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반파는 빈대떡집

2시.
늦었다.
문을 빼꼼히 열고, 밥 먹을 수 있냐고 물었다.
시간 맞춰 우루루 먹고 나가는 직장인들을 상대로 하는 백반집에 오후 2시 넘어서 입장하는 건 결례다. ‘일하는 사람들도 쉬고, 저녁 장사 준비도 해야 되는데, 그래도 오후 3시는 아니니까, 아직 남은 게 있겠지.’ 하면서 쭈뼛대며 기웃댄다. 주인여자가 남자에게 “어떻게 해?”라고 묻는다. 남자가 들어오라고 해서 기뻐하며 자리에 앉았다.
반찬과 밥이 나오고 맑은 된장국이 나왔다.
‘우와 떡갈비다.’
우리가 밥을 먹는 사이, 주인여자는 닦은 물컵을 테이블위에 나란히 놓고 물기를 말렸다. 그 다음엔 소쿠리를 양손으로 들고 물기를 털다가 젓가락 한 짝이 바닥에 떨어졌다. 소쿠리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주인이 떨어진 젓가락을 집으러 가는데 사장님 뒷통수에서 ‘아이고 귀찮아, 아이고 하기 싫어.’ 문자가 전송되는 것 같았다.

반찬을 다시 보면서 ‘이런 장사를 매일 어떻게 하나’ 생각했다.
밥하기 귀찮아진지 오래전이다. 예전 전업주부들은 환갑 넘어가니 남이 해준 건 누룽지도 맛있다더니, 우리또래는 밥하기 시작한지 10년차 되면서부터 지겨움에 넌덜머리를 낸다. 집이 지척인데 사무실 앞 백반집에서 밥먹는 이유도 별다른 게 아니다. 집에 가서 차려 먹고 설거지 하는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지는 건, 한마디로 귀찮아서다. 먹는 건 좋고, 먹기 위해 꼼지락 대긴 귀찮으니, 인간이 이리 무쓸모하다.
나물 무치고 어묵 자르고, 이 반찬을 만들기 위해 온종일 씻고 다듬고 볶고. 물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거지만. 밥도 맛있고 반찬도 맛있는 이 집 백반은 1인분에 6천원이다.

“저희 너무 늦게 왔죠? 몇 시 오는 게 제일 좋으세요?”
“1시 조금 넘어서 오시면 제일 좋아요. 여기 장부로, 대놓고 드시는 분들이 있어요. 제가 2015년부터 장사를 시작했는데, 저희 간판이 빈대떡이잖아요. 원래 전 장사를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여기 동네 아저씨들이 그거 잘 안 될거래. 그러면서 차라리 백반을 해보라더라고. 그래서 나는 아니 여기 동네 백반집들이 있는데 우리까지 하면 좀 그렇지 않나, 싶었는데 아저씨들이 그래요. 가서 먹어보면 백반집 할 용기가 날거래요. 그래서 백반을 시작했어요. 진짜로 저녁엔 손님이 별로 없고요. 전은 비 오는 날이나 좀 돼요. 그리고 저희는 명절에 장사가 잘돼요. 요기 아파트에서 명절에 전 예약 많이 하세요. 젊은 엄마들은 다 사가더라고요.”
“저희가 거기 살아요.”
“아 그러시구나. 내가 사장님 아까 얼굴 이렇게 보고, 어디서 봤는데 어디서 봤는데. 지난번에 거기 이삿짐 아저씨들 밥값 내고 가셨죠? 아휴. 이제 알겠다. 여름에는 저희가 에어컨 아저씨들이 많이 오세요. 요기 장부 달고 밥 드시는 분들은 회사 분들인데 시간을 정해서 오시거든요. 12시에 오는 회사 있고, 12시 40분 오시는 분들 있고 그래요. 그래도 대부분 1시면 장부 다시는 분들은 다 끝나니까, 그냥 일반손님 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지난번에 그 이사하신 날 예약 못 받는다고 한 게 그래서 그랬어요. 여기 백반집 간판으로 바꾸라는데 그랬다가 장부 달고 드시는 분들 밥 못 드시면 어떻게 해. 그냥 있으려고요. 아까 들어오실 때 우리 아저씨한테 어떻게 하냐고 물어본 거는, 저희가 오늘 점심에 떡갈비 했어요. 근데 다 떨어진 줄 알고. 우리 아저씨가 그 비싼 비비고를 사 왔어요. 그래서 지금 일단 맞춰드린 거예요. 내일도 고등어 할 거라 지금 받아놨는데, 저거 60마리 가지고 되지도 않아요. 안에 또 있어. 이제부터 그거 해야 해요. 아휴. 힘들어. 너무 일이 힘들어, 나 진짜 이거 안 하고 싶어요.”
“그러게요. 이게.. 보통 일이 아닌데요. 반찬도 맛있어요.”
“우리가 작년까지 5천 원 받았어요. 근데 손님들이 7천 원 받아도 된다, 고속도로 휴게소 가면 9천 원짜리도 엉망이라면서, 자기들 지방 갔다 와야 된다고, 일부러 와서 밥 먹고 가시는 분들도 많아요.”

사무실이 있는 곳은 고속도로 진입로와 가깝고 임대료가 높지 않은 편이라 유통회사들이 꽤 많다. 렉카차 회사도 있다. 외곽순환도로와 경수대로를 끼고 있으니 유통이나 물류회사에는 부담없고 좋은 조건이다. 그런 작은 회사 사람들이 이 집 단골이고, 이 골목에서는 제일 맛있는 집이다. 이사하는 날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이 이 동네에서는 저 집이 제일 맛있다고 알려줬다. 우리는 밥 한 공기를 추가해 둘이 반 절씩 더 나눠 먹고 사장님 이야기를 한참 듣다가 잘 먹었다고, 내일부터는 한가한 시간 맞춰서 오겠다고 얘기하고 나섰다. 사장님이 우리가 나가는데 지난번에 돌린 이사 떡도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해줬다.
백반집에서 나와 커피집을 가면서 박부장이 말했다.
“아줌마가 많이 심심했나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 고등어 60마리면, 하루 60인분 나가고, 월세 나가고, 월 수익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고 있었다. #속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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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동이야기

2020. 5. 20.

롱안 쌀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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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부근에 있는 롱안쌀국수 집은 베트남 이주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사장이다. 처음 그 집에 갔을 때는 여름이었다.
에어컨도 틀지 않은 매장에 사내 아이 둘이 의자에 누워 뒹굴다 내가 들어서자 벌떡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옆에는 아이들의 책가방과 신발주머니가 있었다.

그 다음에 갔을 때는 어린 사내아이 하나와 할머니 한 분이 마주 앉아 뭘 먹고 있었다. 계산할 때 보니 사내 아이가 앉은 자리 언저리에 장난감과 책 같은 잡동사니가 있었다.

오늘은 옛날 까까머리처럼 머리를 깎은 사내아이가 계산대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내 테이블로 와서 주문을 받았다. 키나 얼굴로 보아 내 아들과 나이가 비슷해보였다.
아이가 주방을 향해, 엄마, 라고 불렀다.

오늘의 국수는 지난 번과 맛이 좀 달랐다.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2인분을 현금계산하면 10,500원이라는 메뉴가 추가 되었다. 나는 몇 달에 한 번 정도 가는데, 내가 밥 시간을 잘 못 맞추는 탓도 있겠지만 갈 때마다 손님이 없거나 먹고 나간 흔적만 있다. 가게는 가끔 닫혀 있는데 언제 닫는지는 잘 모르겠다.

난 그래도 이집이 장사가 더 잘 되었으면 좋겠다. 손님도 꽉꽉 차고 그래서 아들 말고 종업원도 두고, 사장님이 주방에서 나와 카운터에서 환히 웃으며 지폐를 셌으면 좋겠다. 장사가 잘 되면 ‘고수 많이 주세요’ 라는 말을 편하게 할 수 있을 거 같아서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호계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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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19.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518민주화운동 설명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518민주화운동 설명>>

1. 배경

1979년 10월 26일, 1961년부터 18년간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을 쥐고 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하인 김재규의 총을 맞고 사망합니다. 대통령이 죽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시민들은 독재가 끝났으니 새로 대통령도 뽑고 민주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해 겨울, 대통령을 죽인 범인을 잡겠다며 군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군인들은 다음 대통령 선거를 취소해버렸습니다. 나라가 위험해졌다며 군인들이 시민들을 감시하고 경찰을 대신했습니다. 소장계급이었던 전두환이 대통령처럼 굴었습니다. 최규하 총리는 자리에서 쫓겨났고 전두환을 중심으로 군인들이 정부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군인들이 세상을 점령한 것입니다.

2. 왜 시작되었나?

1980년에 만일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면 대통령후보로 나올 만한 정치인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김대중은 인권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박정희 대통령 때 정부에 반대하고 독재를 그만하라고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었습니다. 전두환과 군인들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일했던 김종필과 시민들에게 존경받았던 김대중을 체포했고, 박정희를 반대했던 김영삼을 비롯한 정치인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하거나 집안에 가둬버렸습니다.

옳은 소리를 해온 정치인들이 범죄자처럼 감옥에 갇혀버렸습니다. 민주주의를 바랐던 시민들의 실망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절망하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와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외쳤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대학생들이 먼저 시위에 나섰습니다. 현수막과 맨주먹으로 나선 학생들을 군인들이 마구 잡아갔습니다. 광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광주는 전라남도에서 가장 큰 도시입니다.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에 나서 힘으로 정부를 제압한 전두환은 물러가라, 더 이상의 독재는 싫다고 소리높여 외쳤습니다.
전두환과 군인들은 인기가 높았던 김대중과 김대중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광주는 특히 김대중의 인기가 높았습니다. 시민들은 감옥에 갇힌 김대중을 석방하고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습니다.

3. 광주 민주화운동의 시작

5월 18일, 그동안 작은 시위를 이어가던 광주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민주주의 수호를 외쳤습니다. 바로 다음 날 5월 19일, 전두환과 군인들은 거칠고 사나운 부대를 만들어 광주에 보냈습니다. 군인들도 이유를 모르고 광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군인들의 대장은 전두환이었습니다. 광주에 가는 군인들에게 광주에 전쟁이 벌어졌고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무리들이 숨어있으니 누구든지 눈에 띄면 잡아서 가두고 죽여도 된다고 지시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군인들은 정말 전쟁터에 온 것으로 생각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마구 때리고 죽였습니다. 무섭고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5월 21일부터는 시민들이 힘을 합쳐 경찰서에서 총을 꺼내고 버스와 트럭으로 길을 막고 군인들을 잠시 몰아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더욱 뜨겁게 모이자 더 많은 군인들이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모여들었습니다. 군인들은 헬기에서 총을 쏘고 거리에서도 총을 쏘고 도망가는 시민들을 잡아 곤봉으로 마구 때렸습니다.
광주로 가는 길은 모두 막혔습니다. 나올 수도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섬이 되어버린 삶의 터전에서 군인들의 총탄에 쓰러지고 다쳤습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나서서 주먹밥을 만들어 시위대에게 전달했습니다. 모두가 가족이고 하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이렇게 한 마음으로 힘을 합치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대동사상, 대동정신이라고 부릅니다. 광주의 시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를 아끼고 지켰던 정신이 바로 대동정신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광주의 시민들이 죄 지은 것도 없이 계속 죽어나가는 것도 모자라, 탱크까지 앞세워 시민들을 짓밟으려 했습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도청에 모여 광주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은 헬기까지 동원해 도청을 공격했습니다. 이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군인들이 광주에 몰려들어와 민주주의를 외쳤던 사람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 가뒀습니다. 5월 27일이었습니다.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에서는 수백명이 넘는 사람이 죽고, 3천명 넘는 사람이 다쳤습니다. 죽은 사람들 중엔 청소년도 있었습니다. 이 열흘 동안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4. 518민주화운동의 이름이 생기기까지

그때 군인들에 의해 집안에 갇혔던 김영삼은 1993년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야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민주화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김대중은 1998년에 김영삼대통령에 이어서 우리나라 15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은지, 여태까지도 518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거짓말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전두환이 자기를 반대하는 시민들을 죽이라고 했다는 증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사실이 아니라며 계속 발뺌하고 있습니다. 1980년 5월에 가족을 잃은 시민들이 모든 것을 기억한 채 살아있는데도 말입니다.

5. 우리의 할 일

이 끔찍하고 슬픈 사건은 1980년 전국을 뒤덮은 시민들의 열망, 민주주의를 원하는 움직임이었다는 뜻을 담아 지금은 “518민주화운동”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됩니다. 우리는 끝까지 비극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기억해주세요.
1980년 5월 18일, 광주는 바로 우리입니다.

 

작년에 써둔 것 보완해서 공유.

안양군포의왕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진행할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518민주화운동 설명을 담을 전시물이 필요한데, 아무리 찾아도 적당한 걸 찾지 못해,
글쟁이의 쓸모를 발휘해 봄.
사실 왜곡이 있나 계속 검토중.
자극적인 묘사는 하지 않으려고 애써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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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인증에 실패했습니다

시장 근처에 옛날통닭과 생맥주만 파는 집이 있다.
아이가 그 집 통닭이 제일 맛있다고 해서 가끔 가서 포장을 해 온다.

오늘은 통닭 두 개를 튀기고 지역화폐카드를 내밀었더니 통닭집 남자가 이거 어떻게 쓰느냐고 묻는다.
동사무소 가서 받아왔는데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고. 여기 돈 들어오면 문자 오는거냐고 물었다. 나는 ‘앱을 까시고 통장을 연결하셔야 한다’고 하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해서
앱을 깔아드릴까요? 물었더니 휴대폰을 냉큼 가져왔다.

구글 플레이스토어를 여는데 연결이 잘 안되어 보니 로그인이 안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아, 구글 계정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이메일이 있어야 해서요.”
“아휴 나는 그게 뭔지 몰라요.”
“제가 해드릴까요?”
“아휴 그래주면 고맙죠.”

나는 다 튀긴 통닭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메모지와 펜을 받아 이름과 생년월일을 입력하고 구글아이디를 하나 만들었다. 비밀번호는 쉬운 걸로 만들어 메모지에 적었다. 그제서야 내 앞에 앉아 있는 초로의 남자가, 사장이 아니고 직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주인인지, 또래의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이 남자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구글계정을 일단 만들고 구글플레이스토어가 열려서 경기지역화폐 앱을 다운받았다.
“이거 다운받으면서 통장 연결해서 쓰시는 거예요. 통장 번호 기억하세요?”
“통장 없어요.”
“아.. 월급 들어오는 통장 같은거.. 전혀 안 쓰세요?”
“통장 없어요.” 라고 같은 대답을 하자, 주인여자가
“기초수급 들어오는 통장 있잖아요.”라고 말을 보탰다.
앱 다운로드가 완료되었고 나는 그제서야 통장이 없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앱이 열려서 이용약관에 동의를 하고 본인인증을 해야 한다. “삼촌”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어느 통신사냐고 물으니 삼성폰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바탕화면으로 넘어가 앱을 몇 개 살펴보니 LG U+ 앱이 보여 통신사는 엘지신 거 같다고 하면서 본인인증을 시작했는데, 본인인증이 계속 안됐다.
기초수급이 들어오는 통장이 있다는 얘기가 떠올라,
“이 전화번호 삼촌꺼세요? 누구 명의로 되어 있어요?”라고 물었더니
“여동생이 해줬다”고 대답했다.

본인이라는 걸 인증할 수 없었다. 그 사이 나는 그 사람의 정보를 너무 많이 알게 되었다.
삼촌은 내 손에 들려 있던 자기 전화기를 살짝 잡았다. 나는 손에 힘을 풀었다.
“아이고 됐어요. 닭만 다 식었네. 제가 내일 동사무소 가볼께요.”
나는 이메일 주소와 비밀번호를 적은 종이를 ‘삼촌’에게 건넸다.
“이거 가지고 가시고요. 혹시 앱으로 뭐 해야된다 라고 하면 이거까지 했다고 얘기하시고요. 이메일 만드는거요. 본인인증이 안되면 상품권으로 받으실 수도 있다고 하니까, 그렇게 받으셔도 될거예요. 아무튼 가서 물어보세요.” 나는 닭봉투를 들고 일어섰다.

인사를 하고 닭봉투를 자전거 앞 바구니에 넣고서 자물쇠를 푸는데 주인여자가 나와 문앞에 서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장사하세요?”
“아.. 예.. 저 이런 저런거.. 글도 쓰고.. 시민단체 일도 좀 해요.”
“그래서 그렇게 착하시구나. 고맙네요. 이거 너무 어려워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줘도 못 써요. 괜히 시간만 버리고 맛있게 못 드시게 됐네.”

디지털이 발달하면서 누군가에겐 앉은 자리에서 꿈적앉고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누군가에겐 그림의 떡이 되어간다. 본인인증을 할 수 없고, 자기 명의로 된 휴대폰이 없고, 자기 통장을 쓸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모두 선한 피해자는 아니지만, 자신의 과거를 자꾸 후회하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나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말했던, ‘삼촌’은 잠을 잘 이룰 수 있을까.

‘우리 집엔 에어프라이어도 있어요. 집에 가서 덥혀 먹으면 돼요. 닭 식은 건 괜찮아요. 모두 해결해줬으면 좋았을텐데.’ 라고 자전거를 타고 오며 못 다한 이야기를 혼자 머릿속에서 떠들었다.

집에 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들이 왜 착한 척 하고 다니냐고 한다.
확 마…

 

2020.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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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로아트 – 생애사쓰기

발달장애인작가를 길러내는 사단법인 로아트와 6회차 생애사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2020년 5월 8일에 시작한 로아트 생애사쓰기는 법인 내 임원진을 대상으로 합니다.

6회차는 집단 생애사쓰기를 깊게 진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가볍게 자신의 삶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는 간단한 프로그램으로 진행합니다.

1강 – 생애사쓰기를 하는 이유

2강 – 자기 소개와 과거의 흔적 몇 가지 찾기

3강 – 가계도, 역사로 통해보는 내 근원 찾기

4강 – 연표 작성

5강 – 내 삶에 가장 큰 사건

6강 – 나와 사회

이번 강좌는 군포의 아름다운 갈치 저수지에 자리한, 카페 이백에서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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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생애사쓰기 결과를 보여드리며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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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공간에서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니, 뜻밖의 행운이네요.

이번 강좌는 6월 12일까지 진행됩니다.

문화공동체 히응의 생애사쓰기 강좌는

2013년부터 집단생애사쓰기의 노하우를 가진 대표자 이하나가 직접강의합니다.

관심있는 단체, 기관은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hana@allmytown.org / 031-455-2016

[퍼스트 펭귄] 12. 50년, 호주제 폐지에 걸린 시간

https://together.kakao.com/magazines/989

 

 

‘퍼스트 펭귄 캠페인’은 펭귄 무리 중에서 제일 먼저 검은 바다로 뛰어들어 다른 펭귄들에게 용기를 주는 ‘퍼스트 펭귄’과 같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과 제도에 대해 처음 목소리를 낸 시민들과 ‘공익단체’들을 알리는 캠페인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퍼스트 펭귄’들의 스토리가 연재됩니다. 함께 응원해주세요! 본 기획연재는 카카오같이가치와 서울시NPO지원센터가 함께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

1914년 태어난 이태영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두 오빠 밑에서 자랍니다. “아들이든 딸이든 공부만 잘하면 대학에 보내주겠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이태영은 공부에 뜻을 품어 1931년 정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됩니다. 독립운동가 정일형과 결혼 후 남편의 지지에 힘입어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1932년 이화여전에 입학하고 1946년 서른세 살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서울대학교 최초의 여대생이 됩니다. 1952년 제3회 고등고시 사범과에 합격해, 사업 시험 역사상 첫 합격자가 됩니다. 

김병로 대법원장이 이태영을 판사 임용해달라고 건의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한마디로 이를 거절합니다. 

“여성은 아직 이르니 가당치 않다”

 
여성차별의 피해자였던 이태영은 이후 변호사가 되어 1953년 가족법 초안을 만들 때 여성계 인사들과 함께 법전편찬위원회에 남녀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헌법 정신에 맞게 민법을 제정해 달라는 건의서를 제출합니다. 1957년 국회 공청회에서 가족법상의 남녀차별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내용을 담은 청원서와 호소문을 발표했으나, 1958년 새 민법은 호주제를 비롯한 남녀 성차별적 조항을 담은 채로 발표되고 맙니다.
1989년 가족법 개정을 위한 여성대회 관련 경향신문 기사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와 여성계 전체가 50년을 넘게 싸워온 가족법과 호주제에는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걸까요? 가족 내 성평등을 위해 애써온 지난 50년, 다음과 같은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가족 내 성평등을 위해 여성계가 싸워온 시간들]


 
1948년 이후, 호주제를 채택했던 유일한 나라 
 
호주제는 ‘호주’를 중심으로 가족 구성원들의 출생, 혼인, 사망 등의 신분 변동을 기록하는 제도입니다. 당시의 민법은 ‘가족’의 범위를 ‘일가의 계통을 승계하는 자이며 호주와 같은 호적인 자’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호주제는 일제 시대에 도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1947년 가족법 개혁으로 호주제를 없앴고,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유일하게 호주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성을 따라 쓰는 우리나라에서는 일가의 계통을 승계하는 것이 남성만 가능하다고 말하며, 한 가족을 거느리며 부양하는 일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잇는 남자를 호주로 정했습니다. 호주가 될 수 있는 순위는 아버지 > 아들 > 결혼하지 않은 딸 > 아내 > 어머니 > 며느리 순으로 정해졌습니다. 여성의 경우, 결혼 전에는 아버지가 호주가 되고, 결혼 후에는 남편이, 남편이 사망하면 아들이 호주가 되어야 했습니다.
 
현실에서는 친아버지만을 호주로 정해 이혼가정의 자녀들은 친부의 동의 없이 여권발급이나 은행거래도 쉽게 할 수 없었고, 학교 입학에도 제한이 있었습니다. 생부, 생모의 자녀로 구성된 가족만 정상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재혼가정과 입양가정의 경우 법의 한계 때문에 겪어야 할 불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1999년 호주제 폐지 운동에 대한 경향신문 기사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호주제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이기에 다수의 국민들도 폐지에 동의하고 있었지만 쉽게 제도가 바뀌기는 어려웠습니다. 호주제는 헌법의 기본정신을 위배한 제도였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헌법 제36조에는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라고 되어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죠.
 
이태영 변호사는 법률전문가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평생을 투쟁했지만 1998년 끝내 호주제 폐지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6개월 뒤 여성단체연합은 ‘호주제폐지운동본부’를 발족해 그간의 투쟁을 통합하고 더욱 구체적인 싸움에 들어갔습니다.
 
호주제 폐지를 위한 큰 물결
 
1997년은 수많은 연인들을 고통에 몰아넣은 동성동본금혼 위헌 소송에 헌법 불합치 판정이 있었습니다. 이 기세를 몰아 2000년 말부터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주축으로 호주제 위헌소송을 이어 나갔습니다. 
 
한국씨족총연합회, 성균관유도회 총본부, 대한독립동지회, 대한노인중앙회 등으로 결성된 ‘정통가족제도수호 범국민연합’은 가족법 졸속 개악 반대 총궐기대회에 이어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는 1천만 국민 서명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호주제 폐지는 종북이라고 이념논쟁을 벌였습니다.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는 정통가족수호 범국민연합
(출처 : 신권화정)
 
“호주제가 없으면 한국 인구 상당수가 쌍놈!”
“온 나라가 콩가루 집안이 되고 우리 민족이 개돼지와 다름없이 되는 꼴을 못 보겠다!”
 
이들의 과격한 언쟁은 국민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 실패하고 역효과만 불러일으킵니다. 
정통가족제도수호범국민연합의 신문광고 (출처 : 신권화정)
 
조한혜정, 고은광숙, 이이효재, 오한숙희 등 여성학자, 여성운동 활동가들이 먼저 ‘양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부모의 성을 함께 쓰고 상징적으로 호주제의 부당함을 알렸습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서명운동과 사이버 시위 등을 벌여나가며 토론회와 의원간담회를 체계적으로 열어 정치적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호주제 폐지가 실현될 수 있는 기틀을 잡아나갔습니다.
 
누구나 가족이 될 수 있듯, 누구나 호주가 될 수 있다 
 
호주제 폐지를 위해 싸워온 긴 세월. 드디어 2002년 대선에서는 한나라당을 포함해 모든 당의 대선후보들이 호주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2003년 법무부는 호주제 폐지 민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고 헌재는 다섯 번의 변론 끝에 헌법불합치 결론을 내렸습니다. 호주제는 2008년 완전히 폐지되었고 가족 구성원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관계 등록제’가 시행되었습니다. 자녀는 엄마의 성을 따를 수 있고,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의 가족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가족 내 성평등을 위해서는 남아있는 과제들이 있습니다.
 
자녀가 우선적으로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도록 한 민법상 781조의 ‘부성주의원칙’에 대해서는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CEDAW)에서 우리나라에 수차례 철회 요구를 하고 있는 사항입니다. 법무부와 여성가족부는 관습과 사회적 이견 등을 이유로 소극적 태도를 보였고 이 조항은 유보된 채 남아 있습니다.
 
호주제 대신 가족관계 등록법이 시행됐지만 기본 내용이 호주제와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외국인 남편을 둔 여성만이 자녀의 성 선택이 자유롭습니다. 아직도 한국의 가족관계는 한국인 남성을 중심에 놓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남편의 동생을 ‘도련님, 아가씨’로 부르는 반면, 아내의 동행을 ‘처남, 처제’로 부르는 성차별적 가족 호칭에 대해서도 개선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와 개인의 가장 기본적인 환경이 되는 ‘가족’에서 남성과 여성이 평등한 모습을 갖춰간다는 것은 성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가장 일차적인 부분이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퍼스트 펭귄들이 호주제에 반대해 싸워온 것은 기존의 권리를 가져오겠다는 것보다 다양한 삶의 형태를 존중하고 어떤 이유로든 기본적인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든다는 의지였습니다. 앞으로도 이 퍼스트 펭귄들의 활동에 함께 해주세요.
 

| 기획 : 서울시NPO지원센터, 현장연구자모임 들파

| 스토리 : 신권화정 (사단법인 시민 사무국장)

| 글 : 이하나 (hana@allmytown.org)

| 삽화 : 이한비 / 인포그래픽 : 문화공동체 히응


👉🏻 가족 호칭 개선에 대한 에세이(한국여성민우회) : https://goo.gl/PR4whC

👉🏻 가족법개정운동본부 : http://www.newfl.or.kr/

👉🏻 한국여성단체연합 : http://women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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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공익활동지원센터 안양지역 간담회

5월 13일 오전 11시 안양시의회 1층 시민토론방에서는 경기도 공익활동지원센터와의 안양지역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안양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와 지속가능한 시민사회 활성화방안 연구회원인 최병일 시의원과 이번 21대 총선에서 동안갑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민병덕 당선인이 배석했습니다.

안양시도 시민사회단체중심의 공익활동지원센터 설립을 논의중입니다만, 가까운 군포시에 비해 조례나 센터 설립에 대한 내용들이 많이 부족합니다. 모든 시민이 편안하게 드나들고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NPO, NGO센터 설립을 위해 여러 논의와 토론이 필요합니다.

2020. 5. 13.

2020년 518 민중항쟁 기념식 – 비대면 방송진행

 

2020년은 518민주화운동, 민중항쟁의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다양한 행사로 시민들과 추모의 뜻을 다지고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만, 코로나19라는 뜻밖의 사태를 맞이해 비대면 방송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노래패 ‘우리나라’의 노래공연, 극단 ‘경험과 상상’의 뮤지컬 &lt;오월의 사람들&gt;, 각계인사와 안군의민기사 정금채이사장님의 추념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역방송인 (구)티브로드ABC방송 (현)SK브로드밴드-ABC방송 채널1번에서 5월 18일 오전 11시에 방송됩니다. 안양군포의왕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유튜브와 페이스북, 카카오TV로 본 방송을 5월 18일 11시 이후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안군의민기사에서 업로드하는 링크는 추후 회원 단체채팅방을 통해 공유드리겠습니다.

본행사를 위해 후원해주신 안양시, 안양문화예술재단, 제40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에 감사드립니다.

2020. 5. 13.

정의기억연대와 시민사회단체에 관하여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이사장, 이제는 국회의원 당선인에 대한 별의 별 소리들이 돌아다니는 걸 며칠 지켜보며, 부글부글한 마음을 참다가 오늘에서야 적어본다.
(요즘은 부글부글 며칠 푹 고다가 쓰는 게 패턴이 되어가나)
1. 정의기억연대는, 그 초창기부터 정신대와 일본군 성노예의 참상을 알리고 비인간적이고 비평화적인 폭력적 행태를 비판하고 이를 사회적 이슈로 만드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정의기억연대 홈페이지에 비전과 미션이 적혀 있다.
비전 :
우리 함께 손잡아 피해자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하고, 이 땅을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으로!
미션 :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활동
– 피해자 지원, 진상규명을 위한 연구.조사
–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교육과 장학사업
– 기림사업과 국제연대 사업
전시성폭력 재발방지를 위한 활동
– 전시성폭력 피해지원

2. 시민사회단체는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 역할을 한다. 시민사회단체는 그 주체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당사자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연대운동이라 할 수 있다.
당사자들이 주체가 되어 운동을 직접 실행하는 경우는 장애인인권운동, 노동운동이 대표적이다. 연대운동의 경우는 조금 더 추상적이고 거대한 공동체를 지향하는데, 교육운동, 환경운동등이 그 범주에 들어간다.
정의기억연대는 당사자와 연대체가 결합한 복합적 형태라 볼 수 있다.

3.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처음 알려진 것은 일본에서였다. 그 문제를 세상에 알린 것이 한국의 학자와 시민운동가였다. 알리기만 하고 사라지는 이슈들은 수두룩하게 많다. 단체를 설립하는 것은 운동의 지속성을 위해서다. 누군가 이 일을 붙잡고 있어야 계속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싸운다고 해서 개인의 생계가 해결되진 않는다. 대부분 초기에는 자기 사비를 털고 자기 시간을 털고 일상과 영혼을 갈아넣어 시작한다. 자본금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은 시민운동단체라 보기 어렵다. 돈이 모이는 이유는 투자대비 성과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익단체는 자본금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으나, 시민운동을 주로 하는 단체들은 초기에 절대 자본금을 가지고 시작할 수 없다. “훌륭한 일 하십니다.”라는 칭찬으로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 시민사회단체다.

4. 일본군성노예문제는 이제 국제적으로 알려졌지만 일본은 아직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박근혜정권에서 저지르는 당사자 동의 없는 합의 때문에 일이 더 꼬였다. 대통령직을 박탈당한 자가 행했던 일을 원상복귀하는 일이 어렵다. 한마디로 투표 잘못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수십 년간의 노력이 작살난 것이다.
이번 일로 언급되는 문제들 중에 내가 동의하는 부분도 있다. 당사자들이 피해자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고통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당사자들이 나서지 않으면 운동의 힘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그 중에 김복동 어르신처럼 앞장 서서 나섰던 분도 있고 거부한 분도 있을 것이다. 모두 개인의 선택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하고 헤아려야 하는 부분이다. 수십 년 동안 집회에 나가 자신의 피해를 말하고 또 말해야 하는 고통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고통은 왜 발생했는가.

누가 피해자를 평생 피해자로 살게 했는가. 누가 피해자를 죽을 때까지 피해를 말하게 만들었는가.
정대협인가, 일본인가?

일본이 사과를 했다면 정대협은 피해자로 말하기를 중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대협이 그 일을 중단했다면 일본은 이 모든 증거를 삭제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을 것이다.
그래도 정대협이 그 일을 중단했어야 한다는 주장은 ‘내 딸이 위안부로 갔어도 나는 일본을 이해한다’는 주옥순의 주장과 다른가? 그렇다면 정대협 외에 누가 그 일을 했을 것인가? 졸속으로 협상했던 한국정부가 그 일을 했을 것인가? 정권이 바뀐다고 믿을 수 있나? 아니. 행정기관은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다. 행정기관은 입법기관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고, 입법기관은 당대의 요구에 따라 이기적으로 구성된다.

5. “이래서 시민단체에 후원 안 합니다.” 라는 댓글들을 보며 안타까웠다. 정의기억연대는 피해자 지원을 하는 재단이 아니다. 정대협에서 정의기억연대까지로 이어진 일본군피해자 문제의 보상과 지원은 국가대 국가의 문제로 일본정부와 한국정부가 해결해야 한다. 정의기억연대는 피해보상금을 받아 피해자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법적 의무를 가진 것이 아니다.
시민사회단체에 후원하는 것은 조직이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다. 그 조직이 무너지지 말라는 의미를 담는다. 상근자 급여 조금 더 가져가고, 밥이라도 사먹고, 교통비라도 하라고 후원하고 회비를 내는 것이다. 정의기억연대 이전의 정대협이 구호단체이거나 복지단체인가?
국가대 국가의 피해보상 문제를 일개 단체가 집행하는 경우도 없다.

후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지역아동센터에 당신이 후원금을 낸다고 치자. 그 돈으로 쌀을 살 수도 있고, 아이들의 낡은 신발을 사줄 수도 있고 다 같이 읽을 책을 살 수도 있고, 활동가가 아이들을 데려오고 데려가면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먹을 수도 있고 아픈 아이들 데리고 병원에 가느라 택시를 탈 수도 있다. 돈 좀 줬더니 길바닥에서 아이스크림 사먹더라고, 돈 좀 줬더니 돈 아깝게 택시 잡아타더라고, 비난하는 것은 마땅한가?

시민사회단체의 후원금은 대부분 운영비다. 최저임금보다 못한 비용으로 노동하는 활동가들이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붙잡기 위해 최소한의 급여가 필요하다. 전국평균 활동가들의 급여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도 최저시급 이상의 비용을 받을 자격이 있고, 상여금을 받을 자격도 있고, 복리후생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 돈이 그렇게 아까운가?
한겨레에서 냈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의 노동조건에 대한 기사가 있다.
http://www.hani.co.kr/…/society/society_general/918928.html…
나는 지역에서 교육운동을 하고 있지만, 2014년부터 지금까지 무급으로 일했다. 교육운동 외 다른 단체의 간사역할을 하면서 2020년부터 월 20만원씩의 활동비를 받고 있다. 그게 내가 받는 급여의 전부다.

각 시민단체는 홈페이지를 운영할 정도의 재정상황이 되면 홈페이지에 모든 재무상황을 공개한다. 홈페이지 운영도 어려운 단체는 총회를 거쳐 회계 내역을 공개한다. 내부자들이 자금을 유용하면 운영위원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싸인 하나 맘 편하게 못 받는게 시민단체다. 모두가 감시자고 철저하길 원한다.

6. 활동가의 자녀가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유학을 갔다고 시비를 거는 것에 대해 실소을 참지 못하겠다. 세상은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하며, 당신들이 아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인내심과 위기대처능력을 가진 자들이 있다. 접시 닦으며 유학 생활 하는 사람 있고, 노숙자가 되면서 아이비리그에 다니는 케이스도 봤다. 2년제 컬리지를 다녔다가 4년제로 점프하는 경우도 있다. 나도 중국에서 공부하며 아르바이트로 생계해결하고 사업도 했다. 가진 게 없는 집구석에서, 부모는 운동한답시고 내 팽개쳐져 자란 아이들은 상상이상으로 강인하게 자란다. 돌봄의 사각지대에서 알아서 크는 아이들이다.
그들의 돌파력은 보호받으며 자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다. 배경 없고 돈도 없는 자들이 신념을 가졌을 때,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가진 자들은 절대 알 수 없다. 년 소득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데 유학이라 놀라운가? 그만큼 대단한 의지의 인간들과 그 자녀들이 시민운동계에 수두룩하게 많다. 그래서 버티는 것이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극우파들이 수십 년을 괴롭히고, 도무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꿈을 현실화 시키는 일이 만만해보이나? 그렇게 우스운 사람들 아니다. 운동가들은 돈과 명예를 떠나,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주체적으로 산다는 게 뭔지 안다면, 이들이 얼마나 강인한지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7. 김복동 장학금은 한겨레 기사에 잘 나와 있다.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들의 자녀들, 보호받지 못하나 보호받지 못했다고 말 한 번 해본 적 없는 이들에게 쓰겠다는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만든 장학금이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rights/944520.html
활동가는 시민단체에서 급여를 받는 사람만을 말하지 않는다. 급여 없는 활동가가 더 많다. 때로 활동가들은 과로사로 먼저 떠나기도 한다. 투쟁과정중에 병을 얻는 경우도 있다. 이들의 활동이 세상을 바꾸는데 미약하나마 힘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들이 적어도 부모를 원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만드는 장학기금들이 더러 있다. 운동에 빚을 진 사람들이 만들어주는 기금이다. 김복동 장학금이 나눠먹기로 보였다면, 고인의 유지가 무엇인지, 그분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알고 떠드는지 궁금하다.

8. 정의기억연대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잘 알겠다. 어쨌거나 물어뜯고 공격할 대상이 필요한 것이겠다. 본인의 낮은 자존감을 타자에 대한 공격으로밖에 표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남은 삶에 행복이 있길 간절히 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민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정치에 뛰어드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에 대해 첨언하자면.

그동안 시민운동은 정치, 행정과 시민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생계형 정치인이 늘어나고, 정치가 신뢰를 잃고, 언론도 돈을 쫓기 시작하면서, 운동은 뒷심이 부족해졌다. 믿을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성명서를 내거나 기자회견을 해도 찾아오는 언론사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운동을 그만둘 수 없기 때문에 언론사도 만들고 직접 정치에도 뛰어들 수밖에 없다. 운동을 모르는 사람들은 개인의 영달이나, 이익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판에 속한 자들의 사고방식은 좀 다르다. 모든 것이 운동의 일환이다. 정치에 뛰어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 이후에 변질되는 것은 개인의 운명이다. 시민사회단체가 개인의 욕망까지 비난할 권리는 없다.

caption
2020. 5. 12.

[칼럼]집에가자 : 재택근무를 그만두며

한국노총 발행지 <노동과 희망>에 청탁을 받고 기고한 글입니다.

한국노총 노동과희망 바로 가기

 

어릴 적 상상했던 2020년에도 오늘의 풍경이 숨어있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 화상회의와 화상전화교육, 팔다리가 가늘고 머리통만 커진 인간들.
하늘을 나는 자동차는 없지만, 비대면 업무와 온라인학습은 뜻밖의 바이러스 때문에 앞당겨졌다. 강제 재택근무에 돌입한 사람들은 초반에는 가족들 때문에 집중이 안된다더니, 거리두기 권고가 3주를 넘기자 집중력이 떨어져 업무시간이 늘어지고 출퇴근이 없으니 밤낮없이 일만 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월요일 오전 8시 50분이면 메시지창이 열린다

2005년, 결혼과 임신을 하면서 재택근무를 시작한 나는 2020년 지금까지 재택근무중이다. 가족사업과 작은 회사 두 개 거치면서도 절반은 재택근무를 했다. 독립해서 프리랜서를 거쳐 개인사업자를 낸 지금까지도 굳이 사무실을 얻지 않았다. 사무실 월세도 부담이지만, 대리돌봄이 불가능한 육아문제가 가장 컸다. 아침을 먹고 아이가 학교에 가면 9시부터 거래처들의 업무가 시작된다. 나도 그 시간에 맞춰서 책상에 앉는다. 월요일 오전이 되면 8시 50분, 또는 8시 이전부터 메세지창이 열리기 시작한다. 일을 하기 싫어도 시작해야만 하는 외부의 압박이 온다. 점심시간에도 전화기가 조용하다. 아이가 어릴 때는 ‘일 그만하고 놀자’고 조르기도 했고, 친구들을 우루루 데리고 와서 소란스럽기도 했다. 친구들과 집에서 놀고 있으면 먹을 것만 챙겨준 뒤 신경을 안 써도 되지만 어느 순간 분란이 일어나면 일을 중단하고 일어나 중재도 해야 한다.
사무실이 없으니 회의를 할 때면 항상 내가 상대방의 장소로 찾아갔다.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꽤 든다. 하루에 회의 세 건이면 하루가 몽땅 날아갔다. 작년부터는 이동시간을 아끼자며 온라인 미팅을 하는 팀도 생겼다.

 


▲재택근무를 하는 이하나씨의 책상

 

아이가 잠든 후 반 11시에 다시 하루가 시작된다

재택근무에서 어려운 것은, 업무와 일상의 분리다. 육아 때문에 재택근무를 선택했으니 육아와 살림은 당연히 함께 지고 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순간적인 집중력을 높이는 기능을 발달시켜야만 한다! 아침 9시부터 커피 한 잔 내려 컴퓨터 앞에 앉으면서 업무를 시작하고 가족이 없는 시간엔 절대 집안일을 하지 않았다. 모든 살림살이를 다 뒤로 미룬다. 눈앞에 설거지가 쌓여있는 걸 못 참는다면 재택근무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전에 집중해서 일을 하고 나면 점심시간엔 뇌가 지치는지 졸음이 쏟아진다. 여기서 재택근무의 장점이 발휘된다. 내 멋대로 점심을 걸러도 되고, 다른 직장인들이 밥 먹고 커피 마시는 시간에 낮잠을 잔다. 오후가 되면 집으로 돌아온 아이가 간식을 내놓으라고 외친다. 아이가 오기 전에 기력을 회복해두어야 늘어지는 오후에 아이도 돌보고 일도 하는 것이다. 저녁 시간에 내가 어질러놓은 것까지 밀린 집안일을 하며 업무로부터 한 번 더 쉰다. 저녁을 해 먹이고 아이를 재운 뒤 다시 책상에 앉는 시간이 밤 11시였다. 혼자 집중해야 할 일이 있으면, 아이가 잠든 이후인 11시부터 하루를 다시 시작했다.

 

다년간의 재택근무를 거치면서 내가 찾은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오전 9시 전에 일어나 샤워하고 머리도 감고, 아침을 먹고 커피도 내리고 언제든지 미팅을 나갈 준비가 된 채로 일을 시작한다. 옷은 굳이 갈아입지 않아도 괜찮다.

2. 오전 9시 이전에는 되도록 컴퓨터를 켜지 않는다. 하루 일정을 정리하거나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본다. SNS도 괜찮다.

3. 업무 관련 장비는 가장 좋은 것으로 쓴다. 장시간 앉아 있게 되고 수시로 야간작업에 돌입하기 때문에 키보드, 마우스, 마우스 패드, 의자는 능력치 내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고른다. 나는 MS의 스컬프트 키보드와 마우스를 쓰고 있는데 의자는 PC방 의자로 바꾸고 싶다.

4. 하루를 마무리 짓는 시간을 정해야 한다. 저녁 7시까지는 어렵더라도 밤 10시라든가. 연장근무는 아무래도 새벽 2시에는 끝낸다거나.
5.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혼자 진행한다면 집중해서 한 가지 일을 마치고 의자에서 일어나 다른 걸 한다. 안 그러면 화장실 갈 때 말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점점 의자가 나인지 내가 의자인지 모르는 지경이 된다. 이때 스트레칭을 하면 더 좋겠지만 게으른 자는 자기 성향에 순응하도록 한다.
6. 수시로 수다를 떨 수 있는 절친과 간간히 메신저로 채팅을 하면서 외로움을 달랜다. ‘혼자 일한다는 건 고립되기 쉬운 일이라 절대적으로 SNS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재택근무의 함정은 끊임없는 셀프착취

재택근무의 장단점을 상당히 파악한 지금이 이르러서야, 나는 다음 달에 사무실을 얻기로 결정했다. 집안에서 내가 차지하는 공간이 점점 넓어져서 가족들이 앉을 자리도 없어졌다. 정리정돈을 못 하는 성향이라 온 집안이 내 업무의 잔해들로 가득하다. 가정을 지키며 돈도 번다는 유세를 떨 수 있으나 집안의 고요한 폭군의 입지에 오른다. 당사자인 나는 끝도 없이 24시간 근무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낮에 자고 밤에 일해도 되지만, 습관이 되면 회의도 가기 싫어진다.

 

재택근무는 끊임없는 셀프착취에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출퇴근길을 오가며 보게 되는 도시의 풍경과 사람들의 표정을 모르고도 랜선으로만 일을 하며 업무에만 몰입할 수도 있다. 시간을 아끼려 화상회의를 하고 업무공간을 벗어나지 않으며 효율을 잔뜩 높일 수도 있다. 아파트 단지안의 빈집의 대낮은 산사만큼 고요하다.

 

사람을 만나는 게 공포가 되는 시대에, 다시 밖으로 나가겠다는 결단을 한 것은 사람을 부딪히고 싶어서다. 누군가 나의 공간에 편하게 찾아오고 그에게 커피를 내려주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는 시간, 모르는 사람들이 밥을 벌기 위해 뛰어다니는 모습을 창가에 서서 지켜보는 시간이 필요해졌다. 거슬리는 옆 사무실의 큰 소리나, 공동공간을 두고 일어나는 자잘한 신경전도 적당한 자극과 활기가 될 지도 모른다. 침체된 채 저녁도 새벽도 없는 자기노예화에서 벗어나, 매일 돌아갈 곳, 매일 그리운 곳을 두고 ‘집에 가자’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어쨌거나 모든 일은 사람이 만나야 이루어지니 말이다.

 

#재택근무 #업무와일상의분리 #셀프착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