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마을로 돌아가다》-  나쁜 자본주의와 이별하기

 

히라카와 가쓰미 지음 / 남도현 옮김 / 이숲 펴냄

 

문득 서평을 쓴다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읽으라고 초강추라고. 꼭 읽으라고.” 한 줄이면 될 것 같다.
한 권에 책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을 할 필요가 뭐가 있냐는 생각이 드는 건 굳이 쪼개어 해체하거나 느낌을 덧붙이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고양이와 같이 사는 나에겐) 제목이 참 매력적이다.
고양이 마을로 돌아가다니. 고양이는 인간이 키우는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위상을 높였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양이를 모시고 산다고 말한다. 어쩌면 지구의 주인은 고양이인지도 모른다는 말을 진지하게 들을 때 나 역시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는 도시에 산다. 전혀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고양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고양이를 대하는 도시민의 태도가 그 도시의 인간미를 측정하는 지수가 된다고도 한다. 작은 생명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모여 그 도시 시민이 생명을 대하는 가치관을 보여준다.

이 책은 멀리가지 않고 도시의 골목을 거닐며 자본주의에 대해 성찰한 한 사업가의 명상이다. 주장이라고 보기엔 논조가 부드럽고 이야기라 하기엔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다. 또한 책상에 앉아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언저리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고양이 마을도, 그가 관찰한 고양이들을 지켜보다가 나온 이야기다. 이전에 출간했던 저자의 책중에 《‘소비를 끊는’ 공중목욕탕 경제의 권유》라는 책도 있는데, 이 책에도 공중목욕탕과 가업을 잇지 않으려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처럼 동네를 산책하며 고심했던 소재들이 등장한다.

책은 1장과 2장으로 나뉘어 있따. 1장은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 이야기를, 2장은 골목길에서 찾은 자본주의와 자본이 바꿔놓은 우리 일상의 이야기들을 한다. 일본과 한국은 여러 모로 닮아있다. 한국은 일본의 전철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이유로 저자의 이야기가 더 정겹게, 실감나게 들릴 것이다.

작가는 1950년 도쿄 출생으로 사업가이자 저술가이다. 벤처사업가 중 하나라고 알려졌는데 참신한 업종을 창업한 경력이 있는데 저술한 책을 보니 기존의 체제와는 다른 길을 걷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히라카와 가쓰미가 쓴 그간의 책은 《반전략적 비스니스의 권유》, 《주식회사라는 병》, 《경제성장이라는 병》, 《이행기적 혼란-경제성장 신화의 종말》, 《소상인小商人에의 권유-경제성장에서 축소 균형의 시대로》,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 《소비를 그만두다》 등이다. 그러니까 기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계속 제시하고 주장하고 있다.

묵직한 경제학원론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겉핣기식 책은 아니다. 발로 쓴 글은 어딘가 깊이가 있는 법이다. 혼자 읽고 음미하기도 좋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 독서모임에서 자신의 일상과 비교해가며 함께 이 책을 읽는 것도 매우 좋겠다.

 

나는 연명 치료를 원하지 않지만 (이런 문제는 그때가 돼야 알 수 있겠지만), 인간의 죽음을 법제화한다는 생각에는 거부감이 든다. 그리고 연명 치료를 원하지 않는 자연사를 ‘존엄사’라 부르는 것에도 반대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발상에 ‘당사자의 책임’이라는 근거를 끌어들인다는 점이 못마땅하다. (중략)
내가 존엄사 법안에 반대하는 이유는 죽음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사건이며, ‘죽음’이라는 개념이 일반적 정의가 필요한 법과 어울리지 않아서다. 죽음이 개인의 문제라는 인식에서는 법안의 취지나 내 생각이나 똑같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죽음은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 없는 집단적, 집합적인 면이 있고, 또 역사적인 면이 있다. 이런 측면이야말로 죽음을 생각할 때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법안에는 이런 부분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임상 차원에서 죽음은 역시 개별성이 문제시된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죽음이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대책이 있기에 이 문제를 획일적으로 다룰 수 없다. (중략) 결국, 죽음은 내 것인 동시에 내 것이 아닌 무엇이다. (58-59)

“처음부터 지금까지 실마리는 없었다.” 헤이안 시대(794~1185) 진언종을 창시한 구카이가 지은 『삼교지기(三敎指기)』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실마리는 인간의 지성 밖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할 뿐이다. (98)

토드는 가족 분류를 설명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점을 지적한다. 외혼제 공동체 가족이 분포된 곳은 러시아, 중국, 베트남, 구(舊)유고슬라비아, 쿠바, 헝가리 같은 국가들이다. 즉, 사회주의 국가들은 거의 외혼제 공동체 가족 구조로 구성돼 있다. 이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나는 이런 지적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즉, 공산주의 국가처럼 ‘권위주의’와 ‘평등주의’라는 두 가지 규제력을 통해 통치되는 공동체는 원래 외혼제 공동체 가족 체계에도 존재했던 셈이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도 하나의 구상인 것이다.
*토드 『세계의 다양성(La Diversite du monde. Structures familiales et modernite)』의 저자 엠마누엘 토드

많은 사람이 일본 전체가 순식간에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경험했다. 만약 원전 사고의 영향이 도쿄까지 미쳤다면, 수도의 기능이 마비됐을 뿐 아니라 모든 정치 기능이 수도에 집중된 일본 전체의 기능이 마비됐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 기능을 분산하고, 수도 이전을 고려하는 등 집중을 막으려는 논의는 정치가 사이에서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고 있다. 국가만이 아니라 세계도 집중이 아니라 분산을 통한 공존을 구체화하는 것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자연에서 배워야 할 지혜다. 효율만을 중시하는 중앙집권 체계와 지속을 위한 공존 체계라는 두 가지 사고방식이 서로 싸우는 것이 오늘날 상황이다. (126)

지구의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이 이토록 많은 쓰레기를 배출한다. 문명인의 생활은 어쩌면 쓰레기를 만들고, 쓰레기를 치우는 삶이다. 개도, 고양이도, 가축도, 야생동물도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다. 그들의 배설물을은 시간이 흐르면 땅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집을 짓거나 부수지 않는다. 보금자리는 자연 그대로 풀숲이나 나무뿌리 사이, 혹은 인간이 만든 건축물에 있다. 해가 뜨거운 여름에는 어디가 시원한지, 추운 겨울에는 어디가 따뜻한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아니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고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간다. 인간만이 자연에 도전하고, 자연과 대립하고, 자연을 가공한다.
최근에 ‘지속 가능한 사회’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인간을 제외하면 어떤 생물도 지속 가능한 사회라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간다. 지속 가능한 사회는 오로지 인간에게 국한된 개념으로 다른 생명체한테는 너무도 당연해서 염두에 둘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133-134)

사무실 뒤쪽에는 나무가 많은 공원이 있는데, 뒷문으로 나가 잠깐 쉬다 보면 이네무리 군이 햇볕을 쬐며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다. 이네무리 군이 나무 아래서 오줌을 누고 나서 요령 있게 모래로 덮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은 참으로 정교하게 조직돼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중략)
우리는 고양이들의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당신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134)

정치가는 자기 정치 생명의 큰 부분을 주식회사에 의존하고 있다. 주식회사의 경영자들 또한 성장을 지속시키지 못하면 그 소유자인 주주들에게 버림받을 운명에 처한 사람들이다. 혀재 국가는 주식회사에 의해 지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면 국가가 구사하는 경제 성장 전략은 실제로 주식회사의 전략이고 국가가 말하는 성장 시나리오의 내용 또한 주식회사 경영자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136)

문명의 발전은 어떤 가혹한 자연조건에서도 살아갈 조건을 갖추도록 도구와 기계를 만들어냈다. 가혹한 자연조건을 완화하고,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어느 정도 에너지가 필요할까? 우리는 자연이 아니라 자신을 통제하면서 자연과 관계 맺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무한하다고 생각했던 자연은 소진할 것이며, 오늘날 바로 그런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140)

찬찬히 바라보면, 정상경제를 우리가 발로 딛고 서 있는 이 땅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일하고 살아가는 바로 이 땅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일하고 살아가는 바로 이곳을 소중히 여기고, 품격 있는 국가로서 실현할 수 있는 경제를 새롭게 구상해보자. 품격 있는 국가는 품격 있는 의식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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