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도시

1.

오늘 아침엔 늦잠을 자려고 맘을 먹었는데 일찍 깨어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이명박 구속으로약간 흥분상태였던 게 분명하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데다가 어깨와 팔 통증이 심해 집 근처 사우나에 갔었다. 불가마에 들어가려는데 입구를 떡 막고 어떤 여자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육중한 몸을 움직인 여자가 통로를 열어주어 나는 불가마 안에 들어가 앉아 책을 폈다. 여자는 궁둥이를 조금 움직인 상태로 계속 통화를 하고 있었다. 수원에 누군가 입원을 했고 그 입원한 환자의 지인인지 본인인지와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여자의 목소리를 작지 않았고 나는 15분이 지난 걸 확인한 뒤 문장을 고를 새도 없이 “아주머니 통화 더 하셔야 되면 좀 나가서 하시면 어때요?”라고 큰 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돌리고 등을 돌리더니 몸을 부비적거리며 자리를 떴다. 그 여자가 통화를 하는 그 15분 동안,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아침 9시도 안 된 시간에 찜질방에 온 사연은 무엇인지, 여기서 통화를 못하게 하면 밖에 나가선 통화를 할 수 있을 것인지,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는 모두들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는데 저 여자는 거기서도 저런 통화를 할 수 없을 것이며, 가족이 있다면,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있지 않고서야, 가족들도 큰 소리로 장시간 통화를 하는 것에 타박을 할 것이며, 그렇다면 저 여자는 어디서 마음껏 통화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라도 참아야 하나.

알지도 못하는 한 사람의 행동으로 타인의 삶을 이리 저리 재단해보며 나는 15분을 견뎠고 결국은 참지 못해 그 여자를 내몰아버렸는데. 몰지각한 행동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말하는가.

2.

명동을 나가는 지하철을 타고 회현역에 진입했을 때 내 앞에 통 넓은 회색바지에 회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섰다. 마른 여자였다. 내 눈높이에 닿은 그녀의 배가 동그랗게 불러 있었다. 가방에 “임산부 먼저”라는 고리가 달린 것을 보고 자리를 양보했다. 여자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가방을 끌어안고 자리에 앉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임산부인지 확인하려 들었을까 생각했고, 행여 성질 못된 노인을 만나 폭언을 들은 적은 없었을까 생각했고, 그 이야기를 집에 가서 남편에게 털어놓으며 엉엉 울었을까 생각했고, 오늘도 퇴근을 하는 길인 것 같은데 3개월쯤 되어 보이는 산모와 태중의 아이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 염려했다.

3.

명동성당을 올라가는 계단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중늙은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여자는 스카프인지 목도리인지 모를 것으로 머리통을 감싸고 있었는데, 그 감싼 것 밖으로 흰 머리칼이 삐져나와 있었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분명히 나를 보고 내 눈을 바라보며 실실 웃고 있었는데 제정신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게 쉽지 않은 내가 천천히 계단을 하나씩 디뎌 올라가자 여자는 “천원만 줘.”라고 말을 했다. “천원만 줘.”

나는 목소리를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계단을 올랐다.

신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제단을 보러 가는 것도 아니다. 저기 남겨둔 기억 하나를 되살리고 싶었던 건, 공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쌀쌀한 날씨에 어둠이 깔린 거리를 환하게 밝히는 전등 사이를 헤매고 다니다 이 분주한 도시 한 복판의 섬같은 저 곳을 찾아가는 이유는, 거기 그 건물이 있기 때문이다.

구걸을 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부자들을 떠올렸다.

행여 그와 마음이 닿을까봐, 그 마음에 가난이 옮아올까봐, 전염병을 피하듯 돌아가고자 하는, 걍팍한 마음을 느꼈다. 내 안에 있었다. “천원만 줘.” 그 말이 어색하지 않은 날이 올 수도 있다.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공포는 골목 마다 숨어있다. 기억이 없던 시절부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고갔던 그 거리에서 나를 밀쳤던 어쩔 수 없는 것들의 힘은 언제나 나를 짓누른다.

4.

명동의 섬.

카톨릭회관 지하에 있는 전광수 커피에서 저녁커피라는 드립커피를 시켰다.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을 갔다가 집에 가면 되겠다. 휴대폰을 열어 집에 가는 여러 가지 경로를 찾아보다가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코스를 살피고 있는데 한 여자가 나를 빤히 본다. 중년의 여자가 입구에 있는 테이블에 짐보따리를 올려놓는 걸 내가 보고 말았다.

“짐 좀 봐주세요.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보따리가 많아서.”

나도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날까 하던 참인데 예기치 못한 남의 짐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내가 검색을 끝낸 뒤에 금세 돌아왔다. 커피를 다 마시고 화장실에 갔더니 그 여자가 짐을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머니가 안 나오셨다며 웃었다.

5.

집에 오는 버스엔 자리가 있었다. 앉자마자 이어폰을 꽂고 학교 강의를 들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휴대폰을 잡은 내 손을 누군가 몇 번 누르는 느낌이 나서 잠이 깼다. 휴대폰을 들은 여자의 손이었다. 내 고개가 의자 밖으로 떨어지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자의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다. 내 휴대폰이 떨어지려고 해서 나를 살며시 깨운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저 손잡이를 잡지 못해서 실수로 내 손을 스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낯모르는 여자의 손길 덕에 잠에서 깨어 갈아타야 할 정류장에 무사히 내렸다.

6.

집에 돌아와 늙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몇 번 봤던 늙은 시츄가 공원에서 혼자 어기적대며 걷고 있었다. 따뜻한 천으로 몸을 감쌌는데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같은 단지에서 봤던 아이였다. 많이 늙었고, 눈은 안 보인지 오래된 듯 했고 걸음걸이도 좋지 않았다. 나는 주인이 보이지 않아 엄마는 어디로 갔냐고 시츄에게 물었다. 쭈그려 앉아 엉거주춤 걸음을 겨우 떼는 시츄의 사진을 찍었다. 생각했다. 버렸나? 잃어버렸나? 주인이 있는 개인데. 그 개가 맞는데. 아프다고, 늙었다고 버린 건가. 데리고 가야 하나? 동물병원은 문을 닫았을 텐데. 얘를 내가 또 데리고 갈 수 있나? 내가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자 내 시야 밖에 있던 개주인인 여자가 나타났다.

“다리를 잘 못 써서 좀 걸어보라고 데리고 나왔어요.” 개 산책을 시키다 몇 번 마주쳤던 그 여자였다. “아…”나는 말을 보태지 않았으나 나보다 나이가 열 댓살은 많아 보이는 그 여자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 알 것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다 보니 혼자 있는 애들 보면 걱정되죠.” 여자가 내가 할 말을 대신 했다.

 

날씨가 적당히 쓸쓸하다. 세상엔 이렇게 여자들이 많다. 품고 기르고 돌보고 그리고 헤매는. 수많은 여자들의 도시를 저녁 내내 걸었다.

2018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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