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이야기 4 – 곤화

유리로 된 샷시문은 닫을 때마다 불안했다. 유리창에 반짝, 소주케틀이라는 맞은편 가게의 글자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험한 골목에 가게를 낸 것은 염려하지 않았으나 가게 문을 닫을 때마다 불안이 다시 떠오르곤 했다. 골목이 험하다는 건 드나드는 사람들이 험하기 때문이다. 험한 사람들이 드나들어서가 아니라 흥분한 사람들이 드나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흥분한 이유는 어두운 밤 좁은 골목길 현란한 간판과 더불어 소주케틀이라는 술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부분 젊었다. 소주케틀은 과일맛이 나는 탄산음료에 소주를 부어 만든 소주 칵테일이다. 커다란 1.5리터 페트병의 윗부분을 잘라내어 탄산음료를 절반정도 담고 소주를 한 병 붓는다. 간단한 제조법으로 만든 소주케틀은 1개의 페트병에 2000원에 팔렸다. 주말에는 젊은이들이 줄을 서서 샀다. 머리가 짧고 얼굴은 하얀, 더러 여드름도 난 미국병사들이 소주케틀을 들고 골목에 가득했다. 헌병은 맨 위 디스코클럽 앞에 서 있고 아이들이라고 불러도 아무 문제가 없는 청년들이 담배를 물고 주말을 가득 채웠다. 곤화는 소주케틀을 들고 서 있는 아이들이 만 20세가 안 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곤화의 가게에 들어오지 않았다. 2천원의 소주케틀로 밤을 홀라당 보낼 수도 있는데 4천원짜리 병맥주는 아이들에게 고급술이 되었고, 2천원짜리 라면을 먹으러 들어오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아직 골목은 반쯤 차 있었다. 반쯤 비어있다는 얘기도 된다. 다른 주말엔 새벽 4시까지 문을 열어놓지만 오늘은 일찍 닫는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나. 곤화는 여기까지 온 게 어디냐고 되묻는다.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 하이, 하고 손 흔드는 아이들이 있다. 곤화의 치즈라면을 먹어본 아이들인 모양이다. 요란한 음악소리가 등뒤로 넘어가면 붉은 조명이 켜진 작은 바들이 아직 영업중이다. 더러 문을 닫은 곳도 있다. 아주 오래전, 곤화가 이 골목에 들어서기 전에 저 바 뒷부엌에서 한 여자가 끔찍하게 죽었다. 곤화는 가끔, 그 여자의 꿈을 꾼다.

골목이 끝나자 다시 쿵쾅거리는 음악소리가 길을 메웠다. 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은 도로에 얼굴색과 머리색이 다른 사람들이 서 있었다. 한 손에 맥주를 들고 한 손은 호주머니에 꽂은 남자들이 많다. 곤화는 골목을 내려가 시장통으로 직진했다. 시장통 끝에는 기가 막힌 만둣국을 파는 집이 있다. 오늘도 만둣국집 아이들이 가게에서 자고 있다. 곤화는 어디선가 잘 크고 있을 아이를 생각한다. 눈물 따위. 라고 입을 다물어도, 눈물이 마른 것은 아니다. 만둣국집을 지나 살인사건이 났던 햄버거집 2층으로 올라간다. 생각해보면 꽤 많은 사람들이 이 동네에서 죽었다. 유명해지는 죽음이 있고, 잊혀지는 죽음이 있다. 호텔 뒤에서 칼부림이 나 세 명이 죽었다는데 소문만 무성하고 보도되지 않았다. 어느 클럽에서 마리화나 냄새가 심하게 나는데 경찰은 오지 않는다.

머리를 양갈래로 내려 묶은 젊은 여자 앞에 곤화가 앉았다. 둘은 카스 맥주를 시켜 몇 병을 비웠다. 곤화 앞에 앉은 여자가 울었다. 곤화는 냅킨을 달라고 해서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곤화는 여자에게 올 해 몇 살이냐고 묻는다. 곤화의 얼굴근육은 움직이지 않는다. 너 많이 어렸구나 라고 말했다. 여자가 피식 웃는다. 눈가가 벌겋다. 곤화는 종업원을 불러 하이네켄 두 병을 시킨다. 여자와 곤화는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간다. 더러 웃기도 한다. 곤화가 가슴을 펴고 등을 의자에 바짝 붙인다. 앞에 앉은 여자와 거리를 만들고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곤화는 몸을 다시 숙여 젊은 여자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 본다.

“정말 돈 벌고 싶어?”
“벌어야 돼요.”
“너 먹고 사는 것만 벌면 되잖아.”
“동생 학교 보내야죠.”
“내년에 졸업이라며.”
“내년에 엄마가 출소해요. 방도 구해줘야 되고. 한 달에 삼백만원만 벌면 금방 될 거 같아요.”
“정말 그렇게 벌어야겠어?”
“안 그러면 어떡해요. 방법이 없는데.”
“그렇게 벌 수 있는데가 있긴 해.”
곤화는 맥주잔 앞에 놓인 땅콩을 입에 넣었다. 오물거리는 곤화의 입술이 더욱 작아보였다. 곤화는 땅콩접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일이 너무 힘들어. 쉬는 날도 없고. 낮에도 일을 해야 되고.. 밤에는 더 바쁘고..내가 그걸 한 4년 했어. 그래서 지금 사는 집 전세잖아. 4-5천 정도는 모았지… 집을 살 정도까지 버는 건 아니고..”
“어딘데요?”
“말해주기 싫다.”
“예전에 저 아는 언니가 빠찡꼬에서 동전바꿔주는 거 하면 돈 많이 번다던데. 손님들이 잭팟 터지면 팁도 막 준다면서요.”
“……. 그런 거 아니야.”

곤화는 땅콩을 다시 입에 넣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랗고 붉은 네온사인들이 더러 꺼지고 더러 반짝였다. 곤화가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자 앞에 앉은 여자는 더 묻지 않고 맥주를 마셨다.

“언니는 그 루즈가 되게 잘 어울려요.”
“그래?” 곤화가 활짝 웃었다. 속쌍커풀진 눈은 강아지를 닮았고, 코도 입도 작았다. 하얀 피부에 굵게 말은 파마가 잘 어울렸다. 씨익 웃는 곤화의 표정은 매우 천진했다. 내일은 즐거운 소풍날, 이라고 말하는 듯한 웃음이다. 곤화는 젊은 여자와 이야기를 하다 깔깔대고 웃기도 했다. 웃을 때마다 빨간 립스틱이 반짝거렸다. 맥주잔에 묻은 곤화의 립스틱 자국도 반짝거렸다.

하늘끝이 파래졌다. 둘이 마신 맥주병이 창가에 나란히 서 있었다.
“야 해뜬다.”
곤화는 계속 땅콩을 먹고 있었다. 서너개를 한 번에 집어 입주변에 손을 대고 하나씩 까넣었다.
“미경언니 왔을라나..?”
“처 자고 있겠지뭐. 요새 만나는 사람도 없잖아?”
“스테디는 없지” 젊은 여자가 재미난 일이 생각난다는 듯이 웃었다.
“가자 야. 나 피곤하다.” 파란 하늘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파란 청바지를 입은 곤화는 계산서를 들고 빨간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사람이야기

2014.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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