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과 전쟁터 – 죽어가는 아이들

몇 년전 읽은 토니모리슨의 <빌러비드>는 자녀를 살해한 흑인노예여성의 이야기가 모티브다. 1856년, 실제 있었던 마가렛 가너의 사건이다. 마가렛은 가족이 있었다. 그들 모두 노예였다. 흑인노예들도 가족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있었으나 백인주인에 의해 이 가족은 파괴되고 삭제되곤 했다.

가너의 가족 8명은 탈출을 준비한다. 농장이 있던 켄터키주에서 출발해 오하이오강을 건너 북부로 갈 생각이었다.

이들은 성공적으로 얼어붙은 오하이오강을 건너 신시내티에 도착했고 자유흑인의 집에 잠시 머물러 북으로 갈 채비를 했다. 추격자들이 이들을 금세 찾아냈고 가너의 가족은 죽음으로 저항할 지언정 다시는 노예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마가렛 가너는 당시 스물두살이었고 네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추격자들의 앞에서 가너는 세 살난 딸을 죽인다. 그도 바로 자살하려 했으나 바로 체포되어 감옥으로 이송된다. 배를 타고 감옥으로 가던 중에 물에 뛰어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마가렛이 남은 아이중 9개월된 아이를 안고 뛰어들었다는 증언과, 아이를 먼저 물에 던지고 가너가 뛰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강에 빠진 아이는 죽었고 마가렛은 사람들이 건져올려 또 살아남았다.

마가렛의 남편은 남북전쟁에 참전한 뒤 자유인이 되었고 마가렛은 다시 뉴올리언즈로 팔려갔다가 미시시피로 팔려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김인선의 2014년 논문 <흑인노예의 자식 살해와 모성: 1856년 마가렛 가너 사건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가너의 아이들은 흑인과 뮬라토(흑인과 백인 혼혈)가 뒤섞여 있었다. 첫 아들은 흑인이었으나 둘째부터는 백인의 피가 섞였다. 마가렛 역시 뮬라토였다고 한다. 한 아이는 백인에 가까울 정도로 밝은 피부색이었다고 한다. 마가렛의 남편 로버트는 흑인이었다.

마가렛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흑인이었고 마가렛은 뮬라토였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마가렛이 누구의 자식이며 마가렛의 자녀들은 또 누구의 자식인가를 추정하게 한다. 논문에서는 이 부분을 상세히 다룬다.

요약하면 이렇다.

가너일가는 프리실라와 마가렛, 마가렛의 자녀들까지 한 농장에서 일했다. 마가렛의 어머니인 프리실라는 흑인과 결혼하였으나 백인소유주에게 성폭행을 당해 가너를 낳았을 것이다. 프리실라는 가너가 열 두살쯤 되었을 때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을거라 생각해 이웃에 있는 흑인노예 로버트와 급하게 결혼을 시켰으나 마가렛도 첫 아이 이후로 백인의 피가 섞인 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가족이 탈주를 결심한 때에 가너 가족의 소유주였던 존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아들들에게 농장을 맡겼다. 존의 아들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사이였다. 프리실라는 마가렛이 사실상 이복형제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의 자녀를 출산할까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가렛이 죽인 아이는 누구의 자녀였을까. 마가렛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가렛과 남편과 가족들을 잡으러 온 자들중에, 살아서 다시 노예가 된다면 다시 만나야 할 사람들 중에, 딸아이의 아비가 있었을 것이다.

수원의 한 아파트 냉동실에서 두 명의 영아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을 곰곰히 생각했다. 죽은 아이들 위로 자녀가 셋이 있다고 했다. 체포구속된 아이의 엄마인 고씨는 12살, 10살, 8살의 자녀가 있다. 그뒤로 둘을 더 낳은 것이다. 고씨는 서른 다섯살이고, 남편은 마흔 한 살이다. 고씨가 처음 아이를 낳았을 때는 스물 셋이었을거다. 아이들이 죽은 것은 2018년 11월과 2019년 11월로 추정된다고 한다. 5년 전 일이다. 나는 죽은 넷째와 다섯 째 아이가 1년 터울인 것에 놀랐다. 이미 한 아이를 낳아 죽였는데, 또 임신을 했다니. 나는 고씨가 어떤 심리상태였는지 알 수 없으나 가정폭력에 오랫동안 노출된 사람은 아닐까 의심했다.

사진 1 : The Modern Medea – The Story of Margaret Garner ARTIST Noble, Thomas Satterwhite, 1835-1907

160여년 전, 마가렛의 사건 이후 토마스 새터화이트는 The modern Medea 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다. 자신을 배반한 남자와 그 자녀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린 메데이아.

마가렛 사건을 두고 죽음으로 인간임을 증명하려 했던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흑인노예의 저항은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노예의 삶을 대물림해주느니 ‘신에게 보낸다’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재임의 2022년 논문 <낙태와 아동학대 사이에서: 영아살해 처벌의 의미 변화에 대한 역사적 분석, 2010-2022년*>에 따르면 사회적 처벌은 이데올로기의 전파수단이며 사회적 통제의 기능을 한다. 조선시대의 영아살해는 출산통제의 수단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처벌을 받는 범죄가 되었다. 1951년 만들어진 형법에서는 “여성이 약자의 지위에 있는” 사회 현실을 고려하여 영아살해죄, 영아유기죄, 낙태죄의 형을 경하게 규정했다. 미국 심리학자 레스닉(Resnick, 1970)은 신생아살해를 다른 자식살해와 개념적으로 구분짓고 명명했다. 신생아살해(neonaticide) 가해자는 1살 이내의 유아살해(infanticide), 미성년 아동살해(filicide)와 같은 다른 자식살해 가해자와 달리 병원 진료를 받지 않고, 임신 사실을 숨기고 부정한다는 특성을 가지며, 의료 기관의 도움 없이 홀로 출산한 상황에서 범죄를 저지른다(Alder and Baker, 1997; Malmquist, 2013; Resnick, 1970; Saavedra and Cameira, 2018)고 한다. 한국의 영아살해도 같은 특성을 갖는다.

이재임논문의 표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이들이 있다. 촛불같은 인생에 바람 한 점 가려줄 데가 미숙하고 부족해도 부모와 가족뿐인 세상이라고 치면, 그나마도 부족한 삶은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내가 사는 집이 지옥과 다르지 않고 내 일상이 전쟁과 다르지 않다면, 지옥과 전쟁터에서 아이를 낳고 기를 생각은 하기 어렵다. 이 지옥을 다시 물려주고 싶은 않은 어떤 어미들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2013년 재판부는 한 영아살해 사건에 대해 “어린 미혼모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출산을 장려하면서도 양육은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 책임도 커 실형은 선고하지 않는다”고 적기도 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이 어미의 손에 의해 죽어가는 세상. 어떻게 생각해도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 아이를 버리고 아이를 죽여야 하는 바로 여기가 지옥이다.

참고문헌 : 이재임 (2022) <낙태와 아동학대 사이에서: 영아살해 처벌의 의미 변화에 대한 역사적 분석, 2010-2022년*

김인선 (2014) <흑인노예의 자식 살해와 모성: 1856년 마가렛 가너 사건을 중심으로>

한국일보 남보라 2023. 6. 29. ‘수원 영아살해’ 엄마 “막내 초등학교 졸업하면 자수하려했다”

수원 영아살해 피의자 고 모 씨의 편지

[퍼스트 펭귄] 09. 미인대회는 왜 공중파에서 사라졌을까?

2018.11.08

‘퍼스트 펭귄 캠페인’은 펭귄 무리 중에서 제일 먼저 검은 바다로 뛰어들어 다른 펭귄들에게 용기를 주는 ‘퍼스트 펭귄’과 같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과 제도에 대해 처음 목소리를 낸 시민들과 ‘공익단체’들을 알리는 캠페인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퍼스트 펭귄’들의 스토리가 연재됩니다. 함께 응원해주세요! 본 기획연재는 카카오같이가치와 서울시NPO지원센터가 함께 합니다.😀

지덕체를 갖춘 여성을 뽑는다고요? 

마이크를 든 사회자가 참가자에게 묻습니다.
 

“데이트를 하다 보면 식사를 하러 갈 수 있잖아요?

밥 속에 돌이 들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먼저 얌전하게 빼내고요.

애인한테도 조심하라고 얘기해줄 거예요.”

 
대답을 하는 여성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네요.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어떤 자리일까요? 바로 1987년 미스코리아선발대회 결선입니다. 

미스코리아 대회를 기억하시나요? (출처 : shutterstock)

수영복을 입고 높은 하이힐을 신고 부풀린 머리를 한 여성들이 긴장된 발걸음으로 무대 위를 걷습니다. 한 손은 허리에 올리고 온몸을 곧게 펴죠.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뽑는 미스코리아 대회. 결혼과 출산의 경험이 없는 만 18세 이상,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고졸 이상의 지덕체를 겸비한 여성을 선발하는 것이 미스코리아 대회의 기준이었습니다.
 
1996년의 미스코리아 대회 선발기준 중 일부를 뽑아보면 이렇습니다. 
 
– 얼굴이 크지 않아야 하며, 양 어깨가 넓으면 안 되고 어깨선이 부드러워야 한다.
– 가슴의 크기, 위치, 선 그리고 엉덩이의 사이즈, 선, 모양을 고려한다.
– 몸에 상처가 있거나 큰 점이 있으면 안 된다.
 
이를 평가하는 심사위원은 대회 주관사에서 결정했습니다. 지덕체를 가진 여성을 뽑는다면서 신체적 기준을 특정하게 맞춰놓은 것도 말이 안 되지만, 만 18세 이상의 결혼과 출산의 경험이 없는 여성을 뽑는다는 것은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성만이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뜻일까요? 
 
사람을 잣대에 놓고 이렇게 재고 저렇게 재는 미스코리아선발대회. 게다가 후보자들의 신체조건을 평가하기 위해 여성들이 파란색의 동일한 수영복을 입고 몸매를 뽐내기도 했습니다. TV 채널이 몇 안되던 2000년대 이전, 미스코리아 대회는 매년 전국으로 생중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반기를 든 퍼스트 펭귄들이 있었습니다.
 

[미스코리아선발대회와 그에 대한 반대 운동]

 

미스코리아가 뭐길래 

 
미스코리아 대회는 1957년 한국일보사의 주최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는 공개적으로 외모를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여성의 미래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부모들이 참가를 만류했다는데요. 이후 1972년부터 공중파에 생중계되면서 미스코리아 대회는 국가적 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 미스코리아에 뽑힌 여성이 바로 방송과 연예계로 진출하는 풍토가 생기자 대회의 경쟁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 것입니다.
 
1980년대, 여성유권자 연맹은 미인대회 폐지를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여러 여성단체들이 이에 동참하였습니다. 1989년 여성신문에서는 “노예시장 같은 미인대회를 차 버리자 – 미스코리아 대회는 굴욕적이고 반여성적인 추태”라고 논평을 하기도 했지요. 
 
물론 주최 측은 외모만으로 미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선발된 여성들은 하나같이 서구적 기준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을 수치와 외양으로 평가하고 우열을 가리는 일에 돈까지 끼어들자, 미스코리아 대회는 더 이상의 명분을 얻기 어려웠습니다. 

여성들에게 번호와 점수를 매겨 외모를 평가하는 미인대회

미스코리아를 시작으로 전국에는 각종 미인 선발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지역특산품과 연결시킨 OO 미인 선발대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농산물을 들고 있는 여성들의 사진이 전국으로 퍼져나갔죠. 이러한 미인대회들은 대부분 미스코리아 선발기준을 비슷하게 따르고 있었습니다. 
 
미인대회에서 선발되면 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많은 젊은 여성들이 그 기준에 맞춰 자기 외모를 바꿔나가기도 했습니다. 키가 커야 하고 날씬해야 하며 몸에 상처가 없고 피부가 매끄러워야만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걸까요? 여성의 기준이 외모에 집중되기 시작하자 초등학생들도 장래희망을 ‘미스코리아’라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미인대회를 반대한다

 
미스코리아가 아름다운 여성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고 그 경쟁도 치열해졌습니다. 경쟁이 심화되자 이에 대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는데요. 특정 미용실에서 수천만 원을 받고 미스코리아 대회를 준비시키거나 수억 원의 뒷돈이 오고 갔다는 비리가 밝혀지고 나이와 학력을 위조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1993년 심사위원들의 뇌물수수 사건이 드러나자 미스코리아 대회를 반대하는 여론도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단체연합은 성명서를 냈습니다. 
 
“돈거래로 얼룩져 세계무대에 나갈
한국미인을 선발한다는 명분도 잃었으며,
여성의 상품화를 부추기는 대회를 폐지하라”
 
대회도 대회지만, 매년 미스코리아 대회는 공중파를 통해 전야제부터 본 대회까지 모두 생중계가 되었습니다. 1996년 여성단체연합은 MBC 방송국 앞에서 방송 중계를 중지하라고 시위를 하였고 1999년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은 ‘이달의 나쁜 방송’으로 MBC의 미스코리아 중계방송을 선정하였습니다.
 
“미스코리아 대회는 획일적 미의 기준, 외모지상주의,
여성상품화, 연예계 등용문으로의 전락 등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공중파 방송사가 이를 생중계해 정당화하고 있다”

1999년 미스코리아 대회 생중계에 대한 경향신문 기사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미스코리아 반대 움직임을, 남성들은 ‘못생긴 여자들의 질투’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비웃기도 했는데요. 이를 통해, 미의 기준을 미스코리아의 기준에 이미 맞춰버린 대중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라고?!

 
1999년 페미니스트 매거진 ‘이프’는 미스코리아 대회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을 개최하였고, 이 행사는 2009년까지 매 해 열렸습니다.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에서는 기존의 미스코리아 대회에 맞서 정형화된 미인이 아닌 행사 취지에 적극 동의하는 사람이면 남녀노소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대회를 통해 10살 된 어린이, 20대 남학생, 트랜스젠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님, 여성 축구 선수, 남자 간호사 등 획일화된 미의 기준이 아닌 다양한 ‘아름다움’에 대해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였습니다. 

1999년 1회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에 대한 한겨레 기사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은 당시 방송인 홍석천 씨, 영화감독 변영주 씨, 가수 백지영 씨 등 유명인들의 참여도 이어져 많은 시민들에게 관심을 받았고, 그 취지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였습니다. 
 
결국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오랫동안 생중계했던 MBC도 내부 비평 프로그램을 통해 미스코리아 대회 방송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고 2001년 MBC가 재계약을 포기하면서 2002년부터 미스코리아 대회는 공중파에서 중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퍼스트 펭귄들이 10년 넘게 싸워 얻은 작은 결과였습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가치

 
2000년대 후반에는 문화관광부의 요청으로 지역 미인대회가 하나씩 폐지되었습니다. 미인대회가 더 이상 호응을 얻지 못하자 미인대회 반대에 대한 목소리도 조금 줄어들었는데요. 대신 여성의 성상품화에 대한 인식이 보편적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결국 여성을 대상화하고 상품화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의식도 일반화되었습니다.
성형 프로그램 폐지를 요구하는 시민들
(출처 : 여성민우회 트위터)
 
하지만 지금도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대중문화는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심지어 성형수술을 통해 외모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시민단체들의 폐지 요구로 결국 해당 프로그램은 폐지되었습니다.
 
날씬하고 얼굴이 예쁜 여성만이 아름다운 것일까요? 어느 누구도 외모를 포함한 보이는 모습으로 평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각자의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의 다양한 아름다움이 존중받는 날까지, 퍼스트 펭귄들의 활동은 계속됩니다.

| 기획 : 서울시NPO지원센터, 현장연구자모임 들파

| 스토리 : 박수연 (서울시NPO지원센터)

| 글 : 이하나 (hana@allmytown.org)

| 삽화 : 이한비 / 인포그래픽 : 문화공동체 히응

👉🏻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 
👉🏻 여성신문 : http://womennews.co.kr/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 http://kocsc.or.kr/ 

이름 없는 자의 #metoo

중학교 2학년때였다.
초등학교 4학년무렵부터 의붓아버지와 같이 살았다.
아버지의 빈 자리를 채워주던 사람이라 살갑게 굴었고, 나는 그가 싫지 않았다. 엄마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두 사람은 갈등이 깊어졌고 그 사이에 나와 내 동생이 있었다.

혼자 늦잠을 자던 일요일 아침에 그가 내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왔고 여기 저기를 만졌다. 여기와 저기는, 내가 2차 성징이 시작되었다는 걸 명징하게 나타내주는 두 곳을 말한다.
그일 이후, 나는 다른 일로 그와 격렬하게 싸우다 몇 대를 맞고 집을 나가 밤을 새고 들어온 적이 있고, 그 이후로 오래 지나지 않아 엄마와 그 사람은 헤어졌다.
그때 나는 열 네 살이었고, 지금 나는 마흔 네 살인데, 칠순을 넘긴 우리 모친에게 이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이 사실을 직접 엄마에게 말한다면, 그것으로 엄마의 인생이 물리적으로 깔끔하게 끝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신철석이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중고등학교를 지나며 교사들의 적절치 않은, 지금으로 따지면 성희롱이나 그때로 따지면 음담패설에 불과했던 그 자잘하고 무수했던 이야기들은 차치하고,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안에서 제 음부를 내 엉덩이에 밀어대던 얼굴도 마주치지 못한 수많은 성기들과 학교 앞에서 제 성기를 내놓고 자위행위를 하던 눈도 마주치지 못한 그 성기들은, 존재가 아닌 그저 좆으로만 남았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동생과 단 둘이 살던 이대 앞 대흥동 자취방에 잠든 사이 들어와 불을 끄고 얼굴을 살피던 리바이스 청남방을 입은 그 놈과, 보광동 반지하방의 화장실 문을 열던 그 놈과, 현관 문이 열린 사이 거실에 들어와 팬티를 훔쳐가 골목 사이에 쌓아두던 놈과, 고시원 방에서 자꾸 여자들의 팬티를 훔치던 그 놈도, 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스무 살이 넘어 만으로 스무 살이 되기 두 달전, 나는 라이브 호프집의 밴드 싱어였고, 내가 속한 밴드의 리더의 후배가 운전기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실직상태였는데 그 이전엔 유명가수의 소속사에서 로드매니저와 운전기사로 일했다고 자랑을 했다. 그 당시엔 어머니를 그리는 노래로 유명한 젊은 가수의 매니저 자리를 따내려고 애를 쓰던 중이었고 호감인지 질척댐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을 자주 나에게 보냈다. 그가 업계 사람을 소개해주겠다며 나를 술자리로 불렀다. 나는 일감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그 자리에 동석했다. 경향신문사 길 건너 편의 작은 술집이었다. 그 자리에 와 있던 신문사 간부는 내 이력을 듣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고 응원을 해주고 자리를 떴고 그 가수는 사실 나에게 별 다른 관심이 없었다. 나를 불렀던 연예계 종사자, 그 사람은 키가 180이 훌쩍 넘는 거구에 가장 완력이 좋을 20대 후반의 남자였다. 술 자리가 파하고 집에 가겠다는 나에게 그는 화를 내며 길바닥에서 물건을 부수고 소리를 지르며 깽판을 쳤다. 어떻게든 그 자리를 수습하려는 나에게 여관이 들어가 눕는 것을 보고 가달라고 그가 애원했다. 서교동의 한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그가 나를 때려 눕혔고, 나는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했으나 그에게 머리채를 잡혀 다시 바닥에 내다꽂혔다. 같이 입실을 하는 순간 강간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그가 소리쳤고, 그는 허리띠를 풀어 온몸을 때렸다. 아, 그리고, 나는 그때 생리중이었다.
아침이 되어 인검이 나왔다. 경찰이 문을 두들겼고 나는 경찰에게 신분증을 보였다. 그때 내 표정이 어떠했는지 나는 기억할 수 없다. 경찰은 내가 미성년자라고 했고 그의 신분증을 조회하더니 기소중지 중인 사람이 미성년자 데리고 이런 데 와도 되냐고 비아냥 거렸다. 그리고 경찰은 나에게 “아가씨 빨리 집에 가요.” 라며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여관을 떴다.
그의 이름은 박명호다. 나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명확히 기억한다. 그의 커다랗던 몸의 무게도 가끔 기억난다. 나는 그 이후로 그를 몇 번 더 봤으나 밴드리더가 사기사건으로 잠적한 이후 나는 그를 다시 만난 적 없다.

그날 여관방에서 나온 정오쯤에 햇빛은 뜨거웠고, 한 여름이었다. 원피스를 입었는데 어깨끈이 찢어졌던 것 같다.
택시를 타고 고시원으로 돌아가, 공동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했다. 마음대로 하루를 쉬거나, 아프다고 일을 거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이후, 나는 그를 경찰에 고발하거나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도 그 사실을 제대로 서술한 적 없다. 그때를 회상하는 글을 쓸 때면 “성폭행을 당했다.” 라고만 적었다. 최근 벌어진 #미투운동을 보면서 자꾸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선명해졌다. 한 가지 더 추가된 것은, 내가 왜 그 일에 대해 괴로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거나, 세상을 등지거나 당시엔 우울증조차 겪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감정을 모두 꼬깃꼬깃 접어서 아무도 못 보는 곳에 쑤셔 박고 산 세월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후의 내 행동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습관처럼 매일을 살았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만큼의 절망을 만났을 때, 살아남는 방법은 습관처럼 사는 것이리라. 나는 그렇게 습관처럼 그 시절을 살아냈을 뿐이다.

그 이후에 있던 수많은 성희롱은 딱히 불쾌한 지경도 아니었다. 그저 같잖다고 느꼈을 뿐이다. 어쩌면 내 감정을 단단하게 만들면서 넘기고 넘겼을 것이다. 매번 닥칠 때마다 고통스러워 봤자, 나만 다친다는 걸 깨달은 동물적 감각일 것이다.
결혼 후, 애 엄마가 된 뒤에도, 마흔즈음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일로 엮인 자리에서 한 차례의 성추행과 성희롱이 있었다.

한 사람은 지역행사에 왔던 젊은이였는데 술자리에서 옆에 앉은 사람을 쓰다듬는 것이 습관 같았다. 다음날 그의 선배였던 나의 지인에게 전화를 해서 엄중하게 경고하는 걸로 넘어갔다. 그의 선배는 나에게 깍뜻하게 최선을 다해 사과했다. 한 사람은 지역에서 알게된 엄마 또래의 지식인이었는다. 일 때문에 같이 회의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녁 식사에서 그 분은 맥주 몇 잔을 했고 나는 어르신들이 많은 자리라 술을 삼가했다. 겨우 그 정도 술에 거나해진 그 분이 내 차 조수석에 앉아 운전하는 나에게 “한국 차는 키스하기가 참 안 좋다”는 둥, 부인하고 사이가 안 좋다는 둥, 으례 쓰는 촌스러운 멘트를 날려 피식 웃었다. 나는 그 이후로 그를 안 만났으나 그분은 아마 본인의 언행을 기억못할 것 같다. 상습법이기엔 너무 어설펐다.

미투운동은, 나도 당했다, 라는 것을 넘어 나도 고발한다, 라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내가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 굳이 불편하게 공개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나 자신에게 물었다. 이 글을 쓰려고 일주일 넘게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왜 그 사건을 고발하지 못했으며, 지금의 나는 왜 이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 내려 하는가. 성폭행과 아동학대의 생존자는, 언론지상에 유사한 폭력사건이 공개될 때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린다. 묻어뒀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고, 무의식적 가해가 다시 일어난다. 그 기저엔 죄책감도 있다.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죄책감 말이다.

며칠 전, 나의 늙은 개와 함께 집 근처를 산책하던 중이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주변엔 캣맘들의 밥을 얻어먹고 사는 씩씩한 길냥이들이 몇 마리 있다. 놀이터에서 놀던 남자 아이들이 어슬렁거리며 걸어가던 노란점박이 고양이를 발견하고 고양이를 뒤쫒았다. 아이들은 내가 늙은 개의 목줄을 잡고 걸어다닐 때면 자기가 서 있던 자리에서 “강아지다. 아 귀엽다. 만져보고 싶다.” 라고 하지만 쉽게 접근하지 않는다. 내가 목줄을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늙은 개만큼이나 덩치도 큰 길냥이들은, 아이들이 쉽게 쫒아가고 쉽게 접근하고 쉽게 위협한다. 아무도 그 옆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고양이와 친해지고 싶어서인지, 괴롭히고 싶어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가까이 가도 되기 때문이겠지. 옆에 서 있는 보호자가 없으니까.
아이들이 고양이에게 돌을 집어던져도, 숨어 있는 고양이에게 나뭇가지로 쿡쿡 찔러대도, 길고양이의 밥그릇에 신나를 부어 같이 살던 고양이가 죽어도, 살아남은 고양이는 먹어야 한다. 그 하루를 위해서, 먹이를 찾고, 숨을 곳을 찾아야 한다. 그때 내가 고발하지 못했던 이유가 그런 것이었을 거다. 내 옆에 보호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테고, 나는 그날도, 그 다음날도 살아야 했으니까.

이어지는 미투고발은 대부분 이름을 가진 자들에 대한 폭로다. 내가 고발할 수 있는 그자들은, 내가 이름을 기억하지만, 전혀 유명하지 않다.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고, 이미 다른 죄로 구속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름은 커녕 얼굴도 제대로 못 본 가해자들도 수두룩하다. 그들에 대한 고발도 얼마만큼의 사회적 가치를 가질까. 나는 그 부분을 고민했다.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나의 가해자는 유명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굳이 이런 사소한 얘기까지 할 필요가 있겠냐며 기억을 다시 쑤셔 박을 지도 모르겠다.

모든 가해자는 이름이 있을 것이다. 그들도 알량한 권력이 있었다. 더 큰 권력 앞에서 개처럼 꼬리를 내릴 비겁한 권력이었고, 그 좁쌀만한 힘 앞에 무너졌다는 게 나를 분노케 한다. 프레임 논쟁따위가 끼어들만큼 여유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인간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그저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인생을 뒤집었고 삶의 기준점을 바뀌게 하며 숨 쉬는 방법과 걸음걸이를 바꾼다.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으로 산다. 이 분노와 수치심이 모여, 세상을 뒤엎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건은 절대 없던 일이 되지 않으며, 우리는 절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방법은 하나다.

싸우는 우리가 이긴다.

2018. 2. 27.

#metoo #withyou
#싸우는우리가이긴다

 

덧붙이자면, 부탁하건데, 피해자를 불쌍하게 보거나, 어줍잖은 위로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싸울 수 있다고 믿는다.

마흔 넘어 페미니즘

딸아이가 짧은 치마를 입고 출근 준비를 했다.

뭘 주우려고 허리를 숙이는데 위태로웠다.

야야, 너 치마가 좀 짧다. 보이겠네. 라고 했더니

치마를 번쩍 들어올려 “안에 속바지 붙은건데?”라고 반문한다.

나는 입을 닫았다.

아이가 열다섯일 때 딱 저만큼 짧은 빨간 치마를 가위로 난도질한 적이 있다. 내내 불편했던 마음이 다시 올라왔다.

네가 입는 옷이 너를 결정한다는 사상은 “남들의 시선을 고려해서 남들이 좋아하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렇게 짧고 야한 걸 입으면 안된다는 것”은 “성폭행 당시 무슨 옷을 입었나요?” 라고 묻는 것과 동일하다.

며칠 전 누가 “이 옷은 가슴이 너무 파여서 좀 신경이 쓰인다”는 말을 하길래 “그건 그거 지적하는 인간이 젖만 보고 있다는 뜻이지.” 라고 대답한 적 있다.

여성의 옷차림에 대해 유독 민감하게 굴며 질타하는 남성을 보면 자기 억제가 강한 사람인 공통점이 있었다. 일반화는 위험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본인 욕망을 해소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인간”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적어도 내 내면에서는. 때로 나도 그런 꼰대가 된다.

이 나라는 희한하게 다리를 내놓는 것엔 관대하고 젖을 내놓는 것엔 까다롭다. 유방은 여자만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운 신체기관이다. 유방에 대해 유난히 예민한 것은 “어머니의 신성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타인을 질책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그 사람의 욕망이 보인다.

세월호 유가족을 두고 “돈 때문에 저런다”는 건 본인이 돈에 대한 욕망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산다는 뜻이고, “그런다고 공천 못 받아요!”라고 은수미의원을 향해 외쳤던 김용남은 “공천 노이로제”에 시달리던 때였을 것이다. 그는 공천은 받았으나 낙선했다. 김용남의 욕망은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사람마다 욕구의 정도는 모두 다르다. 타인에 대한 힐난은 본인의 욕구가 해결되지 않음을 반증한다. 손가락질 할 때 나머지 손가락이 나를 향한다는 말의 뜻이 바로 이거다.

나이 마흔이 넘어 페미니즘을 배워간다. 그동안 나는 사회적 남성으로 살아왔다.

딸아이에게 카톡을 보내서, 오래 전 일을 사과하고 싶다.

“언제나 네가 꼴리는 대로 입어도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다 죽겠노라”고.

 

2016년 5월 1일

 

[영화]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

지난 3월 24일부터 31일 사이에 서울 롯데시네마 홍대입구점에서 인디다큐 페스티벌이 열렸다. 코코뉴스와 연대를 맺은 창작집단3355가 공동체상영을 진행하는 영화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를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었다.
▲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 엽서 이미지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 <Masquerade of Her>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는 감독 박강아름의 사적 다큐멘터리다. 한 사람의 생활 일부가 기록되어 후세에 남을 때 그 중 기록의 가치를 갖는 것들이 있다.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는 기록의 가치를 갖는 사적 다큐에 해당한다. 십대때부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여자이고, 대한민국 국민이다. 한국사회에서 성장한 20대 후반의 여성의 정체성은 어떤 것들이 규정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이 영화에 담겨있다.

이 영화의 첫 촬영은 2008년에 시작되었다. 영화는 텀블벅 후원을 거쳐 2015년에 마무리되어 그 해 4월 26일에 첫 시사회를 열었다. 2008년부터 박강아름은 “나는 왜 남자친구가 안 생길까?” 하는 사적인 질문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감독의 카메라는 계속해서 한 여성의 사적인 생활을 기록한다. 사회는 감독이자 주인공인 박강아름에게 단호하게 ‘남자친구가 안 생길만 하다’라고 말한다. 10대 소년소녀들부터 감독의 선배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외모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남자친구 없는 몇 년을 지내며 주인공은 체중조절도 시도해보고 외모의 변신도 꾀해보지만 신통치 않다. 결국 주인공은 특별한 실험을 준비한다. 외양을 바꿔보고 사회의 인식을 시험한다.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각자의 역사 속에 깃든 선입견으로 그녀를 규정하고 원래 주인공의 모습보다 훨씬 더 보기 좋다는 말을 건네며, 심지어 ‘몰라보겠다’, ‘훨씬 예쁘다’, ‘진작 좀 그렇게 하고 다니지’라고 쉽게 말을 한다. 주인공은 연령과 계층을 넘나드는 몇 가지 주제를 가지고 외모로 판단할 수 있는 어떠한 상을 구현해낸다. 교복을 입고, 무슬림복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한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에 충실하여 주인공을 대한다.

박강아름의 원래 모습은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은 편안한 모습이다. 대한민국에 사는 젊은 여성들은 정말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으며 살아갈까? 내가 좋아한다고 정한 것들은 진정 자기가 좋아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영향으로 좋아하기로 결심한 옷일까? 청바지에 흰 면티는 가장 편안하고 무난한 복장이라 했나? 소녀시대가 청바지에 흰 면티를 입은 그 날부터 대한민국 여성의류에 관한 미의 기준은 뒤집어졌다.

미디어는 이미지를 쏟아내고 대중들은 거리낌 없이 소화한다. 이미지가 세계를 점령하면서 개인이 각자 스스로 창출해낼 수 있는 계층에 대한 이미지는 소멸된 셈이다. 누군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낸다는 것은 ‘반전’이라 불리며 행위자는 ‘특이한 사람’이 된다. 이미지를 먹고 자란 사람들은 늘 새로운 이미지를 갈구하면서도 기존의 질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길 바란다. 고대 서사의 원형에서 벗어나지 않는 스토리를 소비하는 것처럼 예측 가능한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길 바란다. 사회는 점점 복잡해지고 초단위로 쏟아지는 정보는 사람들의 뇌를 흥분시킨다. 일상이 예상 가능한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힘겨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 돌출적인 인물이 되고 그들의 실험은 누군가에게는 신선한 지적 자양분이 되지만 과로누적의 사회에서는 귀찮은 일이 된다.

▲ 아주 사적인 질문에서 시작한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는 사회의 통념을 녹여냈다

박강아름의 실험은 지금 이 나라에서 한 사람을 대하는 인권존중의 민감도가 어디쯤 와 있는지 보여준다. 기계에 사람의 몸을 맞추고 옷에 사람을 끼워 넣는 것처럼 우리는 이미 물질이 만들어놓은 것에 인간을 액체처럼 변형시켜 계속 자르고 다듬는다. 사람들은 스스로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에 가서 누워 묻는다. 내가 이 침대에 사이즈가 맞느냐고.

문명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은 사실 자본이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더 많다. 자본의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다리가 잘려나간다. 발목이 없는 사람들이 침대에서 기어 나와 절룩거리며 기뻐한다. 나는 이제 침대에 맞는 사이즈가 되었다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본의 영향력 없이 순수하게 대할 수 있을까. 이미 모두 침대에 맞춰 스스로를 다듬은 마당에 혼자 삐쭉하니 튀어나온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테세우스가 되어 프로쿠르스테스를 죽이고 싶어 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강아름처럼, 그의 영화를 후원한 사람들처럼, 그의 영화를 보러 간 사람들처럼 죽이지 말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설득하여 다리를 다르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설득하는 테세우스들의 실험이 2016년 5월 26일 인디포럼에서 다시 열린다.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 프로듀싱을 맡은 창작집단3355에 연락하면 공동체 상영도 추진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진지하고 묵직한 주제를  발랄하고 즐겁게 풀어낸 다큐다. 105분의 상영시간 동안 너무 웃다가 눈물을 흘릴 수 있으니 마스카라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 영화 한 장면

제작_박강아름
각본 Screen Writer_박강아름, 정성만
프로듀서 Producer_김문경
촬영 Cinematographer_박강아름
편집 Editing_박강아름

박강아름 필모그라피
1999 <섹스>
2000 <물어보는 거야, 너한테>
2004 <유실>
2004 <파리의 노래>
2006 <똥파리의 꿈>
2007 <내 머리는 곱슬머리>

공식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hermas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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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뉴스에 게재된 영화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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