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삼척
오래된 골목을 걸으며
당신의 바다를 만져본다

반짝, 하고 빛나던 별들의 폭발과
무너져 내리던 한 세상에 관하여
돌아보면 돌이 될 거라던 이방인의 주문이
국자에 스뎅그릇에
덜그럭, 소리를 내고 떨어질 때

도깨비처럼 벚꽃잎처럼 천변에 흩날리던
산 자의 영혼에 관하여
꽃잎처럼 뛰어내린 여자들에 관하여
비 내리는 기차역 앞마당에 관하여

비린내가 싫었던
당신의 차가운 우주를 잡아본다
여기 이 손끝에 와닿기를

기억이 소멸되지 않기를
시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도가 하나씩 늘어갈수록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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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9

 

 

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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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 앞바다엔 작은 바위섬이 있었대.
사람들은 바위섬이 닿을 듯이 가까워도 갈 수 없다 해서 “멀곳”이라 불렀다지.
작은 바위섬은 온통 바위와 마른 나무 몇 그루 뿐이었지만, 가닿고 싶은 사람들은 다리를 놓아서 섬과 바위섬을 하나로 묶었어.

오래전에 멀곳이었던 바위섬은, 마을의 전망대가 되었대.
멀리서 들어오는 뱃머리를 보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어.

가까이 있어도 먼 곳이 있고,
멀리 있어도 가까운 곳이 있잖아.

넌 지금 어디야?

20170402 장봉도

별바다집

남자는 배를 타고 고기를 낚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그물을 손질하는 사이, 여자는 의자에 앉아 해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밖에 놓인 메뉴판엔 식사가 세 종류.
백합조개가 들어간 칼국수가 있었지만, 

칼국수보다 커피가 궁금했다. 

예상치 못한 사물은 낮게 말한다. 

여기, 무언가 숨어 있다고. 
드립커피가 3500원.
벽에는 LP판이 꽂혀있고 피아노 위엔 영농일지가 있었다.

어느 도예가가 선물했을 법한 도자기들과 

바다를 좋아하는 작가가 붓을 뻗쳤을 바다풍경, 

한지를 우그려뜨려 붙인 천장, 

나무로 된 싱크대, 

피아노 위 주인여자의 흑백사진과  

멀찌기 걸려 있는 어부의 파안(破顔), 
별바다호(號),가 잡아오는 물것으로

노래를 잇는 여자가 있는 곳.
별바다집.

 
20170402 인천 옹진 장봉도 

3월

내 어리석은 낱말들을 모아
미련한 문장 하나를 만들어
뽑혀나갈 나무 뿌리 아래에
숨겨두고 싶었다

부끄러운 연필을 부러뜨리고
운동화 끈을 꼭 묶고 달릴 수 있다면
사다리를 타고 척척
달에 갈 수 있을까

흩어질 꽃잎을 모아
주인 잃은 의자 위에 뿌리면
오늘이 조금 짧아질까

해가 너무 길다고
네가 말했다

170319
경기도 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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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개가 무섭다

순천에서 태어나 자랐다.

형제가 열 둘이었다. 열 두 형제 중에 유일한 딸이었다. 막내 남동생이 하나 있었고, 위로 오빠가 열이 있었다.
아버지는 소작농 관리를 했고 먹고 살만 했다. 1948년, 열 한 살이었다.

여순사건이 났다. 하늘에선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땅에선 군인들이 총을 들고 눈에 띄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인민군인지 국군인지 가늠하지도 못했다.

집에 논이 다섯 마지기가 있었다. 밭도 몇 마지기 있었다. 위에서 쏴대고 아래서 쏴대고 그저 눈에 띄면 죽여 댈 뿐이었다. 당숙모는 말하라는 걸 말하지 않아 방에 갇혀 총에 맞아 죽었다. 아버지의 논에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처럼 흘러 몇 년 동안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한 살이라도 젊은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떠났다. 동네 노인들은 살만큼 살았으니 집을 지킨다며 남았다. 집에는 늙은 할머니가 있었다. 노인들이 떠난 마을에 시체만 쌓였다. 주인 잃은 개들이 마을을 헤매 다녔다. 논과 밭에 늘어진 시체를 굶주린 개들이 뜯어먹었다. 송장을 뜯어먹은 개의 입가에 피가 흥건했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개가 무섭다.

아홉 명의 오빠가 모조리 죽어버렸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정신을 놓았다. 맨발로 산을 계속 오르며 죽은 자식의 이름 열 개를 부르며 헤매고 다녔다. 아버지가 나일론 줄을 구해와 어머니를 묶었다. 밤이 되면 엄마를 가운데 두고 온 식구가 나란히 잤다. 새벽이 되면 엄마가 없었다. 이로 물어뜯었는지 줄을 끊고 달아나 산으로 헤매며 죽은 자식들의 이름을 불렀다. 오빠와 등불을 들고 산으로 들로 엄마를 찾아다녔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에게 옥도정기를 발라주었다. 발과 다리가 다 찢어졌는데 아프다 소리도 안 했다. 엄마는 죽은 자식들의 이름만 불렀다. 엄마는 말라갔다. 허리가 두 손으로 잡힐 지경이었다. 한 번 넋을 놓은 엄마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럴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나는 연로하신 할머니에 미쳐버린 엄마를 돌보느라 학교를 가지 못했다. 위로 오빠가 하나 남았고 아래 남동생도 하나 남았다. 남동생이 친구들과 어디를 다녀오는 길에 미친 개에게 물렸다. 개에게 물린 아이는 셋이었는데, 사내애 둘은 죽고, 가이나 하나는 살았다. 살아남은 가이나는 아직도 고향에 살고 있다. 남동생도 그렇게 가버렸다. 그러니 나는 여전히 개가 무섭다.

화가 치민 아버지는 목소리를 잃었다. 목이 쉬어버리더니 죽는 날까지 말을 똑바로 하지 못했다. 사람이 울화가 치밀면 그렇게도 되는가보다.

위로 오빠만 하나 남았다. 오빠는 학교를 다녀서 한양대까지 나왔다. 나는 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가 아이들을 모두 공부시키려고 했는데,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다. 엄마는 미쳐버리고, 아버지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그렇게 살았다.

어디 길을 가다가도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을 보면 엄마가 보인다. 염을 할 때 보니 온 다리가 멍투성이였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


※ 전라도 순천 출신 백할머니의 이야기다. 눈물을 숨기느라 애썼다. 어머니와 아버지, 노할머니가 돌아가신 나이가 뒤죽박죽이었는데 아마 어머니는 집에서 염을 했다는 얘기가 나온 걸로 보아 일찍 돌아가셨던 것 같고, 오래 살았다는 얘기는 노할머니의 사망시점과 헛갈리신 것 같다.
막내아들까지 잃은 아버지가 갑자기 목이 쉬었다고 하는 걸 들었을 때 나는 자살기도가 있었을거라 생각했다. 농약을 좀 마셨다가 뱉었거나, 기도나 성대에 손상이 와서 목소리를 잃는 경우가 있다. 아마 백 할머니는 그런 상상을, 했어도 한 적 없다고 부정하며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여순 사건은 아직도 원인과 진상규명이 명확하지 않다. 할머니가 살던 마을에서 사람을 죽인 무리가 반란군인지 진압군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저 무고한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죽어버렸다는 것 뿐. 반란이 무엇이고, 좌익과 우익이 누구이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따져 묻지도 못한 채, 70년이 지났다. 희생자의 가족들이 모두 이 땅에서 사라지면, 누가 왜 사람을 죽였느냐고 물을 수 있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는 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죽어버린 아홉 명의 오빠에 대해, 미쳐버린 어머니에 대해, 죽을 떄까지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한 아버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겠지.

 

2017년 1월 18일

독립문 평화의 집에서.

박근혜양은!

“내 담주에 교회 댕겨오니라 늦을끄야. 그래도 좀 봐둬.” 라고 지난 주에 미리 얘기하고 글쓰기 수업에 늦게 오신 84세 갑순씨,
앉자 마자 분통을 터뜨리신다.

“나라가 나라가, 나라가 이게 뭔 꼴이고.
내는 막 미쳐버리겠다.”
고 하신다.

갑순씨는 박근혜를 ‘박근혜양’이라고 칭하셨다.

“이게 뭐꼬 이게.
이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을 벌려놓고 말이다.
내사 마 내가 그 광화문에 나도 나가서 막 미치고 싶다 안카나.
내도 막 소리지르고 막 그 위에 드러누버버리꼬 싶다.
내가 나이만 더 젊었으믄 거 나가서 나도 소리 지르고 그러고 싶다.
박근혜양은 무릎꿇고 빌어야 된다.
잘못했다고 말해야한다.
아이고 내가 마.. 이게 뭐꼬 이게.”

내가 1번 찍으신 어르신들이 더 배신감이 큰 거 같다 했더니
“거럼. 배신이지. 배신이다. 우째 이리 망쳐놓을 수가 있나.
우리가 전쟁 다 겪고 진짜 배곪아 가며 이래 만들어 놓은 나라다.
그래도 나는 새마을운동 때문에 나무 껍질 벗겨먹던 시절 벗어났다고 그래도 박대통령 존경했다. 근데 이게 뭐꼬 이게.
어매 내가 막 밤에 잠이 안 온다.
내는 죽는 것도 안 무섭다. 내가 막 매달려 죽어부리고 싶다.
내 좀 보라고. 내 고생한 게 다 뭐냐고 응 이 말이야아.”

안동출신 갑순씨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앞에 앉은 서울태생 춘예씨는 눈이 벌겋다.
“아 그만 얘기해요 형님.
난 눈물이 나.”

춘예씨 옆에 고흥사람 연례씨가 날 보며 말한다.
“어. 여긴 계속 울었어. 울드라고. 서럽다고.
그러게 내가 뭐라 그랬어. 1번은 안된다 했잖아. 걔들은 안돼.
그거 이제 돈 해먹은 거 다 받아내야지. 전부 다 받아내야돼.”

부산싸나이 영석씨도 한마디 한다.
“그 최태민이가 목사 아이가. 그라믄 그래도 좋은 점만 배우면 될낀데 우째 그래 못된 거만 배워처먹었나 모르겠다.”

네 사람은 한참동안 분통을 터뜨리며 얘기했다.
배신이다 배신.

평생 1번만 찍고 산 사람들이 느끼는 배신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어르신들을 만나다 보면,
어버이연합 알바 나가는 분도 만나고, 민주평통 행사 나가시는 분들도 만나게 된다. 이분들은 조국을 위한 “봉사”라고 생각하고 나가시는 분들이다. 추선희 같은 사람의 입담에 끄덕끄덕 할 수도 있다.
1번은 좋은 거니 1번만 찍는다는 분들도 있다. 정의당이 1번이거나, 노동당이 1번이라해도 그래도 1번을 찍을 분들이다.

이들이 겪은 공포, 이들이 겪은 가난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놀다가 폭탄이 떨어져 반쯤 날아가버린 집을 바라보던 열 살남짓의 어린아이, 배가 고파 나무뿌리를 캐다가 푹푹 삶아먹던 어린아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 어느 날 갑자기 총살당한 삼촌, 날 버리고 도망간 엄마, 널부러진 시체의 산, 의붓동생을 업어 키우느라 학교를 포기했던 어린이, 피난 길에 부모를 잃은 어린이, 자고 일어나면 피난민 천막이 산을 메워버린 풍경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제발 생각 좀 하고 사세요.”라고 그렇게 쉽게 말해도 될까.

나는 흥분한 어르신들에게 이 얘기를 마무리하자며 부탁했다.

“그러니까 어머님 아버님, 다음에는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찍어주세요. 젊은 사람들한테 인기 많은 사람 찍어주시면, 저희가 잘 해볼께요. 잘 감시해볼께요.
2016년 12월.
(기록해놓고 업로드를 안 해 이제 올림)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나 우리 아버지 얘기 할 거 있어.
 
(1936년생, 여, 전남 구례 출생)
 
우리 아버지는 서른 여덟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열 세 살 때 돌아가셨는데,
그때 내가 태어나기는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는데.
왜정때니까
아버지가 징용을 피해서
어릴 때니까
엄마한테 자세히 알아놓을 걸 안 들어놓은 게 한이 돼.
옛날엔 도라꾸(트럭)라 그랬어요.
인부들을 싣고 아버지가 객지로 막 다녔어요.
징용에 안 갈라고.
시골에서 농사짓고,
서당 열고,
한문 한글 다 하고,
밖에 나가서 일 하고.
집에 잘 안 오고 그랬는데.
 
함경도로 평안도로 객지로만 다녔을 때.
내가 9살 때까지.
내가 아홉 살 때.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우리 아버지가 교육열이 강한 분이라,
나를 초등학교 입학 시켜놓고
또 객지로 돈 거야.
나는 그 때는 어린 마음에
엄마가 나 놓고, 아버지랑 객지 다니러 가는데
엄마한테 가지 말라고 치마자락 붙잡고 막 따라 가고
울었던 생각이 나.
엄마가 여기서 학교 잘 다니고 있으면
열심히 다니면
꼭 온다 한 거야.
 
815 해방 됐는데,
어렴풋이 그게 음력 칠월칠석날일거여.
저녁에 우리 친구 하나가,
우리 놀러가자 하고
그 같이 놀던 동네 언니하고 나하고
둘이를 떼어놓고 간다 해서
그럼 우리도 놀러가자 하고 갔는데,
우리 안 가 그러는데
그러니까 실갱이를 한 거지.
근데 그때,
언니 친구가
나를 보고, 이래 돌아보더니
순이야 순이야
니 엄마 아버지 오셨다 해서
어메 나, 지금도 머리가 막 쭈삣쭈삣 설라고 그러네.
열 살 조금 넘었을 때니까.
그때가.
 
그래가지고
아이고 지금도 목 매어서 얘기 못하겠네.
학교 댕긴다고 1년을 떨어져 살았어.
 
거기서 그러고
이제 해방도 되얏고, 징용 갈 일이 없으니까,
세간살이도 사고 아버지 월급도 받고
대충 뭐가 생각이 나는데
9살 때는 엄마 아빠만 갔으니까 모르지.
(그 세간살이도 사고 이래가지고)
도라꾸에 실어가지고
도라꾸를 먼저 고향으로 보냈는데
도라꾸 기사가 사기를 치고
사라져버린거야.
응. 도라꾸랑 같이. 그렇지.
엄마 아버지랑 기차 타고 가고
이제 차만 먼저 보냈는데.
그리 돼 버린 거야.
살림을 홀딱.
 
그래도 사람이 무사히 들어와서 다행이다 하고
응 우리 엄마 아버지가 그리 말하드라고.
참말 행복하게 살았지.
 
 
여수 반란사건 났잖아.
무지한 백성들 그냥 막 갖다가
처단하고
눈만, 눈만 껌뻑거려도 잡아가고 그러던 때.
그런 때여 그때가.
여기서 안 죽이면 저기서 죽이고.
그때 우리 아버지가 돌아 가신 거지.
육이오 사변 나기 전 해.
그리고 육이오 나고.
 
 
▶옆 자리 할머니가 말을 보탰다.
▶징용을 안 가셨는데 돌아가셨네.
 
 
징용 안 갈라 했는데 그렇죠잉.
나도 태어나기만 거기서 태어났지
객지로 객지로 다녀서.
친구가 없어요.
 
아버지는 열세 살에 돌아가시고
형제는 오남매인데, 남동생 하나 먼저 죽었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 아버지가 건설업, 감독정도 되는 거지.
내가 어릴 때 따라다닐 때 보며는,
함경도 갔던 생각이 나는데
여섯 살, 다섯 살인가.
지금도 이북애들 보면 집들 나오는 거 보면
그때 내가 봤던 집 그대로 나오는 게 있어.
일자 집인데, 일자 집 여기 이렇게 나란히 있어.
한 세대씩 줘서 거기서 인제 몇 세대가 사는데,
어리니까 데리고 다닌 거지 이리 저리 다녀야 하니까.
어떤 때는 기차도 타고 다니고.
 
우리 증조 할아버지부터 벼슬아치 집안이라는데
자식도 딸 둘 아들 하나 삼남매 중에 우리 엄마가,
몸종까지 일 봐주는 사람까지 다 대동해서 시집을 보내서
일을 할 줄 몰라.
당췌 일을 할 줄 몰라.
그러니 시골에서는 이리 저리 벌어먹을라면
품이라도 팔아야 하는데
뭐 할 줄 아는 게 있어.
김도 못 매고 아무 것도 못하는거야.
품팔이도 못 한거야.
일을 할 줄 몰라서.
그래서 우리가 엄청 고생했어.
18살 때까지 살다가 인제 거기 살다가 연천으로 갔어.
소개를 해서 고모할머니가.
거기 살만한 집이 있다 해서.
연천이 제 2고향이 되어버렸어.
 
제가 1936년생인데.
그때 연천이 종전 막 되고 난 다음이니까
머 아주 하꼬방에 판자집에 뭐 움막에 그냥 난리도 아니고
거기가 그니까 휴전선 바로 아래 니까 아주 그냥 머.
 
그래서 내가 이제 컸으니까
빵 만드는 집에 취직하고, 돈 벌고
결혼해가지고 살림 놓고 살았지.
그래서 그때부터는 고생을 덜 했어.
 
우리 어머니가 재주가 없어가지고
고생을 많이 했어.
우리 어머니는 몇 년도 돌아가셨는지 모르겠는데
일흔 아홉에 에 부산서 돌아가셨어.
 
왜정때 징용 피해 이리 저리 객지로 돌아
여순반란 나서 아버지 죽어
전쟁 나고 구례 사는데 지리산으로 패잔병 숨어들고,
밤이면 밤마다 이 빨치산들 와서 있는 대로 다 집어가.
트럭 사기 당했지.
빨갱이들한테 밤마다 털리지
어머니는 능력이 없지.
오남매가 고생을 많이 했지.
 
우리 엄니가 그때는,
참 어떻게 저렇게 자식들한테 저럴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가 그때 서른 넷 다섯인데.
 
자기 집에서 아씨 아씨 하던 사람이,
얼마나 황당했겠어.
 
재가는 무슨,
양반집이라 재가도 못하고
재가 하면 그 동네에서 쫓겨나지. 난리나.
우리 어머니도 대단하고,
우리 아버지도 참 대단한 분이야.
그때는 딸들은 안 가르쳤어요.
아들 딸 안 가리고 능력대로 가르치겠다고 우리아버지가.
나를 가지고 그렇게..
내가 조금 똑똑했는지,
공부 잘 하면 대학까지 꼭 보내주마 했는데
돌아가셨어.
엊그제 같어. 그게.
나는 아버지 얘기만 하면
이렇게 지금도
눈물 나와.
눈물이 나서……
 
 
2017년 1월 16일.
서울, 동대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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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입니다.

– 뭘 써야 할 지 모르겠어요. 나는 이룬 것이 없고, 내 인생은 다 실패예요.

나는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든 이 분에게 그렇지 않다고 우길 작정을 했다.

– 여기 책에 있는 글도 그렇고, 이 교재, 응? 이 책, 여기 있는 사람, 방금 읽은 그것도 그렇고. 이렇게 사람들이 살다 보면 그래도 뭐 하나라도 이룬단 말이죠. 나는 전혀 그런 것이 없어요. 아무 것도 해 놓은 게 없어요. 내 인생은 완전히 실패예요.

나는 짖궃은 표정으로 “아닐껄요.” 하고 웃었다.

– 정말이예요. 나는 다 실패. 모든 게 실패.

“성공한 사람들은 오늘도 죄다 청문회장에 앉아 있잖아요.”
노인의 앞에 앉았던 영감님이 내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굵은 주름이 남은 굽은 손가락으로 노인은 얇은 글쓰기 교재를 쥐고 가만히 있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남은 듯 했다.
다른 노인들은 교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몸을 숙여 그 분 앞에 팔꿈치를 대고 가까이 말했다.

“아버님, 우리 모두 다 죽잖아요. 인생에 성공이 어딨어요. 모두 다 죽는다는 건 결국 다 실패한다는 말이잖아요. 아닌가요?”

허허허.
노인이 웃었다.

– 나는 다 실패여…

“어떻게 실패했는지 알려주세요. 그럼. 실패인지 아닌지 좀 보게요.”

노인이 환하게 웃었다. 어이가 없는 것인지, 기분이 나아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굽은 허리를 일으켜 노인이 나에게 목례를 했다.

“다음 주에 꼭 뵈어요.”

다짐을 받고 싶었다. 당신이 배운 것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공부 잘 하고 돈 잘 버는 게 성공이 아니라는 걸 그 사람의 입으로 듣고 싶어졌다.

알 수 없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내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 라고 뇌까리며 형광등을 켜둔 채로 모로 누울 지, 나는 알 수 없다.

– 1월 9일 월요일, 서울 동대문에서.

 

201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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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할매들 – 과거와 과거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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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바라지 골목은 사라져버렸다. 높게 둘러친 펜스를 따라 독립문초등학교 앞에서 골목을 찾는다. 독립문 초등학교는 오늘 입학생 예비소집일인가보다. 지킴이 아저씨가 어린이와 엄마들을 맞이하고 있다. 한 아이가 두리번거리자, 혼자 왔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할머니와 같이 왔다고 저어기, 오고 계시다고 대답했다.

골목을 내려간다. 천주교 무악동 선교본당이 있다. 낮은 기와지붕, 나무대문을 밀고 들어선다.
노인들을 만나러 간다. 분명히 대부분 여성일테지.
서까래가 있는 대청마루에 어디선가 진동이 올 때마다 문이 흔들리는 유리달린 나무문틈으로 찬바람이 스며든다. 88년쯤,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마당이 있는 한옥집. 마당엔 성모상이 있다.
할머니들이 미리 모여 명찰을 달고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를 따라 온 어린아이가 지루함을 참아내려 애쓰고 있다. 방학은 모두에게 쉽지 않다. 예상대로 남자노인은 없다. 나이를 먹어가며 사람의 내공을 알아채는 신묘한 기술이 나에게도 생겼다. 활동가의 내공이 강하게 느껴지는 팀장과 인사를 주고 받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업공간과 나누어 둔 곳에는 낮은 탁자위에 과자와 인스턴트 차가 마련되어 있다. 이런 곳에서 잽싸게 차를 타고 물을 끓이는 이는 언제나 내가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간식거리를 대접하는 일에 늘 굼뜨다. 나도 커피믹스를 하나 타 마셨다.

바닥은 따뜻했다. 다리를 모으고 앉은 노인들이 다리를 구부리고 있기 힘들다고 말한다. 나는 다리를 뻗으시라고 얘기했다. 저도 관절염이예요. 저도 이따가 뻗을거예요. 노인들이 쑥스럽게 웃는다. 수업이 시작되고 글쓰기 교재를 나눠드리자 글은 쓸 줄 모른다고 할머니들이 입을 모은다. 글 쓰란 소리를 하지 말라고 못을 박는다. 말로 하면 열권 이상도 얘기한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구술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 토박이들일테고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엔 지역의 역사가 담겨 있을거다. 할머니들은 넓은 마당이라는 마을의 한 곳에 대해 말했다. 검색엔진이 알려주지 않는 넓은 마당이라는 곳은 예전에 공터가 있던 곳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패드를 꺼내고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재빠르게 받아 적었다.

29년생부터 50년생까지. 무려 21년이나 나이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노인”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묶였다. 이름, 나이, 고향, 서울에 언제 오셨어요? 라는 걸 가지고 자기 소개를 했다. 고향은 어디고, 서울엔 언제 왔고, 이 동네엔 언제 왔고, 지금은 어디에서 누구랑 살고,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일단 고생한 얘기가 먼저 터진다. 첫 만남부터 자기 이야기를 줄줄줄 늘어놓는 경우는 흔치 않다.

사별하고 혼자 지낸 할매는 왜 그리 많은가. 왜 옛 사람들은 남자들이 그리 일찍 죽었을까. 평균수명으로 남자들이 더 짧게 살다 간다지만, 내가 만난 노인들 중 젊은 시절 남편을 잃은 할매들이 꼭 몇 명씩 있었다. 스물아홉에 혼자되었다, 서른여덟에 혼자되었다는 할매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6-70년대에 애 딸린 과부로 살던 사람들은 “안 해 본 일”이 없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범주의 돈벌이를 했다. 대부분은 장사다. 광주리를 이고 시장에 나가 팔아보는 걸로 시작을 한다. 여성들이 직장인으로 살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없었다는 얘기다. 아이들은 둘 이상이다. 집 가까운 곳에서 장사를 하면 아이들도 들여다볼 수 있고 동네에서 아이들끼리 잘 크기도 했다. 고등어를 떼어다 판다고 나섰다가 생선 아가미에 구더기가 낄 때까지 한 마리도 팔지 못해 그대로 버렸다는 얘기부터, 그 무거운 수박을 받아다가 리어카에 실어 판 얘기, 요즘은 가사도우미라고 하는 남의집살이, 아모레 화장품 장사, 미제장사,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각종 비정규직 노동의 직업이 등장한다. 그때는 직장이 있어서 월급을 받으면 살기가 편한 것이었고, 직장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은 그날 그날을 자신의 노동과 입담으로 해결해야 했다. 할매들의 이야기를 받아치면서 고생 많이 했다고 무용담 삼아 말하던 내 모친을 떠올렸다. 엄마 고생은 고생도 아니다 생각했다가, 비슷한가 했다가, 노동의 강도를 어디가 더 세다고 비교하는 것은 고통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과 비슷한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바닥은 따뜻하고, 머리는 차가운데 낮은 천장 아래 둘러앉아 있으니 이야기가 더 잘 나오는 것이겠다. 정면을 보고 앉는 교실형 구도와 둘러앉아 있는 구도는 한 장소내의 권력서열을 말해준다. 학교의 교실은 그 자체로 비민주적이다. 특정인에게 특정한 것을 배워야 한다는 압박은 사람을 유순하게 만드는 것인지 비겁하게 만드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비슷한지를 말하는 자리에 높낮이가 있을 필요는 없다. 할매들의 이야기는 한 시간 반 동안 끊임없이 이어졌다. 29년생인데도 미모가 빼어난 할머니가 잘 안 들린다며 나를 보고 자꾸 웃는다.

– 예전엔 못 배우고 글 모르는 게 참 부끄르왔는데, 이제는 그런 거 없어. 살만치 살고 고생할 만치 다 했는데 멋이 부끄러. 안 부끄러인쟈.

– 못 배운 것보담도, 살다 보니 이뤄놓은 게 없어서 내가 참 부끄럽습니다. 어딜 가서 앉아 있으면 얼굴이 붉어지고 말을 잘 못하고 그럽니다. 나름대로 부지런히 살았는데, 어쩌다가 이래 되얏나 모르겠심다. 나는 생전 구경도 안 댕겨봤어요. 제주도도 못 가봤습니다. 그리 살았는데, 어찌 지금 사는 게 이렇습니다.
– 우리가 몇 번 봤어도, 이런 얘기는 오늘 처음입니다. 내 살아온 얘기를 누가 들어줍니까. 이렇게 말할 기회도 없었고, 나도 말해 본 적이 없는데 얘기 해보니 참 재미있고 좋네요.

허리가 적당히 굽은, 다리가 적당히 휜, 노인들이 주섬주섬 힘겹게 일어나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할매들을 보내며 신발을 확인한다. 신발 안 미끄러우세요? 추운데 잘 여미고 들어가세요. 나는 부러 살가운 척 한다. 때로는 옷깃도 여며드리고 신발을 신는 사이 들고 있는 커피잔도 들고 서 있는다.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다 만 제일 젊은 어르신이 내 옆에 선다. 사잇문에 몸을 반쯤 기대고는 잘 뚜등긴다고 칭찬을 한다. 타자를 빠르게 친다는 말이다. 할매라 부르기 애매한 이 분은 붉은 모직 모자를 쓰고 서서 아들이 만나고 있는 여자 흉을 본다.
맘에 안 들어 죽것어. 그러실만 하겠는데요.
그래도 낼 모레 칠순인데 여기서는 막내시네요. 라며 웃으니 잇몸을 보이며 큭큭대고 웃는다.
사는 게 무셔. 나는 자다가 깨서 멍, 하니 있을 때가 많아. 여기 노인네들 봐봐. 내가 젤 어린데. 내가 이쟈 낼 모레 칠십이면, 팔십까지, 구십까지 살아야 허잖어. 죽지도 몬하고. 죽는 게 반갑지는 않을 것이고. 10년, 20년을 내가 어찌 견디나. 나는 사는 것도 무섭고, 죽는 것도 무섭고. 우울햐. 에이. 기분이 안 좋아. 어째 갈수록 사는 게 무서워.

사는 게 무섭다고. 나도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 모르는데, 할 일도 없고 갈 데도 없으면 앉은 자리가 그대로 무덤이겠지. 나도 사는 게 무섭다.

어르신들과 일별하고 돌아오는 길, 남대문을 향해 가는 수문장 교대식 행사행렬을 본다. 과거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몸부림이다. 어쩌자고, 왕조의 기억만 남겨두는가. 변변한 무덤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과거는 모두 어디에 묻혔나.
남산을 돌아 해방촌으로 내려서며 지나가는 여자들의 얼굴을 훑는다. 나의 과거 어디메에서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늙지 않고 있는 이태원언니들을 찾는다. 미제장사 했다는 할머니의 미소를 떠올린다. 역사의 과거에 돌아앉은 행촌동 골목길에서, 타인의 과거를 엿듣고, 나의 과거를 지나, 나의 미래에게로 돌아간다.
오늘따라 햇빛이 따가워 눈에 멍이 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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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근데 계속 가는데 마다 느끼는 건데, 아무래도 할매들이 날 좋아하는 거 같다. 아마 다 내 몸에 붙은 살 덕분이 아닌가, 마 그래 생각하고 있다.-

☆ 서울한겨레두레협동조합과 협동조합 은빛기획의 공동사업에 관한 기록입니다. 계속 쓸란지는 잘 모르죠 뭐.

2017.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