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반파는 빈대떡집

2시.
늦었다.
문을 빼꼼히 열고, 밥 먹을 수 있냐고 물었다.
시간 맞춰 우루루 먹고 나가는 직장인들을 상대로 하는 백반집에 오후 2시 넘어서 입장하는 건 결례다. ‘일하는 사람들도 쉬고, 저녁 장사 준비도 해야 되는데, 그래도 오후 3시는 아니니까, 아직 남은 게 있겠지.’ 하면서 쭈뼛대며 기웃댄다. 주인여자가 남자에게 “어떻게 해?”라고 묻는다. 남자가 들어오라고 해서 기뻐하며 자리에 앉았다.
반찬과 밥이 나오고 맑은 된장국이 나왔다.
‘우와 떡갈비다.’
우리가 밥을 먹는 사이, 주인여자는 닦은 물컵을 테이블위에 나란히 놓고 물기를 말렸다. 그 다음엔 소쿠리를 양손으로 들고 물기를 털다가 젓가락 한 짝이 바닥에 떨어졌다. 소쿠리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주인이 떨어진 젓가락을 집으러 가는데 사장님 뒷통수에서 ‘아이고 귀찮아, 아이고 하기 싫어.’ 문자가 전송되는 것 같았다.

반찬을 다시 보면서 ‘이런 장사를 매일 어떻게 하나’ 생각했다.
밥하기 귀찮아진지 오래전이다. 예전 전업주부들은 환갑 넘어가니 남이 해준 건 누룽지도 맛있다더니, 우리또래는 밥하기 시작한지 10년차 되면서부터 지겨움에 넌덜머리를 낸다. 집이 지척인데 사무실 앞 백반집에서 밥먹는 이유도 별다른 게 아니다. 집에 가서 차려 먹고 설거지 하는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지는 건, 한마디로 귀찮아서다. 먹는 건 좋고, 먹기 위해 꼼지락 대긴 귀찮으니, 인간이 이리 무쓸모하다.
나물 무치고 어묵 자르고, 이 반찬을 만들기 위해 온종일 씻고 다듬고 볶고. 물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거지만. 밥도 맛있고 반찬도 맛있는 이 집 백반은 1인분에 6천원이다.

“저희 너무 늦게 왔죠? 몇 시 오는 게 제일 좋으세요?”
“1시 조금 넘어서 오시면 제일 좋아요. 여기 장부로, 대놓고 드시는 분들이 있어요. 제가 2015년부터 장사를 시작했는데, 저희 간판이 빈대떡이잖아요. 원래 전 장사를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여기 동네 아저씨들이 그거 잘 안 될거래. 그러면서 차라리 백반을 해보라더라고. 그래서 나는 아니 여기 동네 백반집들이 있는데 우리까지 하면 좀 그렇지 않나, 싶었는데 아저씨들이 그래요. 가서 먹어보면 백반집 할 용기가 날거래요. 그래서 백반을 시작했어요. 진짜로 저녁엔 손님이 별로 없고요. 전은 비 오는 날이나 좀 돼요. 그리고 저희는 명절에 장사가 잘돼요. 요기 아파트에서 명절에 전 예약 많이 하세요. 젊은 엄마들은 다 사가더라고요.”
“저희가 거기 살아요.”
“아 그러시구나. 내가 사장님 아까 얼굴 이렇게 보고, 어디서 봤는데 어디서 봤는데. 지난번에 거기 이삿짐 아저씨들 밥값 내고 가셨죠? 아휴. 이제 알겠다. 여름에는 저희가 에어컨 아저씨들이 많이 오세요. 요기 장부 달고 밥 드시는 분들은 회사 분들인데 시간을 정해서 오시거든요. 12시에 오는 회사 있고, 12시 40분 오시는 분들 있고 그래요. 그래도 대부분 1시면 장부 다시는 분들은 다 끝나니까, 그냥 일반손님 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지난번에 그 이사하신 날 예약 못 받는다고 한 게 그래서 그랬어요. 여기 백반집 간판으로 바꾸라는데 그랬다가 장부 달고 드시는 분들 밥 못 드시면 어떻게 해. 그냥 있으려고요. 아까 들어오실 때 우리 아저씨한테 어떻게 하냐고 물어본 거는, 저희가 오늘 점심에 떡갈비 했어요. 근데 다 떨어진 줄 알고. 우리 아저씨가 그 비싼 비비고를 사 왔어요. 그래서 지금 일단 맞춰드린 거예요. 내일도 고등어 할 거라 지금 받아놨는데, 저거 60마리 가지고 되지도 않아요. 안에 또 있어. 이제부터 그거 해야 해요. 아휴. 힘들어. 너무 일이 힘들어, 나 진짜 이거 안 하고 싶어요.”
“그러게요. 이게.. 보통 일이 아닌데요. 반찬도 맛있어요.”
“우리가 작년까지 5천 원 받았어요. 근데 손님들이 7천 원 받아도 된다, 고속도로 휴게소 가면 9천 원짜리도 엉망이라면서, 자기들 지방 갔다 와야 된다고, 일부러 와서 밥 먹고 가시는 분들도 많아요.”

사무실이 있는 곳은 고속도로 진입로와 가깝고 임대료가 높지 않은 편이라 유통회사들이 꽤 많다. 렉카차 회사도 있다. 외곽순환도로와 경수대로를 끼고 있으니 유통이나 물류회사에는 부담없고 좋은 조건이다. 그런 작은 회사 사람들이 이 집 단골이고, 이 골목에서는 제일 맛있는 집이다. 이사하는 날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이 동네에서는 저 집이 제일 맛있다고 알려줬다. 우리는 밥 한 공기를 추가해 둘이 반 절씩 더 나눠 먹고 사장님 이야기를 한참 듣다가 잘 먹었다고, 내일부터는 한가한 시간 맞춰서 오겠다고 얘기하고 나섰다. 사장님이 우리가 나가는데 지난번에 돌린 이사 떡도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해줬다.
백반집에서 나와 커피집을 가면서 박부장이 말했다.
“아줌마가 많이 심심했나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 고등어 60마리면, 하루 60인분 나가고, 월세 나가고, 월 수익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고 있었다. #속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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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동이야기

2020. 5. 20.

롱안 쌀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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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부근에 있는 롱안쌀국수 집은 베트남 이주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사장이다. 처음 그 집에 갔을 때는 여름이었다.
에어컨도 틀지 않은 매장에 사내 아이 둘이 의자에 누워 뒹굴다 내가 들어서자 벌떡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옆에는 아이들의 책가방과 신발주머니가 있었다.

그 다음에 갔을 때는 어린 사내아이 하나와 할머니 한 분이 마주 앉아 뭘 먹고 있었다. 계산할 때 보니 사내 아이가 앉은 자리 언저리에 장난감과 책 같은 잡동사니가 있었다.

오늘은 옛날 까까머리처럼 머리를 깎은 사내아이가 계산대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내 테이블로 와서 주문을 받았다. 키나 얼굴로 보아 내 아들과 나이가 비슷해보였다.
아이가 주방을 향해, 엄마, 라고 불렀다.

오늘의 국수는 지난 번과 맛이 좀 달랐다.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2인분을 현금계산하면 10,500원이라는 메뉴가 추가 되었다. 나는 몇 달에 한 번 정도 가는데, 내가 밥 시간을 잘 못 맞추는 탓도 있겠지만 갈 때마다 손님이 없거나 먹고 나간 흔적만 있다. 가게는 가끔 닫혀 있는데 언제 닫는지는 잘 모르겠다.

난 그래도 이집이 장사가 더 잘 되었으면 좋겠다. 손님도 꽉꽉 차고 그래서 아들 말고 종업원도 두고, 사장님이 주방에서 나와 카운터에서 환히 웃으며 지폐를 셌으면 좋겠다. 장사가 잘 되면 ‘고수 많이 주세요’ 라는 말을 편하게 할 수 있을 거 같아서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호계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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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19.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518민주화운동 설명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518민주화운동 설명>>

1. 배경

1979년 10월 26일, 1961년부터 18년간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을 쥐고 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하인 김재규의 총을 맞고 사망합니다. 대통령이 죽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시민들은 독재가 끝났으니 새로 대통령도 뽑고 민주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해 겨울, 대통령을 죽인 범인을 잡겠다며 군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군인들은 다음 대통령 선거를 취소해버렸습니다. 나라가 위험해졌다며 군인들이 시민들을 감시하고 경찰을 대신했습니다. 소장계급이었던 전두환이 대통령처럼 굴었습니다. 최규하 총리는 자리에서 쫓겨났고 전두환을 중심으로 군인들이 정부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군인들이 세상을 점령한 것입니다.

2. 왜 시작되었나?

1980년에 만일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면 대통령후보로 나올 만한 정치인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김대중은 인권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박정희 대통령 때 정부에 반대하고 독재를 그만하라고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었습니다. 전두환과 군인들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일했던 김종필과 시민들에게 존경받았던 김대중을 체포했고, 박정희를 반대했던 김영삼을 비롯한 정치인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하거나 집안에 가둬버렸습니다.

옳은 소리를 해온 정치인들이 범죄자처럼 감옥에 갇혀버렸습니다. 민주주의를 바랐던 시민들의 실망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절망하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와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외쳤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대학생들이 먼저 시위에 나섰습니다. 현수막과 맨주먹으로 나선 학생들을 군인들이 마구 잡아갔습니다. 광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광주는 전라남도에서 가장 큰 도시입니다.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에 나서 힘으로 정부를 제압한 전두환은 물러가라, 더 이상의 독재는 싫다고 소리높여 외쳤습니다.
전두환과 군인들은 인기가 높았던 김대중과 김대중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광주는 특히 김대중의 인기가 높았습니다. 시민들은 감옥에 갇힌 김대중을 석방하고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습니다.

3. 광주 민주화운동의 시작

5월 18일, 그동안 작은 시위를 이어가던 광주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민주주의 수호를 외쳤습니다. 바로 다음 날 5월 19일, 전두환과 군인들은 거칠고 사나운 부대를 만들어 광주에 보냈습니다. 군인들도 이유를 모르고 광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군인들의 대장은 전두환이었습니다. 광주에 가는 군인들에게 광주에 전쟁이 벌어졌고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무리들이 숨어있으니 누구든지 눈에 띄면 잡아서 가두고 죽여도 된다고 지시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군인들은 정말 전쟁터에 온 것으로 생각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마구 때리고 죽였습니다. 무섭고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5월 21일부터는 시민들이 힘을 합쳐 경찰서에서 총을 꺼내고 버스와 트럭으로 길을 막고 군인들을 잠시 몰아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더욱 뜨겁게 모이자 더 많은 군인들이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모여들었습니다. 군인들은 헬기에서 총을 쏘고 거리에서도 총을 쏘고 도망가는 시민들을 잡아 곤봉으로 마구 때렸습니다.
광주로 가는 길은 모두 막혔습니다. 나올 수도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섬이 되어버린 삶의 터전에서 군인들의 총탄에 쓰러지고 다쳤습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나서서 주먹밥을 만들어 시위대에게 전달했습니다. 모두가 가족이고 하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이렇게 한 마음으로 힘을 합치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대동사상, 대동정신이라고 부릅니다. 광주의 시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를 아끼고 지켰던 정신이 바로 대동정신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광주의 시민들이 죄 지은 것도 없이 계속 죽어나가는 것도 모자라, 탱크까지 앞세워 시민들을 짓밟으려 했습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도청에 모여 광주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은 헬기까지 동원해 도청을 공격했습니다. 이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군인들이 광주에 몰려들어와 민주주의를 외쳤던 사람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 가뒀습니다. 5월 27일이었습니다.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에서는 수백명이 넘는 사람이 죽고, 3천명 넘는 사람이 다쳤습니다. 죽은 사람들 중엔 청소년도 있었습니다. 이 열흘 동안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4. 518민주화운동의 이름이 생기기까지

그때 군인들에 의해 집안에 갇혔던 김영삼은 1993년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야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민주화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김대중은 1998년에 김영삼대통령에 이어서 우리나라 15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은지, 여태까지도 518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거짓말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전두환이 자기를 반대하는 시민들을 죽이라고 했다는 증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사실이 아니라며 계속 발뺌하고 있습니다. 1980년 5월에 가족을 잃은 시민들이 모든 것을 기억한 채 살아있는데도 말입니다.

5. 우리의 할 일

이 끔찍하고 슬픈 사건은 1980년 전국을 뒤덮은 시민들의 열망, 민주주의를 원하는 움직임이었다는 뜻을 담아 지금은 “518민주화운동”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됩니다. 우리는 끝까지 비극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기억해주세요.
1980년 5월 18일, 광주는 바로 우리입니다.

 

작년에 써둔 것 보완해서 공유.

안양군포의왕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진행할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518민주화운동 설명을 담을 전시물이 필요한데, 아무리 찾아도 적당한 걸 찾지 못해,
글쟁이의 쓸모를 발휘해 봄.
사실 왜곡이 있나 계속 검토중.
자극적인 묘사는 하지 않으려고 애써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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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인증에 실패했습니다

시장 근처에 옛날통닭과 생맥주만 파는 집이 있다.
아이가 그 집 통닭이 제일 맛있다고 해서 가끔 가서 포장을 해 온다.

오늘은 통닭 두 개를 튀기고 지역화폐카드를 내밀었더니 통닭집 남자가 이거 어떻게 쓰느냐고 묻는다.
동사무소 가서 받아왔는데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고. 여기 돈 들어오면 문자 오는거냐고 물었다. 나는 ‘앱을 까시고 통장을 연결하셔야 한다’고 하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해서
앱을 깔아드릴까요? 물었더니 휴대폰을 냉큼 가져왔다.

구글 플레이스토어를 여는데 연결이 잘 안되어 보니 로그인이 안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아, 구글 계정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이메일이 있어야 해서요.”
“아휴 나는 그게 뭔지 몰라요.”
“제가 해드릴까요?”
“아휴 그래주면 고맙죠.”

나는 다 튀긴 통닭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메모지와 펜을 받아 이름과 생년월일을 입력하고 구글아이디를 하나 만들었다. 비밀번호는 쉬운 걸로 만들어 메모지에 적었다. 그제서야 내 앞에 앉아 있는 초로의 남자가, 사장이 아니고 직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주인인지, 또래의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이 남자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구글계정을 일단 만들고 구글플레이스토어가 열려서 경기지역화폐 앱을 다운받았다.
“이거 다운받으면서 통장 연결해서 쓰시는 거예요. 통장 번호 기억하세요?”
“통장 없어요.”
“아.. 월급 들어오는 통장 같은거.. 전혀 안 쓰세요?”
“통장 없어요.” 라고 같은 대답을 하자, 주인여자가
“기초수급 들어오는 통장 있잖아요.”라고 말을 보탰다.
앱 다운로드가 완료되었고 나는 그제서야 통장이 없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앱이 열려서 이용약관에 동의를 하고 본인인증을 해야 한다. “삼촌”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어느 통신사냐고 물으니 삼성폰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바탕화면으로 넘어가 앱을 몇 개 살펴보니 LG U+ 앱이 보여 통신사는 엘지신 거 같다고 하면서 본인인증을 시작했는데, 본인인증이 계속 안됐다.
기초수급이 들어오는 통장이 있다는 얘기가 떠올라,
“이 전화번호 삼촌꺼세요? 누구 명의로 되어 있어요?”라고 물었더니
“여동생이 해줬다”고 대답했다.

본인이라는 걸 인증할 수 없었다. 그 사이 나는 그 사람의 정보를 너무 많이 알게 되었다.
삼촌은 내 손에 들려 있던 자기 전화기를 살짝 잡았다. 나는 손에 힘을 풀었다.
“아이고 됐어요. 닭만 다 식었네. 제가 내일 동사무소 가볼께요.”
나는 이메일 주소와 비밀번호를 적은 종이를 ‘삼촌’에게 건넸다.
“이거 가지고 가시고요. 혹시 앱으로 뭐 해야된다 라고 하면 이거까지 했다고 얘기하시고요. 이메일 만드는거요. 본인인증이 안되면 상품권으로 받으실 수도 있다고 하니까, 그렇게 받으셔도 될거예요. 아무튼 가서 물어보세요.” 나는 닭봉투를 들고 일어섰다.

인사를 하고 닭봉투를 자전거 앞 바구니에 넣고서 자물쇠를 푸는데 주인여자가 나와 문앞에 서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장사하세요?”
“아.. 예.. 저 이런 저런거.. 글도 쓰고.. 시민단체 일도 좀 해요.”
“그래서 그렇게 착하시구나. 고맙네요. 이거 너무 어려워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줘도 못 써요. 괜히 시간만 버리고 맛있게 못 드시게 됐네.”

디지털이 발달하면서 누군가에겐 앉은 자리에서 꿈적앉고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누군가에겐 그림의 떡이 되어간다. 본인인증을 할 수 없고, 자기 명의로 된 휴대폰이 없고, 자기 통장을 쓸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모두 선한 피해자는 아니지만, 자신의 과거를 자꾸 후회하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나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말했던, ‘삼촌’은 잠을 잘 이룰 수 있을까.

‘우리 집엔 에어프라이어도 있어요. 집에 가서 덥혀 먹으면 돼요. 닭 식은 건 괜찮아요. 모두 해결해줬으면 좋았을텐데.’ 라고 자전거를 타고 오며 못 다한 이야기를 혼자 머릿속에서 떠들었다.

집에 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들이 왜 착한 척 하고 다니냐고 한다.
확 마…

 

2020.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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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공익활동지원센터 안양지역 간담회

5월 13일 오전 11시 안양시의회 1층 시민토론방에서는 경기도 공익활동지원센터와의 안양지역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안양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와 지속가능한 시민사회 활성화방안 연구회원인 최병일 시의원과 이번 21대 총선에서 동안갑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민병덕 당선인이 배석했습니다.

안양시도 시민사회단체중심의 공익활동지원센터 설립을 논의중입니다만, 가까운 군포시에 비해 조례나 센터 설립에 대한 내용들이 많이 부족합니다. 모든 시민이 편안하게 드나들고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NPO, NGO센터 설립을 위해 여러 논의와 토론이 필요합니다.

2020. 5. 13.

2020년 518 민중항쟁 기념식 – 비대면 방송진행

 

2020년은 518민주화운동, 민중항쟁의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다양한 행사로 시민들과 추모의 뜻을 다지고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만, 코로나19라는 뜻밖의 사태를 맞이해 비대면 방송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노래패 ‘우리나라’의 노래공연, 극단 ‘경험과 상상’의 뮤지컬 &lt;오월의 사람들&gt;, 각계인사와 안군의민기사 정금채이사장님의 추념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역방송인 (구)티브로드ABC방송 (현)SK브로드밴드-ABC방송 채널1번에서 5월 18일 오전 11시에 방송됩니다. 안양군포의왕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유튜브와 페이스북, 카카오TV로 본 방송을 5월 18일 11시 이후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안군의민기사에서 업로드하는 링크는 추후 회원 단체채팅방을 통해 공유드리겠습니다.

본행사를 위해 후원해주신 안양시, 안양문화예술재단, 제40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에 감사드립니다.

2020. 5. 13.

[칼럼]집에가자 : 재택근무를 그만두며

한국노총 발행지 <노동과 희망>에 청탁을 받고 기고한 글입니다.

한국노총 노동과희망 바로 가기

 

어릴 적 상상했던 2020년에도 오늘의 풍경이 숨어있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 화상회의와 화상전화교육, 팔다리가 가늘고 머리통만 커진 인간들.
하늘을 나는 자동차는 없지만, 비대면 업무와 온라인학습은 뜻밖의 바이러스 때문에 앞당겨졌다. 강제 재택근무에 돌입한 사람들은 초반에는 가족들 때문에 집중이 안된다더니, 거리두기 권고가 3주를 넘기자 집중력이 떨어져 업무시간이 늘어지고 출퇴근이 없으니 밤낮없이 일만 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월요일 오전 8시 50분이면 메시지창이 열린다

2005년, 결혼과 임신을 하면서 재택근무를 시작한 나는 2020년 지금까지 재택근무중이다. 가족사업과 작은 회사 두 개 거치면서도 절반은 재택근무를 했다. 독립해서 프리랜서를 거쳐 개인사업자를 낸 지금까지도 굳이 사무실을 얻지 않았다. 사무실 월세도 부담이지만, 대리돌봄이 불가능한 육아문제가 가장 컸다. 아침을 먹고 아이가 학교에 가면 9시부터 거래처들의 업무가 시작된다. 나도 그 시간에 맞춰서 책상에 앉는다. 월요일 오전이 되면 8시 50분, 또는 8시 이전부터 메세지창이 열리기 시작한다. 일을 하기 싫어도 시작해야만 하는 외부의 압박이 온다. 점심시간에도 전화기가 조용하다. 아이가 어릴 때는 ‘일 그만하고 놀자’고 조르기도 했고, 친구들을 우루루 데리고 와서 소란스럽기도 했다. 친구들과 집에서 놀고 있으면 먹을 것만 챙겨준 뒤 신경을 안 써도 되지만 어느 순간 분란이 일어나면 일을 중단하고 일어나 중재도 해야 한다.
사무실이 없으니 회의를 할 때면 항상 내가 상대방의 장소로 찾아갔다.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꽤 든다. 하루에 회의 세 건이면 하루가 몽땅 날아갔다. 작년부터는 이동시간을 아끼자며 온라인 미팅을 하는 팀도 생겼다.

 


▲재택근무를 하는 이하나씨의 책상

 

아이가 잠든 후 반 11시에 다시 하루가 시작된다

재택근무에서 어려운 것은, 업무와 일상의 분리다. 육아 때문에 재택근무를 선택했으니 육아와 살림은 당연히 함께 지고 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순간적인 집중력을 높이는 기능을 발달시켜야만 한다! 아침 9시부터 커피 한 잔 내려 컴퓨터 앞에 앉으면서 업무를 시작하고 가족이 없는 시간엔 절대 집안일을 하지 않았다. 모든 살림살이를 다 뒤로 미룬다. 눈앞에 설거지가 쌓여있는 걸 못 참는다면 재택근무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전에 집중해서 일을 하고 나면 점심시간엔 뇌가 지치는지 졸음이 쏟아진다. 여기서 재택근무의 장점이 발휘된다. 내 멋대로 점심을 걸러도 되고, 다른 직장인들이 밥 먹고 커피 마시는 시간에 낮잠을 잔다. 오후가 되면 집으로 돌아온 아이가 간식을 내놓으라고 외친다. 아이가 오기 전에 기력을 회복해두어야 늘어지는 오후에 아이도 돌보고 일도 하는 것이다. 저녁 시간에 내가 어질러놓은 것까지 밀린 집안일을 하며 업무로부터 한 번 더 쉰다. 저녁을 해 먹이고 아이를 재운 뒤 다시 책상에 앉는 시간이 밤 11시였다. 혼자 집중해야 할 일이 있으면, 아이가 잠든 이후인 11시부터 하루를 다시 시작했다.

 

다년간의 재택근무를 거치면서 내가 찾은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오전 9시 전에 일어나 샤워하고 머리도 감고, 아침을 먹고 커피도 내리고 언제든지 미팅을 나갈 준비가 된 채로 일을 시작한다. 옷은 굳이 갈아입지 않아도 괜찮다.

2. 오전 9시 이전에는 되도록 컴퓨터를 켜지 않는다. 하루 일정을 정리하거나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본다. SNS도 괜찮다.

3. 업무 관련 장비는 가장 좋은 것으로 쓴다. 장시간 앉아 있게 되고 수시로 야간작업에 돌입하기 때문에 키보드, 마우스, 마우스 패드, 의자는 능력치 내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고른다. 나는 MS의 스컬프트 키보드와 마우스를 쓰고 있는데 의자는 PC방 의자로 바꾸고 싶다.

4. 하루를 마무리 짓는 시간을 정해야 한다. 저녁 7시까지는 어렵더라도 밤 10시라든가. 연장근무는 아무래도 새벽 2시에는 끝낸다거나.
5.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혼자 진행한다면 집중해서 한 가지 일을 마치고 의자에서 일어나 다른 걸 한다. 안 그러면 화장실 갈 때 말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점점 의자가 나인지 내가 의자인지 모르는 지경이 된다. 이때 스트레칭을 하면 더 좋겠지만 게으른 자는 자기 성향에 순응하도록 한다.
6. 수시로 수다를 떨 수 있는 절친과 간간히 메신저로 채팅을 하면서 외로움을 달랜다. ‘혼자 일한다는 건 고립되기 쉬운 일이라 절대적으로 SNS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재택근무의 함정은 끊임없는 셀프착취

재택근무의 장단점을 상당히 파악한 지금이 이르러서야, 나는 다음 달에 사무실을 얻기로 결정했다. 집안에서 내가 차지하는 공간이 점점 넓어져서 가족들이 앉을 자리도 없어졌다. 정리정돈을 못 하는 성향이라 온 집안이 내 업무의 잔해들로 가득하다. 가정을 지키며 돈도 번다는 유세를 떨 수 있으나 집안의 고요한 폭군의 입지에 오른다. 당사자인 나는 끝도 없이 24시간 근무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낮에 자고 밤에 일해도 되지만, 습관이 되면 회의도 가기 싫어진다.

 

재택근무는 끊임없는 셀프착취에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출퇴근길을 오가며 보게 되는 도시의 풍경과 사람들의 표정을 모르고도 랜선으로만 일을 하며 업무에만 몰입할 수도 있다. 시간을 아끼려 화상회의를 하고 업무공간을 벗어나지 않으며 효율을 잔뜩 높일 수도 있다. 아파트 단지안의 빈집의 대낮은 산사만큼 고요하다.

 

사람을 만나는 게 공포가 되는 시대에, 다시 밖으로 나가겠다는 결단을 한 것은 사람을 부딪히고 싶어서다. 누군가 나의 공간에 편하게 찾아오고 그에게 커피를 내려주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는 시간, 모르는 사람들이 밥을 벌기 위해 뛰어다니는 모습을 창가에 서서 지켜보는 시간이 필요해졌다. 거슬리는 옆 사무실의 큰 소리나, 공동공간을 두고 일어나는 자잘한 신경전도 적당한 자극과 활기가 될 지도 모른다. 침체된 채 저녁도 새벽도 없는 자기노예화에서 벗어나, 매일 돌아갈 곳, 매일 그리운 곳을 두고 ‘집에 가자’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어쨌거나 모든 일은 사람이 만나야 이루어지니 말이다.

 

#재택근무 #업무와일상의분리 #셀프착취

코로나19로 깨닫는것들, 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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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0년 민주시민교육 학교 출강 문제로 이번주에 교사들과 이룸 각 팀장들이 전화통화를 했다. 개학이 연기된 마당에, 어제부터는 재 연기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어서 학교현장은 당황을 넘어서 이제 지친 상태. 언제 개학을 할 지 모르겠는, 또는 개학을 해서도 뭐가 제대로 진행이 될지, 걱정밖에 없다.

일정을 변경해야 하는 곳도 있어서 통화를 하며 수업내용에 대해 의논도 하고 있다.
우리가 진행하는 민주시민교육의 수업은 대부분 모둠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별활동을 최대한 줄이고 협동과 토론, 활동으로 이어지는 교육안들인데, 코로나로 교실 내에서 이게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이 강사들 사이에서 시작되었고, 교사들에게도 의견을 묻고 있다.

어떤 학교는 모둠활동 최소화, 물건 공유도 줄이겠다고 한다. 짝꿍도 없애고 1인 1책상으로 학생들 간의 거리를 두도록 교실 배치를 다시 하는 곳도 있다. 식당이 있는 학교는 아크릴칸막이를 설치하기도 하고 교실 안에서 밥을 먹는 경우는 아이들이 배식을 할 때 모두 마스크를 써야 한다. 학교 입구에 열감지카메라를 준비하기도 하는데 지자체에서 얼마나 도와주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것 같다.

교실 안에서 아이들 사이의 거리를 두려면 교실이 넓어야 하는데, 2000년대 이전에 지은 학교들은 70명씩 들어차던 교실을 그대로 쓰고 있어서 여유가 있지만 그 이후에 지은 학교들은 교실이 작은 편이다.

안양지역의 K초등학교는 과밀학급으로 유명하다. 한 반에 35명씩 11반이다. 요즘 초등학교 한 반에 30명 정도 되는 학교는 그리 많지 않다. 보통 한 반에 25명 정도인데, 한 학교에 서너 반, 많으면 7개 반인데, 이런 학교는 그런대로 아이들 간의 거리를 둘 수 있겠지만 1개 학급당 인원수가 30명이 넘는 학교는 교실이 꽉 차서 맨 뒷 줄 아이들의 경우 사물함에 붙어서 수업을 받는다.

안양에서 과밀학급인 학교는 두 종류로 나뉘는데 시경계에 있는 학교, 즉 학부모들이 서울로 출퇴근 하기 좋으면서 유해시설이 없는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사교육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어, 위장전입이 많은 경우다. 애들 공부 더 시키겠다는 학부모들의 욕심이 위험한 교실을 만들어냈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교실에 아이들이 꽉 들어찬 것은 각종 호흡기 질환과 감염병에 취약하다. 자리가 좁으니 분쟁도 더 하다. 여름엔 답답하고 에어컨을 틀어도 쾌적하지 않다. 이런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는 1년 내내 감기에 시달린다. 아이들이 와서 엉기고 안기며 침과 콧물로 선생을 감염시키는 셈이다. 아이들도 서로 인플루엔자를 주고 받으며 산다.

일단 교육안은 죄다 뒤집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강사들도 묘안을 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일부 교사들은 일정을 그대로 진행하겠다면서 개학연기가 또 되면 다시 얘기하기로 했고, 하반기로 미뤄봤자 별 이득이 없을 거 같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코로나가 끝날 거 같지 않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아무리 요즘 애들이 적다고 해도, 한 학교에 보건교사 1명이 수백 명의 아이들을 상대한다. 이게 감염병 상태에서 가당키나 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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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룸에서 진행하는 수업의 일반적인 모둠형태

2.
각 단체들은 집체교육 형태의 공모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올해는 공모사업 모집이 일찍 시작되어 3월부터 발표가 나기 시작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교육사업이 모여서 듣고 배우고 토론하고 활동하는 것들이라 실내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거나 밀접한 자리에서 신체접촉이 불가피한 형식이다. 이 부분도 교육내용을 모두 변경해야겠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기존의 사업목표를 크게 변경하지 않으면서 교육내용을 변경하려니, 온라인을 이용하거나 콘텐츠 개발 제작으로 전환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공모사업에서 온라인 콘텐츠 제작, 동영상제작, 책자 제작등은 사업비로 집행할 수 없는 규정이 있는 경우가 꽤 된다. 동영상 제작이 사업주체의 자산취득이라는 것이다. 2019년부터 이런 규정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동영상 제작이 왜 사업주체의 자산취득인지 이해할 수 없으나, 동영상은 사업주체가 나중에 홍보자료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거다. 이 규정을 올해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 민간 사업공개모집으로 실적을 쌓아가는 공기관들은 빠르게 정신 차리고 적응해야 할텐데, 확신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민간에서 일하고 공기관이 실적 챙겨 먹는 이런 형태의 공모사업은 모두 없어져도 그만인 것이다.

공기관은 교육사업에 대해 평가할 때 1인당 얼마짜리 교육인가로 가성비를 따져 실적을 자랑한다. 의자를 몇 개 깔았느냐로 사업의 양적 평가를 한다. 행사와 교육 모두 마찬가지다. 1인당 1만 원짜리 교육인가, 1인당 10만 원짜리 교육인가로 평가한다. 이게 공무원들이 답답해서 저렇게 평가하느냐. 아니, 1인당 할당되는 교육비가 높으면 의회에서 까인다. 의회의 수준인 것이다. 의원은 누가 뽑으냐? 유권자가 뽑았다. 그러니 이건 의회의 탓도, 공무원의 탓도 아니고 우리 모두의 문제였던 것이다.

작년에 모 기초단체의 도시재생지역의 마을기자단 용역을 수행했다. 기자단 교육에 대해 담당부서에서 가장 걱정한 것은 1인당 소요되는 교육비가 너무 높다는 것이었다. 한 마을의 마을기자가 20명 이상 필요치도 않고 20명을 넘어가면 양질의 교육도 어렵다. 총 용역비용이 1천만원이었는데 기자단 인원 20명에 1천을 모두 소진했다면 1인당 50만 원짜리 교육을 진행한 것이다. 행정감사에서 분명히 지적받을 거라는 게 담당부서의 고민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담당팀에서는 50명의 대학생을 불러모으는데 성공해 누적인원수를 획기적으로 늘렸다.

지역의 평생학습원의 질이 그 모양인 것도 이런 이유다. 3만 원짜리 강사 불러 10회 진행하면 교육비용 30만 원인데, 30만 원으로 수강생이 30명이면 1인당 1만원짜리 교육을 2개월 반이나 진행했으니, 훌륭한 사업이라고 평가받는다.
1천만 원 들여 진행한 행사에 의자를 천 개 깔았으면 담당공무원은 어깨 펴고 행정감사에 나갈 수 있다. 모객이 안되어 50명이 모였다. 담당공무원은 좌불안석이다. 기초의회에서 가만두지 않는다. 예산낭비라고 질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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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의자의 갯수가 사업의 성공여부를 결정한다

나도 이런 평가의 기준을 알게 된 이후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무원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교육대상자의 누적인원을 발표해준다. 다들 엄청 흐뭇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다.
대시민교육과 행사를 평가할 때, 몇천 명, 몇백 명에게 세금으로 수혜를 줬다는 구질구질한 사고방식을 깨지 않는 이상, 감염병 앞에서 대책이 없는 상황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정량평가가 꼭 나쁜 것도 아닌데 참 후지게 만드는 시스템에서 살아왔다. 그러니, 지금의 이 거리두기가 얼마나 여러 사람을 성찰하게 하는가.

쪽수 채우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시점이다. 인원수 많은 걸로 승패를 걸다니 너무 후진적이지 않은가.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주는 반성과 교훈은 다 헤아릴 수 없는 정도다.

2020. 3. 27.

코로나의 거리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온 구로 콜센터는 신도림동이라는데, 예식장과 스타벅스도 있는 건물인 모양이다. 지도를 열어보면, 신도림동 뿐 아니라 이 나라의 수도권은 모두 인구밀집지역이다. 신도시는 구역이 나눠진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구도심은 들쭉날쭉 물길처럼 이리 저리 휘어져 있는 채로. 한때 지하철에는 푸시맨이라는 특정직군이 있었다. 미어터지는 출근길에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플랫폼에서 사람을 객차 안으로 밀어 넣는 ‘업무’를 맡은 사람들이 있었단 말이다.

88년 올림픽 이후, 한국사회는 스스로 서구권에 비해 미개한 문화를 가졌다고 자폭하는 일에 열중했다. 그 중 하나가 한국사회는 개인과 개인간의 물리적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팔꿈치가 닿고 몸이 밀착되는 상황은 수십 년간 이어졌고 내 얼굴 앞에서 말을 하는 사람의 침이 튀는 상황에 익숙했다.
개인에게 허락된 공간을 계속해서 좁히며 도시를 확장시키면서 인구가 너무 많다는 핑계를 댔다. 도시에는 빈 틈이 없고 그저 존재만 하는 땅이 없다. 나이든 사람들은 공터를 보면 안달을 한다. “땅이 아깝다.”

버스에서 타인의 엉덩이와 성기가 밀착되지 않고 지하철에 사람을 구겨넣지 않을 수 있을까? 다닥다닥 붙어 앉아 남의 손을 팝콘인 줄 알고 잡게 되는 영화관이나 건물 용적을 높이려고 딱 네 명만 탈 수 있게 만든 좁은 엘리베이터도 바뀔 수 있을까?

우리에 비해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고 개인공간을 보장받는다던 말했던 서유럽과 미국도 이제 창궐하기 시작했다. WHO는 판데믹을 선언했다. 신종인플루엔자도 판데믹이었다고 한다. 이제 코로나19의 백신이 나오기 전까지는 이 상황이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3월 23일 개학도 연기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같이 쓰는 공간조건이 열악하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겠다.

오늘까지 남한에서 실시한 검사는 22만 건을 넘겼다. 확진자 통계를 보면 여성이 조금 더 많다. 사람을 만나서 말을 하거나 신체접촉을 해야 하는 직군에 여성들이 대부분 밀집해있기 때문이겠지. 콜센터 몇 개를 더 털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우리의 거리는 얼마쯤이 적당할까. 당신의 침이 내 얼굴에 튀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재택근무가 가능한 직군과 남이 버린 마스크를 맨손으로 집어야 하는 직군으로 나눌 수 있을까.

지난 주말 갔던 대형마트에서는 여전히 무빙워크에서 카트를 잡아당기는 일을 하는 직원이 있었다. 코로나생각하면 중단하는 게 맞지 않나. 게다가 그 직원은 장갑을 안 낀 맨손으로 마스크만 끼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을 만나는 사람에게 왜 장갑을 안 주나. 장갑줘라.

#오늘의결론 #서비스직에는_마스크만주지말고_장갑도줘라

 

2020. 3. 11.

1992년 다미선교회

모태신앙이던 내가 교회를 멀리하게 된 것은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가 이혼했다는 사실이 동네에 알려졌다. 엄마는 가끔 교회에 충성했고 가끔 냉담했는데 본인이 정서적으로 불안정할 때 교회에 집착했다. 초등학교 4학년쯤 엄마가 교회에 충성하던 시절이었다. 그날은 엄마가 주일예배 전에 교회 앞에서 주보를 나눠주는 안내를 맡았다. 건너편에서 같이 안내를 하던 다른 집사가 엄마에게 “이집사, 이혼했다며?”라고 물었다. 그게 84-5년도 쯤이었다. 이혼한 싱글맘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시선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현존하는 모든 여성혐오의 총체쯤. 그래서 엄마는 그길로 교회를 그만뒀다. 나도 자연히 교회를 안 나가게 되었다. 엄마는 종교를 포기할 수 없었는지 말이 적다는 천주교로 옮겨갔다. 나는 세례를 받으려고 여러 번 애를 쓰다가 번번히 실패했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쯤, 어찌저찌해서 친해지게 된 아이들과 함께 갑자기 교회열풍에 휩쓸려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광신도가 되었다. 집안사정이 정신없이 흔들렸고 매일 다툼과 폭력이 난무하던 때였다. 집에서 학교를 제외하고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은 당시에 흥하던 단과학원과 교회였다. 합법적으로 외부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토요일에는 청소년부 예배가 있어서 하루종일 교회에 있었고 일요일에도 교회에 있었다.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중학교 2학년이 되는 방학때 교회오빠들에게 기타를 배웠다. 그때가 CCM이 막 퍼져나가던 때였다. 주찬양선교단이 봄여름가을겨울만큼 흥했고 송명희와 최덕신은 청소년기독교도들의 아이돌이었다. 기타를 가르쳐주던 오빠와 찬양집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찬양집회만 다녔겠나. 연애도 했다. 우리는 신앙으로 똘똘 뭉친 강력한 커플이 되었다. 화요일에는 동대문 근처에 있는 무슨 교회의 찬양집회에 나갔고 가끔은 온누리교회 두란노 찬양집회에 갔다. 토요일,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찬양집회를 주도했다. 내 남자친구는 기타를 쳤고 나는 탬버린을 든 보컬을 하거나 키보드를 치면서 노래를 했다. 우리 둘은 매일 아침마다 큐티도 했고 주말에는 수유역에 있는 아멘서점에서 책과 음반을 골랐다. 그때 락음악을 사탄의 노래로 규정한 무리들이 있었는데 나도 그 영향을 받아 몇 년동안 모은 모든 테이프를 죽죽 잡아빼서 가위로 싹둑싹둑 오려 버렸다. 엄마는 방문을 열고 내가 테이프를 다 망가뜨리는 걸 보더니 “어머, 저 미친년.”이라 말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연애초기, 내 남자친구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친구에게 연애질이 들통나 무리에서 왕따가 되었고, 학교에서는 남녀공학에서 계집애가 학생회장이 되었다는 이유로 남자애들에게 물을 뒤집어쓰기도 했고, 새아버지와 엄마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집안꼴은 개판이었다.

모든 상황이 악화일로이던 때에 남차친구가 다미선교회 책을 내밀었다. 지금은 그 책 제목이 기억이 안나는데, 파란색 표지에 한 가운데 무슨 사진인지 그림이 붙어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휴거가, 사춘기에, 혼란스러운 집구석에, 외롭던 나에게 한줄기 구원이었다.

다 망해버려라. 나도 망해가고 있으니 다 같이 망하고 나도 하늘나라 가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었다. 창세기부터 읽기 시작한 성경통독을 두 번 마치고 구약이 지겨워 신약을 다시 읽고 있었다. 새로 나온 만나성경을 사서 주석까지 훑어가며 읽으면서도, 다미선교회 이장림목사의 책을 있는 대로 찾아 읽으면서 휴거론에 푹 빠졌다.
친구 한 명이 나에게 “미친 것 같다.”라고 했는데 나는 “미쳐도 모자라지 않겠니.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이라고 대답했던, 그게 중3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주찬양 선교단의 테이프를 다시 듣는데 이런 가사가 들렸다. “누가 아는가, 주님이 오실 그날을.” 이건 성경에 있는 구절인데, 다미선교회의 말과 상반되는 것 아닌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성경을 다시 펼쳤고 요한계시록을 다시 읽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고 다들 “너무 미친 거 같아서” 나를 멀리할 때, 다시 성경을 통해 휴거에서 벗어났다.

곧이어 가족에게 큰일이 생겼고 나는 잠시 학교를 쉬게 되었다. 내가 다미선교회에서 벗어나면서 남자친구와도 멀어졌다. 남자친구는 다시 나에게 찬양집회에 나가자고 했는데 “오빠는 한가하냐? 나는 이제 바쁘다. 공부해야하거든.”이라고 시건방지게 대답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완전히 헤어졌다. 오빠는 교회였고, 교회가 오빠였으니까. 일체된 두 가지 존재를 같이 밀어냈다.
6개월 후에 학교에 복학한 나에게 선생님과 아이들이 “신앙부장” 안 하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종교에서부터 멀어졌고 중창단에 복귀해 노래연습하고 공연다니며 잘 지냈고, 그 이후로는 어떤 종교와도 가까워지지 않고 있다. 회피한다기 보다, 모든 게 납득이 잘 안된다. 가끔 진보적인 신학서적을 읽을 때는 있다.

사춘기에 술 담배 폭력으로 일탈하지 않은 건 교회때문인데, 그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는 데가 그때는 교회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어려서는 매우 금욕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내가 교육받은 범위내에서 정당하게 일탈할 수 있는 한계는 다미선교회까지였을 것이다. 차라리 그때 예체능에 집중했다면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성경을 두 번이나 읽는 기염을 토하진 못했겠지. 성경을 읽은 건 서구문화와 문학을 이해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된다. 종교가 필요한 시기라 종교에 몰입했고, 그 종교에게 기복을 원할 때 위험해진다. 기복신앙으로 바라보던 종교가 나에게 답을 주지 않을 때, 사이비에 빠지는 건 아닐까.

사회적 자아를 키우고 싶은 욕망을 가진 부류가 있을 것이다. 사이비에 빠지는 저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 사연도 모두 안타깝고 구구절절할 것이다. 오죽하면 그랬겠나 싶은 일들이, 많을 것이다. 매몰차게 거절할 줄 모르고, 자기 이득을 우선시 할 줄 모르는, 적당히 손해보고 싸움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힘든 곳이 이 나라니까. 그 개개인 모두가 안타까운 사연이 있을 것이다. 들어보면 모두 그럴만한 사정일 것이고, 모두 이해할 만한 사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용납되는 것은 다르다. 저간의 사연은 이해해도 좋지만, 그렇다고 “불법감금이나 개인의 결정권을 침해하거나 지능적으로 노동력과 금전을 갈취하는 등의” 비윤리적 행위는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건, 스티븐 핑커가 <빈서판>에서 한 얘기다.

2020. 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