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추운 밤 이야기

1.

딴따라나 재주꾼이나
그가 사는 곳, 그가 머무는 자리가 바로 작업실이고 무대다.
어디에 가면 화양연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바닥을 치는 자존감의 발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산이 좋지 않으면 저 산도 좋지 않다.

2.
할머니는 언제나 오만가지 재주 있는 년이 밥굶는다 했다. 오만가지 재주 중에 하나씩 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3.
한 밤의 도로엔 바스러진 유리조각과 신속히 달리는 렉카차가 있다. 멍하니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과 이 나라의 척박함에 진절머리 내는 청춘이 있다. 그래도 내일은 낫지 않을까 하고 믿어보고 싶지만 대부분의 내일은 어제와 비슷했다. 그저 그 중에 맘에 들었던 어제를 꼼꼼히 복기하고 재현하는 일로 내일과 모레를 채워보는 것이다.

4.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저 듣는 자들이 있다. 세상에 수없이 넘쳐나는 문자들이 나무를 베어낸 종이로 책이 되어 팔린다.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가. 초대형 서점에 서서 수없이 많은 무명씨들의 감정의 배설물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나 역시 어딘가에 끊임없이 싸지르고 있다.

5.
도시는 끊임없는 배설의 공간.
사람들은 악귀같이 꾸역꾸역 욕망을 먹고 짐승보다 격하게 싸지르며 밤을 탕진한다. 멍하니 있는 시간은 비생산적이고 스스로를 컨베이어벨트에 올린 채 끼륵끼륵 기어간다. 욕하고 째려보고 분노를 배설하여 허기지면 위산과다를 못 참고 또 꾸역꾸역 음식을 마신다. 모두 나와 같이.

6.
태생이 그런 것을 어쩔 수 없다는 섭리가 있다. 그리스 신화의 수많은 신들은 광폭한 절대 권력을 가졌다. 호메로스가 음모론의 기초라는 얘기를 들었다. 오이디푸스의 재앙은 오이디푸스 그 자신이었다는 말이 있다. 열심히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절대 선이 아닌 이유가 그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잘나고 용맹했다. 그게 그를 망쳤다. 공자의 知天命과 오이디푸스의 저주는 닮아있다. 그리스의 난잡한 신들은 지금의 재벌과 권력자의 모티브다. 인간이 사는 방법은 과연 무엇이 가장 현명한가. 그 답에 적어도 한 발은 가까워진 거 같기도 하다.

7.
움베르트 에코는 파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은행원이 되어서라도 파리에 살고 싶다” 고 말했다 한다.
그 말을 열 번쯤 곱씹어 본다.
은행원이 그닥 나쁜 직업 같지도 않다. 수많은 군상을 관찰하고 퇴근은 제 시간에 할 테니까.

8.
더럽게 피곤한 밤이 깊어간다.
적어도 내게 삶은 언제나 치열해야만 했고 그래서 그게 정당했다.
그렇지 않게 살던 시절이 가장 괴로운 나날이었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늘 조금은 부족하고 외로워야 행복했다.
문 닫기 직전의 마지막 손님으로 앉은 라면집에서 추위에 김이 서려 허얘진 안경을 내려 놓고 있자 그니가 말했다.
“너 중국에 있을 때, 안경 바꿔야 되는데 돈이 없다고 했었잖아. 진짜 불쌍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돗수가 안 맞아 눈이 피곤해도 아마 나는 행복했던 기억만 남긴 게 분명하다. 그 때는 가난했고 조금 외로웠다.
오이디푸스의 저주와 공자의 知天命 과 그리스 신들의 교만한 장난질이 안경에 서린 김 같았다.

– 어느 졸라리 추운 날 밤.

순대국을 먹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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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대국은 언제나 혼자 먹는 음식이다.
한 고비를 넘어가야 할 때, 그 순간을 넘겨야 할 때, 나는 돼지의 잡고기로 만든 냄새나는 순대국을 먹으러 간다.

그 때는 언제나 남들은 모두 배부른 시간
늘어져 있던 앞치마들이 나 때매 다시 일어나는 시간. 오후 3시라든가, 밤 9시라든가. 아침 10시 반이라든가.

어쩔 수 없는 누린내가 나는 국에 들깨를 넣고 다대기를 풀고 맵고 짜게 한 그릇을 들이켜면 언덕을 내려갈 힘이 난다고 스스로를 속이기가 쉬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빈그릇을 바라보며 다시 최영미의 혼자라는 건 을 떠올리곤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 나에게 같이 순대국을 먹자고 할 때, 뛸 듯이 기뻐하지 못하고 아 이 것은 내 외로움의 음식인데.. 라고 주저하는 것이다.

겨울밤, 미친 몸뚱이에 질퍽한 순대국을 먹고 돌아오다.

인간의 조건

아이가 엄마 일어나 – 하면서 나를 깨운 것은 10시 반이었다. 어젯밤에 몇시에 잠을 잤던가, 새벽이 다 되어 잠이 들은 것 같다. 무엇을 하다가 그렇게 늦었던가, 아마 인터넷을 하고 뭔가를 쓰고 뭔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정리를 한답시고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했을 것이 틀림없다. 나는 아이가 잠이 들면 바로 눈이 딱 떠지는 이상한 증상을 가지고 있는데, 아이가 잠이 들면 자 – 나는 이제 자유다 – 라는 생각에 눈이 번쩍 떠지는 것이다. 그런 시간들은 대부분 책을 읽거나 쓸데없는 인터넷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거나, 아이의 미니홈피에까지 사진을 올리거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모여 있는 까페에서 기운내세요 하는 따위의 댓글을 다는 짓거리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24시간을 붙어 있는 아이와 내가 결별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아이가 잠을 잘 때뿐이다. 때로는 내가 아이와 영원히 헤어지길 바라는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그리고 그런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엄하게 꾸짖는다. 아이가 계속 잠만 자면 어쩔꺼냐고 그런 생각 따위는 떨쳐 버리라고 하지만 아이는 잠에 들어서도 가끔 나를 귀찮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 밤잠을 자다가 새벽 서너 시 쯤에 오줌을 싸버렸을 때라든가, 감기에 걸려서 기침을 심하게 할 때라든가, 코가 막혀서 잠을 통 이루지 못할 때 말이다. 그런 어미가 어디 있겠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는, 모성이란 길들여지는 것이지 타고 나는 것은 아님을 알려주고 싶다. 단지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모성이라는 애정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적응하고 책임지겠다는 건강한 마인드가 없이는 아이를 잘 길러내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무의식에 팽배해 있는 상처 받은 작은 아이가 투정을 부리지 않는 조건하에서다. 무의식에 상처받은 어린 시절이 치유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면, 내 아이를 기르는 일은 몇 갑절 힘들다. 나는 그 상처와 치유 속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는 여자이기도 하다. 아이는 이렇게 가끔 나를 깨우곤 한다. 아이가 유난히 늦게 잠이 든 날엔 나는 더 늦게 잠을 자게 되는데, 새벽 서너 시를 넘겨 잠이 들면 아침에 일어나기가 영 힘들다. 서른다섯을 넘겼다. 이제는 옛말로 올나이트를 할 수 없는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어제도 아이가 한 시를 넘겨 잠이 들었다. 자기는 푹 잤다고 10시 반쯤 깬 모양이다. 그리고 자고 있는 한심한 어미를 애타게 깨우고 있다. 요즘 나는 그래서 알람을 맞추지 않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아이가 적당한 시간에 잠이 들었으면 먼저 일어나서 나를 깨울 것이므로. 늦게 자더라도 일부러 알람을 맞추지 않는 것이다. 남편은 언제 나갔는지 알 길이 없지만 예의 그렇듯이 8시에 나갔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아침을 차리지 않는 아내와 엄마가 되었다. 오늘은 스케줄이 빡빡한 하루이다. 오전에 준비를 하고 아이를 데리고 1시에 수업을 시작하는 미술학원에 가야한다. 그리고 4시부터 시작될 내년도 유치원 설명회에 가야 한다. 온전히 아이를 위해 하루를 보내는 일과가 시작되었다. 다른 날은 나를 위해 병원을 가거나 집에서 쉬면서 아이는 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나는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기도 하지만, 오늘만큼은 온전히 아이를 위해 보내는 하루가 될 것이다. 아이의 사교육을 위해 보내는 하루.
아이에게 밥을 빨리 먹이기 위해 햄을 썰었다. 햄밥 먹을까? 하는 질문에 아이는 좋다고 대답을 한다. 나는 햄을 잘게 썰어 밥과 함께 끓였다. 기름들이 자작하게 물과 졸아들었다. 아이에게 아토피가 경미하게 있더라도, 급하게 밥을 먹여야 하는 날이면 나는 햄을 과감하게 사용하곤 한다. 어쩔 수 없다고 나에게 변명한다. 찌개를 끓이고 안 먹는 반찬을 억지로 먹이는 것보다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서 밖으로 외출을 유도하는 편이 훨씬 쉽다. 아이를 길러내면서 나는 점점 더 쉬운 방법들이 없나를 찾게 된다. 아이를 기르는 데 조금 더 쉬운 방법, 아이를 달래는 데 조금 더 쉬운 방법. 내 말은 듣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려는 아이를 좀 더 쉽게 제어할 수 있는 방법과 협박등. 그게 나의 방어기제이거나, 그저 나의 성격이 그런 것이냐는 중요치 않다. 나는 순간순간을 모면하려는 데 급급한 애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 아이는 햄이 섞인 끓인 밥을 TV를 보면서 먹어치웠다. TV에서는 아이들의 프로그램이 이미 다 끝나고 어른들의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나는 아이를 위해 IPTV의 리모콘을 조종해 아이를 위한 만화를 틀어 주었다. TV 보면서 밥 먹는 습관이 나쁘다?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돌아다니면서 먹는 습관도 나쁘다. 아이는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부산하다. 끊임없이 세상을 탐구하고 연구하려고 한다. 아이를 식탁에 고정시켜야 외출에 차질이 없다. 게다가 지금부터 부지런히 준비한다면 시간에 맞춰서 택시를 타지 않고도 미술학원에 도착할 수 있다. 아이가 다니는 미술학원은 일주일에 한 번씩 퍼포먼스 미술을 수업하는 곳이다. 퍼포먼스 미술이란 종래에 우리가 알던 앉아서 그리는 미술 수업이 아니라 서서 물감을 튀기기도 하고 자동차바퀴나 원목으로 된 공에 물감을 묻히기도 해서 굴려 보기도 하고 과자로 된 집을 만들기도 하고 손바닥에 물감을 찍어 나뭇잎을 만들어 보기도 하는 종류의 미술수업을 말한다. 영유아 아동의 엄마들에게 인기가 좋으며 아이들의 스트레스 해소나 심리치료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집에서 해 주기는 겁나는 퍼포먼스 미술을 위해 엄마들은 적지 않은 돈을 내고 그런 종류의 미술원에 등록을 해서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이다. 나는 버스를 타고 다니지만 차를 가지고 다니는 엄마들도 있다. 아이를 태우고 미술학원으로, 체육학원으로 돌아다니는 생활이 생후 24개월부터 시작된다. 나는 40개월쯤 되었을 때 아이의 미술학원을 등록했다. 매월 10만원이고 3개월을 한 번에 납기 해야 한다. 남편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남편이 이걸 이해할 지 알 수 없었지만 속된 말로 그냥 질러 버린 것이다. 다행히 아이는 예전부터 놀이미술을 즐겨했고 색채 감각이 있는 편이라 지금 유일하게 하고 있는 사교육으로 최대의 효과를 누리고 있다고 나는 자부한다. 우리 아이는 좋아한다. 라는 것은 우리 아이는 뛰어나다는 말의 변종어법이다. 나는 아이가 너무나 좋아한다고 하며 나도 덩달아 좋아한다. 너에게 적절한 사교육을 시켜 준 너의 엄마에게 고마워하렴. 그리고 그 돈을 벌고 있는 너의 아빠에게도. 라고 아이에게 말하지 못할 뿐이다. 왜냐하면, 아이가 아직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아이의 미술학원을 가기 위해선 챙겨야 할 준비물들이 있다. 물감이 많이 묻기 때문에 팔이 달린 앞치마가 필요하고, 신발에도 물감이 묻기 때문에 실내화를 따로 장만했다. 갈아입을 옷도 챙겨야 한다. 바지나 티셔츠에도 물감이 많이 묻기 때문이다. 챙겨 간 날 수업이 얌전한 수업이면 약간 허탈하지만 그래도 옷을 버려서 아이가 지저분해 진 채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나는 무거운 가방 쪽을 택한다. 오늘은 바지는 별도로 준비하지 않고 앞치마와 실내화, 그리고 티셔츠를 챙겼다. 생각해보니 앞치마가 있으니 티셔츠는 없어도 될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라는 불안감이 엄마라는 사람에게 가방에 티셔츠 하나쯤은 더 넣어도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을 한다. 나는 아이가 TV를 보며 자동차를 굴리는 시간에 화장을 한다. 이제 맨 얼굴로 나서기엔 민망한 나이가 아니었던가. 큰 치장은 하지 못하더라도, 가을이 되면서 화장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화장을 한 얼굴이 조금 더 나아 보였다. 예전엔 누나는 화장 안 하는 게 더 예뻐 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이제는 제발 좀 화장 좀 하고 다녀라. 라는 말을 들을 나이가 되었다. 피부는 침착 되었고, 다크서클이 간혹 짙게 내려온다. 얼굴은 누리끼리하고 눈동자도 탁하다. 미장원에 다녀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머리는 다시 부스스하다. 헤어 매니큐어나 코팅이라도 해줘야겠다 싶지만 그런 시간과 돈의 여유는 쉽게 나는 것이 아니다. 대단한 결심, 오늘 시작했으니 1년이나 지나야 헤어 매니큐어를 하러 가지 않을까? 나는 피부화장을 하고 두껍게 아이라인을 그린다. 살이 쪄서 작게 있는 속쌍꺼풀도 덮여 버렸다. 모든 것은 육아와 가사노동으로 점철되었고 나는 점점 이상한 아줌마가 되어 가고 있다. 화장을 하면서 왔다 갔다 하며 아이를 체크한다. 아이는 혼자 잘 놀고 있다. 엄마 오늘 물감놀이가? 이제 제법 말을 잘 하는 아이가 물감놀이라는 나의 단어를 받아들여 묻는다. 응 지금 엄마 준비하고 있어. 아이는 내가 화장을 하는 방으로 들어와 화장대 위에 물건을 몇 개 만지작거리다가 나에게 하지마! 라는 말만 듣고 뽀르르 사라진다. 아이는 물감놀이 수업을 정말로 좋아한다. 그러니까, 내 아이는 우수하다는 말이다. 남들보다. 뷰러로 속눈썹을 집어 올리는 동안 아이는 마룻바닥에 누워 자동차를 가지고 놀고 있다. 수많은 자동차들이 늘 사고현장을 연상시킨다. 왜 남자 아이들은 사고현장을 좋아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그건 좋지 않은 거야. 라고 말하지만, 어느 학설에 따르면 남자 아이들은 사물의 이동에 가장 큰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는데, 그렇다면, 사고현장만큼 이동이 급박하고 빠르게 이루어지는 곳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안도한다. 아이의 자동차 놀이 풍경엔 소방차와 구급차, 경찰차가 등장하고 사다리차가 길게 사다리를 올리고 있다. 그나마도 험하게 다뤄 다 부러져 버린 채로, 그리고 가끔 헬기가 날기도 한다. 불이 났다. 아이는 불이 난 광경을 단 한 번도 제 눈으로 본 적이 없다. 나도 불이 난 광경을 본 것은 이 아파트로 이사 온 후 처음 보았다. 하늘에서 몽실몽실 검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저게 뭘까?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 아이가 몇 년이 지나면 그런 모양새가 될까,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이 철없는 목소리로 불났다 불났다. 210동에 불났어. 다 탔어. 하며 신나게 뛰어다녔다. 어떤 아이는 제가 직접 목격한 사고 현장을 나에게 생생하게 전달해 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흥분해 있었다. 세상 제일 재미난 구경이 불구경과 물구경이라고 했던가, 그 날 20층 꼭대기집에서 났던 불은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였고, 조경시설 때문에 소방도로를 만들지 못한 어처구니없는 이 아파트에서 20층은 고스란히 다 타버렸다. 학교를 다녀오는 그 집의 아이들은 제가 사는 건물의 밖에 서서 제 집이 다 타는 것을 보고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소방차도, 사다리차도 진입을 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태워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에 1년쯤 지나 이 아파트는 대한민국 조경 무슨 상에서 최우수상인가를 받았다. 조경만 좋으면 집값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소방도로가 있던 말건, 그건 알아서 단속할 일.
내가 옷을 다 입고 난 뒤에 아이의 옷을 입혔다. 날씨가 별로 춥지 않아 간단하게 내복 위에 니트티와 청바지를 입혔다. 이제는 혼자 옷을 입을 때도 되었다 싶은데 아이는 여간해서 내 손을 타지 않으면 옷을 입지도 벗지도 않았다. 바지를 입힐 때마다 짜증이 났다. 아이를 앉히고 바지를 입히기도, 세워놓고 바지를 입히기도 힘들었다. 아이도 짜증이 날까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내가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바지 하나 입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의 나이를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저 아이는 아직 혼자 바지를 입지 못하는 것이다. 두꺼운 점퍼를 입히고 목도리를 감아 올렸더니 아이가 강렬하게 거부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두건으로 썼던 천조각을 아이의 목에 살짝 동여매 준다. 아이는 목이 졸리는 것처럼 켁켁 거리며 유난을 떨었다. 아이에게 장난감 자동차를 담은 가방을 메어준다. 나는 외출을 할 때마다 아이에게 작은 장난감들을 조금씩 가져가게 하는데, 아이가 할 일이 없을 때 마다 이런 소품들이 무척 유용하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더 얘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제 놀이에 집중하는 단 오 분이라도 나에겐 소중하다.
아이와 버스를 타러 나섰다. 아이는 제가 교통카드를 찍겠다고 주장했다. 버스가 와서 버스에 오를 때에도 제가 타겠다고 내가 잡아 주는 것에 화를 낸다. 버스 기사들은 가끔 아이를 잡아달라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아이가 결연한 표정으로 버스에 오르는 것을 보는지 그저 천천히 출발을 해 줄 뿐이다. 대한민국 버스 기사들의 친절에 감사를 보낸다. 아이는 둘이 앉는 자리가 아닌 각자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앉기를 바라지만 요즘은 허용하지 않는다. 얼마 전 아이를 혼자 앉혔다가 어느 버스 기사에게 지청구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 보호자 분 어디계세요. 아이 보호자 분 아이와 같이 앉으세요. 라고. 아이는 아직 버스요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나는 아이가 혼자 앉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뿐이 아니라, 버스 기사들은 아이가 급작스러운 사고를 당할 까봐 노심초사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주장한다고 해서 모두 들어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기사가 같이 앉으라고 조언을 한 이후부터 나는 아이를 혼자 앉히지 않았다. 물론, 그러니까, 그 전에는 그냥 혼자도 앉혔다는 말이다. 나는 MP3를 꺼내 귀에 꽂고 책을 읽으면서 말이다. 아직 세상은 위험천만한 곳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방치하곤 하니까.
아이와 한참 버스를 타고 학원 가까이에 와서 내가 내릴 것이라고 알려주니 아이는 버스 정류장의 이름을 혀짧은 소리로 대며 청하브영언 이라고 한다. 버스 정류장의 이름을 몇 번을 외치며 버스 카드 줘봐 버스 카드 줘봐를 이어서 외친다. 나는 버스카드를 쥐어주고 아이에게 버스카드를 찍게 해 주고 따로 버스에서 내렸다. 늘 조마조마한 마음이지만 이제는 제법 버스에서 내리는 일도 잘 한다. 버스를 안 타고 다녔으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쉽게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일단 내가 면허가 없는 상태이며, 면허를 딴다고 해서 남편이 덜컥 차를 내 줄 것도 아니다. 차를 산다고 치자. 그렇다면 기름값은 고사하고 노상 시내로만 쏘다니는 나의 주차비는 어디서 솟구친다더냐. 나는 남편에게 면허를 딸까 하는 얘기를 꺼냈다가 슬그머니 주워 담았던 적이 있다. 버스에서 내려 아이는 아는 길이랍시고 나보고 먼저 가라고 한다. 나는 앞서 걷다가 계속 아이를 돌아보는데 아이는 엄마 빨리 가. 라고 하며 나를 재촉한다. 그러면서 저는 혼자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는 고양이처럼 걸어오고 있다. 나 먼저 학원으로 들어서고 선생님들의 약간은 호들갑스러운 인사가 이어졌다. 아이는요? 선생님들이 묻는다. 오늘도 혼자 오는구나. 선생들이 활짝 웃으며 아이를 반긴다. 나는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해야지 하고 아이를 다그친다. 어딜 가더라도 인사는 꼭 많이 시키는 편이다. 그 편이 여러모로 살아가는 데 이득이 된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등은 상대방을 작은 시간과 정성으로 설복시키고 나 역시 맘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좋은 방편이 된다. 나는 아이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안녕하세요 – 하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먼저 와 있는 다른 타임 엄마들과 대충 인사를 나눈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오늘도 자리가 좁다. 이 학원에 처음 왔을 때는 겹치는 수업에 아이들이 두 명 뿐이었고 여름이었기 때문에 옷가지도 없는 단출한 차림이라 자리가 넓었지만 한 달쯤 전에 수업이 새로 개설이 되어서 겹치는 엄마들이 생기자 눈에 띄게 엄마들의 대기실이 좁아졌다. 그녀들은 우리 보다 20분 정도 먼저 오고 20분 정도 먼저 간다. 아이들의 수업은 거의 50분간 진행된다. 네 살짜리 아이가 50분짜리 수업을 소화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학원 측에서 그렇다고 25분짜리 수업을 나누어 일주일에 두 번씩 해 내는 것보다는 이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엄마들 입장에서도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와서 25분 수업을 하라고 했다면 뜨악했을 것이다. 아이는 안중에도 없는, 어른들을 위한 편의이다. 아이들은 적응하기 나름이다. 한 명의 선생이 서너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두 편의 수업을 이어서 진행하는 셈이다. 본격적인 수업을 진행하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하고 나누기도 한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아이들은 책을 읽어 주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말하자면 토론과 논술 수업을 한다고 포장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오늘은 무슨 수업이 있는지 알 지 못한다. 물어 본 적도 별로 없다. 스케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날 그 날 아이들의 컨디션에 따라서 진행을 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는 했다. 그러나 그 보다는, 그 날 그 날 준비되는 준비물에 따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봤었다. 오늘은 물감으로 수업을 한다고 하여 아이의 옷을 갈아입혔다. 아이는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같이 수업하는 친구들이 왜 아직 오지 않았는지 궁금해 한다. 재형이는, 소미는, 하면서 아이는 어느 교실에서 수업을 하는 지도 묻고 선생님한테 이런 저런 말도 건넨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이의 옷과 나의 겉옷가지들을 정리한다. 가방은 언제나 크고 날이 추워져 옷가지들도 늘었다. 비좁은 의자에서 남산만한 궁둥이를 비비고 앉아 있으려니 약간 민망스럽다. 겹치는 수업의 엄마들은 모두 날렵한 허벅지를 지녔다. 왜 나는 저렇게 태어나지 못했을까 하는 원망이 든다. 산후 비만을 조절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기 일주일 전까지 나는 격무에 시달렸으며, 남들은 팔자 좋게 다니는 임산부 요가 따위는커녕 산책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남편도 그 때는 정신없이 바쁠 때였고 그 정신없는 남편의 정신없는 사업 확장을 돕느라 나는 한 번 컴퓨터 앞에 앉으면 일어날 새도 없었다. 산후 조리를 돕는 도우미를 잠깐 쓰고 한 달 만에 빨래도 내 손으로 해 댔다. 그 모든 것이 원망스러운 순간이 간혹 오는데 이렇게 비교될 때이다. 탄력 있는 다리라인을 가지고 있는 동갑내기 아이들의 엄마들을 볼 때. 나는 괴롭다. 적어도 그 자리에서, 그 학원에서만큼은 내가 제일 뚱뚱하니까. 얼마 전 아이를 담당하지 않는 다른 선생이 나보고 어머니 항상 스타일이 좋으세요. 라고 했을 때 기분이 상당히 고무된 적이 있었다. 내가 뚱뚱하긴 해도 옷은 잘 입는 편이지 하면서 혼자 하루 종일 업되어 있었다. 아이와 수업을 같이 듣는 다른 아이 두 명이 제 엄마들과 함께 들어왔다. 한 명의 엄마는 차 키를 들고 있고 다른 한 아이의 엄마는 나처럼 버스를 타고 온다. 버스를 타고 오는 우리들은 차를 가지고 다니는 엄마들에 비해 살짝 우울하다. 애 있으면 차 있어야 된다는 의견에 우리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이들이 수업을 하러 들어가자 우리는 어색한 시간들을 때우기 위해 이런 저런 수다들을 시작한다. 사는 동네가 다르기 때문에 동네 유치원에 대한 정보 교류는 되지 않는다. 나는 학원의 서남쪽에서 오고 있고, 버스를 타고 오는 다른 엄마는 북서쪽에서 오고 있으며, 차를 가지고 온 다른 엄마는 친정집이 바로 앞집이기 때문에 이 학원에 오는데 가끔 자기 집에서 오는 날은 차를 가지고 오고 정작 집은 학원의 정남쪽이다. 우리가 나눌 이야기는 이런 유치원도 있더라, 하는 정도의 정보이지 어느 유치원은 급식이 잘 나오고 어느 유치원은 커리큘럼이 잘 되어 있다더라 하는 얘기는 아니다. 요즘 수업을 같이 듣는 엄마들 말고 여름엔 두 명의 3살짜리 아이 둘이 겹치는 시간에 수업을 했었는데, 그 두 여자는 학원 근처에 살고 있었고 항상 아이들의 옷태도 좋았으며 주로 택시를 이용해서 이동을 하는 것 같았다. 두 여자는 원장과 함께 동네의 유치원과 어린이집 다른 사설 교육기관에 대한 평가를 주로 많이 했는데, 그 얘기를 듣고 있으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어디는 급식이 좋고, 어디는 급식 때문에 어떤 사건이 있었고, 체육은 어디가 좋은데 커리큘럼이 바뀌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며, 야마하 음악교실은 어떤지, 짐보리는 다 다니는 거 아니예요? 하는 얘기를 듣고 있다 보면 나는 너무나 동떨어진 엄마가 되어 있었다. 여름 어느 한 날 아이가 수업 중인 중에, 나는 같이 수업을 듣는 아이의 엄마들과 수다를 떨 정도로 친해지기 전이라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펴놓고 졸고 있었는데다가, 그나마 다른 아이의 엄마들이 잠시 볼 일을 보러 나가 내 아이가 들어간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을 하는 아이의 엄마 중에 나만 혼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그 날에, 그 사이에 옆 교실에서 수업을 하는 통통한 애 엄마가 명동에 있는 모백화점의 어린이 미용실에서 아이의 머리를 깎이는 데 예약도 되지 않고 1주일 대기해서 머리를 했는데, 파마는 6만원이고 앞머리 자르는 건 1만원, 사내아이 커트는 2만원이라고 전해주었으며 나는 그녀의 대범한 씀씀이에 혀를 내둘렀으나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날이 자꾸 떠오르곤 했다. 그 날 그 앞에 앉아 있던 다른 엄마는 아이 아빠가 아이에게 멋진 침대를 사 준 이유는 아이 아빠가 너무 바빠 아이와 놀아주지 못하는 대신이라는 이유를 전하며 정가가 220만원이랬나 180만원이랬나 하는 얘기를 하는 것을 못 들은 채 하며 아침에 새로 읽기 시작한 2009년 이상문학상으로 눈을 돌리다가 꼬닥꼬닥 졸았던 기억이 있다. 그 날 아마 나는 집으로 돌아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한참 고민하다가 일기를 한 참 적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아마 엄마들이 모여 있는 인터넷 까페에 들어가 다른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얼마를 쓰고 있는가를 가늠해 보느라 2시를 넘겼던 기억이 났다. 내가 아이를 데리고 다녔던 데라곤 문화센타 몇 군데뿐이었는데, 그 역시도 두 번 정도밖에 안 했기 때문에 다녔던 거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문화센터는 끊으면 1년이 기본이란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의 정서발달에 오히려 해가 된다나, 게다가 최근엔 이상한 전염병이 돌고 있어서 겨울학기 등록도 하지 않았는데 그 엄마들 같으면 아이들을 교육기관에 넣지 않으면 몸살이 나는 여자들 같아 보일 때도 있었다. 나는 내가 그녀들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은근히 그녀들을 폄하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너무 많이 시키는 엄마들과, 적당히 시키는 엄마들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엄마들로 엄마들의 세상이 나뉘고 있는데,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 엄마들은 많이 찾을 수가 없었다. 내 친구 중에 아무 것도 시키지 않는 친구가 몇 명 있는데, 한 명은 둘째가 있는데다가 남편의 벌이가 시원치 않았고 아파트 대출금 상환 때문에 꼼짝없이 집에 들어앉아 사교육비를 절대적으로 지출하지 못하는 경우였고 한 명은 학위 준비 중이라 친정에 맡기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너무 어리잖아, 라며 정말 아무 것도 시키지 않고 있었는데, 너무 어리다고 했던 그 친구와 그 친구의 딸아이는 정말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낼지 가끔 궁금했다. 나는 이 사교육 외엔 다른 것은 없었지만 외출이 잦았다. 아이는 아랑곳 않고 내가 나서고 싶으면 나섰고 내가 쉬고 싶으면 쉬었다. 쇼핑을 하러 가기도 하고 대형서점을 가기도 했으며 카메라를 들고 덕수궁 돌담길을 걷기도 했고 아이는 재미없어 할 클래시컬한 미술관을 가서 칭얼댄다고 아이를 야단치기도 했다. 아이의 행동반경은 넓어졌고 체험 할 거리는 많았다. 영유아 때는 체험학습이 가장 중요합니다. 암만.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우리 아이는 수없이 많은 체험을 하고 있지요. 하고 말이다. 아이는 정해진 코스대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데 예를 들면 병원 검진을 받기 위해서 혹은 다른 일로 S역에 간다면 그 역에선 병원 예약시간이 주로 점심시간 근처이므로 병원에 갔다가 나와서 설렁탕 체인점에 들어가 설렁탕을 한 그릇씩 먹고 아이는 아이스크림 전문점에 들어가 제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내가 커피를 마실 장소로 이동을 해서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는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혹은 집과 가까운 P쇼핑몰에 간다면 9층에서 나는 햄버거를 먹고 아이는 딸려 나온 감자튀김을 먹으며 나는 콜라를 마시고 아이는 오렌지 주스를 시켜 마신다. 그리고 그 옆의 오락실에 가서 자동차게임이나 공던지기 게임을 하기도 하고 가끔 박스로 된 노래방에 들어가 은하철도 999를 부르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나는 쇼핑을 조금 하고 1층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나는 커피를 마시고 아이는 물 한 잔을 달라고 해서 물과 함께 쇼트케이크를 하나 먹으면서 배를 또 채우고 지하에 있는 대형서점에 가서 시간을 보내다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오늘 같은 경우는 대부분 명동을 나가서 하릴없이 돌아다니거나 내 친구를 만나거나 하는데 오늘은 유치원 설명회를 가야 하므로 그 계획이 틀어졌다. 아이들이 수업을 하는 동안 우리는 선호하는 유치원 성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번 주에 모두 설명회가 있으며 입학접수를 받고 있으니 서둘러야 한다고 서로를 재촉하고 위로한다. 엄마들은 오늘도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는데, 여기 저기 육아 책에서 본 이야기들을 조합해서 이야기 하거나, 다큐멘터리나 EBS에서 하는 부모대상 프로그램의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고, 어느 학자의 말에 의하면, 이라고 운을 떼며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그녀들은 나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아니, 우리 클래스의 엄마들과 그 클래스의 엄마들의 평균나이는 적어도 서너살 정도 차이가 나 보였다. 한 엄마가 영재교육을 한다는 뭐뭐 스쿨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나는 아 – 그거 비용 어마 어마 하던데 하고 아는 체를 하자 다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대고 웃었다. 좋아 보이는데 정말 너무 비싸더라고요, 하는 그 뭐뭐스쿨은 한 달에 48만원 기본으로 하는 화학, 물리 전문 수업이었다. 너댓살 짜리 아이들을 데리고 하는 화학과 물리 수업은 대부분, 빗사면에서 공이 데구르르 굴러갑니다 라든가, 페트병에 뿅뿅 구멍을 뚫고 물을 채우면 위에 있는 물이 먼저 빠집니다 라든가,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지요 하는 정도의 것들이다. 나는 그 수업 내용까지 인터넷으로 살펴보고 비용을 알아보고자 각종 까페와 지식검색을 뒤진 결과 한 달에 48만원이라는 답을 얻고 얼른 창을 닫았던 기억이 났다. 갑자기 내 지갑에서 돈이 쑥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덜커덕 등록을 해 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꾐에 넘어가선 안 된다고 부들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느라 진을 뺐다. 한달에 10만 원짜리 미술수업을 보내고 48만 원짜리 영재수업을 듣고 60만 원짜리 유치원에 보내면 애 하나 키우는 데 한달에 200만원 정도 채우는 건 일도 아닐 듯 했다. 그것도 내가 사는 곳처럼 교육적 환경의 질이 그다지 높지 않는 곳에서 조차도.
아이들이 수업을 끝마치고 문을 열고서는 엄마 들어오세요. 한다. 수업이 끝나면 선생이 엄마들을 모아놓고 리뷰를 해주는 데 오늘은 벽에 종이를 붙여 놓고 나무를 물감으로 칠하고 종이에 과일을 그려 오려 붙이기도 하고 손바닥에 물감을 찍어서 나뭇잎을 표현해 보는 수업을 했다. 내가 보기엔 내 아이의 그림의 손바닥 자국이 가장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나는 역시 우리 아이가 가장 우수하다는 생각에 혼자 슬며시 웃는다. 아이의 나무는 활짝 열려 있다. 포도도 달렸고 딸기도 달렸다. 딸기는 밭에서 나는 거야. 라고 말해 줄 필요는 없다. 그런 건 어차피 나중에 알아도 상관없는 것이니까. 우리 어릴 때는 벼나무가 있는 줄 아는 아이들이 있다고 어른들이 개탄했지만 지금은 자연생태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아이들은 대부분 쌀은 논에 심은 벼라는 풀에서 나오는 것임을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얼마 전 이 미술학원에서는 부엽토를 뿌려놓고 감자를 캐는 퍼포먼스 수업을 했다. 돈 주고 점토놀이나 감자 캐기 놀이를 시킨다니 기가 막혔지만, 점토나 모래를 가지고 놀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았다. 아이는 흙으로 된 길을 걸으면 자주 미끄러졌고, 내가 사는 아파트의 놀이터엔 아예 모래가 있지도 않을 뿐더러, 혹 모래가 있다 치더라도 그 안엔 고양이 똥이 가득할 터였다. 나는 수업이 끝나고 약간 흥분되어 있는 아이를 보채며 빨리 옷을 입자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오늘은 유치원에 가야 하니까 꼭 옷을 빨리 갈아입어야 한다고 나는 아침부터 몇 번씩 강조해서 말했다. 아이는 언제나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10여분 이상을 뱅글뱅글 돌며 혹은 교실에서 선생님의 뒤처리까지 도와주며 그 교실에서 잘 나오지 않는 아이인데, 오늘은 유치원이라는 얘기에 귀가 번쩍 뜨였는지 나의 서두름에 어느 정도 협조를 해 줘서 학원이 완전히 썰렁해 지기 전에 학원을 나설 수 있었다. 선생님들께 인사를 하고 아이는 또 아는 길이라고 마구 내달려 가고 있다. 나는 뛰어가서 아이를 잡지는 못하고 그저 골목에서 천천히- 그만 – 이라고 소리를 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길을 건너 버스를 타고 자주 가는 P 쇼핑몰로 향한다. 배가 조금 고프다는 아이에게 아이가 가장 좋아할 간식거리인 감자튀김을 선물하기 위해. 그리고 내 배를 위해 나는 햄버거를 하나 먹기 위해 9층으로 올라가 햄버거 세트를 시키고 아이의 오렌지 주스를 추가 주문한다. 아이는 감자튀김을 먹으면서 오렌지 주스를 먹는다. 오늘은 옆 매장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찾지 않는다. 웬일인지 몰라도. 늘 이 곳에 오면 아이는 바로 옆 아이스크림 전문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감자튀김과 함께 먹는다. 그야말로 아토피가 작렬할 수 있는, 트랜스지방의 포화상태로 내달리는 것이다. 아이와 끼니를 대강 때우고 나니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아이는 그제야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한다. 나는 오늘은 유치원에 가야 하는데, 시간이 다 되었으므로 아이스크림을 먹을 시간이 없다고 하며 나도 커피 마실 시간이 없어 이 녀석아 하는 말을 속으로 삼킨다. 아이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우리 집을 경유해 유치원까지 가는 버스를 탄다. 내가 아이를 데리고 가려는 유치원은 버스 정류장으로는 한 정거장이지만 산 속에 뚫린 터널을 지나가야 하는 곳이라 절대 걸어가긴 벅찬 곳이다. 아이는 버스 안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나는 다리가 아파 더 이상 아이를 안기 어려운 상황이고, 아이의 몸무게는 벌써 훌쩍 18kg을 넘었으므로, 나는 필사적으로 아이가 걸을 수 있을 만큼 깨운다. 아이를 안고 버스에서 내리는 일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그건 아이가 혼자 버스에서 내리는 일보다 더 위험해졌다. 둘의 몸무게가 늘어나고 나는 게다가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으니 여기서 기우뚱 거렸다간 많은 사람들이 웃음을 참으며 안쓰럽게 우리를 바라볼 것이며, 게다가 크게 다칠 수도 있다. 아이는 다행히 버스에서는 겨우 내렸으나 힘들어 힘들어하면서 걷기를 거부했다. 그건 나에게 배운 말버릇일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제일 많이 했던 말. 엄마 힘들어, 하지 마.

유치원에 도착하니 홈페이지에서 많이 봤던 얼굴의 여자가 안녕하십니까 하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저 여자가 원장이다. 정말 곱상하게도 생겼다. 다른 선생들도 모두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는 걸 보니 이 유치원은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시키는 모양이다. 우리가 일찍 온 편이었다. 나는 동생이 나온 고등학교의 부설 유치원인 이 곳을 선택하면서 가장 많이 놀게 하는 곳이라고 들었기에 여기를 선택했다. 아까 학원에서도 엄마들과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아직 공부를 시키기엔 어리지 않나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되도록이면 아이들을 많이 놀리는 곳에, 그리고 저렴한 곳에 보내고 싶었다. 한 달에 60만원이 넘는 돈을 내면서 유아교육을 시키고 싶지 않았고, 취학 전에 60만원이 넘는 유치원에 보냈다가 나중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감당이 서지 않았다. 나는 의식 있는 엄마다 이거다. 소문으로 이 곳이 그나마 교육의 질에 비해 가장 저렴하다고 들었고 미술특화교육이 잘 되어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여기를 선택했는데 생각보다 참석한 학부형들이 적었다. 설명회는 안 들어도 좋다는 것인지, 전염병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산을 깎아서 만든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유치원이라 지하로 내려가도 지하가 아니었다. 강당 앞쪽에 의자를 놓아 엄마들이 앉도록 해 놨고 뒤편에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시설이 갖춰져 있어서 엄마들이 설명회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 놓은 배려도 맘에 들었다. 아이는 옷을 벗자마자 놀이기구로 달려가 자동차를 타겠다고 용을 썼다. 곧이어 자리가 차기 시작했고 둘째들을 안고 온 엄마들도 있었다. 아랫집 영빈이 엄마도 와서 알은 체를 했다. 영빈이는 둘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어서 영빈이 엄마는 낮에는 온전히 둘째 육아에 전념하고 있었다. 아래윗집 산 지 3년이 되어 가는 데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서 우리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사이이다. 그녀도 나를 많이 파악했을 것이고 나도 그녀를 어느 정도 파악했지만 누군가와 친해지기에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녀는 여름에 태어난 둘째를 안고 왔다. 얼굴이 핼쑥해 진 게 아들 둘 키우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내심 부러웠다. 둘째가 부러운 게 아니고 그녀가 다시 날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명회는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원장은 마이크를 들고 조근조근하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4년제 대학 졸업자와 석사 이상의 학력을 가진 선생님들을. 에서 말을 끊었다. 나는 다음 문장으로 보유했다. 를 떠올렸지만 그녀가 선택한 단어는 모시고 있습니다. 였다. 베테랑다운 단어 선택이었다. 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 유치원 때문에 이사를 가지도 못하게 생겼다. 이 유치원에 다닌다면 말이다. 원장이 강조한 부분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가지는 이제는 유치원이라고 하지 않고 정부 시책에 따라서 유아학교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는데, 이건 3년 과정이 정규과정이며, 중간에 옮기는 것은 전학과 같다.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 번 보낼 거면 끝까지 보내라는 행간을 읽어내시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우리는 내년 가을쯤 근처에 있는 위성도시로 이사를 할 예정이다. 그래서 유치원 입학도 미뤄둘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새로 분양받은 곳이라 증축이 되어지는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입주 예정일로부터 한 참이 지난 다음에도 들어가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 때까지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아이는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처럼 하루 종일 부글부글 끓었다. 피가 끓는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낮에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고, 남편은 사교육을 환영하지 않으며, 나는 벌이가 없으니 내 맘대로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무작정 아이를 붙잡고 둘이 퍼질러 앉아 TV 만화만 보면서 6개월 이상을 버틸 수가 없었다. 아이를 처음 가졌을 때부터, 아이를 언제부터 교육기관에 보내고 어떤 교육을 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를 낳기 직전엔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아이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는 두 시간에 한 번씩 깨어나 젖을 먹었고, 그 뒤로는 이유식을 했는데, 나는 앞치마를 벗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아이의 새모이 만큼의 이유식을 만들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소고기를 갈고 브로콜리를 삶고 시금치를 데치고 배추를 썰고 닭가슴살을 익히고 내 인생에서 최대로 공을 들였던 부분은 아마 아이의 이유식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지극정성을 다했다. 한 때 이유식을 만드는 블로그를 만들었을 정도로 소개되는 모든 이유식들을 섭렵했다. 다행히 아이는 넙죽넙죽 잘 받아먹었고 나는 당장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먹고 자고 싸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이 조그만 머리에 무엇을 집어넣을 것인가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이가 밥을 먹게 되면서 아이만을 위한 반찬을 만들고 버섯과 카레와 시금치와 당근을 먹이는 사이에 아이는 네 살이 되었던 것이다. 남편을 위한 반찬과 아이를 위한 반찬과 내가 좋아하는 반찬 사이에서 남편은 주로 외톨이가 되었으며 남편은 주로 회식이나 잦은 저녁 약속으로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나는 고등어자반을 사다가 냉동실에 꽝꽝 얼렸다가 남편이 집에서 밥을 먹는 날이면 그저 고등어 한 토막을 꺼내서 해동시켜 구워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남편이 집에서 먹는 반찬은 고등어나 갈치, 굴비구이, 혹은 김치찌개. 운 좋으면 좋아하는 오뎅볶음이었다. 내가 아이를 위한 반찬과 국을 만드는 사이 아이는 TV 속으로 빠져들었고 나는 그 여유를 즐기기 시작했으며, TV 는 가장 좋은 보육교사가 되었다. 그것도 잠시, 아이는 TV를 한 삼일 줄기차게 보고 나면 금방 시들해져서 나를 붙잡고 책을 읽어달라, 아까 뿡뿡이에서 본 게임을 해달라, 스티커 붙이기를 해달라 뭔가 그림을 그려달라 하며 혀짧은 소리로 나를 계속해서 졸라댔다. 기진맥진. 아이의 요구는 불쑥 불쑥 튀어나왔고, 나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었으며 아이에게 온전히 집중해야만 아이와 뭔가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것은 그래서 외출이었다. 밖에 나가면. 된다. 나가면, 아이는 세상을 탐구하고 탐험한다. 나는 아이가 넘어지지 않는지만 바라보면 되고 찻길에 아이를 내놓지만 않으면 된다, 는 것은 그것도 잘 걷기 시작한 36개월 이후부터였다. 그러니까, 그러느라고 아이에게 어떤 교육을 시킬 지에 대해서 나는 진중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유치원 원장은 작년부터 영어수업을 강화했다면서 올해 새롭게 도입되는 영어교육제도에 대해서 부가설명을 듣기 위해 초빙한 선생이 있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었다. 그녀는 이 유치원 아이들과 시범수업을 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유치원의 커리큘럼이 훌륭하니 믿고 맡기시라는 이야기를 했고 우리가 하는 영어 수업은 강남에서 98만원에 하는 수업인데 여기서 터무니없이 싼 가격으로 하게 되었으니 운 좋은 줄 알라는 말을 완곡한 어법으로 말했다. 게다가 중국어 수업도 한다고 했다. 중국어라니, 아이들한테 중국어를 어떻게 가르친단 말인가, 나는 스물일곱 정도 되어서 중국어를 잠깐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 나이를 먹고도 진짜 인내와 고통이 따르는 언어가 아니었던가 했었다.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필법을 잊었고 하루라도 말하지 않으면 어법은 영어문법과 뒤섞이고 있었다. 유아시절에 언어를 배워두면 표현력이 풍부해 집니다 라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가, 원장은 영어유치원에 아이들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감행했다고 부드럽게 말했다. 단순히 원비나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서가 아닌,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마시고, 학교로 보내시라는 말이라고 이해해 주십사 하는 간곡한 부탁도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유아학교라는 명칭이 생긴 것이 분명 원장에게 어떤 힘을 북돋아 준 게 틀림없었다.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 진행하는 본인부담금이 매우 높은 공교육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원장은 개인의 인성발달과 질서교육, 그리고 예절교육도 잘 시킵니다, 미술특화 교육이 있고 자연친화 교육을 위해 뒷산에 자주 오르며, 체육교육을 위해 옥상에 실내 체육관을 건립할 예정에 있습니다, 놀이시설을 통해 아이들은 활달하게 놀 수 있으며 모든 놀이가 지능발달과 학습적응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았다. 듣자하니 아이들을 규격화 시킨다는 얘기로 들려왔다. 아이들이 가야 할 방향으로 잡아주는 것이 교육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가고자 하는 방향이 그 방향이 아니면 방향을 틀어줘야지요, 차선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 아이들로 만들어 드립니다. 엉뚱한 짓거리도 창의성이 있다면 인정합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그런 것은 어느 정도 걸러내야죠 하는 얘기로 들렸다. 공기는 텁텁했고 뒤편에서 아이들이 노는 소리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영빈이 엄마는 아까부터 둘째를 달래느라 저 뒤에 일어서 있었고 나는 마이크를 잡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진행하는 동안에 내 아이가 어디에 있는 지 확인하기 위해 세 번 정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이가 뭘 하고 있는지 보고 왔다. 아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노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여기는 착한 형아야 하면서 다섯 살짜리 아이와 짝이 되어 공을 굴리고 자동차를 밀고 집중하여 놀고 있었다. 마이크에서 퍼지는 음성들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머리를 딩딩 울리기 시작했다. 마이크와 스피커의 경계에서 울리는 전자파들이 내 뼛속 깊이 스며드는 듯 했다. 나는 앞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았는데 대놓고 자꾸 시계를 들여다봤다. 4시부터 시작된 입학 설명회는 5시 반이 넘어가도록 끝나지 않고 있었다. 원래 예정에는 4시부터 5시까지였다. 피로가 몰려 왔다. 집에 가서 밥해야 되는데, 남편이 일찍 오면 갈치라도 꺼내고 프라이팬을 닦았나 안 닦았나 라도 확인해야 할 텐데 하는 조급한 마음도 밀려왔다. 이 여자들은 왜 예정한 시간을 지키지 않는 건지 화가 나기 시작했다. 놀고먹는 아줌마라고 자기네 마음대로 시간을 연장해도 되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정말 아줌마들이 놀고먹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저녁 6시면 엄마들이 가장 분주해 질 때가 아닌가, 배고파지기 시작하는 아이의 칭얼거림을 들으며 남편이 정시퇴근을 한다면 찌개라도 끓여야 하는 시간 아닌가, 뜨신 밥을 먹이기 위해 쌀을 일고 밥을 안쳐야 하는 시간이 아닌가, 반찬이 모두 떨어졌다면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 동네 슈퍼라도 뛰어갔다 와야 하는 시간이 아닌가, 오뎅이라도 볶고 두부라도 부쳐야 하는 건 아닌가, 이불을 널어놨다면 이불을 걷어 들여야 할 시간이 아닌가, 건조해 질 가을 저녁 거실을 위해 빨래를 돌리기 시작해서 밥을 먹고 난 뒤에 딱 널 수 있도록 빨래를 정리해야 할 시간이 아닌가, 그 빨래를 널기 위해 널어놓았던 빨래를 걷어 개켜야 하는 시간이 아닌가, 현관을 정리해야 할 시간이 아닌가, 영빈이 엄마처럼 아이를 놀이방에 맡겼다면 찾으러 가야 하는 시간이 아닌가, 남편 몰래 주문한 물건이 있다면 경비실에 가서 택배를 찾아와야 하는 시간이 아닌가, 가장 바쁜 시간 아니냐 말이다. 단순히 저녁만을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란 말이다. 분노가 슬슬 올라오기 시작할 즈음에 원장이 오늘 너무 늦어졌으니 이것으로 간단히 마무리 하고.. 라고 운을 떼며 설명회를 마무리했다. 간단히 마무리라니, 그럼 애초부터 간단히 할 것이지 흥. 하는 마음을 접으며 1층으로 올라와 사무실에 들러 어제 급박하게 이 유치원에 전화를 걸어 추천서를 써 줄 이웃을 찾아 달라 해서 받아 낸 추천서를 냈다. 그리고 추천자 입학원서를 받아 들었다. 추천인 한 명당 두 명까지 추천을 할 수 있다고 하여 영빈엄마도 몰래 이름을 끼워 넣기로 했다. 영빈엄마는 둘째 밥을 먹여야 한다고 동동거렸고 큰 아이도 찾으러 가야 한다며 바쁘네 바쁘네를 반복했다. 나는 시간 맞춰 말 하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죠 하며 사람 좋은 척을 했다. 내 안에 복닥거리고 일어났던 울화통은 모두 집어 삼킨 채로. 우리는 어두운 아파트 단지 안을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우리가 사는 동의 주차장에 내린 뒤 택시비는 영빈엄마가 손에 쥐고 있던 잔돈으로 내고 각자의 집으로 헤어졌다. 지난봄에 실파를 사다가 남편이 좋아하는 파김치를 담갔다가 내가 파김치가 됐던 순간이 떠올랐다. 올해 김장철에는 유달리 인기라는 절임배추도 떠올랐다. 나는 마루에 앉아 스르르 가라앉고 있었다. 아이는 여전히 마룻바닥에 누워서 자동차를 굴리기 시작했다. 제발 남편이 약속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섭섭할까봐 전화를 걸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아이가 벌떡 일어서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외쳤다.
“배고파!”

말하라 기억이여 치유하라 상처여

내앞에 깜빡이를 켜고 지나가는 405번 버스, 그리고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강남세브란스병원

이길을 지날때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을 안고 달렸는가 생각한다
서초 사거리에서 유턴을 하던 일, 급하게 여기 저기 전화를 하며 다시 예술의 전당 아래 우면산 터널을 지난 일 그런 것들 말이다.

여기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국립중앙도서관이 보이고 그 아래 검찰청과 경찰청이 이어져 있나. 한때 나꼼수라는 팟캐스트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정봉주 전위원이 여기서 크리스마스의 구속이 결정된 날 사람들이 모여 역사상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구속 환송회를 했다

프로파일러의 강의를 듣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다. 이 사회에서 경찰과 검찰이 존재하고, 누군가를 단속하고 누군가가 누군가를 강제하고 재판하고 판단하고 단죄하고 구형하는 시스템, 그런 권리가 과연 인간에게 있는가 아니면 인간이 만든 시스템 위에 군림하는가 생각한다. 법안에 있는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밖에있는 누군가를 내쳐야 하는 것이 법의 기본이라던 아무리 읽어도 삐딱함이 느껴지는 조르주 아감벤을 떠올린다.

인간 세상에 대해서 유지되는 그 시스템의 효율성에 대해서 사람들은 한 번이라고 고민하고 살까. 특정한 계급이 세상을 엄호한다는 핑계아래, 한없이 자행되는 폭력의 연속성을 생각한다.

인간이 얼마나 처참하게 걍팍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의 인격의 밑바닥을 보고 싶을 때마다, 나는 살인범이 사람을 죽이고 토막내고 그러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영화를 즐긴다. 어쩌면 그건, 그래, 내가 겪은 폭력의 역사는 매우 고상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 침묵하고 살고있다
말해야 한다.

나보코프의 말이 떠오른다.
말하라. 기억이여.

나는 얼마나 말 할 수 있 는 가.

386은 꿈이다

나에겐 386세대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내가 겨우 초등학교를 다닐 때쯤 종로에 나가면 최루탄 냄새가 가득했고 학생들은 늘 “데모” 중이었다. 
비싼 등록금 내주고 소팔고 논팔아 학교 보내줬더니.. 하는 세대는 그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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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계를 책임지는 엄마의 작업, 그에 필요한 재료를 사러 엄마와 강북시중심을 돌다보면 늘 백골단과 마주쳤고 최루탄이 어디 터지나 신경써야 했다. 
 
나의 엄마는 67학번쯤 되는데, 야간통행금지에 걸렸다가 풀려난 이야기, 닭장차라고 하는 저 탈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박정희가 화폐개혁을 또 한다더라 는 말을 포장마차에서 했다가 막걸리보안법에 걸려 몇 달동안 생사를 모르다 다리를 못 쓰게 되어 나타난 거래처 아저씨의 인야기를 전하며, 이 나라에서 데모를 하는 것은 삼대가 망할 일을 애써 도모하는 것이며, 여자의 경우 성고문도 비일비재 하니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는데, 오히려 엄마가 이야기를 전하는 그 어법은 무용담과 같아서 나에겐 환상적인 저항의 문법이 되었다. 
 
사람을 마구 잡아가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는 정부가 있다고 알려준 것은 역설적으로 “절대 데모꾼이 되어서는 안된다” 라고 강조했던 엄마였다. 그 때 엄마의 언어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엄마도 뭔가 그 “데모꾼” 들에 대한 호의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의 용기와 체제전복에 대한 꿈과, 사생활과 가족의 생계보다 더 큰 대의를 생각할 수 있는 그들에게 계급이라는 것을 덧붙여 나와 다르지만 그 팔자도 나름 부러운 상황이었던 것 같다. 
나의 모친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밥그릇을 포기하고 대의를 택할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에게는 늘 자신의 생활과 자신의 몇 안되는 혈육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했고, 어떤 대의가 사회적으로 실천될 때, 약간의 혜택을 조금 더 특별하게 받고자 했다. 그건 본인이 끊임없은 불가항력의 힘에 이끌려 인생의 파도를 고스란히 맞아야 했던 것이 억울함으로 남았고, 그에 대한 미미한 보상을 세상에 요구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그렇게 살아왔는데도, 결과적으로 나에겐 엄마가 투쟁해야 할 권력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엄마의 규칙대로 살길 바랐던, 그것도 매우 강경하고 카리스마가 심한 사람이었으므로, 나에겐 저항의 문법이 필요했다. 어릴 때는 욕지거리를 배워 사용해보기도 했지만 이후엔 사회적으로 여러가지 메커니즘이 얽히고 설켜 결국 내 삶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느낀 건 아마 중학교 때쯤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거였다. 그게 내가 열 네살쯤 때의 일이었다. 전교조가 시작되었고, 6월 항쟁이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당시 시사저널은 좋은 언론이었고, 한겨레가 창간되기 전이었다. 그 때 선두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 386이었다. 전교조를 시작한 나의 선생님들은 1960년 생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그 분들의 “애제자” 로 쉽게 발탁되었다. 그 분들이 읽어보라고 적어준 책의 리스트는 점점 늘어나,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전태일 평전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따로 있었고, 그들이 즐겨 읊는 시가 따로 있었으며, 그들에게 가치가 있는 작가는 따로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답습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아마 그들은 저항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386의 정서를 많이 흡수한 것은 내가 만났던 그 세대의 사람들이 줄곧 나에게 친절했기 때문이다. 
 줄곧 그들은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려 했고, 나는 기쁘게 그것들을 받아들였으며, 더욱 익숙해졌다. 그러다 보니 다시 그들에게 환영받는 입장이 반복되었다. 
 그들이 대열에서 벗어나 각자 흩어지고, 우리세대는 한총련의 마지막을 맞이했으며, 나는 그 입시전쟁에서 복합적 이유로 밀려나 그 대열에 끼지도 못했는데, 대열은 연세대 사태로 와해되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조국을 휩쓸었다. 대학 가서 뭔가 해 볼 것 같던 친구들은 취업에 몰두했고, 그들은 높은 소득이 보장되는 전문자격증을 따기 위한 삶을 살아갔다. 나 역시, 그런 대의나, 저항에 대해서 잊고 살았다. 그 때, 우리가 저항했던 적들은 모두 시야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 적들은 땅으로 스며들어 우리들이 마시는 물까지 오염시켰다. 그게 바로 경쟁과 경제위주의 삶, 약육강식, 적자생존, 2등은 기억하지 않는 시기가 2002년 월드컵과 노무현을 어깨에 메고 시작되었다. 
 
 2002년 종로서점의 폐점이 이 시대의 시작을 울리는 경고였다고 생각한다. 
 월드컵이 열리고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레드컴플렉스를 극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컴플렉스를 극복했다기 보다, 이념을 버리고 소비를 택한 소비자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노무현이 대선에 승리한 것으로 진보진영이 한 발 나선 것처럼 보였지만, 그 때 부터 사람들은 선거나 투표권이 소비자의 권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만일, 전두환이 이 시점에 다시 출마를 해, 숨겨둔 돈이 100억조 정도 있는데, 그돈으로 시장경제를 다시 활성화 시키고 당신들의 아파트값을 유지해주며 해외정복을 시작해 부동산 경기를 재 점화하겠다는 공약과 함께 실천을 시작한다면. 나는 전두환도 재선에 이길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광주에서는 곡소리가 이어지겠지만, 이미 그런 것들은 괘념치 않는 사회 아닌가. 북한 주민들을 그리도 걱정하는 사람들이 한 국가의 테두리 안에 살고 있는 5월마다 제사상이 이어지는 광주를 잊고, 대추리를 잊고, 노근리를 잊고, 자살자가 가장 많은 동두천을 외면하고 지내지 않던가. 
 
 이 시대가 진보가 그나마 밥술 좀 얻어먹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해도 괜찮을 것 같다.
 이 시대는 위험사회(율리히 벡), 그리고 고도성장이 멈춘 것을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상태, 그리하여 더 이상 발전하거나 팽창하지 않을 각자의 재산에 대해서, 그 재산을 빼앗기면 가난과 죽임과 파산과 종말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시대, 그래서 이 사람들은 더욱 더 보수保守적일 것이다. 자기의 것을 지키기 위한 것. 그 지키기 위한 방패로 누군가는 진보를 택하고 보수진영을 택할 뿐, 진정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제는 진보나 보수라는 구분 자체가 모호한 상태이다. 성장을 하기 위해 파괴를 서슴치 않아야 한다는 종(縱)적 팽창에 대한 주장인가, 혹은 성장을 멈추더라도 나누면서 가야한다는 횡(橫)적 팽창을 꿈꾸는가 그 정도의 차이다. 
 
 나에게 꿈과 저항을 알려준 386세대는 지금 50대가 되었고, 이번 대선을 지나면서 극명한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다. 
 시사인에 만화를 그리는 굽시니스트는 “50대 이상 평범한 엄마들이 아는 유일하게 친근하고 스토리가 있는 정치인”으로 박근혜의 당선이유를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대선이후 멘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누군가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뒷짐을 지고 있다. 이리 저리 여러곳에서 모두 실망한 사람들은 대통령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국민수준이 더 중요하다는 이상적인 생각을 하기도 한다. 
 
 386이 대열에서 벗어날 때쯤, 신자유주의, 혹은 경기 부양의 마지막 정점을 향해 그래프를 바짝 끌어올리는 총력전을 벌이고 있을 때, 이들은 후배들을 양성할 시기를 놓쳤다. 많은 후배들이 대열에서 벗어나 어학연수를 떠났고, 혹은 돌아오지 않았고, 혹은 학위를 따서 금의환향했다. 
 어떤 50대가 나에게 말했다. ‘가난과 전쟁을 직접적으로 겪지도 않은 세대 아닌가. 중학교 입시와 고등학교 입시가 사라졌던 세대가 아닌가.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그렇게 쉽게 간 세대가 단군이래 없었을 것이다. 취직도 얼마나 쉽게 되었던가. 학교 앞에 대기업의 차가 와서 학생들을 모시고 가던 세대다. 취업을 하고 나서 경기는 얼마나 좋았나. 10% 성장율까지 보인 고도성장의 세대다. 세계 역사상 그런 유래가 없을 만큼 실컷 먹고 잔치 벌린 가장 풍족한 세대가 아닌가. 그러면서 뭐가 힘들다고 징징대는 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나도 50대지만, 우리는 정말 편하게 살았다.’ 라고.
 
 그 사람의 이야기에 바로 다른 50대가 “그건 당신 생각”이라고 일갈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었겠군.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덤으로 억울함이 솟구쳐 올라오기도 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적어도, 
 기본 규칙과 규율이 있고, 그에 대해서 변치 않는 적용이 있고, 열심히 하면, 이렇게 가면, 성실히 하면, 이 길이 正道다. 라는 룰이 지켜져야 하지 않나. 
 이제 인생의 절반정도를 살았는데 지금 느끼는 것은 나보다 어린 세대, 혹은 내 자식들이 엄마 이 길이 正道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글쎄..어떤 인간이 정권을 잡고 누가 교육감이 되고 누가 입시제도에 손을 대느냐에 따라 정도가 달라지지 않을까? 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다. 
 
아랫세대들에게 정답과 규칙을 가르쳐 줄 수 없는 세상. 그 때 그 때 다르다고, 융통성있게 살아야 한다고. 정답은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게 오늘의 현실. 
 
공분을 논하기 바쁜 인터넷 場에서 조만간 “경상도 50대 개새끼론”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용어에 광분하지 마시라. 한 때 20대 개새끼론이 유행이었다.) 
저항할 게 없어서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제 그냥 맥이 빠져버린 것이다. 
 
저항은 언제나 지속된다. 운명에 대해, 관습에 대해, 삶에 대해, 불가항력적인 권력에 대해, 내 욕구에 대해, 인간은 끊임없이 저항해야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저항이 모든 이에게 善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저항은, 저항하고 싶은 자에게만 가치가 있다. 
 
그런데, 맥 빠져 버린 이 나라 사람들은 왜 몇 백년전 실패한 혁명의 이야기 “레 미제라블”에 이렇게들 광분하시는지. 
당신들의 마음속에 장발장에게 투영한 그 부글거리는 욕망의 실체는 무엇인지, 들여다 본 적 있는가. 
 
  
 
 
 

Up the hill

up the hill 이다. Hooker hill이라고 부른 적도 있다.
고만고만한 juicy bar ( 두 잔 값을 내고 한 잔을 마시면 한 잔의 가격이 아가씨에게 돌아가는 체제) 들이 있고 맨 위에 스텀퍼라는 댄스클럽 ( normal한 pop음악) 이 있고 그 밑 우측엔 프렌즈라는 곳이 있었다. 사진으로 간판이 보인다. 프렌즈에는 당시 흔치 않던 포켓볼 다이가 있었고, 다트판도 있었는데, 한국인들이 갈만한 장소였다.

그 윗쪽에서 스텀퍼 사이에는 오란씨와 소주를 섞은 소주케틀kettle을 1.5리터 PET 병을 자른 것에 담아 팔았는데, 일반 미군 사병들이 자주 사 마셨다. 그 아이들은 보통 16세부터 시작해,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저학력층 아이들도 적지 않아 자기 이름 정도 겨우 쓰는 아이들이었고, 하루에 50단어만 사용한다는 전설의 계급층이었다.

맨 꼭대기엔 남산모텔인가 여관인가 하는 엉뚱한 여관이 골목의 마무리를 했고, 그 골목의 왼쪽으로 틀어서 내려가면 매번 불이 나서 문을 닫는 나이트클럽이 있은 유명한 계단(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도 연출) 연결된 길이 있다.

간혹 미군 헌병대가 나타나면 골목이 좀 얌전해졌고, 비상이 걸리거나 미군범죄가 일어나면 모든 일반사병은 외출금지가 걸려 이 골목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병들을 상대하는 저렴한 술집들이 있어, 고위 장교나 다른 외국 비지니스 맨들은 이 곳을 찾지 않았는데, 유독 스웨덴 네덜란드 등 스칸디나이아 근처 복지국가쪽 엔지니어들은 이 곳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우리나라에 발전기를 파는 북유럽 A모회사 팀들이 특히 이 골목을 좋아했다.

당시 매우 인상깊은 커플이 하나 있었는데 50대의 북유럽 엔지니어 커플로, 비혼이었는데, 아줌마는 작고 마른 체형에 아주 머리가 길고, 아저씨는 콧수염이 난 바이킹 같이 생겼었다. 이 둘은 주말마다 이 골목의 입구에서 헤어져 밤새 각자 놀다가 동 틀무렵 헤어진 곳에서 다시 만나 집으로 돌아갔다.
Honey, did you have fun?
Yes, I did. How about you?
Me, too!
I’m very grad to hear that you had fun!

스텀퍼stumper 에는 이태원에서 잔뼈가 굵은 듯한 한국인 디제이 아저씨가 있었는데 언제든지 내가 Gloria Gaynor의 I will survive 를 틀어달라고 하면 두 번 세 번씩도 틀어주곤 했다.

이 사진이 찍힌 지점의 좌측쯤에 있던 업소에서 그 당시에 여성접대부가 미군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고, 그 이후 관광특구로 개발되고 이태원이 내국인에게 업소를 오픈해야 하는 규정이 생긴 뒤 IMF가 터지고 이 골목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때 흥이 좋은 (군인들에게도, 민간인들에게도 아무 불행한 사건도 없는) 때에 이 골목은 사람으로 꽉 차서 걸어올라가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때 나는,
스물 셋에서 스물 다섯,
하루종일 미니스커트를 입고 높은 구두를 신고 계단을 뛰어다니며 햄버거와 스테이크를 나르다가 12시에 마감을 하면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떨구는 대신 카스 한 병 마시고 카스 두 병을 마시러 이 골목의 프렌즈를 김언니와 올라갔었다.

알콜중독으로 비명횡사할 것 같던 김언니는 일본남자와 결혼해 딸을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고, 나는 지금 고등학생 딸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는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제 에비가 사다 준 설렁탕 반그릇을 먹은 아이가 “아 행복하다” 라고 말한다.

아들의 집

나에겐 아들이 하나 있다.
이 아이는 2006년도에 한국에서 태어났고, 2006년 12월에 처음 아파트에 입성했다.
난곡의 판자촌을 깎아 만든 재개발 단지였다. 유모차를 밀고 높은 언덕을 올라다녀야 하는 길이었다.
시흥의 뒷길을 돌아 멀리서 그 아파트를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성채가 모여 있는 듯 했다. 그만큼 생경스럽고 낯선 곳이었다. 내가 사는 곳이었지만, 언제나 기괴하고 이상야릇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산안개가 아파트 단지를 뒤덮었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신림역과 기온차이도 3도 정도 났다. 미림여고를 지나 버스가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올 때는 귀가 멍멍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2009년 7월에 지금 살고 있는 평촌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 곳은 모두가 아파트로 이루어진 신도시이다. 20년이 되어가는 대한민국 신도시 1기 도시 중의 하나로, 대부분의 아파트들이 조금씩 낡아가고 있지만, 적절한 20-30대 평수가 골고루 있고, 사교육시설등이 잘 되어 있고 구획정리가 깔끔한데다가 인구밀집도가 높아 생활편의시설이 많다. 이런 편리성 때문에 20-30대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키우기 좋은 도시로 평가해 이주를 해오는 경우가 많다. 기존의 안양이나 평촌 들녘에 살던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신도시라는 것이 원래 외부인을 유입하기 위한 곳이므로.

아이는 그렇게 기억이 생성될 무렵부터 아파트촌에 살았다.

이 아이가 자라나면서 문화의 격차가 생겨나고 있다.
일단 아이는 흙길을 잘 걷지 못한다. 산에 데려가면 자꾸 미끄러지곤 한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대로, 물이 마르면 물이 마르는대로 그 느낌이 달라지는 산길과 흙길을 잘 걷지 못하는 것이다.
“벽장속의 요정”이라는 김성녀 주연의 모노드라마 연극에는 40여년을 벽장에 숨어 살던 정치범 아버지가 세상에 처음 나와 포장된 도로 위를 걸으며 튕겨져 나갈 거 같고, 미끄러질 거 같다고 하던 것과 상반되는, 그러나 역시 낯설다는 것에 대해선 동일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아파트단지를 나와 안양천변을 걸어 단독주택과 연립주택이 많은 관양동 인근의 밤산책을 나갔다가 반지하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아이가 물었다.
_ 엄마 저기는 뭐야?
_ 집이지.
라는 내 말에, 저기가 사람이 사는 곳이냐고 물었다. 집이 땅 속에 있어? 라고.
아이는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반지하방. 엄마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모두 다 한 번씩 거쳐갔던 주거시설. 반지하방. 거기도 사람이 살고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곳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이는 낯설어 했다.

또 몇 달 전에는 내가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가면..” 이라고 말했을 때,
아이가 “마당이 뭐야?” 라고 물었다.

그러니까 원래 집은 대문이 있고, 마당이 있고, 그 안에 건물이 있고, 건물에 들어가는 현관문이 따로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마당이 없는 집에서 유년기를 모조리 보냈고, 앞으로도 몇 년은 더 아파트에서 살아야 할 아이에게 마당이란 매우 먼 곳의, 동화나 영화에나 나오는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처음 크레파스를 쥐고 집을 그릴 때도 아이는 아파트를 그렸다.
그러면서도 엄마 아파트는 왜 모두 네모모양이야? 라고 묻긴 했다.
세모난 아파트, 동그란 아파트가 있으면 재미날 거 같아. 라고 말하긴 했다.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긴 하지만, 함부로 놀러가지 못하는 곳.
마당과 골목이 없는 곳.
경비아저씨와 관리사무실이 있는 곳.
누군가 우리집을 지켜주는 대리인과 노동의 대리자가 존재하는 곳.
그 대신에 마당도, 대문도 없는 네모난 공간.
우리집과 저 친구의 집이 똑같고, 우리집은 몇 평이고, 친구의 집은 몇 평인 것으로 한 번에 수치상의 가늠이 되는 공간.

그러나, 그 집엔 다락방이 있고, 좁은지 넓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집엔 뭔가가 있는, 그 집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닌.

그런 자리에서 아이가 자랐다.

이 아이가 좀 더 자라, 반지하방에 살고 있는 친구와, 마당이 있는 집에 사는 친구를 만나게 되면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질 수도 있겠고,
우리가 다른 형태의 주거형식을 택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지금의 형태가 지속적으로 이어졌을 때, 아이가 갖게 되는 마음의 폭은 어느 정도일까 궁금하다.

내 마음대로 내 집을 개선하지 못하고, 정해진 양식과 주어진 형식에 따라 객관식의 답을 맞추듯 다지선다로 골라야 하는 삶이 지겨워지려고 하는데,
어쩌면 그런 선택지를 고르는 인생은, 2006년생 내 아이에겐 배고프면 밥을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 당연한 인생의 법칙이 될 지도 모르겠다.

2013. 1. 3.

한국사회, 가족의 파시즘 – 강준만 글 발췌

냉정한 사회과학적 분석의 메스를 들이대자면, 한국의 어머니 역사는 어머니가 ‘자궁 가족’의 수장으로서 그런 전쟁 (입시전쟁) 체제에 순응해 온 슬픈 역사다. 그 역사는 ‘보수적 과잉반응’, ‘보상적 인정 투쟁’ 이라고 하는 세 가지 관점에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보수적 과잉 순응이다. 이는 어떤 체제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오히려 그 체제에 과잉 순응함으로써 자신의 안전과 번영을 추구하는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
어머니의 카드는 아들이다.

둘째, 보험적 투자협정이다. (중략)
“한국의 특수한 모성 이데올로기 속에서 한국 중산층 어머니는 서구의 어머니처럼 아이의 감정적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공감하는 어머니가 아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아이를 하나의 투자의 대상으로 파악하면서, 아이의 성적과 대학 진학, 이에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성공에 책임을 지는 것을 어머니 역할로서 받아들이고 있다….이러한 한국사회의 모성 이데올로기는 아이를 하나의 상품으로 그럴 듯 하게 만들어 내기 위해, 어머니로 하여금 아이들과 전적으로 함께 지내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 윤택림
“근 1-2 세기 동안 지속된 식민지적 격동기와 혼란기를 살아가면서 여자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전력투구했으며 특히 부계 혈통주의의 전통에 따라 아들에게 투자를 했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이 커지니까요. ‘여자의 적은 여자’ 라는 말이 종종 나옵니다만, 아들을 둔 어머니들을 남녀 고용 할당제를 반대하며, 불합리한 결혼제도를 앞장서서 존속시킵니다. 여자는 혼란기를 거치면서 개별 가족내의 어머니로서 강해졌지만 여전히 여자로서는 매우 취약한 존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조한혜정

셋째, 보상적 인정 투쟁이다. 아들에게 뭘 바랄 게 전혀 없을 만큼 유능하고 당당한 어머니들이 많다. 그래도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인정 투쟁’을 피해갈 순 없다. “니네 아들 무슨 대학 다니니?” 여기서 기죽는 어머니들이 많다. 아들에게 뭘 바라서가 아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인정 투쟁의 도구다. 어머니의 유능함을 입증해주고 자존심을 충족시켜줘야 한다.

(중략)
교류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어머니의 인정 투쟁은 변형된 권력투쟁인 셈이다. 투쟁이 습속이 돼 관성에 의해 굴러가는 면도 있다. 공적 영역에 대한 불신과 혐오는 완화 되기는 커녕 계속 악화되고 있기 때문에 대중에겐 다른 선택이 없는 점도 있다. 그래서 어머니가 이끄는 新자궁 가족모델과 이에 따른 ‘도구적 모성’은 한국사회의 전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전 세계적으로 살펴볼 때 가족주의가 강한 나라일 수록 부정부패가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략)

한국에서 개인은 혼자 뛰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대표선수다. 한국인은 국가의 이익과 가족의 이익이 충돌할 경우 가족의 이익을 앞세우는 경향이 강하며, 이는 부정부패가 성행하는 주요 이유가 되고 있다.
(중략)
집단적 위선의 향연을 꼬집고 ‘가족 파시즘’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이득재는 한국의 가족주의를 ‘가국체제’, 즉 가족과 국가의 논리가 끈끈하게 결합된 체제로 보면서, 가족을 파시즘의 씨앗이자 파수꾼으로 규정했다. 이런 시각에 근거하여 이명원은 한국의 가족주의는 국가주의로 표상되는 집단주의의 하위구조이기 때문에 지난 역사를 통하여 작동되었던 가부장적 ‘국가 파시즘’ 체제는, 가족단위 내에서 가부장적 ‘가족 파시즘’ 체제로 재생산된다고 보았다.

“오, 가족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느 순간에도 잊을 수 없는 그리운 살점이면서, 나를 낳고 키워준 사랑과 감사의 궁극적 상징이자, 때로는 내 삶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끔찍하게도 들러붙는 수초 같은 것’ – 김용희

어머니 수난사 – 강준만 발췌

오늘 낮에 친구와 나눈 대화. 경상도 남자들의 해외망명(?) 욕구에 대한 원인은 가족파시즘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다 페북의 어느 글을 읽고 다시 강준만의 책을 꺼내 일부 발췌해 적는다.

특별한 계절

셀프주유소에서 카드를 긁고 있는데 (순서상 카드 먼저 긁고 주유) 주유소 아저씨가 다가오신다.
아저씨가 주유총을 잡으시고 물으신다.
할 줄 알아요?
아저씨 라기엔 연세가 많으신 편.
아버지 뻘도 더 되신 듯 하다.
네! 잘 합니다! 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저씨는 총을 잡다가 놓고 한 번 해보랜다.
익숙하게 걸쇠를 딱 받쳐놓으니 어 정말 할 줄 아시네 하신다.
예전에 알바도 했었습니다. 오래전에요.
아저씨가 씩 웃으신다. 그러냐고.
한 16년전쯤이죠. 라고 했더니 그 때도 셀프주유소가 있었냐고 물으신다.
아니요.
순간, 경유차와 휘발유차를 구별하고 차종마나 주유구가 달랐던 걸 기억하느라 종종걸음치던 그 겨울이 떠올랐다.

아저씨가 다시 물으신다.
그럼 한 서른 대여섯됬나?
서른 여덟입니다.
아 그럼 토끼띠인가? 하셔서 네!
하니 아저씨 아들이 토끼띠라 잘 아신다 하신다.
우리 아들은 토끼띠 6월 생인데..
저는 음력으로는 7월입니다.
한 달 늦게 나왔구만 하던 아저씨의 주름진 얼굴 위로 다시 한 문장이 지나간다.

그 해 여름은 진짜 더웠지..
애엄마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

37년전 여름, 더웠던 것을 기억하는 노년의 남자는, 당시 젊은 아빠로 아내가 만삭으로 힘겹게 땀을 흘리던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정말 더웠다고 말했던 엄마가 떠오른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산같이 쌓인 머슴밥을 막던 겨울의 공기가 코끝에 스치던 그 계절도 떠오른다.

한여름의 열기를 기억한 늙어가는 남자와
한겨울의 공기를 기억하는 내가 주유소에서 노란 노즐을 잡고 섰다.

지금은 봄,
이 역시 또 누군가에겐 특별한, 아주 특별한, 40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그런 공기겠지..

2012. 4. 28.

썩지 않는 사과

⒞Hana Lee_120424 @Gwanyangdong

봄빛은 찬란한데 당신 마음은 여전히 지옥이구나
누군가에게 갖고 있는 욕심들이 그대를 지옥에 몰아넣는구나

내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인정받고 싶고, 숭앙받고 싶은 당신의 노력들을
매일 매일 입으로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이로구나

내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따듯한 눈빛으로 안아주길
수고했다고 어깨를 쓰다듬어 주길
따스한 밥상을 함께 하길
당신이 원하는 것들은 그리 큰 것들이 아닐 것이다.

내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리하여 마음 한 켠에 미안함이 있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고
고맙다고 말할 시간을 놓쳤고
수고했다고 말할 시간을 놓쳤다.

놓쳐버린 시간이 너무 가슴아파 술에 취해 울고 있는 것이지.
눈물은 수치라서
화를 내고 있는 거지.

내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언제나 나는 이 자리에서 당신을 응원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당신이 보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그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대를 일으켜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일어나는 것은 그대 스스로 해야한다.
내가 일으켜 주는 것은 언젠가 당신이 다시 무너질 수 있음을 말한다.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깨우치지 못하면
다음 번에 쓰러졌을 때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때 당신은 일어날 수 없으므로.

당신의 마음을 봐야만 한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슬퍼도 아무리 버겨워도
조금이라도 기운이 있을 때 마음을 사랑하라.

모든 것이 다 그대만의 잘못은 아닐진대
그리하여 나는 오늘 이렇게 억울함을 조금 가라앉히는 것이다.

2012. 4. 27.

_ 블로그에 이렇게 줄바꿈을 해서 쓰는 것은 가독성과 쉽게 쓰기 위한 블로그 작성의 특유한 글쓰기 입니다. 詩라고 오인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혼으로 글을 쓰는 詩人들을 모독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