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겨울 빨래

https://www.vop.co.kr/A00001461784.html

2020년 1월 19일 민중의소리 발행

그해 겨울, 생애사쓰기 수업을 했던 한 복지관에서 연락이 왔다. 복지관 이용자 중 복지지원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면담이 잘 안된다면서 면담을 진행해서 글로 정리해달라는 것이었다. 약간 의외의 일이었다. 구술생애사기록정도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흔쾌히 응했다. 다섯 명의 사람을 2주에 걸쳐 여러 번 만났다.

후드티를 뒤집어쓴 한 여성이 면담 장소인 작은 회의실로 들어왔다. 면담자 정보를 보니 나이는 40대 후반이었다. 내가 만날 사람들 중에 가장 젊은 사람이었다. 가난이 지워지지 않는 눈물자국처럼 옷섶에 묻어있었다. 이 사람은 깍지 낀 손을 계속 조물락거리며 바빠서 나오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빨래를 하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겨울철에 빨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툭툭 끊어지는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수도가 손 닿는데에 있는 게 아니고, 저 위에 있으니까,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꼭지를 열었다 잠갔다 해야되거든요. 쪼그려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물 다시 틀고, 잠그고, 그나마 수도가 안 얼어서 다행이지. 밖이 추우니까. 세탁기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세탁기 들어갈 자리도 없고.”

겨울 수도
겨울 수도ⓒpixabay

서울시내 한복판, 재개발이 임박한 그 마을에는 수십 채의 집이 남아있었다. 어떤 집들의 대문에는 “철거”라는 글자가 붉은 스프레이로 쓰여 있었다. 대부분 마을을 떠났고,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가스보일러가 있지만 빨래를 하는 수도에는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아파트 같은 데는 좋지요? 뜨거운 물도 사시사철 나오고. 보일러 조금만 때도 엄청 따뜻하다던데. 임대 간 사람들이 얘기하더라고요.”

백 씨. 이 사람은 가난했다. 아들이 둘 있는데 둘 다 지병이 있었다. 백씨는 두 아들의 병이 질환인지 장애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쓰러지는 병이라고만 했다. 뇌전증 같은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게 뭐냐고 되물어서, 간질을 요즘은 뇌전증이라고 한다고 말해주었는데 그건 아니라고 했다. 아무튼 걸핏하면 쓰러진다고만 했다. 남편은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이 같은 병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어 집을 떠났다. 백 씨의 말에 따르면,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남편이 떠난 이후로 생계를 책임지고 육아와 간병을 홀로 해왔다. 결혼 전에는 직장도 다녔고, 친구들과 어울려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춤추러도 가는 보통의 20대를 보냈다. 백씨는 아픈 두 아들의 엄마로 거듭나면서 세상과 단절되었다. 큰 아들은 스무 살이 넘었고, 작은 아들은 그때 고3이었는데 작은 아들은 취업을 할 수 있는 정도라서 직장을 얻었다고 좋아했다.

세 번을 만나는 동안 백 씨는 계속 너무 힘들다는 말을 반복했다. 자기는 정말 지쳤고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제는 자기도 늙었는지 온몸이 아프고 쑤셔서 무슨 일도 할 수 없다고. 공공근로도 나가봤지만 아들만 남기고 집을 비울 수가 없다고.

두 시간이나 길게 무슨 할 말이 있냐고 말했던 백 씨는 매번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조금 더 이야기를 하다가 갔다. 나는 백 씨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복지관에 넘겨주었다. 복지관에서는 백 씨가 필요한 복지혜택 중에 받을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냐고 반문했던 백 씨는 만나는 시간 내내 때론 즐겁게 때론 비통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겨울 빨래
겨울 빨래ⓒpixabay

즐거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할 때는 밝은 표정이 되었다. 자기가 살던 고향의 빛 좋던 들판과 부모님이 자기를 돌봤던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는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는 아이였다고 했다. 말 하는 것 자체를 꺼리던 백 씨는 ‘누가 내 이야기를 이렇게 들어주나’ 라는 말도 했다. 기득권이 될수록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아진다. 사회와 고립되고 단절될수록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줄어든다. 자기 삶을 쓰는 일도 무엇이든 더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하다. 더 많이 배웠거나 더 많은 기득권을 가질수록 자기 삶을 돌아보고 늘어놓을 기회가 더 많다. 백 씨는 그렇지 못한 사람 중 하나였다. 말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말하는 방법도 잊는다. 수십 번 자기 주장을 말해본 사람은 점점 더 잘 말하게 된다. 세상에 펼쳐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다.

어른이 되어도, 어미가 되어도 수십 번 마음을 고쳐먹기 마련이다. 조금 더 잘 살아야지, 조금 더 잘 해봐야지, 오늘부터는 밥을 건강하게 차려먹어야지, 아이에게 화내지 말아야지.

얼음이 얼지 않고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이 지나간다. 세탁기에서 편하게 꺼낸 빨래를 널며 손가락이 시릴 때 백 씨를 떠올린다.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을까. 나를 만났을 때 살던 집보다 빨래하기 편한 곳으로 이사를 갔으면 내 마음이 편하겠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