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 할매들 – 과거와 과거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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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바라지 골목은 사라져버렸다. 높게 둘러친 펜스를 따라 독립문초등학교 앞에서 골목을 찾는다. 독립문 초등학교는 오늘 입학생 예비소집일인가보다. 지킴이 아저씨가 어린이와 엄마들을 맞이하고 있다. 한 아이가 두리번거리자, 혼자 왔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할머니와 같이 왔다고 저어기, 오고 계시다고 대답했다.

골목을 내려간다. 천주교 무악동 선교본당이 있다. 낮은 기와지붕, 나무대문을 밀고 들어선다.
노인들을 만나러 간다. 분명히 대부분 여성일테지.
서까래가 있는 대청마루에 어디선가 진동이 올 때마다 문이 흔들리는 유리달린 나무문틈으로 찬바람이 스며든다. 88년쯤,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마당이 있는 한옥집. 마당엔 성모상이 있다.
할머니들이 미리 모여 명찰을 달고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를 따라 온 어린아이가 지루함을 참아내려 애쓰고 있다. 방학은 모두에게 쉽지 않다. 예상대로 남자노인은 없다. 나이를 먹어가며 사람의 내공을 알아채는 신묘한 기술이 나에게도 생겼다. 활동가의 내공이 강하게 느껴지는 팀장과 인사를 주고 받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업공간과 나누어 둔 곳에는 낮은 탁자위에 과자와 인스턴트 차가 마련되어 있다. 이런 곳에서 잽싸게 차를 타고 물을 끓이는 이는 언제나 내가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간식거리를 대접하는 일에 늘 굼뜨다. 나도 커피믹스를 하나 타 마셨다.

바닥은 따뜻했다. 다리를 모으고 앉은 노인들이 다리를 구부리고 있기 힘들다고 말한다. 나는 다리를 뻗으시라고 얘기했다. 저도 관절염이예요. 저도 이따가 뻗을거예요. 노인들이 쑥스럽게 웃는다. 수업이 시작되고 글쓰기 교재를 나눠드리자 글은 쓸 줄 모른다고 할머니들이 입을 모은다. 글 쓰란 소리를 하지 말라고 못을 박는다. 말로 하면 열권 이상도 얘기한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구술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 토박이들일테고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엔 지역의 역사가 담겨 있을거다. 할머니들은 넓은 마당이라는 마을의 한 곳에 대해 말했다. 검색엔진이 알려주지 않는 넓은 마당이라는 곳은 예전에 공터가 있던 곳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패드를 꺼내고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재빠르게 받아 적었다.

29년생부터 50년생까지. 무려 21년이나 나이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노인”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묶였다. 이름, 나이, 고향, 서울에 언제 오셨어요? 라는 걸 가지고 자기 소개를 했다. 고향은 어디고, 서울엔 언제 왔고, 이 동네엔 언제 왔고, 지금은 어디에서 누구랑 살고,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일단 고생한 얘기가 먼저 터진다. 첫 만남부터 자기 이야기를 줄줄줄 늘어놓는 경우는 흔치 않다.

사별하고 혼자 지낸 할매는 왜 그리 많은가. 왜 옛 사람들은 남자들이 그리 일찍 죽었을까. 평균수명으로 남자들이 더 짧게 살다 간다지만, 내가 만난 노인들 중 젊은 시절 남편을 잃은 할매들이 꼭 몇 명씩 있었다. 스물아홉에 혼자되었다, 서른여덟에 혼자되었다는 할매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6-70년대에 애 딸린 과부로 살던 사람들은 “안 해 본 일”이 없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범주의 돈벌이를 했다. 대부분은 장사다. 광주리를 이고 시장에 나가 팔아보는 걸로 시작을 한다. 여성들이 직장인으로 살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없었다는 얘기다. 아이들은 둘 이상이다. 집 가까운 곳에서 장사를 하면 아이들도 들여다볼 수 있고 동네에서 아이들끼리 잘 크기도 했다. 고등어를 떼어다 판다고 나섰다가 생선 아가미에 구더기가 낄 때까지 한 마리도 팔지 못해 그대로 버렸다는 얘기부터, 그 무거운 수박을 받아다가 리어카에 실어 판 얘기, 요즘은 가사도우미라고 하는 남의집살이, 아모레 화장품 장사, 미제장사,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각종 비정규직 노동의 직업이 등장한다. 그때는 직장이 있어서 월급을 받으면 살기가 편한 것이었고, 직장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은 그날 그날을 자신의 노동과 입담으로 해결해야 했다. 할매들의 이야기를 받아치면서 고생 많이 했다고 무용담 삼아 말하던 내 모친을 떠올렸다. 엄마 고생은 고생도 아니다 생각했다가, 비슷한가 했다가, 노동의 강도를 어디가 더 세다고 비교하는 것은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과 비슷한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바닥은 따뜻하고, 머리는 차가운데 낮은 천장 아래 둘러앉아 있으니 이야기가 더 잘 나오는 것이겠다. 정면을 보고 앉는 교실형 구도와 둘러앉아 있는 구도는 한 장소내의 권력서열을 말해준다. 학교의 교실은 그 자체로 비민주적이다. 특정인에게 특정한 것을 배워야 한다는 압박은 사람을 유순하게 만드는 것인지 비겁하게 만드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비슷한지를 말하는 자리에 높낮이가 있을 필요는 없다. 할매들의 이야기는 한 시간 반 동안 끊임없이 이어졌다. 29년생인데도 미모가 빼어난 할머니가 잘 안 들린다며 나를 보고 자꾸 웃는다.

– 예전엔 못 배우고 글 모르는 게 참 부끄르왔는데, 이제는 그런 거 없어. 살만치 살고 고생할 만치 다 했는데 멋이 부끄러. 안 부끄러인쟈.

– 못 배운 것보담도, 살다 보니 이뤄놓은 게 없어서 내가 참 부끄럽습니다. 어딜 가서 앉아 있으면 얼굴이 붉어지고 말을 잘 못하고 그럽니다. 나름대로 부지런히 살았는데, 어쩌다가 이래 되얏나 모르겠심다. 나는 생전 구경도 안 댕겨봤어요. 제주도도 못 가봤습니다. 그리 살았는데, 어찌 지금 사는 게 이렇습니다.
– 우리가 몇 번 봤어도, 이런 얘기는 오늘 처음입니다. 내 살아온 얘기를 누가 들어줍니까. 이렇게 말할 기회도 없었고, 나도 말해 본 적이 없는데 얘기 해보니 참 재미있고 좋네요.

허리가 적당히 굽은, 다리가 적당히 휜, 노인들이 주섬주섬 힘겹게 일어나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할매들을 보내며 신발을 확인한다. 신발 안 미끄러우세요? 추운데 잘 여미고 들어가세요. 나는 부러 살가운 척 한다. 때로는 옷깃도 여며드리고 신발을 신는 사이 들고 있는 커피잔도 들고 서 있는다.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다 만 제일 젊은 어르신이 내 옆에 선다. 사잇문에 몸을 반쯤 기대고는 잘 뚜등긴다고 칭찬을 한다. 타자를 빠르게 친다는 말이다. 할매라 부르기 애매한 이 분은 붉은 모직 모자를 쓰고 서서 아들이 만나고 있는 여자 흉을 본다.
맘에 안 들어 죽것어. 그러실만 하겠는데요.
그래도 낼 모레 칠순인데 여기서는 막내시네요. 라며 웃으니 잇몸을 보이며 큭큭대고 웃는다.
사는 게 무셔. 나는 자다가 깨서 멍, 하니 있을 때가 많아. 여기 노인네들 봐봐. 내가 젤 어린데. 내가 이쟈 낼 모레 칠십이면, 팔십까지, 구십까지 살아야 허잖어. 죽지도 몬하고. 죽는 게 반갑지는 않을 것이고. 10년, 20년을 내가 어찌 견디나. 나는 사는 것도 무섭고, 죽는 것도 무섭고. 우울햐. 에이. 기분이 안 좋아. 어째 갈수록 사는 게 무서워.

사는 게 무섭다고. 나도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 모르는데, 할 일도 없고 갈 데도 없으면 앉은 자리가 그대로 무덤이겠지. 나도 사는 게 무섭다.

어르신들과 일별하고 돌아오는 길, 남대문을 향해 가는 수문장 교대식 행사행렬을 본다. 과거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몸부림이다. 어쩌자고, 왕조의 기억만 남겨두는가. 변변한 무덤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과거는 모두 어디에 묻혔나.
남산을 돌아 해방촌으로 내려서며 지나가는 여자들의 얼굴을 훑는다. 나의 과거 어디메에서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늙지 않고 있는 이태원언니들을 찾는다. 미제장사 했다는 할머니의 미소를 떠올린다. 역사의 과거에 돌아앉은 행촌동 골목길에서, 타인의 과거를 엿듣고, 나의 과거를 지나, 나의 미래에게로 돌아간다.
오늘따라 햇빛이 따가워 눈에 멍이 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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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근데 계속 가는데 마다 느끼는 건데, 아무래도 할매들이 날 좋아하는 거 같다. 아마 다 내 몸에 붙은 살 덕분이 아닌가, 마 그래 생각하고 있다.-

☆ 서울한겨레두레협동조합과 협동조합 은빛기획의 공동사업에 관한 기록입니다. 계속 쓸란지는 잘 모르죠 뭐.

2017. 1. 11.

마지막 가는 길, 외롭지 않도록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취재기

서촌의 골목을 돌아

광화문을 지나 사직공원쪽으로 올라가면 배화여대로 올라갈 수 있다.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과 경복궁을 지나 사직공원 옆 사직파출소부터 이어지는 곳은 서촌이라 부른다. 조선의 임진왜란 이후 관청이 모여있던 이 곳에 민간인들이 살기 시작했고 1930년대부터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오늘날 서촌에는 각종 단체들이 모여있다. 환경연합과 참여연대를 비롯해 크고 작은 시민단체들이 모여 있다. 세종음식문화의 거리가 시작하는 지점에 아담한 건물 2층에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이 자리를 잡고 있다.
2009년 4월 풀뿌리공제운동연구소가 한국 상조사업의 현황과 대안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며 상조사업의 현황을 점검했다. 동년 9월에 한겨레신문사와 풀뿌리공제운동연구소가 공제조합 운동을 함께 하기로 결의하고 각 지역 주민운동, 협동조합운동, 시민사회운동가들이 모여 한겨레두레공제조합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우리의 고유 관혼상제 문화 중 공동체정신이 있는 두레와 품앗이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형태를 찾다보니 그 중 하나가 장례문화였고 그 어떤 문화유산보다 가장 빠르게 상업화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합원 가족들의 상장례를 함께 준비하려고 출발한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조합원을 모집하던 중 장사서비스 제공에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한다. 뒷돈거래, 폭리구조를 파악하고 이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다시 공력을 들인다. 2010년 가을,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뒷돈거래와 폭리가 없는 장사서비스 제공 시스템을 구축하고 다시 조합원 모집을 시작한다. 이후 법인 설립을 놓고 치열한 논의를 거쳐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상포계를 중심으로 한겨레두레협동조합으로 등록하기에 이른다.
당시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생협으로 인가신청을 하였는데 생협법상 사업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청이 반려된다. 2012년 12월 1일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되면서 그제서야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협동조합”의 형태로 사업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죽음의 존엄함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다.
1997년 구제금융 이후 경제적 곤궁함은 인간의 존엄성마저 훼손했다. 산 자의 삶이 가치를 잃는 순간 죽은 자의 가는 길은 더없이 쓸쓸해졌다. 가족형태가 변형되고 구성원이 줄어들고 집안과 가족의 일도 자본에 넘겼다. 상장례를 도맡아 하는 업체가 등장하면서 죽음은 집 밖으로 몰려났다. 건강보험의 혜택으로 병원문턱이 낮아지면서 사람들은 끝까지 죽음과 싸워 이기려는 투쟁을 시작했다. 많은 삶이 병원에서 사라졌다. 살기 위해 가는 곳도 병원이지만 죽기 위해 가는 곳도 병원이 되었다. 병원은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곳을 넘어서 상장례를 치르기 위한 외부기관이 되었다. 집안에서 상장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장례는 사업이 되었고 자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한 뒷돈거래와 과다한 비용의 청구로 장례식은 계산서와 영수증으로 점철되고 고인에 대한 애도는 온데간데없다. 장례식을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밀려드는 문상객과 습관처럼 인사하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례식장에 보이지 않는 바가지를 물리치기 위해서이니.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서울조합 사무실을 처음 찾은 것은 2015년 여름이었다. 아담한 건물의 2층에 위치한 사무실은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서울조합과 연합회가 같이 사용하는 공동사무국이다. 연합회 상근직과 서울조합 상근직이 함께 사무실을 공유하며 서로 협력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각 지역별 조합이 있고 각 지역조합들이 결합하여 연합회를 구축한다. 연합회에서는 전체 조합의 사무를 관장하고 각 조합의 총무부문을 정리한다. 각 지역조합은 지역마다 자생적으로 구축된 조합이 있기도 하고 정관과 규정에 따라 새로 조합이 구성되기도 한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지난 3년간 조직의 체계를 갖추는데 집중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총괄상임이사 김경환 씨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협동조합이 한국에서 성공하고 자리잡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외부의 목소리를 익히 들었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활동가들과 80년대 민주화세대들이 주축이 된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당연히 갈등과 반목이 반복되는 일이 끊임없는 게 당연하다고 평가한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을 주목한 것은 24%의 기적이라는 협동조합의 사회적 역할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조합원들만의 이익을 도모하는 공제조합의 성격을 갖추기만 해도 되는데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이념을 관철하고 죽음의 가치를 재고하기 위해 사회공헌의 장치를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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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두레 겨울 워크숍

죽음의 가치를 통해 삶을 다시 보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조합원은 초기 출자금과 매달 조합비를 낸다. 이 조합비중의 24%를 별도로 모아 사회공헌에 사용하는데 2013년부터 종로구 마을주민제안사업의 일환으로 무연고노인의 결연장례를 몇 개 단체와 함께 진행했다. 법무법인, 사회단체, 비영리단체들을 규합하고 마을주민들과 협력사업으로 무연고노인이 많이 살고 있는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의 거주민들을 대상으로 장례 결연을 맺었다. 종로구 돈의동은 일제강점기에 집창촌으로 조성된 지역이다. 이후 1968년 나비작전이라는 집창촌 철거 계획에 따라 집창촌은 모두 사라졌고 대신 성매매가 이루어지던 공간에 하루 벌어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의 일세방이 생겨났다. 이 지역은 현재까지도 한 평남짓한 공간에 인생을 맡기는 여러 사연들이 모여 산다. 돈의동 103번지 일대는 노인들이 모이는 파고다공원일대부터 헐리우드 극장까지를 말한다. 서울 한 복판에 대규모 쪽방촌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거니와 그들의 삶은 있어도 없는 것으로 치부되다가 결국 마지막 가는 길도 “처리”가 된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서울조합은 지역 공동체의 회복과 삶의 가치를 회복하는 방법에 고심하다 돈의동 쪽방촌에서 죽음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를 찾게 된다.

2015년에 급부상한 키워드는 고독사다. 그 이전에 고독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술인들의 고독사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 예술인보호법이 생겨나기도 했다. 사회의 사람다움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가 있다면 그것은 그 사회가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 있다. 도시의 인간성을 알아보려면 그 도시의 고양이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라는 말이 있다. 길고양이에게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도시는 인간도 당연히 존중하는 문화가 남아 있다. 한 사람의 삶이 사라지는 죽음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우리 사회는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죽음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이나 인간 본성의 가치회복, 삶의 목적 따위는 차치하고, 죽음에 대한 예를 어찌 갖추는가도 이 사회의 인간성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늘어나는 고독사는 멀리 있지 않았다. 골목 곳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간간히 뉴스에 등장했다. 심지어 한 건물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던 건물주 노인이 혼자 지내던 방에서 죽은 지 오래되어 발견되었고, 한 가족이 집단으로 자살하는 경우 등 사회에 이슈가 되는 뉴스거리 외에도 이름은 있으나 기억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홀로 죽어간다.
한 때 우리는 죽음의 예를 “축제”에 빗대어 부르기도 했고, 살만큼 살고 여한 없이 떠난다며 호상이라는 단어도 붙였다. 노령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이제 이 사회는 더 이상 “장수”를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다. 정치도, 행정도, 장수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이제 정치와 행정에서의 장수는 골치 아픈 일이 되어간다. 환영받지 못하는 노령인구는 밀려 밀려 혼자 죽어간다. 골목에서 아무도 모른 채, 옆집에 누가 사는지 인사 한 번 제대로 못한 채, 사라진다. 이 사람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 남은 흔적을 지우는 업체가 있고, 그들의 물건을 수습하는 유품정리업체가 있다. 모든 것은 자본이 대신한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그들의 죽음을 정리할 수 없다면 모여 있는 곳부터 파고 들 수 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서울조합은 같은 지역에 속한 종로구 돈의동을 찾았다. 돈의동의 복지를 책임지는 사랑의 쉼터 복지관과 종로1·2·3·4가동 담당 공무원과 장례결연을 맺을 대상을 우선 선정했다. 장례결연이란, 혼자 사는 쪽방촌의 무연고 노인이 이 세상과 이별할 때, 그들의 장례를 대신해주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쪽방촌에 사는 사람이라고 가족이 전혀 없지 않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연락이 끊겼고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거나 가족과 연락이 닿아도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이들은 무연고자가 된다. 무연고자의 죽음은 기억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
돈의동과 같은 빈곤지역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면 복지관이나 담당공무원을 통해 일단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된다. 연고자를 찾을 수 있도록 기다리는 시간은 48시간이 된다.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이들의 시신은 직장(直葬)처리된다. 바로 장사를 지낸다는 것이다. 상례가 없이, 즉 장례식이 없이 바로 화장장으로 가게 된다. 사망진단서를 끊고 사망자에 대한 행정 처리를 하고 서울시시설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화장장으로 간다. 시신운송 차량은 버스 기사 1인이 운전한다. 동행자는 없다. 이들의 시신이 화장장에 도착하면 바로 화장하고, 유골은 “처리”된다.

이 시대 대다수 사람들은 병원에서 죽어 병원에서 장례를 치른다. 장례를 치르기 전에 의사와 의료행위에 대한 합의를 가족들이 하게 된다. 사망이 확인되면 그 때부터 상례 절차가 시작된다. 상조 회사를 부르고 병원 장례식장을 예약한다. 사망한 병원과 장례식장이 상이한 경우 정복을 입은 장례식장 관계자가 나와 시신을 운송한다. 가족들은 상조회사와 각종 계약을 체결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계산이 오고간다. 관은 얼마짜리로 할 것인지, 수의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 손님접대를 위한 밥상은 얼마짜리를 할 것인지, 가족들은 수도 없이 계속해서 장례지도사와 상례에 대한 비용을 확인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그 때부터 문상객이 몰려든다.

돈의동 103번지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만성질환을 앓고 있다. 전쟁고아부터 IMF때 사업이 무너져 생사의 갈림길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까지.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이 사람들 중 장례결연이 필요한 사람들 중 협동조합에서 약속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정하여 장례결연을 맺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구술생애사집을 출간하기로 하였다. 서울조합의 사무국장이 이 작업을 맡았고 결연장례 어르신의 집단생애사집에 들어갈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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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의동 구술생애사 기록과정

돈의동 103번지 골목

여름이었다. 처음 만날 어르신은 두 분이라고 사무국장이 말했다.
종로 3가 파고다공원 뒤로 들어가면 돈의동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파고다공원의 담벼락엔 대낮부터 만취한 사람들이 등을 기대고 있거나 장기를 두기도 한다. 돈의동에 사는 사람도 돈의동에 살지 않는 사람도 여기서 낮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한 여름, 비지땀을 흘리며 사무국장이 커다란 검은 봉투를 들고 사랑의 쉼터 사무실로 들어왔다. 인터뷰를 할 어르신들에게 선물을 드려야 하는데 사무국장이 사는 동네의 마트가 싸다며 10kg짜리 쌀을 두 포대나 짊어지고 왔다. 사무국장은 남다른 미모의 40대 여성이다.

첫 인터뷰는 사랑의 쉼터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사무국장은 선글라스를 쓴 멋진 차림의 노인에게 원래 고향을 물었다. 전쟁고아인 박노인은 원래 살던 집이 남산동이었으며 폭격을 맞아 집이 날아간 기억이 생생하다고 전했다. 사무국장이 준비한 쌀과 라면, 커피를 전달해드리기 위해 박노인의 쪽방으로 향했다. 멀끔한 춘원당 한의원을 지나면 바로 쪽방촌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있다. 입구부터 지린내가 진동을 했다. 골목 어귀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박 노인을 보고 인사했다. 박 노인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그는 없이 살수록 깨끗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평 남짓, 잡다한 물건들이 그득한 방은 나름대로 질서를 갖추고 있었다. 먼지도 별로 없었다. 박노인의 성품은 방에서 모두 드러났다. 허투루 보이지 않으려는 노력, 깨끗하게 정돈하는 습관, 깨끗하게 걸어둔 옷가지 등, 놀라울 정도였다.
박노인과 일별하고 만난 두 번째 결연장례 대상자도 박 씨였다. 이 분은 무연고자의 장례문제에 대해 복지관에 건의를 한 적도 있다. 옆방에 같이 살던 노인을 아버지처럼 오래 모셨다. 그 분이 돌아가시고 나니 장례식도 제대로 치를 수 없이 그저 화장장으로 보내야 했던 일이 잊을 수 없이 가슴 아팠다. 기관과 복지재단의 도움을 받아 돈의동 노인들의 장례를 치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그 바람이 이루어져 기쁘다고 전했다. 기초수급자로 공공근로를 다니면서도 봉사활동을 하고 자기 장례식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상조회사에 가입도 해두었다. 두 번째 박 노인은 봉사활동으로 받은 표창장도 선 보였다.
자칫 잘못하면 뒤로 나가떨어지기 십상인 계단을 오르내리며 참담한 기분이 들었지만 두 분의 태도는 예상보다 훨씬 긍정적이었다. 방안에 앉아 있으니 땀이 줄줄 흘렀다. 7월이었다. 두 분과 함께 불고기 백반을 먹고 헤어졌다. 한겨레두레의 사무국장은 두 분에게 엔딩노트를 보여드렸다.
“어르신들 돌아가시면 원하시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 내용을 여기 적어서 방에 잘 보이는 데에 걸어두시면 저희가 나중에 와서 어르신 필요하신 거, 왔으면 좋겠는 사람, 연락해서 장례를 치러드릴 거예요.”
본인의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풀어내는 사무국장도, 그 얘기를 듣고도 좋게 고개를 끄덕이는 두 분의 모습은 매우 낯설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처음 만났다.

IMF때 사업에 실패하고 돈의동에 들어온 지 얼마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황 씨 어르신, 열여섯에 팔려가듯 시집을 갔다가 쫓겨나 식당일을 전전하며 모은 돈을 사기 맞아 돈의동에 들어온 신 씨 어르신, 전쟁 때 가족을 잃고 평생 종로구를 떠돌았다는 강 씨 어르신을 만났다. 가정불화로 평생을 방황하다 노동으로 생계를 잇던 홍 씨는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 부상을 입었는데 병원비를 낼 돈이 없었다. 카드깡으로 급한 치료비를 메꿔보려다가 불법업체에게 사기를 당해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그는 쪽방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달랬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넘었다. 가장 젊은 안 씨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집을 떠나며 친척집을 전전하다 이런 저런 기술을 배우며 열심히 살았으나 어느 순간 알콜중독자가 되어 중환자실에서 다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미 간경화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결연장례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돈의동 103번지를 아우르는 종로1·2·3·4가 주민센터의 공무원들은 돈의동 골목을 지날 때 주민들과 일일이 인사를 했다. 사랑의 쉼터 복지사와 사무국장은 이웃처럼 지내는 모습도 보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절망적이지 않다거나, 나름대로 살만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 내가 마주친 돈의동 103번지의 주민과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은 매일 매일 애쓰며 살아야 한다. 나는 그저 그 곳을 지나친 이방인에 불과하며, 이방인이 보는 시선은 짧고 얕다. 그들은 때때로 배를 곪는 게 차라리 편리하여 평소에 많이 먹지 않는 습관을 들이고, 병원에 실려 가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 하며, 작은 일거리라도 끊이지 않기 위해 성실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오랫동안 몸에 익은 여러 가지 낡은 버릇들을 버리기 위해 오랜 시간 자기 자신과 싸워왔고, 지나간 날을 들추는 고통을 잊기 위해 주어진 하루에 충실하다. 통풍이 되는 창문이 있다는 것에 행복해 한들, 삶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 쓰러져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신의 불안한 미래에 대해서 덤덤해 지기 위해 이를 악물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켜야 했을지,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돈의동 103번지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성품이나 기질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아파도, 슬퍼도, 하물며 죽어도, 연락할 곳이 없다는 것. 무연고이다. 내가 그들을 “우리”라고 칭할 수 없다면 나는 “그들”의 삶의 곤고함을 이해할 수 없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삶이 결국 무연고로 이어지고 영결식이나 장례식도 없이 “처리”되는 죽음으로 마무리 된다면. 우리는 모두 가족을 가져야만 온당한가. 질문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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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두레협동조합과 종로구마을장례지원단의 협업 돈의동 결연장례 증서 전달식

 

한겨레두레가 지향하는 장례

시대가 변하고 가족의 형태는 변형되었다. 가족이 붕괴하였다고 표현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가족이란 형태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지도 모를 일이며, 어떤 가족은 폭력적이고, 어떤 가족은 사람의 삶을 더욱 고단하게 한다. 때로 가족제도는 국가가 복지의무를 방임할 기회를 제공한다. 가족이 꼭 정당한지 가족이 꼭 필요한지 알 수 없다.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의 단위로 역사를 차지한지 오래된 형태임은 분명하고, 그로 인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상포계를 서비스한다. 전통한국사회의 두레와 계의 형식을 계속해서 구현하되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상포계이다. 상업적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상조 회사는 “상조”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에서는 상포계가 전통양식에 맞는 말이라 한다. 상포는 상례에 사용되는 천(직물, 삼베)을 서로 추렴하던 계의 형식에서 가져온 말이다.
한겨레두레조합원은 1구좌 (1만원) 이상의 출자금을 내고 매달 3만원의 조합비를 낸다. 이 중 24%가 조합운영비로 사용되는데 조합사무국운영비 외에 사회공헌에 이 비용을 상당 지출한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조합원은 직계가족 만에게 상장례 서비스를 국한하지 않고 친구나 지인의 장례도 주관하도록 돕는다. 장사물품의 목록을 보고 필요한 물품만 구입하게 되며 상장례에 사용되는 물품은 조합에서 직거래를 통해 제공한다. 여타 장례식과 상이한 비용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겨레두레는 장례서비스의 혜택의 폭을 넓히고 궁극적으로 장례를 통한 공동체의 회복을 꿈꾼다. 집장례가 사라진 세상에서 품앗이 마을장례와 작은 장례를 다음 단계로 추진하고 있다. 품앗이 마을장례는 변화되는 가족형태에 맞춰 마을사람들이 함께 장례를 치르는 일이다. 집장례를 하고 싶은 조합원이 있다면 기꺼이 집장례가 가능하도록 함께 준비한다.
실제로 조합원 중 집장례를 치른 조합원이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가장 긴 시간을 머물렀던 집에서 장례를 치르고 오래전 풍경처럼 동네 사람들이 들여다보며 서로 위로하고 애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집장례를 추구하기엔 지금 우리의 삶이 모습이 여의치 않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한겨레두레는 품앗이 마을장례를 제안한다. 마을의 공동체 공간을 이용하여 함께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한겨레두레에서 추진하는 “작은 장례”는 품앗이 마을장례와 상포계를 결합한 형태라 볼 수 있다. 마을회관, 공동체 공간에서 장례를 치르고 이 구조를 행정기관과 협조하여 녹색장례로 추진하는 것이다. 일회용품과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는 장례식의 형태를 바꾸고 수의를 고집하지 않고 생전 본인이 좋아했던 옷으로 대체할 수도 있고, 대규모 장례가 아닌 소규모 장례를 지향하고, 인공장이 아닌 자연장, 산골(散骨: 화장한 유골을 자연에 흩뿌린다는 의미)을 자리 잡고자 한다. 수목장의 형태는 또 다른 상업화를 낳아 현재 전국 도처에 무허가 수목장 난립이 이루어지고 있다.
시대가 그러하다.
어떤 움직임만 있어도 촘촘히 돈 벌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두뇌를 가진 게 현대인들이다. 틈새시장, 벤치마킹이라는 단어가 자리를 잡은 이후 어떤 분야도 물질이 틈타지 못할 곳이 없다. 작은 장례가 자리를 잡게 되고 보편화되면 그 때 또 어떤 산업이 밀려올지도 모른다. 이를 지켜나가는 것은 하나의 신념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의 가치와 그 가치를 지켜나가려는 조합원들의 굳건한 협동과 신뢰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2015년 말, 돈의동 103번지의 결연장례 주민들과 결연장례 전달식을 가졌다. 종로1,2,3,4가 주민센터의 행정공무원들과 돈의동 사랑의 쉼터 실무자들, 종로구 마을장례지원단의 각 단체와 법률자문을 맡은 법무법인 명륜의 변호사, 돈의동 자원봉사센터와 적십자 병원에서도 참여했다. 결연장례를 맺은 10명의 돈의동 주민들 중 어떤 이는 자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다는 생각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진심으로 전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연고가 없는 이들의 마지막 길을 약속해준다니 고맙다.”고 명료하게 말했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이익을 우선시할 필요가 있다. 대의와 사회공헌을 위해 구성원의 희생을 마냥 강조할 수 없다. 조합원이 직접적으로 혜택을 받을 이익을 놓치지 않고 조금씩 추렴하여 사회에 공헌하는 형태가 가장 이상적인 협동조합의 형태라면,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이 바로 그 모범사례라 할 수 있다. 1년간 지켜본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행보는 의미심장했다. 이 사람들이 무언가 작은 바람을 일으켜 언젠가 거대한 물결이 된다면, 세상은 분명 더 따듯해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의 선한 마음에 축복을 기원한다.

 

2016년 2월 4일

작은 장례 – 2016년 1월 21일

한겨레두레협동조합과 사랑의쉼터, 돈의동 첫 작은장례를 치르다.

 

돈의동은 탑골공원의 담벼락을 끼고 돌아 종로 3가에서 5가의 숨은 골목으로 이어지는 주거지역이다. 주소는 돈의동 103번지. 103번지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 한 사람이 산다. 103번지에만 700여명이 산다. 이들은 모두 혼자 산다. 옆 방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고, 삶을 나누며 형제처럼 가족처럼 지내는 이도 더러 있지만 대다수의 주민들은 혼자다. 사람들은 이들을 쪽방촌 홀몸노인, 혹은 독거노인이라고 부른다. 700여 명 중, 노년층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노인인 것도 아니다. 103번지의 골목을 오가다 보면 꽤 많은 장년층을 볼 수 있다. 사회적 약자인 청년 장애인도 눈에 띈다.

고독사가 이슈로 부각되며 노인고독사에 대한 이야기가 연일 언론에 오르내렸다. 통계청에 발표에 따르면 2015년 고독사망자 연령비율 1위는 60대 이상 독거노인이 아니라, 50대 남성이었다.

103번지 주민들은 어딘가가 아프다. 젊은 시절 산업재해를 입은 사람, 직업으로 인한 질병을 얻은 사람, 여러 이유로 마음을 다쳐 술로 달래다 몸도 다친 사람, 직업병, 만성질환, 성인병, 신체적 정신적 장애, 이들은 모두 각자 다양한 이유로 아프고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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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동 사랑의쉼터 복도에 붙어 있는 돈의동 지도

가족은 인간사회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기초공동체다. 이 기초공동체를 기반으로 사회가 이루어지고 지역과 국가와 이익집단이 탄생한다. 기초공동체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돈의동과 다른 쪽방으로 흩어진다. 이들은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 개체가 되어 골목을 떠돈다. 이들은 가난과 굶주림, 추위나 더위 따위의 물리적 환경은 사람이 사람의 손을 잡고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다.

몇 년 전 노숙자 인문학운동을 하던 이가 했던 말을 잊지 않는다. 노숙자의 공통점이 게으르거나, 술문제가 있거나, 아프기 때문인 거 같냐 물었다. 그는 단호하게 가족이 없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대화를 할 사람도, 없어요.”

돈의동에 사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세상에 가족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태어나고 사람에 의해 길러진다.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보니 아무도 없는 막막한 어둠, 어쩌겠는가. 그래도 살아야 한다. 돈의동에 모인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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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동 103번지. 2015년 가을촬영

이 돈의동의 복지를 담당하는 것은 종로1,2,3,4가 주민센터와 사랑의쉼터라는 복지관이다. 복지관은 구세군재단이 위탁운영을 한다. 작은 골목의 사이로 허름한 건물이 하나 있다. 지하엔 교육관과 샤워시설이 있고, 1층과 2층엔 휴게공간이 있다. 3층에는 사무실과 상담실이 있다. 이화순소장과, 사무국장과, 복지사 둘이 이 공간에서 업무를 본다. 복지관 쉼터 계단에는 “주폭”에 대한 경고가 여기 저기 붙어 있다. 술을 먹고 난동을 피우는 주민들이 많다. 5년간 일한 복지사는 주민에게 폭행을 당해 상해를 입었다. 그래도 그는 아직 거기 있다. 주민들이나, 주민복지를 책임지는 행정직들도 술 때문에 괴롭다. 술을 마셔서 괴롭고 못 마셔서 괴롭다. 술에 취해서 괴롭고, 술이 안 취해서 괴롭다. 그래도 살아야하니까. 맨 정신에 버틸 수 없는 날이 지속되면 사람들은 술을 마신다. 가난한 자들의 마취제는 화학작용으로 만든 술뿐이다. 소주 한 병 만큼의 위로는 쉬이 다가오지 않는다.

다들 자기 한 몸 누일 쪽방보다 커다란 사연을 품고 산다. 죽이고 달래고 얼러봐도 상처받은 일들은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추운 날 시린 걸음을 걸을 때마다 길모퉁이에서 툭 치고 튀어나오는 고통이 이들을 들볶는다. 사연을 말한들 무슨 소용 있겠냐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추운 겨울, 쪽방촌에 죽음이 문을 두드린다. 한 달에 한두 명은 시신이 되어 103번지를 떠난다. 이들은 무연고자다. 공고를 내도 가족을 찾아도, 시신양도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죽음은 무연고 독거자의 시신처리라는 이름을 쓴다. 장례절차 없이 바로 화장장으로 향한다. 죽어 사라질 육신은 모두 마찬가지지만, 이들을 기억하는 103번지의 이웃들은 애도를 표할 방법이 없다. 살아서 한 줌 도움이 못되었다면 가는 길이라도 잘 보내주고 싶은 103번지의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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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동 쪽방촌의 한 건물. 아래에서 위로 3층까지 주거공간이 있다. 2015년 여름 촬영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죽음의 의식을 개선하는 단체다. 상업주의에 휩쓸려 가정의 대소사도 외주를 주게 된 이 시대에 함께 하는 상포계를 통해 의례의 힘을 확인하고자 한다. 자본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출자금과 조합비를 내고 혈연으로 한정하지 않은 타인의 장례를 준비한다. 그 조합비의 24%중 20%는 조합운영비, 그 중 1%를 공동체 기금으로 조성하고 4%는 연합회 회비로 사용한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 지속성을 가진다. 무턱대고 사회공헌만 하는 곳은 협동조합보다 사회복지재단이 걸맞다.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모인 협동조합이라면 공동체의 회복에 지출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이 원칙을 지켰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는 상포계를 통해 상장례의식을 전문적으로 다룬다. 자기 분야를 지키며 사회공헌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돈의동 사랑의쉼터와 MOU를 맺었다.

직장으로 처리되는 돈의동 주민들의 장례를 대신해서 치르기로 약속했다. 병원의 영안실이나 상조회사의 식사대접, 화려한 제단과 방문객을 대신해, 이웃들이 죽음의 본질을 생각하며 애도하고 한 번쯤 그를 기억하고, 영정사진을 놓고 잘 가라고 이별의 인사를 건네고, 함께 살던 공간에서 그를 기리는 일,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이 착안한 “작은 장례”이다.

장례의식은 상업적 상조회사의 난립으로 변질되었다.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알고 있는 장례절차는 전통의식과도 다르고 죽음을 대하는 성숙한 자세도 아니다. 상품으로 만들어질 수 있고 계산서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이 남았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작은 장례를 통해 이윤을 창출할 필요가 없다. 그야말로 사회환원이기 때문이다. 2015년 겨울이 깊어갈 때 작은 장례를 약속했다.

2016년 1월에 돈의동에서 사망자가 발생했고 약속한대로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사랑의쉼터와 첫 작은 장례를 준비했다.

좋은 일을 할 때 외부에 얼마나 알려야 하는가에 대해 사람들은 갈등한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서의 가르침 때문인지 좋은 일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불편해한다. 작은 장례를 준비하며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이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은 이 사람의 죽음을 한 번쯤 기억해 달라는 의도였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추도식을 취재하겠다는 기자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사무국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슈화되어 이것이 마치 행사처럼 비춰질 때, 가치가 훼손되고 본질이 곡해될까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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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동 사랑의쉼터 복지관 앞 2016년 1월 21일 아침

2016년 1월 21일 목요일 아침. 며칠 째 혹한이 몰아치고 있었다. 엘니뇨현상으로 겨울이 따뜻할 거라더니 자연현상은 인간이 예측하기 어렵다는 걸 반증이라도 하듯, 일주일째 영하 10도에서 수은주는 깔짝대기만 했다. 대설이었다. 눈은 내리지 않았다. 겨울철 맑은 하늘은 추위의 상징이다. 하늘이 맑고 햇빛이 쨍쨍했다. 사랑의쉼터 앞에는 카메라와 휴대폰, 수첩을 든 취재진들이 몰려왔다. 이 풍진 세상을 등지고, 가시는 길 평안하길 바란다는 추도사를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김상현 이사장이 읽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이사장과 사랑의쉼터 이화순 소장이 상주가 되었다. 삼베완장을 차고 조문객을 맞았다. 고인을 기억하는 이웃들이 소식을 듣고 와 조문을 했다. 사랑의쉼터 지하 교육장엔 작은 제단이 차려졌다. 고인의 독사진도 없어 주민등록증을 확대해 영정사진을 놓았다. 검소한 꽃바구니 두 개가 제단을 지켰고, 흰 국화와 향, 간소한 제기가 놓였다. 간단한 다과가 한쪽에 차려졌다. 쪽방만한 돗자리에 이웃들이 차례대로 신을 벗고 올라가 고인과 이별했다. 신발을 벗은 맨발을 사진기자가 뒤에서 찍었다. 굳은살만 남은, 한 생명의 삶을 말해주는 발뒤꿈치에 애도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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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한 아이가 조문을 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그에게 소주 한 병의 위로가 되었을까.

적어도 오늘 돈의동을 떠난 고인의 죽음은 여러 경로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여기 한 사람이 힘들게 살았고, 그리고 오늘 이 세상을 떠난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그를 기억했고, 2천 원짜리 국수를 지하시장에서 먹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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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상가 지하시장, 조문객들은 2천원짜리 잔치국수를 나눠먹었다.

몇 사람은 말했다. 나도,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알 수 없는데, 나 가는 길도 저 정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전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2년째 결연장례를 약속했다. 가는 길을 약속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집단구술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 조합원이 늘어나고 한겨레두레의 공동체기금이 늘어날수록 외로운 죽음이 줄어들 것이다. 누구나 죽는다. 같은 하늘 아래 머리를 내리고, 같은 땅 위에 발 딛고 살던 사람들은 먼저 가는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주고 그의 삶을 기억하고 이별을 슬퍼할 권리가 있다. 사람답게 사는 길 너머에 사람답게 이별하는 의식이 있다. 장례를 통해 삶을 돌아보고 옆에서 울고 있는 사람의 손을 맞잡을 수 있다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는 차가운 삶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질지도 모른다.

골목에 뒹구는 소주병처럼 깨어지지 말자고, 훈훈하게 덥힌 따뜻한 술이 되어, 고인의 가는 길을 덥히고 싶다.

2016년 1월 21일 목요일

▦ 종로구 돈의동 103번지에 살던 故김철구씨의 명복을 빕니다.

기록으로 남다

 

아래의 글은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서울지역 조합원 자격으로 은빛기획, 서울시시설관리공단과 같이 진행한 다음스토리펀딩의 연재글로 작성한 것입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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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5년간의 투병을 끝으로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님의 장례식을 치르며 장례식장에서 집에 잠시 들러 내가 부랴부랴 한 일은 집에 와서 기록을 챙기는 일이었다. 2008년부터 시작된 병원순례, 어머님의 마지막 5년은 병원기록으로 남았다.

진료비 영수증, 예약증, 병원을 옮길 때 받았던 의무기록지, 의사의 소견서, CT 촬영 안내문, 영상CD, 혈액검사결과, 임상실험권유안내서, 더 이상 병원에서 해줄 것이 없다고 했을 때 받았던 되의뢰서, 발급기관은 온통 병원이었다. 5년간, 병원수발을 들며 모든 기록을 40페이지짜리 두 개의 클리어파일에 정리했다.

기록을 모아두지 않으면 그 일도 사라지는 것처럼, 마치 없었던 일이 되는 것처럼, 나는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붙잡는 심정으로 하나씩 기록을 모았다.

사그라지는 생명이 기록된 영상CD에는 암세포가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하얗게 가득차 있었다. 이제 이 모든 기록이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된 건, 임종 일주일 전이었다.

어머님의 옷가지를 태우며 나는 클리어파일을 통째로 불속에 집어던졌다.

통증도, 고통도, 모두 사라질 것이라 말하며, 남은 진통제도, 진통제패치도, 아미노산도 기록과 함께 불속으로 던져버렸다.

이듬해 아버지의 자서전을 내고 싶다는 한 사람을 만났다. 구남매의 막내라던 그는 자기 아버지를 엄청난 기록광이라고 소개했다. 팔순을 넘긴 아버지의 기록을 그대로 두기 아까워 책으로 묶어 정리하고 싶다는 얘기와 함께 요즘은 아무도 쓰지 않는 흰 편지지를 펼쳐 보였다. 편지지에는 자필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팔순 노인의 글씨가 그득했다. 문서의 제목은 “비망록”이었다. 어떤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적어둔 기록. 비망록.

구남매의 아버지는 전라남도 고흥군 나로도에서 평생을 살았다. 단 한 번도 외지로 나간 적 없고 고흥군 면사무소에 다닌 것이 이력의 전부다. 막내아들은 아버지의 두꺼운 수첩을 하나 가져왔다. 단행본만한 합성피혁 다이어리에 본인의 사주, 조상들의 생몰년도, 제삿날부터 큰 딸의 결혼식 때 지출한 내역과 지난 30년간 자식들이 보내온 용돈과 방문기록까지 꼼꼼히 적혀 있었다. 경기도 남부에서 출발해 전라남도 고흥까지 달려갔다.

1980년대에 지었다는 집은 나로도 바닷가가 내려다보였다. 노인은 멋쩍게 웃으며 별 일도 아닌데 일을 크게 만들었다며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보였다. 노인은 1960년대부터 손바닥만 한 농협수첩에 매일 매일 일지를 적었다. 감상은 적었다. 그날 있었던 일을 또박또박 연필로 꼼꼼하게 적었다. 그날 무엇을 샀고 무엇을 팔았고, 몇 째가 서울에서 전화를 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연말이 되면 농협에 가서 수첩을 하나 구해오고 매일 밤 작은 소반을 놓고 앉아 그날의 일을 적은 것이 50여권이 넘었다. 두꺼운 클리어파일에는 신문스크랩, 자식들에 대한 서류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자료는 차고 넘쳤다. 손수 정리해 둔 비망록노트를 기반으로 구술을 받았다. 노인의 듬성듬성한 이야기는 글로 옮겨져 그대로 책이 되었고, 책 뒤편엔 손수 정리한 비망록을 그대로 스캔해서 실었다. 이 분은 스스로 자기 연대기를 표로 만들었는데, 본인의 삶과 지역사건, 국내 사건과 국외사건까지 같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왜 이렇게 기록을 하셨냐는 질문에 노인은 그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라며 웃었다.

구술을 시작할 때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초연하던 노인의 눈가가 붉어졌다.

“내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소. 그게 내 한인디, 뱃사람이 아닌디, 배를 하나 인수해서 그 배안에서 하룻녁 주무시던 중에 화물선인가 뭐인가가 충돌해가지고 침몰했지. 지금도 다들 옛날 사진은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어째 우리 아버지는 초상 하나도 없소. 아버지 인상이 어쩌코롬 생겼다 대충 이런 것으로 연상해서 만들수가 있다 하는디 이제 다 끝나버렸지 않소. 이제 끝나부럿어.”

나무처럼 한 곳에서 뿌리내리고 산 노인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서류 한 장 남아있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쓰는 연필로 이어갈 수 있을까.

“어째 초상하나 안 남기고.”라고 먼 산을 보던 노인의 선한 눈매가 가슴에 박혔다.

고흥에서 돌아와 시댁의 안방을 뒤적거렸다. 1988년부터의 가계부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매일의 기록을 넘겨보다 1995년 7월 손녀, 3.8, 출산 9시, 고대병원. 이라는 기록을 발견했다. 그 아래는 과일 4,000, 차기름 10,000, 과자 1,200, 소주 2,000이라는 그날의 소비가 적혀 있었다. 몇 권의 가계부를 뒤적거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의 가계부도 있어 꺼내보았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것은 이런 것이었다.

“8월 24일, 장남 가는 날, 어머니와 있다가 병상에 엄마 돈 두고 떠나감. 눈물을 흘리면서 갔다. 아버지 마음 몹시 아프다. 엄마의 가슴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기도.

8월 25일. 아내가 병원 퇴원. 은환엄마가 엄마 머리 감겨주고 둘째 집으로 가다.”

가계부는 곧 끝났다. 어머님의 기록은 아버님의 서툰 문장으로 이어져 나에게까지 남았다.

2015년 12월 14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