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습니까!

1. 강신주의 글때문에 충격받았다는 글은 어제인가 그제 봤다. 그리고 그게 퍼져서 오늘 오후부터 여기 저기 담벼락에 걸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어떻게 이리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반응이었다. 그 글은 2012년 어느 신문에 기고한 칼럼이고, 수치심에 대해 거론하며 노숙자를 끌어 들였는데, 그들은 ‘수치심도 모르는 존재’처럼 읽을 만 했다.

그 글에 대한 분노폭발은 강신주 개인에 대한 분노폭발로 이어졌고 인신공격도 이어지고 있었다.

이 분노의 대열에 쉽게 동참하지 않은 것은 일단 운전중이었고, 대부분의 반응이 ‘어떻게 철학자라는 사람이 이럴 수 있느냐’ 였기 때문인데 이 반응을 나타낸 사람들의 대다수가 나와 비슷하게도 평소, 닭그네나 귀태의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는 걸 기억하기 때문이다.

형평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권력을 가진 자, 즉 기득권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비난과 원색적인 욕설까지 할 수 있다. 때로 그런 것들은 정의로운 발언, 속시원한 이야기, 타인이 하지 못할 이야기를 대신 하여 카타르시스를 전해준다 – 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그러나 그 반대축에 서 있는 약자에 대한 비난은 무식한, 뻔뻔한, 엘리트 지상주의의, 인문학이 뭔지도 모르는, 저 딴 게 학자라고, 일컫는다. 매우 쉽게.

나는 아까 그 글을 보고, 왜,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해도 되고, 노숙자에 대한 비난은 하면 안되는가? 라고 생각했다.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약자의 정의는 무엇이며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내가 그랬다. 약자 앞에 약하고 강자 앞에 강하자는 주장아래, 강자를 씹어내어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대신 약자는 언제나 사회적 피해자라 “나를 투사하여” 맹목적으로 그들의 편을 들었다.

여기에서 내가 제시하고 싶은 것은 왜, 약자는 객관적으로 평가하거나 비판해서는 안되는 대상이냐는 것이다. 그게 과연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가?

어제 나이지리아의 한 소설가인 치마만다 아다치가 한 말이 생각난다. 단편적인 이야기의 위험성. 우리는 가까이 다가가보지 못한 약자계층에 대해 너무 단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2. 가난하다는 건 벼슬이 아니다. 부자인 것도 벼슬이 아니다.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그 모든 것도 단편적이지 않다.

권력과 부를 가진 누군가의 삶은 평생 폭력에 노출되어 이미 정신적으로 좀비(오늘 회자된 낱말이므로 활용해보도록 하자)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돈과 명예보다 삶과 행복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쉽게 불행한 부자를 시기하고 비난한다.

적어도, 이 글을 읽을 정도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가난이 몸에 익은 사람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에서 좋게 말해 자유롭다. 쉽게 말해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구걸을 하거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은 자존감이 바닥에 가닿은 것이 맞다. 그게 항상 그의 의지때문도 아니고 항상 사회적 구조 문제 때문도 아니다. 이야기는 단편적이지 않으므로.

20년전 동자동 뒷골목에서 만난 사람들은 주변에 피해를 입히며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담배를 피우며 앵벌이를 해서 냉장고를 바꾸고 보일러를 바꿨다. 싸움을 하다 가스통을 열어 불을 질러 버리기도 했다. 아침 10시에 소주병을 들고 돌아다니다 행패를 부리기도 했고, 새벽부터 출근하여 하루 종일 그들의 오줌을 닦아야 하는 경비원과 청소노동자가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몇 백원을 달라고 생짜를 쓰기도 했고,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 이불이나 옷을 훔쳐 가기도 했다. 그들에게 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오늘 여러사람들이 비난한 강신주의 표현에 의한 ‘좀비같은 노숙자’이거나 그보다 조금 형편이 나아 쪽방 한 칸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만큼 법의 외부에서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부류들은 또 있는데 바로 고위 권력층이다.

3. 경제적 약자를, 노점상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타당한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세금 한 푼 내지 않는다. 당신이 며칠 동안 애를 써서 겨우 접속한 국세청 홈페이지에서 소득공제 자료를 찾고 어떻게 10원이라도 더 환원 받을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일을 그들은 안 한다 말이다. 그들이 받는 혜택이 없기에 세금도 내지 않으며, 때로는 어느 학교의 담벼락에 무단으로 조립식 건물을 짓고 통행을 방해하며 몇 년씩 재산권리를 주장하다가 관공서에서 철거를 해서 세금 잘 내는 시민들에게 돌려줄 공원을 만들겠다고 하면 드러누워 폭력경찰 물러가라 ㅇㅇ시장 자폭하라. 등등의 말을 내뱉을 수 있다는 거다.

물론 이런 예시도 단편적이다. 우리는 항상 이 단편적 이야기의 반대편도 살펴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긴 걸 여기까지 읽은, 혹은 강신주가 누구인지 아는 바로 우리- 나를 포함하여) 약자를 비난하기 꺼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출발선이 달랐거나 혹은 같은 선에서 출발했더라도 여러가지 개인적 사회적 이유 때문에 많은 기회를 박탈당했을 거라고 잠재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때로 그들 중의 일부가, 스스로 그 기회를 계속 해서 거절해왔거나, 마음에 맺힌 상처 때문에 스스로를 주변인으로 규정하고 계속 사회에서 겉돌았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들을 어떻게든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내부의 인물로 끌어당기기 위함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 암묵적 동의 안에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법 안의 테두리에 존재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법과 사회란, 그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은 보호할지라도 그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내던지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정당해보이는” 사회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4. 어쩌면 강신주의 “좀비같고 강시 같은 노숙자들”에 대한 반응이 과한 것은 아닌가 경계해본다. 무릇 학자라면, 더구나 인문학 학자라면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인문학이란 인간의 무늬를 곱게 아로 새기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혜택받은 지식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설령 시궁창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더라도 어찌됬건 그들은 문자 해독 능력을 부여받았고 남들보다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좋은 뇌를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므로. 때로는 그들이 선택하지 않은 타고난 혜택 때문에, 혹은 주변의 환경 덕분에 그렇게 될 수도 있으나 절대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의해 지식인이 될 수도 있다. 의지도, 타고난 힘이라, 그 역시 혜택이라 쉽게 말해도 되는 걸까.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사회적 공적 자리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모두 “그러면 안돼” 라고 쉬쉬하며 동의하는 어떤 규칙에 대해서 과감히 아니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오늘 나는 강신주의 글을 읽고 한 개인의 의견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는가 우려한다. 혹은 잘나가는 대중철학자를 자칭한 그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전혀 없었는가 확인하고 싶다. 몇 달전 서점에 갔다가 강신주의 책이 비소설, 인문 부분 베스트셀러 대열에 다수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어… 이 양반 심하네. 라는 생각을 한 적 있다. 게다가 그는 모 방송국의 예능프로그램에까지 출연했으며, 공중파에서 강의도 한다. 적어도 대중들에게 매우 알려진 사람이며 알려지고 있는 중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의 역할은 인문철학계의 공지영쯤이다. 공지영에 대한 문학적 성취나 작품성, 언어조탁성을 떠나 공지영을 인정하게 된 계기는 1년에 책 두 권 읽을까 말까 한 사람이 공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본 다음부터다. 그래 때로 저런 역할을 해내는 사람이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말하자면 예전에 MBC 방송국에서 했던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에서 책을 소개할 때 있었던 논란과 같은 거다. 그 프로그램은 도서시장을 분명히 부흥시켰다. 신동엽이라는 이름은 개그맨의 이름으로만 알던 사람들에게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를 사 읽게 했다. 아무리 좋은 글도, 사람들에게 읽히지 못하면 일기와 다름없다. 세상 가장 평등한 전달 수단이 글자이며 책이라 하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 마당에 대중적 철학자 하나 있으면 좋지 아니한가.

공지영이나, 강신주 같은 대중적인 지식인들은 위험하지만 그들의 순기능도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이 또 한 번의 단편적이지 않은 접근이겠다. 그가 말한 노숙자에 대한 표현도 내가 읽기엔 달을 보랬더니 손가락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가 노숙자를 비난하기 위한 글을 썼던가. 그 글에서 노숙자는 장치였다. 물론 사람의 삶을 놓고 대상화 한다는 비난은 면하기 어렵겠으나 어떤 삶을 대상화하지 않고 글을 이끌어 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강신주가 그만큼이나 되는 사람인가는 세월이 더 흘러봐야 알겠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수치심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리너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왜, 그가 말한 글의 장치에 대한 비유 하나에 이렇게 화를 내는가.

만일 그가, “대통령이랍시고 눈알은 비어 있고 영혼이 없는 미소를 내뱉으며.” 라고 썼다면 뭐라고 답했을 것인가. 그리고 그가 만일 “대통령이랍시고 영혼이 없는 미소를 내뱉는” 이라는 수식어를 2011년에 썼을 때와 2003년에 썼을 때라면 얼마나 다른 평가가 나타나겠는가. 내가 믿는 진실과 내가 믿는 상식이 절대적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그게 지식인의 자세일까? 정말?

2014. 1. 16.

그의 원문글은 다음 링크다.

http://pdf.joins.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2201204080056

2012년 4월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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