가 교육을 하고 윤달을 택해 수의를 만들고, 치관을 하며 죽음을 준비한다. 지금은 수명이 늘어나 회갑잔치는 거의 하지 않고 칠순잔치로 넘어갔지만 예전에는 환갑을 넘기면 수를 다 했다고 보는 것이다.
의식적이며 의례적인 이런 산제사 외에 현실적인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가.
죽음은 예비가 불가능하다. 문밖이 저승이라는 말이 있다. 죽는 것은 예비할 수 없으므로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출생과 죽음을 비교해서 보자.
출생은 예비가 가능하지만, 죽음은 예비가 불가능하다. 사람이 태어나는 일은 예비가 가능하니 식구들이 준비를 했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목욕을 시키고 강포에 싼다. 사람이 죽어도 염습을 하고 씻기고 작은 이불로 싸는 소렴을 거쳐 큰 이불로 싸는 대렴을 한다. 태어남과 죽음의 과정이 같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안방의 아랫목에서 태어났다. 옛날에는 죽을 때가 되면 안방 아랫목에 눕혔다. 태어나는 장소가 죽는 장소가 된다.
아기가 태어나면 금줄을 삼칠일 친다. 상여를 질 때 횟소리를 메기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모두 스물 한 명이 일을 한다. 은정(隱丁)이라하는 못을 박을 때도 스물 한 개의 못을 박는다. 예전에 큰 배는 스물 한 명이 노를 저었다. 21이라는 숫자는 전통사회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1년은 원래 360일인데 이는 자연현상과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아 5일을 더해야 한다. 그보다 더 정확하게 계산하기 위해서는 5일과 1/4일을 더해야 한다. 이 계산법은 복잡하기 때문에 1/4를 매해 더하지 않고 4년에 한 번씩 윤년을 만들어 계산을 맞추는 것이다. 5일을 네 번 더하고 4분의 1을 네 번 더하면 21이 된다. 삼과 칠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21은 역법상 계산의 의미로 불완전한 역법을 완전케 해주는 기능을 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100일이 되었을 때 백일잔치를 한다. 이 백일잔치에는 백설기를 돌리는데, 백(百)자와 백(白)자의 중의적 표현을 더하고, 설(舌)자를 쓴다. 이는 여러 번 혀가 움직인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유명(有名)이 된다는 뜻이다. 이름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백일이 되면 이름을 짓게 된다. 백일을 버텼으니 살았다고 보는 것이며, 이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다.
사람이 죽고 나서도 백일(百日)이 지나면 졸곡(卒哭)을 한다. 백일이 지나 졸곡을 하면 흉례(凶禮)에서 길례(吉禮)로 바뀐다. 지금은 유명무실화된 가정의례준칙에서도 백일이 탈상의 기준이 된다. 3년상은 세종때 생긴 것이다. 원경왕후가 죽고 난 뒤 세종이 백일탈상을 너무 아쉬워하자, 황희가 3년상을 제안했는데 이후 자리를 잡게 되었다.
백일을 지난 사람이 성장을 하여 맞는 첫 예(禮)가 관례(冠禮), 성년식이다. 남자들은 상투를 틀고 여자는 비녀를 꽂는다. 노동의 의미에서는 장정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남자들의 관례에서는 마을 어귀에 있는 큰 돌을 들어 어깨에 올려야 반품에서 온품이 되었다고 본다. 여자들은 초경을 하면 혼인을 준비할 수 있게 되는데 여자는 관례라 하지 않고 계례(笄禮)라 한다.
이때부터 남자들은 공부를 위해 집을 떠날 수 있고, 술을 마실 수 있고 자(字)를 받을 수 있다. 사회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어린 시절이 끝났다는 의미를 갖는다. 관례를 치른 후 혼인을 약속하면 서로 사주단자를 보내고 신부댁에서 길일을 택해 신랑댁에 보낸다. 납패라고 하여 신랑댁에서 간단한 선물을 보낸다.
혼인식 때 술을 나눠 마시는 것은 합궁을 의미하고 시아버지에게 밤과 대추를, 시어머니에게 닭을 올린다. 혼인례가 끝나면 신부댁으로 가고 3년을 산다. 신부댁으로 갈 때 신부도, 신랑도 모두 가마를 타고 간다. 가마는 4명이 드는 것을 탔다. 다시 신랑댁으로 돌아와 평생을 보내게 된다.
관혼상제가 인간의 기본 의례였는데 이 중 혼인의 다음에 오는 것이 상례이다.
사람이 죽는 것이 상례인데, 안방 아랫목에서 사람의 죽음을 확인하고 매장을 한 뒤 혼을 다시 모셔오는 절차가 있었다. 혼백상자를 가져와 상청에 모시고 살아있는 것처럼 아침에 밥을 올리고 저녁에 밥을 올리는, 상식을 올리는 의식을 갖췄다.
죽음을 표현하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임금이 죽으면 붕(崩), 제후가 죽으면 훙(薨), 일반인이 죽으면 졸(卒), 가장 보편적인 말로는 죽었다, 사(死)를 썼고, 비하하는 말로 뒈지다쯤에 해당되는 폐(廢)라는 말도 썼다. 귀양을 가 위리안치에 봉하는 것도 폐인(廢人)이라 칭했는데 살아있으나 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는 말을 썼다. 이는 혼은 날아가고 육신은 흩어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사상 앞에서 향을 피우는 것은 혼을 불러오는 행위이며, 술을 땅에 붓는 것은 육신을 불러 모으는 것이 된다.
(1) 임종(臨終)
가족이나 가까운 혈족이 운명(殞命)할 때 곁에서 지켜보는 것을 말한다.
임종이 가까워지면 병자가 평소에 입던 옷 중에서 흰색이나 엷은 색의 깨끗한 옷을 골라 갈아 입히고 거처하던 방과 운명한 뒤 모실 방도 깨끗하게 치워 둔다.
유언(遺言)이 있으면 침착한 마음으로 기록하거나 녹음해 두고, 병자가 죽기 전에 가장보고 싶어하는 친족 친지에게 속히 연락하여 운명을 지켜볼 수 있도록 손을 써야 한다.
임종단계에 들어가면 바깥에 있던 사람을 안방 아랫목으로 눕힌다. 집안의 중심은 안방이며, 안방에 모시는 것을 천거정침(天居停寢)이라고 한다. 머리는 동쪽을 향하게 두고 호흡의 기식을 보며 인중을 살펴 숨이 끊어지는 것을 확인한다. 기식이 끊어지면 사람이 완전하게 죽었다고 본다. 북쪽에 대고 높은 곳에 올라가 초혼(招䰟)을 하게 되는데 이를 복복(復復)혹은 고복(皐復)이라 한다. 높은 곳에 올라가 고인이 입을 새 옷을 줄 테니 영혼이 다시 들어오라고 부르는 의례이다. 기록에 있는 의식이나 대부분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정형화된 형식이 있으나 지방마다 그 양식이 조금씩 다르다.
초혼을 하고 날 때가 되면 몸이 경직되기 시작한다. 그 다음은 사자상을 차린다. 사자상은 문밖에 신발을 세 켤레 두고, 밥도 세 공기, 간장도 세 종지, 물도 세 대접을 준비한다. 저승사자는 보통 삼사(三使者)자라고 하여 세 명이 움직이고 삼성이라는 신과 함께 혼을 데리러 온다.
(2) 수시(收屍)
먼저 눈을 곱게 감도록 쓸어 내리고 몸을 반듯하게 한 다음 손과 발을 매만져 가지런히 한다. 머리를 약간 높게 하여 괴고, 깨끗한 솜으로 코와 귀를 막는다. 이를 수시 또는 정제수시(整齊收屍)라 한다. 얼굴에 백포를 씌우고 홑이불을 머리까지 덮은 뒤 병풍이나 장막으로 가린다.
사자상을 차린 후에 시신을 곧게 편다. 이를 수시라고 한다. 몸을 잘 펴서 칠성판이라는 판 위에 올린다. 북두칠성을 본떠서 만들었다하는데 시신에서 나온 분비물을 걸러내고 잡귀를 쫒기 위해 구멍을 일곱 개 낸 판이다. 이는 염습을 위해 몸을 정리하는 것이다.
(3) 발상(發喪)
초상을 알리고 상례를 시작하는 절차이다. 수시가 끝나면 가족은 곧 검소한 옷으로 갈아입고 근신하며 애도하되, 호곡은 삼간다. 흔히 ‘謹弔’라고 쓰인 등을 달아 놓거나 ‘喪中’또는 ‘忌中’이라 쓰인 네모난 종이를 대문에 붙여 초상을 알린다.
이후 발상(發喪)이 이어지는데 여기부터 의례적인 행위가 시작된다. 곡을 하는 것도 아이고, 에고라는 소리를 넣어서 해야 한다. 발상(發喪)은 상장례가 바뀌는 단계를 말한다. 장례는 임종의 단계가 지나면 그 주체가 바뀌어 상례에서 장례로 전환된다.
(4) 부고(訃告)
호상은 상주와 의논하여 고인이나 상제와 가까운 친척과 친지에게 부고를 낸다. 부고에는 반드시 장일과 장지를 기록해야 한다. 가정의례 준칙에는 인쇄물에 의한 개별고지는 금지되어 있다. 다만 구두(口頭)나 사신(私信)으로 알리는 것은 허용된다.
(5) 염습(殮襲)
운명한지 만 하루가 지나면 시신을 깨끗이 닦고 수의(壽衣)를 입힌다. 남자는 남자가, 여자는 여자가 염습을 한다. 우선 목욕물과 수건을 준비하고, 여러벌의 수의를 깨끗이 닦은 후 겹쳐진 옷을 아래옷부터 웃옷의 차례로 입힌다. 옷고름은 매지 않으며, 옷깃은 산사람과 반대로 오른쪽으로 여민다. 옷을 다 입히면 손발을 가지런히 놓고 이불로 싼 뒤 가는 베로 죄어 맨다.
염습부터 살아있는 사람이 주체가 되기 시작한다. 베옷을 입히는 것은 오래된 풍속이 아니고 옛 시신을 발굴해보면 대체적으로 평상복을 입혀 묻었다. 관료는 관복을 입히고 관료가 아닌 사람들은 평소에 입던 옷 중 깨끗한 것을 골라 입혔다. 염은 오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는 작업에 쓰이는 솜을 말한다. 이 때 빈곳을 채운다는 의미로 반함을 하는데 씻은 쌀이나 구슬을 죽은 사람의 입에 물리는 일이다. 이 쌀은 바로 사람의 몸을 의미한다.
사망 후 24시간이 지나면 시반현상이 일어나고 몸이 부패하기 시작한다고 보고 염습을 진행한다. 씻겨서 옷을 입히는 절차를 보면 사람이 태어났을 때와 같다. 여자는 여자가 하고 남자는 남자가 하는 식으로 현대의 절차가 바뀌었다. 입관을 한 뒤 주검은 무덤으로, 즉 장지로 가게 된다. 상례는 발상, 상주들, 즉 살아남은 사람들의 의식이며, 장례는 매장절차를 말한다.
(6) 입관(入棺)
염습이 끝나면 곧 입관한다. 이때 시신과 관 벽 사이의 공간을 깨끗한 벽지나 마포(麻布) 등으로 꼭꼭 채워 시신이 관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한다. 망인이 입던 옷을 둘둘 말아서 빈 곳을 채우기도 한다. 시신을 고정시키고 홑이불로 덮고 관뚜껑을 덮은 다음 은정(隱釘)을 박는다.
그리고 관 위에 먹으로 ‘○○(직함)○○(본관)○○○(성명)의 널’, 여자의 경우는 ‘○人○○(본관)○씨의 널’이라 쓰고, 장지(壯紙)로 싼 뒤 노끈으로 묶는다. 입관이 끝나면 관 밑에 나무토막을 깔고 안치한 다음 홑이불(관보)로 덮어 둔다. 관은 병풍으로 가린다.
(7) 성복(成服)
입관이 끝나고 영좌를 마련한 뒤 상제(喪制)와 복인(服人)은 성복을 한다. 성복이란 정식으로 상복을 입는다는 뜻이다. 요즘은 전통 상복인 굴건제복을 입지 않고 남자는 검은 양복에 무늬없는 흰 와이셔츠를 입고 검은 넥타이를 매며, 여자는 희색 치마 저고리를 입고 흰색 버선과 고무신을 신는다.
(8) 발인(發靷)
영구가 집을 떠나는 절차이다. 발인에 앞서 간단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린다. 이를 발인제라 한다.
(9) 운구(運柩)
발인제가 끝난 뒤 영구를 장지나 화장장까지 장의차나 상여로 운반하는 절차이다. 장의차를 이용할 때 상제는 영구를 차에 싣는 것을 지켜본다. 승차 때는 영정, 명정, 상제, 조객의 순으로 오른다. 상여를 이용할 때는 영정, 명정, 영구, 상제, 조객의 순으로 행렬을 지어 간다.
(10) 하관(下棺)
장지에 도착하면 장의차나 상여에서 관을 내려 광중(壙中)에 넣는다. 하관때는 상주와 복인이 참여하되 곡은 하지 않는다. 광중이란 관을 묻기 위하여 파놓은 구덩이이다. 관을 들어 수평이 되게 하여 좌향(坐向)을 맞춘 다음 반듯하게 내려놓고 명정을 관위에 덮는다. 그 다음에는 횡대를 차례로 가로 걸친다. 이때 상주는 ‘취토(取土)’를 세 번 외치면서 흙을 관위에 세 번 뿌린다.
기존에 있는 무덤이나 묘지가 진짜일까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장례는 풍장이 많았다. 시신을 나무에 매달아 바람에 의탁한 후 풍화가 되면 뼈만 추려 항아리속에 넣었다가 땅에 내려놓고 풀로 덮거나 가매장을 하여 탈골이 될 때까지 기다려 뼈만 다시 묻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조선조에는 특정 계급만 의례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하고 일반 백성들은 풍장의 풍습을 유지했을 것이라 본다.
한국의 장례는 풍수와 관련하여 탈관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관에 쓰는 널과 탈관문제는 기본적으로 뼈가 잘 산화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게끔 하는 것이다. 동남아의 아열대기후는 부패가 잘 안되기 때문에 주로 화장을 하게 되었고 우리나라도 뼈의 산화가 늦어지는 지역에서는 탈관을 하여 하관을 했다.
명당지혈을 찾는다는 얘기에 의문이 가는 것은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는 대부분 왕족을 중심으로 한 최상류층의 의례만 남아있을 뿐 일반인들의 장례문화는 거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풍수에 따라 명당을 찾는다는 것은 조선조에 들어와 보급된 일로 추정하는 것이다.
(11) 성분(成墳)
상주의 취토가 끝나면 석회와 흙을 섞어서 관을 완전히 덮는다. 이때 빨리 굳도록 물을 조금식 끼얹고 발로 밟아 다진다. 평토를 한 다음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 봉분을 만들고 잔디를 입힌다. 지석(誌石)은 평토가 끝난 뒤 무덤의 오른쪽 아래에 묻는다. 나중에 봉분이 허물어지더라도 누구의 묘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2) 위령제(慰靈祭)
성분이 끝나면 묘소 앞으로 영좌를 옮기고 간소하게 제수를 차린 뒤 고인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화장을 했을 때에는 영좌를 유골함으로 대신하여 제사를 지낸다.
상주는 특별한 지팡이를 짚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대나무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오동나무나 버드나무 지팡이를 짚는다. 대나무의 상징은 하늘을 상징하여 동그랗다. 고통을 당해 속이 비었다는 의미가 있다. 대나무의 마디부분은 세(世)라고 하고 마디와 마디 사이는 대(代)라고 하는데 세대차이의 어원이 된다. 어머니는 고통을 당해 단단하다는 의미이며 땅으로 상징하여 나무를 네모낳게 깎는다. 오동나무의 오동(梧桐)의 동(桐)자가 동(同)과 음이 같은 것을 취해 아버지와 같이 슬퍼하라는 의미가 있다 하며 오동나무는 마디가 없어 두 사람을 모시지 않는다는 뜻을 말한다. 이는 천원지방(天元地方)의 의미를 띄는데, 하늘은 동그랗고 땅은 네모난 것이 자연의 일부라 인정하고 무덤도 바닥은 네모지게 파고 봉분을 동그랗게 하는 이유가 된다.
(13) 삼우(三虞)
장례 후 3일째 되는 날에 첫 성묘를 하고 봉분이 잘 되어 있는지를 살피고 간단한 제사를 올린다. 이를 삼우라 한다. 요즘은 초우와 재우는 생략한다.
(14) 탈상(脫喪)
상기(喪期)가 끝나 복(服)을 벗는 절차이다. 탈상은 부모, 조부모, 배우자의 경우 별세한 날로부터 100일까지이고 그 밖의 경우는 장례일까지이다. 이때 지내는 제사가 탈상제인데 제사 지내는 방법은 기제(忌祭)에 준한다.
탈상은 상복을 벗는 것을 말한다. 현재는 돌아가신 지 3일째 되는 것을 주로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49제를 지내고 더러 100일 탈상도 있다.
우리나라는 점점 화장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땅을 사고 무덤을 만드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인데 이처럼 의례를 바꾸는 것은 대체적으로 돈 때문이다.
이후에 남은 절차가 제례이다. 관혼상제의 마지막 부분이 제사인데 한국사회의 친족관계는 이 제사절차를 위해 정리되었다 봐야 한다. 부모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형제간이 2촌이 된다.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4촌이 있고, 증조할아버지의 제사를 위해 6촌이, 고조할아버지의 제사를 위해 8촌이 있다. 동고조를 8촌까지로 명하는데 고조할아버지, 즉 위로 4대까지는 집안 사당에 모신다. 4대면 거의 100여년, 한 세기가 되고 4대가 넘어가면 사당에서 물러나 조상이 된다. 보통 4대조까지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지만 4대 봉사가 끝난 뒤에도 없애지 않고 계속 봉사하는 신위를 위한 제사를 불천위제사라 부른다. 불천위는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적 학문적으로 뛰어난 경우에 한하여 자손대대로 제사를 지내는 조상이다. 국가에서 명하거나 유림에서 지정하기도 하며 부부를 합동으로 제사지낸다.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모신다고 하여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줄임말을 사용해 불천위제사(不遷位祭司)라 한다.
상장례와 제례에는 촌수에 따라 복식이 달라지고 불천위제사를 포함해 100년 이후의 조상을 모시는 지체는 집안이 아니라 문중이 된다. 죽은 자의 무덤, 산소가 주체가 되고 죽은 사람의 집이라 하며 무덤을 유택(幽宅)이라 한다.
제사를 지낼 때 음식을 준비하는데 이를 선물(膳物)이라 한다. 이 음식을 할 때 파와 마늘은 쓰지 않는다. 오로지 간장만 사용하는데 이는 한 집안은 한 가지 맛의 장을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 집안이라도 각자의 입맛이 다르니 마무리 양념은 각자 집에 가져가 조리해서 먹으라는 뜻이다. 국가의 제사나 향교의 제사는 간장도 쓰지 않고 전혀 간을 하지 않는다. 제사의 음식은 궁극적으로 모인 제례의 주체들이 먹을 것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갑오경장 이후 신분제도를 철폐하여 4대봉사까지만 하도록 정리하였고 제사는 기본적으로 살아있을 때 얼굴을 본 사람까지만 지내게 되었다. 일반사람은 대부분 자기 부모님의 제사만 지내는 편이다.
유교에서 가장 이상향으로 보는 것은 요순시대이다.
요순시대는 집안이 갖추어지고, 깨끗한 옷을 입고, 농사를 지어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처자식을 먹일 수 있고 부모를 봉양할 수 있는 사회였다고 한다. 이런 시대를 소강이라고 한다. 그 다음 단계를 대동사회라 한다. 모두가 행복한 시대를 꿈꾸는 것이다.
인간은 행불행을 논하기 어렵고 하늘의 도가 옳고 그른지 정의내릴 수 없으나 인간이 지향하는 지점은 모두가 편안하고 행복한 것이라는 것엔 이의가 없다. 인간이 하는 근심걱정이 하루에 몇 개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말처럼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각을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사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인중의 아래에서 일어나는 먹고 본능을 채우는 일부터 인중의 위에서 일어나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깨닫는 일까지 사람의 인생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스티븐 호킹은 사람의 죽음이 컴퓨터가 꺼지는 것과 같은 구조라 하였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마음 심(心)자에도 어떤 파장이 느껴지는데, 이것이 과연 단순한 기계의 종료로 치부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든다.
죽음을 이기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끝없는 고행으로 이어져왔다. 인간은 각자의 수양을 통해 인간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 살아가는데 사후세계가 있고 없고를 떠나 행불행을 뛰어넘는 것이 죽음이 아닐까.
몸은 못 움직이고 의식은 남아있을 때 우리는 품위를 지킬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고, 고통을 인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삶과 죽음은 새끼줄처럼 하나로 꼬여 있어서 안이 행(幸)이면 밖이 불행(不幸)일 수 있고 안이 불행이어도 밖이 행일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심상(心相)중에 자존심, 자기를 지키려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다. 자존심을 지킨다는 것은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살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의지를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늘 짐승과 사람의 경계, 사람과 신의 경계에 놓여 있다.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남는 마지막 순간, 그 순간을 숭고하게 남길 필요가 있다. 비록 육신은 이 세계를 떠나가지만 한 사람의 삶과 그 삶을 지켜왔던 혼은 자손과 자손을 통해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다.
2015년 8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