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자의 #metoo

중학교 2학년때였다.
초등학교 4학년무렵부터 의붓아버지와 같이 살았다.
아버지의 빈 자리를 채워주던 사람이라 살갑게 굴었고, 나는 그가 싫지 않았다. 엄마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두 사람은 갈등이 깊어졌고 그 사이에 나와 내 동생이 있었다.

혼자 늦잠을 자던 일요일 아침에 그가 내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왔고 여기 저기를 만졌다. 여기와 저기는, 내가 2차 성징이 시작되었다는 걸 명징하게 나타내주는 두 곳을 말한다.
그일 이후, 나는 다른 일로 그와 격렬하게 싸우다 몇 대를 맞고 집을 나가 밤을 새고 들어온 적이 있고, 그 이후로 오래 지나지 않아 엄마와 그 사람은 헤어졌다.
그때 나는 열 네 살이었고, 지금 나는 마흔 네 살인데, 칠순을 넘긴 우리 모친에게 이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이 사실을 직접 엄마에게 말한다면, 그것으로 엄마의 인생이 물리적으로 깔끔하게 끝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신철석이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중고등학교를 지나며 교사들의 적절치 않은, 지금으로 따지면 성희롱이나 그때로 따지면 음담패설에 불과했던 그 자잘하고 무수했던 이야기들은 차치하고,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안에서 제 음부를 내 엉덩이에 밀어대던 얼굴도 마주치지 못한 수많은 성기들과 학교 앞에서 제 성기를 내놓고 자위행위를 하던 눈도 마주치지 못한 그 성기들은, 존재가 아닌 그저 좆으로만 남았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동생과 단 둘이 살던 이대 앞 대흥동 자취방에 잠든 사이 들어와 불을 끄고 얼굴을 살피던 리바이스 청남방을 입은 그 놈과, 보광동 반지하방의 화장실 문을 열던 그 놈과, 현관 문이 열린 사이 거실에 들어와 팬티를 훔쳐가 골목 사이에 쌓아두던 놈과, 고시원 방에서 자꾸 여자들의 팬티를 훔치던 그 놈도, 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스무 살이 넘어 만으로 스무 살이 되기 두 달전, 나는 라이브 호프집의 밴드 싱어였고, 내가 속한 밴드의 리더의 후배가 운전기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실직상태였는데 그 이전엔 유명가수의 소속사에서 로드매니저와 운전기사로 일했다고 자랑을 했다. 그 당시엔 어머니를 그리는 노래로 유명한 젊은 가수의 매니저 자리를 따내려고 애를 쓰던 중이었고 호감인지 질척댐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을 자주 나에게 보냈다. 그가 업계 사람을 소개해주겠다며 나를 술자리로 불렀다. 나는 일감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그 자리에 동석했다. 경향신문사 길 건너 편의 작은 술집이었다. 그 자리에 와 있던 신문사 간부는 내 이력을 듣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고 응원을 해주고 자리를 떴고 그 가수는 사실 나에게 별 다른 관심이 없었다. 나를 불렀던 연예계 종사자, 그 사람은 키가 180이 훌쩍 넘는 거구에 가장 완력이 좋을 20대 후반의 남자였다. 술 자리가 파하고 집에 가겠다는 나에게 그는 화를 내며 길바닥에서 물건을 부수고 소리를 지르며 깽판을 쳤다. 어떻게든 그 자리를 수습하려는 나에게 여관이 들어가 눕는 것을 보고 가달라고 그가 애원했다. 서교동의 한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그가 나를 때려 눕혔고, 나는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했으나 그에게 머리채를 잡혀 다시 바닥에 내다꽂혔다. 같이 입실을 하는 순간 강간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그가 소리쳤고, 그는 허리띠를 풀어 온몸을 때렸다. 아, 그리고, 나는 그때 생리중이었다.
아침이 되어 인검이 나왔다. 경찰이 문을 두들겼고 나는 경찰에게 신분증을 보였다. 그때 내 표정이 어떠했는지 나는 기억할 수 없다. 경찰은 내가 미성년자라고 했고 그의 신분증을 조회하더니 기소중지 중인 사람이 미성년자 데리고 이런 데 와도 되냐고 비아냥 거렸다. 그리고 경찰은 나에게 “아가씨 빨리 집에 가요.” 라며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여관을 떴다.
그의 이름은 박명호다. 나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명확히 기억한다. 그의 커다랗던 몸의 무게도 가끔 기억난다. 나는 그 이후로 그를 몇 번 더 봤으나 밴드리더가 사기사건으로 잠적한 이후 나는 그를 다시 만난 적 없다.

그날 여관방에서 나온 정오쯤에 햇빛은 뜨거웠고, 한 여름이었다. 원피스를 입었는데 어깨끈이 찢어졌던 것 같다.
택시를 타고 고시원으로 돌아가, 공동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했다. 마음대로 하루를 쉬거나, 아프다고 일을 거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이후, 나는 그를 경찰에 고발하거나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도 그 사실을 제대로 서술한 적 없다. 그때를 회상하는 글을 쓸 때면 “성폭행을 당했다.” 라고만 적었다. 최근 벌어진 #미투운동을 보면서 자꾸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선명해졌다. 한 가지 더 추가된 것은, 내가 왜 그 일에 대해 괴로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거나, 세상을 등지거나 당시엔 우울증조차 겪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감정을 모두 꼬깃꼬깃 접어서 아무도 못 보는 곳에 쑤셔 박고 산 세월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후의 내 행동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습관처럼 매일을 살았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만큼의 절망을 만났을 때, 살아남는 방법은 습관처럼 사는 것이리라. 나는 그렇게 습관처럼 그 시절을 살아냈을 뿐이다.

그 이후에 있던 수많은 성희롱은 딱히 불쾌한 지경도 아니었다. 그저 같잖다고 느꼈을 뿐이다. 어쩌면 내 감정을 단단하게 만들면서 넘기고 넘겼을 것이다. 매번 닥칠 때마다 고통스러워 봤자, 나만 다친다는 걸 깨달은 동물적 감각일 것이다.
결혼 후, 애 엄마가 된 뒤에도, 마흔즈음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일로 엮인 자리에서 한 차례의 성추행과 성희롱이 있었다.

한 사람은 지역행사에 왔던 젊은이였는데 술자리에서 옆에 앉은 사람을 쓰다듬는 것이 습관 같았다. 다음날 그의 선배였던 나의 지인에게 전화를 해서 엄중하게 경고하는 걸로 넘어갔다. 그의 선배는 나에게 깍뜻하게 최선을 다해 사과했다. 한 사람은 지역에서 알게된 엄마 또래의 지식인이었는다. 일 때문에 같이 회의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녁 식사에서 그 분은 맥주 몇 잔을 했고 나는 어르신들이 많은 자리라 술을 삼가했다. 겨우 그 정도 술에 거나해진 그 분이 내 차 조수석에 앉아 운전하는 나에게 “한국 차는 키스하기가 참 안 좋다”는 둥, 부인하고 사이가 안 좋다는 둥, 으례 쓰는 촌스러운 멘트를 날려 피식 웃었다. 나는 그 이후로 그를 안 만났으나 그분은 아마 본인의 언행을 기억못할 것 같다. 상습법이기엔 너무 어설펐다.

미투운동은, 나도 당했다, 라는 것을 넘어 나도 고발한다, 라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내가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 굳이 불편하게 공개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나 자신에게 물었다. 이 글을 쓰려고 일주일 넘게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왜 그 사건을 고발하지 못했으며, 지금의 나는 왜 이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 내려 하는가. 성폭행과 아동학대의 생존자는, 언론지상에 유사한 폭력사건이 공개될 때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린다. 묻어뒀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고, 무의식적 가해가 다시 일어난다. 그 기저엔 죄책감도 있다.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죄책감 말이다.

며칠 전, 나의 늙은 개와 함께 집 근처를 산책하던 중이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주변엔 캣맘들의 밥을 얻어먹고 사는 씩씩한 길냥이들이 몇 마리 있다. 놀이터에서 놀던 남자 아이들이 어슬렁거리며 걸어가던 노란점박이 고양이를 발견하고 고양이를 뒤쫒았다. 아이들은 내가 늙은 개의 목줄을 잡고 걸어다닐 때면 자기가 서 있던 자리에서 “강아지다. 아 귀엽다. 만져보고 싶다.” 라고 하지만 쉽게 접근하지 않는다. 내가 목줄을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늙은 개만큼이나 덩치도 큰 길냥이들은, 아이들이 쉽게 쫒아가고 쉽게 접근하고 쉽게 위협한다. 아무도 그 옆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고양이와 친해지고 싶어서인지, 괴롭히고 싶어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가까이 가도 되기 때문이겠지. 옆에 서 있는 보호자가 없으니까.
아이들이 고양이에게 돌을 집어던져도, 숨어 있는 고양이에게 나뭇가지로 쿡쿡 찔러대도, 길고양이의 밥그릇에 신나를 부어 같이 살던 고양이가 죽어도, 살아남은 고양이는 먹어야 한다. 그 하루를 위해서, 먹이를 찾고, 숨을 곳을 찾아야 한다. 그때 내가 고발하지 못했던 이유가 그런 것이었을 거다. 내 옆에 보호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테고, 나는 그날도, 그 다음날도 살아야 했으니까.

이어지는 미투고발은 대부분 이름을 가진 자들에 대한 폭로다. 내가 고발할 수 있는 그자들은, 내가 이름을 기억하지만, 전혀 유명하지 않다.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고, 이미 다른 죄로 구속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름은 커녕 얼굴도 제대로 못 본 가해자들도 수두룩하다. 그들에 대한 고발도 얼마만큼의 사회적 가치를 가질까. 나는 그 부분을 고민했다.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나의 가해자는 유명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굳이 이런 사소한 얘기까지 할 필요가 있겠냐며 기억을 다시 쑤셔 박을 지도 모르겠다.

모든 가해자는 이름이 있을 것이다. 그들도 알량한 권력이 있었다. 더 큰 권력 앞에서 개처럼 꼬리를 내릴 비겁한 권력이었고, 그 좁쌀만한 힘 앞에 무너졌다는 게 나를 분노케 한다. 프레임 논쟁따위가 끼어들만큼 여유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인간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그저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인생을 뒤집었고 삶의 기준점을 바뀌게 하며 숨 쉬는 방법과 걸음걸이를 바꾼다.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으로 산다. 이 분노와 수치심이 모여, 세상을 뒤엎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건은 절대 없던 일이 되지 않으며, 우리는 절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방법은 하나다.

싸우는 우리가 이긴다.

2018. 2. 27.

#metoo #withyou
#싸우는우리가이긴다

 

덧붙이자면, 부탁하건데, 피해자를 불쌍하게 보거나, 어줍잖은 위로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싸울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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