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마트 휴업이 필요한 이유

1. 마트에 가야한다 하니 남편이 다녀와서 치킨을 시켜 달라 함.  (개 사료및 간식이 딱 떨어졌다. 집 앞과 근처 동물병원 역시 문을 닫았다) – 혼자 시켜먹을 줄 모름 – 나는 마음이 조급함

2. 주차장 만차, 게다가 몇몇 차주들의 야릇한 주차 – 스트레스 상승

3. 사람 많음. 혼잡 복잡 판매원들이 적극적 마케팅 – 피로도 상승
인구밀집도가 높아져 공기도 불쾌
매장이 크고 카트를 밀며 다니는 일에 육체적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허기짐까지 발생

4. 타인과의 장바구니 비교
– 내 카트가 꽉 차 있으면 돈 많이 나가는 일에 스트레스,
내 카트가 비어 있으면 상대적 빈곤감에 스트레스

5. 타인의 배우자에 대한 비교

박스자율포장대에서 혼자 포장을 하다가
포장하고 애 보고 하는 아빠들을 보며 급 분노 상승.
– 나는 왜 명절에도 “혼자” 5-60만원어치의 장을 봐야 하는가. 에 대한 뒷끝작렬 서러움 쓰나미
집에 다쳐서 누워있는 남편에 대한 분노 폭발
여기서 빨리 안 오냐고 전화오면 끝장나기 직전의 임계점 도달

6. 계산하며 남편카드로 결제 집에 있는 남편에게 SMS가 도착해
나의 현재 행동반경이 노출되는 것에 대한
사생활침해에 대한 불쾌감이 갑자기 급분노 상승
(분노에 분노가 덮혀 가속도를 밣기 시작)

7. 주차장에서 나오면서 김종배의 이털남을 들으며 주의를 분산시키려 하는데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 내용이 나와 사회적 분노로 승화

8. 마트 주차장 앞 “소비자는 대형마트 휴업을 반대합니다.” 라는 문구에 사회적 분노 추가

– 결국 집에 오는 길에 혼자 교동짬뽕에서 짜장면을 먹으며
혼자 왔기 때문에 짬뽕과 짜장을 동시에 맛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탄식 추가

9. 집 지하 주차장에서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박스 하나 장바구니 하나 혼자 들고 올라가는 것에 대한 분노를 넘어선 탈진과 인생무상에 대한 개엿같은 기분까지 추가.

결론.

주말마트는 국민건강에 매우 해로우므로
절대적으로 휴업하는 것이 옳음.

나꼼수를 생각한다.

최근들어 불거지는 나꼼수에 대한 이슈와,
그로 인해 분열이니 통일이니에 대한 얘기들과
생각을 주로 같이 하는 한 트친의 트윗을 보고 생각을 정리하려고 한다.

길게 수식하지 않고 최대한 간결하게 적겠다.

1. 나꼼수의 공적 인정. 

– 정치에 대한 관심, 주류언론에 대한 비판, 해적방송의 위대할 손 (위대할 수 있다), 애플본사에서 한국을 특별방문할 정도로 팟캐스트의 위상을 드높인 점.
(더불어 아이폰 판매도 증가했는가? – 김어준 왈 “씨발 그건 내 알바 아니고” 까지)
여러가지 진보진영에 대한 담론 증가.
이 모든 공적 인정.

슬로건 –
정치도 유쾌할 수 있다 – 전국민의 가벼운 정치로의 접근,
쫄지바 씨바 – 전국민의 상처받은 자존심 회복
정치가 생활의 스트레스다 – 전국민의 향햑열을 불태운 점 (가카와 같은 공적)

이 모두 인정. 

2. 나꼼수의 정체성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를 읽는 순간, 이 방송과 김어준의 목적과 정체성을 알 수 있다.
“노무현의 노제에서 소방차 뒤에 서 울며, 내 남은 시간은 내가 어떻게든 해볼께요.”
라고 했던 그의 결심, 여태 검은 넥타이를 메고 다니는 김어준의 행보,
오로지 가카만을 위한 방송을 통해 이미 드러나는 정체성.

– 이 방송은 노무현을 위한 진혼곡이다.
복수를 꿈꾸는 김어준, 그를 위한 방송을 준비하고 딴지일보와 본인 특유의 특성을 드러낸다.

– 이 방송은 “편들어주기”를 지향한다.
곽노현 교육감 사건 때 이미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김어준이 어떤 경로로 “편들어주기”로 정립했는지 나는 김어준이 아니라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무 편도 없어서 무참하게 개박살나고 망신당하고 결국 죽음에 이른 노무현을 보낸 사람으로 “편들어주기”로 누군가가 망신당하는 것이라도 막고 싶었던 것일게다.

나꼼수는 노무현을 편들어 주지 못한 자괴감에서 시작해
곽노현 편들기와 정봉주 편들기로 이어진다.

3,

유시민의 말대로 (그 사람이 거기 있었고 민중이 그를 발견한 것 – 이거 참 명언이다)
나꼼수가 거기 있었고 사람들이 찾아서 들었고 알아서 열광했고 모두들 편을 들어주었다.
모든 시스템은 정점을 찍으면 내려오게 되어 있다.
나꼼수의 곽노현 편들어주기에서 시작된 논란이 비키니 사건을 거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4.

나꼼수의 1회분은 BBK 관련이다.
이 때 주진우는 출연하지 않았고, 김용민은 말이 없었다.

나꼼수는 이 정권 전부를 까기 위한 방송이 절대 아니고
오직 가카만을 위한 방송이 맞다.
하다 보니 여기 저기서 요구가 들어와 몇 가지 손을 내민 적은 있으나
다시 KTX 민영화와 1026 부정선거 (혹은 선관위 디도스 사건)에 대해 집중하는 점을 보여준다.
이 방송은 가카가 폐기처분되면 같이 사라질 방송이다.

방송이 시작된 2011년,
김어준이 다 지난 (다 지났다고 그들이 주장하고 싶은!) BBK사건을 끄집어 내고 나와
BBK 저격수 중에 역사상 가장 경박하고 유쾌한 정치인인 정봉주와 함께 시작한 것.
여기 BBK 저격수로 활동했던 박영선이 영입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라.
– 재미가 없자나!

5.

일각에서 나꼼수가 한명숙 밀어주기를 한다는 얘기가 있다.
현 시점에서 가카에게 노무현에 대한 가장 큰 복수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한명숙이다.
정동영은 아니다.
나꼼수의 정체성은 약간 흐트러지긴 했으나 목표점은 하나다.
그건 변치 않은 듯 하다.

6.

방송의 한계다. 
모든 방송은 초반엔 시대와 대중을 끌다가 폭발적인 시민대중의 참여와 혓바닥에 의해 결국 대중에게 이끌려 가고 만다.
(이게 일종의 인간역학을 연구하는 인간들이 말하느 멱함수나 BURST 현상과도 어우러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7.

나꼼수는 이제 봉주 편들어주기에 집중하며
봉주와 대척점에 있는 가카에게 다시 집중한다.
그리하여 자기들로 인해 희생당했다고 “여겨질 수 있는” 정봉주를 위해 프로그램명도
“봉주 X회” 로 변경한다.

8.

가장 빠른 대선 레이스는 오세훈과 김어준의 합작품이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였고,
2011년 김어준의 “나는 꼼수다”가 시작하였다.
김어준은 가장 빠른 대선 레이스가 오세훈으로부터 촉발되었다. 라고 말하지만
나꼼수가 깔아놓은 자리에 오세훈이 불을 지른 것이다.
자리를 펴줬더니 춤을 추는 자가 있었던 것.

9.

왈가왈부 할 것도 없다.
나꼼수는 정봉주가 출옥할 때까지, 혹은 가카가 폐기될 때까지.
봉주 X회, 혹은 나는 꼼수다. 라는 목적을 가지고 오로지 가카만을 위해
오직 가카 한 분을 위한 방송을 계속 할 것이다.

이들의 자세도 이제 더 이상 “소설을 써봅니다.” 혹은 “라고 추정!” 이라고 하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꼼수는 복수와 승리를 거머쥘 대상을 찾을 것이고 오로지 가카에게 집중해야 할 시점에 도착했다.

10.

아무도 듣지 않아도 그만일 방송이었다.
그러나 알아서 찾아들은 방송이고 떠날 때도 말없이 떠나든가 말든가 상관없다.
나꼼수에게 무엇을 기대할 순 없다.
물론 기대하는 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기대해봤자 실망만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들은 수차례 방송에서 언급하듯이
다시 가카에게 집중. 하려고 늘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떠날 자는 떠나고,
함께 할 자는 함께 하면 된다.

그리고 떠날 때
그동안 고마웠다. 라고 한 마디 해주면 참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동안 고마웠다,
나는 이제 뉴스타파로, 이털남으로, 반민특위로, 희뉴스로, 저공비행으로, 등등등등.
으로 간다. 빠이.라고.

11.

나?
나는 계속 들을 것이다.
난 김어준을 오랫동안 좋아해왔고 편은 들어주지 못해도 매우 냉정하고 까칠한
친구같은 마음으로 그냥 같이 하고 싶으니까.

2012. 2. 26.

나꼼수를 까는 것도
옹호하는 것도
모두 개인의 자유다.
그로 인해 갑론을박이 이어져도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만 거시적으로 봐서는 긍정적이다.

비난하는 자를 비난하는 것도
옹호하는 자를 옹호하는 것도
모두 괜찮다.

다른 의견을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하여 세상이 다양해져야 우리 뿐 아닌 인류가 가진 전체주의공포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극뽀옥!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복수 : .죽는 거 보다 더 힘든게… 살던 세상 바꾸는 일이예요. …죽는건 세상을 버리면 되지만, …살던 곳 바꾸는 건, …세상을 바꾸는 일이니까…

경 : (얼굴을 닦아주며 미소) 복수씨, 위대해요. …세상을 바꿨으니까…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천상천하유아독존에 대해서 불교에서 뭐라고 말하는지 
찾아보면 바로 나오는 일이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오로지 나만이 존귀하다. 라는 말은, 
모두가 각자의 세상을 갖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하여, 내 세상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타인의 세상을 침범하지 말 것이며, 
두 사람간의 갈등은 하나의 우주와 또 다른 우주의 충돌이겠구나. 
라고 혼자. 씨부려 본다. 
2012. 2. 24. 

감당할 만 하니까.

가끔 이 구절이 생각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 

카톨릭 성경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버전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 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주십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하던 말도 생각난다.
“다 능력이 되니까 그런 일도 생기는거예요.”
“다 감당할 만 하니까 해내시는거예요.”

그래서 간만에 성경을 들춰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고린도후서) 4장 16-18절. 

매우 고무적이고 희망적인 말이다.
가벼운 환난이라는 말이 맘에 들지는 않지만, 아무튼 종교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고 감안했을 때. 뭐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는 말일 것이라 판단한다.

그리고 가만히
술 취한 남편이 들고 오는 길에 한 번 자빠진 듯한 형상을 한
비싸 보이는 회를 씹으며 생각하였다.


감당하지 못할 일들만 이어졌으면,
이미 보따리 싸서 인연이 없는 곳으로 피신하였거나,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겠지.
견딜만 하고 감당할 만 하니까
아직도 산 채로 오밤중에 깨어난 아들과 “돼지코 공룡 임피의 모험”을 보면서,
이 집에서 회를 먹고 있는거구나..

라고.

할 만 하니까 이러고 살고 있는거다.
정말 못 견딜 일이었으면 이미 이 세상 사람도 아니었을 거다.
살만 하니까 살아있는거다.
그저 간혹가다 귀찮을 뿐이다.

2012. 2. 24.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오늘 집에 회를 먹을 사람이 나밖에 없는데도
백퍼 이건 정말 나먹으라고 회를 사들고 꾸역꾸역 걸어오다가 몇 번 자빠진 게 뻔한 채로
널부러져서 감당도 안되게 자고 있는 남편이라는 사람은,
간혹 감당할 일이 없으면 의식의 고리를 끊어버리기 위해
위장의 보호를 포기하고 뇌의 시냅스를 살짝 끊는 방법인 폭음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이다.

다 왕년에 해봤던 짓이다.

_ 대인의 풍모

무거운 시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괴로운 마음을 안다. 
그건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것도 안다.
죽음을 통해 뭔가 다른 것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것도 안다. 
죽고 싶다라는 말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내 세상을 바꾸고 싶다. 라는 절절한 호소였다는 것도 
아주 뒤늦게 알았다. 
무거운 시간들이 흘러간다. 
눈이 녹아가고 있는데 봄이 와도 화려하지 못할까 두렵다.
지리멸렬하다는 단어가 가슴에 맺힌다.
인연도 사랑도 모두가 업보다
지은 것이 많아 풀어야 할 것이 많다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사는 모습들이 애당초 이런 것이라는 것
그저 조금 더 쉽게 가고 싶어서 
울고 불고 안달했다는 것을
이제 안다
그저 걸으면 될 일이다
해는 뜨고 달이 진다
내가 걷는 동안 
내가 엎드려 쉬는 동안
시간은 가고 아이들을 자란다
겨울나무는 소리없이 자라고
봄나무는 요란하게 노래할 뿐
그저 걸으면 될 일이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고 
묵묵히 걸으면 될 일이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때로는 고개를 쳐들고
그 날 그 날 
그저, 가야 할 곳을 잊지 말고 
걸으면 될 일이다 
2012. 2. 14. 

이틀

이틀이 지났다.
점과 점이 이어져 선이 되듯
시간이 이어져 하루가 되는데,
모든 것이 뚝.뚝. 끊겨 있다.

자고 일어나면 꿈이었나
의심하는 순간 이미 알고 있다
꿈이길 바라는 마음을

똑똑
노크한다

부른다
엄마 – 라고.

전화기를 본다

없다 아무도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보안경비를 건다

밤은 가고
나는 잔다
너도 잘 것이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밤.

나는 안다

그 어딘가에
헤메는 우리의 두 손과
더듬는 우리의 두 발을

머쓱한 그 자리의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의 젖은 물들.

2012. 2. 10.

ER

여기는 모두가 살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다.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붙잡기 위해, 공포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매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위해 오는 곳이다.

살기 위해 오는 사람들 가운데
죽기를 원했다가 다시 살기를 원해 오는 생명이 있다.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 같은 노인이 끊임없이 말하기 위해 노력한다.
언제나 지나간 것은 미련스럽고
딱 한 번만이라고 말한 순간은 이미
늦은 때이다.

주춤하고 서 있는 골목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휘파람 불며 걷고 싶다.
너도 그러길 바란다.

2012. 2. 7.

아주 사소한 것들의 이유

서른이 넘도록 각자의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완벽한 이방인이다.
외국인과 결혼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이유는, 이 사람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니 어느 정도 나와 비슷하겠거니 하는 착각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외국인과의 결혼은 이 사람은 나와 완전히 다른 문화의 사람이라는 것을 대전제로 깔고 시작하는 반면, 같은 국적과 같은 언어, 혹은 게다가 동향의 사람일 경우 나와 같으리라는 엄청난 착각을 대전제로 깔고 시작한다.

법륜스님의 말씀대로 부부는,
큰 일로 절대 싸우지 않는다.
말하자면 큰 일이 벌어졌을 경우, 그 어떤 집단과도 동일하게 내부에서 엄청난 단결력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위기 상태에 빠지거나, 집안의 어떤 불우한 일이 발생했을 경우 외부의 침략으로 간주하고 전투적으로 뭉치게 되어 있다.
이는 아주 소규모집단인 가족에서도 일반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집단의 규칙이다.

아주 작은 일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나와 같으리라는 착각”에서 시작된다. – 이 역시 법륜스님이 하신 말씀.

쓰레기통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쓰레기통을 화장실에 두지 않는 문화에서 나고 자랐다.
나의 모친은 재래식 화장실에서 벗어난 이후 절대 화장실에 쓰레기통을 두지 않았다.
불결하다는 게 그 주된 이유였으며, 수세식 화장실에서는 모든 휴지가 다 녹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녹지 않는 특별한 재질의 물품을 쓰지 않는 이상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리하여 나는 화장실에 쓰레기통을 두고 사는 것을 불결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독립을 해서 혼자 살 때도 절대 화장실에 쓰레기통을 두지 않았다. 쓰레기통은 외려 화장실의 바깥 좀 가까운 곳에 두고 그 곳에 가지고 나와 물건을 버렸다. 예를 들어 생리대나, 수채구멍에 쌓인 머리카락 같은 것들이 해당된다. 이것은 관습이 된다. 그리고 엄마의 주장은 대부분 자식들에게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고착된다.

반면,
남편은 화장실에 쓰레기통을 두고 사는 문화에서 나고 자랐다.
그리하여 독립을 하고서도 화장실에 쓰레기통을 꼭 두었다.
그 이유는 수세식 변기라 할지라도 변기의 크기나 형태에 따라 간혹 변기가 막히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뒷처리에 사용된 휴지는 반드시 따로 분리를 해서 버려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화장실에서는 절대로 변에 관련된 종이만 발생되지 않는다. 머리카락이나, 어떠한 물품을 뜯은 포장들이나 물기가 묻은 것들을 다른 쓰레기통에 버릴 때 오히려 벌레가 생기거나 집안 전체가 불결해질 수 있다. 그리하여 남편의 본가는 여전히 화장실에 쓰레기통이 있고 가사일에 늘 부지런하신 시어머니께서 수시로 화장실의 쓰레기통을 닦고 말리는 일을 해오셨다.

결혼을 하고 난 뒤 나는 화장실에 휴지통을 두지 않았다.
내가 그런 문화에서 나고 자랐고 아무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쓰레기통이 없는 화장실에서 당황했다.

여기서 문제는 내가 과연 나의 문화가 합당하기 때문에 그 주장을 관철하려고 하는 것이 진정성이 있는가다.
기실, 주부의 자리에 있던 엄마나, 그 자리를 이어받은 나도, 결정적으로, 화장실에 있는 쓰레기통을 비우고 싶지 않다는 게 합리적 논거보다도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내 가족이라도, 내 새끼라도 쉽게 말해 “똥닦은 휴지”를 내 손으로 치우는 일이 싫다는 것이다.
희생이라고 생각하거나 쓸데없는 집안일을 더 만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모두 “하기 싫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여러가지 합리화의 근거들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화장실에 쓰레기통이 있거나 없거나 당황하거나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편은 화장실에 쓰레기통이 없으면 매우 당황하고 불편해한다.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 남편은 있어야 한다면, 둘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엔 있는 게 맞다.

여기서 내가 나의 진정한 마음의 욕구 “똥 닦은 휴지를 내가 치우고 그 냄새나는 쓰레기통을 내가 닦고 씻고 말려야 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관철했다면-
우리 부부은 매우 추접스럽고 민망한 소재인
“화장실에서 똥닦은 휴지를 왜 수세식 변기에 버리지 않고 별도의 쓰레기통에 따로 보관하느냐” 에 대해서 24시간 이상을 싸웠을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들의 이유는 이러하다.
대부분, 내가 옳다고 주장하고 싶기 때문이고, 그 마음의 근간엔,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 상반되는 작업을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아주 견고하게 굳어버린 자아의 욕구가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뿌리를 걷어내는 작업은 평생에 걸쳐 지난하게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결혼 이후 내가 곧 화장실에 쓰레기통을 비치하는 것으로 별 갈등없이 마무리되었지만 그 외에도 각종 매우 사사로운 것들로 끊임없이 갈등하게 되는 것이 동거인들 사이의 문제다)

왜 안되는가,
왜 용납하고 싶지 않은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 중에 어떤 것은 나의 욕구와 상관없이 나의 양심이나 신념에 기반하는 것들도 있고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철저히 나의 욕구에 기초하는 것들도 있다. 이런 것들을 분별해 내는 과정은 쉽지 않으나, 내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들이 된다.

2012. 1. 19.

기억의 지배

1.

어제 트윗에 쓴 글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4학년때인가 5학년때인가 왕따를 당한 적이 있는데 폭력 이런 건 아니고 집단 따돌림. 갑자기 성적이 오른 걸 애들이 내 요점정리 쪽지를 보고 컨닝을 했다며 근 6개월간 나를 괴롭혔다. 결국은 애들의 강요로 담임에게 거짓자백도 했지.

봄에 봤던 시험을 가지고 가을이 깊어갈 때까지 나를 괴롭혔는데 내 등에 욕쓴 쪽지 붙이고 깔깔대고 뭐 그랬다. 나중엔 애들이 하도 몰아세우니까 나도 내가 컨닝을 했다고 착각을 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는데. 아직도 동갑내기 여자에 대한 포비아가 있다.



정확히 언제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 5학년때가 맞는 거 같다. 
4학년때는 담임과 관계가 정말 좋지 않았고, 그 담임선생은, 촌지를 요구하는 김옥자라는 선생이었는데 긴 파마머리에 잠자리 안경을 썼었다. 
당시의 일을 떠올렸을 때 내가 허위 자백을 한 것이 김옥자 선생이 아니라 중간에 병가로 자리를 비웠다 다시 복귀한 허재영 선생님이었으니 5학년때가 맞을 것이다. 


아무튼 사건은 위와 같이 벌어졌고 몇달이 지나 담임에게 허위자백을 했고 교실 밖에는 아이들이 나를 지키고 있었다. 그 때 주도를 했던 아이가 오윤숙이라는 아이였다. 머리가 유난히 노랗고 매우 날카롭게 생긴, 그런 인상의 아이였다. 

결정적인 이유는 오윤숙과 내가 성적으로 엎치락 뒤치락 하는 사이였는데 
나는 전교에 소문난 이혼녀의 딸이었고 – 당시 전교에 알려진 이혼가정은 단 둘 – 가정형편도 그닥 넉넉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스카우트를 하거나 여러가지 눈에 띄는 짓들을 했으니 그 아이 눈에 내가 가시같았을 지도 모른다. 

4학년때 우등상을 촌지때문에 받지 못해 매우 억울해 하며 하루종일 울었고 
엄마가 종업식날 학교를 찾아가 소고기 한 근을 갖다 주며 (당시는 이런 촌지도 가능하던 무려 80년대)
우등상을 주지 않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엿을 먹인 사건이 있었다. 

다음 해 (내가 5학년이 되던해에) 동생이 입학을 했는데 담임이 김옥자 선생으로 배정이 된 것. 
교실 뒤에 서 있는 엄마와 눈이 마주친 선생이 놀랐다는 전언을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입학 두번째 날에 동생이 반이 바뀌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1학년 6반으로 배정받았던 아이가 2반으로 변경된 것. 
이게 선생의 농간인지 아니면 학사처리의 실수이거나 일괄적으로 몇 몇 아이들을 이동시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확인 한 바가 없으므로.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나는 기필코 촌지를 건네지 않더라도 1점차로 우등상을 밀리는 일이 절대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열두살의 굳건한 다짐으로 (풉;) 새벽부터 일어나 공부를 하는 기염을 토했고, 4학년 전체 성적 91점에서 98점으로 빅 점프를 한 것인데. (그 몇 점에 목숨거는 아이였다 내가) 그게 사달이 된 것이다. 

2. 

쓰다가 생각이 난 건데 
중학교 2학년 때 교회를 같이 다니던 친구들 몇 명, 유진, 수정, 혜영 뭐 이런 아이들 사이에서 남녀관계가 엮여서..
에..그러니까 유진이가 흠모하던 오빠랑 나랑 연애질을 시작한.. 그게 발화점이 된 것인데. 
사실 나는 정군을 좋아했었는데 (아 한 참 그럴 때 아닌가. 다들 양해해주시길) 정군이랑 잘 안되다가 윤군의 고백을 받고 윤군에게 틀어버린 것인데 유진이가 좋아하던 윤군을 그러니까 내가 빼앗아갔다..는 .. 
중2만의 논리에 밀려 몹쓸년이 되어버렸다. 
(너는 고백도 하지 않았잖아 응? 이라고 하기엔 사실 뭐 되게 애매모호한 점이 있다.)

아무튼 그리하여 이 문제도 근 일년간의 따돌림으로 이어졌는데 
교회 근처 골목에서 상당히 심한 욕설등을 당한 기억이 있다. 
그게 수차례 이어졌고 아이들이 그간에 쌓인 나에 대한 불만도 겹쳐서 (사실 당시에 내가 뭐 상당히 인격적이었다거나 선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중 2의 패거리 문화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버렸다. 나는 그 간극을 신앙에 집중하고 (컥) 학교에서 맡고 있던 학생회 간부 활동에 집중하고 (컥컥) 공부는 하지 않았으나 연애에도 집중했다. (환장) 

그러니까 나는 두 번의 따돌림을 겪었던 것인데 
경미하다고 생각이 되는 것은 반전체나 전교생에게 낙인이 찍힌 것보다는 
내가 어울리던 패거리에서 떨궈져 나간 것이라 다른 아이들도 남아 있었고 나에게 할 일도 늘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공부에 몰빵 한다거나 중학교 때는 다른 활동에 몰빵 했다. 
이 아이들과는 졸업식 즈음에 다시 화해를 했는데 역시나 나는 매우 기가 죽은 상태였고 
내가 학생회장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 얼만큼의 영향이 있었던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해보았으나 그건 알 수 없다. 
그런 수준의 아이들은 아니었던 거 같다. 
이 아이들과는 주로 유재하나 봄여름가을겨울의 이야기를 많이 나누던, 그런 친구들이었다. 


3. 

문제는 동갑내기 아이들과 두 번의 마찰을 빚은 후
나는 75년생 여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때 가정내 우환으로 학교를 1년 쉬고 76년생들과 학교를 다녔는데 그 때는 아이들과 고딩에게 하늘같은 1년의 차이를 극복하고 참 잘 지냈다. 
그리고 졸업후 75년생들과는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동기들이 모두 76년생이었으므로. 
친구들의 연령대가 77까지 내려가는 일도 펼쳐졌으나 잦은 이사와 이직, 결국 유학까지 가면서 여러가지 연결고리들이 사라져버렸고 지금 내가 연락을 하고 종종 만나는 75년도생 친구들은 초등학교 동창 남자 아이들(이젠 아이들이 아니지만) 두명 정도와 고등학교 동기는 아니지만 입학 때 같은 반이었던 동갑내기 3명이다. 

기실 나란 사람이 사회성이 상당히 좋고 사람을 잘 사귀고 여기저기 커넥터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발이 넓은 편인데 주변에 75년생이 이렇게 없다는 건 약간 의아할 정도이다. 

생각해보니 예전에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동갑내기 친구들과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함께 무리지어 몇 번 만났는데 상당한 피로감을 느껴 친한 친구에게 다른 아이들을 만나는 게 좀 어렵다고 고백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75년생 여자, 라든가 동갑이라든가 하는 얘기를 들으면 뒤로 주춤. 하게 되었던 기억이 분명히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최근 집단따돌림으로 인해 지적장애를 입었다는 어느 여학생의 사연을 듣고 나서 떠오른거다. 





4.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 

성폭행 피해자는 뉴스에서 성폭행에 대한 뉴스가 대대적으로 보도될 때 2차 3차의 정신적 상해를 입는다고 한다. 
나 역시 기억도 잘 하지 못하던, 그러니까 가슴속에 막 새겨놓고 곱씹고 그러던 일이 아닌, 
내 무의식, 잠재의식 저기 어느 구석방에 처박아놨던 기억과 상처와 난감했던 그 공기가 갑자기 터져 나온 것인데, 다행히도 2차 상해를 입을 정도는 아니다. 그건 당시에 별로 힘들지 않아서가 아니고, 지금 내가 많이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느 책에서 
양쪽 성의 부모중에 편향적으로 관계가 좋지 않았던 성별의 부모와의 유착관계가 성장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는 설을 들었다.  예를 들자면 양쪽 부모 중 특별히 엄마와 관계가 극단적으로 나빴던 영유아기를 지내면 성장을 해서도 여성들과 잘 지내지 못하거나 엄마 또래의 여성들을 대하기 어려워진다는 말인데, 이건 익숙함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할머니와 지냈던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할머니를 친근하게 여긴다. 
어려서 단 한 명의 노인도 만나보지 못하고 자란 아이가 세상의 모든 노인을 어색하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나는 아이들과 내 동생과 나의 인간관계의 폭을 보면서 우리의 기억나지 않는 영유아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한다. 

특정한 패턴이 사람마다 발견되는 것은 있다. 
내 경우는 연상의 남자들이 연상의 여자들보다 편하고 연하의 남자들보단 연하의 여성들이 편하다. 
그건 아마 내 기억속에 각인된 상처나 여러가지 경험들로 인해 스스로 방어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런 부류의 사람들이 나를 공격해왔다. 그러므로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다는 자체 방어 시스템이 가동되는 것이다. 

5. 

문제는 이러한 기억들이 제대로 박혀있는가도 있으나 오인되고 조작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1차 따돌림을 당했던 초등학교때의 그 컨닝사건은 내가 허위자백을 하면서 정말 내가 컨닝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혼란에 빠져 상당히 괴로움을 겪었다. 

성장과정에서 부모의 갈등으로 인한 한 사람의 상처받은 마음으로 인해 조작된 기억이 주입되고 세뇌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게 서른 여덟이나 된 지금에 와서도 작용을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은 그것으로 인해 나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나와 갈등을 빚었거나 나의 기억을 조작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 기억이 나의 인생의 어떤 장애물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부분이다. 


현대 철학자 중 한 사람이자 철학적 해석학의 창시자인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객관주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개인의 선입견이 오히려 세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선입견이란 이해하는 사람, 즉 해석자에게 축적된 모든 정신적 자산 일체 (관습, 지식, 경험 등을 통해 생성된)를  뜻하며, 이러한 선입견이 ‘현재의 견해’로 작용하면서 이해를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이 정신적 자산이 없는 한 그 어떤 이해과정도 작동할 수가 없게 된다. 결국 선입견에 의해 이루어진 이해의 과정들은 인식의 근본적인 지평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주목할 또 다른 점은 바로 선입견, 즉 대상을 보는 현재의 관점을 ‘열린구조’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가다머는 선입견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개방되어 있고 변화한다고 말한다. (중략) 결과적으로는 뻔한 말일지 몰라도 선입견이라는, 경계해야 하는 가치를 정신적 자산으로 해석하고 열린 구조를 통해 이에 대한 오류를 방지하는 가다머의 해석.. 

선입견은 그 자체가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선입견이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닫힌 구조’로 인해 위험해지는 것이었다.  

– 선입견을 허하라  / 김선미 씀 
디자인 문화잡지 “지콜론 57호” 2011년 12월분 중에서 발췌  

그리하여, 
나는 내가 가진 선입견이 얼마나 닫힌 구조로 나를 봉쇄했는지 고찰해 보는 것이다. 
이 깨달음이 나에게 내가 가진 선입견을 다시 열린 문으로 밀어낼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짐작해 볼만한 것이다. 

얼마전 인생이 통채로 조작당한 느낌이 들었을 때, 내가 했던 생각도 이런 것이다. 
그 조작된 기억들이 나를 얼마나 방해해왔는가, 그런 이유로 내가 저질렀던 실수들은 무엇이며, 결국 지금의 나는 얼마나 또 내 삶의 바리케이트를 치고 스스로를 좀 먹고 있는 요소가 있는가 꼼꼼히 점검할 것. 

결론은 어쨌거나 지나온 나의 모든 아픔도 내 인생을 구성해 온 요소들이며, 그로 인해 형성된 지금의 나라는 인간 역시 과거에 대해선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선입견들이 꼭 내 인생을 방해해왔다고 규정짓기도 애매한 것이다. 

내가 꼭, 굳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때 과연 내가 더 행복해졌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흔하게 내가 하는 이 말은 과거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와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은 움직이는 동물이고 사람의 뇌는 끊임없이 분할하므로, 나의 사고가 달라진 하루 하루의 시점에서 나는 매일 매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구난방 한 입으로 여러말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건 日新又日新에 해당되는, 인격도야, 혹은 불교적 철학에 닿아있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성인군자가 나치가 되진 않지만, 성인군자도 어떤 경험이 의식으로 들어와 장애가 되기 시작하면서 나치가 될 수도 있는 일이므로. 

6. 

최근들어 일어나는 일련의 학교폭력 사건의 노출 (난 이것을 언론 노출이라고 본다. 여태 없었던 일들이 갑자기 터지는 것이 아니라 늘 있었던 일들이 최근에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한 것 뿐이다)과 고문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급작스럽게 사망한 故 김근태 의장을 생각한다. 

고문으로 인해 혹자들은 자기들이 정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채 허위자백을 하고 이후 살아남기 위해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조작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이 우파나 보수의 호위무사라고 생각하며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르고도 그런 기억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가슴속 어느 어두운 곳에 처박아 둔 조작된 기억들과 

전두환을 비롯한 몇 명의 독재자들을 열심히 보필하고 독재자의 딸을 대권주자로 추대하려는 사람들의 왜곡된 기억과 

새마을 운동이 사실상 농촌을 황폐화 시킨 박정희 독재정권의 매우 파렴치한 임기응변적 대책이었다는 것에 대해서 꼼꼼히 살펴보지 못하고 흰쌀밥 먹게 해준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안스러운 구호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위원장님께서 돌아가셨다” 며 통곡을 하는 북한의 주민들과 

역사를 지우고 또 어린 아이들에게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심어주려는 위정자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당시엔 친일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자기 합리화를 위한 스스로 조작한 기억과 가치관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7. 

기억은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그 기억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 기억을 끄집어 내어 다시 펼쳐서 하나씩 따져보고 다시 잘 접어 마음속에 다시 넣어두는 것도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이 작업은 매우 지난하고 고통스러워서 자기 자신이 명료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는 정신상태가 유지될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합리화를 하고 변명을 하고 그런 일은 기억하고 싶지 않다며 기억을 해내지 않으면 깊은 나락으로 빠지는 것은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을 돌이켜보고 조금 더 숭고한 인간미에 접근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믿는다. 

사람으로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사실상 사람으로 인한 기억에 의해 베어진다. 
그 기억을 꺼내서 다시 접어낼 수 있는 힘이 그들과 함께 하길 바란다. 
기억은 분명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조작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감정은 쉽게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기억들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린다면, 
그 기억들이 아픈 기억이 아니었길 바라는 욕망을 버린다면, 
조금은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 

기억들은 기억으로 잔존한다. 
인정하고 보내주는 것. 나뭇잎 배에 글자를 적어 흘려 보내듯이, 유리병에 편지를 적어 먼 곳으로 떠나보내 듯이 기억으로 베어진 상처들을 모두 다 고이 접어 보낼 수 있길 빈다. 

2012.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