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이후의 창동역

7시 30분, 지하철역 플랫폼에는 지하철이 도착하면 열릴 문 앞마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끼고 두 줄로 서 있었다. 모두들 서울로 가는 사람들일 거다. 이 지하철은 한강을 지나 강의 북쪽으로 가게 되어 있다. 열차가 도착했고, 나는 휴대폰 화면을 또릿하게 보고 있는 원피스 입은 아가씨 앞에 섰다. 지하철 안에서 누가 먼저 내릴 것인지 예측하고 싶었다. 내 모든“광복절 이후의 창동역” 계속 읽기

월요일엔 생애사쓰기

  바늘을 가지고 하는 짓이니 바늘질이라고 썼을 뿐이다. 않다, 에 왜 ㅎ이 붙는지도 이해할 수 없고, 돼와 되는 왜 꼭 그렇게 다른지. ㅋㅌㅍㅎ은 별로 발음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데, ㅋ이 붙으면 어렵다. 부억은 왜 부엌이라고 쓰는가, 갔다, 왔다, 했다에는 꼭 쌍 시옷인가. 나는 휴대폰을 열어 “한국인이 잘 헛갈리는 맞춤법”을 찾아 왠지, 웬지, 돼, 되, 않고,“월요일엔 생애사쓰기” 계속 읽기

여름이 낮아질 때 – 성수종합복지관 첫 수업 기록

– 선생님, 이제 우리 가르치려면 큰 일 났어요. – 아주 속이 터지실거예요. 어르신들이 킥킥대고 웃었다. – 아이고 선생님이 엄청 젊으네. 팀장이 지원서류와 저작권동의서를 묶은 종이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나는 빠르게 지원서류를 훑었다. 1931년생부터 1952년생까지, 무려 20년이나 차이나는 사람들이 “어르신”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노인 수업을 할 때마다 이런 것들이 꺼림칙하다. 베트남 참전용사가 자유총연맹을 가면 625참전용사들과 세대차이가 나서“여름이 낮아질 때 – 성수종합복지관 첫 수업 기록” 계속 읽기

우연은 어떻게 오는가

점심시간 내내 포켓몬을 잡다가 분식집에 들어가 건빵이와 충무김밥과 순두부찌개를 시켰다. “나 보광동 살 때 이런 분식점 순두부 자주 시켜먹었어.” 건빵이가 “나도”라고 말했다. 제일 만만하고 표준화된 맛. 냄새가 나거나 비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음식. 반찬이 허술해도 충분히 한 끼를 채울 수 있는 것. 나는 빈집에서 출근을 준비하다 순두부를 시켜 먹고 그릇을 지하방 알루미늄 새시 문 밖에“우연은 어떻게 오는가” 계속 읽기

노인들의 세상

동해 묵호에 가면 늘 들르는 화성곰치국. 아침7시부터 문을 여는 집이다. 도착하자마자 아침으로 곰치국을 먹으러 들어가려는데 문 앞에 발가락 양말을 신은 노인이 길에 걸어가는 노인 둘을 보고 이 집이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문을 막고 서는 건 기본. 나는 그 앞에 가만히 서서 노인의 양말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소리를 지르다 침을 흘렸다. 7시 반이었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단체 손님이“노인들의 세상” 계속 읽기

순대국과 숙대

점심시간이 지난 순대국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직원과 눈이 마주치면, 순대국 한 그릇을 외치고 자리에 앉는 법이다. 순대국이 나오기 전 반찬이 나왔다. 자동문이 열리네 안 열리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허리가 완전히 굽은 노인이 들어섰다. 계산대 근처 테이블에 앉은 노인에게 서빙하던 여자가 다가간다. “할머니 뭐 드려? 순대국 하나 포장? 똑같이?” 노인의 목소리는 멀지 않아도 안 들릴 것“순대국과 숙대” 계속 읽기

메리 크리스마스

두 아들이 뇌전증을 앓고 있는 백씨는, 오전 내내 터진 수도를 고쳤다. 집주인에게 연락을 해봤자 안 좋은 소리를 해댈게 뻔했다. 관리를 잘 못해서 그렇다느니, 날씨가 이렇게 추우면 알아서 수도관을 보온해야지 뭘 했느냐고 말할 사람이다. 날이 추워지자 집안은 온통 한기다. 다 큰 아이들의 옷은 무겁고 두껍다. 한 겨울에 쪼그려 앉아 다 장성한 아이들의 빨래를 하고 있으면 어떻게든“메리 크리스마스” 계속 읽기

마른 빵, 마른 잎 

이한열열사의 추모제가 열리는 시청 앞 광장에 노을이 내려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치환이 나와 거칠고 익숙한 목소리로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부르고 있었다.  시청 뒤 NPO센터에서 있을 행사에 가러 나온 길이었다.  행사 시작전인 센터 안은 꽤 무더웠다. 냉방이 필요했는데 아직 장치를 가동하지 않은 듯 했다. 북태평양에서 바람이 불어온다는 며칠, 바깥 바람이 상당히 시원했다.  베이스와 낮은 드럼“마른 빵, 마른 잎 “ 계속 읽기

지금도 개가 무섭다

순천에서 태어나 자랐다. 형제가 열 둘이었다. 열 두 형제 중에 유일한 딸이었다. 막내 남동생이 하나 있었고, 위로 오빠가 열이 있었다. 아버지는 소작농 관리를 했고 먹고 살만 했다. 1948년, 열 한 살이었다. 여순사건이 났다. 하늘에선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땅에선 군인들이 총을 들고 눈에 띄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인민군인지 국군인지 가늠하지도 못했다. 집에 논이 다섯 마지기가 있었다. 밭도“지금도 개가 무섭다” 계속 읽기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나 우리 아버지 얘기 할 거 있어.   (1936년생, 여, 전남 구례 출생)   우리 아버지는 서른 여덟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열 세 살 때 돌아가셨는데, 그때 내가 태어나기는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는데. 왜정때니까 아버지가 징용을 피해서 어릴 때니까 엄마한테 자세히 알아놓을 걸 안 들어놓은 게 한이 돼. 옛날엔 도라꾸(트럭)라 그랬어요. 인부들을 싣고 아버지가 객지로“우리 아버지?”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