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날 다시 오면

1.

아침일찍 욕실공사를 맡은 업체 사장님이 와서 콜타르와 비슷한 방수액을 바르고 갔다.
새벽까지 이제훈, 최우식, 박정민, 안재홍이 나오는 <사냥의 시간>을 절반정도 보다가 잤다. 첫 장면에 황폐해진 서울의 소공로가 나왔는데, 코로나로 인해 저 풍경이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길 건너 목욕탕은 찜질방에 없어 한 번도 안 가봤다. 들어가니 매표소에 사람은 없고 무인발권기가 있었다. 아무리 코로나시대라도, 매일 목욕탕을 들르지 않으면 밥을 굶은 것같이 여기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지라, 오늘도 너댓명의 직원과 너댓명의 손님이 있었다. 정기권을 끊고 다니는 사람들은 사실 직원인지 손님인지 구분이 안 갈 때가 있다. 목욕탕은 어딜가나 늘 뉴스를 틀어놓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나는 3단계로 빨리 가야 한다고 봐.”
“뭐 먹고 살으라고.”
“딱 2주만 하고 빨리 잡자는거지. 홍콩이 그렇게 잡았잖아.”
“교회가 문제야 교회가.”
“교회 소모임을 다 못하게 해야돼.”
“아니 근데, 지금도 응? 이 와중에도 자기들은 병이 안 걸린다고 하잖아. 교회 다니는 분들은 그래.”
“아휴 그러게나 말이야. 교회를 싹 다 닫게 해야돼.”

격한 발언은 없었지만, 교회가 문제라고 입을 모으는 걸 들으니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우리 교회는 안 그래요!’하면서 침 튀기는 사람은 이 안에 없겠구나.
기독교인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니, 이제 이 나라의 기독교는 끝까지 온 거 같다.

2.

원두가 떨어져서 고심 끝에 자주 가는 동네 카페에 가서 블렌드 원두를 샀다. 블렌드 원두는 200g에 오천원이다. 이집은 원두를 살 때마다 커피 한 잔을 내려준다. 오늘도 뭘 드릴까요? 묻길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받았다. 신 나서 사진도 한 방 찍고 편의점에 들렀다. 아침거리로 간단하게 뭘 살까 고민하다가 마땅한 게 없어서 담배만 두 갑 샀다. 사장님이 아이와 통화중이었다.
“일어났어? 밥 차려놓은 거 먹고. 수업 듣고, 영어 숙제 하라고.”
나는 씩 웃음이 나서 우리 아들은 아직도 자고 있다고 얘기했다.
중학생라 새벽 서너시까지 안 자고 오후 한 시나 되야 일어난다고 했더니 “밥 차려놔도 챙겨먹질 않는다”며 속상해한다.

편의점을 나왔더니 자전거가 무거운 가방 때문에 자빠져 있었다. 소중하게 받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바닥에 다 뿌려졌다.
자전거를 일으키는데 노년의 남녀가 헤어지며 “코로나 끝나면 밥 한 번 먹자.”는 대화를 하는 게 들렸다.

사무실에 들어와 쏟아진 아메리카노를 대신해 마시려고 물을 끓이는데 교육지원청 담당장학사에게 카톡이 왔다.
“국장님, 뉴스 들으셨지요? 9.11까지 원격수업이요. 저희도 방송을 통해 본 거라, 학교에서도 지금 고민이 많을 거 같습니다.”

3.

우리는 절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이 사람들은 증오와 혐오를 차차 늘려나갔고, 대면이 불필요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온라인으로 수업을 해도 청자의 표정이 보이면 어떤 생각을 하며 듣고 있는지 파악되기에 이르렀다. 온라인으로 사람을 느끼는 기능은 강화될 것이다.
그나마, 우리는 사람을 계속 그리워하고 있으며, 이 상황을 견딜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한 형태의 연대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게 긍정적이라 볼 수 있을까.
모두의 결핍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
수도권 병상이 7개 남았다는 뉴스 속보가 도착했다.
본 게임이 시작된 느낌이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아니라,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의 전쟁인 것 같기도 하다.

어른들은 자꾸 “좋은 날 다시 오면”이라고 말한다.
그 좋은 날은 이제 끝난 거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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