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종로 5가, 카바이드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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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0일, 민중의소리 발행

남편은 성실했다. 매달 따박따박 받아오는 봉급으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차츰 살림을 늘려나갔다. 살림을 늘린다는 것은 어제까지 쓰던 낡은 냄비를 버리고 새 냄비를 사는 것, 그 중에서도 조금 더 좋은 것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성실하게 매일 매일 좋은 대우를 받으며 직장을 다니던 남편이 듬직했다.

어느 날 남편이 회사에서 받는 봉급보다 더 벌 수 있으니 사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성실한 거로는 누구 뒤지지 않는 사람이다. 성실하고 부지런하면 무엇인들 못하랴. 남편이 잘 해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남편이 차린 공장과 어린 아이들과 같이 살던 조그만 집까지 모두 은행으로 넘어갔다. 남편이 이 고비를 넘기면 된다고 할 때, 나는 이웃과 친구들을 찾아 푼돈이라도 꾸어 남편에게 주었다. 금방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점점 들어가는 돈만 늘어났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집을 비워줘야 했는데 빚이 있으니 멀리 갈 수도 없었다. 살면서 갚겠노라 약속하고 바로 옆 동네로 이사했다. 빚을 꿔준 사람들과 연락도 끊지 않았다. 누군가는 와서 욕도 하고 화도 냈지만 다 내가 돈을 빌리고 약속한 날짜에 갚지 못했으니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계절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편은 집에 드러누워 일어나지도 않았다. 미안하다고만 했다. 성실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나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답답했다. 내가 무지해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무슨 도움을 줄 수는 없을까, 아무 것도 알지 못하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무작정 버스를 탔다. 버스는 종로 5가를 지나갔다. 해가 진 지 몇 시간이 지났다. 어둑한 밤거리에 다들 집에 돌아갈 법도 한데 카바이드 불빛이 한데 잔뜩 모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버스에서 내려 불빛을 따라갔다.

겨울 포장마차 노점 불빛(자료사진)
겨울 포장마차 노점 불빛(자료사진)ⓒ뉴시스

카바이드 불빛은 출항을 앞둔 오징어잡이배처럼 빛나고 있었다. 불빛은 수 십대의 리어카 위에 있었다. 리어카 위에는 국수, 오뎅, 꼼장어 같은 게 놓여 있었다. 장사를 나가는 사람들이 한군데 모여 있었던 것이다.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부터 애기 업은 젊은 여자도 있었다. 그들은 리어카 위에 뭔가를 척척 올리더니 하나씩 대열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는데 가슴이 콩닥거렸다.

“아저씨, 나도 장사하고 싶어요. 아저씨 나 좀 알려줄 수 있어요?”
“남편이 죽었어요?”

아. 장사를 나가는구나. 내가 잠들던 시간에 이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잠도 제대로 못자고 다음 날 해질 무렵 어제 갔던 장소를 다시 찾아갔다. 한 남자가 제일 커다란 리어카에 지갑과 잡화를 올려두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먼데서 그 남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그 남자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물건 살 폼도 아닌데 리어카 앞에 버티고 있으니 그 남자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그 남자에게 말했다.

“아저씨, 나도 장사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돼요? 아저씨 나 좀 알려줄 수 있어요? 나 돈 벌어본 적 없어요.”

남자는 나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물었다. “남편이 죽었어요?”

여기까지 적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수년 전 성업하던 식당을 접었다. 식당이 있던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지금은 복지관에서 영어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우고 미처 졸업하지 못한 학교의 졸업자격 시험도 통과했다. 칠순을 넘기고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몇 차시였던가. 생애사쓰기 수업 중에 카바이드 불빛을 발견한 순간의 이야기를 써왔다. 써 온 글을 내가 대신 읽었다.

“밤 9시에 혼자 버스를 탔다. 가다보니 종로 5가였다.” 라는 문장을 읽고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밤에 일 없이 혼자 버스를 탔을 때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다들 아시죠? 이게 무슨 기분인지.” 라고 물었고, 칠순을 넘긴 수업 참가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되었든 다른 곳으로 나를 데려다 줄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그 위에 거침없이 올라타고 싶은 마음, 그 신산함에 대하여, 동의를 구했다.

남편이 죽지 않았으나, 돈을 벌지 못하는 남편은 마치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 이야기의 주인공은 노점상을 시작한다. 누워서 꼼짝을 하지 못했던 남편은 아마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우울증을 앓고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노점상을 거치다 노점상 철거 투쟁에도 나섰다. 정부가 마구잡이로 노점상들을 때려 부쉈고 데모도 해봤다던 이야기를 짧게 언급하고 그 시절의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인의 도움으로 식당을 열었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사명감으로 살았다. 식당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자식을 유학까지 보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2시에 일이 끝나는 고된 노동을 십 수 년 겪고 비로소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구청의 철거 단속에 항의하는 노점상(자료사진)
구청의 철거 단속에 항의하는 노점상(자료사진)ⓒ민중의소리

카바이드 불빛에 홀려 장사를 시작한 사람은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졸기도 했고 바닥만 보면 눕고 싶었다고 적었다. 그 정도의 고된 노동이 있어야, 나이 먹어 복지관에 다니며 여생을 즐길 수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이 사람은 경매로 넘어간 건물주 때문에 권리금 한 푼도 못 받고 보증금만 건져 가족을 먹여 살린 식당을 접었다. 후회는 없다고 했다.

나는 이 사람의 노동이 과연 온당한 대가를 받았던 것인지 따져보고 싶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뼈를 깎는 고통이 없이 평온한 노후를 얻을 수 있을까. 카바이드 불빛에 생계의 희망을 보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도 가히 이해할만 했다.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

2019년 11월 14일. 민중의 소리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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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이름 내가 지었지.
피란민으로 남한에 내려왔거든. 내려와서 동네 이장이 호구조사 나왔을 때, 이름이 뭐냐고 묻길래, 저는 이름이 김명자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어. 그 이름이 맘에 들었거든. 명자. 아끼꼬. 원래 어릴 때는 우리 아버지가 독자인데, 우리 할머니가 독자가 큰 딸을 낳아놓으니 이쁘다면서 이쁜아 이쁜아 이렇게 불렀지. 그래서 그게 그냥 이름이 됐어. 다른 이름이 없었던 건데, 호적에다가 이쁜이라고 올릴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내가 나는 이름이 김명자요, 라고 한 거야.

자,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잉?

먹고 살기 힘들어서 우리 할머니는 지금 내 나이만큼 되었을 때야.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딸을 일곱을 낳았다고. 내가 맏딸이고. 할머니까지 해서 우리 식구가 모두 다 남만주로 갔어. 거기 가서 딸을 하나 더 낳았지. 그래서 우리 집에는 딸이 여덟이 됐어. 나하고 밑에 동생 셋은 이름이 있는데, 나머지는 이름이 없어. 딸그만이, 딸그뿐이, 뭐 그랬어.

그 당시에 재수 좋은 사람은 헤이타산 끌려가고 재수 나쁜 사람은 정신대로 끌려갔어. 정신대 알아? 내가 그때 열여섯 살 먹었는데, 열여섯 살 먹어서 결혼을 하면 안 잡아간다 하길래, 그때 우리 살던 집 근처에 스물여섯 먹은 총각이 혼자 와서 살드라 이거야. 그래서 그놈하고 결혼을 했지. 그게 우리 영감이여.

일본놈이 언제 손을 들었냐 하면 음력으로 7월 초이레 12시였어. 중국에서, 몽고에서, 만주에서 일본놈 하고 미국놈 하고 싸움을 했어. 미국놈이 이기고 일본놈이 졌지. 그때는 중국에서 만주족들이니 몽고사람들이 우리를 막 창으로 찔러 죽여버린다고 해. 무서워서 우리는 너무 무서워서 거기서 살 수가 없어. 소련놈이 이북에서 정치한다고 하고, 미국놈은 이남을 정치한다고 해. 그래서 거기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이제 내려오는데 겨울을 내내 걸어서 여덟 달을 걸어서 내려왔어. 내려오는 길에 너무 추우니까 아들이 얼어버렸어. 서울에 도착했는데 아들이 얼어 죽어버렸어. 그래서 남대문에 죽은 거 버리고.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자료사진

그리고 그 담에 임신을 해서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이 일흔 넷이여 시방. 그 아이를 지 아부지가 딱 짊어지고 내려왔다고. 일본놈들이 면이란 면은 다 걷어가서 솜도 없고 이불도 없어. 여름옷도 없고. 그래서 홑이불 뜯어가지고 묶어서 애 아부지가 그 딸을 업고 내려왔다고. 그게 지금 일흔 넷이여.

여덟 달을 빌어먹으면서 내려오는데 한 번은 어디를 걸식을 하러 갔어. 밥을 뜩뜩 긁어서 밥풀만 줘. 그때는 양은그릇도 없고 다 투가리 들고 다녔어. 우리 밥 좀 주시오, 했더니 우리도 점심이 얼마 없응게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오, 하는 소리를 듣고 뒤로 돌아서는데 눈물이 비 오듯 하더라고. 날은 추워서 강가에서 바들바들 떨고. 그때는 우리 아들이 아직 안 죽었어. 밥을 얻어먹으면 한 숟갈, 두 숟갈 뜯어서 먹이고, 그래가지고 그 아들을 업고 내려왔거든.

여덟 달을 걸어서 내려왔어. 빌어먹으면서 내려왔어. 걸어서 여덟 달을 빌어먹으면서 내려왔어. 아들은 얼어서 죽어버리고. 죽은 거 남대문에 내다 버리고. 애 아부지도 내려오다가 얼어버려서 내려와서는 죽어버리고. 오는 데 추웅게 죽어버리더라고. 그때 내가 서른셋이여. 여태까지 내가 혼자 살았어.”

지금으로부터 6년 전, 한 복지관에서 만난 노인이다. 을축년 소띠 1925년생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총기 있었다. 남만주에서 내려와 서울에 자리 잡았던 주소도 줄줄 읊었다. 첫 수업때 아들이 죽은 이야기를 했다. 황해도에서 태어났다는 김명자옹은 먹고 살기 힘들어 남만주로 이주했다가 해방 이후 전쟁 즈음에 서울로 내려온 것 같았다. 말이 매우 빨랐고, 알아듣기 어려운 단어를 섞어 말했다. 변형된 일본어가 곳곳에서 튀어나왔고 나이 탓에 발음이 어눌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김명자옹은 첫 수업이후로 다섯 번을 더 만났다. 매번 수업이 끝날 때마다 나를 잡았다.

“선생님, 내 얘기 좀 들어봐.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항상 같았다. 남만주에서 추운 겨울을 견디며 여덟 달을 걸식을 하며 걸어 내려왔다. 남대문에 도착하니 등에 업은 두 살배기 아들이 얼어 죽었다. 남대문에 아기 시체가 쌓여있었다. 피난 내려오며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모아두었더라. 나도 거기다 아기를 던졌다. 묻어주지도 못했다.

아들의 죽음에서 멈춘 김명자옹의 삶
노인은 얼마나 많이 죽은 아들의 이야기를 했을까

내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담당복지사를 붙잡았다. “선상님, 내 얘기 좀 들어봐.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같았다. 구체적으로 상상하면 끔찍하고 처절해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얘기였다. 매주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사뭇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노인의 손을 잡았으나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더러 마음의 귀를 막았다.

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주최로 열린 세월호참사 전면 재수사, 국민고소고발인대회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9.11.02
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주최로 열린 세월호참사 전면 재수사, 국민고소고발인대회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9.11.02ⓒ김철수 기자

노인은 얼마나 많이 죽은 아들의 이야기를 했을까. 자기 옛 주소까지 기억하는 총명한 사람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처음부터 얘기한다는 것이 항상 남만주에서 걸어 내려와 등에 업은 아이가 죽은 것이었다. 그 사람의 생애 처음은 남만주가 아니었고, 아이가 죽은 일도 그 사람의 삶의 첫 장면이 아니었는데, 김명자옹의 처음은 남만주에서 걸어 내려와 아이가 죽었고, 그 아이를 묻어주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게 김명자옹에게는 삶의 전부였을 것이다.

상실은 사람을 멈추게 한다. 김명자옹은 묻어주지도 못한 얼어 죽은 아들 이후의 삶을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때 죽지 않은 딸이 일흔이 넘었다는 것 외에는.

아이들을 잃고 난 다음엔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누군가 애써 잡아끈다고 그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죽음은 그 무엇보다 무고하기에, 그 슬픔도 대책이 없다. 태연하게 “명복을 빈다”라고 말하기도 죄스럽다.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공개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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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소리 : 발행 2019-10-18 12:05:51

“이거는 선생님만 보시고.. 공개는 좀…”
아무렇게나 뜯어온 다양한 종이에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씨를 내보이며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이거는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지 말고, 선생님만 보시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남성노인들은 공개하지 않을 이야기는 아예 쓰지 않는 것인지, 그럴 이야기가 있으면 아예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것인지, ‘공개하지 말고 선생님만 보시라’고 했던 남성노인은 없었다.

여성들이 말하는 ‘선생님만 보시라’는 내용은 대부분 가족과 얽힌 이야기다.
올 봄에 만난 한 여성노인은 수업이 끝나고도 나를 붙잡고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갔다. 주인공의 남편은 오랫동안 도박에 빠져 살았다. 남편이 지방으로 일을 하러 간다고 해서 혼자 얼마나 외로울까 힘들까 걱정했다. 남편이 지방으로 일을 떠난 뒤 주인공은 이웃의 권유에 못 이겨 아이들을 데리고 집 근처 공원에 놀러갔다. 공원을 뛰어놀던 아이가 저기 아빠가 있다고 소리를 쳤다. 남편은 지방으로 일 하러 간 적 없었다. 집 근처 어딘가에 도박꾼들과 방을 얻어 기거하며 본격적으로 도박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 이후로도 남편과 이혼하지 않았다. 남편은 아직도 살아있고 이제는 도박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사람은 꽤 많은 글을 썼지만 복지관에서 책자로 만든다고 했을 때 원고를 내지 않았다.

“선생님, 나요, 이거 다 썼지만, 아직은 아닌 거 같어. 못 내. 이거는. 내가 진짜 부끄러워서. 언젠가는 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근데 지금은 아니야. 우리 애들은 이런 거 몰라. 이런 거까지는 공개 못해. 내가 이 동네 너무 오래 살아서….”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그이의 손을 잠깐 잡았다.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한국여성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장미를 들고 폭력 근절을 요구하고 있다.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한국여성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장미를 들고 폭력 근절을 요구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이 사람이 참가한 수업은 모두 여성만 있었다. 그 중 전업주부로 살아온 사람은 단 한 명이었고, 대부분 가장으로 살아온 여성들이었다. 남편의 폭행을 몇 장에 걸쳐 써온 사람도 있었고, 시댁의 횡포를 한 두어 줄로 적은 사람도 있었다. 폭력이 없는 남편들은 아팠다. 이들은 남편이 먼저 병들어 죽지 않는 이상, 버텼다. 수업에 참가한 여성들은 남편이 먼저 죽은 동료들을 “힘들게 살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본인들도 만만치 않게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이 먼저 사라지는 삶이 더욱 안타까운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한 달여가 지나, 가장으로 살았으면서 가장행세를 하지 못했던 여성들이 왜 남편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리 동네에 남편이 먼저 간 이가 있었어. 근데 남편이 먼저 가면,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여. 밤에 찾아와. 남자들이.”
“누가 찾아온다고요?”
“동네 남자들이 그렇게 찾아온다고.”
다른 여성들도 말을 보탰다.
“그렇지. 그럴 수밖에 없지. 아이고 우리 동네는 진짜 흉측한 일도 있었다니께. 친척 아저씨까지 온다더라고!!”
노인들은 그들 특유에 탄식을 쏟아내며 몸서리를 쳤다.
“선생님, 무슨 말인지 알지요?”
삼시세끼 밥도 제대로 못 챙겨먹던 시절에, 끼니보다 잦았던 성폭력의 그림자가 교실위에 나타났다가 가라앉았다.
“그래서 집에 남자가 있어야 하는 거야. 아무리 쓸모가 없어도, 집안에 들어앉아 있어야 하는 거라고.”
아빠가 없는데도 남자 신발을 현관에 두고, 음식을 배달시키면 빈 방을 향해 “여보!”라고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내 등줄기를 스쳐갔다.

일러스트.
일러스트.ⓒ제공 : 뉴시스

이 교실에 있었던 여성들의 남자들 중 다수는 기운이 있는 상태로 집안에 있으면 술을 마시거나 가족을 때렸고 그렇지 않으면 아프다가 먼저 죽었고, 집밖에 있으면 도박을 하거나 다른 여자를 만났다. 소수의 남자들이 충실히 가정생활을 했고 소처럼 일했다.
여성노인들은 계속해서 말했다. 얼마나 모진 세월이었는지, 힘겹게 살아왔는지, 가족에게 끊임없이 상처받으면서도 가족을 지키려고 얼마나 애써왔는지.

가장 처음의 상처는 가족에게 왔다.
물론, 가장 처음의 위로도, 가장 처음의 돌봄도 가족이었다. 한 교실 안에서 여성 노인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할 때 남성노인들은 입을 꾹 닫고 눈을 반쯤 감았다. 그들의 마음은 어떠한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해수욕을 잊은 늦가을, 보드라운 마룻바닥에서 갑자기 느껴지는 서걱대는 모래알 같았다.
나는 이들에게 언제나 “더 말하라”고 강권한다.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남고, 이렇게 글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퍼져나간다.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세상에 도착한 적 없이 허공을 떠돌다 증발한다. 삶의 성과를 가족의 평안으로 측정하는 여성노인들의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상해본다. 당신의 삶은 또 얼마나 모질었더냐고.
공개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남몰래 적어가는 그들의 손끝에서 우리들의 생존이 단 한 번 찬란한 빛과 만난 낡은 칼날처럼 번뜩인다.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모자를 쓴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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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노인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을 처음 진행하게 되었다. 보조강사로 시작해 두어 번의 수업을 맡았다. 내가 맡은 첫 수업에는 남성 노인이 열 명이 넘었고 여성 노인이 세 명이었다. 그 이후에 만난 어느 집단도 이렇게 남성 노인이 많은 경우는 없었다. 그 교실의 남성 노인들은 모두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들의 모자에는 보훈, 호국 같은 글자가 수 놓여 있었고 몇 명은 그 모자에 배지를 잔뜩 달고 있었다. 모자를 쓴 노인들은 좀처럼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쓸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등을 의자에 깊이 넣고 이야기를 듣겠다는 자세였다.

노인들이 글을 쓰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나는 복지관 담당자에게 다시 물었다. 수강생의 특성을 알려달라고. 사전에 복지관측에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은 참가자의 70%가 문맹이었고 나머지 30%도 문자를 해독하는 수준이라는 것. 문장을 완성해 한 편의 글을 써볼 기회가 없던 사람들이었다.

교실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후반 출생자였다. 잊고 있던 근현대사를 다시 뒤졌다. 1919년 3.1운동, 1921년 조선어연구회가 설립되었고,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했지만 동아시아 전체를 전쟁을 몰고 간 일제는 1938년 한글교육을 금지시킨다. 1939년 징용령이 공포되고 1940년 창씨개명이 실시되었다.

일본 전쟁영웅 찬양 글을 쓰는 학생들
일본 전쟁영웅 찬양 글을 쓰는 학생들ⓒ경남교육청 홈페이지

그 교실에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앉아 있던 노인들은 그때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연표를 읽은 나는 다음 수업에서 이들에게 모두 일본어는 조금이라도 기억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노인들은 갑자기 신나서 자기가 기억하는 일본어와 일본노래를 이야기했고 몇 년 전 일본 여행 갔을 때 통역이 필요 없었다는 허세까지 부렸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소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한글말살정책의 현상이 강의장에 고스란히 살아났다. ‘지금 돈으로 치면 500원씩 벌금을 걷어갔다, 우리 센세이는 때렸다, 집에 와서 한참을 울었다, 그걸 고자질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일본인 센세이보다 조선 선세이가 더 나빴다..’ 이들은 일본어를 얼마나 혹독하게 배웠고 잘했는지를 말했다.

나는 한국어를 배울 수 없던 상황에 대해 하나씩 점검하며 물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학교를 다닐 수 있던 사람들이 적었고 다닌 사람들이 배운 언어는 일본어. 45년 광복을 맞아 하루아침에 선생들도 사라져 버렸다. 학교는 길을 잃었고 이들은 산으로 들로 소란스러운 정국을 구경하며 몰려다녔다는 이야기를 했다. 혼란스러운 정치대립이 이어져 길에서 싸움이 잦았다고 기억했다. 코에 솜털이 거뭇해질 때쯤 전쟁에 뛰어들어야했고 돌아와 보니 청년이었다.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던 사내들. 이들이 문맹으로 남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국가는 이들을 방첩대나 보안대라는 이름으로 불러 세웠고, 제대로 된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자원봉사로 이용했다. 그러다가 어느덧 경력도 이력도 없이 배지를 잔뜩 달고 노인이 되어 앉아 있는 이 사람들을 보며, 국가란 무엇인가 생각했다.

2017년 8월 22일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사 앞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무죄석방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2017년 8월 22일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사 앞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무죄석방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정의철 기자

이들의 삶은 기록된 것보다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발화하지 못한 것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꿈틀거리다 어디론가 몸을 감췄다. 비가 오면 냄새를 피우는 썩은 사체처럼,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기회가 되면 사람들을 괴롭혔다. 공포와 불안은 혼백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내가 만난 노인들이 어제 광화문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빨갱이 세상을 막아야 한다는 공포는 어느 집에나 있는 억울하게 죽은 조상신이었다. 노인들의 목덜미엔 비참하게 죽어버린 혼백이 매달렸다. 모자에 배지를 달면 두려움이 사라질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어린 시절, 일본 선생의 매질을 기억하며 손가락을 구부리던 그들의 모자를 기억한다.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나는 다 실패여” – 민중의 소리

https://www.vop.co.kr/A00001435728.html  

2017년 1월이었다.
서울의 어느 노인복지관에서 ‘노인 자서전 쓰기’ 수업을 의뢰해왔다. 나는 그 수업의 보조강사이자 기록자로 참여했다. 복지관의 규모가 커서 수강생도 많았다. 노인들은 대부분 유년기의 기억을 이야기하다 울었다. 그들이 겪은 전쟁은 그저 비참이었다. 누군가 사라지고 누군가와 헤어진 이야기만 이어졌다. 자기를 살뜰하게 챙기다 사라진 아버지를 이야기하던 여성 노인이 펑펑 울었다. 노인들의 서사는 유년기에서 오랫동안 맴돌았다.

두꺼운 점퍼를 입고 맨 뒷자리에 앉아 글쓰기 교재를 뒤적거리던 남성 노인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내 인생은 실패입니다.”
강사로서의 역할은 포기하려는 사람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다독이는 일인지라 나는 그에게 최대한 친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실패인지 아닌지 이야기를 들어봤으면 좋겠는데요.”
그는 슬며시 웃더니 말을 이었다.
“다들 뭔가를 이뤘어요. 일이 있거나, 자식이 있거나. 여기 책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 사람들이 살다 보면 뭐 하나라도 이룬단 말이죠. 하지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전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해 놓은 것이 없어요. 내 인생은 완전히 실패예요.”
나는 짓궂은 표정으로 “아닐걸요.”라고 말하고 웃었다.
“정말이에요. 나는 다 실패. 모든 게 다 실패.”

2017년 1월이었다. 나는 그에게 성공한 사람들은 오늘 모두 청문회장에 앉아 있다고 말했다. 굵은 주름이 남은 굽은 손가락으로 노인은 얇은 글쓰기 교재를 쥐고 가만히 있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남은 듯했다.
다른 노인들은 교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몸을 숙여 그의 앞에 다가갔다.
“아버님, 우리 모두 다 죽잖아요. 인생에 성공이 어딨어요. 모두 다 죽는다는 건 결국 다 실패한다는 말이잖아요. 아닌가요?”
노인이 허허허,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다 실패여….”
“어떻게 실패했는지 알려주세요. 그럼. 실패인지 아닌지 좀 보게요.”

노인이 환하게 웃었지만 어이가 없는 것인지, 기분이 나아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굽은 허리를 일으켜 노인이 나에게 목례를 했다.
그는 다시는 그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노인 자서전 쓰기 수업 참가자
노인 자서전 쓰기 수업 참가자ⓒ필자 제공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다시 만나지 못한 사람이지만 그의 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내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라고 뇌까리며 형광등을 켜둔 채로 모로 누울지, 나는 알 수 없다.

노인들을 만날 때마다 이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모든 것이 실패였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고.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성공”은 무엇이냐고. 헤어진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 이 칼럼을 시작한다.

당신의 인생은 실패도 성공도 아니라고. 나도 비슷하게 살고 있다고.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문자가 주는 오만함을 경계하라

[서평]활자 잔혹극 – 루스 렌들

영국 미스테리 소설의 거장 루스 렌들의 <활자 잔혹극>은 1977년작이다. 한국에는 북스피어 출판사가 2011년에 소개했다.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 “의식(儀式)”의 원작소설이다.

▲ 루스 렌들 (지은이) | 이동윤 (옮긴이) | 북스피어 | 2011-11-25 | 원제 A Judgement In Stone (1977년)

오만의 유혹, 세계의 파멸

소설의 첫 문장은 도발적이다. 사건의 결과를 내던지고 시작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자 이런 일이 있었어. 그 속에 숨은 이야기를 내가 지금부터 잘 설명할텐데, 듣고 싶으면 듣고 아님 말어’ 라는 태도로 보인다. 소설은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히고 시작한다. 독자가 찾아내야 할 것은 그 원인이다. 문맹인 가정부가 지식인 가족을 살해한다. 그 곁에는 광신도인 미치광이가 하나 붙어 있다.
주인공은 사회와 격리된 채 살아왔다. 문맹이라는 건 제도권 교육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며 누구도 이 주인공을 살뜰하게 보살피거나 주인공의 미래를 진지하게 염려한 적 없다는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이나, 문맹이 느낀 수치심은 과연 어떤 것인지 사실 잘 알 수 없다. 글을 알기 때문에 전혀 알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 마지막 해제에 장정일이 적은 발문이 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단초가 된다. 영어권 국가에 갔는데 말을 한 마디도 못해 죽고 싶은 심정이 들었던 적 있다면. 이라는 부분을 읽으니 개인의 경험이 생각났다.

10년도 훨씬 더 전에 공부를 하겠다고 중국대륙으로 갔다. 중국어는 학원을 몇 달 다녔지만 사실 한 열 마디 정도 하는 게 전부였고, 영어가 어느 정도 통하겠거니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하며 대책없이 떠났다.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부터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나는 영어로 된 호텔명만 알고 간 것이고, 내가 아는 주소도 영어로 된 것이라 발음이 명확치 않았다. 택시기사 한 명에게 호텔명을 댔더니 공항에 줄 지어 서 있는 택시기사 수십 명이 몰려들었다. 그 땅은 영어는 통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새로운 단어는 중국어로 바꾸어 말했고, 내가 도착한 상하이라는 도시는 사투리마저 심해서 어학연수 기간 내내 표준어를 배워봤자 벙어리나 다름없었다. 말도 글도 안 통하는 몇 개월을 보내며 어릴 때 본 중국무협드라마에서 본 이미지가 떠올랐다. 팔다리가 다 잘려서 항아리속에 목만 내밀고 살아있는 반역자의 모습이었다.
이후, 말을 떼고 글을 배우고 알량한 글밥으로 공부를 했을 때의 심정은 좌절감, 열패감, 소외감, 박탈감, 온갖 부정적인 감정표현명사는 다 갖다 붙여도 무방하다.
나의 개인적인 체험이 설마 주인공의 감정을 반푼어치라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들까?
아닐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평생을 문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온 것이다.
주인공에게 문맹이라는 건 치명적인 비밀이요 상처다. 불행하게도, 주인공은 숨기고 싶은 상처를 후벼파는 대상들에 둘러싸여 산다. 결국 주인공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

작가는, 주인공의 이 문제가 그저 감정의 것으로 건드리고 넘어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문화전체와 문자라는 기표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문자로 둘러싸인 삶과 지식인연 하는 것과, 타인의 삶을 통제하려고 드는 기득권층의 계급성을 두고 문화의 차이로 인한 삶이 달라지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질문을 던진다. 문화수혜자와 문화박탈자의 경계는 또 다른 계급갈등으로 이어진다. 한 사람이 어떤 삶을 꾸려가는가는 사실 의지의 문제와 동떨어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언어의 기의도 누구에게나 동일하진 않다. 굳이 성문화하지 않은 약속이 있다고 치면, 언어의 기표는 특별한 교육을 거쳐야 습득할 수 있다. 근대교육은 분명 특별한 영역이다. 그저 너무 흔해서 보편화된 것처럼 보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문맹이 아닌 이들이 말하는 보편이나 평범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본인이 기득권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기득권들의 놀음은 아닐까.

예를 들어, 쪽방촌에 사는 70대 이상의 노인들은 메모를 길게 하지 못한다. 문자습득이 순탄하지 않았고 문자는 그저 명사, 이름씨로 존재하지만 문자를 사용해 감정이나 생각을 전달할 정도의 문자 습득력은 없다. 이것은 문해력과 바로 직결되는데 타인의 기표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하며 평생을 살아가게 되면 온전히 사람의 표정과 어투, 말씨를 통해 세상을 이해할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휘갈겨대는 수많은 문자를 보며 온통 어지러운 세상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글씨는 쓸 줄 알지만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엉망이었다. 이 사람은 초등학교를 3년 정도 다닌 게 학력의 전부였다. 가정내 폭력으로 가출이 아닌 구출을 받아, 어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의 남편이 문맹인 거 같다고 나에게 고백한 적 있다. 그 남편은 고아로 보육원에서 자랐고 역시 초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했다. 결혼 후 모든 공기관과 은행 업무를 이 사람이 도맡아서 했는데 남편은 글자를 써야 하는 상황이 예상되기만 해도 짜증을 부리고 포악을 떤다는 것이다. 남편의 얘기를 전하던 그는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포악을 떨 게 뭐냐고 투덜댔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문맹이라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개연성을 생각해보면 아감벤을 떠올릴 수 있다. 조르주 아감벤은 <호모사케르>에서 “만일 오늘날에는 명백하게 규정된 하나의 호모 사케르의 형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 루스 렌들이 말하는 문맹이라는 형상은 그저 여러 종류의 호모 사케르 중 하나일 것이다.

문해자들은 문맹을 보면 가르치려 든다. 문맹자의 의지박약을 말할 것이고 동정하고 연민하며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겠다고 안달을 할 것이다. 타인을 가르치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지 않고 있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인간이 많다. 과연 그것이 인간이 인간에게 해도 되는 행동인가? 존엄의 문제와 과연 무관할까? 이는 통제의 한 방편이거나 폭력의 묘한 양상은 아닐까?

주인공의 이름은 유니스다. 유니스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한 존엄한 존재가 가진 온전한 세계의 침탈을 꿈꾼 한 가족에 대한 인간으로써의 저항일 수도 있다.

“유니스는 숨쉬는 돌이었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라는 문장이 눈에 띈다. 유니스는 문자가 필요 없는 원형 그대로, 문화가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특정한 세계, 요컨대, 자연계의 상징으로 보였다.

영어 원제는 A Judgement In Stone이다. 위에 소개한 문장이 그 핵심문장이 되는 셈이다. 사전을 다시 뒤져 in stone을 확장해 찾아보면 carved in stone이라는 관용어구가 나온다. 변경불가능한, 이라는 뜻이다. 돌은 그런 것이다. 돌에 새긴 심판, 이라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말할 것이다. 문맹 너머, 유니스라는 한 개체가 가진 특질과 그 개체가 40년간 흡수해 온 문자를 제외한 사회문화의 많은 것들이 상징하는 바일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지울 수 없는, 변경 불가능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떠한 세계.

조선 후기 문인 김려(1766-1821)는 사유악부(思有樂府)에서 ‘세상이 어지러워 화 당하기 쉬우니 글짓기를 조심하라’고 전했다. 글짓기나 글쓰기가 과연 세상이 어지러울 때나 조심해야 할 일일까. 우리는 글 속에 파묻혀 얼마나 많은 것을 돌아보지 못하고 오만을 떨며 죽어가는가. 배운 것이 탈이고, 아는 것이 병이로다. 무수히 부딪히는 세계와 세계의 충돌, 그 사이에 벌어지는 크레바스 같은 파멸은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작가의 의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래 읽히는 작품은, 늘 온당한 이유가 있다.

▲ La Ceremonie, 1995 | 감독 : 클로드 샤브롤 Claude Chabrol | 주연 : 상드린느 보네르(Sandrine Bonnaire), 이자벨 위페르 (Isabelle Huppe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