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일요일

일요일,

지난 달에 국립극단 안티고네를 예약했고,

나는 마감을 해야 할 일이 있고,

날씨는 더없이 좋고,

벚꽃잎이 흩날리는 찬란한 일요일이였다.

 

예정대로였다면,

오전에 일찍 일어나 일을 하다가 여유있게 공연장에 가서 연극을 보고 집에 돌아오면 될 일이었다. 어린 아이는 아빠와 함께 있을 것이므로.

 

그러나, 남편은 급작스럽게 출장을 갔고, 그 출장은 늘 급작스러우며, 일정은 전적으로 본인의 사정과 거래처의 문제에 준하기 때문에 변경되는 일은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 외에는 없으며, 그런 급박한 출장이 잡히는 경우는 주로 내가 모든 스케줄을 변경해야 하는 결과가 있다.

금요일에 남편이 출장을 갔고,

나는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아이와 놀고 시간을 보내고 밥을 해먹이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려고 매우 매우 애를 썼으며, 토요일엔 맛있는 콩나물과 쭈꾸미를 넣고 맛있는 탕도 끓여 먹었으며, 오늘도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고 여유있게 연극을 보러 가고 아이는 제 이모에게 맡겨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일은 순조롭지 않아 나는 늦게 일어났고, 아이는 뭉기적 거렸고, 애 이모도 마감해야 할 일이 있어 피곤한 상태라 일찍부터 애를 보내기가, 애한테도 내 동생한테도 미안해서 뭉기적거렸고, 1시간 10분 전에 차를 몰고 공연장으로 출발을 했는데 날씨가 너무 좋은 탓에 길이 엄청나게 막혀서 자동차 전용도로에 진입도 못하고 차를 돌려서 돌아왔으며, 마음을 비우고 아이와 함께 꽃구경이나 하자 하고 호숫가에 갔으나 아이는 가는 길에 차 안에서 곯아 떨어져 버렸으며, 밥을 먹고 몇 가지 구경을 하다가 집에 돌아와서 9시에 아이를 재우고 나의 남은 일정을 소화하고자 했지만 아이는 낮에 푹 낮잠을 잔 탓에 11시가 넘도록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고, 나는 11시 20분에서야 컴퓨터에 앉아서 미진한 일을 하나 마무리 했다.

이건 모두 내가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건 가정의 경제를 백프로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며, 육아를 주로 담당해야 하는 환경의 문제이며, 그 와중에도 내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고 내 일을 하겠다고 붙잡고 있기 때문이며, 결정적으로 고등학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예전에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기지배 공부 해봤자 팔자 사나와진다” 라는 말이 바로 이 말이었다 싶다. 차라리 배운 것도 없고 꿈도 없고 돈 벌어다 주는 사내 밑에서 고분고분하게 애나 키우고 엄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자기 존재가치 따위 단 한 번도 고민하지 않은 채 그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산다면 인생은 오히려 더 풍요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억울하다거나, 화가 나는 단계도 지났다. 그저 이제는 아, 아직 이 나라에서 배운 여자가 사는 것은 매우, 쉽지 않고, 팔자 사나운 일이구나. 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2013 4. 21.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