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잇을 붙이다

이태원에 가기로 했다. 서초에서 잠수교를 타고 넘어가는데 잠수교 북단 끝에 세 명의 남자들이 서 있는 걸 발견하고 속도를 줄였다. 낙엽을 치우는지 두명은 안전조끼를 입은 것 같고 안전관리자도 없고 경광봉이라도 흔들어야 하는데 차도에 나와서 일을 하고 있으니 기가 막혔다.

바로 다산콜센터에 전화를 해서 위치와 상황을 알려줬다. 결과를 듣겠냐고 물어서 전화번호와 이름을 남겼다.

만두국을 사먹던 이태원시장 골목 유료주차장에 차를 대고 살인사건이 있었던 옛날 버거킹 자리에 서서 신호를 기다렸다.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수북하게 쌓인 추모의 표식들은 비닐로 씌워놓았다. 비 바람이 예보되어 그런 모양이다. 추모공간을 지키는 경찰들을 보고 있으니 속이 답답해졌다.

오래 전에 꽃집이 있던 자리를 둘러보았는데 지저분한 유리만 남은 공실이었다.

소방서 방향에도 꽃집이 없어서 일단 골목으로 올라갔다. 오래 전에도, 최근 몇 년 전에도 나는 이 골목으로 다니지 않았고 녹사평 방향의 두 번째 골목으로 주로 다녔다.

불법증축이 있었다는 해밀턴호텔의 벽은 추모의 포스트잇과 메모, 꽃과 인형 같은 추모 물품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 벽은 추모의 벽으로 남기면 좋겠다.

내가 가방에 들은 포스트잇을 꺼내 글자를 적는 사이 남편이 꽃을 사오겠다고 골목을 내려갔다. 카메라를 든 사내가 MBC에서 나왔다며 포스트잇을 붙이는 걸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꽃을 사러 갔으니 조금 기다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남편을 기다리는 사이 용산구청에서 전화가 왔다. 자원순환과 직원이라고 했다. 내가 다산콜센터에 전달한 내용을 확인하고 지점을 다시 물었다. 짜증이 치솟았지만 구청직원도 어렵겠다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눌렀다. 나는 구청직원에게 안전조끼도 모두 착용하지 않았던 것 같고 차도에서 일을 하는데 안전조치가 안 되어 있었으니 확인부탁한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기자가 인터뷰도 가능하냐고 물어서 그러자고 했다.

– 오래 전에 여기 살고 일도 했었는데, 그때도, 최근에도 저는 많이 이용하지 않던 골목이거든요. 이 뒷길의 구조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의지대로 이 골목으로 오지 않았다는 걸 알 겁니다.

– 길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안전하고 편안해야 하는데, 이 좁은 길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다가 희생되었다는 건, 지금 우리나라에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 MBC에서는 1029참사로 부르기로 했는데, 일부에서는 용산구나 책임의 소재를 묻기 위해 이태원참사라고 불러야 한다는 얘기도 있거든요. 재난은 우선 그 이름을 어떻게 붙일 것인가 사회적합의를 통해 호명을 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상규명, 책임자처벌이 있어야 추도와 회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나는 회복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 않듯이, 트라우마는 그저 안고 가는 역사의 일부가 될 뿐이다. 우리들의 세계와 시간은 수많은 재난으로 이미 뒤틀렸다. 구비구비 꺾어진 구간마다 억울한 죽음들이 깔려 있다. 기억하는 자들은 이 희생을 안고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희생자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기 삶의 끄트머리 단 한 톨의 공간에도 억울한 영혼이 내려앉지 못하게 혐오의 발언을 내 뱉는 자들의 비겁합과 비루한 마음과 두려움을 이해한다.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 나는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기억과 약속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강남역 6번 출구에 붙어있던 포스트잇을 기억한다. 구의역에서 혼자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죽은 청년의 가방에서 나온 사발면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그 스크린도어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얼마 전 신당역에서 있었던 스토킹 살인사건에도 포스트잇이 붙었다.

왜 우리의 추모는 벽을 가득 메운 포스트잇으로 끝나는가.

해가 뜨고 지는 사이 하루 하루 사람들이 까닭없이 죽어간다. 우리는 포스트 잇을 붙이며 이름없는 죽음을 밀어낸다.

– 용산구청에서는 자원순환과가 아닌 도시관리국 공원녹지과에서 신청건의를 처리한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 이태원추모공간 자원봉사자들이 홈페이지를 만들어 추모 메시지를 정리하는 것 같습니다. https://www.itaewonmemorial.com/

힌남노가 남긴 것

포항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생존자가 주차장 입구까지 나와 제 두 다리로 선 것을 본다. 

1996년, 삼풍백화점 지하에서 들것에 실려나왔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물에 떠다니다 지붕 위로 올라간 소떼도 떠오른다.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 주, 주말을 지나 월요일 낮 하루종일 태풍뉴스가 미디어를 뒤덮었다. 

SNS에도 역대급 태풍이라니 걱정하는 글들이 그득했다. 지난 번 수도권을 강타한 폭우로 강남역이 침수된 이미지가 강렬했던 탓으로 봤다. 대책없이 당했던 것이 불과 한 달전이니, 이번에는 대체로 대처하자는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제주부터 시작되는 태풍의 경로가 시시각각으로 보도되었다. 각 언론사는 오래 전의 뉴스클립을 꺼내 재편집해서 태풍으로 인한 피해를 전시하기 시작했다. 매미와 치바때의 장면과 일본을 지난 힌남노로 인한 피해가 연달아 재생되었다. 

포항의 지하주차장 상황을 보도한 기사를 몇 건 봤다. ‘지하주차장이 잠기고 있으니 차를 빼라’고 방송했다는 관리사무소의 소장에게 기자들이 인터뷰를 시도한 모양이다. 관리소장은 미안하다는 말과 더 말하기가 어렵다고 대답한 것 같다. 관리사무소에서는 처음엔 주차장이 괜찮은 것으로 봤다가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차를 빼라는 방송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물이 얼마나 빨리 불어나는지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나도 겪어보지 않은 일이다. 

관리사무소는 보통 9시쯤 출근한다. 전날 태풍이 올라온다 하니 누군가 철야근무를 했을 수도 있다. 그 외의 시간엔 관리직으로 바뀐 아파트경비원들 등 야간조가 남는다. 물이 들어오기 전에는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뺐을 경우 그 많은 차가 밖으로 나와 빚어질 혼란이 걱정되었을 거고,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는 차가 침수되었을 경우에 책임을 생각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주민들의 재산에 손실을 줄이는 것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일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일때, 사람은 10분 후를 예측하지 못한다. 게다가 아파트 옆의 개천은 수년간 물이 흐르지 않은 건천이었다. 물이 그렇게까지 들어찰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말을 그들에게 물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들의 방송으로 누군가 사망하고 누군가 다쳤다는 것만으로도 그 부담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재난을 맞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예측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포항시는, 재해대책전문가들은 천이 범람하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걸까. 태풍에 대한 이야기는 3일 전부터 있었다. 그 주변을 막아낼 방법이 없다면, 지하에 들어가지 말라는 메세지를 전달할 수 없었을까. 월요일이 되는 새벽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시간이니, 그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걸까. 이미 몇 년동안 메말라 있던 건천에 물이 차고 넘쳐 아파트까지 밀려들어올 거라는 예상을 관리사무소에서 할 수 있었을까. 

마른 땅에 물이 흐르고 그 물이 넘쳐 10분만에 마을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전문가나 예측능력이 뛰어난 현명한 사람이나 가능하겠다. 지하주차장에서 차가 빠져나오는 장면을 찍은 블랙박스가 언론에 공개되었다. 한 대의 SUV차량이 갈 길을 헤매 머뭇대는 사이에 2분이 지났다는 기자의 해설이 붙었다.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은 재난 그 자체를 책망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망실에 대한 격분을 쏟아내기 위한 대상을 찾기 시작한다. 언론은 이때 사람들에게 먹잇감을 물어다 주고 조회수를 올려 돈벌이를 할 수 있다. 해운대 마린시티의 파도를 찍던 유튜버나,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한 사람이 바로 그 사냥감이 되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배운 사람이라면, 언론이라면, 재난을 당한 사람들의 황망함이 건강한 비판으로 승화되고 정당한 분노로 이어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 게이트키퍼라는 이름은 이론과 교육에만 남았다. 

티비에서 재난을 생중계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여름이면 동생과 나는 하루종일 티비를 켜놓고 재난방송을 봤다. 나의 모친은 그 특유의 성격과 정서적 문제 때문에 ‘다 떠내려가라’는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 재난방송을 보고 있으면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우리를 위로했고, 곧 눈앞에 닥칠 해결해야 할 일들도 잠시 잊었다. 나는 8월 말에 태어났고, 내 동생은 9월 말에 태어났다. 내 생일과 내 동생의 생일 사이에 수많은 태풍이 오고 갔다. 멍하니 재난방송을 보고 있던 그때의 마음을 기억한다. 세상 모든 것 앞에 무력해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을 때, 물이라도 쓸려와 강바닥을 뒤집어주길, 못된 것들을 밀어내길, 세상을 바꿔주길 바랐던 어리석은 마음. 그 마음들을 모여 어디로 흘러갈지는 각자의 마음에 도사리는 삶의 무게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재난을 생중계하는 며칠간, 새로운 포르노그라피를 본 기분이다. 불안한 사람들의 댓글을 먹고 무서운 파도를 보여주고, ‘잘 대처해야 한다’라는 뻔한 말만 지껄이면서 공포를 팔아 덩치를 키우는 시대. 기후위기만큼이나 무서운 세상이다. 

8월에는 구례에 갑니다

2020년 섬진강 수해를 기억하시나요?

소들이 떼를 지어 산을 오르고 물에 빠진 소들을 구해내던 장면이 미디어를 통해 여기저기 퍼졌습니다. 그때 그 수해를 입은 주민들은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구례군 구례읍 전통시장 부근은 특히 피해가 컸습니다. 상류 댐들이 방류량을 늘리면서 섬진강이 넘쳤습니다. 이 수해는 공식적으로 “섬진강 수해”로 부릅니다.

이번 강좌는 재난지역을 찾아가는 NGO #에이팟코리아 의 추진으로 이뤄졌습니다. 아시아퍼시픽얼라이언스(이하 에이팟_A-PAD)는, 아시아 · 태평양 내 국가들이 협력하여 재난 현장 긴급 구호 · 복구 · 방재 · 재난 이후 지역재생 등을 주로 다루는 아시아 대표적 국제기구입니다. 에이팟코리아에서 활동하는 #현관앞비상배낭 팀과 함께 합니다.

그해 여름을 응시하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속도 없이 쓰담쓰담. 이야기 나누러 가겠습니다.

1994년 10월 21일

집안 사정으로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닌 탓에 한 살 어린 친구들과 동급생이었다. 학교를 4년 다니다 보니 유명해져서, 나름대로 편하게 살았다. 술담배를 하거나 일탈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교사를 어려워하지 않았고, 한 살 많은 나에게 선생님들도 나름대로의 대접을 해 준 셈이다. 고 3 때, 아침 7시 50분까지 등교를 해야 했는데, 학교는 월계동이고 우리집은 경기도 양주라서 새벽차를 타고 나가야 했다. 가을이 되어 급기야 담임에게 도저히 시간을 못 맞추겠으니 아침 자율학습을 빼달라고 통보했다. 나는 그런 애였다. 사정하는 게 아니고, 못 나오겠으니 처리는 당신이 맘대로 하시라고 선언하고 뒤돌아 나가버리는 애였다.

2학기에 들어서는 졸려서 살 수가 없었다. 야간 자율학습은 밤 11시에 끝나는데 새아버지가 매번 나를 데리러 운동장에 차를 대놓고 기다렸다. 11시에 월계동에서 출발하여 잽싸게 밟으면 집에 12시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씻고 야식먹고 공부를 조금 더 하다 보면 2시가 넘어 잠들었고 아침에는 5시에 일어나야 학교를 갈 수 있으니, 나는 6시에 일어나 아침자율학습을 째기로 한거다.

그 날은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잘 못 일어나는 사람들이 우리집 여자들인지라, 그 날은 모두 다 늦잠을 잤다. 유달리 일찍 일어나는 새아버지도 그 날은 늦잠을 잤다. 새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나도 동생도 같이 차에 탔다. 동생의 학교가 더 가까워 동생을 먼저 내려주고 차가 창동으로 들어설 때쯤, 아버지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한강다리가 무너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다리가 무너졌다고?”

조수석에 앉은 엄마가 라디오 소리를 크게 올렸다. 강북에 살아 강건너 가는 일이 드문 나에게 한강다리는 혜은이의 제 3한강교가 끝이었다. 그렇게 많은 다리가 있는줄도, 다리마다 이름이 다른 줄도 잘 모르고 지냈다.
8시가 넘어 학교에 도착하니 아침자습이 끝난 시간이었다. 나는 지각한 것은 생각도 안하고 교실로 마구 뛰어 올라가 한강 다리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호들갑 떨며 아이들에게 전했다. 내가 시끄럽게 라디오 뉴스를 전하고 있는데 덩치 큰 국어선생이 들어와 내 뒤통수를 갈겼다.

“야. 이하나. 지각했으면 가만히 있어야지 뭐 이렇게 시끄러워 아침부터.”
“아 그게 아니고 지금 한강다리가 무너졌다니까요오!!” 나에게 그 뉴스는, 희생자를 생각하지 않는, 일종의 쑈같았다. 걸프전의 생중계를 고스란히 본 나에게 재난과 사건사고소식에 사람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건 마치 게임 시뮬레이션 화면 같은 것이었으니까. 걸프전을 CNN으로 보면서 느꼈던 것. 폭탄이 떨어질 때 참 아름다웠으니까. 광활한 사막에 떨어지는 불꽃놀이, 나에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은 언제나 죽고 어디서나 죽게 마련이니.
“이 새끼가, 지각한 거 무마할라고 수 쓰고 있어.” 국어선생은 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아니었으나 어떻게든 나를 자리에 앉히려고 다그쳤다.
“아 진짜라니까요.”

고 3쯤 되면, 선생과 인간 대 인간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지경이 되지 않나, 나는 앞자리에 앉은 아이에게 빨리 티비를 틀어보라고 했다. 교실에는 뒤통수가 뚱뚱한 브라운관 티비가 있었다. 티비 아래 서 있던 아이가 손을 뻗어 MBC를 틀었다. 비오는 한강에, 다리 상판이 아래로 뚝, 썰어낸 듯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쉬는 시간동안 티비를 틀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아무 일 없는 듯 자율학습을 했다. 누군가는, “저 중에 고3이 있었다면, 좋겠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죽음은 교실에 언제나 가득했다. 우리는 햇빛 한 번 못 보고 매일 매일 도시락을 싸러 집에 다녀오곤 했으니까. 타인의 죽음과 또래가 학교 가던 길에 무참하게 아무 이유없이 생명을 잃은 일에 대해서 우리는 분개할 시간도, 울 정신도 없었다. 우리에겐 수능이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고, 이미 중간고사를 끝내고 내신성적을 정리할 때였을 뿐이다. 그 다음 해, 우리중 많은 아이들이 대학에 가고, 내가 명동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안타깝다거나, 슬프다거나, 억울하다거나, 누군가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도, 하나의 쑈처럼 보였다. 나는 일주일 내내 그 뉴스쇼를 지켜보았고 전혀 슬프지 않았다. 잠을 설치긴 했고, 뉴스를 끄지 못했으나, 같이 울거나 뭐가 문제라거나,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렇게 보낸 20년의 세월을 지나, 20년만에, 세월호가, 그 세월을 관통해 다시 침몰했다.

도대체 배 이름은 왜 세월호라 지은 것인가.

묻어두었던 긴 세월동안의 공감하지 못했던 타인의 죽음과 고통이, 굽이쳐 휘돌아 거대한 해일이 되어 몰려오는 오늘이다. 성수대교 붕괴 후 20년, 2014년 10월 21일이 방금 지나갔다.

2014. 10.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