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로 쓰는 생애사 – 일곱 번째 이야기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 일곱 번 째 수업 – 비 오는 날의 추억

 

비가 올 줄 알았는데 맑게 개인 아침이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먼 바다의 태풍이 오키나와 근처에 머무르며 전국에 비를 뿌렸다. 폭우가 그친 하늘은 푸르렀고, 오랜만에 공기도 맑았다.

20분 먼저 도착했더니 아무도 없었다. 내가 일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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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교실에 1등으로 도착하면 느꼈던 쾌감이 기억났다. 누가 제일 먼저 오나 지켜봐야겠다는 장난기 서린 마음으로 책상에 앉았다. 에어컨이 켜져 있었다. 담당선생님이 이미 왔다 간 모양이다.

책상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고 다이어리를 꺼내는데 승민 씨와 동선 씨가 같이 들어왔다. 사무실에 들러 오늘 쓸 재료를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승민 씨는 키위주스 같은 걸 손에 들고 있었고 동선 씨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테이프 커팅기를 가져 왔다. 나는 “오.. 둘이 같이 오는 건가요…” 하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둘은 쑥스럽게 웃었다. 승민 씨가 에어컨을 켜뒀으니 문을 닫아야 한다며 문을 닫았다. 승민 씨가 교실 밖으로 왔다갔다 하는 사이 동선 씨가 말을 시작했다.

“저한테 관심을 보이는 친구들이 많아서요. 조금 불편할 때가 있어요.”

“아 그런가요? 어떤 친구들이예요? 동선 씨가 인기 짱인가봐요.”

동선 씨가 수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수정이 누나가 문자를 자꾸 보내는데요. 자기 화난 거 속상한 거 막 저한테 너무 많이 얘기해서 좀 피곤해요. 그리고 자기 얘기 안 들어주고 편 들어주지 않으면 저한테 막 화를 내서요. 부딪힘이 있어요.”

“아, 그렇군요. 수정 씨가 동선 씨를 좋아하나봐요. 승민 씨는 어때요?”

동선 씨가 웃으며 “승민이는 괜찮아요. 저를 잘 챙겨줘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뭔가 장난을 더 치고 싶었지만 웃으며 들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웃음이 절로 났다. 청춘 아닌가. 좋아한다는 건 여러 가지 관계의 가능성이 있으니까, 굳이 더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동선 씨가 나에게 얘기를 술술 해 주는 게 재미났다.

나는 동선 씨와 승민 씨에게 커피 한 잔을 갖다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한 번 부탁해보고 싶었다. 학우들이 직접 만든 커피는 아니더라도 일부러 얻어먹어보고 싶었다. 동선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가 다녀오겠다고 했다. 강사샘 커피라고 하면 그냥 줄거라고 말했다. 동선 씨가 1층 까페로 내려간 사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수정 씨가 들어왔다. 그리고 재민 씨도 들어왔다.

 

학우들이 무슨 얘기를 하다가 또 연애 얘기가 나왔는데 수정 씨가 “연애는 운이야.”라고 했다. 나는 또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럼 수정 씨의 운은 누굴까요?” 하고 물었더니 수정 씨가 자지러지듯 웃으며 책상에 털푸덕 엎어졌다.

승민 씨가 “띠로리~”라는 소리를 효과음처럼 내며 장난을 쳤다.

“동선이는 동생이야.” 수정 씨가 항변하듯 말했다. 오늘은 수정 씨 기분이 상당히 좋아보였다.

승민 씨는 “수정 언니는 앙탈을 부려요.”라고 말을 보탰다. 그리고는 앙탈부리는 모습을 몸으로 표현해줬다. 내가 다이어리를 뒤적이는 사이에 갑자기 수정 씨와 승민 씨가 노래를 불렀다. 무슨 노래냐고 물으니 걸그룹 시크릿의 “Love is move”라는 노래라 했다. 승민 씨가 율동까지 곁들여 몸동작을 하며 노래를 불러줬다.

오늘 제일 늦게 온 사람은 수영 씨였다. 늦었어요. 늦었어요. 하며 들어오는 모습이 앨리스의 이상한 모험에 나오는 하얀 토끼 같았다. 수영 씨를 보면 조끼에서 시계를 꺼내 보며 마구 달려가는 흰 토끼가 생각난다. 수영 씨는 귀가 다 나았고 나에게 팔을 보여주며 여기 저기 상처가 나서 최선규 아나운서와 샬롬남매가 못 될 거라고 슬퍼했다. 피부도 예민한 모양인데 감각도 예민하니 많이 긁고 딱지를 뜯어낸 것 같았다. 팔에 얼룩덜룩한 상처가 많았다. 수영 씨가 팔의 상처를 보여주며 속상해하길래 나도 상처가 많다고 했더니 내 팔을 마구 살폈다. 나는 “선생님은 발에 상처가 많아요.”라고 대답했다.

비가 오는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냐고 물으며 칠판에 몇 가지 의성어와 의태어를 적었다. 부슬부슬, 보슬보슬, 추적추적, 뚝뚝뚝, 주룩주룩, 쏴아, 등등 승민 씨가 태풍이 오는 이야기를 하며 우르르쾅쾅을 말했다. 나는 비오는 날의 기억에 대해서 적어보자고 권했는데 다들 조금 어려운 모양이었다. 과거의 기억이 이 교실에서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승민 씨는 비 오는 날 집에서 엄마 아빠와 TV를 보며 쉬었던 기억을 적었고 수정 씨는 감각적으로 비 내리는 소리가 음악소리 같다고 적었다. 은혜 씨는 오늘도 열심히 또박또박 글자를 적어내려갔는데 교회에 갔다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바로 집에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어느 선생님 댁에 머물며 젖은 옷가지를 말렸던 기억을 썼다.

채영 씨는 비가 와서 좋았다. 끈적끈적했다, 라는 표현을 썼다.

재민 씨는 이렇게 썼다. 옆에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앉아서 한 가지 한 가지 선택하며 말을 만들었다.

“비 왔을 때가 기억나요. 23살 때 비가 많이 왔어요. 비가 많이 와서 기분이 나빴어요. 점심 때 일하러 가고 있었어요. 우산은 파란 우산이에요. 집에 와서 엄마가 만든 밥을 먹었어요.” 담백하게 쓴 재민 씨의 글이 흐뭇했다.

기현 씨는 자기가 쓴 글을 발표하려고 일어났을 때 옆에 앉은 재민 씨의 손을 살짝 잡았다.

손을 잡은 채로 읽더니 슬며시 손을 놓았다.

“비가 오면 기분이 좋아요

시원하기 때문이에요

검정색 우산이 있는데 나가기 싫어요

옷이 젖으니까요

어제는 비가 조금 왔는데 운동하러

가고 싶었어요 우산쓰고 버스타고

갔어요 운동하고 집에 올 때 우산쓰고

걸어왔어요 비오는 길을 걸어오니 좋았어요

사람들도 우산 쓰고 다녔어요“

기현 씨는 옆에 서서 계속 다음 문장을 뭘 써야 하는지 의논해야 한다. 마침표는 안 찍는 버릇이 있는데 마치 계속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뜻 같아서 나는 마침표 없는 문장도 흥미롭게 읽는다.

처음에 수정 씨가 적은 글을 보고 다른 글을 하나 더 써달라고 종이 한 장을 내주었다.

“어제 주말에 내가 비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비가 내리는 소리 꼭 음악같다. 우산을 쓴 내가 음악 같은 소리를 듣고 있네. 그녀의 행복은 음악같은 비 내리는 소리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비가 싫지는 않은 거라고 말해주자.”

흰 종이 위에 내가 제목을 적어서 넘겼다. “우산을 쓰고 빗속에 서 있는 내 모습”. 수정 씨는 부끄러워하다가 큼직한 글씨로 다음 글을 적었다.

“빗물 속에 내리는 걸 나는 들었다. 팝콘처럼 툭툭 사탕처럼 촉촉하고 우리들의 미소처럼 톡톡 햇살처럼 나의 마음 따사로운 빗소리 ♡ 꼭 사랑하는 친구들처럼 내렸다가 안 내렸다가 한다.”

수영 씨는 여전히 손을 마구 흔들며 과거의 기억을 얘기했다.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건 어쩐지 부자가 된 것 같다.

“나는 어릴 때 교회 유치원에서 비가 많이 오는 게 기억났다. 밖에 빗소리가 와서 그런가 보다. 보슬보슬 비가 왔다. 너무 비가 오면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게 기억났다. 마치 크리스천이 될 것이다. 꼭 크리스천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최선규 아나운서와 함께 Rhythm of the Rain 노래를 무대에 서고 싶은 느낌이다.” 문장의 조응이 잘 맞지 않지만 보슬보슬, 이라는 의태어를 넣은 게 인상적이었다. 결국 오늘도 수영 씨의 글은 최선규 아나운서로 귀결되었다. 최선규 아나운서를 만날 수 있으면 수영 씨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너무 좋아서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다.

혜은 씨는 길게 먹은 음식을 적었다. “비가 와서 우산 써요. 기분이 좋아 방긋방긋 웃어 빗소리 연두색 우산 쓰고 집에 가요 시원하게 아이스크림 먹고 부추전 부침개 먹었다 김치전 부침개 먹고 부라보콘 아이스크림 먹었다 팥빙수 먹고 파시통통 먹고 냉면 먹었다 둥지냉면 물냉면 먹고 수박 먹었어 포도먹고 메론 먹었다 메론 아이스크림 먹고 쿠앤크 아이스크림 먹었다 메로나 아이스크림 먹고 비비빅 아이스크림 먹었다 쿠앤크 아이스크림 먹고 삼겹살 먹었다 고기 먹었다 족발하고 냉면 맛있게 먹었다 피스타치오 부라보콘 아이스크림 먹고 달래전 부침개 먹었다 슬러시 먹고 둥지냉면 비빔냉면 먹었더 메론 아이스크림 먹고 메론 슬러시 먹었어 빵먹고 과자 먹었다 요구르트 먹고 앙팡 요구르트 마셨다 음료수 마시고 메론마루 아이스크림 먹었다 앙팡 요구르트 마시고 애플쨈쿠끼 먹었다 딸기쿠기 먹고 김치찌개 맛있게 끓여 먹었다 서울우유 체다치즈 먹어서 치즈 좋아서 먹고 있어 짜장면 짬뽕 먹고 만두 먹었다 여름에 비오는 날 맛있게 많이 먹고 운동하러 갑니다 뚝방길 걸어요 살찌는데 많이 먹어 운돈해야지 다이어트 해야 돼 빵 조금만 먹고 산에 다니기 커피 조금만 마셔 밀가루 조금만 먹어 집에서 국정홍보처들어가요 아이스크림 조금만 먹고 적당히 먹었다.”

혜은 씨의 글은 소리를 내서 읽어보면 운율이 느껴진다. 혜은 씨가 읽을 때 운율을 넣어서 읽는데 항상 3,4조를 맞춰 글을 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3,4 운율을 맞춰 읽어보면 리듬이 느껴질 것이다. 아이스크림은 다섯 글자지만 소리가 짧고, 빵, 같은 것은 소리가 길어서 한국어에 살아있는 운율이 매우 생생하다. 이 글은 모두 먹을 거만 적은 것 같지만 혜은 씨가 비오는 날 먹었던 음식을 나열한 것이다.

다들 글을 쓰고 발표하는데 승민 씨가 동선 씨에게 쓴 편지를 읽겠다고 했다. 사랑해, 결혼하자, 는 내용이 있었는데 나는 아무도 없을 때 몰래 하는 게 좋겠다고 설득했다. 이건 중요한 얘기니까, 친구들이 놀리지 않도록, 몰래 몰래, 단 둘이 있을 때 고백하는 게 좋겠다며 말렸다. 승민씨는 그래도 발표하겠다고 우기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편지는 두 번 접어 가지고 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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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시간에는 빗방울 모양으로 오려낸 종이를 나눠주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것들을 그려보기로 했다. 선생님이 일일이 한 명씩 확인하고 지도하며 열심히 책상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혜은 씨는 모든 걸 초록색으로 그렸다. 왜 다 초록색이냐고 물었더니 메로나 색깔이라고 답했다. 혜은 씨는 계속 웃으면서 그림을 그렸다.

칠판에 분홍 구름과 파란 구름을 붙이고 물방울들을 연결해서 붙였다. 미술 선생님이 학우들의 그림을 봐주는 동안 분홍구름이 떨어져 내가 칠판앞으로 다가가 다시 구름을 붙였다. 채영 씨와 수정 씨가 손가락 하트를 그리며 나를 쳐다봤다. 사소한 일에도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기현 씨가 자동차 그림을 그려넣었다. 비오는 날 자동차는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이건 레이 자동차인데 하얀색이라고 했다. 비오는 날 하얀 레이 자동차에 채영이를 태우고 놀러갈 거라고 했다. 채영 씨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양팔을 높게 들어 기뻐했다. 기현 씨는 빨간 자동차는 불자동차 같아서 좋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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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우들이 그림을 그리고 붙이는 걸 턱을 괴고 바라보았다. 마음이 편했다. 평화로운 시간이다. 학우들이 악수를 하고 돌아간 다음 담당 복지사와 미술선생님, 나 셋이서 빗방울 그림을 어떻게 보관할 것인가 얘기했다. 일단 파일에 담긴 할거지만 스캔을 어찌할까 물어서 한 사람이 그림 빗방울 세 개를 한꺼번에 스캔해두면 나중에 자석툴로 따서 디자인을 할 수 있으니 개별로 정리해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일주일이 지나면 학우들을 다시 만날 것이다. 그 사이에 승민 씨가 동선 씨에게 편지를 전해줄까 궁금하다. 기현씨는 운전을 하기 어려울텐데, 하얀색 레이에 채영씨랑 같이 타고 여행을 갈 날이 올까. 그리고 이 수업에 커플이 나타나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그리고 커플이 안된 학우들은 살짝 삐치기도 할까? 여러 가지가 궁금해졌다. 연애는 고달프고 힘든 일이다. 청춘의 연애는 그래도 반짝이니까. 학우들도 모두 누군가에게는 유달리 반짝이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2018년 7월 3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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