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아 목욕시키는 건 꽤나 귀찮은 일이다.
페친의 포스팅을 읽다가 나도 그게 참 두렵고 어려웠던 기억이 났다.
게다가 내 아이는 봄에 태어나 배밀이를 하기 전까지 뜨거운 여름을 보냈기 때문에 늘 땀이 흥건하여 매일 씻겨야 했다. 백일까지는 아이 아빠가 많이 씻겨주었는데 아홉살이 된 올 해 여름 끝물에 드디어 혼자 머리를 감게 되었다. 한 번 해보라고 시켰더니 곧잘 해내어 많이 칭찬해주었다. 오늘도 아이는 내가 설거지를 하는 사이에 혼자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로 잠들었는데 아무래도 감기가 걸릴 것 같아 자는 아이의 머리맡에 앉아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주었다.
생각해보면.
딸아이는 어릴 때 제 할머니가 키웠는데, 나를 처음 만난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도 혼자 머리를 못 감았다. 머리는 긴데 혼자 감을 수 없다 하니 가끔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머리를 감겨달라 했다. 머리도 혼자 묶을 줄 몰라 머리도 묶어줘야 했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그 때는 그런 속내를 들켜선 안되는 시기였기에 입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열 한 살이나 되어 혼자 감지도 못하고 묶지도 못하는 긴 머리를 하고 다니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건 내가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희한한 케이스라고 생각했던 거다.
어릴 때부터 무수하게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여고를 나오기도 했지만 친구들과 어릴 때 몇 살까지 엄마가 머리를 감겨줬는지 말해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내 이야기를 먼저 해버리는 바람에 아이들이 입을 닫았을 지도 모른다. 나도 선명하지 않은 기억은 조각조각 여기 저기 처박혀 있다가 가끔 이런 자라닮은 솥뚜껑들을 보고 문득문득 떠올라 조합이 된다. 사람마다 우울해지기 쉬운 케이스가 있다고 하는데, 그건 아마 이렇게 많은 기억들을 쪼개놓고 살다가 한 번에 조합을 하면서 오늘만 사는 게 아니라 과거도 같이 살아가는 뇌구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맘에 들거나 안 들거나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닌 유전자적 구조이거나, 성장과정의 수많은 이야기들 때문이거나. 그건 내가 부모를 택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동생이 아직 태어나기 전이니 나는 네 살이었거나 동생이 태어난 해라면 다섯 살이었을 거다.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일을 하다가 일찍 들어온 엄마가 나보고 혼자 샤워를 하라고 했다. 그 때 우리 집은 큰 방이 두 칸, 작은 방이 한 칸에 안에 욕조도 있는 목욕탕까지 딸린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나중에 가보니 연립주택과 유사했지만 그 때는 그런 구조를 모두 아파트라고 불렀다. 나는 목욕탕에 들어가 혼자 할 수 없다고 징징거렸다. 무슨 연유인지 욕조엔 물이 한 가득이었는데 아마 당시엔 단수가 되는 일도 종종 있었거나 물을 받아놓고 쓰는 문화가 습관이 되어 있어서 욕조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바가지로 물을 퍼서 씻어야 하는데 머리를 감을 수 없다고 징징대기 시작하자 동생을 임신해 배가 어지간히 나왔던 엄마가 벌컥 컴컴한 목욕탕에 들어와서 왜 혼자 머리를 못 감냐고 소리를 지르더니 내 머리채를 잡고 욕조안에 깊이 처박았다. 그리고 이제 감으라고 했다.
욕조 옆에는 2조식의 무지개 세탁기도 있었는데 나는 그 세탁기통에도 한 번 들어간 적이 있다. 엄마가 벌컥 들어서 집어넣고 죽여버린다고 했던 건데 그게 같은 날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칠곡계모사건이 터졌을 때 아이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는 기사를 보고 아 그래도 우리 모친은 버튼을 누르진 않았어. 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상한 것은 나는 그런 기억이 매우 선명한데도 불구하고 물에 대한 공포도 없고, 욕조에 대한 공포도 없고, 세탁기나 폐쇄된 공간에 대한 공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충분히 있을 만한데 없다는 게 더 이상하다. 건강하다는 얘기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몇 번 안되기 때문이다.
엄마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외롭게 자랐고 외롭게 살았다. 청춘도 외로웠고 결혼을 해서도 외로웠다. 아버지와 엄마는 서로 그 문제를 같이 해결하지 못했고 같이 살면서도, 헤어져서도 엄마는 외로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애초에 그닥 외로운 사람도 아니고 그다지 부정적이거나 우울한 사람도 아닌 듯 하여 엄마와 헤어지고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지만 엄마의 문제는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채 칠십을 바라보고 있다.
아버지가 헤어지고 난 뒤 혼자서 쭉 산 것도 아니었지만 혼자서 딸 둘을 키우는 그 짧은 기간마다 모든 화를 나에게 풀었다. 엄마의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돈벌이도 못하고 현실에 보탬도 안되는 쓸모없는 년들”이라는 개념이었다. 나는 그 개념을 당시에 알 지 못해 싸우지 못했고 그저 지속되는 매타작에 반복하여 저항할 뿐이었다. 매번 한 번도 지지 않고 바득바득 소리 지르고 반항하는 큰 딸년인 내 덕분에 진이 다 빠진 모친은 내 동생은 돌아보지도 못했다. 스물 한 살이 되어 독립해서 나올 때까지 지속되던 폭력도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게 신기하다. 어쩌면 그게 내가 여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생명력이라는 생각이 오늘에서야 든다. 엄마가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들면 나는 도망을 치거나 손으로 막거나 일일이 따져 대들거나 골목을 튀어나가거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저항했다. 주눅이 들면 사람이 이상해진다는 얘기를 듣고 공황발작이 일어난 것처럼 쇼도 해봤는데 돌아오는 건 두 배의 저주와 두 배의 폭력이었을 뿐. 게다가 우리 모친은 여고 때 육상선수 출신이라 내가 온 동네를 뛰어다녀도 금방 잡혀오기 일쑤였다. (이 부분에선 좀 웃어야)
마흔을 넘겨, 혼자서 80년대에 딸 둘을 키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 좀 알 것 같은 이제, 엄마의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결국 본인이 도전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단 한 번도 진실한 모습을 들여다보거나 마음의 거울을 보거나 단 한 명의 타인 앞에서도 그 속내를 꺼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으려고 한다.
나의 생명력이 끝없는 엄마의 매타작에 대한 저항에서 기원했다면, 엄마의 생명력은 끊임없는 원망과 저주에 기원한다. 그래서 당신은 주변에 은은하게 피해를 주면서도 매우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불사조처럼 백살은 너끈히 넘기고 살 것같은 나의 모친이 언제쯤 기운이 빠질 지, 언제쯤 생명을 다 할 지 알 수 없다. 과연 엄마의 장례식에 누가 올까 궁금하다. 아직도 엄마는 욕망이 끓어 넘쳐 “돈벌이도 못하고 자기 삶에 보탬이 안되는 훼방꾼
같은 년들”의 기본개념은 곤고하다. 그 생각은 내가 스스로 물려받아 가끔 나를 자학할 때 사용하는 도구가 되곤 한다.
부모가 아이를 바라보는 생각은 고스란히 눈동자를 통해 전달된다. 엄마와 손잡고 걸어본 적 없어도 나는 엄마가 어떤 생각으로 나를 바라봤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타인앞에 내 딸일 때는 지상최고의 여성이 되지만, 단 둘이 있을 때는 당신 인생을 망친 주범이 된다. 엄마가 나에게 들었던 각종 매와 연탄집게와 빗자루, 등산용 지팡이 따위는 오늘도 가끔 나를 내려친다. 여전히 나는 저항하고 있다.
그게 아니지 않냐고. 엄마 생각은 분명히 틀린거라고. 아닌 건 아닌거라고. 돈이 없으면 안 먹으면 되지 왜 선생 김밥을 엄마가 싸야 되냐고. 생일파티 안해도 된다고. 나는 죽어도 외상으로 두부를 사올 수 없다고. 여전히, 오늘도, 내일도, 아마 그 다음날도, 엄마는 아직도 손에 매를 들고 있고 나는 여전히 그 매를 어떻게 하면 낚아 채서 던져버릴까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2014.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