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털끝

갑작스럽게 전화가 왔다.

이따 회의에 오시죠? 라는 뜬금없는 말이었다. 느릿한 억양으로 말하는 이 남자는 두꺼운 뿔테의 안경을 썼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안경이었다. 매우 지적으로 보이려는 수작임에 틀림없었다. 지적이라기 보다 의뭉스럽다는 말이 걸맞은 사람이었다. 연락을 받은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오라면 가야 하는 입장이다. 그게 내가 할 일이었다. 시간에 맞춰 도착하겠노라고 말했다.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고 가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어쨌거나 길게 봐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고 굳이 길게 보지 않아도 당장 나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내가 소집해 달라고 한 회의였고 그들은 그 책임을 다 했지만 책임이 분산되면 언제나 가장 중요한 일이 누락되는 법이다. 누군가 연락을 했겠지. 그 사람이 연락을 했겠지, 저 사람이 통화했겠지. 왜 그 말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나. 통화했다면서 무슨 말을 한거야. 사람들의 책임은 핑퐁처럼 오고 간다. 외면하고자 하면 눈 감아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도착하여 점심을 먹기로 하고 주차장에 놓인 차에 시동을 걸었다. 선생님은 옆에 탔다. 교실에서 나를 가르치지 않아도 나에게 스승이면 그걸로 선생이 된다. 휴대폰 네비게이션을 켜고 속도계 앞에 휴대폰을 올려놓았다. 휴대폰을 네비게이션으로 사용한 지 한 달쯤 되었다. 내 차에 장착된 네비게이션은 어느 날부터 글자가 잘 입력되지 않는다. 아예 안되는 것도 아니다. 잘 안된다는 것이다. 찍고자 하는 자음의 좌측 상단 30도 방향에서 입력을 해야 하는데 맨 왼쪽에 쏠려 있는 자음은 좌측 상단이 없다. 그게 네비게이션의 끝이니까. 휴대폰을 속도계에 올려놓으면 휴대폰을 보지 않을 수 있다. 계속해서 누군가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일이 내가 하루를 사는 일의 절반이다. 계속해서 말하고 싶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하다.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기 때문에 읽고 쓴다. 저열하고 가볍고 속된 글이나 단 하나의 문장이라도 즐거이 시간을 내어주는 것은 관계의 단절, 내가 끊임없이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과 앉아 사람과 이야기하며 다른 사람을 찾는 시대에 살고 있다니 관계의 허기는 마치 먹어도 먹어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는 지옥의 병에 걸린 듯 하다. 무엇을 내어주지 않고 무엇을 허용하지 않았기에 계속해서 단절되고 분절되는가. 삶은 뚝뚝 끊긴 채 길에 떨어졌다.

 

한 마리, 두 마리, 어쩌면 반마리, 또 다시 한 마리, 이번에도 반 마리.

목적지까지 왕복으로 70km, 오고가며 길바닥에 죽어서 터져 있던 짐승들이 일곱 마리가 넘는다. 가는 길에 너댓마리를 봤고 오는 글에 두 세 마리를 봤다. 그 중에 어떤 것은 반마리처럼 보였다. 붉은 내장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체를 보고도 나는 달려야 했다. 그 길을 지나치던 최초의 충돌자도 살아 있는 짐승과 눈을 마주쳐도 달려야 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과연 변명이 되는가.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더 큰 피해를 줄이기 위해 나는 속도를 줄일 수 없었다고. 눈을 번쩍이는 작은 짐승을 살리기 위해 내 목숨을 담보로 하거나, 내 뒤에 오는 사람의 위험을 감수할 의무가 나에겐 없었다고 모든 사람들이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 길은 자동차 전용도로이며 제한 속도는 시간당 70km 이거나 110km의 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속도위반 단속구간이 아닌 곳에서 많은 차들이 120km를 넘게 가속페달을 밟곤 한다. 울퉁불퉁한 도로 사정따위는 고려할 바가 아니다. 차들은 빨리 달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거침없고 싶어서 달린다. 앞 서 가는 차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 운전을 할 수 없다. 앞서 가는 차와 내 곁을 치고 들어오는 차는 그저 기계다. 사람이 운전을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외면하고자 하면 눈 감으면 그만이다. 길에서 죽어가는 생명이 어디 짐승뿐인가. 사람도 바다에 산 채로 수장시키는 마당에, 고양이따위에게 줄 동정심이나 남아있긴 한걸까.

펄덕이며 숨쉬던 생명이 무력하게 사그라지는 것을 보는 일은 고통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모두 어떻게든 스스로를 보호하고 살아남고자 한다. 더 좋은 방향으로. 낯선 풀도 독을 뿜어내듯 움직이는 동물도 모두 독을 품고 산다. 하악. 하고 이빨을 드러내도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하악, 하고 이를 드러내는 것은 짐승만의 일은 아니다.

나와 감정적으로 엮일 일이 없는데 한 남자가 그 오후에 이를 드러냈다.

뭐하는 짓인가.

나는 가만히 서서 나에게 이를 드러내고 사라지는 그 남자의 등판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서 있었으나 그를 바라보고 서 있는 나의 몸은 낱낱이 알고 있었다. 죽여버릴까.

내가 감히 어떤 생명을 죽일 수 있나. 할 수 없어도 문장을 뱉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내가 설령 누군가에게 가만두지 않겠다, 라고 한다면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과연 그는 가만히 있기나 했나. 폭력. 죽여버릴까에서 비롯되는 폭력, 나에게 이를 드러내는 자의 이를 몽창 뽑아버리고 싶다는 건 분노의 감정을 나에게 전이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불쾌하다는 이유로. 너의 분노가 나의 감정에, 나의 삶에 개입했을 때 내가 느끼게 되는 이 번잡함. 심장이 빨리 뛰고 식은 땀이 나는 것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기계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매우 복잡한 구조. 사람이 사람을 무시하는 일에 대해서 느끼게 되는 분노는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인가. 나를 존중해 달라고 하는 욕구는 대체 왜 일어나는가.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하는 타당한 이유는 어디서 찾아야 하나.

 

나는 그가 나를 존중해주길 바랐다. 존중이라는 것은 예의를 갖추고 공손하게 말을 하며 때로 두 손을 모으기도 하고 내가 털끝만큼 그 사람을 배려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감사히 여길 줄 알길 바랐다. 왜 그는 나에게 감사를 표해야 하나. 나의 삶의 일정부분을 그에게 소비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길 바랐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에게 소비되는 나의 감정과 시간은 원래 내 것이므로. 내 것을 너에게 딱 고양이 털끝만큼 내어준 것에 대하여 고마워하라. 당신은 나의 수명을 딱, 고양이 털끝만큼 가져갔으므로.

 

내가 내어준 고양이 털끝을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이 가져가고 그는 나에게 이를 드러내어 관여하고 싶지 않은 분노를 전이시켰다. 분노를 고스란히 떠안고 삭히고 원인을 찾는 시간을 그가 강요하게 된 셈이다. 그리하여 나의 수명의 일부를 그가 가져갔다. 아 그래서 화가 나는 것이었나. 그가 나에게 강요한 분노의 용량이 고양이 털끝을 넘어 개똥만한 것이었는데 그 개똥만한 크기의 예측불가로 인해 나는 소똥만한 수명을 단축시켰다.

 

죽어버린 짐승의 사체를 고스란히 목도하며 돌아오는 길은 괴로웠다. 타인의 분노를 떠안은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밤이 깊어갈 무렵 사과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길에 깔려 죽은 고양이만큼 당신은 숭고하게 살았는가 묻고 싶었다. 해가 넘어가는 시간 내내 분노를 전가했다는 이유로 씩씩대고 내 수명을 스스로 갉아먹던 나는, 사람들을 피해 냇가로 도망치는 작은 짐승만큼 충실하게 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삶을 보존하는 방법에 집중하기에 우리는 너무 헐렁하게 지낸다. 눈 감고 외면하면, 그만인 것들이 많다는 건 내 눈이 그만큼 헛 것이라는 얘기일까.

 

2014.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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