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활어시장, 나의 비겁

통영 중앙시장이 활어가 싸다길래 가봤다. 중앙시장은 활어시장과 붙어 있는데 항구의 출입구와 바로 맞닿은 곳은 통영활어시장이고 바로 옆에 중앙시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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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장 앞 통영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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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컨텐츠로 밀어부치는 느낌. 활어시장 입구

통영활어시장은 위치로 봐서는 그야말로 항구에서 막 잡아온 활어를 받아다 팔 수 있을 것이다. 항구 바로 앞에 주차장이 있고 4차선 도로 앞에 활어시장이 있다.

통영활어시장만큼 싼 곳이 없다길래 회를 먹으러 갔다.

시장 한 가운데 쪼그려 앉은 아지매들이 소쿠리에 각종 바닷고기를 놓고 흥정을 한다. 감성돔, 민어, 점성어, 도다리, 능어, 송어, 제철에 올라오는 온갖 고기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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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쪽과 안쪽 가격이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생선을 잘 아는 사람이 흥정을 잘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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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을 고르고 흥정을 마치면 아지매들이 잽싸게 회를 뜨기 시작한다. 생선을 도마에 놓고 칼로 정확하게 뼈를 발라낸 뒤 껍질과 살점 사이에 칼을 집어넣어 살살 밀다가 손으로 생선 껍데기를 확 벗겨낸다. 비늘을 다듬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다. 껍질과 내장, 뼈를 다 발라낸 생선은 소쿠리에 다시 넣어 물에 헹군다. 아지매마다 수도꼭지를 하나씩 가지고 있고 콸콸 물이 나온다. 모두들 어부바지와 장화를 신고 있다. 목욕탕의자만큼 작은 의자에 앉은 아지매가 허리를 펴지 못하고 구부정한 상태로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앉으며 회써는 도마를 초벌손질 도마 위에 올린다. 포장비닐 안에 들어있는 흰 수건 위에 손질을 마친 생선을 올려 물기를 꽉꽉 짜낸다. 오로지 악력으로 물기를 짠다. 다시 살점을 꺼내 흰 도마위에 얹고 먹기 좋게 회를 썰어준다. 배바지는 배바지대로, 세꼬시는 세꼬시대로. 흰색 스티로폼 도시락에 대나무포장재를 얹은 위에 횟감을 썩썩 얹는다. 매운탕을 먹을거냐고 묻고 먹을 거라 하면 뼈는 다른 흰 비닐봉투에 얹어준다. 흰 비닐에 각각 도시락을 담고 검은 봉투에 한 번 더 담아주면 아지매의 역할은 끝난다.

 

우리가 감성돔 한 마리에 도다리 세 마리를 삼만원 주고 사서 회를 썰고 있는 사이, 비어 있던 옆자리의 주인이 나타났다. 분명히 통영 사투리인데 이야기가 심상치 않다.

“니 어데 갔다왔노? 고기를 이래 놓고 몇 시간을 안 나타나면 우짜노? 오다가 뭔 일 났는지 알았다.”우리 회를 써는 아지매가 옆 자리 여자를 보고 말한다. 옆 자리에 나타난 여자는 야구모자를 쓰고 안경을 쓴 젊은 여자다. 시장에서 제일 젊은 여자로 보였다.

“아가 아파가지고예. 캄뽀디아에 전화를 했는데예. 전화가 안되지 뭡니까. 아 그래가지고예. 전화를 계속 하고 머 이래 이래 하다가, 연락이 안 되가꼬.” 여자가 하는 말을 나는 못 알아듣겠는데 부산 출신 동행은 들으며 웃고 있고, 앞자리 옆자리 아지매들은 빠른 사투리로 지청구를 했다. 앞자리에서 해산물을 팔던 아지매가 고개를 숙이며 중얼댔다.

“안 오니까는 걱정을 했지. 뭐 사고라도 났는가 싶어가.”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동행을 바라보자 캄보디아 사람인데 애가 아파서 고향에 전화한다고 자리를 비웠다고 해준다. 다시 여자를 보니 이목구비가 좀 달라보인다. 사투리는 제대로였다.

횟감을 들고 시장을 둘러치고 있는 초장집으로 들어간다. 초장집은 1인당 4천원 정도의 상차림비용을 받는다. 음료수와 술값은 별도고, 매운탕은 10,000원을 받는다.

 

초장집 아지매의 말씨가 구성지고 맛깔난다. 원래 장어구이도 하는 집인데 노인네들이 와서 장어값이 비싸네 어쩌네 한다고 짜증이 잔뜩 올랐다.

“할배요. 그거 그리 돈 생각하고 먹으면 다 맛이 없는깁니다. 그냥 먹을 때는 맛있게 자셔야지. 그렇게 비싸네 어쩌네 돈 생각할 거 같으면 딴 데 가이소 마.”

전채음식이 하나도 없어서 해산물이 좀 먹고 싶다 했더니 동행이 1만원을 들고 나가 해삼멍게개불을 사왔다. 해삼은 주로 딱딱해서 잘 못 먹었는데 여기만큼은 오독오독 잘 씹히고 고소했다. 굴은 소량으로 안 판다 해서 맛을 못 봤다.

저쪽 끝에 수도권에서 온 듯한 커플이 앉아 초장집 아지매에게 이런 저런 걸 물었다.

“고등어회가 어디 어디가 맛있다던데, 거기 아세요?”

“어데?”

“ㅇㅇ이라고..”

“거기가 맛나다하요?”

“블로그 봤는데요. 인터넷에 올라온거요.”

아지매가 걸레로 바닥을 훔치며 낮지 않은 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 집이 맛나다해요? 대체 누가 그런 걸 올린대요? 난 그것이 참말로 궁금하네.”

“어머 아주머니 표정이 안 좋으셔요. 맛 없는집이예요?” 여자가 웃었다.

“마, 가보이소. 가봐야 알제. 뭐든지 다 자기가 묵어봐야 이게 맛나나 안 맛나나 확인이 되제. 가보이쏘. 가보고 댓글 달아보소.”

커플이 가면 안되겠다고 속닥거린다.

여자가 계속 아지매에게 맛집을 물었다.

“시락국은 거가 아이고, 거 말고, 그 대로변에 큰 집이 있어. 거 말고 그 안에 들어가면 쪼만한 데가 있어요. 거가 제대로지. 그 아지매가 서울아지맨가 그래. 그 집 간판? 그 집 간판 없을걸. 간판 못 봤는데? 여보, 당신 그 집 간판 봐쓰요? 못 봤제? 응. 그 집 간판 없다. 없을기다. 낸 본 기억이 없어. 원조는 무슨, 여기 뭐 죄다 원조지 그래 따지면. 60년이고 50년이고, 우리도 여기 24년 됬쓰요. 그럼 뭐 우리도 원조지. 방송 나온 집? 방송 다 나왔쓰. 돈 내고 방송 나오라케. 우리도 아니 초장집도 돈 내고 방송 나오라카대. 안 나간다캤어. 뭔 초장집에서 돈 내고 방송엘 나가. 그 시락국은 일찍 닫아. 새벽 4시에 열고 9시에 닫아. 거가 원래 뱃사람들 먹는 데지. 외지 사람들 먹는 데가 아니예요.

충무김밥은, 명가가 좋다. 거가 재료를 좋은 거 써. 밥이나 김은 다 똑같애. 그 무침 있자나. 반찬. 오징어 이런 걸 존 거 쓴다. 거가 좋고. 꿀빵은 원래 꿀봉이가 원조다. 갸가 그거 하고 나서 돈 좀 번다카니 여기 저기서 따라해가 톳빵이고 뭐고 난리다. 아주.

다찌집? 다찌집은 다 거기서 거기지. 근데 외지사람들이 둘이 가면 사실 다찌집에서 별로 안 좋아해. 그게 왜그냐하믄, 통영 사람들이 술을 엄청 마셔요. 서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그만큼 못 마셔. 한 상에 4만원 이래 하면, 술을 추가해야 돈이 된다고. 술에다가 안주가 기본으로 나가자나. 술 한 병에 만원 받는데 안주가 새로 나간다고. 근데 둘이 가서 술하고 안주를 먹어봤자 얼마나 먹겠노. 그 집은 술이 계속 나가야 돈이 된다 말이다. 근데 둘이 가서 두 병 마시고 한 상 받으면 그 다 먹지도 몬한다. 여러 명 가서 여러 병 먹어야 좋아하지.

아 택시? 멀다캤는데 가깝드라꼬? 통영사람들이 승질이 급해가 다 그러고 다녀요. 걸어가도 되는데 그걸 못 기다리는기라. 버스도 다른 도시보다 정거장 사이가 짧아. 근데도 그걸 못 참아. 택시 탄다꼬. 버스 정거장 하나 거리가 문 열고 닫는 시간인기라. 승질이 엄청 급해.”

아지매의 말을 들으며 낄낄대느라 불편했던 마음이 모두 사그라들었다. 나는 휴대폰을 열어 아지매가 말하는 식당의 간판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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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피랑 올라가는 길. 다음을 기약하며 패스.

통영에서 그렇게 회를 먹고 동피랑 마을 아래 커피집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집으로 가려고 운전대를 잡았다. 회를 써는 아지매들을 보며 눈물이 나더라고 내가 말했다. 동행은 생선이 불쌍해서 울었냐 할매가 불쌍해서 울었냐고 물었다.

그게 아니라. 그 삶에 대해서, 내가 너무 비겁하게 사는 거 같아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수십년을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채, 여름엔 더워서 물것이 상할까봐. 겨울엔 추워서 손에 감각을 잃은 채로. 하루종을 물에서 생선을 건지고 또 썰어대던 손목. 그 앞에서 문학이니 예술이니, 모두가 나발이다.

부끄러웠다. 내 삶이. 이렇게 살아도 되나. 선 채로 나불대며 입으로나 떠들고, 앉아서는 모니터 앞에 앉아 헛된 주장들만 쏟아내는 이 따위 삶은 얼마나 비겁한가.

바다와 싸우고 매일 사람과 실갱이 하는 삶을 구경하며, 이따위로 살아도 되나.

뭔가를 하고 있다지만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추상적인 일상 아닌가.

통영은 그랬다. 싸게 회를 먹겠다고 간 도시에서. 나는 한없이 비겁하고 무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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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통영을 두고 오다

2018년 3월 13일.

거제, 해금강마을

거제에 가면 봐야 할 것이 해금강과 바람의 언덕이라고 한다. 바람의 언덕은 개인 사유지인데 얼마 전에 너무 지저분해져서 소유자가 개방을 재고하겠다는 소식이 있었다. 주말이 되면 도로가 꽉 막힐 정도로 관광객이 몰린단다.

거제 와현해수욕장 부근에서 1박을 하고 해금강쪽으로 차를 돌렸다. 구비구비 산길이 해변으로 이어져 있다. 운전자는 볼 수 없지만 동행자는 좋은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

해금강은 바다의 금강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멋진 바위섬이 이어져 있는데 바위섬과 바위섬 사이로 여객선이 다니며 이 경치를 자랑한다. 여객선은 몇 가지 코스가 있었는데 내가 간 날은 2시간 30분짜리 외도 왕복 코스밖에 없어서 유람선 타는 것은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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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강일대는 해금강마을이라 불리고 숙박시설과 횟집이 상당히 많지만.

거제 물가가 그렇다 하니 섣불리 뭘 먹으러 들어갈 수는 없다.

해금강 호텔은 영업을 중단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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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횟집 아주머니들이 점심을 먹고 가라고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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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만 바라보며 갯바위에 앉아 책을 읽다가 가져간 숄을 뒤집어 쓰고 낮잠을 잤다.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지만 아직 여름만큼은 아니다. 낚시를 하러 온 사람들을 갯바위로 실어나르는 낚싯배만이 오고 갔다. 날씨는 좋았고, 군데 군데 동백꽃이 떨어져 있었다.

아. 거제의 해변 곳곳엔, 화장실이 깨끗하다. 그거 하나는 좋다.

2018년 3월 13일

거제 낚시 (2018,3)

거제는 나의 동행이 한때 일하던 곳이다.

그는 조선소에서 배의 가장 밑바닥에서 뚜껑을 덮은 채 일을 했고, 쉬는 날이면 낚싯대를 메고 아무데나 가서 낚싯대를 바다에 던지고 서 있다 돌아오곤 했다. 바다만 보면 그저 마음이 좋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낚시는 거대한 배의 부품처럼 느껴지는 일상을 위로해주는 성취감이 있었을거다. 운칠기삼. 낚시꾼들은 어복(漁福)이라고 말한다. 물고기가 와서 물어주거나 안 물어주거나. 그건 모두 운에 달렸다고. 낚시꾼들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 자신을 놓아두고 약간의 노력을 가할 뿐이다. 행운이 오거나 오지 않거나에 대해 낙담하지 않는다. 매일 사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거제 장승포에는 작은 어판장이 있고 트럭이 오갔다. 대규모의 경매는 없는 것 같았으나 냉동창고에서 네모낳게 각이 잡힌 채 얼어버린 생선이 목조파레트 위에 올라가 냉장차에 실렸다. 새벽 운전을 한 탓에 장승포항에 차를 대고 잠시 졸았다.

동행은 너댓시간을 기다린 끝에 봄도다리 한 마리를 건졌다.

봄에는 작은 도다리가 올라온다. 바다에서 잡은 도다리에, 들에서 캔 쑥을 넣고 국을 끓인다. 제주부터 거제, 통영에 이르기까지, “봄도다리쑥국 개시”라는 글자가 여기 저기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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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경의 장승포앞바다

오가는 사람들이 낚시 포인트를 알려주었지만 관절염환자인 나를 동행으로 둔 그는 갯바위에 오르는 일이 자유롭지 않다. 멀리 동행을 앉혀두고 낚시를 가지 않는다. 개의치 말라고 해도 낚시의 목적은 자연산 물고기를 낚아올려 나를 먹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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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포항 앞바다 (배가 드나들지만 생활낚시꾼이 많다) 오후가 되자 바닷색이 바뀌었다.

별다른 소득이 없자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지새포라는 항구로 이동했더니 시에서 만든 공영주차장과 긴 방파제가 있다. 낚시꾼들을 위해 만든 자리 같았다. 완만한 테트라포트나 다리 위에서 낚시를 던지는 이들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빨간 양동이를 들고 나와 고도리를 계속 낚아 올렸다. 낚시를 하려면 물의 깊이를 알아야 한다. 어느 물고기가 어떤 높이에 사는지 짐작하는 것이다. 기계식 장비를 사용하면 정확한 수심을 파악할 수도 있지만 싼 게 아니고 그렇게 전투적으로 고기를 낚을 것도 아니라 취미로 하는 이들은 수심을 재는 측정기까지 쓰지 않는다. 어디에 있을지 모를 고기를 잡겠다고 어림짐작으로 낚시의 길이를 조정하는 일. 마치 사람의 마음을 가늠하는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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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새포 공영주차장

미세먼지는 남쪽 끝 거제까지 가득했다.

그래도 바다는 파랬다. 바다가 편한 이유는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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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앞에 방파제를 끼고 이런 다리가 있다. 낚시꾼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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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잡던 고도리 (고등어 새끼)

거제의 물가는 놀라웠다. 거제에 몇 번 다녀왔지만 매번 숙소에서 끼니를 때웠는데 이번엔 외식을 두 번 했다.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장승포의 대구탕은 13,000원이었고, 양이 푸짐한 것도 아닌 묵은지 고등어찜은 1인분에 15,000원이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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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0원짜리 대구고니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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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0원짜리 고등어묵은지조림

비수기라 숙소는 할인이 많았다. 데일리호텔 앱에서 보기만 하고 전화를 해서 따로 계산을 했다. 숙소를 오가는 고양이들이 삼겹살을 얻어먹으러 나타났다. 서열대로 고기를 나눠먹은 아이들은 배를 채우고 이내 사라졌다. 숙소는 여태 여행 중에 묵은 것 중 제일 만족스러웠다. 비수기라 50% 할인이었는데 성수기엔 작은 방이 12만원쯤 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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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도여행펜션의 고양이 삼대장. 앞부터 서열이 높다. 맨 앞놈이 먹고 남은 것을 두번째 놈이 먹고 두번째 놈이 먹다 남은 것을 마지막 놈이 먹었다.

노동자들이 채운 도시에 서울의 두배쯤 되는 외식물가라. 거제에서 싼 것은 휘발유값 뿐이라더니. 아름다운 섬이었던 이 도시를 망친 건 오직 자본인가 자본에 기댄 인간인가.

거대자본이 들어와 망가지는 사회는 얼마나 많은가. 그게 비단 거제의 문제일까.

2018년 3월 12일

거제, DSME 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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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 40분.
대우조선해양 남문 앞 미니스톱.
로또는 6시 조금 지난 시간부터 판다.
작업복의 남자들이 한 둘씩 편의점에 들어와 각자의 하루를 책임질 물건을 사간다. 담배, 딸기 우유 하나, 숙취 해소 음료 하나, 일주일을 책임질 로또 같은 것들.

– 삼년 전에 성과급 좋을 때 이 동네 여자들은 싸우나 끊어 다니고 그랬죠. 이제는 성과급 없다고 봐야 돼요. 이제는 뭐 그냥, 아끼는 거 말고 뭐 하겠습니까.

– 여 조선소는 잘 될 수가 없심더. 우리 일할 때요, 볼트 너트가 없어가지고 다음 배 작업장 가서 몰래 훔쳐다 하고 그랬심더. 그게 왜 그랬겠어요. 중간에 누가 해처먹고 누가 잃어버리고 그런 거 책임을 안 지는 깁니다. 직영은 일 안 하고 놀지요. 하청에 하청은 책임감 없지요. 그냥 일당만 받아가면 되는데 누가 열심히 합니까. 열심히 한다고 누가 알아줍니까 일당이 올라갑니까. 구조 자체가 그래요. 여기는 아무도 책임 안 집니다. 수주 받으면 뭐 합니까. 수주 받는다고 돈 버는 게 아니라예. 오히려 그게 더 손핸데 일부러 싸게 수주 받아오면 뭐 합니까. 부품 모잘라가 결국에 마지막 배는 못 만들 상황이예요.

– 조선소 일 힘들지요. 우리 아는 동생은 여 와서 하루 교육 받고 그냥 갔습니다. 원래 갸가 편한 일만 하던 아다 보이, 못 하겠답디다. 또 다른 동생 하나도 이틀 일하고 가뿔데요. 일 힘들지요.

– 우리 남편도 어려서 배운 게 없어가, 그냥 억지로 억지로 다닙니다. 지금도 하기 싫어 죽을라 해요. 근데, 그만두라 소리는 못하고…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대화를 못 들은 척 하다가 들은 척 하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이럴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어쩌다 저기에, 거기에, 없었을까. 나는 어쩌다 지금 여기에 있을까.

사람들은 먼 산의 긴 노을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신호가 바뀌어도 뛰지 않았다. 사람이 덜 지나갔는데도 차들은 날카로운 경적을 울리며 씽씽 달렸다.

그 많던 조선소 노동자들은 모두 어디에 갔을까.

18.03.12.

 

 

거제 (2017, 5)

거제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6시였다.


멀리서 남해의 태양이 노오랗게 떠오르고 있었다.


동해의 일출이 붉은 색을 많이 띈 주황이라면 이 곳의 태양은 노란빛이 절반이상을 휘감고 있었다.


거제엔 조선소가 있다.


대형 선박을 만드는 대우조선해양부터 삼성중공업을 비롯해 크고 작은 중공업 공장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거대한 섬의 삶을 책임진다.


입구부터 휘발유 값이 안양보다 싼 게 눈에 띄였다. 거제도는 절대 물가가 싸지도 않고 음식이 맛있지도 않다고 했다. 내내 격한 노동으로 하루 하루를 꾸려가는 사람들이 양질의 음식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음식이 맛없는 도시는 뜨내기들이 많은 도시일수록 더하다. 토박이가 오래 사는 곳에는 맛없는 식당이 살아남기 힘들다. 역전 앞 식당이 찐 밥으로 스텐공기를 채우고 조미료가 가득한 텁텁한 찌개를 내어놓고도 아무 꺼리낌 없는 것과 다름없다.


식당 밥이라는 건 다시 올 사람에게만 친절하다. 관계가 형성되어야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 다시 볼 일 없는 이에게 정성스러운 밥을 내어주는 일을 흔치 않는, 어쩌면 숭고하기까지 한 일인 것이다.


음식에 대해 타박한 적 없는 이들도 거제에 와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보면 이렇게도 음식이 맛없을 수 있나 생각하게 된다고 들은 적 있다. 지역의 음식맛이라는 건 개개인의 편차겠지만 하루에 10시간 이상 쇳덩어리와 사투를 벌이는 이들이 “맛없다”고 하는 것을 믿지 않기 힘들다.


노란 해가 다 떠오르고 유달리 맑을 거라는 하루가 시작되자 작업복을 입는 사내들이 한 둘씩 거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토요일이지만 오늘은 일하는 날이라 한다.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은 주로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 직원들이다. ㅇㅇ 인력이라고 써 있는 버스들이 작업복 차림의 사내들을 태워가기도 했으며 안전화를 신은 남자가 다가와 서는 승용차에 올라타기도 했다. 아웃소싱업체라는 인력공급회사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실어나른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쉬는 날도 딱히 정해진 바가 없으며 잔업과 야근을 계속 이어간다. 조선소는 24시간 불빛이 꺼지지 않는 곳이라 한다. 이 섬에서는 낮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성인 남자들은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고 했다. 모두가 일하는 도시, 모두가 노동으로 하루를 일궈나가는 도시다.


육지의 끄트머리에 배의 밑바닥 판을 깔고 그 위에 하나씩 조각을 이어붙이는 작업, 거대한 배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다. 갑판이 만들어지기 전, 배의 바닥을 건조하는 작업엔 불빛도 없는 막장과 같다고 한다. 헤드라이트에 의존해 머리통도 들어가지 않는 좁은 공간에 선과 관을 끼워넣는 작업들을 이 곳에 모인 사내들이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배들이, 그 배들의 출항을 돕는 거대한 기계들이 바다를 점령하고 있다. 낮은 갯벌처럼 보이는 잔잔한 바다위에 드문드문 제 영역을 지키고 섰는 기계들은 마치 골리앗의 무기같다. 작은 다윗들은 골리앗의 무기에 올라타 작은 망치를 들고 무엇을 이겨내고 있는가.


오늘 하루를, 지나간 시간의 회한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노동의 섬. 골목마다 들어찬 깔끔한 건물과 마당이 넓은 아름다운 개인주택들이 이만큼 잘 살고 있지 않냐고 속삭이는 듯 하다.


시내에는 둘 셋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젊은 여자들이 눈에 많이 띄였다. 그만큼 먹고 살만 하고 키울 만 하다는 얘기인가, 이 도시는 대기업 조선소의 추락으로 예전같지 않다는데 그래도 여전히 활기가 있었다. 나머지가 없는 노동의 도시 같달까.


거제에서 2차선 다리를 건너 칠천도를 들어선다. 연초면에서부터 대나무 군락이 꽤 많아 산 빛깔이 다채롭다. 온통 초록인 숲속에 연두빛 대나무가 시원하다. 산 위에 색종이 한 장씩을 덮은듯이 손바닥 하나로 꾹, 또 하나의 손바닥으로 꾹 누른듯 환하다. 대나무가 있으면 잡귀가 없다던가. 대나무는 잡귀를 쫓고 복을 부른다하며 설날 새벽엔 문 밖에서 대나무를 태워 잡귀를 쫓고 복을 불렀다는 유래를 읽는다. 알게 뭐람. 처음 듣는 얘기지만, 거친 바다를 앞세워 살아가는 터전에 잡귀를 쫓는 대나무가 많은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만큼의 안정을 주는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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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도는 조선조에 검은 소와 붉은 말을 키우는 곳이었는데 그 검은 소가 옻색깔과 같고 일곱개의 하천이 있다고 하여 漆川이라 불렀는데 일제강점기에 지명을 약자로 축약해버리며 七川으로 변형되었다고 추정한다. 근래 들어 가장 맑은 하늘에 북풍이 적당히 불어 그늘은 쌀쌀하고 양달은 뜨거웠다.


칠천도에 들어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10분 못 미쳐 물안마을에 닿는다. 대나무 군락이 산을 덮고 있는 작은 산 아래 30여가구의 지붕이 알록달록하다. 파란 하늘과 더 파란 바다를 안고 물안항이라는 아주 작은 포구에 작은 고깃배 열 척 정도가 기다리고 있다가 아침 7시부터 드문드문 출항을 시작했다.


방파제를 걷는 아이에게 배에 오른 어부가 닻줄을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는 생전 처음 보는 닻줄을 풀어 어부의 배로 던졌다. 네가 뭍에 있고 내가 물에 있으니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협조. 사람들은 대부분 저렇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


묶인 줄을 풀어주고, 묶어야 할 배를 잡아주고, 물을 건널 때 손을 잡아주고 배에서 내릴 때 배가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는, 그 사람과 딱히 어떤 인연이 없더라도, 그저 옆에, 한 번쯤 스쳐간다는 이유로,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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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마을의 물안항 방파제 앞산에는 시들어 떨어진 아카시아가 지천이다. 꽥꽥거리는 새소리가 요란해 올려다보니 왜가리인지 백로인지 무지한 나는 모를 날 것들이 나무 위에 잔뜩 올라붙어 있다. 아침 8시를 넘기며 새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새들도 어디로 출근을 하는건가. 해가 뜬 후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섭리인가.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줄어들자 내가 당황스럽다.


해변에 가족단위, 모임 단위 사람들이 방파제까지 다가와 하늘아래 천국이 있다면 이런 모양이겠다며 신이 나서 떠들고 갔다. 등대주변에서 돗자리를 깔고 자다 깨어 책을 읽다가 바다를 보다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일행을 한 번 내려다보고 등대 아래 그늘 아래 앉았다가 햇빛에 앉았다가를 반복했다.


저녁나절이 되자 동네가 소란스러워진다. 민박을 통채로 빌려 오는 객들이다. 20여명이 넘는 중년의 남녀가 노래방 기계를 켜놓고 밤늦게까지 노래를 부르고 이리 저리 건배사가 마을에 넘친다. 이 동네는 작은 방은 별로 없고 민박도 독채로 쓰거나 단체 여행객들이 많다고 한다. 두 군데 민박에서 자리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붉은 지붕을 얹은 펜션의 방 하나를 잡았다. 적지 않은 평수에 일행과 함께 들 수 있게 생겼다. 칠천도 밖에 있는 마트에서 삼겹살과 반찬거리, 햇반을 사다가 소주에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상을 치우고 남자들은 낚시를 하러 다시 방파제로 나갔다. 먼 바다를 바라보고 앉았는데 펜션 주인 여자가 올라와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하라고 인사를 한다.


아들이 몇 살이냐 물어 5학년이라 하니 주인여자도 5학년 아들이 있다며 내 아이 칭찬을 한다.
“아이고 그렇지도 않아요.” 라는 건 애엄마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의 시작이다. 펜션 주인의 남편은 조선소에 다닌다. 딸 둘에 막내아들이 하나 있는데 여자가 펜션을 지키느라 아이들은 주로 친정언니네 맡긴다. 아이를 데리고 오면 좋은데 아이들이 여간해서 따라다니지 않는다. 요즘 아이들은 어찌나 자기 주장이 강한지 답답할 뿐이다. 큰 아이가 중학생이라 여기서 학교를 보내기가 어려워 아이들은 모두 육지에 있다. 숙박업이라는 게 남들 놀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 쉬는 업종이라 쉽지 않다. 배를 한 척 구했으면 좋겠는데 차로 치면 폐차직전에 있는 배 한 척도 기천만원이 넘어가 엄두를 못 낸다. 일행이 방파제에 잡히지도 않는 고기를 잡겠다고 내려가 있다니 믹스커피라도 타 가서 대접해야겠다고 웃는다. 이모도 내려오세요. 나에게 그녀가 말했다.


나는 동네에 몰려든 관광객들이 방파제에서 떠드는 모습을 보며 뭉개고 앉았다가 슬슬 바닷가로 나갔다. 오늘은 달 때문에 만조라 물이 잔뜩 들어찼다. 밤이 되면서 물이 엄청 높아졌다. 인근 마산지역은 만조로 인한 피해가 예상된다고 계속 재난 문자가 왔다. 잠깐 떴다 사라진 커다란 초승달은 태양보다 붉은 빛이었다. 펜션 주인 여자가 나눠준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고맙게 마시며 물이 들어차서 걸어놓은 낚싯대가 떠내려 갈 뻔 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여자는 빈 쟁반을 들고 그녀를 따라나온 남편이 여자의 어깨에 팔을 걸고 펜션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봤다.
바닷가에 앉아 물에 떠밀려온 쓰레기를 본다. 철썩대는 파도소리가 들린다. 바다가 있고 산이 있어 좋다는 일행의 옆에 앉아 바흐의 1043번을 틀었다.


새벽까지 시끄럽던 민박들은 아침에도 노랫소리가 이어졌다. 새벽 4시부터 수탉이 울어대고 산에서 새들이 계속 시끄럽게 날았다. 해가 뜰 때쯤 숭어와 뽈낙을 잡았다고 전갈이 왔다. 낚시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생각이 없었고 살아있는 생명을 잡아내는 일에 대새 적잖은 불안감이 있는데, 저녁에도 삼겹살을 먹은 주제에 생명 운운 할 일은 아닌 듯 하다. 작은 치어들은 바늘을 빼서 놓아주고, 바늘을 삼겨버린 도다리는 바늘을 잘 제거해 바다로 되돌려 보내기도 한다.
낚시를 하는 자들의 뒷모습은 돌아오지 않을 인연을 기다리는 그림자같다. 언제가 되어도 절대 내 것이 되지 않을 바다에서 한줌 희망을 낚는 이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바라보는 심정은 누구나 엇비슷하다.


해가 뜨고 하루가 또 시작된다.
칠천도의 해안도로를 달리는 버스 한 대가 지나가고 마을 어귀에 있던 잘 생긴 말을 타고 누군가 해안도로를 달린다. 일군의 자전거 부대가 도로를 내려오고 까마귀와 물새들이 이리저리 하늘을 나는 사이, 동네 터줏대감같은 고양이들이 밭 사이를 어슬렁거린다. 사투리가 진한 마을 이장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마을에 내려앉고 숙소 뒤편 집은 아침부터 밭고랑을 경운기로 뒤집었다. 새벽에 숭어와 뽈낙을 잡은 일행은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 방파제로 내려갔다. 나는 드물게 오가는 차를 바라보며 도시에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오늘 이 곳을 오래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간만에 이렇게 매일 행복했으면 좋겠다던 너의 그을린 음성을 떠올린다.


숙소에 앉아 방파제를 바라본다. 내가 미처 돌아보지 않은 사이 누군가는 또 출항을 했다. 항구에 매어져 있던 배가 몇 척 뿐이다. 아이와 함께 물안마을을 살짝 돌아가는 섬의 해안도로를 달린다. 엎개, 라는 이름의 작은 해수욕장엔 철 이른 피서객들이 모여들고 있다. 여기도, 아이들이 많다. 미취학 연령의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모습을 몇 년만에 보는지 모르겠다. 오래 전 신림동 난곡을 재개발 한 아파트에 살 적에 이렇게 아이들이 많았다. 그곳은 학교에 가기 전 아이들을 데리고 사는 젊은 부부들이 밀집해 살기 적절한 조건이었는데 젊은 부부와 한 둘의 아이들이 가족을 이뤘다면 이 곳에 잔뜩 보따리를 싸 짊어 지고 오는 부부들은 둘을 걸리고 하나는 업거나 안고 있는 일이 많았다. 어젯밤 펜션 주인이 이 동네는 기본이 애 셋, 이라는 얘기를 해줬던 게 생각났고 더불어, 신림동에서 들었던 불쾌했던 어느 노인의 언사가 생각났다. “없는 동네에 애새끼만 많다.” 그 노인은 저출생 문제로 나라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지금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없는 동네엔, 애들도 없다.


조선소의 삶을 모르는 내가 거제는 살만한 동네라 아이들이 많다고 말할 순 없다. 그저 이것은 어떠한 현상일 뿐. 밥벌이를 하는 자의 수입이 보장되어 있고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도시라면 어디든지 아이들이 늘어날테고, 서울 인근 수도권에서는 한 아이를 두 명의 성인이 키우는 일도 버거운 것이 틀림없을 뿐. 아무튼 엎개 해수욕장엔 아주 작은 아이들이 춥지도 않은 지 물가에 들어가 고무튜브를 타거나 모래밭에서 성을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돌보다가 자기네 자리로 돌아가 어른들만의 이야기를 했다. 넓은 그늘막을 치고 간이의자를 펴고 앉은 몇 명의 무리들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여유있게 바라봤다. 이 곳의 삶을 아는 사람들은 주말이 되면 딱히 별다르게 할 게 없고 집은 갑갑하고 아이들이 있으니 야외로 놀러나오는 것 뿐이라고 했다. 주말에 딱히 할 게 뭐가 있겠나. 안 그래도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는 한국사람들은 주말이 되면 “딱히 할 일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게 마땅하다.


아침을 먹고 난 뒤 커피를 마시지 않아 어금니 하나가 빠진 기분이다. 엎개해수욕장까지 오는 길에 봤던 “도로시” 까페가 전방에 있다는 입간판을 떠올리고 차에 올라 한참을 달렸다. 3km정도 되었을까. 해안도로 언덕 두어개를 넘어가니 작은 포구와 인가가 보인다. 십여명의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에 도로시라는 분홍색 글씨의 돌출간판이 보였다. 짧은 커트머리를 하고 세련된 인상을 가진 젊은 여자가 방금 들어온 일대의 무리에게 내어주기 위해 팥빙수 위에 콩가루를 올리고 있었다. 아메리카노가 되느냐고 물으니 방금 넉 잔 주문이 들어와 잠시만 기다려달라 부탁한다.
커피집 야외 테이블에 자리잡은 무리에도 아이들이 너댓 정도, 그 부모들이 두 커플인지 세 커플인지 눈여겨 보지 않았다. 아무튼 커피집 사장은 분주하게 에스프레소를 내려 아메리카노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구석 탁자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몇 권의 문학 계간지를 본다. 까페 주인은 문학을 가까이 두는 사람이겠다. 포스에 달라붙은 고양이 인형을 보고 사진을 찍고선 아메리카노 몇 잔을 받아 종이 캐리어에 담았다. 섬에서 유일한 까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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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같아선 어디가 되었든 그냥 좀 주저앉아 멍 때리고 싶지만 나는 여기 와서도 할 일이 많다. 커피를 낚시하는 일행에게 가져다 주었고 아이가 혼자 놀고 있어 다시 해수욕장으로 돌아가 아이를 쳐다보며 책을 펼쳤지만 이내 졸음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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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서 가장 적절한 행동은 자는 거다. 뜨거운 햇살이 절반쯤만 비치는 곳에 자리를 잡고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자리에 아무렇게나 눕는 일. 아이를 바라보다 김금희의 소설을 읽다가 바람이 불어와 벤치에 누워 깜빡 잠이 들었는데 전화가 왔다. 펜션의 짐을 정리해야 한다. 이방인의 그 해변도 이러했을까. 햇빛도 바람도 적당했을텐데, 아마 그 해변엔 아무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노는 아이들도, 아이를 부르는 어미의 목소리도.


그늘막에 펼쳐놓은 텐트를 접고 섬 여기저기에 펼쳐놓은 우리의 흔적들을 치운다. 결국 쓰레기는 남기고 떠난다. 아껴둔 비닐봉투를 꺼내 1박 2일간 머무르며 외주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임을 증명한다. 봉투와 봉투, 플라스틱과 비닐로 이루어진 온갖 것들을 쓰레기하적장에 버린다. 쓰레기 하적장 옆엔 작은 개집이 있다. 밤과 아침나절엔 사라졌다가 낮에는 혼자 하루종일 줄에 매여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작은 개 한마리. 아침엔 집에 없던 아이. 어딜 갔다왔냐고 물을 수도 없다. 눈이 마주치면 마음이 무겁다. 주인이 누군지, 왜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지, 오가는 관광객의 아이들이 너에게 몹쓸 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아무 것도 묻고 싶지 않다.


물새가 날아드는 해변과 아득한 마을을 바다에 두고 우리는 다시 도시로 나간다.
조선소의 정규직들이 쉬는 날, 거제에선 뭐 사먹는 거 아니라는 말을 들으며,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골리앗과 골리앗과 또 다른 골리앗들을 뒤로 한 채, 내가 사는 도시보다 조금 싼 휘발유를 가득 채우고 통영은 세상에 없다는 듯이 모른 척 하고 지나간다.
새로 닦인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타고 꾸역꾸역 도시로 도시로, 또 다시 일터로 힘껏 애써 벌어 먹고 살다가 또 다시 찾아와 죽어도 내 것이 되지 않을 바다 앞에 앉아 웃고 울어보겠노라고. 지리산에 걸린 해가 한참동안 나를 간지럽혔다.


2017년 5월

묵호항 (2017.5)

 

묵호항은 꽤 큰 항구로 보인다. 묵호항으로 네비게이션을 찍으면 여객터미널이자 배가 드나드는 진짜 항구로 들어선다. 울릉도로 가는 여객선을 타는 터미널과 여객터미널이 분리되어 있다. 묵호등대는 상징물이 되어 그 주변에 등대오름길과 수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묵호항 수변공원에서는 방파제가 이어져 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내항이라고 부르는 곳에 바다쪽으로 다리를 놓았다. 파란색 금속펜스를 두른 전망대에는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낚싯대를 던진다.
주인아저씨를 따라 나온 강아지가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바다를 들여다 보다가 뒷걸음질 쳤다. 엄마 아빠를 따라 나온 어린아이는 종이박스 안에 호일로 감싼 치킨을 먹으며 등대며 배의 불빛을 바라봤다. 오는 7월 묵호항엔 야시장이 열린다. 청년 판매자를 모집한다는 현수막이 있었다. 묵호항을 바라보는 언덕빼기엔 작은 마을이 있는데 논골마을이라며 벽화도 그리고 산책로를 조성해 놓은 모양이다.
근처 동해항은 물류가 오가는지 인적이 드문데 비해 묵호항은 사람이 많다. 묵호역에서 묵호항으로 들어가는 길엔 건어물 도매상과 묵호시장, 횟집이 늘어서 있다. 묵호항부터 시작된 해안도로는 망상해변까지 이어지는데 해안도로를 따라 숙박업소와 식당, 까페가 끊이지 않고 늘어서 있다.
묵호항에서 가면 인근 회센터에서 저녁을 먹는데 횟값이 싼 편은 아니다. 묵호항 주변의 회센터는 모두 비슷한 쌈장을 주는데 생선뼈를 삭혀 막장에 담근 것으로 보이고 생와사비를 주는 집이 없었다. 반찬에 꼭 찹쌀떡을 두어개 주는데 달달하다. 서빙하는 이들이 딱히 정감가지 않아 자세히 물어본 적은 없다.
아침에는 늘 화성곰치국에 가서 곰치국을 먹었다. 이 곳의 주인은 늘 밖에 서서 곰치가 가득찬 수조앞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투명한 수조에 들은 커다란 곰치에 관심을 보이면 곰치에 대해서 마구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곰치는 심해에 살아서 홍게나 새우 등 사람 몸에 좋은 것만 먹고 산다며, 그러니 이 곰치가 얼마나 영양가가 있겠냐는 논리다. 곰치는 살이 흐물흐물하고 생긴 게 못나 사람들이 잘 먹지 않았던 생선인데 부산 부근에서 신김치국에 곰치를 넣기 시작해 곰치국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묵호항 주변에는 곰치국 하는 곳이 가장 많다.
화성 곰치국 옆에는 4월에 새로 문을 연 마젠타라는 커피집이 있다. 인근에서 눈에 띄게 예쁜데 벽면은 사이언 색깔이고 간판은 마젠타다. 인쇄나 디자인을 한 사람들은 CMYK 색상표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집은 8시 조금 넘어 문을 여는데 커피 맛도 괜찮은 편이고 젊은 커플이 운영한다. 몇 번을 마주치자 스쿠버다이빙을 해서 12kg짜리 문어를 잡아 동네 잔치를 한 얘기며 미역철이라 물에 들어가지 않고 바닷가에 다가온 것만 건져 말려도 맛있다는 얘기를 한다. 마젠타는 민박도 겸하고 있는데 평일엔 13만원, 주말엔 18만원으로 주변 민박에 비해 한참 비싼 가격이다.
인근엔 민박과 펜션이 많은데 민박은 비수기 평일 2만원, 주말 5만원 선이고 펜션이라 간판을 걸었어도 민박과 비슷한 구조면 가격대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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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 떡하니 자리잡은 동해비취호텔과 꿈의궁전호텔은 손님이 늘 많은지 친절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꿈의궁전호텔 안에는 해수사우나가 있는데 목욕탕 안에서 바다가 보이긴 하지만 습기로 유리창이 뿌얘서 딱히 경관을 즐기기 어렵고 시설은 동네 오래된 목욕탕 정도다.
북쪽으로 해안도로를 타고 걸어 올라갈 정도 거리에 어달항이 있는데 어달항은 낚시를 하기 좋다고 조성해놓은 곳이다. 대한민국에 낚시꾼들이 그리 많은 줄 최근에 처음 알았다.
대진항을 지나 망상해수욕장까지 올라가면 오토캠핑장이 있어 북적인다. 봄이 되면서부터 카라반을 빌리는 사람과 캠핑장에 텐트를 치는 가족들이 많다. 망상해수욕장까지 철길이 이어져 있다. 해안철도는 옥계에서 내륙으로 조금 들어갔다가 바로 정동진으로 향한다. 해안철도는 남으로는 삼척역까지 이어져있다.
토요일 저녁 묵호항 인근엔 중년의 관광객들이 가득하다. 열 명 남짓한 남녀가 어울려 회에 술을 마시며 소란스럽게 떠든다. 깔깔대는 중년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사는 게 별 거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횟집에서는 너무 소란스러워 우리 주변에 앉은 내 또래 여자가 정중하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정중한 항의는 순식간에 데시벨을 낮춰놨고 20대의 젊은 커플들은 고소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킥킥대며 웃다가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관광버스가 저녁나절에 묵호항에 더러 들어오는데 한무리의 등산복 중년들은 도대체가 당할 재간이 없다.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와 거슬릴 정도로 거침없는 목소리가 외려 허탈하다. 사는 게 별 재미가 없는 순간이 이어지면 일부러 크게 웃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주로 그들을 이해하고 싶지만 자주, 내 일행과 대화가 불가능해지곤 한다.
동해를 오가는 내내 휴게소에서 그들을 만난다. 알록달록한 아웃도어를 입은 중년의 남녀들은 딱 달라붙는 바지에 잘 가꿔온 몸매를 뽐낸다. 배가 볼록 나온 아재들도 딱 달라붙는 드라이핏 셔츠를 자신있게 입는다. 가끔 그들이 팔짱을 끼고 지나가며 하는 말을 엿듣게 될 때가 있는데 한 사람의 삶을 가늠하려는 오만을 범하게 된다.
“애들 다 키우고 여우고 돈 쓸 데도 없으시겠네요. 호호호.” 와 같은 대화에 담배연기가 목에 걸릴 만큼 켁켁대고 웃게 된다. 사람의 욕망은 늙지 않을 것이고, 나의 세상과 그들의 세상이 그닥 멀지도 않다. 불과 몇 년 후면 젊은이들이 나를 보고 “아웃도어 입은 중년의 어느 갱년기 아줌마” 라고 칭하겠지.
그들은 휴게소에서도 늘 즐겁다. 깔깔대는 웃음소리는 사방에서 휘몰아치고 쿵짝대는 고속도로 테이프 뽕짝에 맞춰 스텝을 밟기도 한다. 여럿이 있으면 용감해진다고, 부끄러울 것도 없는 그들의 용기가 때론 부럽기도 하다.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모두 다르니, 그저 오늘 하루 즐겁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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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의 #metoo

중학교 2학년때였다.
초등학교 4학년무렵부터 의붓아버지와 같이 살았다.
아버지의 빈 자리를 채워주던 사람이라 살갑게 굴었고, 나는 그가 싫지 않았다. 엄마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두 사람은 갈등이 깊어졌고 그 사이에 나와 내 동생이 있었다.

혼자 늦잠을 자던 일요일 아침에 그가 내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왔고 여기 저기를 만졌다. 여기와 저기는, 내가 2차 성징이 시작되었다는 걸 명징하게 나타내주는 두 곳을 말한다.
그일 이후, 나는 다른 일로 그와 격렬하게 싸우다 몇 대를 맞고 집을 나가 밤을 새고 들어온 적이 있고, 그 이후로 오래 지나지 않아 엄마와 그 사람은 헤어졌다.
그때 나는 열 네 살이었고, 지금 나는 마흔 네 살인데, 칠순을 넘긴 우리 모친에게 이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이 사실을 직접 엄마에게 말한다면, 그것으로 엄마의 인생이 물리적으로 깔끔하게 끝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신철석이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중고등학교를 지나며 교사들의 적절치 않은, 지금으로 따지면 성희롱이나 그때로 따지면 음담패설에 불과했던 그 자잘하고 무수했던 이야기들은 차치하고,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안에서 제 음부를 내 엉덩이에 밀어대던 얼굴도 마주치지 못한 수많은 성기들과 학교 앞에서 제 성기를 내놓고 자위행위를 하던 눈도 마주치지 못한 그 성기들은, 존재가 아닌 그저 좆으로만 남았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동생과 단 둘이 살던 이대 앞 대흥동 자취방에 잠든 사이 들어와 불을 끄고 얼굴을 살피던 리바이스 청남방을 입은 그 놈과, 보광동 반지하방의 화장실 문을 열던 그 놈과, 현관 문이 열린 사이 거실에 들어와 팬티를 훔쳐가 골목 사이에 쌓아두던 놈과, 고시원 방에서 자꾸 여자들의 팬티를 훔치던 그 놈도, 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스무 살이 넘어 만으로 스무 살이 되기 두 달전, 나는 라이브 호프집의 밴드 싱어였고, 내가 속한 밴드의 리더의 후배가 운전기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실직상태였는데 그 이전엔 유명가수의 소속사에서 로드매니저와 운전기사로 일했다고 자랑을 했다. 그 당시엔 어머니를 그리는 노래로 유명한 젊은 가수의 매니저 자리를 따내려고 애를 쓰던 중이었고 호감인지 질척댐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을 자주 나에게 보냈다. 그가 업계 사람을 소개해주겠다며 나를 술자리로 불렀다. 나는 일감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그 자리에 동석했다. 경향신문사 길 건너 편의 작은 술집이었다. 그 자리에 와 있던 신문사 간부는 내 이력을 듣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고 응원을 해주고 자리를 떴고 그 가수는 사실 나에게 별 다른 관심이 없었다. 나를 불렀던 연예계 종사자, 그 사람은 키가 180이 훌쩍 넘는 거구에 가장 완력이 좋을 20대 후반의 남자였다. 술 자리가 파하고 집에 가겠다는 나에게 그는 화를 내며 길바닥에서 물건을 부수고 소리를 지르며 깽판을 쳤다. 어떻게든 그 자리를 수습하려는 나에게 여관이 들어가 눕는 것을 보고 가달라고 그가 애원했다. 서교동의 한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그가 나를 때려 눕혔고, 나는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했으나 그에게 머리채를 잡혀 다시 바닥에 내다꽂혔다. 같이 입실을 하는 순간 강간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그가 소리쳤고, 그는 허리띠를 풀어 온몸을 때렸다. 아, 그리고, 나는 그때 생리중이었다.
아침이 되어 인검이 나왔다. 경찰이 문을 두들겼고 나는 경찰에게 신분증을 보였다. 그때 내 표정이 어떠했는지 나는 기억할 수 없다. 경찰은 내가 미성년자라고 했고 그의 신분증을 조회하더니 기소중지 중인 사람이 미성년자 데리고 이런 데 와도 되냐고 비아냥 거렸다. 그리고 경찰은 나에게 “아가씨 빨리 집에 가요.” 라며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여관을 떴다.
그의 이름은 박명호다. 나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명확히 기억한다. 그의 커다랗던 몸의 무게도 가끔 기억난다. 나는 그 이후로 그를 몇 번 더 봤으나 밴드리더가 사기사건으로 잠적한 이후 나는 그를 다시 만난 적 없다.

그날 여관방에서 나온 정오쯤에 햇빛은 뜨거웠고, 한 여름이었다. 원피스를 입었는데 어깨끈이 찢어졌던 것 같다.
택시를 타고 고시원으로 돌아가, 공동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했다. 마음대로 하루를 쉬거나, 아프다고 일을 거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이후, 나는 그를 경찰에 고발하거나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도 그 사실을 제대로 서술한 적 없다. 그때를 회상하는 글을 쓸 때면 “성폭행을 당했다.” 라고만 적었다. 최근 벌어진 #미투운동을 보면서 자꾸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선명해졌다. 한 가지 더 추가된 것은, 내가 왜 그 일에 대해 괴로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거나, 세상을 등지거나 당시엔 우울증조차 겪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감정을 모두 꼬깃꼬깃 접어서 아무도 못 보는 곳에 쑤셔 박고 산 세월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후의 내 행동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습관처럼 매일을 살았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만큼의 절망을 만났을 때, 살아남는 방법은 습관처럼 사는 것이리라. 나는 그렇게 습관처럼 그 시절을 살아냈을 뿐이다.

그 이후에 있던 수많은 성희롱은 딱히 불쾌한 지경도 아니었다. 그저 같잖다고 느꼈을 뿐이다. 어쩌면 내 감정을 단단하게 만들면서 넘기고 넘겼을 것이다. 매번 닥칠 때마다 고통스러워 봤자, 나만 다친다는 걸 깨달은 동물적 감각일 것이다.
결혼 후, 애 엄마가 된 뒤에도, 마흔즈음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일로 엮인 자리에서 한 차례의 성추행과 성희롱이 있었다.

한 사람은 지역행사에 왔던 젊은이였는데 술자리에서 옆에 앉은 사람을 쓰다듬는 것이 습관 같았다. 다음날 그의 선배였던 나의 지인에게 전화를 해서 엄중하게 경고하는 걸로 넘어갔다. 그의 선배는 나에게 깍뜻하게 최선을 다해 사과했다. 한 사람은 지역에서 알게된 엄마 또래의 지식인이었는다. 일 때문에 같이 회의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녁 식사에서 그 분은 맥주 몇 잔을 했고 나는 어르신들이 많은 자리라 술을 삼가했다. 겨우 그 정도 술에 거나해진 그 분이 내 차 조수석에 앉아 운전하는 나에게 “한국 차는 키스하기가 참 안 좋다”는 둥, 부인하고 사이가 안 좋다는 둥, 으례 쓰는 촌스러운 멘트를 날려 피식 웃었다. 나는 그 이후로 그를 안 만났으나 그분은 아마 본인의 언행을 기억못할 것 같다. 상습법이기엔 너무 어설펐다.

미투운동은, 나도 당했다, 라는 것을 넘어 나도 고발한다, 라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내가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 굳이 불편하게 공개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나 자신에게 물었다. 이 글을 쓰려고 일주일 넘게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왜 그 사건을 고발하지 못했으며, 지금의 나는 왜 이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 내려 하는가. 성폭행과 아동학대의 생존자는, 언론지상에 유사한 폭력사건이 공개될 때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린다. 묻어뒀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고, 무의식적 가해가 다시 일어난다. 그 기저엔 죄책감도 있다.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죄책감 말이다.

며칠 전, 나의 늙은 개와 함께 집 근처를 산책하던 중이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주변엔 캣맘들의 밥을 얻어먹고 사는 씩씩한 길냥이들이 몇 마리 있다. 놀이터에서 놀던 남자 아이들이 어슬렁거리며 걸어가던 노란점박이 고양이를 발견하고 고양이를 뒤쫒았다. 아이들은 내가 늙은 개의 목줄을 잡고 걸어다닐 때면 자기가 서 있던 자리에서 “강아지다. 아 귀엽다. 만져보고 싶다.” 라고 하지만 쉽게 접근하지 않는다. 내가 목줄을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늙은 개만큼이나 덩치도 큰 길냥이들은, 아이들이 쉽게 쫒아가고 쉽게 접근하고 쉽게 위협한다. 아무도 그 옆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고양이와 친해지고 싶어서인지, 괴롭히고 싶어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가까이 가도 되기 때문이겠지. 옆에 서 있는 보호자가 없으니까.
아이들이 고양이에게 돌을 집어던져도, 숨어 있는 고양이에게 나뭇가지로 쿡쿡 찔러대도, 길고양이의 밥그릇에 신나를 부어 같이 살던 고양이가 죽어도, 살아남은 고양이는 먹어야 한다. 그 하루를 위해서, 먹이를 찾고, 숨을 곳을 찾아야 한다. 그때 내가 고발하지 못했던 이유가 그런 것이었을 거다. 내 옆에 보호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테고, 나는 그날도, 그 다음날도 살아야 했으니까.

이어지는 미투고발은 대부분 이름을 가진 자들에 대한 폭로다. 내가 고발할 수 있는 그자들은, 내가 이름을 기억하지만, 전혀 유명하지 않다.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고, 이미 다른 죄로 구속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름은 커녕 얼굴도 제대로 못 본 가해자들도 수두룩하다. 그들에 대한 고발도 얼마만큼의 사회적 가치를 가질까. 나는 그 부분을 고민했다.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나의 가해자는 유명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굳이 이런 사소한 얘기까지 할 필요가 있겠냐며 기억을 다시 쑤셔 박을 지도 모르겠다.

모든 가해자는 이름이 있을 것이다. 그들도 알량한 권력이 있었다. 더 큰 권력 앞에서 개처럼 꼬리를 내릴 비겁한 권력이었고, 그 좁쌀만한 힘 앞에 무너졌다는 게 나를 분노케 한다. 프레임 논쟁따위가 끼어들만큼 여유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인간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그저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인생을 뒤집었고 삶의 기준점을 바뀌게 하며 숨 쉬는 방법과 걸음걸이를 바꾼다.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으로 산다. 이 분노와 수치심이 모여, 세상을 뒤엎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건은 절대 없던 일이 되지 않으며, 우리는 절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방법은 하나다.

싸우는 우리가 이긴다.

2018. 2. 27.

#metoo #withyou
#싸우는우리가이긴다

 

덧붙이자면, 부탁하건데, 피해자를 불쌍하게 보거나, 어줍잖은 위로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싸울 수 있다고 믿는다.

순대국과 숙대

점심시간이 지난 순대국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직원과 눈이 마주치면, 순대국 한 그릇을 외치고 자리에 앉는 법이다.
순대국이 나오기 전 반찬이 나왔다.
자동문이 열리네 안 열리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허리가 완전히 굽은 노인이 들어섰다.
계산대 근처 테이블에 앉은 노인에게 서빙하던 여자가 다가간다.
“할머니 뭐 드려? 순대국 하나 포장? 똑같이?”
노인의 목소리는 멀지 않아도 안 들릴 것 같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지도 모르겠다.
몸을 숙이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큰 소리로 순대국 포장을 묻던 여자가 주방에 대고 외친다.
“순대국 하나 포장. 밥 따로 포장!”

“밥 따로 포장?”
“어. 밥 추가해서.”
국밥집에서 포장을 할 때 밥은 원하는 사람에게만 딸려간다. 대부분 밥은 집에 있는 걸로 먹는다는 얘기다.
국밥집의 뜨거운 밥을 포장해버리면 그 온기와 끈기 때문에 맛이 떨어져서인지, 나도 포장할 때 밥을 달라고 하지 않지만,
음식을 나르던 사람들은 노인의 순대국 포장 주문을 받으며 밥을 싸가겠냐고 물은 모양이다.

허리가 완전히 굽은 노인이 엉거주춤하게 걸어 반대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약간 기울어진 고개는 살짝 좌우로 떨렸다.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저 할머니 불쌍해서 어쩐대.”
“그래도 저 할머니가 숙대 나온 할머니야.”

숙대나온 할머니, 우리 엄마가 올해 일흔 한 살인데, 저 정도 걸음걸이면 여든 다섯은 넘었을라나.
30년대에 태어나 식민지를 거치며 숙명여전을 다녔던 이력이 순대국집에도 알려진,
노인의 학력은 순대국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다른 생명의 창자를 씹으며 내내 생각해도 알 도리가 없었다.
  1. 2. 23.

메리 크리스마스

두 아들이 뇌전증을 앓고 있는 백씨는, 오전 내내 터진 수도를 고쳤다.
집주인에게 연락을 해봤자 안 좋은 소리를 해댈게 뻔했다.
관리를 잘 못해서 그렇다느니, 날씨가 이렇게 추우면 알아서 수도관을 보온해야지 뭘 했느냐고 말할 사람이다.
날이 추워지자 집안은 온통 한기다. 다 큰 아이들의 옷은 무겁고 두껍다. 한 겨울에 쪼그려 앉아 다 장성한 아이들의 빨래를 하고 있으면 어떻게든 생각을 끊어버려야 한다. 생각을 하면 안된다. 아파트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사시사철 뜨거운 물이 나온다던데. 수도세도 훨씬 싸게 나온다는데.
미리 미리 준비를 했어야 한다던데 그 긴 세월 빚을 갚느랴고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2월에 졸업을 하는 작은 아이는 복지카드가 있으면 장애인작업장에라도 취업을 할 수 있다. 약만 꾸준히 먹으면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은 아이는 그래도 큰 아들보다 나으니까.
엊그제는 아랫집 사는 미친년이 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자기 털신을 아들이 훔쳐갔다고 지랄을 해댔다. 이사온 지 몇 달 된 저 미친년은 억센 부산사투리를 쓰며 뻑하면 우리집 애들이 자기 물건을 훔쳐갔다고 지랄이다. 대문 앞에 새 밥이고 고양이 먹이를 가져다 놔서 안 그대로 지저분한 동네를 더 엉망진창을 만든다. 이 동네 십년을 살면서 누구하고도 깊게 말 섞어 본 적이 없는데 저 여자 때문에 모든 평화가 깨졌다.
“다 늙어빠진 여자 털신을 젊은 아이가 왜 훔쳐가는데요?” 백씨는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댔지만 미친년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내가 아줌마 털신 신고 다니는 꼴을 한 번도 못 봤는데 무슨 털신을 훔쳐갔다고 합니까? 아줌마 맨날 그 분홍색 목욕탕 쓰레빠 신고 다니는 거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요!”
미친년은 보라색 덧신에 분홍 목욕탕 쓰레빠를 신고 있었다.
“그럼 누가 가져갔는데! 내 털신을! 느그 아들 말고 여기 내꺼 훔쳐갈 사람이 또 있나! 직업도 없이 빈둥거리고 있으니 남의 물건이나 탐내는 거 아이가!!!”
미친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경찰이 왔다. 한 두번이 아니다. 순경들이 아랫집 여자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걸 보고 한숨을 쉬더니 여자를 데리고 갔다.
경찰서에 도착한 홍씨는 윗집 아들이 털신도 훔쳐가고, 전화기도 훔쳐갔다고 다 털어놓았다.
삐쩍 말라서 눈을 까리하게 뜨는 게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저 위쪽에 사는 양희자는 내 돈을 훔쳐갔어요.”
홍 씨는 경찰에게 떠들어댔다. 경찰이 볼펜을 들고 뭔가를 끄적끄적 적었다.
“그래서 잡아줄껍니꺼?”
“뭘요?”
“그래서 내꺼 찾아줄껍니꺼?”
“아주머니. 네 일단 알겠는데요. 증거가 있어야 이걸 수사를 할 수 있거든요. 그 앞에 방법 CCTV가 있으니까 저희가 좀 찾아는 볼께요. 이제 집에 돌아가셔서 쉬세요.”
순경이 홍 씨에게 비타민음료수를 까줬다.
“내가 아가 없어요. 내가 여태까지 아새끼 하나를 못 낳아봤다 아임니꺼. 그래서 저렇게 나를 무시하는 게라니까요.”
“아이고 그럴 리가 있나요. 아무튼 아주머니 날씨도 추운데 들어가셔도 돼요. 저희가 털신 찾게 되면 알려드릴께요.”
“꼭입니더. 내 털신 찾으면 알려주이쏘.”
홍 씨는 파출소에서 나와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갔다.
며칠 전 복지관 프로그램에서 만났던 상주여자가 길 한 복판에 멍하니 서 있었다.
“행님. 여서 뭐합니꺼?”
말을 건 홍 씨는 입을 닫자 마자 아차 싶었다. 괜히 말을 걸었다. 엄한 소리나 해 댈텐데 쓸데없는 짓을 했다.
“아, 저를 아십니꺼?”
상주 여자가 홍 씨를 첨본다는 듯이 대답했다.
홍 씨는 번쩍 머리가 시원해졌다.
“아입니더. 사람을 잘못봤심더. 미안합니데이.”
“아 그란데 내가 여기 복지관을 가야 하는데 입구가 어딘지 혹시 아시니껴?”
“여가 복지관 아니라요? 여 계단 올라가이소마.”
홍 씨는 손으로 복지관 입구를 가르쳐줬다.
완전히 미쳐가는구마. 홍 씨는 생각했다.
갈수록 태산이구만. 제정신이 아닌 거 같더니 나날이 심해지는 것 같다.
한 늙은 남자가 홍씨를 가만히 봤다. 홍 씨는 기분이 나빠져서 집 앞에 침을 퉤 뱉고 초록색 대문을 쾅 닫았다.
별 시덥잖은 노인네들이 다 지랄이고 지랄이. 홍 씨는 목에 건 수건을 들고 일바지의 아랫단을 툭툭 털었다.
홍 씨를 바라보던 노인은 복지관으로 들어갔다. 로비에 상주 여자가 서 있었다.
노인이 인사를 했는데도 상주 여자는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반찬도시락 서비스를 다시 받으라고 복지사가 전화를 해왔었다.
담당 복지사는 오늘도 눈을 초승달처럼 꼬리를 말고 웃었다.
“저기, 선생님.”
“네 아버님.”
“제가 지금 오다가 그, 우리 프로그램 같이 했던 상주 아주머니하고, 부산 아주머니를 봤는데 말입니다.”
“네.”
“근데 저를 못 알아보시는 거 같더라고요.”
“아……. 가끔 그러세요.”
“하이고 이런.”
“네 좀.. 최근들어서 잦아지시는 거 같아요. 방금 보셨어요?”
“네. 부산아주머니는 전혀 못알아보는 거 같고. 상주 아주머니는 로비에 아주 이상하게 서 있던데.. “
“저희도 걱정이네요.”
신 노인은 복지사에게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서류를 다시 확인해주고 피아노연습실로 향했다.
젊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정신줄을 놓기 시작한다니. 입이 썼다.
복도에서 식당에서 자원봉사 하는 김 씨가 아는 체를 했다.
“어르신 오늘 동지라 팥죽 했어요. 이따 꼭 식사하고 가세요.”
교수 부인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인지 참으로 사람이 기품있고 차분하다.
“네 여사님 고맙습니다.” 신 노인은 허리를 숙여 깊이 인사하고 피아노 교실로 들어갔다.
신 노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 김 씨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문이 열리자 휠체어를 탄 청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보호자도 없이 혼자 휠체어를 능숙하게 밀고 사무실로 향했다. 김 씨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서 있었다.
병원에 누워 있는 둘째집 조카가 생각났다.
여름에 교회 수련회에 갔다가 수영장에서 머리를 다쳐 지금 병원에 누워 있은지 6개월째다. 목 아래로 아무 것도 움직이지 못하게 된 스물 네 살의 조카는, 제 누나가 휴직계를 내고 병간호를 하고 있다. 조카가 물리치료를 받는 모습을 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 이후로 병원에 한 번도 못 간게 석달째다. 우리 조카도 언젠가 일어나서 휠체어라도 탈 수 있게 될까. 그래도 막내 동생처럼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린 건 아니니 다행인걸까. 김 씨는 손에 쥐고 있던 고무장갑을 으스러지라 꽉 쥐었다.
조카네 강아지는 잘 자라고 있을까. 큰 조카가 맨날 병원에 있으면 강아지는, 혼자 집에 있게 되는걸까. 1년동안 해외를 나간다 해서 잠시 키워줬던 그 강아지라도 다시 데려올까. 강아지 이름은 메리다. 촌스럽기도 하지. 어쩌면 요즘애들인데 개 이름을 그리 촌스럽게 지었을까. 메리를 몇달이라도 맡아 키우면, 그러면 조카의 병실에 갈 수 있을까.
같이 식당 봉사를 하는 이 씨 아주머니는 마흔이 넘은 아들이 뇌병변이다. 네 살에 다쳐 마흔 다섯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 조카는 말도 하고 생각도 하고 눈물도 흘릴 줄 아니까 다행인걸까. 김 씨는 서둘러 식당으로 갔다. 몸을 움직여야 해. 자꾸 생각을 하면 안돼.
식당에서 팥을 삶는 냄새가 고소하게 났다.
– 지난 크리스마스에 썼던 글을 여기 안 올려서, 이제서야 올립니다.

컬링 vs 팀추월

<컬링 VS 팀추월>

올림픽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수백년된 나무를 베어내는 걸 몰랐더라도, 순실이가 개입했다는 걸 몰랐더라도, 난 스포츠가 만들어내는 감동의 드라마 따위에 관심을 잃은 지 꽤 되었다. 교훈적인 이야기는 진부했고, 현실에서 의미를 찾는 것도 귀찮았다.

올림픽 개막식이 이슈가 되고, 올림픽에 대한 관심은 북한이 온다는 것 하나. 대통령에 대한 인기가 올림픽을 이끌어가는 건 아닌가 의심도 했다.

그러던 중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두 가지 일어났다.

여자 컬링이 사상 최초로 상위권에 진입했다는 것.

그 안에 숨은 스토리가 재미있었다. 동네 언니와 친구가 학교 방과후 수업으로 시작한 취미생활이 국가대표까지 오르게 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21일 저녁, 여자 컬링 대표팀은 조별 예선 7승 1패로 현재 덴마크와 경기를 치르고 있다. 경북 의성의 의성여고 출신인 네 명은 잘 알려진대로 영미랑 영미친구, 영미 동생, 영미 동생 친구로 구성된 지연과 혈연의 팀이다.

의성은 마늘로 잘 알려진 고장이기도 하지만 몇 달전 발표된 조사결과에 의하면 인구소멸도 1위로, 사라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도시 1위이기도 하다. 시사인에서 취재한 기사를 보면 의성엔 산부인과가 없고 노인인구만 남아 의성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사람들도 인근 대도시로 다시 나가야 하나 고민한다는 얘기가 있다.

의성 사람들은 설령 인구소멸가능성이 1위더라도,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그런 도시에서 세계 1위를 할 지도 모르는 여성 스포츠팀이 나타났다.

어릴 때부터 엘리트 체육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 동네 언니, 동네 친구가 뭉쳐 올림픽까지 왔다는 건, 수년간 인기를 끈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과 비슷해 보인다. 이 팀의 인기는 혈연과 지연으로 꽉 짜여진 이 나라의 정서에 맞아 떨어지면서도 그들이 비수도권출신으로 성공스토리를 써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과거사를 밝힌 의성의 전 구의원의 글도 이슈가 되었는데 가정형편이 부유하거나 뛰어난 엘리트가 아니었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칠판에 <컬링 배울 사람> 이라고 쓴 글을 보고 하나씩 모여들었다는 건, 보는 사람들에게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나만큼 평범한 친구”를 만나 말도 안되는 도전을 했다는 얘기로 들린다.

단언컨대 이번 동계올림픽 최고의 스타는 컬링여성대표팀이며, 그 이유는 영미와 영미친구와 영미동생과 영미동생친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컬링팀의 인기가 치솟는 사이에 여성 팀추월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다. 팀추월이 무슨 경기인지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팀워크를 이루지 못하고 한 사람을 따돌린 것으로 보이는 영상에 흥분했다. 한 명의 주자를 이끌지 못하고 낙오시킨 채 결승점을 통과하고, 실소를 뿜은 한 선수가 있었다. 밤새 대표팀 자격박탈과 빙상연맹 해체를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이 일어났고 이틀밤이 지난 오늘 이 청원에 동의한 사람들의 숫자가 50만명이 넘었다. 분노를 금치 못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놀라웠다.

가장 약한 고리를 공격한다는 이야기와 선수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에 이어 빙상연맹의 오래된 파벌문제와 전명규 부회장의 공과논란이 엘리트체육교육에 관한 성토로 이어졌다.

하룻밤새 30만명 넘게 청원했다는 얘기를 듣고 몇 개 커뮤니티 게시판을 들여다보았다. 사람들은 따돌림 당한 것으로 보이는 노선영 선수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고 그 사연에는 각자 겪었던 공동체 내에서의 따돌림 경험이 섞여 있었다. 수십개의 게시글을 읽고 나서 나는 분노의 원인을 여럼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 나라는 라인을 잘못타면 망하기 십상이고, 알량한 권력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기 쉬우며 자기 의사를 솔직하게 얘기했다가 어느 편에도 끼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이 억울한 경험은 고스란히 공동체의 기억속에 쌓여 있었다.

2016년부터 이어져 결국 대통령 탄핵까지 이어진 촛불혁명의 불쏘시개는 정유라였다. 최순실과 정윤회의 딸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특혜를 받았던 아이. 그래서 달그락 훅, 하는 것으로 명문대학을 다녔고, 수십억의 기업체 후원을 받았으면서 “부모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주장을 했던 정유라에게 사람들이 분노했던 건, 특혜였다.

안 그래도 출발선이 다른 아이가, 특혜까지 받았다는 것, 평등과 호혜를 거스르는 일이다. 꽤 많은 인류가 민주주의를 선택한 이유는 더 넓은 평등과 더 많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함인데, 돈과 권력을 가진 집안의 아이가 그 이유로 특혜까지 받는다면 수많은 민중이 민주주의를 지향해봤자 다 헛거다.

동료가 쳐진 것을 두고도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고, 인터뷰에서 피식 웃어버린 김보름 선수에 대한 비난을 보며 사람들은 정유라를 떠올렸을 것 같다. 스피드 스케이팅이 엘리트체육이 아니면 도전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건 동계올림픽을 보는 사람이라면 아는 일이고, 게다가 대학과 파벌로 나뉘었다는 얘기까지 알려지면서 이 집단감정의 오버랩은 점점 강화되는 듯 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적폐는, 평등과 자유를 저해하는 수많은 집단의 구조일 것이다. 팀추월을 보며 화를 낸 이유도, 컬링을 보며 환호하는 이유도, 모두들 좀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기 때문이라고 본다.

누군가의 실수, 누군가의 행운 따위를 말할 필요는 없겠다.

나는 이 두 사건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토리가 무엇이고, 지금 필요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았을 뿐이다.

2018년 지금 이 나라 민중들의 원하는 스토리가 무엇인지, 왜 무한도전이 수년간 인기를 끌 수 있었는지, 우리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세상은 우리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게 미래를 만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