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성글게

아지 산책을 하러 나갔다. 공원엔 웬 덩치 큰 남자가 서서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위협적인 느낌마저 들었지만 이 느낌이 전해지면 저 사람은 억울하겠지.

아지와 공원 한 바퀴를 돌고 공원과 단지사이의 문에 서 있는데 곱게 정장을 차려입은 할머니가 아지를 보고 묻는다.

이 개는 몇 살이죠?

음.. 얘가 열 세 살이예요. 나는 2004년생인 아지에게 한 살을 더 해 대답했다. 누군가 몇 살이냐 물으면 항상 그게 헛갈린다. 개니까 만나이로 따져야 하나.

이 개가 참 순한 개예요. 그렇죠? 할머니가 물으셨다.

아.. 얘는 잡종인데요, 그 다리 짧은 웰시코기하고 섞인 거 같긴 해요.
그렇구나.

할머니는 세로 선이 들어간 위 아래 한 벌짜리 바지 정장을 입고 녹색 로퍼를 신었다. 버버리 파우치백을 손에 쥐고 있었다. 가벼운 퍼머를 한 단발머리는 은발이었다. 동그란 금속테의 안경을 썼는데 눈썹은 가느다란 산모양이고 이목구비가 진하진 않았지만 선명하고 전체적으로 선이 고왔다.

나도 개를 많이 키우는데 다섯 마리까지 키워봤거든요.

내가 지금 칠십 넷인데, (할머니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 나이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칠십 넷, 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점점 달라져간다.) 내가 쉰 다섯부터 개를 키웠어요. 우리 아들 친구가 어디 놀러간다고 일주일만 맡아달라는 거를 데리고 있었다가 정이 들어가지고.. 그때부터 키웠지. 중국에서도 한 마리 데려오고.

아, 얘가 중국에서 온 애예요.

아 그래요?

예. 제가 거기서 공부했는데, 저 살던 아파트단지 앞에 돌아다녀서..

한국사람인데 중국에서 공부한거예요?

네.

할머니는 내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명확히 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래서 검역 다 마치고 데려왔죠. 오래 됐어요.

어디에 살았어요?

저는 상하이요.

아, 우리 아들은 연태에 있었는데, 그때 페키니즈를 장에서 바구니에 넣고 꼬물꼬물한 걸 판는거야. 털도 복슬복슬해가지고 눈은 이렇게 크고 코는 구멍만 보이고 입은 이렇게 째졌어. 할머니는 손을 얼굴에 대어가며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는 듯 얘기했다.

우리 아들은 연태대학에 2년 있다가 학교에서 칭화대를 보내준다고 했다는데, 제가 싫다고 해서 안 갔어요.

아 네…. 중국이 별로 맘에 안 드셨나봐요.

그런가봐.

할머니는 집 앞 내가 다니는 정형외과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시는 중이었다. 고관절 문제가 있는데 나우병원에서 수술을 하려다가 다른 사람이 집 앞 병원을 추천해줘서 다니게 되었다고 하여 내가 이 병원은 과잉진료를 하지 않아 좋다 말했더니 맞다고 호응하셨다.

수술과정의 얘기며, 의사가 얼마나 살뜰히 보살폈는지, 병원에 환자가 많아 늘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 그래도 다녀야 한다고도 했고, 신장이식을 해서 수술이 조심스럽다고도 했고, 물리치료를 일주일에 세 번쯤 받으면 좋은데 많이 불편하면 다섯 번도 간다고 하셨다.

아이고, 바쁜 사람 붙잡고 내가 얘기하느라고. 들어가요.

5분이 안되는 시간동안, 나는 할머니가 어디가 아픈지, 뭘 좋아하는지, 나이가 몇이고, 자녀가 어떻게 되며, 집에 개가 몇 마리인지, 종교가 무엇이며, 교회에서 어떤 사람과 교류하는지, 주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다 알아버렸다. 삶은 어쩌면 매우 성글게 엮여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나는 할머니가 있다.
강남 센트럴시티 맥도날드에서 혼자 점심을 먹던 긴 은발의 나이든 여자, 너무 멋져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분은 꼭 영화배우 문희처럼 생겨서 도저히 카피불가한 사람이었다면,
오늘 이 할머니는 내 생활에 근접해보였다.
나이를 먹을 수록 깨끗하게 입고, 고운 얼굴을 하고 다닐 수 있다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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