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출판콘텐츠 지원사업 – 9억원

매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우수출판콘텐츠 지원사업”을 한다. 올해 들어 주변에 작가, 출판계 사람들이 많다보니 페친들을 통해 이 지원사업에 응모하는 분들을 많이 본다. 출판사가 지원하는 게 있고, 작가 개인이 지원하는 게 있다.
사실 나도 냈다.
암튼. 그렇게 지원선정되기 어렵다는 페친들의 토로를 계속 봤다. 며칠동안 봤다. 몇 년째다, 이번에도 안되겠지, 내가 성의가 부족했다, 내년엔 더 잘 써서 내야지.
근데 왜 다들 안된다고 할까.

기사를 검색해보니 2017년에 이 사업은 거의 로또 당선 수준이라는 논평이 실린 게 하나 있다.
지원사업 선정자는 (올해기준) 작가에게 300만원, 출판사에게 600만원의 제작지원금을 준다. 뭐 대단히 많은 돈도 아니지만, 늘 자금난에 허덕이는 출판사나, 1년 인세 19,000원 받는 작가에게는 고마운 돈이다.
올해 지원자가 얼마나 될 지 모르지만, 2017년에는 2500편 정도 응모했다고 한다. 지금 지원자들은 약 2천 편 이상이 응모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서울의 어느 지역의 제본소는 계속 이 응모작을 제본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올해 사업계획안은 다음과 같다.

■ 2021년 추진내용
◎ 지원자격 : 대한민국 국적의 개인 또는 출판사
◎ 지원분야 : 인문교양, 사회과학, 과학, 문학, 아동
◎ 지원대상 : 미 발간 국내 창작 원고(‘21.11.30.까지 도서로 발간 가능해야 함)
◎ 지원규모 : 총 100편, 편당 900만원(출판제작지원금 600만원+저작상금 300만원) 지급

  • 전체 선정편수 중 30%(30편) 이상 1인 또는 지역출판사, 청년(저자 또는 기업대표) 응모작 선정
    ◎ 추진절차 : 사업 공고 및 접수(2월) → 심사·선정 및 협약 체결(3~5월) → 선정작 도서 발간 및 유통(6~11월) → 선정작 홍보(12월)

자, 그러면 이 사업의 총 예산은 9억이다.
사업수행하는데 드는 제반비용까지 해서 10억이라고 치자.
전국에 있는 출판사와 작가들이 1년을 기다려 여기에 응모한다면, 이 사업의 예산을 늘려야 하지 않나?
100억도 아니고 꼴랑 10억이다.
전국단위 공공사업에서 10억은 하찮은 돈이다.

다른 부처의 사업단위와 좀 비교해보자. 1천만원도 안되는 돈 주고 생색은 난리도 아니다. 책에 여기저기 딱지붙고 모두들 이 사업을 주목한다.
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저희가 지원받은 예산이 없어서” 라고 한다면, 국회 상임위를 찾아가서 담판을 지어야 할 거 아닌가. 돈을 더 내놓으라, 이렇게 전국에서 들썩이는 사업이 없다. 경쟁율이 20대 1이 넘는다 등등. 국회가서 좀 드러누우면 안되나?
여기저기 오피니언 리더들이고, 신문의 칼럼 쓰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왜 이 전체 예산을 현실성 있게 안 늘리나?

박근혜 정부에서 문화체육관련 오만 데 다 건드린 최순실도 손 대지 않은 업계가 출판계인데 (왜겠나. 자금 규모가 너무 하찮으니 안 했겠지) 얼마 안되는 돈도 무조건 감사합니다. 떨어지면 내가 잘못했겠지. 라고 반성하며 그래도 작년보다 1억 올랐으니까, 그래도 작년보다 더 뽑네 하며 기다리는건가.

아 고구마 백만개.

올해 국회문화체육관광위원회 상임위원장은 도종환이다.
출판과 작가에 대해 모른다고 할 수 없는 사람.
다 같이 가서 드러눕자.

2021. 2. 24.

[책]임계장이야기

임계장은
임시 계약직 노인장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신의 직장이라는 공기관에서 37년을 일하고 은퇴한 조정진 씨가 남아 있는 자녀들의 학자금과 생계때문에 다시 일자리를 찾는다.
그의 나이 60세.

책의 도입부는 저자가 다시 돈을 벌어야만 하는 상황을 제시하여 생계의 압박을 알려준다. 퇴직하기 전 벌어놓은 돈은 딸의 혼사로 들어갔고, 퇴직금은 중간 정산하며 집을 사는 데 보탰다. 임금피크제의 적용을 받아 나머지 퇴직금을 받아서 남은 퇴직금은 없다. 아들이 전문대학원에 가겠다고 했다.

퇴직하고 나니, 신용이 사라졌다.
은행에서는 원금과 대출이자를 일시상환하라고 독촉하기 시작하고 직장에서도 복지기금으로 출연한 자녀들의 대학 학자금 대출도 갚으라고 했다.

지금은 신의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일지라도, 빚내어 집 한칸 샀거나 독립하지 못한 자녀가 있다면, 모두가 겪게 될 일이다.

책에서는 저자가 네 군데의 직장을 거치는 과정을 꼼꼼하게 묘사한다. 대단한 운동가이거나 세상을 너그럽게 이해하는 성인군자가 아닌, 나와 같은, 내 이웃과 비슷한 평범한 시민인 조정진씨는 임계장으로 불리는 일을 시작한다. 이 기록은 2016년 버스회사 배차원으로 일했다가 해고당하고, 아파트의 경비로 일하다 해고당하고, 빌딩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해고당하고, 버스터미널 보안요원으로 일하다 해고당하는 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가 2년간, 네 곳의 직장에서 해고된 뒤의 결과를 맨 마지막에 서술한다.

내가 가장 가슴터지게 복받치는 울음을 토해낸 부분은 맨 뒷면, 감사의 말이었다.
맨 마지막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가족에게 부탁이 있다. 이 글은 이 땅의 늙은 어머니·아버지들, 수많은 임계장들의 이야기를 나의 노동 일지로 대신 전해 보고자 쓴 것이니 책을 읽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더라도 마음 아파하지 말기 바란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책은 이 시대를 그리는 시사점뿐 아니라 구성이 좋고 잘 쓰고 잘 만든 책이다. 모든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임계장이야기 / 조정진 지음
우리시대의 논리27 / 후마니타스 펴냄

[책]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간다.’

과거로부터 온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이야기를 온전한 자기 삶으로 바라보는 홈리스의 이야기.

제주도 출신으로 보육원에서 자라 조소작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IMF이후 일자리를 잃고 18년간 홈리스로 산 임상철 씨의 글 모음집이다.

6년간 빅이슈를 파는 빅판으로 활동했던 임상철 씨는 잡지를 사주는 사람들이 고맙고 자기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매달 자기가 파는 빅이슈에 글과 그림을 그려 A4용지에 출력해 끼워 넣었다. 그렇게 보인 52통의 편지. 과장도 증오도 원망도 없는 덤덤한 홈리스의 이야기.

왜 살아야 하는가 묻는다면,
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을 생각하면 된다고 말해줄 수 있겠다.

참고할만한 유튜브 영상
https://youtu.be/wt9Ua7aht4g

지금은 조각가로 살고 계신 듯 하다.

<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
임상철 글/그림, 생각의 힘 펴냄

2020. 5. 24.

임상철지음 / 생각의 힘 펴냄

한심한 독서

1.
글자를 읽기 시작한 건 너댓살 무렵이다. 당시엔 그 나이에 글자를 읽는 아이들이 별로 없어서 신동소리를 들었다. 적어도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꽤 많은 분들이 동일하리라 생각한다.
처음으로 읽는 책이 국민서관의 <신데렐라>였다. 참으로 한심한 동화다.

7살엔 사촌오빠네서 얻어온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백과사전을 읽었다. 읽는 책인 줄 알았다.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48권짜리 위인전집을 읽었고 그 다음에 전래동화집을 읽었다.
지금 생각해도 잘 읽었다 싶은 건 전래동화전집이었다. 나머지는 차라리 읽지 않고 나가 노는 게 나았다.

초등학교 5학년때는 읽을 게 부족해 세로로 된 책이나 어른들 책도 읽었다. 선데이서울도 읽었고 뺑끼통도 조금 읽었던 기억이 있다. 세계걸작 다이제스트를 읽은 건 누군가 읽지 말라고 뺏었어야 했다.

초등학교 때 독서대회를 한 달간 했다. 상 받으려고 얇은 책만 골라 읽고 독후감을 날림으로 썼다. 한 달동안 53권을 읽고 전교 1등을 했다. 목적은 상장이었지 책 읽는 게 아니었다.

중학교때는 성경을 두 번쯤 읽고 휴거를 주장하던 다미선교회의 책과 두란노서원과 말씀사에서 나온 종교서적을 열심히 읽었다.
성경을 읽은 것 외에, 쓰레기를 읽느라 시간을 많이 보냈다. 차라리 연애나 하든가 연예인 팬질이 나았다.

진심으로 책을 읽은 건 중•고등학교 때였다. 한국근대문학을 많이 읽었고 정신세계사의 책을 읽고 몇 달을 앓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난 뒤에 매일 먹고 사는 문제로 괴로운 주제에도 책은 읽었다. 무언가를 읽고 쓰는 일은 매우 당연한 일상이라 무시로 읽고 썼다. 쓰는 건 대부분 체계없는 일기였다.

중국으로 공부하러 건너간 다음에도 교보에 해외 책배송이 생기자마자 생활비를 탕진해가며 책을 샀고 한국에 들를 때마다 40kg를 채워 배낭에 넣어 지고 비행기를 탔다.

2.
문제는 이때쯤부터 시작되었다.
책을 읽고 싶었던 게 아니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영화를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읽으며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는데 독후감을 위해 책을 읽게 되었다.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쉽고 흔하게 말하는 트라우마나 컴플렉스 따위였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술과 책을 골랐다.

결혼을 하고 난 뒤에 책 사는 일이 더 쉬워졌다. 돈을 벌지 않아도 책 살 돈이 생긴 건 노다지 금광을 발굴한 셈이었다. 책을 읽으며 엑셀에 리스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서관이 가까이 있었으나 ‘구멍난 가슴’을 메우기 위해 책을 사제꼈다. 결혼 후 2년차부터 읽는 책보다 사는 책이 많아졌고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책 집착은 도를 넘어섰다.

엑셀에 칸을 채우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쉽고 얇은 책을 읽어야했다. 1년 목표를 100권으로 잡고 2006년부터 꾸준히 목표를 달성했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는 매년 200권이 넘는 책을 읽고 리스트를 정리했다. 심할 때는 하루에 여러 권을 읽었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읽지 않으면 안된다는 압박이 있었다.

이 시기에 읽은 책은 대부분 글자만 읽었다. 책을 더 보관할 수 없어서 박스채 팔거나 여기저기에 기증을 했다.

책 읽는 속도는 당연히 빨라졌고 머릿속에 남는 것은 없어졌다. 책을 사들이는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졌다.
사실 알라딘에서 책을 산 게 몇 년 안된다. 이 시대의 지식분자들은 다 거기서 책을 사는 거 같아서 거기서 산 것 뿐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책을 읽고 싶어서 읽은 게 아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남들에게 나는 이만큼 읽었다고, 이런 것도 읽는다고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내면에 곯아가는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할 지 몰라 그저 앉아서 활자만 읽었다.
오래전에 그만둔 방송통신대에 복학을 했다가 1학기만에 그만두었다. 책 읽을 시간을 줄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런닝머신 위에서도 책을 읽었다. 실내 사이클 위에서 책을 읽어야 했기 때문에 수영장을 다니지 않았고 언제나 가방엔 한 권 이상의 책이 있었다.

집안은 책으로 점점 좁아져갔고 알라딘에 지불하는 돈은 점점 많아졌다. 그럴수록, 머릿속에 남은 건 없어졌다.

집주인과의 갈등도 본격화되었다. 두 번 읽지 않은 책을 사들이는 이유에 대해 추궁했다. 매달 몇 십만원 어치의 책을 사서 쌓아두었다가 다시 어디론가 처박는 일이 반복되었다.

아이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아이의 책을 사들이는 일에도 집중했다.
그저 다 돈지랄이었다.

3.
2013년부터 엑셀에 리스트를 만드는 작업을 그만두었다. 제일 소중하게 여기던 파일인데 지금은 어디다 처박아뒀는지도 모른다.
읽는 책의 권수는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책을 사는 수량은 여전했다. 어설프지만 책 만드는 일을 하면서 필요한 책은 더 늘어났다.

여전히 책을 사고 있었지만 책에 집착하느라 일상을 무너뜨리는 일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해 몇 명의 정신과 전문의와 진지하게 상담도 했다. 술을 못 마시면 활자를 읽었다.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삶의 위기가 오면 급격하게 책 구매액이 늘어났다. 택배가 올 때가 되면 뭘 샀는지 기억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일을 하고 돈을 벌면서 모조리 다 책값으로 탕진했다. 그 책들이 지금 다 우리집과 퇴직한 회사의 작은 도서관 일부에 있다.

견딜 수 없어서 대형 붙박이 책장을 짰다. 도서대여점같은 슬라이딩으로 했어야 했는데 만드는 분이 벽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 했다. 도서대여점의 책은 얇고 가볍지만 내 책들은 그러하지 않으므로.

도서정가제 시행 한달전, 물욕이 폭발했다. 알라딘 할인을 받을 수 있고 무이자 할부가 잘 되는 카드를 새로 발급받았다. 폭풍처럼 택배가 밀려들었다. 알라딘 배송 아저씨는 급기야 짜증을 내기도 했다. 책 좀 나눠서 시키라고 박스를 던져놓고 가기도 했고 도서정가제가 언제 끝나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이 때 긁은 카드값을 나는 아직도 갚고 있다.

지금도 내 서재와 마루와 아이의 방은 당연하고, 거실의 테이블 위, 소파위, 안방의 침대 옆, 화장대 위, 식탁 위에도 책이 있다. 읽다 던져버린 책, 읽으려고 꺼내 둔 책, 읽고 안 치운 책.

올 해초, 1월달에 갈급증이 다시 생겨 한 달동안 빨리 읽을 수 있는 만화책과 동화책을 포함해 40여권의 책을 읽고 리스트만 기록해두었다.

그리고 3월부터 거의 책을 읽지 않고 근 10여년만에 최소수량을 매달 갱신하며 7월을 맞았다. 보름째 소설책 한 권을 읽고 있는데 한 편 읽고 던져놓고 애니팡이나 하다가 이해가 안된 구절을 다시 들춰 읽고 단편 하나를 두 번 세 번씩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4.
누군가는 무슨 개소리냐고 했지만, 나는 학력컴플렉스와 지적컴플렉스가 심했다. 이게 과거형인 건 이제는 그 컴플렉스가 극복되어 자신감이 생겼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시작된 것이다.

남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의 무기를 갈고 닦는다. 우연히도 나는 그게 책이 되었다. 라면봉지 뒷면의 조리법을 읽듯이 수많은 활자를 읽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그 모든 것들이 몸 속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라 하지만 그런 것 같지 않다. 기억나는 스토리가 없고 핵심도 다 날렸다.

최근들어 글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심층적으로 나눌 사람이 생겼는데 도대체 내가 뭘 읽고 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분명 천권이 넘는 책을 읽었는데 사실은 한 권도 안 읽은 것 같다. 녹아내린 책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나 그거 읽었어.
나는 이것도 읽었어.
나 좀 봐줘.
나는 이걸 읽어.
나는 이만큼 읽었어.

내가 책을 읽은 이유는 허세를 부리고 지적허영심을 만족시키려는 것이었지 주로 숫자를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내면의 들키고 싶지 않은 여러가지 문제들을 직면하지 못해서 내내 활자속으로 도망다니기만 했다.

한심한 독서를 중단했다.
이제서야 책을 읽고 있다.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놓친 부분이 없나 다시 읽고 문장을 곱씹어 보면서 가만히 여운을 느끼게 된 지금이, 이제서야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게 된 셈이다.

어릴 때의 독서편력을 들은 정신과 전문의는 그랬다. 외로웠을 거라고. 방임이 있을 때 활자에 천착할 수 있다고. 아이들은 친구와 노는 게 재미있고 가족과 교감을 나누는 많은 활동이 더 즐거운 것이지 책만 쳐다보는 것은 결코 친구와 노는 만큼 재미있는 일은 아니라고. 동생은 내 옆에서 그림을 그렸고 나는 동생 옆에서 책을 읽었다. 우리는 그렇게 자랐다.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마흔이 인생의 중반이라면 여러 방면으로 판을 바꾸고 있는 셈이다. 최근 몇달간 도서구입비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제 활자에 대한 집착은 내 정서상태의 척도가 된다. 기억도 나지 않을 글을 과자봉지의 성분분석표를 보듯 읽는 짓을 그만할 수 있으면 좋겠다.
죽기 전까지 못 읽고 가는 책이 있어도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끝.

2015. 7. 8.

국가란 무엇인가 – 유시민

왜 누구는 보수주의자가 되고 누구는 진보주의자가 되는가? 베블런의 이론에 따르면 생활환경의 변화에 강하게 노출되는 사람이 먼저 새로운 사유습성을 받아들인다. 사회는 개인으로 구성된다. (중략) 그런데 생활환경의 변화가 몰고 온 충격이 모든 개인에게 똑같이 전달되지는 않는다. 어떤 환경의 변화를 긴급한 상황으로 인식한 사람은 새로운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신속하게 받아들인다.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의 여집합(餘集合)이다. 보수주의자는 기존의 지배적 사유습성과 생활양식을 그대로 따르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서 보수주의가 기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의 변화에 의해 강요당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모두 영원히 보수주의자로 살아갈 것이다. 보수주의는 특정한 계급의 독점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속성이다.

(중략)
베블런은 유한계급은 부유하기 때문에 혁신을 거부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해서 보수적이다. 혁신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일이며 상당한 정신적 노력을 요구한다.

(중략)
풍요로운 사람들은 오늘의 상황에 불만을 느낄 기회가 적어서 보수적인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보수적인 것이다. 생활환경 변화에 적당한 압력을 느끼면서도 학습하고 사유할 여유가 있는 중산층에서 주로 가장 뚜렷한 진보주의 성향이 형성되고 표출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기존의 제도와 사유습성에 노출된 기간이 짧으며 지적 활동이 상대적으로 왕성하다. 기존의 사유습성에 대한 집착이 덜하고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가 풍부하다. 반면 나이가 들수록 기존의 사유 습성은 더욱 강력한 지속성을 지니며 그것을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는 부족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 필연이다.

진보주의에 매혹을 느꼈던 젊은이가 나이가 들면서 보수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운명이다.

(중략)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보수주의는 생물학적 본능이고 진보주의는 목적의식적 지향이다.

보수주의는 현존하는 지배적 사유습성을 지키는 것이다. 익숙한 것을 수용하고 낯선 것을 배척하는 인간의 본능에 부합한다. 쉽게 단결하며 잘 무너지지 않는다. 무녀져도 단시간에 수월하게 복원된다. 반면 진보주의는 새로운 사유습성을 창조하여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운동이다. 진보는 본능을 거슬러 간다. 그래서 쉽게 단결하지 못하며 작은 오류만으로도 쉽게 무너진다. 한 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어렵다. 진보는 바람을 거슬러 나는 새,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다. 열정과 신념이 무너지면 바람에 날리고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된다.

– 국가란 무엇인가 – 유시민 / 진보정치란 무엇인가에 실린 글 中 발췌

강권하고 싶은 책 – 백년만의 북 리뷰 :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해로운가

제임스 길리건 / 교양인 펴냄 / 13,000원

영어 원제는 Why some politicians are more dangerous than others. 
국내에서 처음 소개되는 학자인데, 미국에선 violence와 preventing violence를 집필하여 출간한 바 있는 정신의학자이다. 

 굳이 이 책들의 표지까지 갖다 붙인 것은 듣보잡이라고 공격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소개 : 1966년부터 2000년까지 34년간 하버드대 의대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뉴욕대 정신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수십 년간 폭력 행동의 심리적 메커니즘과 폭력 예방책을 연구해 온 폭력 문제의 권위자이다. 
하버드대 법정신의학 연구소 책임자로서 1977년부터 1992년까지 매사추세츠 주 교도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폭력 예방을 위한 사회심리학적 프로젝트를 실시해 교도소 안의 살인율과 자살률을 획기적으로 떨어뜨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91년 하버드 대학에서 ‘폭력의 뿌리’라는 주제로 강의한 뒤 그 내용을 정리해 <폭력: 국가 전염병에 관한 성찰>로 펴냈다. 이 책은 폭력의 심리적, 사회적 원인을 분석한 문제작으로 꼽히며 지금까지도 폭력 연구에서 교과서적 저작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2000년에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으로 청소년범죄예방위원회를 총괄했으며, 2005년에는 국제연합(UN) 총회에서 발표된 아동 폭력에 관한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다.  – 알라딘 출처 

이 책은 폭력치사 (자살과 살인)와 각 정당의 집권기에 이상한 수치 변화가 있는 것을 관찰한 정신의학자의 보고서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사실과 수치를 토대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에 집중한다. 


간단하게 말해, 제임스 길리건이 표시한 수치의 그래프는 다음과 같다.

공화당이 집권하는 시기, 폭력치사 수치는 상승한다. 

민주당이 집권하는 시기, 폭력치사 수치는 하강한다. 

이러한 공통된 통계가 나오는 이유는 두 정당의 정책 때문이다. 
사람들은 개인을 보고 투표하는 경우가 있으나 명백하게 정치인은 정당에 속해 있으며, 이 두 정당의 정책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폭력성을 증대시키기고 감소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길리건이 대전제로 깔고 가는 것은 살인과 자살은 같은 종류의 폭력행위라는 것이다. 
사실 살인이라는 대범위안에 나는 타살과 자살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공격성이 내면으로 향하는 자는 자살을 하는 것이고, 외부로 나가는 사람은 타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신의학자는 아니자만)
폭력성과 공격성을 띈 심리상태에서 타해(폭행)을 가하는 사람이 있고 자해를 하는 사람이 있다. 
이 것은 폭력과 공격성의 분출 방향이 다를 뿐이지 그 기저는 같다고 생각하는 바이므로, 나는 제임스 길리건의 대전제에 동의한다.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서 이러한 여러가지 통계수치들을 이야기하고 책의 중반부에서 그 차이점이 벌어지는 이유를 말한다.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진영과 공화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진영의 차이점은 죄책감과 수치심의 차이로 정리한다. 언뜻 보면 이 두가지 심리는 같은 것으로 보이지만, 명백히 다른 심리상태이다. 


수치심의 윤리는 수치와 굴욕이, 다시 말해서 불명예와 치욕이 가장 큰 악덕이고 수치의 반대, 곧 자부심과 명예(존경)가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죄의식의 윤리는 죄가 가장 큰 악덕이고 죄의 반대, 곧 순결이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자부심 (교만)이다.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누르고 겸손을 품는 길의 하나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하고, 반대로 수치심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끌어올리고 자신의 수치심과 열등감을 누그러뜨리는 길의 하나로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신분에 있는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한다는 것이다. 


이 것을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고 수치심의 윤리에 젖은 사람은 강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다. (132-133쪽) 


그러니, 이러한 성향이 정당 지지에 대해 확연한 차이점을 가져오는데다가 극 정당을 구성하는 인력들의 기본 정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보수정당은 경쟁을 부추키고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며,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 시켜 상류층을 역으로 보호하는 정책 “이중정복(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로마의 대표적 정책)”을 사용한다. 


정치경제학자 더글러스 힙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민주당 정부는 실업을 줄이고 성장을 끌어올리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팽창 정책을 추구하기 위해 높은 물가 상승률을 무릅쓸 가능성이 공화당 정부보다 높다.(중략) 1951년 이후 일어난 여섯번의 불황 중에서 다섯 번이 .. 공화당 정부때 일어났다. 이 경기 위축은 하나 같이 .. 인플레이션과 싸우느라 의도적으로 만들어졌거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기업가집단이 상당히 폭력적이고 경쟁위주에 익숙해, 진보집단과의 윤리 도덕적 결정에 대해 상이한 차이점을 보이고, 보수집단은 기업가 집단과 유사함을 예로 든다. 다시 말해 이러한 보수집단은 폭력치사사건을 개인의 문제로 귀결시키는 반면 진보집단은 사회시스템의 문제로 공론화 시키는 경향이 크다는 주장이다. 

공화당 집권기에 폭력치사 사건이 증가하는 것에 대해 개인의 실업률과 빈부격차의 차이에 크게 주목하는데, 보수집단을 지지하는 지도를 그려봤을 때 옛남부(Old South)와 거친 서부(wild West)로 집중된다. 이것은 ‘카우보이와 인디언’이라는 역사적 유산과 상징과 결부된 주들이 여기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보수집단 – 권위주의적 인격 – 수치심에 젖은 사람 – 경계선 성격장애, 나르시시즘, 편집증, 반사회적, 우파권위주의의 인격구조 – 노예제도가 있던 11개 주(옛남부), 켄터키, 오클라호마 같은 2개 접경주, 서부 산악 주와 사막 주, 대부분의 중서부 대평원 

진보집단 – 평등주의적 인격 – 죄의식에 젖은 사람 – 우울증, 강박관념, 도덕적 마조히즘 유형 – 두 해안지역, 태평양 연안주와 북대서양 연안 주, 뉴잉글랜드와 위스콘신, 미네소타 (스칸디나비아 유산이 강한 북중부), 일리노이, 미시건 등. 

공화당은 경제에 강하고, 민주당은 경제에 약하냐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저자는 실업률과 실업지속도가 단 한 번의 예외없이 모든 공화당 정부때 올라갔고 모든 민주당 행정부 때 내려갔다는 것을 말한다. 
불황의 경우, 민주당의 불황은 86개월, 공화당은 246개월의 수치가 나타났으며 공화당은 정권을 잡은 동안 민주당보다 매년 2.3배나 더 긴 불황을 가져왔다는 통계수치를 이용한다. 
“공화당이 민주당으로부터 물려받은 단 한 번의 불황은 111년동안 1921년 단 한 번 일어났는데 겨우 4개월만에 끝난 반면, 민주당이 네 명의 공화당 대통령으로부터 물려받은 4번의 불황은 끝나는 데 모두 27개월이 걸렸다. “

말하자면 저자가 인용한 내용 그대로 “공화당 열성 지지자들로부터 높은 소득세, 높은 자본 이득세, 높은 법인세, 높은 사망(상속)세와 과도한 규제로 경제 성장을 질식시키는 경쟁자 민주당과는 달리 자기네 정당은 경제를 성장시키는 정당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것은 모두 개 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정책의 차이가 실업과 불황을 가져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개개인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증폭시켜 자살과 살인같은 폭력치사가 전염병처럼 창궐하느냐 마느냐의 여부를 결정짓는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저자는 상당한 진보주의자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정치적인 것보다는 이 사람은 정신의학자로서 폐쇄된 교도소에 대한 긴 연구기간, 그리고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연구를 하다 보니 인간은 폭력에 노출될 수록 폭력적이 되고 (비폭력적인 범죄자를 가장 폭력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교도소 수감이다. 라는 주장) 그 폭력은 인간의 취약한 심리,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에 대해 연구를 지속하다 보니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연구가 민주당이나 미국내 진보세력들에게 상당히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은 뻔하다. 

책을 읽는 내내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이라고 생각해봤으나, 
기껏해서 50년 남짓 된 공화제 정부(민주주의라고 보긴 어렵다) 체제하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것은 말하자면 김영삼 정부때부터라고 볼 수 있는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고작 네 명의 대통령을 거치면서 어떤 특정한 통계를 갖기도 어려울 뿐더러, 이 중에 과연 진보정당이라고 할 것이, 김대중, 노무현..정부도 과연 진보정당집권기였는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혹자들은 박정희 시대에 경기부양책으로 인해 이 나라가 잘먹고 잘살게 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일일이 수치와 통계와 그 후의 벌어진 후폭풍 (지금까지도 이어지는)에 대해서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설득하려면 2-3일 가둬놓고 가르쳐도 모자랄 판이다. 게다가 이 나라에서 이제서야 갑론을박 하고 있는 진보타령에 대해서도, 사실 진보.. 라기 보다는 중도진보..라든가 대부분이 보수우파인 나라에서, 과연 좌파..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가. 이건 물론 상대적인 기준을 갖다 대면, 우리나라에서 그만하면 좌빨진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좌파의 원류인 유럽에 갖다 대면 당신은 국수주의자요. 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상황이니 적용하긴 어렵다. 

그러나! 

최근들어, 불거지는 여러가지 이익집단(이라고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겠다만, 개개의 분열된 사회문제들)들의 갈등에 대하여, 공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진보적 성향을 띈다.이 현상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진보들은 “공감능력이 뛰어나게 발달한 사람들”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데, 제임스 길리건은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다고 정리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경쟁을 선호하고 강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본인은 전혀 상류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저 수치심을 더 강하게 느끼는 성향을 타고 났거나, 살면서 발달된 것일 뿐. 그게 옳고 그름의 문제로 치부하긴 어렵다는 것이지만, 
사회가 적어도 살만하게 돌아가려면 보수집단의 집권이 그닥 유리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 2010년에 발표된 이 나라의 통계 하나를 적어보겠다. 

한국인 2010년 한 해동안 1만 5,566명 자살, 
인구 10만명당 31.2명 자살 OECD 1위, 
세계 2위(1위가 궁금한가. 1위는 리투아니아였다. 평균 남성 70명, 여성 14명이 자살한다고 한다. 
10-30대 사망원인 1위 자살, 
출산율 222개 나라중 217위

이 책을 번역한 이희재씨의 글이 읽을 만 하여 뒤에 적으며 글을 마무리하겠다. 

“분할 정복 전략이 주효하려면 범죄율이 높게 유지되어야 한다. 범죄는 주로 못 사는 사람이 저지르고 그 피해도 주로 못 사는 사람이 입는다. 잘사는 사람은 사설 방범업체가 철통같이 지켜주므로 범죄율이 올라가도 피해를 별로 보지 않는다. 절대 다수의 못사는 사람들은 범죄에 그대로 노출되므로 범죄를 저지르는  똑같이 못사는 사람에 반감을 품고, 말로만 범죄 엄단을 내세우는 공화당을 찍게 마련이다. 

길리건 박사는 미국의 중산층과 서민 99퍼센트가 좀 더 사람답게 살려면 1퍼센트의 분할 정복 전략에 휘둘리지 말고 어떤 당이 99퍼센트를 위한 정책을 내놓는지를 보고 투표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중요한 것은 정당이 추구하는 정책이지 인물이 아니다. 

[2010년 통계 인용] 한국은 잘 사는 사람에게는 천국이고 못 사는 사람에게는 지옥임을 높은 자살율과 낮은 출산율이 말해준다. 

자기 목숨을 끊는 행위를 지금은 자살이라고 하지만 예전에는 자진(自盡) 이라는 말을 썼다. 진이 빠져서 당하는 죽음, 어쩌면 한국인의 자살은 배경없고 힘없는 개인에게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안기면서 극단적 경쟁을 강요하고 소수의 상층부에게는 권력과 금력의 무경쟁 세습을 무한정 허용하는 불공평한 경쟁 지상주의 사회에서 버틸대로 버티다가 탈진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택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2012.2.28.

총선이 얼마 안 남았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민주통합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다. 
아 물론 당명을 바꾼 새누리당도 절대 진보정당이 아니다. 
여기까지. 

황천의 개 – 후지와라 신야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492529

신야의 책은 처음이다.
제목이 맘에 들어 골랐다.
황천의 개라니 이렇게 냉소적일 수 있는가.

후지와라 신야가 <청년플레이보이>지에 실었던 에세이를 묶었다.
그는 아사하라쇼코라는 옴진리교 교주에 대한 탐색으로 시작하는데
그가 미나마타병의 희생자였다는 친형의 증언을 진즉에 얻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친형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약자가 되었다는 입장을 고려해, 만코(쇼코의 형)가 죽은 다음에 글을 완성해 책을 묶어냈다.

뭔가 연결이 되지 않는 듯한 몇 편의 글이지만 그 중심은 같다.
후기산업사회에 아주 일찍 돌입한 일본의 오늘을 지배하는 철학(?)과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할 것인지 그의 존재 자체가 말해준다.

젊을 때 떠났던 인도의 여행에서 얻어온 것들과 삶과 죽음, 진실과 허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마치 비슷한 시절 인도를 다녀온 후지와라 신야의 삶과 아사하라 쇼코의 삶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읽고 나서 퉁 – 하는 책이 있다.
이 책이 그런 책이다.

2011. 11. 27.

겨울밤- 신경림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 신경림 시전집 1권 농무 / 16쪽 – 17쪽.

건국의 정치 – 김영수


철학적인 의미에서 정치 공동체의 궁극적 목적은 ‘잘 먹는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이다. 
그러나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국가는 ‘필요’의 영역이며, 필요중 가장 일차적인 것은 ‘식량’이다.
중국의 전통적 사유에 따르면, 백성의 복질은 ‘욕망을 가진 존재’이다. 
그렇게 때문에 유가에서는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으며,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라고 주장했다.
또는 “먹는 것은 백성의 근본이요, 백성은 나라의 바탕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토지는 백성의 하늘이다.
이 때문에 맹자는 仁政은 밭둑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국가의 ‘선’은 백성들의 필요를 얼마나 만족스럽고 정의롭게 해결하느냐에 좌우되는 것이다. 


/


위기의 시대란 반드시 토지 소유의 극심한 불균형과 때를 같이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시대의 반란 세력이 고창한 정치 이념은 공통적으로 균평(均平)이었다. 공자 역시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한다’고 말했다.


/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공민왕의 말처럼, 고려는 대규모 전쟁을 승리를 이끌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왜구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즉 고려 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에서 한계에 도달했던 것이다. 국가는 백성들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할 수 없었으며, 생활을 개선할 능력도 없었다. 따라서 왜구 문제의 개선은 개혁파들의 국가 운영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


夫何同心友(부하동심우)  마음을 같이한 벗이
各在天一方(각재천일방)  하늘 한구석에 각각 있는지
時時念至此(시시염지차)  때때로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不覺今人傷(불각금인상)  저절로 사람을 슬프게 하네.


鳳凰翔千仞(봉황상천인)  봉황새는 천 길을 높이 날아서
徘徊下朝陽(배회하조양)  돌고 돌아 조양으로 내려가는데
伊人昧出處(이인매출처)  이 사람은 출처에 너무 어두워
一動觸刑章(일동촉형장)  한번 움직이면 법에 저촉 저촉되누나.


芝蘭焚愉馨(지난분유형)  지란(芝蘭)은 불탈수록 향기 더하고
良金淬愉光(양금쉬유광)  좋은 쇠는 갈수록 더욱 빛나는 것
共保堅貞操(공보견정조)  굳고 곧은 지조를 함께 지키며
永矢莫相忘(영시막상망)  서로 잊지 말자 길이 맹세를 하세.




[출처] 次韻寄鄭達可夢周(차운기정달가몽주).鄭道傳(정도전)


/


길재는 자신의 은거가 단지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키는 것 이상으로 유학의 순수한 정신을 보존하기 위한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가 진리와 분열될 때 취하는 제 2의 태도이다. 한말의 유학자 전우(田愚) 역시 망국을 당하여 제자들과 함께 서해의 고도로 떠났다. 
(중략)


그들 모두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상주의자였으나, 역사는 항상 순수한 전형만을 미래의 것으로 남겨놓는다. 그러나 신은 이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두 종류의 제물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순결한 제물이며, 다른 하나는 상처받은 제물이다. 


순결한 제물은 역사의 성화(聖火)를 위해, 상처받은 제물은 역사의 현실을 위해 소용된다. 인간은 상처받은 제물 역시 신의 현현임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신의 순수성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신의 고뇌를 이해한다면, 인간은 상처받은 제물을 위한 변명의 자리도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에서 상처받은 자들을 위한 역사의 작은 위로라고 생각한다. 


– 김영수 “건국의 정치” 마지막 문장.






가끔 남들에게 막 강요하고 싶은 책이 있다. 
이번에 읽은 김영수 쓰고, 이학사에서 펴낸 건국의 정치:여말선초, 혁명과 문명 전환이 그러한 책이다. 


조선의 건국 이전 고려말기의 상황을 일일이 꼬집어 보되 
정치학 전공자 답게 정치학적 관점에서 풀이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엄청나게 많은 문장들이 적용된다. 


문학적인 미려한 문장과 깊이 있는 통찰의 철학이 매력적이다. 
약 80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흥미있는 사람이라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2011. 10. 31.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7350886  알라딘 책소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