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규칙

눈 내리는 오후, 늦게 일어난 탓에 끼니를 거르고 약속장소로 갔다.
만나기로 한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60번쯤 겨울을 겪은 사람.
그가 대부분 잊었을 17년전 기억을 끄집어내어 상기시켜주어야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었다.
공공기관의 2층에 있는 무인까페.
미리 보내준 서류를 읽지 못했다기에 출력해 간 같은 서류를 넘겨주었다.
그가 집중해서 서류를 읽는 사이, 나는 1500원을 카드로 결제하고 큰 종이컵에 커피를 한 잔 뽑아왔다. 내가 커피를 가져온 후에도 그는 진지하게 서류를 읽고 있었다.

내가 앉은 자리는 공간의 정중앙에 놓인 TV가 보이는 자리였다. TV는 켜져 있었고, 몽골로 보이는 화면이 흘러갔다. 어린아이가 초원을 뛰어놀았고, 여자와 남자들, 염소인지 산양인지 모를 짐승들이 지나갔다.
고개를 잠깐 숙였다가 들었더니 화면 속의 사람들이 흰털의 그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있었다. 벌겋게 드러낸 짐승의 속살, 화면이 바뀌어 내장을 꺼내고 그 안에 고인 피를 사람들이 쓰는 양동이에 옮겨 담았다.

내가 그를 만난 이유는, 17년 전 시작된 일이 왜 이제야 완성이 되었는지, 그동안 어떤 욕망들이 오갔는지, 찬성하는 사람들의 명분은 또렷하고 단순한데, 반대하는 이들의 명분은 왜 그렇게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었는지, 그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사실 나는 반대자들의 이유를 알지 못해도 그만이지만, 알고 싶었다. 욕망의 실마리를 잡아보려고 간 자리에서 살아있던 생명이 고기가 되어가는 압도적인 화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창밖에 내리는 흰 눈을 맞으며 멀리 달아나고 싶어졌다.

약속장소 바로 앞엔 샤니 빵공장이 있었다. 언제였더라. 인터넷에서 본 곳인데, 여태 경험한 중에 가장 최악의 근무지였다고, 샤니에서 보름을 견디면 어디든 견딜 수 있다고. 그런데, 그 이야기는 택배상하차가 생기기 전의 글이었던 거 같다. 보름을 견디면 어디든 견딜 수 있는 곳의 어디는, 어디일까?
집에 오는 길, 운전을 하던 박부장이 다시 한번 가고 싶은 곳을 말했다. 오늘 같은 날이어야 하는데. 우리가 갔던 곳 중, 눈이 와야 더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이나, 도담삼봉같은 곳 말이다.

한 지역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몇 가지 승자와 패자의 규칙을 찾았다.

첫 번째는 며칠전에 적은대로,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던 사건들은 결국 10년이나 20년을 두고서라도 그 물증들이 나타나는거다. 스스로의 행동이 물증이 된다. 대부분 올바르지 않은 행동들이라, 결국은 잘 드러난다. “의심스럽던 자들”은 욕망을 감춰서 이슈를 이슈로 덮는 데는 능숙하지만, 결국 어느 순간 덮을 이슈가 없어지거나 궁극적으로 욕망을 실현해야만 하니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간이 걸릴 뿐이지.

두 번째는, 내부총질을 하는 자는 필패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이 나라의 특성인지 모르겠으나, 내부고발과 내부총질은 다르다. 공익을 위한 고발이나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돋보이고 싶어서, 앞서 가는 자를 추월하고 싶어서, 등 뒤에서 “저 자에게 구린내가 난다”고 떠들어대던 자는 부활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단순하고 정확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이유로 싸우는 사람들이 이긴다는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이것은 공익과 꼭 연결되지 않는다.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고, 어쩐지 의심스러운 이유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지키려 했던 ‘보이지 않는 그 무엇’ 때문에 소멸하고 만다.

내가 찾은 이 싸움의 논리들이 완전히 틀려먹었을수도 있을테니, 앞으로도 잘 지켜봐야겠다. 어떤 싸움들이 결국 승리하는지, 알고 싶다.
갑자기 징기스 칸이 생각나네.

2020.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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