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왜 좋고 지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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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었어. 아기 기저귀에 쓰는 노란고무줄이 있었어. 그걸로 가속페달을 묶어놓은 버스를 상상해봤어? 내가 학교 다닐 때 타고 다니던 마을버스는 그런 버스였어. 그 버스가 기울어질 정도로 아이들이 많이 탔어. 그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가던 길에 시비가 붙으면 버스기사 아저씨가 창문을 열고 욕을 했어.

“씨발 내가 너 따위 죽이고 깜빵 한 번 더 가면 돼”

똑같은 교복을 입고 깔깔대던 열일곱 열여덟 아이들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순간이었지. 그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이었어. 순수했고 착했어. 순조롭게 살아갈 수 있는 아이들이었고, 청천벽력같은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안정된 성품의 부모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다수였어. 모험심이 많거나, 책임감이 적은, 바람같은 사람들과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보다 그 반대편이 사는 데는 훨씬 수월했겠지. 몰아치는 폭풍을 헤치고 나갈 에너지를 잘 모아두었다가 자기를 가꾸는 데 쓸 수 있거든.

바다에 배가 가는데, 자꾸 폭풍이 몰아치면 무슨 기운으로 고기를 잡겠어. 근데, 날씨가 계속 좋으면.. 고기도 잡을 수 있고, 하늘도 볼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 할 수도 있거든. 폭풍만 만나면서 살면, 그런 여유는 없지. 하루 하루 버티고 견디는 게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그래서 가정 환경이 안정적이어야 공부를 잘한다고 말하기도 하는거야. 맨날 집에 뭐가 박살나는데 뭔 정신으로 책을 들여다보나. 그런 집구석에서 아이들은 하루하루 숨죽이며 버티는 거거든. 그 와중에 공부를 하는 애들은, 유별난 독종이라고들 하는데, 뭐 꼭 그게 독종이라 그러겠어? 그건 그냥 그 아이가 버티는 방법인데 사회에서 좀 좋아하는 방법을 고른 것 뿐이잖아. 책에다 코 박고 있으면 집중이 잘 되는 뇌를 가지고 태어났나보지. 그게 뭐 꼭 훌륭하다고 말하긴 어려운 거 아니겠냐고.

그렇게 폭풍이 쉴 새 없이 불던 날이 있었어. 이번엔 정말 큰 건이 터진거야. 그 때 내가 열일곱살이었는데. 와 정말 살다 살다 결국 이런 일도 터지는구나. 싶더라고. 욕이 절로 나와. 씨발 이게 뭐지.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되지? 내가 뭘 잘못 했는데? 난 하라는대로 다 하고 살았잖아. 내가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짓을 했냐, 집에서 하지 말라는 짓을 했냐. 열일곱의 나는.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고 지각도 안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어. 게다가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성경을 세 번이나 읽었다고. 그 때 욥의 심정이 뭔가 생각했어. 와 정말 좆같겠구나. 씨발.

내 생일이 8월 말인데.

그 날 학교에 자퇴서를 쓰러 갔지. 담임선생님이 무슨 일인지 다 알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학교에서 인정받는 아이였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내년에 만나자고 힘내라고 다 격려를 해줬어.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에 그 마을버스를 탔어. 나는 사복을 입고 있었지. 나는 학교에 소속된 아이가 아니니까. 사복을 입고 싶었어.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아니라고 완강하게 외치고 싶었던 거 같애. 내가 이만저만한 그지같은 일이 생겨서 학교에 못 다니게 됬다구요!! 라고 나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원망을 퍼붓고 싶어서. 내가 뭘 잘못했냐고! 난 아무것도 잘 못 한 게 없는데! 내가 왜 자퇴서를 써야 되냐고!!

그건 지금 생각해도 충분히 억울할 만한 일이거든.

그래 그 마을버스를 타고 오는데.. 버스 안에 아이들이 하나도 없는거야. 자리가 비었더라고. 애들은 다 학교에 있었거든. 게다가 내 생일인데 말야. 날씨가 겁나게 좋은거야. 진짜 허벌나게 좋더라고. 햇빛이 막 미치게 내려쬐고 말야. 8월 말, 내 생일 즈음엔 주로 태풍이 오지. 그게 참 이 엿같은 팔자를 반영한다고 생각하던 나이였는데. 와 .. 날씨는 왜 좋고 지랄. 약올려?

날씨 좋으면 놀러가고 싶잖아. 사람들의 표정도 좋잖아. 길에 웃는 사람들도 많잖아. 나는 미치겠는데 말야. 내 세상은 무너졌는데 햇빛이 짱짱해. 태양이 비웃는 거 같은거지.

그건 니 문제야. 나는 멀쩡하단다.

슬펐지. 그래서 그 날 어디 쪼그리고 앉아서 뭘 적었을 거야.

내 세상이 무너지는 날, 누군가는 빨래를 널고 세탁소에 옷을 맡긴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누군가가 태어나고 누군가가 죽기도 한다. 일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은 회사에 가고 시장에 가서 고등어를 사겠지. 수박을 사오는 누군가의 엄마도 있을 것이고 아이스크림을 베어먹으며 골목을 뛰어노는 아이들도 있다. 내 세상은 무너졌는데, 그건 내 세상만 무너진 일이었다.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간다. 비록 내가 사라진다 해도, 세상은 아무 일 없이 돌아갈 거다.

뭐 대충 그런 내용이었어..

비참하지. 나 없이도 조직이나, 세상이나, 내가 속했던 사회가 돌아간다는 게 진짜 짜증나잖아. 그게 얼마나 슬퍼. 나 없으면 죽을 거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인간은 그냥 그렇게 먼지같은 존재야. 근데 그걸 깨달았는데도, 그 때 한 생각은. 아 나는 정말 무용지물. 여기서 끝났거든.

근데..나는 무용지물이다 – 에서 모든 인간은 다 그렇지만 그래도, 무용지물은 아니다. 이런 고차원적인 생각으로 발전하는데.. 20년이 걸린 거 같애. 뭘 억지로 해서 티비에 나오는 인물이 되고 싶다는 그 경박한 욕심을 버리는데 말야. 왜 그렇게 오래 걸린 걸까. 한심한가? 근데 또 그것도 아니거든. 뭐가 한심해. 인간은 원래 다 한심해.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래. 더 한심한 인간도 다 잘 살아. 밥 잘 먹고 잘 자고 똥만 잘 싸고 잘 살아.

날씨를 뭐 어떻게 할꺼야.

날씨 좋다고 하늘에 돌 던지면 나빠지나.

아니면 돈이 많아서. 내 기분이 맞는 날씨를 찾아 비행기를 타고 가나? 갔는데 거기 날씨가 바뀌면? 그럼 말짱 꽝이잖아.

기분이 나빠. 날씨 좋아서 더 나빠. 날씨가 나빴으면 좋겠어. 비가 주룩주룩 왔으면 좋겠어. 그럼 뭐..기다려야지. 비 오는 날까지. 뭘 어떻게 하겠어. 그리고 오늘은 집에 가서 적는거야.

와..오늘은 정말 좆같은 날이었습니다. 씨발. 오늘을 최악의 개같은 날로 정하면, 내일은 덜 개같겠지요. 하하하. 잠이 오나. 잠이 안 오겠지. 안 오면 뭐 못 자는거지 뭘 어떻게 하나. 꼭 자야되나. 하루 안 잔다고 죽지 않아. 그냥 내일 좀 피곤할 뿐이야. 세상에 .. 그렇게 큰 일은 없어. 다 어떻게 보면 그냥 먼지같은 일이야. 할매들한테 어떻게 사셨나요? 물어봐봐. 그 새털같이 많은, 개털보다 많은 날들이 한 줄이 되거든. 그 해에는 애를 낳았지. 2년이 넘어가고 그 해에는 둘째를 낳았지. 아마 큰 애가 아팠던가.. 안 죽었으면 다 별 일 아닌거가 되는 거 같애.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도 않잖아. 안 죽으면 됐지. 뭐. 살아있으면 언젠가 억울하다고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혹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살려두는 게 나을 거 같애. 언젠가 붙잡고 말해줘야지. 너 때매 뒈져버리는 줄 알았어. 알고는 있냐? 라고.

2013. 3. 15.

 

근데 그 때 그렇게 억울했는데 말야.

그 때 내가 꼭 그렇게 억울해하지 않을 수도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게 뭔지 알아? 자퇴서를 안 쓰는거야. 버티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거든. 근데 나는 내가 더 비참해지는 방법을 택한거지. 누가 알아줄까봐. 그냥 훈장 하나 달고 싶었던거야. 그래서 훈장을 달았지. 트라우마. 내 트라우마. 내가 골라서 내 가슴속에 새긴거야. 그냥 학교 버티고 다녔으면.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의 위로를 받으면서 혹시 알아. 학교에서 장학금을 줬을 수도 있어. 그 일은 생각보다 무척 금방 해결됬거든.

그렇다고 해서 그 때 왜 자퇴서를 썼나.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 그냥 내가 그런 인간이구나. 깨달은 걸로 만족이야. 어쨌거나 쉬는 동안 공부를 좀 해서 성적을 올리고 다음 해에 당당히 재입학을 했고 학교도 잘 다녔으니까. 그게 막 가슴아파할 일은 아닌거 같애. 내가 그냥.. 모르는 길이 있으면 일단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지랄같은 성격때문이겠지 뭐. 내 트라우마, 내 상처ㅡ 그런 거 말야. 뭐든지, 일단 외부에서 어떤 자극이 왔을 때, 결국 어느 방의 문을 여는가는. 내가 선택하는 거더라고. 등 떠밀려 들어갔어도, 나올라면 나오는거지 뭐.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아닌 이상.

Up the hill

up the hill 이다. Hooker hill이라고 부른 적도 있다.
고만고만한 juicy bar ( 두 잔 값을 내고 한 잔을 마시면 한 잔의 가격이 아가씨에게 돌아가는 체제) 들이 있고 맨 위에 스텀퍼라는 댄스클럽 ( normal한 pop음악) 이 있고 그 밑 우측엔 프렌즈라는 곳이 있었다. 사진으로 간판이 보인다. 프렌즈에는 당시 흔치 않던 포켓볼 다이가 있었고, 다트판도 있었는데, 한국인들이 갈만한 장소였다.

그 윗쪽에서 스텀퍼 사이에는 오란씨와 소주를 섞은 소주케틀kettle을 1.5리터 PET 병을 자른 것에 담아 팔았는데, 일반 미군 사병들이 자주 사 마셨다. 그 아이들은 보통 16세부터 시작해,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저학력층 아이들도 적지 않아 자기 이름 정도 겨우 쓰는 아이들이었고, 하루에 50단어만 사용한다는 전설의 계급층이었다.

맨 꼭대기엔 남산모텔인가 여관인가 하는 엉뚱한 여관이 골목의 마무리를 했고, 그 골목의 왼쪽으로 틀어서 내려가면 매번 불이 나서 문을 닫는 나이트클럽이 있은 유명한 계단(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도 연출) 연결된 길이 있다.

간혹 미군 헌병대가 나타나면 골목이 좀 얌전해졌고, 비상이 걸리거나 미군범죄가 일어나면 모든 일반사병은 외출금지가 걸려 이 골목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병들을 상대하는 저렴한 술집들이 있어, 고위 장교나 다른 외국 비지니스 맨들은 이 곳을 찾지 않았는데, 유독 스웨덴 네덜란드 등 스칸디나이아 근처 복지국가쪽 엔지니어들은 이 곳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우리나라에 발전기를 파는 북유럽 A모회사 팀들이 특히 이 골목을 좋아했다.

당시 매우 인상깊은 커플이 하나 있었는데 50대의 북유럽 엔지니어 커플로, 비혼이었는데, 아줌마는 작고 마른 체형에 아주 머리가 길고, 아저씨는 콧수염이 난 바이킹 같이 생겼었다. 이 둘은 주말마다 이 골목의 입구에서 헤어져 밤새 각자 놀다가 동 틀무렵 헤어진 곳에서 다시 만나 집으로 돌아갔다.
Honey, did you have fun?
Yes, I did. How about you?
Me, too!
I’m very grad to hear that you had fun!

스텀퍼stumper 에는 이태원에서 잔뼈가 굵은 듯한 한국인 디제이 아저씨가 있었는데 언제든지 내가 Gloria Gaynor의 I will survive 를 틀어달라고 하면 두 번 세 번씩도 틀어주곤 했다.

이 사진이 찍힌 지점의 좌측쯤에 있던 업소에서 그 당시에 여성접대부가 미군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고, 그 이후 관광특구로 개발되고 이태원이 내국인에게 업소를 오픈해야 하는 규정이 생긴 뒤 IMF가 터지고 이 골목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때 흥이 좋은 (군인들에게도, 민간인들에게도 아무 불행한 사건도 없는) 때에 이 골목은 사람으로 꽉 차서 걸어올라가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때 나는,
스물 셋에서 스물 다섯,
하루종일 미니스커트를 입고 높은 구두를 신고 계단을 뛰어다니며 햄버거와 스테이크를 나르다가 12시에 마감을 하면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떨구는 대신 카스 한 병 마시고 카스 두 병을 마시러 이 골목의 프렌즈를 김언니와 올라갔었다.

알콜중독으로 비명횡사할 것 같던 김언니는 일본남자와 결혼해 딸을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고, 나는 지금 고등학생 딸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는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제 에비가 사다 준 설렁탕 반그릇을 먹은 아이가 “아 행복하다” 라고 말한다.

버리는 것 버려지는 것

전복을 먹어봐야 전복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것은 아니다.
소고기를 먹는다고 내가 도축을 하는 것은 아니므로.
내가 먹는 먹거리들에 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먹는 콩나물이 어떻게 길러지는지, 내가 먹는 시금치가 어디서 왔는지, 비가 잦아서 작년 시금치 농사가 나빴다는데, 수퍼와 마트엔 어떻게 줄줄이 시금치가 나와 있는지.
규격을 맞추기 위해 비닐봉투 안에서 자라는 애호박을 보며 간혹 참담함을 느낀다. 마치 고등학교 시절에 추운 날 잿빛 교복을 어쩔 수 없이 입고 베개만한 쿠션을 끌어안고 강당으로 줄줄이 걸어가던, 거세된 젊음이 자꾸 생각난다.

누군가에게 힘이 될 음식을 만들기 위해 세일하는 전복을 샀다가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전복은 나에게 오기 전에 푸른 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살았겠지. 어린 아기의 새끼손톱보다 작은 빨판으로 뭔가를 먹으며 몸을 키웠을테고 내가 잘라내 버린 빨간 입으로 바다의
파도를 마셨을것이다.
전복의 사이사이에 낀 검정들을 깨끗하게 씻어내며 그간 찾아뵙지 못한 아쉬움과 죄책감을 함께 씻는다.. 라고 적어도 괜찮겠다.

무언가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고등어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 있고, 갈치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오래전엔 그 떠오르는 사람들이 헤어진 옛 애인이거나, 지금은 연락조차 되지 않아 마음 한 켠이 무거워지는 슬픈 사연의 어떤 여인..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 기억의 연상의 대상들은 세월이 지나고 내 삶의 변화에 발맞추어 다른 대상으로 변해왔다.
이제는 갈치를 보면 생각나던, 파출부 다니며 일수써서 까르띠에 가방을 사던 너무나 무거운 삶을 살던 정아언니가 아니고, 갈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내 아들이다.
샤브샤브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은 육수를 기가 막히게 만드는 시동생이고, 고등어를 더 이상 못 먹게 된 남편이 생각나고, 계란을 보면 계란하나로 대여섯가지의 요리를 만드는 열여덟살 딸아이다.

그리고 이제 전복은 나에게 시어머니를 부른다. 시어머니의 부엌 씽크대엔 전복껍데기가 있다. 그리고 그 위엔 날긋한 초록색수세미가 있다.
“너무 고와서 버리기가 아깝잖니” 하시는 어머님을 생각하며 전복죽을 끓인다.
그리고 나도 전복껍데기에 붙은, 내가 미처 떼어내지 못한 살점들을 뜯어낸다.

묻는다.
무엇이 되겠느냐.
너희들의 살점은 병든 육신에 큰 힘이 되길 기원하니, 너희들의 고운 껍데기는 누군가에게 칠보가 되어, 장롱이 되기도 하고, 미술품이 되기도 하고, 화장대가 되기도 하고, 귀중한 것들이 된다고.

나는 칠보를 만들 줄 모르니, 수세미라도 올려놓고 너희를 기억하려고.
그리고 그 고운 빛 볼 때마다..
지나간 젊은 어느 날, 담양의 대나무숲에서 바람 맞고 앉았을 내 딸래미만한 열여덟의 어느 처녀를 생각하며.
전복껍데기를 보며, 너무 예뻐서 버리기가 아깝다는 시들지 않은 젊음을 꼭 기억하리.

2012. 4. 24.

기억의 지배

1.

어제 트윗에 쓴 글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4학년때인가 5학년때인가 왕따를 당한 적이 있는데 폭력 이런 건 아니고 집단 따돌림. 갑자기 성적이 오른 걸 애들이 내 요점정리 쪽지를 보고 컨닝을 했다며 근 6개월간 나를 괴롭혔다. 결국은 애들의 강요로 담임에게 거짓자백도 했지.

봄에 봤던 시험을 가지고 가을이 깊어갈 때까지 나를 괴롭혔는데 내 등에 욕쓴 쪽지 붙이고 깔깔대고 뭐 그랬다. 나중엔 애들이 하도 몰아세우니까 나도 내가 컨닝을 했다고 착각을 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는데. 아직도 동갑내기 여자에 대한 포비아가 있다.



정확히 언제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 5학년때가 맞는 거 같다. 
4학년때는 담임과 관계가 정말 좋지 않았고, 그 담임선생은, 촌지를 요구하는 김옥자라는 선생이었는데 긴 파마머리에 잠자리 안경을 썼었다. 
당시의 일을 떠올렸을 때 내가 허위 자백을 한 것이 김옥자 선생이 아니라 중간에 병가로 자리를 비웠다 다시 복귀한 허재영 선생님이었으니 5학년때가 맞을 것이다. 


아무튼 사건은 위와 같이 벌어졌고 몇달이 지나 담임에게 허위자백을 했고 교실 밖에는 아이들이 나를 지키고 있었다. 그 때 주도를 했던 아이가 오윤숙이라는 아이였다. 머리가 유난히 노랗고 매우 날카롭게 생긴, 그런 인상의 아이였다. 

결정적인 이유는 오윤숙과 내가 성적으로 엎치락 뒤치락 하는 사이였는데 
나는 전교에 소문난 이혼녀의 딸이었고 – 당시 전교에 알려진 이혼가정은 단 둘 – 가정형편도 그닥 넉넉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스카우트를 하거나 여러가지 눈에 띄는 짓들을 했으니 그 아이 눈에 내가 가시같았을 지도 모른다. 

4학년때 우등상을 촌지때문에 받지 못해 매우 억울해 하며 하루종일 울었고 
엄마가 종업식날 학교를 찾아가 소고기 한 근을 갖다 주며 (당시는 이런 촌지도 가능하던 무려 80년대)
우등상을 주지 않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엿을 먹인 사건이 있었다. 

다음 해 (내가 5학년이 되던해에) 동생이 입학을 했는데 담임이 김옥자 선생으로 배정이 된 것. 
교실 뒤에 서 있는 엄마와 눈이 마주친 선생이 놀랐다는 전언을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입학 두번째 날에 동생이 반이 바뀌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1학년 6반으로 배정받았던 아이가 2반으로 변경된 것. 
이게 선생의 농간인지 아니면 학사처리의 실수이거나 일괄적으로 몇 몇 아이들을 이동시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확인 한 바가 없으므로.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나는 기필코 촌지를 건네지 않더라도 1점차로 우등상을 밀리는 일이 절대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열두살의 굳건한 다짐으로 (풉;) 새벽부터 일어나 공부를 하는 기염을 토했고, 4학년 전체 성적 91점에서 98점으로 빅 점프를 한 것인데. (그 몇 점에 목숨거는 아이였다 내가) 그게 사달이 된 것이다. 

2. 

쓰다가 생각이 난 건데 
중학교 2학년 때 교회를 같이 다니던 친구들 몇 명, 유진, 수정, 혜영 뭐 이런 아이들 사이에서 남녀관계가 엮여서..
에..그러니까 유진이가 흠모하던 오빠랑 나랑 연애질을 시작한.. 그게 발화점이 된 것인데. 
사실 나는 정군을 좋아했었는데 (아 한 참 그럴 때 아닌가. 다들 양해해주시길) 정군이랑 잘 안되다가 윤군의 고백을 받고 윤군에게 틀어버린 것인데 유진이가 좋아하던 윤군을 그러니까 내가 빼앗아갔다..는 .. 
중2만의 논리에 밀려 몹쓸년이 되어버렸다. 
(너는 고백도 하지 않았잖아 응? 이라고 하기엔 사실 뭐 되게 애매모호한 점이 있다.)

아무튼 그리하여 이 문제도 근 일년간의 따돌림으로 이어졌는데 
교회 근처 골목에서 상당히 심한 욕설등을 당한 기억이 있다. 
그게 수차례 이어졌고 아이들이 그간에 쌓인 나에 대한 불만도 겹쳐서 (사실 당시에 내가 뭐 상당히 인격적이었다거나 선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중 2의 패거리 문화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버렸다. 나는 그 간극을 신앙에 집중하고 (컥) 학교에서 맡고 있던 학생회 간부 활동에 집중하고 (컥컥) 공부는 하지 않았으나 연애에도 집중했다. (환장) 

그러니까 나는 두 번의 따돌림을 겪었던 것인데 
경미하다고 생각이 되는 것은 반전체나 전교생에게 낙인이 찍힌 것보다는 
내가 어울리던 패거리에서 떨궈져 나간 것이라 다른 아이들도 남아 있었고 나에게 할 일도 늘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공부에 몰빵 한다거나 중학교 때는 다른 활동에 몰빵 했다. 
이 아이들과는 졸업식 즈음에 다시 화해를 했는데 역시나 나는 매우 기가 죽은 상태였고 
내가 학생회장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 얼만큼의 영향이 있었던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해보았으나 그건 알 수 없다. 
그런 수준의 아이들은 아니었던 거 같다. 
이 아이들과는 주로 유재하나 봄여름가을겨울의 이야기를 많이 나누던, 그런 친구들이었다. 


3. 

문제는 동갑내기 아이들과 두 번의 마찰을 빚은 후
나는 75년생 여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때 가정내 우환으로 학교를 1년 쉬고 76년생들과 학교를 다녔는데 그 때는 아이들과 고딩에게 하늘같은 1년의 차이를 극복하고 참 잘 지냈다. 
그리고 졸업후 75년생들과는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동기들이 모두 76년생이었으므로. 
친구들의 연령대가 77까지 내려가는 일도 펼쳐졌으나 잦은 이사와 이직, 결국 유학까지 가면서 여러가지 연결고리들이 사라져버렸고 지금 내가 연락을 하고 종종 만나는 75년도생 친구들은 초등학교 동창 남자 아이들(이젠 아이들이 아니지만) 두명 정도와 고등학교 동기는 아니지만 입학 때 같은 반이었던 동갑내기 3명이다. 

기실 나란 사람이 사회성이 상당히 좋고 사람을 잘 사귀고 여기저기 커넥터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발이 넓은 편인데 주변에 75년생이 이렇게 없다는 건 약간 의아할 정도이다. 

생각해보니 예전에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동갑내기 친구들과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함께 무리지어 몇 번 만났는데 상당한 피로감을 느껴 친한 친구에게 다른 아이들을 만나는 게 좀 어렵다고 고백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75년생 여자, 라든가 동갑이라든가 하는 얘기를 들으면 뒤로 주춤. 하게 되었던 기억이 분명히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최근 집단따돌림으로 인해 지적장애를 입었다는 어느 여학생의 사연을 듣고 나서 떠오른거다. 





4.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 

성폭행 피해자는 뉴스에서 성폭행에 대한 뉴스가 대대적으로 보도될 때 2차 3차의 정신적 상해를 입는다고 한다. 
나 역시 기억도 잘 하지 못하던, 그러니까 가슴속에 막 새겨놓고 곱씹고 그러던 일이 아닌, 
내 무의식, 잠재의식 저기 어느 구석방에 처박아놨던 기억과 상처와 난감했던 그 공기가 갑자기 터져 나온 것인데, 다행히도 2차 상해를 입을 정도는 아니다. 그건 당시에 별로 힘들지 않아서가 아니고, 지금 내가 많이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느 책에서 
양쪽 성의 부모중에 편향적으로 관계가 좋지 않았던 성별의 부모와의 유착관계가 성장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는 설을 들었다.  예를 들자면 양쪽 부모 중 특별히 엄마와 관계가 극단적으로 나빴던 영유아기를 지내면 성장을 해서도 여성들과 잘 지내지 못하거나 엄마 또래의 여성들을 대하기 어려워진다는 말인데, 이건 익숙함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할머니와 지냈던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할머니를 친근하게 여긴다. 
어려서 단 한 명의 노인도 만나보지 못하고 자란 아이가 세상의 모든 노인을 어색하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나는 아이들과 내 동생과 나의 인간관계의 폭을 보면서 우리의 기억나지 않는 영유아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한다. 

특정한 패턴이 사람마다 발견되는 것은 있다. 
내 경우는 연상의 남자들이 연상의 여자들보다 편하고 연하의 남자들보단 연하의 여성들이 편하다. 
그건 아마 내 기억속에 각인된 상처나 여러가지 경험들로 인해 스스로 방어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런 부류의 사람들이 나를 공격해왔다. 그러므로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다는 자체 방어 시스템이 가동되는 것이다. 

5. 

문제는 이러한 기억들이 제대로 박혀있는가도 있으나 오인되고 조작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1차 따돌림을 당했던 초등학교때의 그 컨닝사건은 내가 허위자백을 하면서 정말 내가 컨닝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혼란에 빠져 상당히 괴로움을 겪었다. 

성장과정에서 부모의 갈등으로 인한 한 사람의 상처받은 마음으로 인해 조작된 기억이 주입되고 세뇌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게 서른 여덟이나 된 지금에 와서도 작용을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은 그것으로 인해 나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나와 갈등을 빚었거나 나의 기억을 조작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 기억이 나의 인생의 어떤 장애물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부분이다. 


현대 철학자 중 한 사람이자 철학적 해석학의 창시자인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객관주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개인의 선입견이 오히려 세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선입견이란 이해하는 사람, 즉 해석자에게 축적된 모든 정신적 자산 일체 (관습, 지식, 경험 등을 통해 생성된)를  뜻하며, 이러한 선입견이 ‘현재의 견해’로 작용하면서 이해를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이 정신적 자산이 없는 한 그 어떤 이해과정도 작동할 수가 없게 된다. 결국 선입견에 의해 이루어진 이해의 과정들은 인식의 근본적인 지평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주목할 또 다른 점은 바로 선입견, 즉 대상을 보는 현재의 관점을 ‘열린구조’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가다머는 선입견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개방되어 있고 변화한다고 말한다. (중략) 결과적으로는 뻔한 말일지 몰라도 선입견이라는, 경계해야 하는 가치를 정신적 자산으로 해석하고 열린 구조를 통해 이에 대한 오류를 방지하는 가다머의 해석.. 

선입견은 그 자체가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선입견이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닫힌 구조’로 인해 위험해지는 것이었다.  

– 선입견을 허하라  / 김선미 씀 
디자인 문화잡지 “지콜론 57호” 2011년 12월분 중에서 발췌  

그리하여, 
나는 내가 가진 선입견이 얼마나 닫힌 구조로 나를 봉쇄했는지 고찰해 보는 것이다. 
이 깨달음이 나에게 내가 가진 선입견을 다시 열린 문으로 밀어낼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짐작해 볼만한 것이다. 

얼마전 인생이 통채로 조작당한 느낌이 들었을 때, 내가 했던 생각도 이런 것이다. 
그 조작된 기억들이 나를 얼마나 방해해왔는가, 그런 이유로 내가 저질렀던 실수들은 무엇이며, 결국 지금의 나는 얼마나 또 내 삶의 바리케이트를 치고 스스로를 좀 먹고 있는 요소가 있는가 꼼꼼히 점검할 것. 

결론은 어쨌거나 지나온 나의 모든 아픔도 내 인생을 구성해 온 요소들이며, 그로 인해 형성된 지금의 나라는 인간 역시 과거에 대해선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선입견들이 꼭 내 인생을 방해해왔다고 규정짓기도 애매한 것이다. 

내가 꼭, 굳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때 과연 내가 더 행복해졌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흔하게 내가 하는 이 말은 과거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와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은 움직이는 동물이고 사람의 뇌는 끊임없이 분할하므로, 나의 사고가 달라진 하루 하루의 시점에서 나는 매일 매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구난방 한 입으로 여러말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건 日新又日新에 해당되는, 인격도야, 혹은 불교적 철학에 닿아있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성인군자가 나치가 되진 않지만, 성인군자도 어떤 경험이 의식으로 들어와 장애가 되기 시작하면서 나치가 될 수도 있는 일이므로. 

6. 

최근들어 일어나는 일련의 학교폭력 사건의 노출 (난 이것을 언론 노출이라고 본다. 여태 없었던 일들이 갑자기 터지는 것이 아니라 늘 있었던 일들이 최근에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한 것 뿐이다)과 고문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급작스럽게 사망한 故 김근태 의장을 생각한다. 

고문으로 인해 혹자들은 자기들이 정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채 허위자백을 하고 이후 살아남기 위해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조작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이 우파나 보수의 호위무사라고 생각하며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르고도 그런 기억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가슴속 어느 어두운 곳에 처박아 둔 조작된 기억들과 

전두환을 비롯한 몇 명의 독재자들을 열심히 보필하고 독재자의 딸을 대권주자로 추대하려는 사람들의 왜곡된 기억과 

새마을 운동이 사실상 농촌을 황폐화 시킨 박정희 독재정권의 매우 파렴치한 임기응변적 대책이었다는 것에 대해서 꼼꼼히 살펴보지 못하고 흰쌀밥 먹게 해준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안스러운 구호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위원장님께서 돌아가셨다” 며 통곡을 하는 북한의 주민들과 

역사를 지우고 또 어린 아이들에게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심어주려는 위정자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당시엔 친일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자기 합리화를 위한 스스로 조작한 기억과 가치관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7. 

기억은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그 기억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 기억을 끄집어 내어 다시 펼쳐서 하나씩 따져보고 다시 잘 접어 마음속에 다시 넣어두는 것도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이 작업은 매우 지난하고 고통스러워서 자기 자신이 명료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는 정신상태가 유지될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합리화를 하고 변명을 하고 그런 일은 기억하고 싶지 않다며 기억을 해내지 않으면 깊은 나락으로 빠지는 것은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을 돌이켜보고 조금 더 숭고한 인간미에 접근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믿는다. 

사람으로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사실상 사람으로 인한 기억에 의해 베어진다. 
그 기억을 꺼내서 다시 접어낼 수 있는 힘이 그들과 함께 하길 바란다. 
기억은 분명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조작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감정은 쉽게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기억들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린다면, 
그 기억들이 아픈 기억이 아니었길 바라는 욕망을 버린다면, 
조금은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 

기억들은 기억으로 잔존한다. 
인정하고 보내주는 것. 나뭇잎 배에 글자를 적어 흘려 보내듯이, 유리병에 편지를 적어 먼 곳으로 떠나보내 듯이 기억으로 베어진 상처들을 모두 다 고이 접어 보낼 수 있길 빈다. 

2012. 1. 5. 
















지나가는 길

긴 터널을 지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웃었다.
모든 게 좋다고
모든 게 순조롭다고
늙어가는 어깨를 보며 혼자 말했다.

도로마다 움푹 패인 곳이 있다.
차가 덜컹거리는 길이 있고
바람이 심해 작은 나의 차가 흔들리는 구간도 있다.
고속도로도 있고. 속도제한 구역도 있다.

언젠가
그가 나에게 길에서 삶을 배운다고 말한 적 있다.
귀밑머리가 희끗해지는
또 한 명의 늙어가는 아비가 서 있다.

지금 나는 천천히 국도를 달리는 중.

모든 것은 지나가고
기억이 되고 풍경이 된다.

이루었다는 마음이 남는다.
그리하여 더 이상의 미련을 지울 수 있을 것이다.

가라앉아 어딘가에 숨어있는 나의 감정들이 언젠가 봇물처럼 터져나오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우리는 긴 터널을 이미 지나왔으므로.

-15년 만에 만난 아버지와 다시 송별하고 돌아오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