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야기 3 – 정아

“에휴. 이러고 살아서 뭐하나 모르겠다.”
“같이 죽어. 같이 죽어? 엄마 우리 같이 죽어?”
다섯 살 짜리 아들이 정아의 손을 잡았다. 정아는 신발을 신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길고 작은 정아의 눈은 또 초승달이 되었다.

“뭘 같이 죽어? 쪼끄만게!”
“엄마 맨날 죽어?” 정아는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였다. 약 3초간.
“너 어디 할머니 앞에 가서 그 소리 해봐라. 뭐라 그러나.”
등 뒤에 선 여자는 다문 입을 열었다.
“애들 앞에서 숭늉도 못 마신다더니.”
“이러니 내가 살겠니?” 정아는 얼굴도 들지 않고 아이의 신발을 신기며 말하였다.
“이모 안녕.” 아이가 집안에 선 여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집으로 가?” 아이에게 손을 흔들며 여자가 말했다.
“얘 맡기고. 일찍 나갈게.”
“조심해서 가. 엄마 말 잘들어?”

아이는 신발을 신고 뭐가 좋은지 폴짝 한 번 뛰었다. 현관에 놓인 어지러진 신발 때문에 아이가 미끄러질까 염려되었다. 아이의 손을 꼭 잡은 정아의 왼손목에 샤넬팔찌가 찰랑. 움직였다.

정아는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반지하를 벗어나려면 몇 칸의 계단이 필요하고 그 집의 대문을 나서면 다시 내리막길이다. 골목을 벗어나면 야트막한 언덕이 나타난다. 정아의 집까지는 몇 개의 계단과, 몇 번의 오르막을 더 올라야 할 것이다.

“엄마 돈 많이 벌어?” 아이가 말했다.
“그럼. 엄마 돈 많이 벌지. 아빠보다 더 벌지.”
땀이 송글송글 돋아났다. 아무리 화장을 진하게 해도 기미는 쉽게 눈에 띄였다. 눈두덩이에 깊은 아이라이너가 번질까, 새로 산 마스카라로 길게 올린 속눈썹이 번질까 걱정되었다. 정하는 땀을 닦지 않고 길을 걸었다.

“벌어야지 그럼. 벌 수 있을 때 벌어야지.” 아이는 땅바닥의 불규칙한 무늬를 보며 제 나름대로의 규칙을 가지고 건너 뛰며 말했다. 애 할머니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정아가 피곤에 찌들은 얼굴로 인상을 쓰고 아이를 시댁에 맡기고 나갈 때 아이 할머니는 나가는 정아의 뒷모습에 대고 그렇게 말하곤 했다.

“엄마 아들이 사고만 안 쳤어도 이러고 안 살아.” 정아는 쏘아붙이는 것도 아니고 뇌까리는 것도 아닌 말투로 대답하곤 했다. 아이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부엌의 쪽문에서 바로 길로 떨어지는 정아의 맨다리를 보며 문을 닫곤 했다.

오늘도 같은 말을 할까. 문득 정아는 간밤에 들어오지 않은 남편 생각에 짜증이 치밀었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했다. 냉면이나 한그릇 먹었으면 좋으련만 마음 뿐이었다. 사람들이 간혹 줄을 서기도 하는 허름한 냉면집을 지났다. 아이는 별 말 없이 순순히 걸었다.

“재윤이 놀이방 재밌어?”
“어.” 아이는 계속해서 바닥만 바라보고 걸었다. 불평이 없는 아이다. 그게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매일 매일은 고단하기만 했다. 아침 9시에 나와 밀린 설거지를 하고 가스불을 올려 자갈을 달궜다. 10시부터 주방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11시 반부터는 점심시간 손님들이 몰려왔다. 집게를 들고 몰아치는 전표를 확인하며 고기를 구웠다. 뜨거운 접시에 이력이 난 손은 물집도 잡히지 않은지 오래, 굳은 살 덕에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손끝이 고마울 때가 있다. 오늘은 점심시간을 마치고 잠시 집에 들렀다. 혜선이가 3시부터 6시까지 대타를 뛰어주기로 했다. 대타를 뛰는 혜선에게는 시간당 3천원씩 9천원을 줘야 한다. 지갑에 그만한 돈은 있을터. 4시쯤 되면 점심손님이 빠져나가고 저녁손님도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라 일수쟁이가 들렀다. 정아는 매일 꼬박꼬박 도장을 찍었다. 오늘은 6시쯤 보자고 이미 전화를 했다. 나가자마자 일수쟁이부터 만날터였다. 남편은 동창과 영동에 주점을 열겠다고 설치고 다니고 있다. 포장마차 해먹은 게 언제라고 또 날뛰기 시작한다. 말릴 기력도 없고 그저 안보고 싶을 뿐이다. 정아는 요즘 이혼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헤어지면 이 동네를 떠나고 싶고, 아이는 키울 자신이 없고, 시어머니가 젊으니 아이를 맡기고 훌훌 떠나는 게 가장 좋을 성 싶다. 얼마 전 사람을 통해 일본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들었다. 파출부 생활 5년에 설거지만 2년이다. 밤에는 업소에서 설거지를 했고 낮에는 업소 청소를 했다. 가서 무엇인들 못할까 정아는 지금보다 그 어떤 것도 나을 것이라 확신했다.

터번캣을 쓴 남자들이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걸어오고 정아는 아이의 손을 잡고 시댁에 당도했다. 내년에는 이혼해야지. 정아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샷시문을 열었다.

출렁. 하고 유리가 진동하는 소리가 났다.
“엄마” 정아는 시어머니를 그렇게 불렀다. 정아의 어깨에 매달린 까르티에 배낭도 한 번 출렁였다.

2014.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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