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 혜숙씨의 찬장

JTBC/넷플릭스/ 박해영 극본 / 김석윤 연출

나는 어제 저 장면에서 천장과 수납장 사이의 깨끗한 공간을 보며 적잖이 놀랐다. 저 공간은, 가정 내 청소를 전담하는 사람에겐 외면하고 싶은 공간이고, 동시에 죄책감을 안겨주는 공간이다.

저 위에 어떤 먼지가 쌓이고 거미줄이 쳐지고 기름떡이 지더라도, 사실 같이 사는 사람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저 공간이 존재한다는 거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가정 내 청소와 수납을 전담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수납을 더 하기 위해서 여러 숨은 공간들을 파악하고 있다. 자리를 만들어 일년에 한 번 이상 쓰지도 않을 물건을 쟁여놓는데 선수가 되어 있기 때문에, 물건을 처박을 공간을 알고 있다. 게다가, 물건이 들어차지 않은 공간이 1년 후에 어떤 꼬라지가 될 지도 예측할 수 있다.

저 공간이 저렇게 깨끗하다는 건, 하루종일 굽고 튀기고 찌고 삶는 그 음식의 증발물들이, 천장 위 곳곳까지 스며드는 것을 다 알고 있는 저 집안의 청소수납조리전담자인, 염씨네 가족의 엄마는, 매일 잠시라도 짬이 나면 저 공간까지 닦아내어 주부가 가질 수 있는 일말의 죄책감을 덜어내는 사람이었다는 증빙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연출자가 굳이, 저, 기피공간을 저렇게까지, 저렇게 길게 보여줄 이유가 있는가.

이 공간이 말해주는 것을 잘 볼 필요가 있다.

충실한 전업주부로 살아본 내 눈에는 온통 일거리다.

식탁보 위의 유리, 뜨거운 것을 올려놓으면 안되는 재질의 오래된 식탁을 쓰고 있을 것이고, 레이스로 된 식탁보를 쓴다. 의자의 등받이도 커버를 씌웠다. 저 커버는 누군가 한 번씩 꺼내서 빨아야 한다.

식탁 위에는 항상 물과 잔이 놓이는데 그 물이 무엇이냐에 따라 또 노동강도가 달라진다 끓인 물인가, 안 끓인 물인가. 엎어놓은 컵은 컵의 재질에 따라 엎어놓거나 바로 놓는 것을 결정할 수 있다. 어떤 컵은 잠시만 엎어놔도 냄새가 난다. 그 아래 쟁반엔 늘 물때가 끼기 마련이라, 다 들어내고 쟁반을 닦아내는 것도, 누군가 할 일이다.

주방 앞 가벽에 있는 커튼, 저 커튼도 누군가 빨아야 하는 커튼이다. 냄새나고 기름때가 더덕더덕 묻기 마련이다. 벽에는 가족의 사진이 걸려있고 아이들의 성장과정이 가부장 아래 묶여 있다. 사진 오른쪽에 걸린 작은 수납장에는 각종 잡동사니, 비닐팩, 행주, 키친타올 같은 게 있겠지. 저 수납장 아래의 물건은 어수선하지만 질서가 있다. 담당자만 아는 질서다. 그 담당자. 주부. 검은 비닐, 흰 비닐, 작은 것, 큰 것, 한 번밖에 안 쓴 것, 한 번만 더 쓰고 버릴 것.

벽의 아랫단에는 최근에 유행하는 방열단열제가 붙어있다. 시트지로 된 건데 인터넷쇼핑몰에서 저렴하게 살 수 있다. 외풍이 심한 집의 맨 끝 벽에 잘라 붙이면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다. 가격대비 디자인도 괜찮은 편이다. 저 집의 단열은 저렇게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다닥다닥 모여 사는 도시의 집과는 차원이 다른 추위가 있을 것이다.

천장과 벽 사이에 초록색으로 된 무언가가 덧발라져 있다. 틈새에 뭔가가 들어올까봐 막아놓는 수단으로 보인다. 바람, 비, 벌레 같은 것. 이 곳에서의 집안관리는 아파트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어떤 노동은 죽어야 끝난다.

돌봄노동이 대체로 그러하다.

이 지긋지긋한 인생, 내가 죽어야 끝나지, 니가 죽거나.

그렇게 해방된, 염씨네 가족의 엄마. 혜숙.

나는 그녀의 성도 모른다.

저 공간은 전생의 나에게 죄책감의 공간이었다.

죽어야 끝날 것 같은 그 삶을, 나는 이혼으로 종결했다는 게, 혜숙 씨와의 다른 점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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