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

2019년 11월 14일. 민중의 소리 발행

https://www.vop.co.kr/A00001446084.html

“나는 내 이름 내가 지었지.
피란민으로 남한에 내려왔거든. 내려와서 동네 이장이 호구조사 나왔을 때, 이름이 뭐냐고 묻길래, 저는 이름이 김명자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어. 그 이름이 맘에 들었거든. 명자. 아끼꼬. 원래 어릴 때는 우리 아버지가 독자인데, 우리 할머니가 독자가 큰 딸을 낳아놓으니 이쁘다면서 이쁜아 이쁜아 이렇게 불렀지. 그래서 그게 그냥 이름이 됐어. 다른 이름이 없었던 건데, 호적에다가 이쁜이라고 올릴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내가 나는 이름이 김명자요, 라고 한 거야.

자,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잉?

먹고 살기 힘들어서 우리 할머니는 지금 내 나이만큼 되었을 때야.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딸을 일곱을 낳았다고. 내가 맏딸이고. 할머니까지 해서 우리 식구가 모두 다 남만주로 갔어. 거기 가서 딸을 하나 더 낳았지. 그래서 우리 집에는 딸이 여덟이 됐어. 나하고 밑에 동생 셋은 이름이 있는데, 나머지는 이름이 없어. 딸그만이, 딸그뿐이, 뭐 그랬어.

그 당시에 재수 좋은 사람은 헤이타산 끌려가고 재수 나쁜 사람은 정신대로 끌려갔어. 정신대 알아? 내가 그때 열여섯 살 먹었는데, 열여섯 살 먹어서 결혼을 하면 안 잡아간다 하길래, 그때 우리 살던 집 근처에 스물여섯 먹은 총각이 혼자 와서 살드라 이거야. 그래서 그놈하고 결혼을 했지. 그게 우리 영감이여.

일본놈이 언제 손을 들었냐 하면 음력으로 7월 초이레 12시였어. 중국에서, 몽고에서, 만주에서 일본놈 하고 미국놈 하고 싸움을 했어. 미국놈이 이기고 일본놈이 졌지. 그때는 중국에서 만주족들이니 몽고사람들이 우리를 막 창으로 찔러 죽여버린다고 해. 무서워서 우리는 너무 무서워서 거기서 살 수가 없어. 소련놈이 이북에서 정치한다고 하고, 미국놈은 이남을 정치한다고 해. 그래서 거기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이제 내려오는데 겨울을 내내 걸어서 여덟 달을 걸어서 내려왔어. 내려오는 길에 너무 추우니까 아들이 얼어버렸어. 서울에 도착했는데 아들이 얼어 죽어버렸어. 그래서 남대문에 죽은 거 버리고.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자료사진

그리고 그 담에 임신을 해서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이 일흔 넷이여 시방. 그 아이를 지 아부지가 딱 짊어지고 내려왔다고. 일본놈들이 면이란 면은 다 걷어가서 솜도 없고 이불도 없어. 여름옷도 없고. 그래서 홑이불 뜯어가지고 묶어서 애 아부지가 그 딸을 업고 내려왔다고. 그게 지금 일흔 넷이여.

여덟 달을 빌어먹으면서 내려오는데 한 번은 어디를 걸식을 하러 갔어. 밥을 뜩뜩 긁어서 밥풀만 줘. 그때는 양은그릇도 없고 다 투가리 들고 다녔어. 우리 밥 좀 주시오, 했더니 우리도 점심이 얼마 없응게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오, 하는 소리를 듣고 뒤로 돌아서는데 눈물이 비 오듯 하더라고. 날은 추워서 강가에서 바들바들 떨고. 그때는 우리 아들이 아직 안 죽었어. 밥을 얻어먹으면 한 숟갈, 두 숟갈 뜯어서 먹이고, 그래가지고 그 아들을 업고 내려왔거든.

여덟 달을 걸어서 내려왔어. 빌어먹으면서 내려왔어. 걸어서 여덟 달을 빌어먹으면서 내려왔어. 아들은 얼어서 죽어버리고. 죽은 거 남대문에 내다 버리고. 애 아부지도 내려오다가 얼어버려서 내려와서는 죽어버리고. 오는 데 추웅게 죽어버리더라고. 그때 내가 서른셋이여. 여태까지 내가 혼자 살았어.”

지금으로부터 6년 전, 한 복지관에서 만난 노인이다. 을축년 소띠 1925년생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총기 있었다. 남만주에서 내려와 서울에 자리 잡았던 주소도 줄줄 읊었다. 첫 수업때 아들이 죽은 이야기를 했다. 황해도에서 태어났다는 김명자옹은 먹고 살기 힘들어 남만주로 이주했다가 해방 이후 전쟁 즈음에 서울로 내려온 것 같았다. 말이 매우 빨랐고, 알아듣기 어려운 단어를 섞어 말했다. 변형된 일본어가 곳곳에서 튀어나왔고 나이 탓에 발음이 어눌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김명자옹은 첫 수업이후로 다섯 번을 더 만났다. 매번 수업이 끝날 때마다 나를 잡았다.

“선생님, 내 얘기 좀 들어봐.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항상 같았다. 남만주에서 추운 겨울을 견디며 여덟 달을 걸식을 하며 걸어 내려왔다. 남대문에 도착하니 등에 업은 두 살배기 아들이 얼어 죽었다. 남대문에 아기 시체가 쌓여있었다. 피난 내려오며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모아두었더라. 나도 거기다 아기를 던졌다. 묻어주지도 못했다.

아들의 죽음에서 멈춘 김명자옹의 삶
노인은 얼마나 많이 죽은 아들의 이야기를 했을까

내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담당복지사를 붙잡았다. “선상님, 내 얘기 좀 들어봐.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같았다. 구체적으로 상상하면 끔찍하고 처절해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얘기였다. 매주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사뭇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노인의 손을 잡았으나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더러 마음의 귀를 막았다.

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주최로 열린 세월호참사 전면 재수사, 국민고소고발인대회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9.11.02
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주최로 열린 세월호참사 전면 재수사, 국민고소고발인대회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9.11.02ⓒ김철수 기자

노인은 얼마나 많이 죽은 아들의 이야기를 했을까. 자기 옛 주소까지 기억하는 총명한 사람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처음부터 얘기한다는 것이 항상 남만주에서 걸어 내려와 등에 업은 아이가 죽은 것이었다. 그 사람의 생애 처음은 남만주가 아니었고, 아이가 죽은 일도 그 사람의 삶의 첫 장면이 아니었는데, 김명자옹의 처음은 남만주에서 걸어 내려와 아이가 죽었고, 그 아이를 묻어주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게 김명자옹에게는 삶의 전부였을 것이다.

상실은 사람을 멈추게 한다. 김명자옹은 묻어주지도 못한 얼어 죽은 아들 이후의 삶을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때 죽지 않은 딸이 일흔이 넘었다는 것 외에는.

아이들을 잃고 난 다음엔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누군가 애써 잡아끈다고 그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죽음은 그 무엇보다 무고하기에, 그 슬픔도 대책이 없다. 태연하게 “명복을 빈다”라고 말하기도 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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