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 민폐

아침을 못 먹고 길을 나섰다.

요즘은 끼니를 거르면 속이 쓰려서 약속장소에 15분 먼저 도착하자마자 먹을 걸 사 먹을만한 곳을 찾았다. 커피집이 문을 열긴 했는데 샌드위치 같은 건 하나도 없어서 다시 나왔다. 근처에 편의점이 있었다.

편의점에 들어가자 물품을 가져온 사람이 냉장고 앞에서 진열을 돕고 있었다. 카운터에는 점주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는데 내가 냉장고 앞에 서서 주저하자 친절한 말씨로 손님 쇼핑 좀 하시게 잠깐만 비켜달라고 그에게 청했다. 샌드위치가 세 종류 있었다. 잠깐 고민하다 햄에그샌드위치와 따뜻한 캔커피를 샀다. 차에 가서 먹을까 하다가 서서 먹는 스탠드에서 얼른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이미 한 청년이 뭔가 뚜껑을 열고 있었다. 청년이 먹는 건 비빔밥이었다. 각종 채소가 들은 용기가 밥 위에 얹어져 있었다. 아침 9시 45분에 편의점에 서서 비빔밥을 먹는 청년은 하루가 끝난건지 시작하는건지 알 수 없었다. 창밖에 초등학생쯤 된 통통한 사내아이가 창문에 붙은 포스터를 한참 보다가 갔다.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은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선거 입후보자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커피로 입을 가시며 서둘러 약속장소로 갔다. 약속시간보다 7분 정도 늦은 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알아봤다. 그는 늦어져 미안하다며 오래 기다렸냐고 물었다. 그는 얇은 선거운동 점퍼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가방이 두 개쯤 들러져 있었다. 나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고 말하며, 시간이 촉박한 줄 알았다면 약속을 조금 여유있게 잡을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사무실로 들어선 그가 성급히 테이블위에 널부러진 것들을 치웠다.

“제가 요즘 아침에 선거운동하느라고요. 근데 애들이 어려서요. 아침인사 끝내고 집에 가서 애들 밥을 차려주고 나와야 해서요. 아휴.”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것같은 커피 드리퍼까지 가져와서 커피를 내려주겠다고 했다. 제대로 된 드립주전자가 없다는 걸 부끄러워했고 동료가 새로 가져온 원두인데 맛있다고 했다며 그럴싸하게 대접하지 못해 부끄럽다는 표현을 했다.

그는 컵을 뜨거운 물로 덥혀보려고 했지만 사무실 안에 개수대가 없어서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가 내려준 머그잔은 절반은 차갑고 절반은 따뜻했다. 커피는 대단히 맛있지 않았으나 그래도 최고의 맛이라고 생각했다. 한 시간 반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국회의원 입후보를 할만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이 있었고, 신념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10% 득표율을 넘지 못해 공탁금을 홀라당 날릴지도 모른다. 그의 얇은 잠바를 보고 있자니 다른 후보들이 입는 두꺼운 점퍼도 생각났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데 그가 서둘러 책을 두 권 챙겨주었다. 후원자가 수 십권을 사서 보내줬다는 “거래된 정의”와, 어린이 재활병원 설립운동에 관한 책자였다. 사무실 밖 공간에는 몇 몇 사람들이 모여 스터디를 시작했다. 나는 손님이 있으니 멀리 나오지 마시라 했으나 그는 굳이 문 밖까지 나와 나를 배웅했다.

진보정당의 국회의원 후보자도 아침밥을 차려야 하는 나라에서, 61세의 여성이 코로나19에 감염된 것을 모르고 전국으로 돌아다녔다는 뉴스가 하루종일 떠돌았다. 60년을 산 여자가 대구에서 서울까지 가야했던 이유와 교통사고로 입원중에도 자기 종교의 예배에 참석했던 이유가 뭔지 나는 잘 모른다. 밤늦게 틀었던 한 보도영상에는 재벌가의 아들에게 프로포폴을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 여의사와 간호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법적으로 그의 집에 가서 프로포폴 주사를 놓았던 간호조무사는 “엄마는 쓰러지시고, 아빠는 수술해야 하고, 돈이 필요해서 그랬다.”라고 했으며, 그 간호조무사의 상사인 병원 원장은 “우리집도 상황 안 좋아. 감옥가서 좀 쉬다 오지 뭐. 의사하기도 지겹다.”고 절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장은 “내가 너를 믿고 의지한 결과가 이거니?”라고 간호조무사에게 물었다.

“돈이 필요해서 그랬어요.”

무엇이 범죄이고, 무엇이 민폐인가.

아침 9시 45분의 편의점 비빔밥은 또 뭐란 말인가.

 

2020.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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