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만세] 마을활동가의 사회적 보상을 둘러싼 어떤 혀들

민중의소리 오피니언 > 마을만세에 기고한 칼럼 링크입니다 .

마을만세는 마을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다섯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기고합니다.

저는 보통 3-4개월에 한 번 기고하고 있습니다.

[마을 만세] 마을활동가의 사회적 보상을 둘러싼 어떤 혀들

https://vop.co.kr/A00001666442.html

모르는 죄

사람이 모르는 게 죄가 아니라고 했던 건, 무학자를 차별하지 말라는 뜻이었을게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공부를 한다는 건 적어도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어야 하고, 공부를 하는 게 필요하다는 각성이 있는 양육자가 붙어있어야 어린 나이에 공부를 할 수 있으니, 이건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불과 30-40년전만 하더라도 저학력이 사회생활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양육자가 적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지금의 4-50대 중년여성들 중 고졸로 직장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대학을 간 여성들도 수두룩하게 많다.

무학이나 저학력의 약점은 고통스럽게 배우고 익혀본 경험이 적어서 배우는 힘이 약한거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고, 공부도 해 본 놈이 잘 한다고, 남들 놀 때 어떻게든 탐구하고 책상에 붙어있어본 자는 일종의 짬밥이 생겨 다음 단계도 거기까지 못 간 사람보다 쉽게 넘어간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학습 숙련도가 높아지니 더 어려운 단계의 공부에도 접근하기 좋아진다. 그러나 학력의 기초단계 – 즉 초등학교 정도 – 에서 문제를 풀기 위해 낑낑대고, 모르는 말의 뜻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물어볼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이 더 어려운 공부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런 경우에서나 모르는 게 죄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르는 게 죄가 되는 경우는 권력을 쥐었을 때다.

그 말 한마디로 예산이 바뀌거나 누군가의 일자리가 사라질 때, 그 말 한마디로 다른 사람이 매달 받던 쌀 한 푸대가 두 달에 한 번씩으로 줄어줄 때, 권력자가 모르는 것은 죄가 된다. 책상에 앉아서 보고 싶은 서류나 들여다보고, 제 가족이 분통터졌던 일에 대해서 기관장을 불러서 되려 내가 갑질했냐고 협박이나 일삼는 자나, 나도 학교 다닐 때 국어가 싫었으니 지금도 영 교과과정이 별로일 거라고 확신에 차서 입을 놀리는 자는, 자신의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는 계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권력을 이미 쥐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침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면 되니까. 갈라치기와 혐오와 차별을 담아 떠들어도 당장 그 불손한 입을 가진 자가 어떻게 되진 않는다. 대중의 분노는 더디게 끓어오른다. 생계가 바쁜 경우도 있고, 그래도 권력자라면 나보다 많이 배웠을테니, 나보다 경험이 많을테니, 나보다 나은 판단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잘 하겠지. 그래도 한 번쯤 믿어주자는 선량한 마음과 귀찮은 마음이 뒤섞인다.

끌려내려오기 전에는 별로 불안감도 없을 것이다. 권력자들의 분노는 가볍고 하찮다.

모르는 게 죄가 되지 않은 경우는 알려고 할 때다.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모르는 것을 묻고, 현장의 소리를 듣고, 혼자 궁리하고,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누군가 크게 소리치면 뛰어나가 물어보면, 모르는 게 죄가 되지 않는다.

결국 태도의 문제다.

모든 정치인이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어쨌거나 그도 사람이고 자기가 경험한 세계가 세상의 전부라는 착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을 쥐었을 때는 모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떠벌리지 말아야 한다.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고 국가가 4대보험처리를 해준다면, 적어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을 다 해봐서 함부로 말하던 권력이 있었고, 아무 것도 안 해봐서 함부로 웃던 권력이 있었다.

권력을 쥔 정치인이 자기 세계에 빠져 제 멋대로 판단하고 재단하며 잔소리하고 윽박지르는 것은 죄다.

이 이야기는 대통령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고, 어느 기초단체 의회의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다.

2013.6.17.

어쩌다 노인복지관 수업을 맡게 되어 5주차의 강의를 끝냈다.
사실 강의라고 하기도 애매한 것이 내가 이 어르신들에게 뭘 가르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고 그 분들도 뭘 배울 형편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하는 일은 한 시간 가량 그 분들이 하나라도 기억을 살려내고 그 기억을 말로 표현하실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첫 시간에는 다른 사람의 말이 길어지는 것을 기다리지도 못하시던 분들이 차츰 차츰 순서대로 이야기도 하시고 남의 얘기도 듣기도 하시고 적당한 추임새를 넣게도 되셨다.
담당 사회복지사는 놀랍다고 했고 나 역시 빠르게 적응하시는 어르신들에게 가능성을 보았다.
처음엔 11시부터 40분 남짓 진행되다가 식사하러 가야된다고 자리를 떠버리시는 분들이셨는데 우리 한 시간 일찍 시작합시다 라는 어르신들의 제안에 10시에 시작에 30분은 워밍업으로 간단한 신체놀이를 하고 (이 부분은 다른 분께서 진행) 나머지 1시간 1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라는 질문에 글쎄요. 하고 어르신들이 말문이 터지던 순간의 몇 가지 사례를 들었더니 듣던 분께서 “자랑할 수 있는 걸 끄집어내셨군요.” 라고 하셨다.

오늘은 내가 맡은 강의의 마지막 날이었다.
어제 오후까지도 대체 내일은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되나 고민을 하다가
“자랑할 수 있는 걸 말할 기회” 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오늘 내가 준비한 것들은 사라진 직업에 대한 것이었고 “제가 잘 모르니 얘기해주세요” 라며 하나씩 하나씩 물어나갔다. 사실 정말로 몰랐다. 내가 똥지게가 뭐고 물지게가 뭔지, 신기료 장수가 뭐며, 가마니를 어떻게 짜는지 알게 뭐겠나.

오늘은 11시 40분이 될 때까지 이야기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한 아버님은 노래 한 자락 해주겠다며 해방때쯤의 가사로 추정되는 노래를 불러주시고 자리를 뜨셨다.
이가 거의 없어 가사를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지만 후반부의 가사는 이런 것이었다.

재주 좋은 제트기랑 (중략)
한시바삐 한국땅에서 주저앉고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자유의 평화를 이제 볼까

193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과의 괴리는 엄청났다.
세월의 차이뿐 아니라 문화적 차이도 엄청났다.
동시대를 살아온 나의 할머니와 무척이나 다른 분들이셨다.

집에 돌아와 나에게 “자랑할 수 있는 걸 말할 기회” 라는 힌트를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좋은 강사는 앉아서 수업을 듣는 사람을 ‘높이고, 그들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며, 그들의 숨은 가능성을 스스로 찾아내게 하는’ 사람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강의를 주로 할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자세로 임하면 실수가 적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듣자하니 거슬리고 거북했던 강의들의 원인이 무엇인가도 알아낼 수 있었다. 그저 칭찬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나를 보고 있는 당신이 나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재촉하는 것. 그런 자세는 마음에 든다.

혼자 전담했던 첫 강좌의 소회다.

무릎

박부장이 고등학교때부터 다니던 국밥집을 찾아갔는데 철거하는 건물에 세들어있던 모양이다. 국밥집이 이사한 곳을 찾아갔더니 일요일 휴무라고, 길에 서 있던 아지매 둘이 알려주었다.

근처 아무데나 들어간 곳은 테이블 네 개의 단촐한 식당이었다. 그 중 두 개의 테이블에 소주병과 고구마가 놓여 있었다. 머리가 허연 남자노인이 앉아서 주인이 하는 말을 다 들어주었다.

밥을 차려주는 사람은
무릎병이 오래된 게 틀림없었다.
무릎이 잘 구부러지지 않고 근육으로 수십 년 살다보면 걸음 하나 하나 뒤틀린다. 허리도 아파서 오래 서서 뭘 할 수가 없다.

주인 노인은 우리의 국밥을 차리며 계속 에어컨 설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고보니 가게 안에 에어컨도 없었다. 지난 여름은 어찌 난 것일까.

비둘기 한 마리가 현관까지 들어와 밖을 둘러보았다. 자주 오는 놈 같은 폼새다.

노인이 차려준 밥상의 땡초와 마늘은 시들시들했고 김치는 묵다못해 쉬어빠졌다. 다리가 저 지경이면 무엇하나 쉬운 게 없을터였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흰 머리의 노인을 보니, 어느 시기가 되면, 장농처럼 그저 듣는 사람이 필요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220612 / 남부민동 / 부산

일요일풍경

일요일에 파스타를 먹을 만한 집은 세 군데정도.

그 중 두 곳은 오늘도 만석일게 분명해서 혼자 가기 저어했다. 한 곳은 음식맛이 좋은데 건물위치 때문인지 손님이 붐비지 않는 곳이다. 나는 붐비지 않는 곳을 선택했다. 들어가자 한 테이블이 있었고, 내 뒤에 두 팀이 들어왔다. 오늘도 서빙을 보는 중년남자는 분홍색 셔츠에 넥타이를 맸다. 이 집은 부부가 한다고 들었는데, 부인이 주방을 보고 남자가 홀을 맡는다. 비어있는 1인석을 가르키며 내가 저기에 앉겠다고 하자 남자가 약간 당황한 듯 주춤했다. 내가 앉으려고 한 곳엔 식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남자가 금세 테이블보와 식기와 앞접시를 가져다주었다. 내 옆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는 물이 아닌 연한 연두빛의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킁킁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간헐적으로 계속 어떤 소리를 냈다. 틱이구나.

수 년 전에 이 집에 왔을 때 주인내외의 자녀로 보이는 사내 아이 둘이 있었다. 동생은 똘똘한 말을 계속 내뱉고 있었고 형은 약간 굼뜬 모양새를 보였던 기억이 났다. 그게 언제였던가. 벌써 4년도 넘은 일이다. 그때 덩치가 큰 아이는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 그 아이가 자라 저 청년이 되었을수도 있겠다.

넥타이를 맨 남자가 뭔가 부탁하는 말을 하자 청년이 일어나 테이블을 치웠다. 청년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다시 킁킁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파스타를 먹는 사이 청년이 주방에 들어갔다. 주방에서 “안돼”라는 여자의 낮은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일어나니 청년은 기계적으로 일어나 자리를 치웠고 주방에 잠깐 들렀다가 테이블에 앉았다. 계산을 하러 계산대에 섰을 때 청년과 나는 마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파스타맛은 옛날과 조금 달랐다. 기름이 적어 뻑뻑했다. 한 때 평촌에서 제일 맛있는 파스타를 한다고 소문났던 곳이다.

파스타집을 나오는데 옆 식당의 주방이 엿보였다. 긴 비닐앞치마에 머릿수건 마스크를 쓴 여성노인 두 명이 식재료를 손질하며 어떤 이야기를 큰소리로 나누고 있었다. 한 사람은 화가 난 것 같았다.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가니 주차관리 아저씨가 앉아 있어야 할 곳에 보이지 않았다. 관리원 부스가 가까이 있었는데 주차관리원은 부스 안에서 반찬통을 꺼내놓고 밥을 먹고 있었다. 12시 50분이었다. 나는 차 앞에 꽂힌 쪽지를 들고 부스로 다가갔다.

식사 하시는 거 같아서 제가 왔어요.

주차관리원은 입을 닦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저쪽으로 가서 끊어드려야 하는데. 관리원이 입을 가리며 말했다.

식사 시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식사하셔야죠. 멀지도 않고.

관리원은 고맙다고 인사했다. 주차비 1200원.

그 구역의 주차관리원들은 모두 노인이다. 비오는 날, 눈 오는 날, 햇빛이 내리쬐는 여름에도 늘 자리를 지키고 늦게 나타난다고 화내는 운전자들의 짜증을 받아내는 사람들의 점심시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오늘부터 점심시간에는 전화를 받지 말라’고 지시하던 어느 중소기업사장이 떠올랐다. 내가 자주 가는 사무실 백반집에는 AS를 다니는 기사들이 자주 오는데 그들은 밥을 입에 물고 한참 이야기를 듣다가 이렇게 말하곤 한다. “네네 고객님, 제가 지금 밥 먹는 중인데요. 얼른 먹고 가겠습니다.”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는 것도 사치가 되는 건가.

온갖 차들이 쏟아져 나온 공원 부근을 지나 시험을 앞둔 아이들을 태우러 나온 학부모들의 차로 학원가의 정체된 도로를 지났다. 일요일. 누군가의 노동을 먹고, 나도 출근을 했다.

마흔 넷

마흔 넷.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많이 버렸다.
나에게 장애물이었던 것들,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서른 살무렵부터 빨리 늙고 싶었다.

나이를 먹으면 사는 게 편해질거란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어쩌면 지금이 제일 좋은 시기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다시 힘들어질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삶은 몇 년째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더 이상 등짐을 진 당나귀 같은 삶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건 내가 간절히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경새재를 넘어오며 골짜기 깊이 파고드는 땅과 비구름을 뿌리는 하늘을 보며, 이제 다시 산을 좋아하긴 어렵다는 걸 알았다.

나는 여전히 너무 많은 걸 사랑하고 있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괴롭던 시절이 있다. 그게 나에겐 청춘이었던 것 같다. 한 소설가의 문장을 읽으며 명치가 뜨거워졌다. 한때 모든 것을 상징으로 읽고 깨달으려 노력한 적 있다. 지금은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본다. 노력하지 않는다. 잘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칭찬받으려고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마흔 넷에 이 정도 인간이 되었으면 내 깜냥에 알맞다 생각한다. 모자라도 어쩔 수 없다.

이대로 10년쯤 살다가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불쾌한 것에 화를 내고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점점 편안해진다. 아마 점점 괴팍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방도는 없을 것이다. 이제사 인간이 뭔지 알아채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면 나는 다시 업무모드로 돌아간다. 많은 것을 잊은 척 할 것이다.

2018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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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도시

1.

오늘 아침엔 늦잠을 자려고 맘을 먹었는데 일찍 깨어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이명박 구속으로약간 흥분상태였던 게 분명하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데다가 어깨와 팔 통증이 심해 집 근처 사우나에 갔었다. 불가마에 들어가려는데 입구를 떡 막고 어떤 여자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육중한 몸을 움직인 여자가 통로를 열어주어 나는 불가마 안에 들어가 앉아 책을 폈다. 여자는 궁둥이를 조금 움직인 상태로 계속 통화를 하고 있었다. 수원에 누군가 입원을 했고 그 입원한 환자의 지인인지 본인인지와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여자의 목소리를 작지 않았고 나는 15분이 지난 걸 확인한 뒤 문장을 고를 새도 없이 “아주머니 통화 더 하셔야 되면 좀 나가서 하시면 어때요?”라고 큰 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돌리고 등을 돌리더니 몸을 부비적거리며 자리를 떴다. 그 여자가 통화를 하는 그 15분 동안,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아침 9시도 안 된 시간에 찜질방에 온 사연은 무엇인지, 여기서 통화를 못하게 하면 밖에 나가선 통화를 할 수 있을 것인지,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는 모두들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는데 저 여자는 거기서도 저런 통화를 할 수 없을 것이며, 가족이 있다면,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있지 않고서야, 가족들도 큰 소리로 장시간 통화를 하는 것에 타박을 할 것이며, 그렇다면 저 여자는 어디서 마음껏 통화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라도 참아야 하나.

알지도 못하는 한 사람의 행동으로 타인의 삶을 이리 저리 재단해보며 나는 15분을 견뎠고 결국은 참지 못해 그 여자를 내몰아버렸는데. 몰지각한 행동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말하는가.

2.

명동을 나가는 지하철을 타고 회현역에 진입했을 때 내 앞에 통 넓은 회색바지에 회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섰다. 마른 여자였다. 내 눈높이에 닿은 그녀의 배가 동그랗게 불러 있었다. 가방에 “임산부 먼저”라는 고리가 달린 것을 보고 자리를 양보했다. 여자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가방을 끌어안고 자리에 앉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임산부인지 확인하려 들었을까 생각했고, 행여 성질 못된 노인을 만나 폭언을 들은 적은 없었을까 생각했고, 그 이야기를 집에 가서 남편에게 털어놓으며 엉엉 울었을까 생각했고, 오늘도 퇴근을 하는 길인 것 같은데 3개월쯤 되어 보이는 산모와 태중의 아이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 염려했다.

3.

명동성당을 올라가는 계단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중늙은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여자는 스카프인지 목도리인지 모를 것으로 머리통을 감싸고 있었는데, 그 감싼 것 밖으로 흰 머리칼이 삐져나와 있었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분명히 나를 보고 내 눈을 바라보며 실실 웃고 있었는데 제정신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게 쉽지 않은 내가 천천히 계단을 하나씩 디뎌 올라가자 여자는 “천원만 줘.”라고 말을 했다. “천원만 줘.”

나는 목소리를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계단을 올랐다.

신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제단을 보러 가는 것도 아니다. 저기 남겨둔 기억 하나를 되살리고 싶었던 건, 공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쌀쌀한 날씨에 어둠이 깔린 거리를 환하게 밝히는 전등 사이를 헤매고 다니다 이 분주한 도시 한 복판의 섬같은 저 곳을 찾아가는 이유는, 거기 그 건물이 있기 때문이다.

구걸을 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부자들을 떠올렸다.

행여 그와 마음이 닿을까봐, 그 마음에 가난이 옮아올까봐, 전염병을 피하듯 돌아가고자 하는, 걍팍한 마음을 느꼈다. 내 안에 있었다. “천원만 줘.” 그 말이 어색하지 않은 날이 올 수도 있다.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공포는 골목 마다 숨어있다. 기억이 없던 시절부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고갔던 그 거리에서 나를 밀쳤던 어쩔 수 없는 것들의 힘은 언제나 나를 짓누른다.

4.

명동의 섬.

카톨릭회관 지하에 있는 전광수 커피에서 저녁커피라는 드립커피를 시켰다.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을 갔다가 집에 가면 되겠다. 휴대폰을 열어 집에 가는 여러 가지 경로를 찾아보다가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코스를 살피고 있는데 한 여자가 나를 빤히 본다. 중년의 여자가 입구에 있는 테이블에 짐보따리를 올려놓는 걸 내가 보고 말았다.

“짐 좀 봐주세요.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보따리가 많아서.”

나도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날까 하던 참인데 예기치 못한 남의 짐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내가 검색을 끝낸 뒤에 금세 돌아왔다. 커피를 다 마시고 화장실에 갔더니 그 여자가 짐을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머니가 안 나오셨다며 웃었다.

5.

집에 오는 버스엔 자리가 있었다. 앉자마자 이어폰을 꽂고 학교 강의를 들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휴대폰을 잡은 내 손을 누군가 몇 번 누르는 느낌이 나서 잠이 깼다. 휴대폰을 들은 여자의 손이었다. 내 고개가 의자 밖으로 떨어지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자의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다. 내 휴대폰이 떨어지려고 해서 나를 살며시 깨운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저 손잡이를 잡지 못해서 실수로 내 손을 스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낯모르는 여자의 손길 덕에 잠에서 깨어 갈아타야 할 정류장에 무사히 내렸다.

6.

집에 돌아와 늙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몇 번 봤던 늙은 시츄가 공원에서 혼자 어기적대며 걷고 있었다. 따뜻한 천으로 몸을 감쌌는데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같은 단지에서 봤던 아이였다. 많이 늙었고, 눈은 안 보인지 오래된 듯 했고 걸음걸이도 좋지 않았다. 나는 주인이 보이지 않아 엄마는 어디로 갔냐고 시츄에게 물었다. 쭈그려 앉아 엉거주춤 걸음을 겨우 떼는 시츄의 사진을 찍었다. 생각했다. 버렸나? 잃어버렸나? 주인이 있는 개인데. 그 개가 맞는데. 아프다고, 늙었다고 버린 건가. 데리고 가야 하나? 동물병원은 문을 닫았을 텐데. 얘를 내가 또 데리고 갈 수 있나? 내가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자 내 시야 밖에 있던 개주인인 여자가 나타났다.

“다리를 잘 못 써서 좀 걸어보라고 데리고 나왔어요.” 개 산책을 시키다 몇 번 마주쳤던 그 여자였다. “아…”나는 말을 보태지 않았으나 나보다 나이가 열 댓살은 많아 보이는 그 여자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 알 것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다 보니 혼자 있는 애들 보면 걱정되죠.” 여자가 내가 할 말을 대신 했다.

 

날씨가 적당히 쓸쓸하다. 세상엔 이렇게 여자들이 많다. 품고 기르고 돌보고 그리고 헤매는. 수많은 여자들의 도시를 저녁 내내 걸었다.

2018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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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빵, 마른 잎 

이한열열사의 추모제가 열리는 시청 앞 광장에 노을이 내려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치환이 나와 거칠고 익숙한 목소리로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부르고 있었다. 

시청 뒤 NPO센터에서 있을 행사에 가러 나온 길이었다. 

행사 시작전인 센터 안은 꽤 무더웠다. 냉방이 필요했는데 아직 장치를 가동하지 않은 듯 했다.

북태평양에서 바람이 불어온다는 며칠, 바깥 바람이 상당히 시원했다. 

베이스와 낮은 드럼 소리의 진동이 거리를 쿵쿵 울리는 시청 뒷골목에 앉아 있었다. 

사위가 곧 어두워질 것이었고 아직 여기 저기 햇빛이 남아 있었다. 

선배를 만나 벤치에 앉아 일 이야기를 하다, 80년대의 이야기를 잠시 들었다. 
우리가 앉아있던 벤치 앞,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이면도로에 작은 원동기가 하나 섰다. 뭔가 들은 것 같은 비닐봉투를 안장에 얹은 작은 원동기에서 노인이 내렸다. 그는 내가 바라보는 방향의 가장 끄트머리 벤치에 앉았다. 주섬주섬 품에서 빵과 우유를 꺼내 천천히 입에 쑤셔 넣었다. 나는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가 빵을 먹는 모습이 자꾸 시야에 들어왔다. 70년대 학번들의 낭만과, 80년대 학번들의 전투적이고 조직적인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빵이 들어가는 노인의 입 매무새가 자꾸 눈에 들어와, 87년쯤, 저 사람은 몇 살이었을까, 딴 생각을 했다. 
칠순은 훌쩍 넘었을 거 같은 노인의 저녁은 시원한 북풍이 부는 시청 뒷골목의 벤치 위에서 마른 빵 하나. 오늘치 빵 하나의 노동은 어떠했을까.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대통령 탄핵을 거머쥐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한 오늘, 박종철과 이한열이 죽고 30년이 지난 지금, 노인의 삶을 얼마나 달라졌을까. 
적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대오는 흩어져 골목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가스처럼 낮게 깔리는 귀신에 사로잡혀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단 하나의 마른 빵을 위해, 마른 잎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걱정말라는 노래의 가사를 믿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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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덕원 고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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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살다가 중년의 어느 날, 인생이 확 뒤엎어지는 고비를 겪곤 한다. 주변을 돌아보면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모두 어떻게 인생을 엎어치고 매치고 다시 일어났는지 궁금해졌다.
내 어머니는 땅에 침을 뱉는 것처럼 욕지거리를 하며 세상을 밀쳐내고 일어났고, 아버지는 바다를 건너가 삶의 기준을 뒤틀었다. 누군가는 그때쯤, 가정을 잃고, 누군가는 그때쯤 자식을 잃고, 또 누군가는 그 비슷한 시기에, 직장을 잃고, 사랑을 잃기도 한다.
삶의 절반을 지배해 온 것들을 버리는 순간이, 누구나에게 오는 것일까. 모든 이에게 그런 날이 오던가, 그것이 궁금해졌다.

넥타이를 동여맸던 낮의 남자들이 소주에 불타는 고기를 입에 넣고 우적거리는 사이, 테이블 사이로 그릇을 나르는 여자들이 오간다. 그들은 모두 그 고비에 있거나, 그 고비를 넘겼거나, 어쨌거나 절반의 생을 살아낸 사람들로 보였다.

삶의 크레바스가 있다면 그 사이에 빠져 사라지지 말고 어떻게든 뛰어넘어 건너야만 하는걸까. 사는 건 그렇게 치열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사는 건 대체 얼마나 독한 놈이 고개를 쳐들 수 있는지 경쟁하는 과정일까.

고기가 지글지글 익고 술에 취해 떠드는 소리가 가득한 고깃집에서 네가 말했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일 것이라고. 살이 타는 냄새가 나고 모두가 우격다짐을 하고 있지 않냐고.
우리가 이 지옥을 빠져나가면 그때는 평화가 올까. 그런 일은 태초부터 없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크레바스에 빠져 죽지 않은 이들이 고기를 굽고 고기를 먹는 저녁에, 연두색 국빈관나이트 점퍼를 입은 남자들이 작은 비닐봉투에 명함과 주전부리를 넣어 테이블 사이를 돌며 인사를 했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전도연이 <무뢰한>이라는 영화에서 저렇게 사탕을 돌렸다. 문득 그녀가 보고 싶었다. <무뢰한>의 그녀. 삶의 모든 고통을 삼겹살 씹듯이 거침없이 삼켜버렸을, 그녀만 알고 있을 것 같은 비밀을 엿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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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8일 인덕원

더 많은 내부고발자

 

외부충격이다, 음모론이다,

잠수함이다, 암초다.

믿고 싶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이유를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그 커다란 배가 어찌 그렇게 넘어갔으며, 모두가 살아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당연해보였던 예상을 뒤엎고 너무 많은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생중계로 봤기 때문이다.

그날 해가 지던 순간을 기억하는가.

청문회에 나와 마이크 앞에 앉은 자들은 모두 그날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헌법재판소에서는 “그날은 일반 국민들도 자기가 뭘 했는지 기억할 수 밖에 없는 날”이라고 했다.

2014년 4월 16일, 해가 지던 순간을 기억하는가.

목이 메이고 눈물을 참으려고 눈알이 벌개지도록, 당신도, 나도 TV 화면을 바라보며 옥죄어드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으니까.

해가 진다,

해가 진다,

해가 지면 안 되는데,

해가 지면 안 되는데.

그날 아침 8시 49분, 세월호가 침몰했고, 뉴스 속보가 떴다.

진도 앞바다 여객선 침몰. 이라는 속보를 보고 앞바다라니 별 일 없을거라 생각했다. 비어 있는 큰 아이의 방문을 닫다가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 젖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교복을 입은 아이가, 큰 아이의 방에 잠시 섰다가 사라졌다. 아이의 머리는 길었고 앞머리가 단정했다. 그 교복은 하복이었다. 살아남은 아이들이 나중에 학교로 돌아올 때 입었던 그 교복의 형태. 반팔의 흰 셔츠로 되어 있는, 짧은 치마와 흰 양말이 흐릿한 형체.

팔에 돋는 소름을 거두고 서울 서초에서 볼일을 보고 나올 때 전원구조라는 속보가 떴다. 그리고 나는 제암리에 있었다. 제암리교회에 도착해 기념관을 둘러보고 자목련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바람이 적당히 불었고, 공기가 텁텁했다. 봄마다 오는 그런 날이었다. 갑자기 대기가 묵지근해지고 바람엔 먼지와 모래가 섞여 있는 듯 하고, 멀리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자꾸 아른아른하고 몽롱하게 들리는, 햇빛은 나지만 찬란하지 않은, 조금 걸으면 몸이 더워져서 겉옷을 벗어들게 되는, 화창하지 않은, 그런 날이었다.

바람이 불어 자목련 잎사귀가 마구 떨어지는 것을 영상으로 찍으며, 전원구조가 오보였다는 걸 알았다. 나는 왜, 지금, 왜 하필이면 여기 제암리에 있는가, 참담했다.

별 일 없을 거라 믿었다. 침몰했다는 여객선은 거대했고, 쉽게 넘어갈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며, 진도 앞바다라 어민들도, 해경도, 모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녁이 되면 아이들이 오돌오돌 떨며 담요를 뒤집어쓰고 엄마아빠에게 안겨 실컷 울다가 저주받은 수학여행이라 운수가 나빴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저녁이 되면, 전 국민이 뉴스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대참사를 피해가는 과정에 등장한 시민영웅이 한두 명쯤 나와 인터뷰를 할 것이라고, 믿었다.

당연하게 펼쳐질 거라 생각했던 뉴스는 없었다. 진도에는 비가 왔고, 아이들은 바다에서 나오지 못했고, 아이들이 왜 나오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비 오는 진도에서 비옷을 입고 청와대로 가겠다는 길이 막혔고, 우리의 모든 소망이 그때부터 가로막혔다.

이후로 우리는 바다, 침몰, 여객선 같은 단어를 쓰기 어렵다. 노란색, 배, 고래, 리본을 보면 가슴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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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일, 안양 범계역

자로의 세월X는 돌을 던진 셈이다.

그는 동영상 시작부분에서 “개인적 견해”라는 점을 밝혔다. 이렇게 2년간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지 궁금해 한 사람이 있다고, 그게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모든 것을 원점에서 재수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정유라가 독일에 있고 독일검찰이 수사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한 네티즌이 썼던 댓글을 잊지 못한다. “독일이 어떤 나란데. 과거를 청산한 나라다.”

오늘은 자로의 세월X가 업로드되었고 언론에 조명을 받았다. K스포츠재단의 내부고발자가 한 명 더 나타나 이제 K스포츠재단내의 내부고발자가 세 명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의인”이라 칭함은 옳지 않으나 “내부고발자”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과거를 청산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죄를 인정하고 처벌을 감수하되 개인의 사익을 위해서라도 더 많은 공익을 위해 위험을 감내할 각오를 보였다. 지금 여기엔 더 많은 내부고발자가 필요하다. 세월호를 잊고 싶던 개인의 내면, 유가족들에게 가졌던 불편한 마음의 내면, 고통을 응시하지 못했던 비겁한 내면, 때로는 잊히길 바랐던 이기적인 내면, 그 모든 내부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 다시 끄집어내고 이 모든 것을 전부 다 바로 세워야 한다고 말하는 각자의 내면의 고발이 필요하다.

그날 아침부터 모두들 해가 지기 전에

아이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그 하룻동안, 박근혜는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일정이 없는 날이니 느즈막이 일어나 드라마를 보거나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며 쉬었을 것이다. 배가 가라앉았는다는데 해경은 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냐고 질책하며, 본인은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을 굳게 확신하며 머리를 올리고 화장을 한 뒤 중대본으로 갔을 것이다. 책임자들이 제대로 구조하지 않은 것에 분개하며, 자신의 임무에 집중했을 것이다. 박근혜가 알고 있는 자신의 책임은 오로지 의전뿐이니까.

그런 자를 대통령으로 뽑아 앉힌 자들이 내 이웃에 있다. 어떤 기관의 보안손님이고 싶었던 내 내면에 최순실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더 많은 내부고발자가 필요하다.

왜 그랬을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작은 욕망들이 뒤틀려 기괴한 모습으로 갑작스럽게 튀어나올 때 일어난다. 왜 그랬는지. 세월호의 진실은 아무리 파헤쳐도 우리가 죽는 날까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을 왜 구하지 못했는지 왜 구하지 않았는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진실도 살아남은 자들을 설득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끊임없이 의심하는 일. 지치지 말고 진실을 파헤치는 일, 끝까지, 책임을 묻고 스스로 내부고발자가 되어 이 모든 과거를 청산하는 일.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다.

2016년 12월 26일

그날, 2014년 4월 16일, 화성 제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