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한끗차이

밤.

건너편 아파트 단지의 테니스장에는 조명이 눈부시다.

나는 개를 끌고 아파트 단지 한 바퀴를 돈다.

지하주차장은 모든 아파트의 현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사람이 걸어나올 길은 없다.

차만 다닐 수 있는 주차장 입구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온다.

저 남자는 왜 저 길로 올라오는 것일까.

가끔 이 보다 더 늦은 시간, 밤 11시가 넘어가 혼자 단지를 걷던 남자가 출구를 묻는 경우가 있다. 대리기사들이다.

그들에게 출구를 알려주고 돌아서며 생각한다. 인생은 한 끗차이.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나는 저 사람에게 출구를 알려주고, 저 사람은 나에게 출구를 묻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서 헤어졌던가.

 

꽉 막힌 양재대로에서 귤을 파는 사내가 있다.

여름이 되면 참외를 판다.

그 전에는 뻥튀기를 팔거나 전자모기채를 파는 사내들도 있었다.

그 때도 생각했다. 인생은 한 끗차이.

우리는 어디서 헤어져서 나는 차 안에서 저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랬다. 주유소에서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면서 기름총을 꽂고 휴지를 갖다주고 영수증을 끊을 때 아가씨 이거 먹어. 하면서 차 안에 있던 귤이나 사탕을 주고 가던 사내들이 있었다.

큰 아버지가 근무했던 신문사의 회사 차량을 보고 큰아버지의 이름을 물었다.

그들은 나에게 그를 어떻게 아느냐 물었다. 나는 그저 먼 친척이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 때 나에겐 큰아버지의 명예보다 비빌 언덕, 나의 혈연이, 정확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안도감, 혹은 한 달에 30만원쯤의 돈이 필요했다. 그 때 큰아버지에게 그런 걸 받기 위해 찾아가지 못했다. 인생은 한 끗차이. 그 때 나는 기름 쩐 내나는 옷을 어찌하지 못하고 손을 열 번씩 씻고 저녁마다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인데 지우고 싶지는 않다.

비 오는 날 버스 정류장에서 과격한 차가 흙탕물을 튀기고 지나가 단 한 벌인 정장바지가 홀딱 젖어버린 순간과, 동생은 굶고 있을텐데 이걸 과연 먹어도 되나 한 참을 망설인 끝에 혼자 설렁탕을 사먹었던 기억과, Shut the fuck up 이라고 소리지르던 고객님에 대해서, 잊지 않으려 한다. 과거를 언제나 끌어안고 가고 싶은 것은 인생은 한끗차이라는 걸 잊고 싶지 않아서다. 내가 누군가에게 흙탕물을 튀기지 않기 위해서, 지하주차장에서 높은 구두를 신고 억지 웃음을 짓는 언니들에게 사탕 하나 나눠주기 위해서, 나에게 밥을 가져다 주는 사람에게 욕하지 않기 위해서.

기억하고 싶다.

 

인생은 한 끗차이.

 

2013.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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