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두 마리 

사람들이 북적이는 어느 지하철역 길거리가 훤히 보이는 커피집에 앉았다. 

사람들이 오가고 차가 지나가는 좁은 골목의 입구 비둘기 몇 마리가 좀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계속해서 뭔가를 먹고 있다. 

일행은 계속 비둘기를 바라보며 초조해했다. 좀처럼 비키지 않는 비둘기는 혐오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지나는 차마다 비둘기때문에 속도를 늦추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종이를 놓고 펜을 하나씩 들고 중요한 계획을 서로 조정하는 중이었다. 비둘기를 눈여겨보던 일행이 탄식을 뱉었다. 

“엇. 아… 저거 뭐야.”
좁은 골목에 깃털이 마구 날렸고 결국 비둘기 두 마리가 납작해졌다. 
오전엔 4년 반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의 수기를 읽었다. 독방에 살던 징역수는 비둘기 둥지를 만들고 비둘기 알을 기다리고 알에서 깬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렸다. 
길바닥에 납작하게 깔릴 비둘기 두 마리는 아직 있는가, 이미 없는가. 

세상은 복잡하게 움직이고 우리의 수명은 조금씩 줄어드는데 비둘기라도 애타게 기다리던 간절함은 여기에 있을까, 거기에 있을까. 
올겨울은 유난히 쓸쓸하게 온다. 

누군가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술에 취해 졸고 싶은 밤이다. 
11월의 마지막 토요일 

인덕원역에서.

꼿꼿하게 견디는 삶

구구절절 갈등이 있었다.

어쨌거나 수개월이 지났고, 내가 맡은 일을 마무리했다.

장애인복지관에서 생애사쓰기를 한 게 2013년. 그 원고를 억지로 책으로 내놔보자고 덤빈 게 그 해 가을. 오직 그 책을 위해 출판등록을 했고 그 책을 위해 인디자인을 배웠다.

변화된 장애아엄마들과, 한껏 뿌듯해진 중도장애인과 다섯 군데 사회복지학과를 돌며 북콘서트를 연 게 2014년. 그리고 올 해는 장애아이들과 그 엄마들이 함께 바이올린을 배우는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사진은 계약에 없었지만 내가 찍고 싶어 찍었다.

 

토요일마다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수업을 했다.

자폐 아이가 다수였고 소아마비인지 다리가 불편한 아이가 하나, 다운증후군 아이가 하나.

장애인을 기억할 때, 이름이 아닌, 질병의 이름과 증상으로 지칭한다. 그들을 기억하는 방법이 이렇게도 저열하다. 부끄럽기 짝이없다.

그래 다시 그 이름을 불러보자. 형주와 민지와 준영이는 자폐아다. 하영이는 다리가 불편하고, 주희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엄마들이 바이올린을 잡으면 아이들은 각자의 세계로 돌입했다.

키 크고 잘생긴 형주는 책상에 앉아 계속해서 낙서를 했다. 큼직한 글씨로 마구 마구 뭔가를 썼다. 그러다 일어나 저보다 한참 작은 엄마를 내려다 보며 물었다. “엄마 뭐해?”, “엄마 왜 그래애?”

민지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기분이 동하면 계속 교실을 뛰어다녔다. 앉은 자리에서 비타오백을 다섯 개씩 까먹었다. 가끔 손톱을 물어뜯다가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교실바닥에 진동이 울렸다. 간혹 바이올린을 잡고 마구 소리를 내다가 제 엄마의 양볼을 잡고 뽀뽀를 해댔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엄마, 민지가 눈을 맞추는 엄마에게 뽀뽀로 말을 했다.

준영이는 구석에 앉아 의자를 돌리고 놀다가 가끔 엄마를 바라봤다. 나와도 눈을 맞췄다.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손으로 반짝빤짝 시늉을 내며 교실을 계속 돌았다. 바이올린 선생님과 눈도 맞추고 소리를 내기도 했다.

주희는 혼자 칠판에 뭔가를 쓴다. 1인극을 하듯이 계속 이야기를 한다. 재미난 동화를 듣는 기분이다. 소리를 크게 내고 의성어와 의태어도 잘 쓴다. 마구 이야기를 하다가 칠판에 아는 글자를 한참 적고 혼자 웃는다. 가끔 엄마와 대화도 하고 사람들과 한 두 마디 주고 받는다.

하영이는 입을 꼭 다문 엄마 옆에서 열심히 연습을 한다. 엄마와 똑같이 입을 꾹 다물고. 다리가 불편하다고 앉은 적 없다. 가끔 연습을 쉴 때만 앉았다. 늘 부끄럽고 쑥스러워했다.

 

시린 봄에 수업을 시작했다.

갑자기 온도가 떨어진 11월에 발표회를 열었다.

엄마들은 드레스를 빌려 입었다. 주저하는 엄마들을 선생님이 밀어부쳤다.

한 것도 없고 잘 하지도 못하는데 옷만 꾸민다고 욕 먹을 거라는 엄마들에게 바이올린 선생님이 충분히 입을 자격이 되는 사람들이니 꼭 입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운 옷을 입은 엄마들이 아이들과 무대에 섰다.

눈물이 나서 뷰파인더가 보이지 않았다.

 

영상을 찍으며 뒤에 서서 혼자 스카프로 눈물을 마구 닦았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어느 한 순간, 남들 앞에서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아이가 당신과 많이 다르다고, 나의 아이는 당신이 왜 화를 내는지도 알 수가 없고, 당신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죄송하고 미안하다고, 폐를 끼쳤다고 그렇게 늘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남들에게 내 아이가 얼마나 다른지 설명해야 하고 내 아이가 얼마나 부족한지 내 아이가 얼마나 느린지 말해야 하는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다른 아이와 같아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내 아이가 눈을 마주치고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주는 단 하루만 있으면 내일 죽어도 좋겠다고 그 엄마가 말했다. 평생 아이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지옥을 누가 알겠냐고 말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아이가 다르다고, 내 아이는 특별한 점이 있다고 늘 말해야 하는 삶인 것이다. 이유가 있어야 삶인가. 이유가 없으면 삶이 아닌가.

고난이 겪는 성숙이 있다고, 좀 덜 성숙한 채 막살면 어떤가, 그러면 인간이 아닌가.

대충 살 수 없는 시간을 꼿꼿하게 견뎌야 산다.

 

커튼 뒤에서 미리 나와 빼꼼 쳐다보는 주희와, 무대에 엄마에게 뭔가를 물어보기 위해 마구 걸어 나오는 형주와 무대에 오르지 않은 준영이와 민지가, 같이 있었다. 기억속에도, 마음속에도.

찬란한 소리가 있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2015. 11. 26. DSC_8555

22원 그리고 10원

 
지난 금요일 롱바이라는 동네에 갈 일이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출발을 했었다.
날씨는 갑자기 추워졌고, 시간은 촉박해, 털모자와 목도리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보니 땀이 나서 옷은 젖어가는데 바람이 칼같아서 속도는 나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렇게나 아플 수도 없는 생활임을 알고 있었다.
자주 가던 시엔시아루 스타벅스앞에 다다라 자전거를 묶어놨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자전거를 다시 찾으러 갔다.
 
원두커피가 떨어져 가서 4봉지를 사면 한봉지를 꽁짜로 주는 스타벅스 수첩에 도장을 한 개 받으면서 골드 코스트를 가장 굵게 갈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22원을 내고 작은 컵에 담긴 카페 모카를 주문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겨울. 스타벅스에서는 붉은 색 크리스마스 종이컵을 쌓아놓고 있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마시고 갈 것이라 머그컵에 커피를 담아주었다. 아마 전세계 어디를 가도 같은 노래가 나오겠지, 스타벅스에서는 조용한 캐롤이 나오고 있었다. 언제나 그 곳의 음악은 들릴 듯 말 듯 하다. 언제나처럼, 하얀 건물로 된 시엔시아루 스타벅스밖의 야외테이블에는 독한 연기를 내뿜는 홍쑤앙시라는 담배를 피우는 상해의 중년남자들이 하나 둘 앉아있고 안에는 노트북을 펼쳐놓은 남자와 여자들, 광동어를 하는 사람들, 일본어를 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있다.
우리가 늘 앉던 2층 창가엔 자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커피를 들고 1층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커피를 다 마시는 그 시간을 기다렸다.
 
묶어놓았던 자전거의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 자물쇠가 잠겨버린 자전거는 매우 무거웠다. 튼튼한 자물쇠가 굴러가지 않는 자전거 바퀴에 끼어 타이어의 한 쪽 바닥만 긁히고 있었을 것이다. 장기판을 벌리고 있는 자전거 수리공을 찾아 자물쇠를 펜치로 끊어 버리고 새 자물쇠를 샀다. 그는 나에게 자물쇠값 20원을 달라고 했고 수공비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 수리공의 옆에 써 있던 回收 香煙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담배를 돌려받아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를 고민했으나, 나는 그에게 묻지 않았다.
 
10미터도 가지 못해서 자전거 뒷바퀴가 펑크 났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자전거를 끌고 가 그에게 바퀴에 바람을 넣어달라고 했으나, 타이어는 바깥쪽도 안쪽도 모두 펑크나 있었다. 언제나처럼, 자전거 수리공들이 모두 그러는 것처럼, 안쪽 타이어를 끄집어 내어 바람을 넣었다가 더러워진 물이 담겨있는 세수대야에 타이어를 부분씩 담궈서 물이 새는 부분을 확인한다. 그리고 은박지로 된 강력한 테잎을 붙이는 것이 이들의 수리법이다. 바깥 타이어는 어떤 물리적인 힘에 의해 찢어져 있었다. 오는 길에 찢어졌는지, 누군가가 내 자전거를 가져가려다가 자물쇠 열기에 실패하고 화가 나서 타이어를 찢어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타이어안에 못쓰게 된 폐타이어의 조각을 이어붙여 자전거는 다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2원을 다시 주었다.
키가 작은 그 남자는 아까 자물쇠를 살 때 얘기했으면 다시 2원을 주지 않아도 됬을 거라며 웃었다. 22원. 커피값, 그리고 자전거를 고친 수리비.
 
슈주허를 넘어오는 길에 달이 커다랗게 떠 있는 걸 보고, 아이를 안고 포르노 CD를 파는 여자들을 뒤로 한 채 사진을 찍었다. 문혁때나 썼을 법한 군청색 모자를 쓴 노인이 길을 잃어서 그러니 10원만 보태달라고 했다. 검은 핸드백을 메고 동그란 항아리 몸을 가진 노부인이 그 뒤에 따라 서 있었다. 팅부동이라고 거절을 했으나, 이미 나는 그들의 말을 모두 알아듣고 있었다. 지갑을 열어 10원을 건네는 나에게 그들은 핸드폰 번호를 달라고 했다. 내일 갚겠다고.
나는, 괜찮다고, 조심해서 가시라고 인사를 했다. 설령 그들이 거짓말을 했더라도, 내 양심은 뿌듯한 것이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도둑이 되거나 거지가 된다. 그들은 어느 편이었을까. 정말로 길을 잃은 노부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비슷한 방법으로 구걸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거지에 비슷한가, 도둑에 비슷한가. 모든 것은 명확하지 않다. 어디쯤엔가 비스무리하게 서 있는 것이었다.
 
22원짜리 커피를 사 먹고 자전거를 타고 슈주허 다리를 건너던 나처럼.
 
2004. 11. 28.

소나기가 지나간 저녁

 
지난 밤에 공씨디를 사러갔던 대형전자상가에는 내가 찾는 공씨디가 없었다. 지난 금요일쯤 그 곳에 갔을 때 남아있는 19장의 씨디를 모두 챙겨나왔는데, 그 빈자리 그대로였다. 빈자리 그대로, 장사를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어젯저녁 심한 돌풍과 비가 내렸던 그 축축하고 어두운 길을 걸어왔었다.
 
집 근처에 있는 다른 전자상가는 흡사 용산전자상가의 축소판 같았다. 공씨디를 여러종류 쌓아놓고 파는 집이 많이 있었다. 예상보다 저렴한 가격, 양질의 씨디를 스물 다섯장 사고 돌아오는 길에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부터 하늘이 어두웠고, 명확하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는 내 시야안으로 비구름이 분명히 몰려오고 있었는데, 나는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단순히 귀찮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비를 맞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여름, 비를 한 참 맞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감기에 걸린다고 했다. 소설이나 영화속의 주인공들은 유난히 나약한 탓에 폐렴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다 죽는 주인공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님을 알고 있다. 적당히 집에 걸어들어가도 그리 많이 젖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에 자주 가던 국수집에 들어가 만두국을 한 그릇 시켰다. 이 집은 여름에 냉만두국과 더운 만두국을 같이 파는데, 문 앞에 멍한 눈으로 서 있던 종업원은 찬 거? 더운 거? 라고 생뚱하게 들리지도 않는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만사가 귀찮은 그 태도, 내 깊숙한 곳을 보는 것만 같아 두려웠다. 50원짜리 지폐를 내고 잔돈을 퉁명스럽게 거슬러 받으며 나는 창가자리에 앉아서 비가 쏟아지는 길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느 새 오색의 비옷을 챙겨입고 자전거 위에서 페달질을 하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기다리는 아늑하고 가난한 집으로.
 
방금 전 내가 돌아온 그 길 어귀엔 대형 극장의 공사가 몇 개월째 계속 되고 있었다. 저 멀리 내가 다니던 헬스장도 보였다. 그 어귀에서 쇠그릇을 앞에 놓고 얼후를 연주하던 남자가 얼후를 집어들고 일어섰다. 내가 어젯밤 이 길을 지났을 때 주머니를 뒤져 1원을 건네줬던 그 남자 같았다. 대머리가 살짝 벗겨진 그 남자가 앉아있는 그 자리엔 바로 뒤 극장을 짓는 공사장에서 나오는 독성 가득할 법한 시궁창 냄새가 올라오는 액체가 흐르고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빗줄기가 거세지자 남자는 더럽고 낡은 바지를 걷어올렸다. 갈색 슬리퍼를 입은 그 남자의 발은 비를 맞는다 해도 도무지 깨끗해질 것 같지 않았다. 호주머니에서 누렇게 변색된 수건을 꺼내 남자는 벗겨진 머리와 얼굴을 닦았다. 그 남자에게 뛰어가 5원짜리 지폐를 건네주고 싶었다. 5원이면, 밥도 한 그릇 먹을 수 있고, 1원을 보태면 어느 욕실에 들어가 샤워라도 한 차례 할 수 있는 돈이다. 10원이면, 내일 아침도 먹고 내일 점심까지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저 멀리 습기 가득찬 통유리창이 달린 그 헬스장을 다녔을 때 그곳까지 가는 곳에 앉아있던 서너명의 얼후를 든 남자들과, 구부러진 다리를 가진 남자 아이와, 머리가 하얗게 탈색된 남자아이를 안고 있던 여자를 기억했다. 그 때, 나는 매일 매일 그 길을 지나며, 매일 매일 그들을 외면했다. 이제 나의 가난이 그들의 가난을 동정하게, 그들의 가난을 이해하게 한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쌀 한 톨 건네주지 않는다는 진실도. 그 사람에게 내가 돈을 주고 싶다는 생각은 나누고 싶은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른다. 나의 한 끼와 그의 한 끼가 동일해지도록, 나의 근원없는 억울함과, 그의 이유있을 억울함에 대해서 공감을 형성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내가 만두국을 반쯤 먹고 나서 양이 많다고 느꼈을 때쯤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전 나에게 살기 싫은 표정을 보여줬던 그 여자 종업원은 내 뒤에 바로 들어온 두 명의 젊은 사내들에게 농지거리를 하며 살살 거리고 있었다. 남자라는 존재가, 그녀의 삶을 바꿔놓는가. 때로 여자는 남자를 살게 한다. 그리고 때로 남자가 여자를 살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무슨 이유로 잣대를 들이미는가. 사람은, 동물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인데.
 
자신의 밥줄을 가만히 들고 서서 비를 맞고 있던 그 남자가 사라지고, 나의 만두국 그릇속의 만두도 남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단 한 번도 비오는 하교길에 누군가의 우산속에 뛰어든 적도, 누군가가 마중을 나온 적도 없었다. 비가 조금 더 많이 온다면, 그래서 지금 추레하게 슬리퍼를 끌고 나온 나에게 누군가 우산을 씌워준다면 그 사람이 당황할 만큼 그 우산속에서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다행스럽게, 비는 그쳤고, 나는 울 기회를 놓쳤다.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나간 길엔 풀과 물이 만난 냄새가 가득했다. 상해의 그 고단한 여름은 사라진 것만 같았다. 길에는 시원한 바람, 비 온 뒤에 산책을 해야겠다는 그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는 공기만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나에게 그래도 혼자 자기엔 조금 넓은 침대가 있고 에어컨까지 달린 작은 집이 있다는 사실이 더 할 수 없는 사치로 느껴졌고, 그 사치를 영유하고 싶었다.
 
요즘은, 해가 너무 늦게 진다.
 
2004. 7. 13.

볶음 국수 한 그릇

 
먼 하늘에서 구름이 밀려오는 게 보였다.
 
구릉구릉 거리는 소리가 공기를 휩싸더니 바람이 심하게 불기 시작했다. 비가 오려나보다 생각하자 마자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는데, 후두둑 거리는 소리가 요란해 마치 우박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비는 오래 가지 않았고, 10여분 만에 그쳐버렸다. 비가 그쳤다고 생각하고 슬리퍼를 신고 국수나 한그릇 먹어야겠다 하고 아파트를 나섰을 때 굵은 빗방울은 셀 수 있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조금씩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복도 창가에 서서 다시 집으로 올라가 우산을 챙겨나와야 할까를 아주 잠깐동안 고민하다가 그냥 몇 방울의 비라면 맞아보기로 했다.
 
국수집에 도착할 때쯤엔 그 몇 방울의 비도 멈추었고, 오랜만에 찾은 그 국수집의 볶음국수의 가격이 4위안인지, 5위안인지가 잠시 헷갈렸다. 계산대에 서서 종업원 아가씨에게 4원인지 5원인지를 묻고 동전 4개를 올려놓고 자리에 앉으려고 거의 텅 빈 식당을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TV 소리가 났고 맨 가운데 테이블 의자위에 커다란 흰 고양이가 늘어져 있었다.
귀여워하기엔 너무 커다란 고양이, 나는 그 자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벽쪽 테이블에 앉았다. 눈이 마주친 고양이는 의자에서 내려와 어슬렁거렸고 반바지를 입은 내 다리 주변으로 왔다갔다 하더니 내 의자밑으로 들어가 맨 발을 툭 건드렸다. 흠칫 놀라 다리를 움직였더니 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TV 소리는 작은 흑백TV를 테이블위에 올려놓은 직원아저씨의 것이었다. 주방에선 키가 큰 젊은 요리사가 커다란 후라이팬 위로 올라오는 불과 함께 놀이를 하는 듯 했다.
 
그 때쯤 바로 옆에 안경을 쓰고 키가 작은 여자가 오렌지색 티셔츠를 입고 비닐봉지를 탁자위에 소리나게 올려놓으며 앉았는데 맞은 편에 동행한 열 일고여덟 살쯤 되어보이는 남자아이에게 계속해서 목소리를 억누르며 화를 내고 있었다.
상해방언은 스즈츠 발음이 많아 듣기에도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탁한 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언어를 짓눌러가며 그녀는 계속해서 소년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소년은 탁자위에 배낭을 확 집어던지기까지 했으나 물론 싸움이 될 상대도 되지 않아보였다. 그녀와 소년은 모자간처럼 보였는데다가, 여자의 목소리는 짓누르는 깽깽거리는 목소리였고 남자아이는 계속해서 징징거리며 웅얼거리는 말투로 말꼬리를 질질 끌고 있었다.
 
볶음국수가 다 되었다는 말을 주방에서 했을 때 이 집에서 아침을 먹을 때처럼 나는 습관적으로 일어나 주방에서 작은 탕 그릇과 국수그릇에 젓가락까지 챙겨 내 자리로 돌아왔고, 나보다 한 걸음 늘 늦을법한 종업원 아가씨가 뻘쭘하게 옆으로 다가왔으나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왔다.
 
급기야 옆자리의 소년은 울음을 터뜨렸고 주방사람들도 힐끔힐끔 그 모자를 쳐다봤으나 여자의 깽깽거리는 꾸중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내 국수를 가져다 줄 기회를 빼앗긴 종업원 아가씨가 소년의 식사를 가져다주자 아이는 울면서 징징거리면서 음식을 밀어넣고 그 앞자리에 앉아 아무것도 먹지 않는 여자는 계속해서 짓누르는 목소리로 앵앵거리고 있었다. 소년은 반쯤 식사를 하고 벌떡 일어나 냅킨을 가지러 갔다와서는 자리에 앉았다가 밖으로 휙 나가버렸고 여자는 여전히 변함없이 끈질기게 쫑알거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손님수보다 많던 종업원들이 모두 빤히 밖을 쳐다보았고 야채를 도마위에 올려놓고 신나게 칼질을 하고 있던 남자는 휘파람을 불면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킥킥 댔다. 나는 상해방언을 모르므로 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장난스럽게도 내가 그 순간 한 생각은, 상해방언을 할 줄 안다면, 이 땅에서 사람들이 왜 저렇게 싸우는지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수를 다 먹고 일어나는 길엔 잘 먹었다고 말할 필요도, 잘 가라는 인사도 필요없는 순간이었고, 국수집을 나오자마자 그 앞의 한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맨손으로 코를 팽팽 풀어대고 있었다.
뚱뚱한 시츄가 뚱뚱한 아줌마와 함께 궁둥이를 들썩거리며 지나갔고 아파트 단지에는 면식이 있는 사람들끼리 이제 들어오냐는 안부를 묻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는 터덜걸음을 걸으면서 핸드폰으로 문자메세지를 주고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다가 담배를 사야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고 다시 아파트 단지앞에 있는 편의점엘 갔다.
 
비는 여전히 오지 않는데 하늘은 구룽구룽하는 소리를 내고 친구에게선 한국드라마 “엄마야 누나야” 가 너무나 재미있다는 문자가 왔다.
 
2004. 5. 21.

NOT THAT BADLY

 
# 1.
 
“근데 이 나라 사람들은 왜 식당이고 술집이고, 잡상인들이 이렇게 드나들게 내버려두죠? 여기도 그래. 복권까지는 괜찮다 쳐. 뻥튀기까지도 넘어가. 근데 왜 술집에 들어와서 한치 안주 사라고 그러는데도 왜 주인이 가만히 내버려두죠? 설마 이런 술집까지 국영인 건 아니겠죠?”
“외국인들만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베트남 사람들은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나라가 아직 가난하지만 남의 고된 생계수단을 빼앗으면서까지 부자가 되려고 하진 않아요.”
 
방현석 소설 《존재의 형식》中…
 
 
# 2.
 
10원짜리 시들어빠진 장미꽃을 들고 와 사달라고 졸라대던 계집아이는 그 골목에서 상주하고 있었다. 그 계집아이에게 장미꽃을 다섯 송이 사고 난 다음에, 그 아이에게 학교를 가겠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아이는 콧방귀를 뀌며 등을 돌렸다. 그 다음번 술취한 나를 본 그 아이는 아는 체를 했다. 그리고 더 이상 나에게 꽃을 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흥청거리는 거리를 잰걸음으로 걸어가던 나에게 달려들던 빡빡머리 사내아이에게 학교에 가겠냐고 물었었다. 그리고 엄마 아빠는 어디에 있냐고 물었었다. 아이는 대답을 하지 않고 손만 내밀었었다. 그리고 나는 지갑을 뒤져 10원짜리 지폐를 건네주었다. 저만치에 서 있던 애 업은 여자가 득달같이 뛰어왔었다. 애업은 여자. 그녀와 나의 나이차이는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시간이 지나고, 이번 달에 만났던 아이들과 애업은 여자는 깨끗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리고 아가씨 예쁘네요 라는 말까지 건네기를 서슴치 않았다. 아이들은 땟국물에 쩔어있지 않았으며 느물거리며 웃어대기까지 했다. 그 아이들이 작년 이맘때 혼자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그 길에서 만났던 아이들인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巨鹿路에 있는 Good Fellas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예쁜 여자애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하루에 12시간 근무이지만, 대학생이 1000위안짜리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그 빠에는, 늘 담배상자를 목에 건 젊은 여자가 들어와 술취한 손님들에게 밀수담배를 공급해주었다. 가끔은 DVD를 든 남자가 들어와 혼자 와 앉아있는 외로운 노란머리의 남자들에게 DVD를 고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우리는 빠 밖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는 양꼬치 장사에게 숫자를 말하면 그녀가 빠 안에까지 가져다 주었다. Good Fellas의 2시가 넘으면, 시내의 모든 빠가 문을 닫고, 거기에 몰려 있던 인구들이 그 좁아터지고 환기 안되는 자리에 앉거나 서서, 담배를 사고 양꼬치를 뜯어먹으며, DVD를 고르기도 했다.
 
과연, 그들의 마음도, “남의 고된 생계수단을 빼앗으면서까지 부자가 되려고 하진 않아서” 인것인가. 모든 것이 용서되는 이 땅에서의 윤리는, 귀찮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나의 모든 판단은 원점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었을까. 모종의 관계, 음모이론에 충실한 나의 기준은 왜 이다지도 선량하지 못한 것이었을까.
 
2001년 밥 빌리러 양푼을 들고 옆집 식당으로 들어가던 내가 밥을 먹던 식당의 어린 종업원을 이해하지 못하던 서양아이들을 나무라던 저녁이 있었다. 남의 생계. 남의 고된 생계. 나는 또 오늘 누구의 고된 생계를 훼방놓고, 누구의 고된 생계를 용서했는가.
 
2004. 4. 28.
아주 오래된 어느 날의 기억을 발견해서 옮긴다.

어떤 영결식이 있던 날 

영결식이 2시부터 엄수라 했다. 1시 30분쯤 서울대병원에서 운구차가 출발한 모양이다. 광화문 부근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신호가 몇 번이나 바뀐 뒤에 광화문을 겨우 지났다. 

남산터널로 올라가는 을지로를 지나다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는 다마스 때문에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신호에 다시 걸렸다. 붉은 신호등 아래로 다마스보다 커다란 종이짐을 실은 리어카가 두 대나 지나갔다. 눈이 내렸고 리어카위의 박스는 젖을 것이다. Kg으로 계산을 할텐데 젖은 박스는 어떻게 무게를 달까. 

리어카를 끌고 가는 남자들의 늙은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라디오에서는 영결식을 중계하고 있었다. 

조국과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온 몸으로 민주화를 이룩해 낸 전직 대통령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운구차는 호위를 받으며 커다란 길의 교통을 통제하고 거침없이 달렸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권력자도 그러했듯이 변절을 했거나 배신을 했거나 권력자로 마감하면 그 뿐이다. 

권력자의 장례는 국가가 치르고 국민들은 불편을 감수하고 당연한 듯 그들을 애도한다. 

당연히 받을만한 일이 존재하는가. 

몇 년전, 사진 한 장 제대로 갖지 못한 노인들의 영정사진을 찍어 드리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왜 그런 꿈을 가졌는지 알 수 없으나 오늘에서야 비로소 어느 단체를 통해 무의탁 독거노인이며 기초생활수급자인 분들의 영정사진을 찍었다. 찍기 싫은데 찍어야겠다고 한 분의 표정은 두려움에 가득찼고 관속에 바카스를 넣어달라던 어르신은 옷을 한 벌 더 챙겨와 환하게 웃었다. 

그 중에 건강이 여의치 않아 다른 일은 못하고 야간에 재활용품을 수거해 생계를 이어나가는 이가 있다. 리어카가 지나갈 때 그 사람을 떠올렸다. 

자기 사람을 위해, 자기 인생을 위해, 자기 밥 한 그릇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고 사는 인생도 있나. 

사기를 치고 구걸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몸을 팔아도, 타인의 밥벌이에 기생하며 남의 등 처먹고 사는 인간도 그 자신으로써는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이다. 달리 다른 방도가 없거나,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을 때, 세계는 점점 좁아져 북극바다에 녹아가는 얼음판 만한 세상 위에서 오돌오돌 떨며 버티는 것이다. 

눈이 퍼붓고 군사독재에 항거했고 결국 권력자로 기억될 한 사람이 떠난 날, 나는 텅 빈 빈소조차 갖지 못할 뻔한 사람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간다. 

 알량하게도 누군가의 불행을 딛고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생각에, 어떤 핑계를 찾아서라도 오랫동안 울고 싶은 날이다. 

간간히 햇빛이 드나들던 하늘이 어둑해진다. 

내가 말을 하는 모든 이유는 누군가와 따뜻하게 마주보며 웃고 싶어서다. 그건 나 뿐 아니라, 세상 모든 불행도 그러하리라. 

2015년 11월 26일. 

어떤 영결식날의 소회.

전통 상장례에 관하여 – 강의록

전통 상장례에 관하여

 

강의 윤여빈(경기문화재단 생활문화팀 전통의례 고증 전문가, 前 성균관 의례부장

정리 이하나

  • 들어가는 말

하늘의 도(道)는 옳으냐 그르냐 天道是非也

사마천의 사기는 「본기(本紀)」 12권, 「표(表)」10권, 「서(書)」8권, 「세가(世家)」30권, 「열전(列傳)」70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이다. 이 중, 일반적으로 본기와 열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본기(本紀)는 천자(天子)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평민이 두 사람 등장한다. 그 중 하나가 공자이다. 포의(布衣)입은 평민이지만 모든 왕의 스승이 되었다 하여 본기에 수록되었고, 초패왕 항우(項羽)는 전쟁을 할 때 기습전을 하지 않고 정공법을 사용했다 하여 천자의 반열에 올랐다. 본기의 기본정신은 포폄(褒貶)이다. 포폄은 춘추전국시대의 정신으로 볼 수 있다.

열전(列傳)은 총 70편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는 백이(伯夷)숙제(叔弟)의 이야기이고, 마지막은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의 자서전이다. 맨 마지막 태사공 사마천에는 자신이 왜 대대로 역사를 공부하고 궁형을 당해 비루한 처지가 되었는지 나타나있고 사실상 마지막 편과 다름없는 제 69편에는 화식(貨殖)열전(列傳), 화(貨)는 돈을 말하고 식(殖)은 불어난다는 뜻으로 재산을 불리는 법, 돈을 버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 69편의 주제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뭐냐고 묻는다. 강남의 상인이 사막을 뚫고 가서 물건을 사 나르고, 강북의 물건이 남쪽까지 가 닿고 바다를 건너고 험한 길을 넘어 물건이 유통되는 이유는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이익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현시대에도 와 닿는 이야기다.

열전의 첫 이야기인 백이숙제(伯夷叔弟)편에는 이런 질문이 있다.

“하늘의 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언제나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 백이와 숙제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했어도 굶어 죽었다. (중략)

최근 사례를 살펴보면 하는 행동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은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매우 당혹스럽다. 만일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라면 옳은가? 그른가?

사마천의 이 질문은 전통상장례와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화두가 된다.

  • 의례의 기본

프랑스의 배우 알랑 드롱은 전세계 최고의 미남자로 손꼽혔다. 그의 전성기때 프랑스정부에서는 프랑스의 음식문화를 해외에 홍보하고자 그를 모델로 영상을 촬영했다. 완성된 영상은 수차례의 정부관료들의 회의를 거쳐 세상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사장되었다. 왜 그랬던 것일까.

1935년생인 알랑 드롱은 17세에 알제리에 군인으로 파병되었고 세계 각지를 방랑하다 파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의 첫 영화는 1957년이었고,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린 것은 1960년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 였다. 신이 만들어낸 최고의 얼굴을 가진 그의 개인사에는 품위가 깃들 겨를이 없없다. 그가 프랑스 음식을 먹는 장면에는 외형의 조형미로 가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품위는 이렇듯 하루아침에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살아온 역사가 그 사람의 품위를 결정지을 수 있다. 전통의례의 기본은 바로 이 품위에 있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은 예비를 할 수 있으나, 인간이 죽는 것은 예비를 할 수 없다. 선한 인간이나 악한 인간이다, 부귀영화를 막론하고 모두 다 죽는다. 인간의 끝은 동일하다. 그러나 죽음의 품격은 인간마다 다르다. 죽음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며,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죽을 때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모든 인간이 단 한 번, 처음으로 겪는 것이 바로 이 죽음이다.

노련한 장의사들은 주검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을 추정할 수 있다. 사람의 몸은 그 사람의 일생을 의식보다 더 많이 기억한다. 삶의 흔적은 고스란히 몸에 남는다. 이 사람의 마지막 살아있는 모습이 평화로웠는지 아닌지도 주검이 말해준다.

전통장례에 관해서는 유교에 입각하여 기술한다.

기본적으로 유교에서는 영혼을 믿지 않고 사자의 의식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유교에서는 신이 있다는 걸 믿지 않고 기록되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유교는 철저히 인본주의다.

품위는 인간이 스스로 충분히 가꿀 수 있다. 어느 영화배우에게 여태 같이 일한 여배우 중 최고의 미인이 누구냐 물으니, 그가 말하길 진선미(眞善美)를 뛰어넘는 것은 귀(貴)라고 했다. 위에 말한 알랑드롱처럼 눈으로 보는 조형미를 넘는 품위를 바로 귀(貴)라고 표현한 것이다.

백범 김구선생은 젊은 시절 동학운동에 투신하였다가 동주 태화산 나복사로 피난을 갔다. 은신중에 운명에 관한 공부를 하는데 자기 얼굴은 아무리 뜯어봐도 도둑의 상이었다. 그 때 그가 깨달은 공부는 관상 좋은 것보다 몸 좋은 게 좋고, 몸 좋은 것보다 심상(心相)좋은 게 최고라는 거였다. 관상(觀相)은 불여심상(不如心相)이다. 도둑의 상이었던 김구의 얼굴은 해방 후 환국하기 전 평범한 한국인의 얼굴이 되었고 오히려 그 얼굴에 기품이 묻어났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수양을 하면 사람의 얼굴도 변한다는 것이다. 타고난 걸 고치는 일은 쉽지 않다. 아무리 억누르려고 자각을 해도 타고난 성질이나 기질을 억누르기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인체의 중심은 어디일까?

인중(人中)이 인체의 중심이라 말한다. 한자로도 사람 인(人)에 가운데 중(中)을 쓴다. 사람의 가운데라는 뜻이다. 이를 다른 말로 말이을 이(而)라고도 한다. 콧물이 흐르는 선이 아니라 말 이을 이(而)를 쓰는 의미가 있다.

인중의 위쪽은 생각을 하는 이성적인 부분, 인중의 아래쪽은 땅에서 나는 걸 먹고 배설하는 본능의 부분이라 생각한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중심이 인중의 위에 있다는 것이다. 순자가 본 성악설은 인간의 중심이 인간의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순자나 맹자나, 두 사상가의 핵심은 교육이다. 본성을 자제하고 희노애락을 억누르기 위해, 혹은 타고난 본성인 “이성적 사고”를 잘 지키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중 성리학은 인중의 윗부분을 인간의 본성으로 본다.

퇴계 이황은 김유신의 말을 이야기하며 주인이 정신을 잘 차리면 말은 바른 길을 갈 것이고 술 마시고 졸면 말이 알아서 천관녀의 집으로 간다고 했다. 이것이 성리학의 본질이다.

율곡 이이는 또한 하늘은 폭포의 물과 같고, 사람은 그 물을 담는 그릇과 같다고 했다. 하늘에 있는 진리와 내 안에 있는 진리가 같다는 말이다. 물을 얼마나 담을 수 있는지, 그릇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는 것이다. 인중의 위쪽을 본 게 이(理), 인중의 아래를 본 게 기(氣)가 되어 이기설(理氣說)이 시작되었다. 형이상학은 인중의 위를, 형이하학은 인중의 아래를 말한다. 이 상하(上下)를 합치 시키는 것이 바로 인(仁)이며, 그것이 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가 닿아야 할 덕목이다. 몸을 잘 못 움직이는 병을 불인지병(不仁之病)이라 한다. 참기 어려운 병이라는 것이다. 인을 이루기 힘들다는 뜻이다.

생명이 어디서 나고 어디서 끊어지느냐가 인간의 출생과 사망을 규정하는 기준이 된다. 생명은 인중에서 끊어진다. 숨이 막힌다, 숨이 끊어진다고 표현하는 데 이 숨이 끊어지고 막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곳이 인중이다. 사람이 죽은 것을 확인할 때 숨이 끊어지는가를 보는데 호흡이 끊어지는가를 확인할 때 산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인중에 손을 대고 호흡을 확인한다. 바로 인중이 기식(氣息)이 끊어지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가 된다.

  • 상장례(喪葬禮)의 절차

매일 죽겠다고 말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농담으로 한국사람은 매일 죽는다고 하지만, 기실 전통 상장례에서 한국인은 환갑에 죽는다고 본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엇일까. 이는 우리의 오랜 농담에도 숨어있다.

흔히들 병풍 뒤에서 향내 맡는다는 표현으로 죽은다는 것을 표현한다. 여기에 나오는 병풍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말한다. 병풍 앞에 있으면 산 것이요, 병풍 뒤에 있으면 죽은 것이다. 벽도 경계를 나타내지만 줄어들었다 늘어났다 할 수 있는 병풍은 생사경계의 상징을 더 많이 내포한다.

예(禮)의 주체를 주례(主禮)라고 한다. 흔히 결혼식장에서 쓰는 주례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지금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주례는 정확하게 주빈(主賓), 큰 손님이 되고 혼인식의 주례는 신랑신부가 된다.

우리가 흔히 보는 환갑잔치를 생각해보자.

회갑때는 잔치자리에 병풍(屛風)(평풍(平風)이라고도 함)을 펴놓고 그 앞에 고임상을 차린다. 죽음의 방향은 서쪽이라 위패는 서쪽에 놓는다. 아버지는 왼쪽에 앉고 어머니는 오른쪽에 앉는다. 돗자리를 펴놓고 음식을 차리고 잔을 올리는데 언뜻 보면 제사지내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그리하여 이를 다른 말로 산제사라고 한다.

일련의 사회생활에서 은퇴하여 노인들이 모이는 경로당에 나갈 준비를 하고, 안방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사랑으로 넘어간다. 재산도 물려주고, 곳간열쇠도 넘겨준다. 이것이 농경시대의 은퇴이며, 죽음의 의례 중의 하나이다.

회갑잔치는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속하지 않는 효도잔치의 한 가지가 되는데, 이 것이 바로 죽음의 준비단계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회갑을 넘긴 사람은 손자들을 데리고 나가 교육을 하고 윤달을 택해 수의를 만들고, 치관을 하며 죽음을 준비한다. 지금은 수명이 늘어나 회갑잔치는 거의 하지 않고 칠순잔치로 넘어갔지만 예전에는 환갑을 넘기면 수를 다 했다고 보는 것이다.

의식적이며 의례적인 이런 산제사 외에 현실적인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가.

죽음은 예비가 불가능하다. 문밖이 저승이라는 말이 있다. 죽는 것은 예비할 수 없으므로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출생과 죽음을 비교해서 보자.

출생은 예비가 가능하지만, 죽음은 예비가 불가능하다. 사람이 태어나는 일은 예비가 가능하니 식구들이 준비를 했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목욕을 시키고 강포에 싼다. 사람이 죽어도 염습을 하고 씻기고 작은 이불로 싸는 소렴을 거쳐 큰 이불로 싸는 대렴을 한다. 태어남과 죽음의 과정이 같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안방의 아랫목에서 태어났다. 옛날에는 죽을 때가 되면 안방 아랫목에 눕혔다. 태어나는 장소가 죽는 장소가 된다.

아기가 태어나면 금줄을 삼칠일 친다. 상여를 질 때 횟소리를 메기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모두 스물 한 명이 일을 한다. 은정(隱丁)이라하는 못을 박을 때도 스물 한 개의 못을 박는다. 예전에 큰 배는 스물 한 명이 노를 저었다. 21이라는 숫자는 전통사회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1년은 원래 360일인데 이는 자연현상과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아 5일을 더해야 한다. 그보다 더 정확하게 계산하기 위해서는 5일과 1/4일을 더해야 한다. 이 계산법은 복잡하기 때문에 1/4를 매해 더하지 않고 4년에 한 번씩 윤년을 만들어 계산을 맞추는 것이다. 5일을 네 번 더하고 4분의 1을 네 번 더하면 21이 된다. 삼과 칠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21은 역법상 계산의 의미로 불완전한 역법을 완전케 해주는 기능을 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100일이 되었을 때 백일잔치를 한다. 이 백일잔치에는 백설기를 돌리는데, 백(百)자와 백(白)자의 중의적 표현을 더하고, 설(舌)자를 쓴다. 이는 여러 번 혀가 움직인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유명(有名)이 된다는 뜻이다. 이름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백일이 되면 이름을 짓게 된다. 백일을 버텼으니 살았다고 보는 것이며, 이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다.

사람이 죽고 나서도 백일(百日)이 지나면 졸곡(卒哭)을 한다. 백일이 지나 졸곡을 하면 흉례(凶禮)에서 길례(吉禮)로 바뀐다. 지금은 유명무실화된 가정의례준칙에서도 백일이 탈상의 기준이 된다. 3년상은 세종때 생긴 것이다. 원경왕후가 죽고 난 뒤 세종이 백일탈상을 너무 아쉬워하자, 황희가 3년상을 제안했는데 이후 자리를 잡게 되었다.

백일을 지난 사람이 성장을 하여 맞는 첫 예(禮)가 관례(冠禮), 성년식이다. 남자들은 상투를 틀고 여자는 비녀를 꽂는다. 노동의 의미에서는 장정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남자들의 관례에서는 마을 어귀에 있는 큰 돌을 들어 어깨에 올려야 반품에서 온품이 되었다고 본다. 여자들은 초경을 하면 혼인을 준비할 수 있게 되는데 여자는 관례라 하지 않고 계례(笄禮)라 한다.

이때부터 남자들은 공부를 위해 집을 떠날 수 있고, 술을 마실 수 있고 자(字)를 받을 수 있다. 사회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어린 시절이 끝났다는 의미를 갖는다. 관례를 치른 후 혼인을 약속하면 서로 사주단자를 보내고 신부댁에서 길일을 택해 신랑댁에 보낸다. 납패라고 하여 신랑댁에서 간단한 선물을 보낸다.

혼인식 때 술을 나눠 마시는 것은 합궁을 의미하고 시아버지에게 밤과 대추를, 시어머니에게 닭을 올린다. 혼인례가 끝나면 신부댁으로 가고 3년을 산다. 신부댁으로 갈 때 신부도, 신랑도 모두 가마를 타고 간다. 가마는 4명이 드는 것을 탔다. 다시 신랑댁으로 돌아와 평생을 보내게 된다.

관혼상제가 인간의 기본 의례였는데 이 중 혼인의 다음에 오는 것이 상례이다.

사람이 죽는 것이 상례인데, 안방 아랫목에서 사람의 죽음을 확인하고 매장을 한 뒤 혼을 다시 모셔오는 절차가 있었다. 혼백상자를 가져와 상청에 모시고 살아있는 것처럼 아침에 밥을 올리고 저녁에 밥을 올리는, 상식을 올리는 의식을 갖췄다.

죽음을 표현하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임금이 죽으면 붕(崩), 제후가 죽으면 훙(薨), 일반인이 죽으면 졸(卒), 가장 보편적인 말로는 죽었다, 사(死)를 썼고, 비하하는 말로 뒈지다쯤에 해당되는 폐(廢)라는 말도 썼다. 귀양을 가 위리안치에 봉하는 것도 폐인(廢人)이라 칭했는데 살아있으나 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는 말을 썼다. 이는 혼은 날아가고 육신은 흩어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사상 앞에서 향을 피우는 것은 혼을 불러오는 행위이며, 술을 땅에 붓는 것은 육신을 불러 모으는 것이 된다.

(1) 임종(臨終)

가족이나 가까운 혈족이 운명(殞命)할 때 곁에서 지켜보는 것을 말한다.

임종이 가까워지면 병자가 평소에 입던 옷 중에서 흰색이나 엷은 색의 깨끗한 옷을 골라 갈아 입히고 거처하던 방과 운명한 뒤 모실 방도 깨끗하게 치워 둔다.

유언(遺言)이 있으면 침착한 마음으로 기록하거나 녹음해 두고, 병자가 죽기 전에 가장보고 싶어하는 친족 친지에게 속히 연락하여 운명을 지켜볼 수 있도록 손을 써야 한다.

임종단계에 들어가면 바깥에 있던 사람을 안방 아랫목으로 눕힌다. 집안의 중심은 안방이며, 안방에 모시는 것을 천거정침(天居停寢)이라고 한다. 머리는 동쪽을 향하게 두고 호흡의 기식을 보며 인중을 살펴 숨이 끊어지는 것을 확인한다. 기식이 끊어지면 사람이 완전하게 죽었다고 본다. 북쪽에 대고 높은 곳에 올라가 초혼(招䰟)을 하게 되는데 이를 복복(復復)혹은 고복(皐復)이라 한다. 높은 곳에 올라가 고인이 입을 새 옷을 줄 테니 영혼이 다시 들어오라고 부르는 의례이다. 기록에 있는 의식이나 대부분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정형화된 형식이 있으나 지방마다 그 양식이 조금씩 다르다.

초혼을 하고 날 때가 되면 몸이 경직되기 시작한다. 그 다음은 사자상을 차린다. 사자상은 문밖에 신발을 세 켤레 두고, 밥도 세 공기, 간장도 세 종지, 물도 세 대접을 준비한다. 저승사자는 보통 삼사(三使者)자라고 하여 세 명이 움직이고 삼성이라는 신과 함께 혼을 데리러 온다.

(2) 수시(收屍)

먼저 눈을 곱게 감도록 쓸어 내리고 몸을 반듯하게 한 다음 손과 발을 매만져 가지런히 한다. 머리를 약간 높게 하여 괴고, 깨끗한 솜으로 코와 귀를 막는다. 이를 수시 또는 정제수시(整齊收屍)라 한다. 얼굴에 백포를 씌우고 홑이불을 머리까지 덮은 뒤 병풍이나 장막으로 가린다.

사자상을 차린 후에 시신을 곧게 편다. 이를 수시라고 한다. 몸을 잘 펴서 칠성판이라는 판 위에 올린다. 북두칠성을 본떠서 만들었다하는데 시신에서 나온 분비물을 걸러내고 잡귀를 쫒기 위해 구멍을 일곱 개 낸 판이다. 이는 염습을 위해 몸을 정리하는 것이다.

(3) 발상(發喪)

초상을 알리고 상례를 시작하는 절차이다. 수시가 끝나면 가족은 곧 검소한 옷으로 갈아입고 근신하며 애도하되, 호곡은 삼간다. 흔히 ‘謹弔’라고 쓰인 등을 달아 놓거나 ‘喪中’또는 ‘忌中’이라 쓰인 네모난 종이를 대문에 붙여 초상을 알린다.

이후 발상(發喪)이 이어지는데 여기부터 의례적인 행위가 시작된다. 곡을 하는 것도 아이고, 에고라는 소리를 넣어서 해야 한다. 발상(發喪)은 상장례가 바뀌는 단계를 말한다. 장례는 임종의 단계가 지나면 그 주체가 바뀌어 상례에서 장례로 전환된다.

(4) 부고(訃告)

호상은 상주와 의논하여 고인이나 상제와 가까운 친척과 친지에게 부고를 낸다. 부고에는 반드시 장일과 장지를 기록해야 한다. 가정의례 준칙에는 인쇄물에 의한 개별고지는 금지되어 있다. 다만 구두(口頭)나 사신(私信)으로 알리는 것은 허용된다.

(5) 염습(殮襲)

운명한지 만 하루가 지나면 시신을 깨끗이 닦고 수의(壽衣)를 입힌다. 남자는 남자가, 여자는 여자가 염습을 한다. 우선 목욕물과 수건을 준비하고, 여러벌의 수의를 깨끗이 닦은 후 겹쳐진 옷을 아래옷부터 웃옷의 차례로 입힌다. 옷고름은 매지 않으며, 옷깃은 산사람과 반대로 오른쪽으로 여민다. 옷을 다 입히면 손발을 가지런히 놓고 이불로 싼 뒤 가는 베로 죄어 맨다.

염습부터 살아있는 사람이 주체가 되기 시작한다. 베옷을 입히는 것은 오래된 풍속이 아니고 옛 시신을 발굴해보면 대체적으로 평상복을 입혀 묻었다. 관료는 관복을 입히고 관료가 아닌 사람들은 평소에 입던 옷 중 깨끗한 것을 골라 입혔다. 염은 오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는 작업에 쓰이는 솜을 말한다. 이 때 빈곳을 채운다는 의미로 반함을 하는데 씻은 쌀이나 구슬을 죽은 사람의 입에 물리는 일이다. 이 쌀은 바로 사람의 몸을 의미한다.

사망 후 24시간이 지나면 시반현상이 일어나고 몸이 부패하기 시작한다고 보고 염습을 진행한다. 씻겨서 옷을 입히는 절차를 보면 사람이 태어났을 때와 같다. 여자는 여자가 하고 남자는 남자가 하는 식으로 현대의 절차가 바뀌었다. 입관을 한 뒤 주검은 무덤으로, 즉 장지로 가게 된다. 상례는 발상, 상주들, 즉 살아남은 사람들의 의식이며, 장례는 매장절차를 말한다.

(6) 입관(入棺)

염습이 끝나면 곧 입관한다. 이때 시신과 관 벽 사이의 공간을 깨끗한 벽지나 마포(麻布) 등으로 꼭꼭 채워 시신이 관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한다. 망인이 입던 옷을 둘둘 말아서 빈 곳을 채우기도 한다. 시신을 고정시키고 홑이불로 덮고 관뚜껑을 덮은 다음 은정(隱釘)을 박는다.

그리고 관 위에 먹으로 ‘○○(직함)○○(본관)○○○(성명)의 널’, 여자의 경우는 ‘○人○○(본관)○씨의 널’이라 쓰고, 장지(壯紙)로 싼 뒤 노끈으로 묶는다. 입관이 끝나면 관 밑에 나무토막을 깔고 안치한 다음 홑이불(관보)로 덮어 둔다. 관은 병풍으로 가린다.

(7) 성복(成服)

입관이 끝나고 영좌를 마련한 뒤 상제(喪制)와 복인(服人)은 성복을 한다. 성복이란 정식으로 상복을 입는다는 뜻이다. 요즘은 전통 상복인 굴건제복을 입지 않고 남자는 검은 양복에 무늬없는 흰 와이셔츠를 입고 검은 넥타이를 매며, 여자는 희색 치마 저고리를 입고 흰색 버선과 고무신을 신는다.

(8) 발인(發靷)

영구가 집을 떠나는 절차이다. 발인에 앞서 간단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올린다. 이를 발인제라 한다.

(9) 운구(運柩)

발인제가 끝난 뒤 영구를 장지나 화장장까지 장의차나 상여로 운반하는 절차이다. 장의차를 이용할 때 상제는 영구를 차에 싣는 것을 지켜본다. 승차 때는 영정, 명정, 상제, 조객의 순으로 오른다. 상여를 이용할 때는 영정, 명정, 영구, 상제, 조객의 순으로 행렬을 지어 간다.

(10) 하관(下棺)

장지에 도착하면 장의차나 상여에서 관을 내려 광중(壙中)에 넣는다. 하관때는 상주와 복인이 참여하되 곡은 하지 않는다. 광중이란 관을 묻기 위하여 파놓은 구덩이이다. 관을 들어 수평이 되게 하여 좌향(坐向)을 맞춘 다음 반듯하게 내려놓고 명정을 관위에 덮는다. 그 다음에는 횡대를 차례로 가로 걸친다. 이때 상주는 ‘취토(取土)’를 세 번 외치면서 흙을 관위에 세 번 뿌린다.

기존에 있는 무덤이나 묘지가 진짜일까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장례는 풍장이 많았다. 시신을 나무에 매달아 바람에 의탁한 후 풍화가 되면 뼈만 추려 항아리속에 넣었다가 땅에 내려놓고 풀로 덮거나 가매장을 하여 탈골이 될 때까지 기다려 뼈만 다시 묻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조선조에는 특정 계급만 의례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하고 일반 백성들은 풍장의 풍습을 유지했을 것이라 본다.

한국의 장례는 풍수와 관련하여 탈관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관에 쓰는 널과 탈관문제는 기본적으로 뼈가 잘 산화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게끔 하는 것이다. 동남아의 아열대기후는 부패가 잘 안되기 때문에 주로 화장을 하게 되었고 우리나라도 뼈의 산화가 늦어지는 지역에서는 탈관을 하여 하관을 했다.

명당지혈을 찾는다는 얘기에 의문이 가는 것은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는 대부분 왕족을 중심으로 한 최상류층의 의례만 남아있을 뿐 일반인들의 장례문화는 거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풍수에 따라 명당을 찾는다는 것은 조선조에 들어와 보급된 일로 추정하는 것이다.

(11) 성분(成墳)

상주의 취토가 끝나면 석회와 흙을 섞어서 관을 완전히 덮는다. 이때 빨리 굳도록 물을 조금식 끼얹고 발로 밟아 다진다. 평토를 한 다음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 봉분을 만들고 잔디를 입힌다. 지석(誌石)은 평토가 끝난 뒤 무덤의 오른쪽 아래에 묻는다. 나중에 봉분이 허물어지더라도 누구의 묘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12) 위령제(慰靈祭)

성분이 끝나면 묘소 앞으로 영좌를 옮기고 간소하게 제수를 차린 뒤 고인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화장을 했을 때에는 영좌를 유골함으로 대신하여 제사를 지낸다.

상주는 특별한 지팡이를 짚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대나무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오동나무나 버드나무 지팡이를 짚는다. 대나무의 상징은 하늘을 상징하여 동그랗다. 고통을 당해 속이 비었다는 의미가 있다. 대나무의 마디부분은 세(世)라고 하고 마디와 마디 사이는 대(代)라고 하는데 세대차이의 어원이 된다. 어머니는 고통을 당해 단단하다는 의미이며 땅으로 상징하여 나무를 네모낳게 깎는다. 오동나무의 오동(梧桐)의 동(桐)자가 동(同)과 음이 같은 것을 취해 아버지와 같이 슬퍼하라는 의미가 있다 하며 오동나무는 마디가 없어 두 사람을 모시지 않는다는 뜻을 말한다. 이는 천원지방(天元地方)의 의미를 띄는데, 하늘은 동그랗고 땅은 네모난 것이 자연의 일부라 인정하고 무덤도 바닥은 네모지게 파고 봉분을 동그랗게 하는 이유가 된다.

(13) 삼우(三虞)

장례 후 3일째 되는 날에 첫 성묘를 하고 봉분이 잘 되어 있는지를 살피고 간단한 제사를 올린다. 이를 삼우라 한다. 요즘은 초우와 재우는 생략한다.

(14) 탈상(脫喪)

상기(喪期)가 끝나 복(服)을 벗는 절차이다. 탈상은 부모, 조부모, 배우자의 경우 별세한 날로부터 100일까지이고 그 밖의 경우는 장례일까지이다. 이때 지내는 제사가 탈상제인데 제사 지내는 방법은 기제(忌祭)에 준한다.

탈상은 상복을 벗는 것을 말한다. 현재는 돌아가신 지 3일째 되는 것을 주로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49제를 지내고 더러 100일 탈상도 있다.

우리나라는 점점 화장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땅을 사고 무덤을 만드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인데 이처럼 의례를 바꾸는 것은 대체적으로 돈 때문이다.

이후에 남은 절차가 제례이다. 관혼상제의 마지막 부분이 제사인데 한국사회의 친족관계는 이 제사절차를 위해 정리되었다 봐야 한다. 부모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형제간이 2촌이 된다.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4촌이 있고, 증조할아버지의 제사를 위해 6촌이, 고조할아버지의 제사를 위해 8촌이 있다. 동고조를 8촌까지로 명하는데 고조할아버지, 즉 위로 4대까지는 집안 사당에 모신다. 4대면 거의 100여년, 한 세기가 되고 4대가 넘어가면 사당에서 물러나 조상이 된다. 보통 4대조까지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지만 4대 봉사가 끝난 뒤에도 없애지 않고 계속 봉사하는 신위를 위한 제사를 불천위제사라 부른다. 불천위는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적 학문적으로 뛰어난 경우에 한하여 자손대대로 제사를 지내는 조상이다. 국가에서 명하거나 유림에서 지정하기도 하며 부부를 합동으로 제사지낸다.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모신다고 하여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줄임말을 사용해 불천위제사(不遷位祭司)라 한다.

상장례와 제례에는 촌수에 따라 복식이 달라지고 불천위제사를 포함해 100년 이후의 조상을 모시는 지체는 집안이 아니라 문중이 된다. 죽은 자의 무덤, 산소가 주체가 되고 죽은 사람의 집이라 하며 무덤을 유택(幽宅)이라 한다.

제사를 지낼 때 음식을 준비하는데 이를 선물(膳物)이라 한다. 이 음식을 할 때 파와 마늘은 쓰지 않는다. 오로지 간장만 사용하는데 이는 한 집안은 한 가지 맛의 장을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 집안이라도 각자의 입맛이 다르니 마무리 양념은 각자 집에 가져가 조리해서 먹으라는 뜻이다. 국가의 제사나 향교의 제사는 간장도 쓰지 않고 전혀 간을 하지 않는다. 제사의 음식은 궁극적으로 모인 제례의 주체들이 먹을 것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갑오경장 이후 신분제도를 철폐하여 4대봉사까지만 하도록 정리하였고 제사는 기본적으로 살아있을 때 얼굴을 본 사람까지만 지내게 되었다. 일반사람은 대부분 자기 부모님의 제사만 지내는 편이다.

  • 품격 있는 죽음

유교에서 가장 이상향으로 보는 것은 요순시대이다.

요순시대는 집안이 갖추어지고, 깨끗한 옷을 입고, 농사를 지어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처자식을 먹일 수 있고 부모를 봉양할 수 있는 사회였다고 한다. 이런 시대를 소강이라고 한다. 그 다음 단계를 대동사회라 한다. 모두가 행복한 시대를 꿈꾸는 것이다.

인간은 행불행을 논하기 어렵고 하늘의 도가 옳고 그른지 정의내릴 수 없으나 인간이 지향하는 지점은 모두가 편안하고 행복한 것이라는 것엔 이의가 없다. 인간이 하는 근심걱정이 하루에 몇 개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말처럼 내가 왜 사는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각을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사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인중의 아래에서 일어나는 먹고 본능을 채우는 일부터 인중의 위에서 일어나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깨닫는 일까지 사람의 인생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스티븐 호킹은 사람의 죽음이 컴퓨터가 꺼지는 것과 같은 구조라 하였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마음 심(心)자에도 어떤 파장이 느껴지는데, 이것이 과연 단순한 기계의 종료로 치부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든다.

죽음을 이기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끝없는 고행으로 이어져왔다. 인간은 각자의 수양을 통해 인간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 살아가는데 사후세계가 있고 없고를 떠나 행불행을 뛰어넘는 것이 죽음이 아닐까.

몸은 못 움직이고 의식은 남아있을 때 우리는 품위를 지킬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고, 고통을 인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삶과 죽음은 새끼줄처럼 하나로 꼬여 있어서 안이 행(幸)이면 밖이 불행(不幸)일 수 있고 안이 불행이어도 밖이 행일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심상(心相)중에 자존심, 자기를 지키려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다. 자존심을 지킨다는 것은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살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의지를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늘 짐승과 사람의 경계, 사람과 신의 경계에 놓여 있다.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남는 마지막 순간, 그 순간을 숭고하게 남길 필요가 있다. 비록 육신은 이 세계를 떠나가지만 한 사람의 삶과 그 삶을 지켜왔던 혼은 자손과 자손을 통해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다.

2015년 8월 10일

용산구 동자동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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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1호실부터 14호실
2층, 2호실부터 28호실
스물 여덟명이 머리위에 머리를 머리 옆에 머리를 포개고 살던 고시원 자리는 작은 놀이터가 되었다.

벌어먹고 사는 일은 매일 목숨을 거는 일,
수명을 내놓고 돈으로 바꿔오는 일,
그 흔적을 덮어버린 깔끔한 어린이 놀이터라니,

도시개발은 내 삶을 부정하고
나의 지난한 세월을 모욕한다.

2015. 11. 3. 저녁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18-37이었던 자리.

바위앞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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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동자동 18번지에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저 바위를 건드리지 않았고
빤지름한 건물을 내처 올리면서도 저 바위만은 어쩌지 않았다.바위를 바라보고 섰는데
그 아래서 술을 먹던 남자가 나를 부른다.
“작가님!”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나 사진 한 장 찍어주세요.”
“그래도 돼요?”
“예 한 장 찍어주세요.”

그는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되면 사진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자기는 언제나 이 자리에 있다고 했다.
그는 나를 어디선가 보았다고 했다.
나보고 TV에 나오지 않았냐고 물었고
서울역 광장에서 본 거 같다고도 했다.
자기는 노숙자라고 말했다.
자기같은 사람을 많이 찍어야 한다고 했다.
자기는 인터넷에 얼굴이 알려져도 상관이 없다고 했다.
오늘은 서울역 지하도에서 자면 된다고 했다.

어찌할 수 없던 바위 앞에 앉아
깨끗한 신발을 신고 술을 마시던 그에게
나는 만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그는 오늘도 내일도 여기 있을 거라고 말했다.

2015.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