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스, 피자, 거울

1999년

냉장고에 병으로 된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사다놓던 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집의 냉장고는 검은색이었고 같이 살던 여자의 것이었다. 나는 6천원쯤 하는 커다란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냉장고에 넣으며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했다.

‘병 주스를 사 먹을 수 있다니. 고생은 이제 끝났어. 다음은 파스퇴르 우유다.’

 

2006년

몇 년이 지나 도미노피자를 시켜먹던 날을 맞이했다. 이 비싼 피자를 먹을 수 있다니. 그 날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나의 노동이 없이도 신용카드가 내 손에 주어져 있었고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시켜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갖고 싶은 책을 계속 사도 모자람이 없었다. 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많아지더라도 중단되지 않았다.

‘이건 뭐지?’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사다 놓던 날보다 훨씬 더 편안하게 살고 있는데 먹을 것은 넘쳐났다.

훨씬 더 힘들게, 치열하게,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못자면서 일을 하던 날은 도미노피자를 시켜먹는 그 날보다 더 열심히 일했는데, 도미노 피자 따위는 꿈도 꾸지 못했다. 정당하지 않는 세상이라 여겼다. 매일 매일이 꿈결이었다. 사람이 미치는 건 현실적이지 않은 일이 눈앞에 버젓이 펼쳐질 때였다. 왜 일하지 않는데 돈이 있는 걸까. 벌어다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까지, 그게 현실이라는 걸 아는 데까지, 벌어 오는 사람이 어딘가에서 노동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람은 현실에서 과거의 나처럼 살고 있고 나는 계속해서 꿈속에 살고 있었다.

‘이건 사실이 아니야.’

 

2014년

나 자신의 가장 비열한 치부를 마주하는 일은 구역질 나는 일이다. 차라리 평생 아무도 비난한 적 없이 살았다면 욕지기는 덜 할 것이다. 내 안에 살아 꿈틀거리는 오만가지의 군상들은 작은 구더기처럼 꿈틀대다가 필요한 것들을 끄집어 내어 내 얼굴에 발라대는 것은 구역질 나는 내 치부의 어떤 조종자다. 오만가지 악과 오만가지 선이 한 사람의 영혼에 모두 깃들어 있다는 걸 알고 지냈더라면, 혹은 모르는 척 평생을 살면 조금 나았을까.

나 자신도 모르는 어떤 불편함이 계속 체증처럼 가슴을 짓누르다가 어느 날 그 불편함이 기괴하게 뒤틀린 얼굴을 하고 어두운 밤 골목에 떡하니 나타나 씨익 – 하고 소름끼치게 웃는 순간이 털썩털썩 눈앞에 떨어질 때.

그런 일을 겪지 않으려면.

‘이놈의 거울은 청동으로 만들었나 아무리 닦아도 잘 보이지 않아.’

2014.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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