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부모 절반의 아이

부모님의 생애사를 쓰겠다는 사람들이 모여 강좌신청을 했다. 8주간의 강좌는 생애사쓰기에 대해 소논문을 작성하신 수리장애인복지관 이형진관장님이 특강으로 마무리했다. 엄마를 이야기하며 눈물짓는 선한 사람과, 아버지의 처절했던 삶의 투쟁에 대해 울먹이는 사람이 있다. 나에겐 둘 다 생경스러운 풍경이다. 몇 년전이었다면 배알이 뒤틀리거나 기분이 착찹했을 것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태초부터 없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몇 개월전 중요한 저녁 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남편은 그 날 급하게 직원회식을 해야 했고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작은 아이를 데려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큰 아이도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수원에서 돌아오는 고속도로에 해가 지고 있었다. 비참했다. 가슴에 불이 오르는데 태풍같은 파도가 넘실거렸다. 한 방에 쓸려나갈 듯, 운전대를 쥐고 있는 날이면 어디든 들이받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 저녁 노을은 더욱 나를 괴롭혔다. 고등학교 1학년, 자퇴서를 쓰고 돌아오던 날 마을버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더없이 평화롭고 화창했다. 내 세상은 무너지는데 누군가는 빨래를 널고 아이를 낳고 학교에 가고 돈을 벌고 밥을 먹었다. 그 날 나는 세상과 완전히 격리되어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를 봐 줄 사람이 없어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태초부터 그 딴 것은 없었다고 말할 것이었으면 바라지도 말아야 옳지 않은가. 세상이 그러하고 삶이 그러하듯 내 마음도 부조리했다.

더 유치할 때는 차라리 고아인 채로 보육원에서 자랐으면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한 적 있다. 더 많은 동정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동정은 때로 돈도 되고 후원도 되고 사람이 되어 나를 밀어줬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큰아버지의 손을 잡을 때 세상의 모든 고아들에게 죄스러웠다.

 

부모가 부모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모가 아니다 라는 명제를 머릿속에 깊이 박았다. 시간이 더 지난 다음에서야 세상의 모든 부모가 “부모다워야 하는가”에 대해 다시 질문했다. 그저 나는 그런 삶을 받았을 뿐이다. 엄마가 만든 성에 갇혀 아무 것도 저항하지 않으며 산다해도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 성문을 깨부수고 나온 것은 나였다. 성문을 모두 망가뜨려놓고 왜 저 성이 저 따위로 생겨먹었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염병을 던지는 꼴이었다. 아버지는 성밖 숲으로 도망쳤다. 화가 나서 도망쳤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꼴뵈기 싫어 그림자가 없는 어둠으로 숨었다. 나중엔 해가 중천에 떠서 그림자를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짧아지는 매일 매일 화창한 곳으로 옮겨갔다. 나는 계속 그림자를 보고 살았다. 성 안에서 쪼그려앉아 그림만 그리고 있는 동생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살았다.

성에서 나왔으니 됐어.

거울 앞에 앉아 스스로에게 그 말을 해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부모님의 생애사를 쓰겠다는 사람들과 앉아 밀면을 먹었다. 부산과 대구의 음식이야기를 하다가 이북음식 이야기로 옮겨갔다. 엄마가 담궜던 동태가 들은 김장김치와 손바닥만한 왕만두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인지 굳이 알고 싶지 않다. 엄마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 것은 하루 종일 마음에 남는다.

 

오후엔 어린아이를 같이 돌보고 키워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 역시 엄마이고 그 아이들이 더 어렸을 때가 있었다. 아이교육에 대해 열을 내지 않는다.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하고 적당히 적응하고 타협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길 바랐다. 어미가 일일이 개입해서 해결될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내가 원하는 교육과 아이가 원하는 교육이 동일할거라고 자만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보기보다 훨씬 강인하고 어른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유연하다. 아이들이 겪는 모든 고통을 어른들에게 던져준다면 그 어떤 어른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가진 생명력을 모조리 살아가는데 집중하여 쓴다. 타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그림자를 만들지 않고 지나치게 계산하거나 예측하지 않아 어른들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지닌다.

남들의 교육관을 듣는 동안 내 아이는 집에서 좋게 말해 자유롭게 나쁘게 말해 방치된 채 동네 형들과 게임을 하고 시간을 보냈다. 배가 고프다고 칭얼댄 것은 몇 시간전부터이다. 전화가 연속해서 오지 않는 것은 뭔가 재미난 것을 찾았다는 뜻이며, 전화를 계속 걸어대는 것은 아무 자극이 없는 정적을 참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아이는 스스로 저녁까지 해결했고 나가서 뛰어놀았다. 아이와 함께 아파트 지하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 바람은 선선하여 기분이 좋았고 우리 앞 동에서는 누군가 첼로 연습을 하고 있다. 첼로 소리를 들은 지 보름이 넘었는데 매일 비슷한 시간에 첼로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음이 넉넉해지는 순간에 세월호 생존자 아이들이 도보행진을 하며 안양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들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었으나 내 눈앞에 알짱대는 내 아이를 더 먼저 돌봐야 했다.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은 광화문과 여의도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있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죽은 친구의 부모들을 만나러 도시를 가로질러 행군을 한다.

 

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가 하룻 밤 땀에 삭아질 수 있을까. 평생을 지배할 아이들의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엿볼 수 있어서 두려움이 가득하다. 아이들의 손을 잡아줄 수 있을까, 만난다 한 들 내가 안아 줄 수나 있을까. 내가 가진 용기는 먼발치에서 보고 눈물 흘리다 돌아오는 게 전부일거다. 아이들이 걷는 모습을 인터넷 생중계로 본다.

어쩌다 세상은 이렇게 부모와 아이들로만 이루어졌나.

아이를 지키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 하는 부모들과 어쩔 수 없었다고 깔깔대며 웃는 엄마의 모습이 겹쳐져도 이제는 화가 나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다르고, 매우 특별한 사람이 나를 낳은 것 뿐이다.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2014.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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