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입니다.

– 뭘 써야 할 지 모르겠어요. 나는 이룬 것이 없고, 내 인생은 다 실패예요.

나는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든 이 분에게 그렇지 않다고 우길 작정을 했다.

– 여기 책에 있는 글도 그렇고, 이 교재, 응? 이 책, 여기 있는 사람, 방금 읽은 그것도 그렇고. 이렇게 사람들이 살다 보면 그래도 뭐 하나라도 이룬단 말이죠. 나는 전혀 그런 것이 없어요. 아무 것도 해 놓은 게 없어요. 내 인생은 완전히 실패예요.

나는 짖궃은 표정으로 “아닐껄요.” 하고 웃었다.

– 정말이예요. 나는 다 실패. 모든 게 실패.

“성공한 사람들은 오늘도 죄다 청문회장에 앉아 있잖아요.”
노인의 앞에 앉았던 영감님이 내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굵은 주름이 남은 굽은 손가락으로 노인은 얇은 글쓰기 교재를 쥐고 가만히 있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남은 듯 했다.
다른 노인들은 교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몸을 숙여 그 분 앞에 팔꿈치를 대고 가까이 말했다.

“아버님, 우리 모두 다 죽잖아요. 인생에 성공이 어딨어요. 모두 다 죽는다는 건 결국 다 실패한다는 말이잖아요. 아닌가요?”

허허허.
노인이 웃었다.

– 나는 다 실패여…

“어떻게 실패했는지 알려주세요. 그럼. 실패인지 아닌지 좀 보게요.”

노인이 환하게 웃었다. 어이가 없는 것인지, 기분이 나아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굽은 허리를 일으켜 노인이 나에게 목례를 했다.

“다음 주에 꼭 뵈어요.”

다짐을 받고 싶었다. 당신이 배운 것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공부 잘 하고 돈 잘 버는 게 성공이 아니라는 걸 그 사람의 입으로 듣고 싶어졌다.

알 수 없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내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 라고 뇌까리며 형광등을 켜둔 채로 모로 누울 지, 나는 알 수 없다.

– 1월 9일 월요일, 서울 동대문에서.

 

201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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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할매들 – 과거와 과거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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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바라지 골목은 사라져버렸다. 높게 둘러친 펜스를 따라 독립문초등학교 앞에서 골목을 찾는다. 독립문 초등학교는 오늘 입학생 예비소집일인가보다. 지킴이 아저씨가 어린이와 엄마들을 맞이하고 있다. 한 아이가 두리번거리자, 혼자 왔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할머니와 같이 왔다고 저어기, 오고 계시다고 대답했다.

골목을 내려간다. 천주교 무악동 선교본당이 있다. 낮은 기와지붕, 나무대문을 밀고 들어선다.
노인들을 만나러 간다. 분명히 대부분 여성일테지.
서까래가 있는 대청마루에 어디선가 진동이 올 때마다 문이 흔들리는 유리달린 나무문틈으로 찬바람이 스며든다. 88년쯤,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마당이 있는 한옥집. 마당엔 성모상이 있다.
할머니들이 미리 모여 명찰을 달고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를 따라 온 어린아이가 지루함을 참아내려 애쓰고 있다. 방학은 모두에게 쉽지 않다. 예상대로 남자노인은 없다. 나이를 먹어가며 사람의 내공을 알아채는 신묘한 기술이 나에게도 생겼다. 활동가의 내공이 강하게 느껴지는 팀장과 인사를 주고 받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업공간과 나누어 둔 곳에는 낮은 탁자위에 과자와 인스턴트 차가 마련되어 있다. 이런 곳에서 잽싸게 차를 타고 물을 끓이는 이는 언제나 내가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간식거리를 대접하는 일에 늘 굼뜨다. 나도 커피믹스를 하나 타 마셨다.

바닥은 따뜻했다. 다리를 모으고 앉은 노인들이 다리를 구부리고 있기 힘들다고 말한다. 나는 다리를 뻗으시라고 얘기했다. 저도 관절염이예요. 저도 이따가 뻗을거예요. 노인들이 쑥스럽게 웃는다. 수업이 시작되고 글쓰기 교재를 나눠드리자 글은 쓸 줄 모른다고 할머니들이 입을 모은다. 글 쓰란 소리를 하지 말라고 못을 박는다. 말로 하면 열권 이상도 얘기한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구술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 토박이들일테고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엔 지역의 역사가 담겨 있을거다. 할머니들은 넓은 마당이라는 마을의 한 곳에 대해 말했다. 검색엔진이 알려주지 않는 넓은 마당이라는 곳은 예전에 공터가 있던 곳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패드를 꺼내고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재빠르게 받아 적었다.

29년생부터 50년생까지. 무려 21년이나 나이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노인”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묶였다. 이름, 나이, 고향, 서울에 언제 오셨어요? 라는 걸 가지고 자기 소개를 했다. 고향은 어디고, 서울엔 언제 왔고, 이 동네엔 언제 왔고, 지금은 어디에서 누구랑 살고,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일단 고생한 얘기가 먼저 터진다. 첫 만남부터 자기 이야기를 줄줄줄 늘어놓는 경우는 흔치 않다.

사별하고 혼자 지낸 할매는 왜 그리 많은가. 왜 옛 사람들은 남자들이 그리 일찍 죽었을까. 평균수명으로 남자들이 더 짧게 살다 간다지만, 내가 만난 노인들 중 젊은 시절 남편을 잃은 할매들이 꼭 몇 명씩 있었다. 스물아홉에 혼자되었다, 서른여덟에 혼자되었다는 할매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6-70년대에 애 딸린 과부로 살던 사람들은 “안 해 본 일”이 없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범주의 돈벌이를 했다. 대부분은 장사다. 광주리를 이고 시장에 나가 팔아보는 걸로 시작을 한다. 여성들이 직장인으로 살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없었다는 얘기다. 아이들은 둘 이상이다. 집 가까운 곳에서 장사를 하면 아이들도 들여다볼 수 있고 동네에서 아이들끼리 잘 크기도 했다. 고등어를 떼어다 판다고 나섰다가 생선 아가미에 구더기가 낄 때까지 한 마리도 팔지 못해 그대로 버렸다는 얘기부터, 그 무거운 수박을 받아다가 리어카에 실어 판 얘기, 요즘은 가사도우미라고 하는 남의집살이, 아모레 화장품 장사, 미제장사,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각종 비정규직 노동의 직업이 등장한다. 그때는 직장이 있어서 월급을 받으면 살기가 편한 것이었고, 직장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은 그날 그날을 자신의 노동과 입담으로 해결해야 했다. 할매들의 이야기를 받아치면서 고생 많이 했다고 무용담 삼아 말하던 내 모친을 떠올렸다. 엄마 고생은 고생도 아니다 생각했다가, 비슷한가 했다가, 노동의 강도를 어디가 더 세다고 비교하는 것은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과 비슷한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바닥은 따뜻하고, 머리는 차가운데 낮은 천장 아래 둘러앉아 있으니 이야기가 더 잘 나오는 것이겠다. 정면을 보고 앉는 교실형 구도와 둘러앉아 있는 구도는 한 장소내의 권력서열을 말해준다. 학교의 교실은 그 자체로 비민주적이다. 특정인에게 특정한 것을 배워야 한다는 압박은 사람을 유순하게 만드는 것인지 비겁하게 만드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비슷한지를 말하는 자리에 높낮이가 있을 필요는 없다. 할매들의 이야기는 한 시간 반 동안 끊임없이 이어졌다. 29년생인데도 미모가 빼어난 할머니가 잘 안 들린다며 나를 보고 자꾸 웃는다.

– 예전엔 못 배우고 글 모르는 게 참 부끄르왔는데, 이제는 그런 거 없어. 살만치 살고 고생할 만치 다 했는데 멋이 부끄러. 안 부끄러인쟈.

– 못 배운 것보담도, 살다 보니 이뤄놓은 게 없어서 내가 참 부끄럽습니다. 어딜 가서 앉아 있으면 얼굴이 붉어지고 말을 잘 못하고 그럽니다. 나름대로 부지런히 살았는데, 어쩌다가 이래 되얏나 모르겠심다. 나는 생전 구경도 안 댕겨봤어요. 제주도도 못 가봤습니다. 그리 살았는데, 어찌 지금 사는 게 이렇습니다.
– 우리가 몇 번 봤어도, 이런 얘기는 오늘 처음입니다. 내 살아온 얘기를 누가 들어줍니까. 이렇게 말할 기회도 없었고, 나도 말해 본 적이 없는데 얘기 해보니 참 재미있고 좋네요.

허리가 적당히 굽은, 다리가 적당히 휜, 노인들이 주섬주섬 힘겹게 일어나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할매들을 보내며 신발을 확인한다. 신발 안 미끄러우세요? 추운데 잘 여미고 들어가세요. 나는 부러 살가운 척 한다. 때로는 옷깃도 여며드리고 신발을 신는 사이 들고 있는 커피잔도 들고 서 있는다.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다 만 제일 젊은 어르신이 내 옆에 선다. 사잇문에 몸을 반쯤 기대고는 잘 뚜등긴다고 칭찬을 한다. 타자를 빠르게 친다는 말이다. 할매라 부르기 애매한 이 분은 붉은 모직 모자를 쓰고 서서 아들이 만나고 있는 여자 흉을 본다.
맘에 안 들어 죽것어. 그러실만 하겠는데요.
그래도 낼 모레 칠순인데 여기서는 막내시네요. 라며 웃으니 잇몸을 보이며 큭큭대고 웃는다.
사는 게 무셔. 나는 자다가 깨서 멍, 하니 있을 때가 많아. 여기 노인네들 봐봐. 내가 젤 어린데. 내가 이쟈 낼 모레 칠십이면, 팔십까지, 구십까지 살아야 허잖어. 죽지도 몬하고. 죽는 게 반갑지는 않을 것이고. 10년, 20년을 내가 어찌 견디나. 나는 사는 것도 무섭고, 죽는 것도 무섭고. 우울햐. 에이. 기분이 안 좋아. 어째 갈수록 사는 게 무서워.

사는 게 무섭다고. 나도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 모르는데, 할 일도 없고 갈 데도 없으면 앉은 자리가 그대로 무덤이겠지. 나도 사는 게 무섭다.

어르신들과 일별하고 돌아오는 길, 남대문을 향해 가는 수문장 교대식 행사행렬을 본다. 과거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몸부림이다. 어쩌자고, 왕조의 기억만 남겨두는가. 변변한 무덤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과거는 모두 어디에 묻혔나.
남산을 돌아 해방촌으로 내려서며 지나가는 여자들의 얼굴을 훑는다. 나의 과거 어디메에서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늙지 않고 있는 이태원언니들을 찾는다. 미제장사 했다는 할머니의 미소를 떠올린다. 역사의 과거에 돌아앉은 행촌동 골목길에서, 타인의 과거를 엿듣고, 나의 과거를 지나, 나의 미래에게로 돌아간다.
오늘따라 햇빛이 따가워 눈에 멍이 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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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근데 계속 가는데 마다 느끼는 건데, 아무래도 할매들이 날 좋아하는 거 같다. 아마 다 내 몸에 붙은 살 덕분이 아닌가, 마 그래 생각하고 있다.-

☆ 서울한겨레두레협동조합과 협동조합 은빛기획의 공동사업에 관한 기록입니다. 계속 쓸란지는 잘 모르죠 뭐.

2017. 1. 11.

혓바늘이 돋는다

1.
엄마,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고,
인간이 신을 만든 게 아닐까?
– 그거 니가 몇 년전에도 물어봤던 거야.
그때도 엄마가 그런 거 같다고 했었어.
그랬나?
– 어.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이 풍진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왜 이따위로 살아야 하는지, 왜 계속 싸워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신이 있다고, 불가항력이라고, 내가 범접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믿어버리면 그때부터 모든 삶은 심플해진다.

이것이 내 팔자라고, 사주가 그렇더라고.
그렇게 믿어버리면 안간힘을 써도 안되는 일에 관해,
알 수 없는 우주의 기운을 믿어버리면,
내 인생이 그닥 쓰레기같지 않게 느껴지니까.
내 삶의 모든 노력이 공허하게 부정당하지 않는 기분이 드니까.

2.
다음 주에 끝나는 종로구 모처의 노인글쓰기 수업의 참여자들은 중산층 이상, 대다수 연금생활자로 보인다.
그 격차는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고학력자들이고 글솜씨가 매우 빼어나다.
직접 한글파일에 사진을 붙이고 사진에 캡션을 붙이는 70대가 있다. 반포주공아파트가 천 만원일 때, 아파트를 사지 않고 카메라를 샀다는 노인이 있다. 평생 공직에 있어서 인생이 참 무료했고 오만하게 살았다고 고백하기도 하며, 개인의 모든 울분을 사회적 문제와 정치이슈로 간단하게 치환해버리는 수구전통의 성향을 가진 분이 거침없이 박근혜는 자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남편이 은행원이었고 나중에 회계사가 되었는데도 사는 게 늘 가난했다고 고백한 77세 여성노인이 있었다. 모두들 은행원 월급이 썩 괜찮은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반문했고, 그녀가 혹시 사치를 한 건 아닌지, 욕심이 많았던 건 아닌지 의심하는 질문이 오갔다. 77세의 곱상한 이 할매는 성격이 명랑하고 장난기도 많아 뒤에서 보고 있으면 중학교 2학년 응원단장 같다. 사람들의 질문에 토라진 할매에게 다가가, 남편이 자수성가했고 줄줄이 동생들 공납금을 대셨다는 얘기를 들으니 무슨 사정인지 알 거 같다고 말을 걸었다.
저는 그거 이해해요. 밑빠진 독에 물 붓기죠. 라고 웃었더니,
육남매의 외아들이고 혼자 공부한 남편이었다며 자기도 육남매의 맏딸이었다고 했다.

이 나라에서 개천에서 난 용은, 그 개천의 장력에 의해 이무기로 생을 마감하기 마련이다. 집집마다 개천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하늘로 승천하지도 못한 채, 가시나무 가지에 걸려 억울하게 뜬 눈으로 소멸되는 삶이 있다.

줄줄이 매달리는 동생들의 공납금을 대고, 병든 가족의 병원비와 약값을 대고, 집집마다 있는 화상들의 사고를 치닥거리 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졌던 사람들이, 왜 국가의 의무에 대해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나, 이해하고 싶어졌다.

복지관 뒤에 아파트에 혼자 사는 영감님은 월 300만원 정도 되는 연금을 받아 살고, 막내딸은 미국에서 박사과정 공부중이라 했다.

3.

큰 아들이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보증사기를 당하고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태로 1년이 흘러가, 며느리와 교대로 아들을 돌보는 84세의 노인은 월 40만원으로 살고 있다. 쓰러진 아들이 빚을 내어 구해준 전세집의 보증금이 5천만원이 넘고, 연락이 끊긴 둘째 아들도 호적에 올라 있어 아무 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복지관에 나오면 시름을 잊는다고 고백했었다.

평생을 비정규 공무원으로 일했던 78세 노인은 부인을 일찍 여의고 딸들은 가난하고 아들은 소식을 모른다. 복지관 청소를 하며 노인사회활동 급여로 월 20만원을 받고, 노령연금 20만원도 받는데, 매달 월세가 22만원이다. 12월부터 2월까지는 노인사회활동이 중단되어 다음 달 월세를 내기 어렵다고 주거비 지원을 요청했다고, 복지사가 전했었다.

지난 달에 만난 노인들의 이야기다.

그 이전에는 쪽방촌에 사는 노인들을 만났고, 작년 겨울에는 쪽방촌의 작은장례에 갔다.  발이 없는 노인이 문상을 왔다. 그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지하 장례식장으로 들어서 슬리퍼를 벗고 고인에게 절을 했다. 고인과 그는 지나가다 몇 번 본, 이웃이다.

나는 수업 중에 노인들이 하는 말을 기록하다가
“왜 노인들의 빈부격차가 이리도 큰가” 라고 적었다.
그리고 10초쯤 쉬었다가 바로 아랫줄에
늙으나, 젊으나 매한가지. 라고 덧붙였다.

4.

파업과 철야농성중에도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더라는 전설같은 사내가 환갑을 넘기고도 여전히 뽀얀 얼굴로 매일 TV에 나와 조근조근 말을 한다. 이제 그는 원했던 원치 않았던, 사람들이 그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난세의 영웅을 바란다.

그 방송국에서 하는 예능프로에 “운이 좋아 노래로 먹고 살게 되었다”는 빼어난 미모의 여가수가 나와 말한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꿈이 부정당하는 말과 같으니까. 그 사람이 간절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간절히 원했던 게 무엇일까.
그녀의 말과 달리, 사실 나는 아무 것도 간절히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간절히 원했던 건 살아남는 거였다.
폭탄이 빗발치는 전쟁터, 지뢰가 터지는 언덕을 넘어 까닥하면 온 몸이 터져버릴 지도 모르는 순간마다, 그저 살아남기를, 그저 별 일 없기를 바랐는지도.

5.

일찍 세상을 떠난 막내삼촌은, 1951년 1월 1일 생이었다. 천하에 불운한 팔자라고들 했다. 남들의 말처럼 삼촌은 자기 능력을 단 한번도 발휘하지 못하고 바다 건너에서 위암으로 일찍 갔다. 문득 삼촌 생각이 났다.

미국의 오바마 케어가 사라질 거라 한다. 나는 다시 아버지의 약을 부쳐야 할 것이다.

모두들 살아남고자 한다.
조금 더 근사한 모습으로 살길, 조금 더 의연한 모습으로 죽길.
올 겨울은 박근혜탄핵을 돕는 우주의 기운 때문인가 뜨듯한 겨울이다. 몸이 많이 피곤한데, 사람들의 상처가 자꾸 혓바늘처럼 입속에 맴돈다.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야겠다.

2017.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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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서울 중림동

은발머리의 독일할배 – 카라얀

길건너 아파트형 공장 식당가에 전주콩나물국밥집이 있는 걸 봤다.
한 번도 간 적이 없어 오늘은 아버지와 콩나물국밥을 먹으러 갔다.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 나오고 있었다. 93.9 강석우의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곡이 끝나자 아버지가 베토벤인 줄 알았다 한다.

나는 며칠 전 임헌정이 지휘하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들었다 했고 예전에 부천필에 있었다가 지금 코리아심포니로 옮겨간 임헌정은 말러열풍을 불러온 주역이라 전했다.
– 우리나라 최초 오케스트라가 서울시향이지?
– 모르겠는데.
– 서울시향일거야. 내 기억은 그래.

검색을 해봤다.
1945년 고려교향악단이 있었다. 1948년 서울관현악단은 해군 정훈음악대에 모여 정기공연을 열었고, 1960년에 서울시향이 되었다. 육군악대는 1956년에 KBS 교향악단으로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내용을 읽었다.

– 해군교향악단이 있었는데.
– 그게 서울관현악단인가봐. 해군 정훈음악대에서 공연했으니 해군교향악단으로 보였겠어.
– 그 옛날 지휘자중에 김만복이라고 있어.
– 몰라.
– 찾아봐. 그 양반이 그때도 나이가 많았어.

지휘자 김만복. 1925년 대구 출생으로 서울대 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전공을 지휘로 바꾼 사람. 이 분은 61년부터 서울시향을 이끌고 1965년 사상처음 해외공연인 일본 도쿄에서 공연을 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 그 양반을 조금 알아. 예전에 아빠 느이 엄마랑 명동서 가게 했을 때 자주 왔었어.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부모님은 명동에서 액자가게를 했다. 당시는 저작권이 없던 시절이라 무단복사가 가능했고 엄마는 르느와르나 모딜리아니, 밀레의 그림을 좋아해 그걸 액자로 많이 만들었고 아버지는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그때 독일에 계시던 큰아버지가 어떤 지휘자의 사진과 LP판을 보내오면서 액자로 하면 근사할 거 같다고 전했다. 아버지가 보기에도 지휘자의 얼굴이나 선, 사진 자체가 매우 훌륭해 히트 좀 치겠다는 예감이 들어 복제를 해서 액자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것만큼 그 사진은 잘 팔렸고 아버지는 이어서 비엔나필, 뉴욕 필의 전체 공연 장면이나 주빈 메타, 게오르그 솔티, 레너드 번스타인등의 사진을 액자로 만들었다. 명동을 지나다 봤을까. 김만복 선생이 가게로 와서 이 사진을 어디서 구했냐 물으며 이야기를 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번스타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며 “웨스트사이드스토리”작곡자라고 말했다. 누구냐고 빨리 이름을 대라고 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검색을 했다.
– 그 분이 오면 미도파 커피집에서 커피 한 잔 하고 음악얘기 하고 헤어지고 그랬어. 그 양반은 내가 음악에 대한 사진을 대중에게 보급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나는 그냥 장사한건데 말야.

어릴 때부터 질리게 봐 온 사진이 헤르베르트 본 카랴얀의 바로 이 사진이다. 이후로 이 사진은 여러 곳에서 복제해 전국에 흩어졌고, 큰아버지는 독일에서 간간히 자켓이 멋진 LP판과 북클릿을 챙겨주었다. 저작권이 없던 시절이라 내 부모는 이때 꽤 괜찮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나는 무단복제의 상업적 성공으로 특수한 혜택을 받았다. 크고 나서 좀처럼 카랴안을 듣지 않는다. 그 사람의 수많은 낭설들도 못 들은 척 한다. 카라얀은 비주얼로 내 유년을 완전히 압도해버렸다. 더 이상 보탤수도 뺄 수도 없는, 세상에 지휘자라는 사람들이 있고, 저리도 고독한 옆모습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사람. 그래서 저 사람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알고 싶은 것도 없다. 그냥 내가 기억이 있을 때부터 우리 집에 늘 있던 잘생긴 독일영감님. 은발머리에 대한 로망은 분명 저 카라얀 때문에 생긴 게 틀림없다.

콩나물 국밥이 나오고 그리그의 페르귄트가 흘렀다. 아버지가 페르귄트가 맞냐고 물었다. 나는 김윤희의 “잃어버린 너”를 생각했고, 그 책을 읽으며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울던 내 나이또래의 엄마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모를, 1989년의 어느 오후.

아버지는 펄펄 끓는 콩나물 국밥을 바라보며 말했다.
– 요즘은 곡명이 잘 생각이 안나.
– 그거 외워서 뭐해?
나는 종업원이 가져다 준 김을 쪼개 넣으며 아버지도 김 넣어드셔. 라고 말했다.

한국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
https://news.samsung.com/…/%ED%88%AC%EB%AA%A8%EB%A1%9C%EC%9…

지휘자 고 김만복 선생 타계 소식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

조금은 성글게

아지 산책을 하러 나갔다. 공원엔 웬 덩치 큰 남자가 서서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위협적인 느낌마저 들었지만 이 느낌이 전해지면 저 사람은 억울하겠지.

아지와 공원 한 바퀴를 돌고 공원과 단지사이의 문에 서 있는데 곱게 정장을 차려입은 할머니가 아지를 보고 묻는다.

이 개는 몇 살이죠?

음.. 얘가 열 세 살이예요. 나는 2004년생인 아지에게 한 살을 더 해 대답했다. 누군가 몇 살이냐 물으면 항상 그게 헛갈린다. 개니까 만나이로 따져야 하나.

이 개가 참 순한 개예요. 그렇죠? 할머니가 물으셨다.

아.. 얘는 잡종인데요, 그 다리 짧은 웰시코기하고 섞인 거 같긴 해요.
그렇구나.

할머니는 세로 선이 들어간 위 아래 한 벌짜리 바지 정장을 입고 녹색 로퍼를 신었다. 버버리 파우치백을 손에 쥐고 있었다. 가벼운 퍼머를 한 단발머리는 은발이었다. 동그란 금속테의 안경을 썼는데 눈썹은 가느다란 산모양이고 이목구비가 진하진 않았지만 선명하고 전체적으로 선이 고왔다.

나도 개를 많이 키우는데 다섯 마리까지 키워봤거든요.

내가 지금 칠십 넷인데, (할머니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 나이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칠십 넷, 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점점 달라져간다.) 내가 쉰 다섯부터 개를 키웠어요. 우리 아들 친구가 어디 놀러간다고 일주일만 맡아달라는 거를 데리고 있었다가 정이 들어가지고.. 그때부터 키웠지. 중국에서도 한 마리 데려오고.

아, 얘가 중국에서 온 애예요.

아 그래요?

예. 제가 거기서 공부했는데, 저 살던 아파트단지 앞에 돌아다녀서..

한국사람인데 중국에서 공부한거예요?

네.

할머니는 내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명확히 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래서 검역 다 마치고 데려왔죠. 오래 됐어요.

어디에 살았어요?

저는 상하이요.

아, 우리 아들은 연태에 있었는데, 그때 페키니즈를 장에서 바구니에 넣고 꼬물꼬물한 걸 판는거야. 털도 복슬복슬해가지고 눈은 이렇게 크고 코는 구멍만 보이고 입은 이렇게 째졌어. 할머니는 손을 얼굴에 대어가며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는 듯 얘기했다.

우리 아들은 연태대학에 2년 있다가 학교에서 칭화대를 보내준다고 했다는데, 제가 싫다고 해서 안 갔어요.

아 네…. 중국이 별로 맘에 안 드셨나봐요.

그런가봐.

할머니는 집 앞 내가 다니는 정형외과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시는 중이었다. 고관절 문제가 있는데 나우병원에서 수술을 하려다가 다른 사람이 집 앞 병원을 추천해줘서 다니게 되었다고 하여 내가 이 병원은 과잉진료를 하지 않아 좋다 말했더니 맞다고 호응하셨다.

수술과정의 얘기며, 의사가 얼마나 살뜰히 보살폈는지, 병원에 환자가 많아 늘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 그래도 다녀야 한다고도 했고, 신장이식을 해서 수술이 조심스럽다고도 했고, 물리치료를 일주일에 세 번쯤 받으면 좋은데 많이 불편하면 다섯 번도 간다고 하셨다.

아이고, 바쁜 사람 붙잡고 내가 얘기하느라고. 들어가요.

5분이 안되는 시간동안, 나는 할머니가 어디가 아픈지, 뭘 좋아하는지, 나이가 몇이고, 자녀가 어떻게 되며, 집에 개가 몇 마리인지, 종교가 무엇이며, 교회에서 어떤 사람과 교류하는지, 주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다 알아버렸다. 삶은 어쩌면 매우 성글게 엮여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나는 할머니가 있다.
강남 센트럴시티 맥도날드에서 혼자 점심을 먹던 긴 은발의 나이든 여자, 너무 멋져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분은 꼭 영화배우 문희처럼 생겨서 도저히 카피불가한 사람이었다면,
오늘 이 할머니는 내 생활에 근접해보였다.
나이를 먹을 수록 깨끗하게 입고, 고운 얼굴을 하고 다닐 수 있다면 좋겠구나.

기록으로 남다

 

아래의 글은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서울지역 조합원 자격으로 은빛기획, 서울시시설관리공단과 같이 진행한 다음스토리펀딩의 연재글로 작성한 것입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3234

mom_장지가는길

2012년 9월, 5년간의 투병을 끝으로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님의 장례식을 치르며 장례식장에서 집에 잠시 들러 내가 부랴부랴 한 일은 집에 와서 기록을 챙기는 일이었다. 2008년부터 시작된 병원순례, 어머님의 마지막 5년은 병원기록으로 남았다.

진료비 영수증, 예약증, 병원을 옮길 때 받았던 의무기록지, 의사의 소견서, CT 촬영 안내문, 영상CD, 혈액검사결과, 임상실험권유안내서, 더 이상 병원에서 해줄 것이 없다고 했을 때 받았던 되의뢰서, 발급기관은 온통 병원이었다. 5년간, 병원수발을 들며 모든 기록을 40페이지짜리 두 개의 클리어파일에 정리했다.

기록을 모아두지 않으면 그 일도 사라지는 것처럼, 마치 없었던 일이 되는 것처럼, 나는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붙잡는 심정으로 하나씩 기록을 모았다.

사그라지는 생명이 기록된 영상CD에는 암세포가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하얗게 가득차 있었다. 이제 이 모든 기록이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된 건, 임종 일주일 전이었다.

어머님의 옷가지를 태우며 나는 클리어파일을 통째로 불속에 집어던졌다.

통증도, 고통도, 모두 사라질 것이라 말하며, 남은 진통제도, 진통제패치도, 아미노산도 기록과 함께 불속으로 던져버렸다.

이듬해 아버지의 자서전을 내고 싶다는 한 사람을 만났다. 구남매의 막내라던 그는 자기 아버지를 엄청난 기록광이라고 소개했다. 팔순을 넘긴 아버지의 기록을 그대로 두기 아까워 책으로 묶어 정리하고 싶다는 얘기와 함께 요즘은 아무도 쓰지 않는 흰 편지지를 펼쳐 보였다. 편지지에는 자필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팔순 노인의 글씨가 그득했다. 문서의 제목은 “비망록”이었다. 어떤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적어둔 기록. 비망록.

구남매의 아버지는 전라남도 고흥군 나로도에서 평생을 살았다. 단 한 번도 외지로 나간 적 없고 고흥군 면사무소에 다닌 것이 이력의 전부다. 막내아들은 아버지의 두꺼운 수첩을 하나 가져왔다. 단행본만한 합성피혁 다이어리에 본인의 사주, 조상들의 생몰년도, 제삿날부터 큰 딸의 결혼식 때 지출한 내역과 지난 30년간 자식들이 보내온 용돈과 방문기록까지 꼼꼼히 적혀 있었다. 경기도 남부에서 출발해 전라남도 고흥까지 달려갔다.

1980년대에 지었다는 집은 나로도 바닷가가 내려다보였다. 노인은 멋쩍게 웃으며 별 일도 아닌데 일을 크게 만들었다며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보였다. 노인은 1960년대부터 손바닥만 한 농협수첩에 매일 매일 일지를 적었다. 감상은 적었다. 그날 있었던 일을 또박또박 연필로 꼼꼼하게 적었다. 그날 무엇을 샀고 무엇을 팔았고, 몇 째가 서울에서 전화를 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연말이 되면 농협에 가서 수첩을 하나 구해오고 매일 밤 작은 소반을 놓고 앉아 그날의 일을 적은 것이 50여권이 넘었다. 두꺼운 클리어파일에는 신문스크랩, 자식들에 대한 서류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자료는 차고 넘쳤다. 손수 정리해 둔 비망록노트를 기반으로 구술을 받았다. 노인의 듬성듬성한 이야기는 글로 옮겨져 그대로 책이 되었고, 책 뒤편엔 손수 정리한 비망록을 그대로 스캔해서 실었다. 이 분은 스스로 자기 연대기를 표로 만들었는데, 본인의 삶과 지역사건, 국내 사건과 국외사건까지 같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왜 이렇게 기록을 하셨냐는 질문에 노인은 그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라며 웃었다.

구술을 시작할 때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초연하던 노인의 눈가가 붉어졌다.

“내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소. 그게 내 한인디, 뱃사람이 아닌디, 배를 하나 인수해서 그 배안에서 하룻녁 주무시던 중에 화물선인가 뭐인가가 충돌해가지고 침몰했지. 지금도 다들 옛날 사진은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어째 우리 아버지는 초상 하나도 없소. 아버지 인상이 어쩌코롬 생겼다 대충 이런 것으로 연상해서 만들수가 있다 하는디 이제 다 끝나버렸지 않소. 이제 끝나부럿어.”

나무처럼 한 곳에서 뿌리내리고 산 노인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서류 한 장 남아있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쓰는 연필로 이어갈 수 있을까.

“어째 초상하나 안 남기고.”라고 먼 산을 보던 노인의 선한 눈매가 가슴에 박혔다.

고흥에서 돌아와 시댁의 안방을 뒤적거렸다. 1988년부터의 가계부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매일의 기록을 넘겨보다 1995년 7월 손녀, 3.8, 출산 9시, 고대병원. 이라는 기록을 발견했다. 그 아래는 과일 4,000, 차기름 10,000, 과자 1,200, 소주 2,000이라는 그날의 소비가 적혀 있었다. 몇 권의 가계부를 뒤적거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의 가계부도 있어 꺼내보았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것은 이런 것이었다.

“8월 24일, 장남 가는 날, 어머니와 있다가 병상에 엄마 돈 두고 떠나감. 눈물을 흘리면서 갔다. 아버지 마음 몹시 아프다. 엄마의 가슴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기도.

8월 25일. 아내가 병원 퇴원. 은환엄마가 엄마 머리 감겨주고 둘째 집으로 가다.”

가계부는 곧 끝났다. 어머님의 기록은 아버님의 서툰 문장으로 이어져 나에게까지 남았다.

2015년 12월 14일 씀

 

 

저 새끼는 어떻게 살아있는거지?

1930년대생 어르신들을 만날 일이 생겼다.

오늘 처음 자리를 가졌고, 내 딴에는 그 분들께서 다채로운 이야기를 구성지게 펼쳐주시지 않으실까 기대도 했으나 기대일 뿐이었다. 할아버지들은 단답형으로 이야기가 끊어지기 일쑤고 가장 연세가 많으신 구순의 할머니는 한맺힌 이야기를 반복하셨다.

 

1930년대.

이 분들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일본제국은 곤고했다.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국가나 민족에 대한 의식이나 개념이 생기기 전에 일본이름이 주어졌다. 학교에 가면 일본어를 배웠으며 일본선생에게 일본노래를 배웠다. 불과 여섯 살, 일곱 살, 많아봐야 열 살인 아이들에게 왜 일본이름을 썼냐고 물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1930년대생, 그들의 부모들은 190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일제침략을 직접 목도한 세대일 것이다. 그들이 새파랗게 두 눈을 뜨고 국권이 침탈되는 과정을 지켜보았을 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갖지 못한 백성의 한 사람으로 나라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지, 내부가 얼마나 썩어들어갔는지 이미 다 체감하지 않았을까.

한 국가가 외세의 침략으로 무너지는 것은, 강력한 무력과 고도의 심리전이 같이 동반된다 하더라도, 어딘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분명히 존재했으리라. 물샐 틈이 없는 집구석에 도적이 들어오진 않으니. 어쩌면 일제시대의 개막을 환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점령을 환영한 자가 과연 친일이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 폭압과 차별에 대한 반감으로 어찌됬건 무엇이 됬건 “새로운 것”이 도래하길 기다리지 않았을까 말이다. 물론 친일의 문제는, 폭력을 인정하고 수긍하고 동조했다는 점이 크기에 비난받아 마땅하다.

국가와 민족을 생각해, 정치적으로 독립을 주창하고 굳게 맞서 싸웠어야 하는 것은 국가구조를 지켜내는 명목으로 녹을 먹는 자들이지, 논밭에서 뒹굴고 해지면 피곤해 곯아 떨어지는 백성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1930년대생.

이 분들은 자연스럽게 일본학교를 다니고, 국가와 민족의 사전적 정의를 알게 될 때쯤에 해방을 맞이 하게 된다. 그리고 신속하게 퍼져나가는 애국심과 민족주의의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1945년 8월에,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 것인가.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배웠던 일본어와 불과 20년이 안되는 세월동안 정겹게 써오던 두 개의 이름들, 그 중의 하나를 처참하게 밟아버리고 정들었던 일본인 선생과 이웃들이 (모든 일본인 개개인이 제국주의인 것은 아니므로) 있었다 한들 모두를 부정해야 하는 역동의 순간을 맞이했을 것이다. 매일 보고 다녔던 일장기를 불태우고 저들은 모두가 다 악마와 같은 것들이라고 한 순간에 세상이 뒤집혔을 때, 10대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태평성대에도 자기 정체성에 혼돈을 느끼던 순간,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한 개념이 한꺼번에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리고 해방과 동시에, 이들은 문맹이 된다.

배운 것은 일본어요, 썼다가 불이익을 당한 것은 조선어였으니, 그들이 조선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다시 돌아왔을 때 국가는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이리저리 흔들렸고, 곧 전쟁이 터져 피란을 가거나 숨어 지내거나 전쟁터에 나가거나 살아 있기 위한 시간을 지낸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을 무렵, 피폐해졌거나, 혹은 무기력해진 모습으로 다시 새로운 세상에서 잘 살아나가기 위해 부지런히 벌어, 먹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악착같이 조선말을 다시 익히고 갈고 닦고 학교로 돌아간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19세기, 20세기만 그랬던가, 그 때 동아시아만 그랬는가.

인간은 그저 큰 물결에 휩쓸려 흘러 흘러 떠내려 간다. 그 중에 누가 더 근력이 좋아 떠내려가는 통나무를 끌어안는지, 그 통나무 위에 떠내려가는 누구를 건져 올리는지, 어떤 사람은 떠내려 가는 돼지를 실어 올릴 수도 있고 거센 물살 속에서도 실속 차리는 인간은 분명히 존재하고 힘에 부쳐 물밑으로 가라앉는 자도 있다.

물길은 끝없이 흐르고 우리는 언제 헤엄을 치고 언제 고개를 들며 언제 숨을 쉴 것인가 결정하며 떠내려 간다. 죽어가는 생명을 외면할 것인가, 같이 죽기를 불사할 것인가 말이다.

소용돌이 치는 물결, 아래는 한 치도 예측할 수 없는 흙탕물속에서 끝없이 내몰리고 휘몰아치는 일. 그런 자아들이 모여, 타인은 과연 어떻게 생존해 나가는 지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누가 그런 얘기를 했었다.

한반도가 3면이 바다인데, 그 모든 바다를 포기하는 순간, 한반도의 모든 인간은 중앙만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고. 모두가 사대문안에 모여, 다른 놈은 어떻게 담을 타고 오르는가, 끊임없이 관찰해야 하는 것은, 누구도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으며, 어떤 집단도 정당한 제도를 만들어 번호표를 끊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다 알게 되는 정서의 출발.

그건 바로 “저새끼는 어떻게 아직도 안 죽고 살아있는거지?” 라는 끊임없는 생존의 위협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2013. 5. 20.

일본극우주의자들의 망언 및, 일베충 광주모독 때매 매우 속이 시끄러운 2013년 5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