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질하지 말자

을질하지 말자
갑질하지 말자는 말은 타인에게 하는 말이다. 강자가 강자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갑질하지 말자는 말은 교묘하게 자기가 갑이라는 착각을 나타내거나 갑들에게 조금이라도 기세등등하게 보이려는 요청이다.
스스로 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몇 안된다. 누군가의 갑은 누군가의 을이다.
백화점에 입점한 업체의 사장은 직원에게 갑이지만 고객에게 을이고 백화점에게도 을이다. 백화점이 갑이라도 결국 업체를 상대하는 과장은 상사의 을이다. 사장은 주주들의 을이고 최고주식을 보유한 그룹의 회장만이 갑이다.
삼성전자의 사장도 어딘가에 부품을 보낸다. 그러면 그 사람도 을이 된다.

이 나라에 갑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갑질하지 말자는 그저 공허한 외침이고 부탁이다. 그보다는 주체적으로 을질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예전엔 그런 게 있었다.
장사꾼들도 손님들과 잘 싸웠다.
너같은 새끼한테 물건 안 팔아!
너 같은 손님 필요없으니 나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사장님들이 있었고, 자기 직원을 보호하고 수모주는 손님을 내몰았다.

어디에서나 물건을 사면서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하는 습관이 있다. 아이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나는 그 사람이 나에게 물건을 팔지 않거나, 여기 가게를 내지 않았거나, 오늘 문을 열지 않았다면 내가 이 물건을 살 수 없을 것을 안다. 문을 열어줘서 고맙고 필요한 물건을 내주어서 고맙고 게다가 친절하기까지 하다면 고마운 거 아닌가. 고맙다는 말은 10원도 들지 않고 나를 세워주는 유용한 수단이다.

손님은 주인에게 고마워 할 줄 알아야 하기에 주인은 손님에게 을이 아니라 갑일 수도 있다.
어느날부터 사람들이 눈앞에 이익을 쫒아 당장 내일을 생각하면서 내년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 순간에 갑을관계는 탄탄하게 반석을 다졌다.

그 때부터 무한친절이 생겼다.

티비가 고장나서 서비스를 받아야 되는데 기사가 안 온다면 티비를 고칠 수 없다. 어떻게 서비스기사가 마냥 을인가. 물건을 안 팔겠다면 필요한 사람은 살 수 없다. 대리점이 물건을 안 받겠다면 본사는 재고가 쌓인다. 왜 갑자기 을들이 무더기로 탄생했나.

오늘을 살아야 되는데 당장 내일을 걱정하고 1년후를 봐야되는데 걱정하느라 아무 것도 못하면서 당장 내일을 걱정한다. 내년에 임대료가 오를 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내일 사고 싶은 물건을 생각하다 오늘을 보내는 삶. 수많은 을들의 탄생이다.

을로 사는 삶은 자존감의 추락이 필수라서 좋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우울하다. 사람의 안정감은 좋거나 싫거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크게 변함이 없어야 한다. 계약이 성사되거나 성과가 좋으면 잠깐 반짝 행복했다가 다시 우울과 자괴감이 온 몸을 휘감는 일이 반복된다.

경쟁자가 많다는 것이 몸에 배어 그렇다. 그건 실제적으로 나와 똑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데 나와 똑같은 사람이 많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꺼내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와 똑같은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너같은 새끼한테 물건 안 팔아 꺼져 이 개새끼야 라고 외치는 장사꾼은 매력적이다. 사기꾼이라 볼펜을 갖다놓고 수성펜이라고 우기지만 않는다면 묘한 신뢰감이 생긴다. 뭔가 있어보이는 거다. 그게 사람의 “곤조”가 가져오는 힘이다.

판매직에 있을 때 절대 을이 되지 않는 언니가 있었다. 옷을 팔면서도 까다로운 손님에게 나하고 지금 장난하냐 협박도 불사했다. 정확하게 코디해주고 물건을 골라주던 그 여자는 자기 자존심이 있었다. 내가 골라주는 대로 입어봐 내가 말하는 걸로 사가봐. 그 여자는 불친절하다는 소리를 들을 지언정 40명 직원중에 언제나 판매1위였다.
재수없을 만큼 을이면서 갑인척 하던 그 사람에겐 믿음직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건 약간의 허세가 가져오는 “뭔가 있어보이는” 신뢰감이었다.

세상의 모든 을들이 세상의 수퍼갑은 없다는 걸 명확히 곱씹으면서 세상의 모든 갑을관계는
그저 서류상의 편의를 위해 적은 조항이고 계약의 문제이지 그게 주종관계를 말하는 건 아닌데. 조금만 더 넓게 보고 스스로 을이기를 거부한다면 갑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지리라 믿는데.

내가 .. 불가능한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그냥 을로 사는 게 편한 건 아니고?

2013.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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