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빛깔 무지개 – 3

[안양중학교 1학년 8반 9반 학생들의 인터뷰 희망대상자 거점지역 맵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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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장소를 기반으로 구획을 나누어 정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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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이동할 모둠을 정해 4개 팀으로 구성하되 함께 진행할 교사도 상황별로 정리한다.

거리가 멀거나 유달리 떨어진 곳이 있는데 제일 먼 곳을 제일 유심히 지켜보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 지도교사는 학교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의 안전을 우선 살피도록 한다.

인터뷰 대상자의 만남장소를 교사가 파악하지 못할 경우 아이들에게 묻는다. 지역에 관한 정보는 교사보다 아이들이 더 잘 알고 있으며 위험지역이나 우범지대 역시 아이들이 더 정확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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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섭외가 실패하거나 불발될 경우를 대비하여 차순위로 방문할 수 있는 희망대상자를 함께 명시한다. 외부 외출시 아이들이 들뜬 마음에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에 비상시 대책을 사전에 준비해야 하며, 담당교사들은 아이들이 인터뷰장소로 입장하는 것 까지만 확인하고 개입하지 않기 위해 중간지점에서 기다린다. 성인 개입시 아이들의 자율성이 방해받을 수 있고 위축될 수 있으며 반면 의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이들끼리의 모둠활동에 성인은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 좋다.

섭외외출은 되도록 자율적으로 진행하도록 하되 꼭 지켜야 할 사항만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한다. 아이들이 가지고 가야 할 명찰이나 기록을 위한 필기도구와 인터뷰 동의서는 꼼꼼하게 각 팀별 지도교사가 확인한다.

정리된 섭외결과로 인터뷰에 대한 구획지도는 다시 한 번 정비한다. 섭외중에 인터뷰를 끝낸 모둠도 있었기 때문에 먼저 끝낸 모둠은 교실로 돌아와 강사와 함께 내용을 정리하고 다른 모둠은 지장없이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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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외출할 때 교사와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은 무조건적 신뢰다. 실패하는 모둠이 발생하길 기다리는 것이 좋다. 모든 모둠이 성공하지 않기를 바라야 한다. 성공경험은 만들어줄 수 있으나 실패경험은 만들어 줄 수 없다. 교실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던 아이가 밖에 나가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고 수행능력이 부족해 보이는 아이가 반전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시키되 가장 먼저 확신을 심어줘야 할 지도자가 아이들을 먼저 신뢰해야 한다. 완벽하게 섭외와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는 역량강화훈련이 부족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고 아이들이 잘하지 못해도 시도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칭찬해야 한다.

섭외과정에서도 각자의 역할수행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각 조마다 정해진 역할을 다시 인지시키고 책임PD가 섭외와 인터뷰에 관련된 모든 돌발상황을 책임지도록 한다. 교사는 되도록 개입하지 않되 아이들의 부탁이 있을 때만 개입하도록 한다.

작가는 섭외당시 상황을 기록하여 제출하고, 인터뷰기자는 섭외요청을 직접 말로 전달한다. 사진기자는 섭외당시 상황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영상기자도 영상으로 기록한다.

섭외 시 인터뷰대상자를 만날 장소를 면밀히 살펴 질문지 작성에 도움이 되도록 전체 분위기를 파악하고 느낌을 기억하며 새로운 것을 발견해오도록 지도한다.

 

섭외과정에서 1순위에 실패한 조는 바로 다른 대상자에게 이동할 수 있도록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협의하여 진행하고 아이들의 의견을 우선반영한다. 섭외문구 지침을 주었더니 말로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고 서류만 전달하거나 주어진 문구를 그대로 읽는 경우가 많았다. 속도를 늦추어 상세히 실습하지 못한 탓이다.

 

섭외가 완료된 상황을 주강사에게 제출하면 주강사는 아이들의 섭외내역을 바탕으로 다시 구획을 정리하고 인터뷰 대상자의 기본사항을 파악하여 표로 도출한다. 이 사이 아이들은 인터뷰 대상자에게 제출할 질문을 별도로 정리하여 제출한다.

[엑셀시트 참고]

 

인터뷰 당일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은 아이들이 정리해온 질문지를 점검하는 것이다. 각 모둠별 질문지를 모두 확인하고 미비한 부분을 지도강사가 추가해서 질문하도록 방향을 잡아준다.

각 역할별로 주의할 점을 알려줘서 기본적인 취재기록을 잘 해올 수 있도록 지도한다.

 

역할별 주의사항
영상 자막처리와 편집을 할 수 있으면 해서 제출합니다.

인터뷰 기자보다 대상자의 얼굴과 손짓을 더 집중적으로 찍습니다.

용기를 내어 되도록 가까이에서 찍습니다.

사진 인터뷰 대상자를 더 크게 찍습니다.

스텝과 인터뷰 취재단의 모습이 인터뷰대상자와 겹치지 않도록 합니다.

인터뷰 장소가 그 사람의 직업과 관련있을 경우 내부 풍경을 더 찍어오도록 합니다.

인터뷰 장소와 그 사람이 일하는 곳은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도록 찍고 세로와 가로 중 어떤 구도를 택할 것인지 고릅니다.

작가 취재 상황은 문장은 육하원칙에 맞춰서 씁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꼼꼼하게 자세하게 정확하게 씁니다

인터뷰 기자 인터뷰는 또박또박 명료하게 말합니다.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질문합니다.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합니다

책임 PD 모든 구성원이 각자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구성원이 어려워하는 일은 대신 합니다.

인터뷰 진행이 잘 진행되도록 최대한 협조합니다.

 

또한 이 인터뷰는 정보취득을 위한 목적이라기 보단 사람간의 소통이 목적이므로 약탈적 인터뷰를 지양하도록 지도한다.

 

인터뷰 금기질문
모든 인터뷰에서 금기할 사항은 아님
우리가 할 인터뷰에서 되도록 하지 말아야 할 질문100인 100색 인터뷰는 적나라한 기사용 인터뷰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고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목적이지 무언가를 캐묻기 위해서 만나지 않습니다.

불편한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안양중학교를 대표한다는 것을 꼭 기억합니다.

상대방의 약점, 상처를 건드리는 질문

월수입, 임대료, 일 매출 등 금전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질문

꼭 묻고 싶으면 -> 장사가 잘 되시는지? 정도로 뭉뚱그려서 질문할 것

인터뷰어의 특이한 점에 대해 놀라지 말 것

인터뷰어가 대답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더 캐묻지 말 것

 

각 모둠별로 인터뷰를 진행하되 되도록 현장에서 기록한 내용을 교실로 돌아와 주강사에게 제출하도록 한다. 가장 좋은 것은 모둠별로 모든 상황을 잘 정리해 PD가 취합한 다음 한꺼번에 주강사에게 제출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개개인별로 여건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각자 개별적으로 제출하되 각 모둠의 PD가 확인하는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휴대폰을 이용해 주강사에게 제출하게 되는데 인스턴트 메시지를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보편적이다. 아이들은 데이터 전송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무선인터넷을 이용하도록 하면 좋겠으나 설비시설 여건상 준비되지 않아 주강사의 핫스팟을 열어 데이터를 공유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일부 촬영한 영상은 용량이 커서 집에 돌아가 컴퓨터에 옮겨 이메일로 전송하도록 했고 작가는 인터뷰 상황을 정리하고 인터뷰기자는 질문과 답변을 글로 적어 제출하도록 했다.

 

질문지 작성에 어려움을 겪는 모둠을 위해서 기본예시도 준비하도록 한다.

살아온 날들 중 가장 행복한 날 하루를 떠올린다면?

지금 하는 일을 하던 중 가장 기분 좋았던 에피소드는?

일을 하다가 정말 힘들 때는 언제이며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인생에 지켜야 할 덕목이 있다면 무엇일지?

안양중학교 학생들에게 칭찬해줄 게 있다면 무엇인지?

이 동네에서 일하신 건 언제부터인지?

석수3동은 어떤 동네라고 생각하시나요?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안양중학교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11월입니다. 올 한 해 꼭 기억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내년 계획은 세우셨나요? 내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올 한 해 하지 못해서 아쉬운 일은 무엇인가요?

중학교때 친구들과 지금도 연락을 하시나요?

매일 매일 똑같은 일을 하는 게 어렵지 않으신가요?

출퇴근 시간은 어떻게 되시나요?

지금과 같은 직업을 갖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자격증이나 가게 허가등.

취미가 있으신가요? 제일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좋아하는 노래가 있으신가요? 요즘 유행가를 알고 있으신가요?

 

 

질문의 깊이는 취재자의 세계의 깊이를 따라간다. 조금 더 여유있는 시간이 주어졌으면 한 사람의 삶을 상상해보고 그의 하루를 추적해보는 수업도 진행할 수 있었을텐데 여건상 어려워 생략한 점이 많이 아쉽다.

 

기초적 질문에도 지역주민들은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주었고 아이들은 힘들고 어렵기도 했지만 깨닫는 것도 많고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예상치 못하게 별도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서 발표한 친구들도 있었다.

역시 아이들은 믿는 만큼 해 낸다는 확신을 다시 한 번 정립하는 계기였다.

 

열두빛깔 무지개 – 2

본 게시물은 2015년도 안양중학교에서 실시한 자유학기제와 마을교육공동체 사업을 기획하고 진행한 내용입니다.

자료집은 안양과천교육지원청에서 발간했으며, 강의안과 진행내용을 나누어 올립니다. 안양중학교 1학년 2개반 학생들, 총 60명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12개의 모둠으로 나뉘어 석수3동 충훈부 일대 주민들을 만나 인터뷰한 프로젝트입니다.

계속 “열두빛깔 무지개 – 2” 읽기

열두빛깔 무지개 – 1

본 게시물은 2015년도 안양중학교에서 실시한 자유학기제와 마을교육공동체 사업을 기획하고 진행한 내용입니다.

자료집은 안양과천교육지원청에서 발간했으며, 강의안과 진행내용을 나누어 올립니다. 안양중학교 1학년 2개반 학생들, 총 60명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12개의 모둠으로 나뉘어 석수3동 충훈부 일대 주민들을 만나 인터뷰한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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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남다

 

아래의 글은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서울지역 조합원 자격으로 은빛기획, 서울시시설관리공단과 같이 진행한 다음스토리펀딩의 연재글로 작성한 것입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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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5년간의 투병을 끝으로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님의 장례식을 치르며 장례식장에서 집에 잠시 들러 내가 부랴부랴 한 일은 집에 와서 기록을 챙기는 일이었다. 2008년부터 시작된 병원순례, 어머님의 마지막 5년은 병원기록으로 남았다.

진료비 영수증, 예약증, 병원을 옮길 때 받았던 의무기록지, 의사의 소견서, CT 촬영 안내문, 영상CD, 혈액검사결과, 임상실험권유안내서, 더 이상 병원에서 해줄 것이 없다고 했을 때 받았던 되의뢰서, 발급기관은 온통 병원이었다. 5년간, 병원수발을 들며 모든 기록을 40페이지짜리 두 개의 클리어파일에 정리했다.

기록을 모아두지 않으면 그 일도 사라지는 것처럼, 마치 없었던 일이 되는 것처럼, 나는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붙잡는 심정으로 하나씩 기록을 모았다.

사그라지는 생명이 기록된 영상CD에는 암세포가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하얗게 가득차 있었다. 이제 이 모든 기록이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된 건, 임종 일주일 전이었다.

어머님의 옷가지를 태우며 나는 클리어파일을 통째로 불속에 집어던졌다.

통증도, 고통도, 모두 사라질 것이라 말하며, 남은 진통제도, 진통제패치도, 아미노산도 기록과 함께 불속으로 던져버렸다.

이듬해 아버지의 자서전을 내고 싶다는 한 사람을 만났다. 구남매의 막내라던 그는 자기 아버지를 엄청난 기록광이라고 소개했다. 팔순을 넘긴 아버지의 기록을 그대로 두기 아까워 책으로 묶어 정리하고 싶다는 얘기와 함께 요즘은 아무도 쓰지 않는 흰 편지지를 펼쳐 보였다. 편지지에는 자필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팔순 노인의 글씨가 그득했다. 문서의 제목은 “비망록”이었다. 어떤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적어둔 기록. 비망록.

구남매의 아버지는 전라남도 고흥군 나로도에서 평생을 살았다. 단 한 번도 외지로 나간 적 없고 고흥군 면사무소에 다닌 것이 이력의 전부다. 막내아들은 아버지의 두꺼운 수첩을 하나 가져왔다. 단행본만한 합성피혁 다이어리에 본인의 사주, 조상들의 생몰년도, 제삿날부터 큰 딸의 결혼식 때 지출한 내역과 지난 30년간 자식들이 보내온 용돈과 방문기록까지 꼼꼼히 적혀 있었다. 경기도 남부에서 출발해 전라남도 고흥까지 달려갔다.

1980년대에 지었다는 집은 나로도 바닷가가 내려다보였다. 노인은 멋쩍게 웃으며 별 일도 아닌데 일을 크게 만들었다며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보였다. 노인은 1960년대부터 손바닥만 한 농협수첩에 매일 매일 일지를 적었다. 감상은 적었다. 그날 있었던 일을 또박또박 연필로 꼼꼼하게 적었다. 그날 무엇을 샀고 무엇을 팔았고, 몇 째가 서울에서 전화를 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연말이 되면 농협에 가서 수첩을 하나 구해오고 매일 밤 작은 소반을 놓고 앉아 그날의 일을 적은 것이 50여권이 넘었다. 두꺼운 클리어파일에는 신문스크랩, 자식들에 대한 서류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자료는 차고 넘쳤다. 손수 정리해 둔 비망록노트를 기반으로 구술을 받았다. 노인의 듬성듬성한 이야기는 글로 옮겨져 그대로 책이 되었고, 책 뒤편엔 손수 정리한 비망록을 그대로 스캔해서 실었다. 이 분은 스스로 자기 연대기를 표로 만들었는데, 본인의 삶과 지역사건, 국내 사건과 국외사건까지 같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왜 이렇게 기록을 하셨냐는 질문에 노인은 그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라며 웃었다.

구술을 시작할 때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초연하던 노인의 눈가가 붉어졌다.

“내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소. 그게 내 한인디, 뱃사람이 아닌디, 배를 하나 인수해서 그 배안에서 하룻녁 주무시던 중에 화물선인가 뭐인가가 충돌해가지고 침몰했지. 지금도 다들 옛날 사진은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어째 우리 아버지는 초상 하나도 없소. 아버지 인상이 어쩌코롬 생겼다 대충 이런 것으로 연상해서 만들수가 있다 하는디 이제 다 끝나버렸지 않소. 이제 끝나부럿어.”

나무처럼 한 곳에서 뿌리내리고 산 노인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서류 한 장 남아있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쓰는 연필로 이어갈 수 있을까.

“어째 초상하나 안 남기고.”라고 먼 산을 보던 노인의 선한 눈매가 가슴에 박혔다.

고흥에서 돌아와 시댁의 안방을 뒤적거렸다. 1988년부터의 가계부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매일의 기록을 넘겨보다 1995년 7월 손녀, 3.8, 출산 9시, 고대병원. 이라는 기록을 발견했다. 그 아래는 과일 4,000, 차기름 10,000, 과자 1,200, 소주 2,000이라는 그날의 소비가 적혀 있었다. 몇 권의 가계부를 뒤적거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의 가계부도 있어 꺼내보았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것은 이런 것이었다.

“8월 24일, 장남 가는 날, 어머니와 있다가 병상에 엄마 돈 두고 떠나감. 눈물을 흘리면서 갔다. 아버지 마음 몹시 아프다. 엄마의 가슴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기도.

8월 25일. 아내가 병원 퇴원. 은환엄마가 엄마 머리 감겨주고 둘째 집으로 가다.”

가계부는 곧 끝났다. 어머님의 기록은 아버님의 서툰 문장으로 이어져 나에게까지 남았다.

2015년 12월 14일 씀

 

 

그 때는 몰랐던 것

 

2003년 여름.

중국의 서쪽을 가겠다고 봄부터 마음을 다졌다.

여름방학은 7월과 8월이었다.

7월 한 달은 한국아이들을 가르치는 보습학원에 나가 국어와 논술을 가르쳤다. 한 달 생활비가 훌쩍 넘는 월급을 받아 챙겼다. 방학 특강을 맡는 동안 8월엔 여행을 갈꺼라고 호언장담해둔 터였다. 원장은 나를 잡았지만 절대 여행계획이 변경되는 일은 없다고 단언했다. 잘한 일이다. 2003년 여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서안을 거쳐 가욕관으로 가 만리장성의 끝을 본 뒤, 둔황에 가서 막고굴을 보고 티벳 아래쪽 감숙성과 사천성을 돌아 성도를 찍고 상해로 돌아오기로 했다. 당시엔 한국인들 중 이 부근을 여행한 사람이 많지 않았고 영어로 된 배낭여행자들의 싸이트를 몇 달동안 뒤졌다. 그 때 온라인으로 알던 한 남자가 이 코스를 다녀온 영향도 컸다. 사진을 잘 찍는 사내였다.

서안까지 가는 데 기차로 18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산사태로 철로가 유실되어 6시간 연착되었다. 서안에서 둔황까지 24시간이 걸렸다. 둔황역에 내리니 밤 12시였다. 자작나무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사제택시를 타고 1시간 넘게 갔다. 둔황역과 둔황시내는 그렇게 멀었다. 명사산에 올라 모래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느끼고 막고굴을 돌아 나왔다. 하미과를 먹었고 가욕관을 갔다. 만리장성의 끝에 서서 말도 안되는 지평선을 봤다. 하늘은 음침했다. 인터넷으로 연락해 함께 여행을 하겠다고 북경에서 온 여자와 동행을 했다. 여행 중 살을 빼겠다며 식사를 굶는 사람이었다. 견딜 수 없었다. 두려움에 벌벌떨던 그 사람은 란저우에서 비보를 듣고 한국으로 황급히 돌아갔다.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이틀이상 묵으면 자살이라던 공기오염이 심한 란저우에서 라면을 하나 먹고 맛대가리 없는 커피를 나눠마시고 헤어졌다. 10시간이 걸린다는 샤허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샤허를 가는 길은 내가 여태 가본 중 가장 험한 길이었다. 그보다 더 험한 길은 황룡에서 성도까지 돌아오는 길이었다.

샤허로 가는 길에 회족들이 보였다. 운전기사와 승무원은 승객을 기다리게 하고 회족식당에 들어가 국수를 사 먹었다. 나는 화장실을 가고 싶을까봐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샤허는 온 마을이 사찰로 이루어진 곳이다. 라마승들이 가득했다. 그 사찰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을 위한 식당과 여인숙, 인터넷 까페와 조잡한 물건을 파는 잡화상, 그리고 터미널. 그게 그 마을의 전부였다. 거기부터 시작이었다.

티벳 사람들이 사는 곳.

샤허에서 하루를 묵고 다시 7시간짜리 버스를 탔다.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랑무스. 郞木寺. 원래 그 쪽에서는 랑무스의 우변이 없는 글자를 쓴다. 랑무스는 마을이 卍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슬람 사원도 있지만 주민의 대부분이 티벳불교도이며, 라마승들이 가득하다. 가난한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승려가 되고, 부모와 헤어져 종교인이 된다.

다른 곳으로 나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대 아침 7시에 있었고, 도착하는 버스는 저녁에 있었다. 나는 버스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북경에서 온 내분비과 의사였다. 그녀와 랑무스에서 숙소를 같이 쓰기로 했다.

날씨는 내내 흐렸다.

해발 3천미터가 넘는 곳이었다.

샤허부터가 고산지대였는데 나는 으슬으슬 몸살기운만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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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무스는 천장터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장은 사람이 죽으면 잘게 쪼개 독수리에게 먹이로 바치는 장례형태를 말한다. 조장이라고도 한다.

랑무스에 도착한 이튿 날 아침, 나는 북경여의사와 천장터로 향했다.

그녀가 오늘은 장례가 없다더라고 얘기했다. 나는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조금 놀랐다. 누군가 죽어서 독수리의 밥이 되고, 나의 구경거리가 되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개가 가득한 천장터에 힘겹게 올랐다. 천장터에는 신선한, 공기가 있었을 뿐이다. 바닥을 이리 저리 둘러보던 나는 사람의 뼛조각과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건드리진 않았다. 이럴 때마다 지나치게 냉담해지는 것이 나인지라, 사람이 죽었고, 여기서 장례가 있었고, 독수리도 안 먹는 게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내려왔다.

별 게 없다 생각한 우리는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오는 길에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북경 여의사가 들어가볼까? 하더니 노크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음식을 해먹고 몸을 누이고 난로를 피울 정도의 공간에 한 라마승이 살고 있었다. 비구니였다. 여자는 바느질을 하다 말고 우리를 맞았다. 매우 쑥스러워했지만 내 동행이 중국인이기도 하고 우리 둘 다 여자인지라 큰 경계심은 없어보였다. 비구니는 우리에게 차를 내주었다.

 

샤허와 랑무스, 이 두 곳의 사람들은 하루종일 마니차를 돌리며 돌탑을 돌거나 오체투지를 했다. 승려가 가득한 마을에서 늘 불경공부를 하는 소리가 들렸고 승려들은 승복을 입고 법당 근처에서 공부를 하거나 축구도 했다. 샤허에는 어린 동자승들이 들락거리는 작은 극장이 있었는데 30인치짜리 브라운관 티비를 높이 걸어놓고 푼돈을 입장료로 내면 지직거리는 화질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가끔 허섭한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사람들도 있었고 야크떼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침엔 양떼무리가 마을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갔다. 여인숙도 있었고 여행객을 상대로 하는 까페와 식당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아니, 내 눈으로 봤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무 경제활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누군가 농사를 짓고 먹을 것을 만들어 올테지만 그들은 많이 먹는 것 같지도 않았고 빨래를 자주 하거나 돈을 버는 사람도 매우 적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승려이거나, 승려가 아니면 그저 마니차를 돌리며 길을 걸을 뿐이었다. 평생의 목적이 라사에 가는 것이라 했던가. 곳곳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최소한의 밥을, 구걸해서 먹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르게 아무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거였다.

 

돈을 벌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아도, 라사에 가겠다는 꿈을 하나 가지고 평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적게 먹고 적게 일하며 본향을 꿈꾸는 사람들의 삶은 낯설 뿐 아니라, 당혹스러웠다.

 

뭐지.

 

뭐지?

 

아무 것도 안 해도, 괜찮은 건가?

 

오두막에서 만난 그 비구니는 길어진 손톱을 자르거나, 길어진 머리를 자르고 차를 끓여마시고 법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하루에 두 번씩 있는 경연에 참여해 승려들은 박수를 치며 질의응답을 이어갔다. 해가 지면 누군가 언덕에 앉아 기도를 했다. 동굴 속에서 하루 종일 기도를 하던 여자가 쑥 나오기도 했다. 주인이 어디 갔는지 알 수 없는 야크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흰 야크는 신성하게 여겨진다며 이리저리 꽃을 주렁주렁 달고 관광객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때는 몰랐다.

그 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라는 걸.

산다는 것은 애써서 뭔가를 만들고 먹고 욕심을 채우고 그 욕심을 버리고 누군가와 싸우고 사랑하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싸우고 뺏고 뺏기며 살아가는데, 그들은 그저 기도할 뿐이었다.

죽으면 뼈를 잘라 새에게 주고 하늘로 돌아가라 빈다. 그 일을 마을 사람들이 하고 누구나 그렇게 하늘로 돌아간다. 조장에 대해서는 척박한 티벳의 환경으로는 화장도 매장도 어렵기 때문에 선택한 생존법일 거라 하기도 한다.

이들이 오체투지를 하고 성지에 가려고 하는 것은 다음 생에 더 좋은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이 생을 살면서 다음 생을 기다린다. 어찌 보면 이 생은 살지 않고 소망만 하며 다음 생을 미리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번 생은 오체투지를 하고 다음 생엔 또 무엇을 할 것인가. 다음 생에도 더 좋은 생을 위해 또 오체투지를 할 것이다. 이들은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 이승을 사는 것인지 저승을 사는 것인지, 이번 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다음 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전생을 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생과 사의 경계가 모호한 삶이 있었다. 과연 산다는 게 무엇이며, 죽는다는 건 무엇인가.

 

12년이나 지나 생각해보면,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다.

이제는 문명이 진입해 랑무스의 사진을 검색해보면 각종 지프차가 여기저기 주차된 모습이 보이지만, 그래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오체투지를 하며 라사로 가겠지. 다음 생을 위해서. 그들은 이번 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라사로 갈 수 있으니.

 

언제 썼는지 기억이 안나는 글을 C드라이브에서 발견하여 옮긴다.

아마도 2015년 초에 적은 듯 하다.

당신을 위한 글

당신을 위한 글을 쓰고 싶어졌다

당신을 위로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당신을 북돋기 위한 글이 아니라,

힘내라고 종용하는 글이 아니라,

그저 이런 일이 있었다고 조잘거리기 좋은 이야기들,

당신이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고 싶어졌다.

 

굳이 아픈 마음을 꺼내 진열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비슷한 강을 건너왔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놓고 싶어졌다.

외로운 겨울에

호빵정도라도 될까.

오뎅국물보다 쓸모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여며입은 옷자락에 비장함을 숨기고

씩씩한 척 걸어가는 주저하는 발걸음이

추적거리는 진눈깨비처럼 자국을 토한다.

 

당신을 위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어두운 조명,

허름한 주점에 앉아

뜻도 모를 이야기를 지껄이며

시끄러운 음악속에 묻혀버려도

좋을 이야기들.

별 쓸모없는 이야기를

 

당신을 위한 글을 쓰고 싶어졌다.

 

2015. 12. 17.

마늘을 까며 

마늘을 까며 송곳을 본다. 이렇게 많은 마늘을 까본 적 없다.

이렇게 많이 깔 필요가 없었는데 그냥 그렇게 세 시간 정도를 보냈다.
안하던 짓을 하려니 왼손 검지손가락이 붉어지며 지릿지릿 통증이 왔다.

마늘을 많이 까면. 맨 손으로.

이렇게 되는구나.
매번 사먹던 깐마늘을 생각했다.

장갑 끼고 까야되는구나.

장갑없이 일하던 중국의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맨손으로, 인이 배겨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지난 주에 놓친 송곳을 다시 본다.

고문 후유증으로 죽어가는 고구신때문에 운다. 마늘 때문은 아니다.

마트 언니들 때문에 운다.

오늘 이마트를 갔다와서는 아니다.
고양이가 와서 나를 본다.

손을 내밀자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고개를 치켜든다.
고구신도

이수인도

정부장도
모두 열심히 살았다.
우리 모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왜 언제부터 우리모두 패배했는가.
2015. 12. 5.

눈이 많이 오던 날 

눈 내리는 해장국집에 여자 둘이 들어섰다. 신발 벗기 귀찮다며 의자에 앉자더니 이내 방으로 올라왔다. 그 집의 의자가 있는 테이블은 알량하기 짝이 없어서 앉으라고 채워둔 거 같지 않다. 안경 쓴 총각이 들여오는 식재료나 다듬던 콩나물이나 무우를 쌓아두거나 때로 주인장이 읽던 신문지를 놓아두는 곳에 더 걸맞다.
해장국 두 그릇을 시킨 여자가 창문을 보며 비명에 가까운 탄식을 뱉었다. 어머 어머 눈 오는 거 봐.

눈은 진즉부터 오고 있었는데 오늘 처음 눈을 본다는 듯 중년 여자가 흥분했다.

이런 날은 저수지에 가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앉아 있어야 하는데.

여자가 말해놓고 까르르 웃었다. 앞에 앉은 여자가 아직 낭만이 죽지 않았다고 말을 받았다.

언니 나는 저번에도 비오는 날 저수지 가서 혼자 커피 시켜놓고 두 시간 앉아있다 왔잖아?

여자가 다시 까르르르 웃었다.
해장국을 가져다 주는 앞치마 입은 여자에게 저수지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여자가 말을 건넸다. 언니도 땡땡이 치고 저수지 가서 커피나 마시자.

해장국집 의자에 앉은 남자는 계속 혼잣말로 씨팔, 이라 말했다. 막걸리를 한 병 시켜놓고 해장국을 간간이 떠먹으며 또 말했다. 씨팔.
눈발이 흩날리는 사거리를 지나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사이가 좋아보이는 중년 남녀가 우산 하나를 쓰고 마주보며 웃고 있었다. 택시 한 대가 두 사람 앞에 와서 서자 여자가 혼자 택시에 올라탔고 창문을 내려 남자에게 살뜰하게 손을 흔들며 떠났다.
신호등이 바뀌지 않은 사이 나는 떠나간 여자의 날씬한 다리를 기억했다.

문득 어제 만난 서른 일곱의 대리기사가 떠올랐다. 프랜차이즈 관리직을 하다 프랜차이즈를 내려고 수제 햄버거집을 열었는데 적자를 면치 못해서 대리운전을 시작했다는, 아리송한 얼굴의 사내는 오늘도 부지런히 고기를 굽고 있겠다.

2015. 12. 3.

비둘기 두 마리 

사람들이 북적이는 어느 지하철역 길거리가 훤히 보이는 커피집에 앉았다. 

사람들이 오가고 차가 지나가는 좁은 골목의 입구 비둘기 몇 마리가 좀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계속해서 뭔가를 먹고 있다. 

일행은 계속 비둘기를 바라보며 초조해했다. 좀처럼 비키지 않는 비둘기는 혐오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지나는 차마다 비둘기때문에 속도를 늦추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종이를 놓고 펜을 하나씩 들고 중요한 계획을 서로 조정하는 중이었다. 비둘기를 눈여겨보던 일행이 탄식을 뱉었다. 

“엇. 아… 저거 뭐야.”
좁은 골목에 깃털이 마구 날렸고 결국 비둘기 두 마리가 납작해졌다. 
오전엔 4년 반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의 수기를 읽었다. 독방에 살던 징역수는 비둘기 둥지를 만들고 비둘기 알을 기다리고 알에서 깬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렸다. 
길바닥에 납작하게 깔릴 비둘기 두 마리는 아직 있는가, 이미 없는가. 

세상은 복잡하게 움직이고 우리의 수명은 조금씩 줄어드는데 비둘기라도 애타게 기다리던 간절함은 여기에 있을까, 거기에 있을까. 
올겨울은 유난히 쓸쓸하게 온다. 

누군가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술에 취해 졸고 싶은 밤이다. 
11월의 마지막 토요일 

인덕원역에서.

꼿꼿하게 견디는 삶

구구절절 갈등이 있었다.

어쨌거나 수개월이 지났고, 내가 맡은 일을 마무리했다.

장애인복지관에서 생애사쓰기를 한 게 2013년. 그 원고를 억지로 책으로 내놔보자고 덤빈 게 그 해 가을. 오직 그 책을 위해 출판등록을 했고 그 책을 위해 인디자인을 배웠다.

변화된 장애아엄마들과, 한껏 뿌듯해진 중도장애인과 다섯 군데 사회복지학과를 돌며 북콘서트를 연 게 2014년. 그리고 올 해는 장애아이들과 그 엄마들이 함께 바이올린을 배우는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사진은 계약에 없었지만 내가 찍고 싶어 찍었다.

 

토요일마다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수업을 했다.

자폐 아이가 다수였고 소아마비인지 다리가 불편한 아이가 하나, 다운증후군 아이가 하나.

장애인을 기억할 때, 이름이 아닌, 질병의 이름과 증상으로 지칭한다. 그들을 기억하는 방법이 이렇게도 저열하다. 부끄럽기 짝이없다.

그래 다시 그 이름을 불러보자. 형주와 민지와 준영이는 자폐아다. 하영이는 다리가 불편하고, 주희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엄마들이 바이올린을 잡으면 아이들은 각자의 세계로 돌입했다.

키 크고 잘생긴 형주는 책상에 앉아 계속해서 낙서를 했다. 큼직한 글씨로 마구 마구 뭔가를 썼다. 그러다 일어나 저보다 한참 작은 엄마를 내려다 보며 물었다. “엄마 뭐해?”, “엄마 왜 그래애?”

민지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기분이 동하면 계속 교실을 뛰어다녔다. 앉은 자리에서 비타오백을 다섯 개씩 까먹었다. 가끔 손톱을 물어뜯다가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교실바닥에 진동이 울렸다. 간혹 바이올린을 잡고 마구 소리를 내다가 제 엄마의 양볼을 잡고 뽀뽀를 해댔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엄마, 민지가 눈을 맞추는 엄마에게 뽀뽀로 말을 했다.

준영이는 구석에 앉아 의자를 돌리고 놀다가 가끔 엄마를 바라봤다. 나와도 눈을 맞췄다.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손으로 반짝빤짝 시늉을 내며 교실을 계속 돌았다. 바이올린 선생님과 눈도 맞추고 소리를 내기도 했다.

주희는 혼자 칠판에 뭔가를 쓴다. 1인극을 하듯이 계속 이야기를 한다. 재미난 동화를 듣는 기분이다. 소리를 크게 내고 의성어와 의태어도 잘 쓴다. 마구 이야기를 하다가 칠판에 아는 글자를 한참 적고 혼자 웃는다. 가끔 엄마와 대화도 하고 사람들과 한 두 마디 주고 받는다.

하영이는 입을 꼭 다문 엄마 옆에서 열심히 연습을 한다. 엄마와 똑같이 입을 꾹 다물고. 다리가 불편하다고 앉은 적 없다. 가끔 연습을 쉴 때만 앉았다. 늘 부끄럽고 쑥스러워했다.

 

시린 봄에 수업을 시작했다.

갑자기 온도가 떨어진 11월에 발표회를 열었다.

엄마들은 드레스를 빌려 입었다. 주저하는 엄마들을 선생님이 밀어부쳤다.

한 것도 없고 잘 하지도 못하는데 옷만 꾸민다고 욕 먹을 거라는 엄마들에게 바이올린 선생님이 충분히 입을 자격이 되는 사람들이니 꼭 입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운 옷을 입은 엄마들이 아이들과 무대에 섰다.

눈물이 나서 뷰파인더가 보이지 않았다.

 

영상을 찍으며 뒤에 서서 혼자 스카프로 눈물을 마구 닦았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어느 한 순간, 남들 앞에서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아이가 당신과 많이 다르다고, 나의 아이는 당신이 왜 화를 내는지도 알 수가 없고, 당신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죄송하고 미안하다고, 폐를 끼쳤다고 그렇게 늘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남들에게 내 아이가 얼마나 다른지 설명해야 하고 내 아이가 얼마나 부족한지 내 아이가 얼마나 느린지 말해야 하는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다른 아이와 같아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내 아이가 눈을 마주치고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주는 단 하루만 있으면 내일 죽어도 좋겠다고 그 엄마가 말했다. 평생 아이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지옥을 누가 알겠냐고 말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아이가 다르다고, 내 아이는 특별한 점이 있다고 늘 말해야 하는 삶인 것이다. 이유가 있어야 삶인가. 이유가 없으면 삶이 아닌가.

고난이 겪는 성숙이 있다고, 좀 덜 성숙한 채 막살면 어떤가, 그러면 인간이 아닌가.

대충 살 수 없는 시간을 꼿꼿하게 견뎌야 산다.

 

커튼 뒤에서 미리 나와 빼꼼 쳐다보는 주희와, 무대에 엄마에게 뭔가를 물어보기 위해 마구 걸어 나오는 형주와 무대에 오르지 않은 준영이와 민지가, 같이 있었다. 기억속에도, 마음속에도.

찬란한 소리가 있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2015. 11. 26. DSC_8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