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어느 밥집

결혼하고 작은 아이를 낳은 게 2006년이다. 아이는 2006년 봄에 태어났다. 2005년 여름에 대만출장을 남편과 같이 다녀왔고 그 이후로 한 번도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여권이 만료된 것도 모르고 있었고 올 해 초에 해외를 나가야 할 일이 있어 여권을 새로 발급 받았는데 그 일도 무산되었다. 가까운 중국은 어떻게든 맘을 먹으면 다녀올 수 있는데 그 마음 먹는 일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외에 있는 아는 동생이 홍콩행 동반을 강권했다. 꼭 같이 다녀오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고 약간은 망설이다가 과감하게 추진해 버리는 그 친구를 보고 이렇게 떠밀리듯 가지 않으면 또 내년이 되겠다 싶어서 비싼 비행기표를 급하게 끊어 주말을 이용해 홍콩을 다녀왔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 내가 바란 것은 그냥 거리를 걷는 것이었다. 간판이 즐비할 그 거리를 그냥 하염없이 걷는 것. 내가 언제나 그리워 하는 상하이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을테니, 나는 그냥 걷다가 오면 될 일이었다. 꼭 가보고 싶은 곳도 꼭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은 길에서 마주칠 수 있는 흔한 국수나 볶음밥 정도였고 어떤 사람들은 무척이나 싫어할, 중국 특유의 냄새였으니까.

홍콩은 스모그가 가득했다. 올 해 들어 중국대륙에 인접한 그 어느 곳도 무사하지 못한 모양이다. 첫 날부터 뿌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한 두방울 떨어졌다. 둘째 날, 저녁이 되자 제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들어 정해진 일정이 있어 숙소와 멀리 떨어진 곳을 방문하고 호텔로 돌아가 잠깐 짐을 추린 다음 저녁으로 무얼 먹을 것인가 둘이 궁리했다. 나는 그제서야 hotpot 이라고 하는 중국식 샤브샤브 훠궈를 생각했고 검색을 했다. 마음은 들뜨고 둘 다 머리는 비어 있는 상태라 검색도 잘 하지 못했다. 택시를 타고 음식점으로 이동했는데 훠궈 전문점이 아니었다. 우리는 다른 훠궈집을 찾아 다시 택시를 탔다. 소호근처였는데 홍콩은 운전석이 반대방향이라 내가 계속 방향을 놓쳤다. 주소를 찾았는데 가게가 없었다. 맞은 편에 PUB이 있었고 문앞에 서 있는 종업원에게 중국어로 물어보니 말을 못 알아듣는다. 그제서야 어둑한 조명에서 그녀가 영어를 사용하는 다른 나라에서 왔을 거란 짐작을 했다. 이 근처에 훠궈집이 없었나요? 바로 이 앞 집인데 문 닫고 다른 주인이 들어왔어요. 그럼 이 근처에 추천할 만한 다른 훠궈집을 아는데가 있나요? 그녀는 모른다고 했다. 내리막길을 가르키며 저리로 내려가면 중국음식집이 있을 지도 모른다 했다.

우리는 일단 비가 더 오기 전에 빨리 자리를 이동해야 했고 어디든 가서 중국음식을 먹겠다는 일념에 가득차 있었다. 낮에 유명하다는 국수집에서 국수를 먹고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라는 세계최장 에스컬레이터로 가는 길에 지나갔던 시장이 다시 나왔다. 시장길을 통해 소호가 됐든 란콰이퐁을 가든 아무튼 열심히 걷고 있었다. 숙소 근처 K-POP이 나오는 잡화점에서 비싸다고 둘이 투덜대며 46원(한화 6200원 가량) 이나 주고 산 우산은 이미 반쪽이 짜부라져 있었다.

그나마 백반집 같은 간단한 음식들을 파는 식당도 문을 닫아버렸다. 시간은 9시가 넘었다. 지나가며 봤던 한 식당에 주방장 옷을 입은 아저씨가 문 밖에 서 있었다. 나는 우산 속에서 손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며 먹는 시늉을 하고 아저씨를 쳐다봤다. 아저씨는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우리는 급한 김에 그냥 마구잡이로 들어갔다. 아무도 주저하지 않았다.

메뉴를 보니 싸게 점심 저녁 메뉴를 파는 집이고 음식맛이 훌륭할 것 같지 않았다. 세트메뉴를 주로 파는 집이었고 면 전문도 밥 전문도 요리 전문도 아니었다. 볶음밥을 먹어보겠냐고 동행에게 물었다. 나의 동행은, 이런 식당에 들어올 일도, 들어와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대부분의 주문을 나에게 일임했으나 나는 항상 괜찮겠냐 되물어봤다. 빈 자리에 앉으려고 가방을 내려놓자 아저씨가 두루마리 휴지를 가져다 주며 등이 다 젖었다고 조금이라도 닦으라고 했다. 친절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두운 밤에 영업시간이 끝났는데 들어오라고 한 것도 뭔가 그냥 밥을 사먹는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볶음밥을 하나 시키고 요리를 하나 주문하고 싶다 하니 아저씨가 돼지족발을 추천했다. 그렇게 달라고 하고 국물이 필요한데 탕은 마땅한 게 보이지 않아서 국수를 한 그릇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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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푸짐한 볶음밥을 한 그릇 내주었다. 우리는 정신없이 볶음밥을 먹었다. 나의 동행도 맛있다며 잘 먹었다. 곧 홍콩 특유의 돼지족발이 나왔다. 중국의 돼지족발은 상당히 맛있는 편인데 역시나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가득해서 한국 사람 중엔 잘 못먹는 사람도 많다. 동행은 자기에게 약간 하드코어한 음식이라고 웃으며 조금씩 살점을 베어 먹었다. 홍콩 사람들이 잘 먹는 양배추 볶음에 굴소스를 얹은 야채 요리도 한 접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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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는 중에 식당 청소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 왜소한 남자가 들어와서 고무장갑을 끼고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앉은 곳을 빼고 다른 테이블엔 이미 의자가 올려져 있었다. 한 사람이 또 들어와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갔다. 우리가 밥을 다 먹어가자 아저씨는 광동어가 가득 배인 부통화 (대륙의 표준어 / 普通話)로 나에게 대만사람이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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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이라고 대답했더니 놀라워했다.

한국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부통화를 잘 하느냐고 되물었다. 대륙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얘기했다. 아저씨의 식당엔, 아마 한국인이 들어오거나 외국인이 들어오는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아저씨는 중국 표준어를 하는 한국사람을 처음 본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저씨는 의자를 옆에 놓고 앉아 나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광동어가 가득한 억양과 분명히 않은 발음을 알아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아들을 만은 했다. 홍콩 어때요? 홍콩 좋네요. 여기 사람들은 뭔가 좀 자유로와 보이고, 개방적인 거 같아요. 대륙에 비해서. 그렇지. 홍콩은 좀 그런 게 있죠. 하지만 여기 생활은 아주 고됩니다. 홍콩은 경찰이 아주 좋아요. 친절하구요. 우리는 경찰을 신뢰하죠. 아. 저는 어릴 때부터 홍콩영화를 많이 봤어요. 영화에 홍콩 경찰은 꼭 나오잖아요. 그렇군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줄도 몰랐어요. 직업상으로도 좋나요? 좋은 직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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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가 내내 담배를 피우며 왔다 갔다 했기에 나도 담배를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은 터였다. 아저씨가 내 담배를 만지며 이건 한국담배냐고 물었다. 아니 이 담배는 영국담배인데 한국에서 가져온 거예요. 라고 얘기하자 앞에 앉은 나의 동행이 아저씨 담배 하나 드리라며 웃었다. 나는 두 가치를 꺼내 드렸다. 아저씨는 좋다며 고맙다 하고 품에 넣었다. 잠시 후에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아주 맑아서 좋다며 홍콩은 담배가 너무 비싼데 한국은 얼마나 하냐고 물었다. 홍콩은 수입담배가 한 갑에 50원(한화 6700원꼴) 정도였다. 아저씨는 나에게 담배를 두 가치 줬으니 밥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그런 게 어딨냐고 웃었다.

같이 온 이 친구도 한국 사람인가요? 한국에서 왔나요? 키가 무척 크네요. 라고 하시길래 이 친구는 한국사람인데 영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친구의 핸드백을 보고 와 이거 비싼 가방인데, 직업이 좋은 모양이라고 하시길래 영국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친구라고 대답해드렸다. 아저씨는 대단하다며 소탈하게 웃었다. 여기서 밥을 먹고 어디로 갈건가요? 란콰이퐁에 가 볼 생각이예요. 아 거기 아주 번화하죠. 놀기 좋아요. 사람들이 많죠. 외국인도 많죠? 아저씨도 끄덕끄덕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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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자기가 만든 돼지족발에 기름기는 모두 빼고 영양가만 남은 것이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고는 주방에서 작은 양푼에 우리가 먹은 볶음밥을 해서 나오더니 우리 그릇에 몇 수저를 덜어주고 청소하는 아저씨에게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볶음밥을 싹싹 먹고 돈을 내려고 하자 이 아저씨가 정말 돈을 받지 않을 기세였다. 그러지 마시라고 재촉하자 120원이라고 밥값을 알려주었다. 적은 돈도 아닌데 받지 않으려 하다니 그 마음이 고마워서 내 동행은 명함에 한자이름까지 적어서 아저씨에게 드렸다. 내가 기억하고 싶어서 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괜찮냐 묻자 웃으며 V자를 그려주셨다. 우리는 돈을 내고 명함을 드리고 가게를 나오는데 앞쪽에 물걸레질을 해서 길이 미끄럽다며 우리가 나가는 길까지 따라나와 조심할 지점을 가르쳐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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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조금씩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짜부러진 우산을 둘이 쓰고 팔짱을 끼고 어두운 시장통을 빠져 나왔다. 내 옆에 선 동행은 “좋다.” 라고 말했다.

“좋지?”

“응. 좋네. 좋은 사람이네.”

우리는 아주 맛있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참 좋은 음식을 먹었고 란콰이퐁의 소란스러움은 우리를 감흥시키지 못했다. 란콰이퐁을 한 바퀴 돌아 그냥 숙소로 돌아왔다. 한 사람의 친절이 오랫동안 홍콩이라는 이름으로 남을 것을 알았기에, 비오는 어두운 길거리도 무척 정겹기만 했다.

 2013년 12월 14일의 일을 17일에 적음

일기쓰기

나의 담임선생님은 환갑쯤 된 남자 선생님이셨다. 이름은 곽동희. 서글서글한 눈매와 진한 눈썹, 그리고 대머리, 인상이 참 좋았다. 1학년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앞에 놓고 율동도 하고 손유희도 해야되는데 학부형들이 와서 구경하면 얼마나 쑥쓰러워 하셨는지 얼굴이 빨개지셨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우리 엄마는 늙은 영감이 1학년 선생을 할려니 죽을 맛이겠다며 혼자 깔깔대고 웃었다.

 

나는 한글읽기를 다 떼고 학교에 들어갔다. 교과서를 받은 건 예비소집일이었는데 날씨가 무척 추웠고, 우리 엄마는 예의 그렇듯이 가죽코트에 가죽장갑을 끼고 나타나 선생님들 옆에 서서 아이들에게 교과서를 나눠주었다. 나는 우리 엄마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엄마는 나에게 자기가 제일 많이 배운 사람이고, 니네 선생들보다 엄마가 더 많이 배운 사람이고, 엄마도 예전엔 고등학교 대학교 선생님을 했기 때문에 한 수 가르쳐 주려고 그랬다고 했다. 그건 우리 집에서 매우 정당화된 일상이었다. 엄마는 세상의 모든 선생들보다 한 수 위라는 것. 한 수 위인 엄마 아래서 자식은 당연히 월등해야 했다. 나는 교과서를 받아 온 날부터 국어책을 읽어 내려갔고 입학식 때쯤엔 통째로 외워버렸다.

파란 하늘 파란 하늘에 우리 태극기로 시작되는 국어책은 그 때 “바른 생활”이라고 적혀 있었다. 숫자가 마구 적힌 것은 “슬기로운 생활”이고 음표와 그림이 있는 것은 “즐거운 생활”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 이름들은 꽤 괜찮다.

즐거운 생활은 7살 때부터 간간히 다닌 피아노학원에서 배운 것을 생각하며 악보를 보고 멜로디언으로 불어보기도 하고 노래도 불러봤지만, 슬기로운 생활은 덮어놓고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학교에 들어가 바른생활을 다 외운 나는 동네에 천재가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다. 글자가 몇 개나 됐겠는가. 읽을거리는 다 떨어졌고 새로운 판형의 책이 신기했을 뿐이다.

 

서글서글한 대머리 선생님은 우리에게 매일 네 바닥씩 바른 생활 써오기를 시켰는데 나는 한창 동네 아이들과 들로 산으로 놀러 다니는 재미에 흠뻑 빠진 때라 이 숙제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오자마자 가방에서 바로 공책을 꺼내 네 바닥을 휘리릭 쓰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딱지치기로 온 동네를 휩쓸자 엄마는 사내놈처럼 그게 뭐냐고 동네 창피하다고 야단이었다. 조만간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살게 되실 건데 할머니는 많이 배운 분이라 네가 그러고 다니면 엄마를 욕할 거라고 했다. 나는 딱지치기를 자중하고, 대신 이상한 말을 만들어 씨부리고 다녔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에게 이게 영어라며 거짓말을 해댔다. 그 동네는 가운데 큰 길이 있고 그 길을 가로질러 냇물이 흘렀다. 네 바닥의 쓰기 숙제는 부모들에게 공책이 빨리 닳아 불만이었다. 어떤 부모들은 선생님께 항의도 하지만 이 숙제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담임선생님이 강조하셨다. 그 동네의 부모들은 멀리 고개 넘어 우유공장에 다니거나 우리 집과 큰 길을 사이에 둔 건넛마을의 소가죽 공장에 다녔다. 논은 몇 마지기 안됬고 다들 밭농사나 조금 일구고 살거나 우리 주인집처럼 돼지를 길러 내다팔거나 젖소를 키워 우유공장에 납품을 했다.

 

많이 배운 엄마는 공책이나 책값은 아끼는 것이 아니라 했고, 엄마만큼 많이 배운 할머니는 매일 모로 누워 AFKN을 보다가 동네 노인대학에 가서 기묘한 율동을 배워야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글씨를 쓰고 문장을 만들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 학교에서 독후감 숙제를 내주었다. 나는 집에 있던 스물 네 권짜리 위인전은 이미 독파한 상태라 그 중에 세종대왕을 골라 독후감을 썼다. 200자 원고지 다섯 장의 독후감을 받아든 담임선생님은 감격하여 손을 부르르 떨었다. 이 양반은 나에게 장래 노벨문학상감이 나의 제자가 되었다며 격양된 목소리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마 그 때쯤이었을 거다. 일기쓰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그림을 전공한 엄마의 자식으로서, 집안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림일기를 그렸다. 나는 매일 매일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단 하루도 잊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썼다. 그리고 어느 샌가 나는 일기를 쓰면서 훗날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이 일기가 증거가 될 것이라고 믿으며 열심히 일기를 썼다. 최불암의 “수사반장”을 열심히 봤던 탓이 아닐까 싶다. 일기는 나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해 줄 것이라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그림이 없는 일기를 썼다. 그림이 없는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에겐 자꾸 억울한 일이 생겼다. 울면서 일기를 쓰기도 했고 일부러 눈물을 일기장에 떨구기도 했다. 정확하게 조준해서 목표한 글자에 떨어뜨려 여울지게도 했다.

 

5학년 때까지의 일기장은 서른 번이 넘는 이사도중 아마 스무 번째 이사쯤에서 잃어버렸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2학년 때까지 썼던 일기는 짝사랑에 너무 괴로워 3학년 때 학교 난로에 넣고 불태워 버렸다. 그 다음부터의 일기는, 고스란히 지금 내 방 장롱에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다이어리를 쓰면서 촘촘하게 작은 글씨로 별의 별 이야기를 다 썼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테이블에 전화기가 놓인 창 넓은 커피집에 앉아 눈썹을 그리느라 두 시간이나 걸리는 친구년을 기다리며 일기를 썼다. 나는 그 때 작가처럼 개똥폼을 잡는 것으로 만족했다. 다이어리를 펼치고 5만 원짜리 파이롯트 만년필로 담배를 벅벅 피워가며 커피집에 앉아 맹물 같은 콜롬비아를 마시며 한 두 시간씩 뭔가를 써 제꼈다. 완성된 글은 없었고 그저 주절거림이었다. 생각나는 것들, 눈에 보이는 것들을 계속해서 써댔다. 당시 종각역에 파이롯트 대리점이 있었고 나는 간간히 그 대리점에 들러 역시나 개똥폼을 잡으며 만년필 구경을 했다. 워터맨이나 몽블랑 같은 만년필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내 한 달 월급보다 훨씬 비싼 것들도 많았지만 3만원이나 5만원짜리 만년필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20대 후반이 되면서 때로 드문드문 썼다. 매일 매일 쓰지 않는 날도 많았고, 가계부로 대신한 적도 있다. 억울한 일이 적어져서 알리바이를 만들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일기를 쓰는 대신 술로 뇌를 씻는 일이 더 많아서였다. 외로울 때는 일기의 양이 많아졌다. 하룻저녁에 예닐곱장을 쓰는 일도 많았다. 결혼 후 아이를 가졌을 때 미치도록 닭살스러운 육아일기를 쓰다가 실패했다. 신혼 때 우리는 복층으로 된 월세집에 살았다. 2층은 작업실과 내 서재로 사용했는데 어느 날 낮잠을 퍼질러지게 자고 일어났더니 남편이 2층에서 씩 웃으며 내려왔다.

“내가 너의 일기를 모두 읽었다! ” 라고 호기롭게 말하며 크게 웃었다.

그 때 내가 친정에서 가져온 일기는 스물 서너살부터 쓴 일기장이었는데 무려 7여년의 일기를 모조리 읽었다는 것이다. 거기는 옛날 남자친구의 글씨도 있고 그가 써준 메모도 붙여놨었는데 이 남자의 몰지각한 행태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만큼의 관심이려니 생각하고 인권침해라 여기지 않았다. 때로, 누군가 이 일기를 봐줬으면 하고 쓸 때도 있었다. 일부러 남편 눈에 띄는 곳에 일기장을 놓아두기도 했다. 그와 갈등이 심할 때 내 일기를 봤는지는 모르겠다. 남편이 일기를 봐주기를 바라지 않아도 되는 지금, 나는 삶을 다시 살고 있다.

 

매년 한 권 이상의 일기장은 남았다. 지금은 스프링노트를 쓰기도 하고 큰 맘 먹고 몰스킨을 사기도 하고 단행본 크기만 한 노트에 매일 한 장이상의 일기를 쓰기 위해 노력한다. 시간이 늦었으면, “너무 졸린 관계로 이만” 이라고도 적는다. 나의 기록은 다이어리에, SNS에, 회사 업무일지에 남는다. 나에게 일기는 하루의 기록이 아니라, 일기장을 펼쳤을 때의 생각과 감정뿐이라 때로 어떤 기록도 없다. 누군가 고은시인의 일기장 얘기를 했었다. 고은의 일기가 출판되어 나왔는데 이 양반은 대취를 한 날에도 대취했다고 일기를 쓰더라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졸린 날은 몰라도, 술을 누구랑 누구랑 마셨는데 누가 뭔소리를 했고, 이런 거는 적을 수가 없다. 쓰러져 자야되니까. 라기 보다, 귀찮으니까.

 

일기를 쓰는 일은 그저 하루에 하나씩 돌탑을 쌓는 기분이다. 누군가 와서 한 번에 허물어 버릴 수도 있지만, 그냥 하는거다. 일기를 다시 성실하게 쓰고 나서부터 잠을 잘 잔다. 내 머릿속엔 매일 매일 어떤 요란스러운 새가 날아와 이상하고 기괴한 집을 짓고 가기 때문에, 일기에다가 오늘 이 요란한 새가 지은 집에 대해서 대충이라도 털어놓고 자면, 머리가 무겁지 않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구구절절한 일기에 대한 글을 쓰고도, 나를 증명할 어떤 알리바이가 필요하지 않더라도, 일기를 쓰고 잘 것이다.

 2013. 11. 27.

남도에 다녀오다

거기 가면 따뜻하겠지.

날씨 앱을 꺼내 보며 생각했다. 숫자가 말해주는 온도는 쉽게 와 닿지 않는다. 그 숫자를 기록했던 어떤 날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숫자는 언제나 막연하다.

두 번째 남도로 가는 길. 남도에 얽힌 이야기는 숱하게 많다. 스물 한 살부터 스물 세 살까지 살았던 고시원에는 모두 남도 사람들이었다. 전라도 순천, 벌교, 목포, 장흥, 고흥, 보성 그 동네 사람들이 모두 왁자지껄 했는데 전주 사람은 북도는 껴주지 않는다고 찬밥이었다. 남도에 대한 환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것을 다녀온 지난 가을, 그 풍요로운 땅에 홀딱 반했다.

이다지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 바다와 산이 가깝고 그 사이에 들이 펼쳐졌다는 것은, 불편함을 담보로 하되 이런 풍광은 댓가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먼 곳의 여행을 할 때마다 기가 막힌 경치가 늘 신기했다. 그 풍경들은 그만큼 먼 길을 굽이굽이 돌고 돌아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만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게 자연이 가까이 오겠느냐 묻는 것에 대한 댓가라 생각했다. 운전을 해서 가는 남도는 대여섯시간이 걸렸다. 피로따위, 참을 수 있는 길. 고흥에 간다는데, 운전 따위 못하겠느냐고 실실 웃었다.

상위에 차려진 음식은 언제나 싱싱했다. 냉동창고에 들어가 본 적 없는 풀과 물고기가 그대로 상 위에 음식이 되어 올라오는 곳, 파도가 거세 양식도 어렵다 했다. 험난한 자연환경이 외려 득이 되는 곳. 고흥에 다녀오면 바다와 들을 멀리 하고 사는 것이 이렇게 비루한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햇살이 좋은 오전, 그 집에 갔다. 마당에 있는 작은 나무에 노란 것이 달렸다. 제주도 귤나무를 심으셨다는데 열매가 열렸고, 그냥 따서 먹으면 되는 일이었다. 귤을 집에서 따 먹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동네에 유자가 지천으로 널렸는데 딸 사람이 없어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땅에 떨어지면 고양이나 들쥐의 먹이가 될 것이고, 나무에 달린 감은 까치의 밥이 되겠지. 문득 까치 같은 날짐승도 유자를 먹을까 궁금해졌다. 시큼할텐데.

한 식구가 먹을 만큼만 심은 작은 밭에 무와 배추가 커다랗게 자라고 있었다. 그 옆에 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누구 먹으라고 나란히 놓았을까. 누군가 먹으라고. 와서 달라고 말하지 못할 누군가를 위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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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도 매달린 채 말라비틀어지거나 썩어가고 있었다. 삼시 세끼 밥을 먹고 노인들만 사는 마을에서 이 모든 작물을 거둬들이는 일은 작정해야 할 일이다. 고향집에 간 아들은 아무도 따지 않은 유자나무위에 올라가 유자를 따기 시작했다. 유자나무에는 가시가 있다. 팔순을 넘긴 노인이 일일이 거둬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이 만든 것을 만나보지 못한 유자는 작고 쪼글쪼글했다. 겉껍질은 시꺼멓고 울퉁불퉁했다. 검게 변한 귤도 마찬가지였다. 내다 팔기에 애매한 과일이다.

충청도의 힘이라는 책을 쓴 저자는 자이랑 식품에서 일하는 남덕현이라는 사람이다. 작은 책이라는 잡지에 젓갈 담그는 얘기를 쓴 걸 읽었다. 보기에 좋지 않으면 사람들이 외면한다고. 가라앉는 새우 단백질 때문에 팔리지 않는 젓갈이 속상한 이야기다. 유자를 생각했다. 보기에 좋지 않아 아무도 돈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 집의 작은 마루엔 유자냄새가 가득했다. 70년을 해로한 두 노인은 유자 껍질을 잘게 잘라 마당에 내놓고 말리고 있었다. 한약방에서 약으로 쓰기에 내다 판다 하셨다. 그게 뭐 얼마나 큰돈이 되겠는가. 그냥 버리기에 아까워 햇빛에 맡겼을 터.

냉난방이 완벽하고 햇빛도 걸러 받아들이는 아파트에 사는 나는 버리기에 아까운 모든 것들을 노란 비닐봉투에 담아서 내다 버려야 한다. 햇빛에도, 바람에도 맡길 수 있는 게 없다. 모두 다 입으로 들어가 똥이 되지 않으면, 씨앗 하나도 함부로 버릴 수 없는 도시.

남도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수산시장에서 갓잡은 싱싱한 생선과 해산물을 사온 그날 밤, 우리집은 쓰레기장이 되었다. 스티로폼 박스는 네 개가 넘었고, 그 안의 물건들을 포장한 퍼런 비닐과 녹아가는 얼음을 씽크대에 버리고 생선 뼈다귀, 내 옷에 붙은 들풀의 씨앗 하나 모두 다 떼어내 쓰레기통에 곱게 넣어야 한다. 먹고 남은 게껍질은 가위로 잘게 잘라 노란 쓰레기봉투에 넣어야 더 많이 들어간다. 생선을 나누어 담는다고 나는 지퍼백을 다섯 개나 꺼냈고 냉동실 칸칸마다 각종 비닐로 쌓인 먹을 것들이 가득한 걸 알아챘다. 냉동실은 블랙홀, 이제 하루가 지나, 돌바지락이라 부르는 살조개는 다 먹어버렸으니 남은 꽃게를 차곡차곡 냉동실에 잘 넣거나 쪄먹어 치워야 할 일이 되었다.

 

순천을 지나오면서부터 추웠다. 집에 도착한 다음날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베란다엔 유자냄새가 가득한데 그 집에서처럼 향긋하지 않다. 신바람이 나서 꽃게를 4kg 정도 사왔는데 언제 먹나 싶다. 잎새주를 사왔는데 남편은 웬지 당기지 않는다며 냉장고에 그대로 두었다. 식탁 위엔 며칠 전에 사온 식빵이 굴러다니고 냉장고엔 일주일된 스타벅스 케잌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며 그 사이 식구들은 컵라면과 봉지라면을 사다 찬장에 쟁여놓았다.

남도의 것을 사온다고 내 집이 남도가 되지 않는다. 장소가 바뀐 먹거리들은 짐짝처럼 물러가겠지. 아쉬울 뿐인가. 슬프기까지 하다.

그 동네의 편의점에서도 원두커피를 찾아 캡슐원액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에 거 참 커피 맛대가리 없다고 마실 때, 옆에 앉은 중년의 남자가 전화통화 하던 걸 들었다.

“돗돔을 하나 잡았는디. 먹을 사람이 있는가?” 하던 얘기.

어쩌다 생기는 것에 대한 반가움, 우리 집엔 그런 게 있던가.

어쩌다 생기는 게 뭔가, 생각나면 주문하면 될 일이다.

동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지, 물건은 언제나 움직일 수 있다. 돈만 내면, 무엇이든 주문할 수 있고,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구할 것은 오로지 돈. 그러니 무엇이 환영받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도시에선 아무도, 아무 것도, 그 어떤 음식도 열렬한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다.

뜬금없이 걸려 올라온 돗돔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온다. 나는 남은 꽃게를 냉장고에 넣을 것인가, 냉동실에 넣을 것인가, 얼음팩에 넣어 딤채에 넣을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2013. 11. 24.

오늘의 숙제

1.

 

오래 묵은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멀리 여름나라에 살다 와서 아이 겨울 옷을 물려주려고 같이 옷을 정리하고 개고 싸고 하던 중에 작은 놈 같은 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숙제 프린트 했냐고 묻는다.

무슨 숙제?

그거 숙제 있잖아. 사진 붙여 가는거.

어.. 나는 모르는 일인데.

우리 아들이 알림장도 잘 안 가지고 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숙제를 해 가는지 안 해가는 지 잘 모르지만 가끔 점검은 한다. 숙제 점검을 하더라도 대부분 해 지고 난 다음이고 전화가 걸려온 시간은 오후 2시쯤.

아이는 집에 오자마자 가방과 실내화 주머니를 멀찌감치 팽개쳐두고 티비 리모콘부터 잡는다. 일단 런닝맨이나 정글의 법칙을 한 편 보고 방과후 일과를 시작하는 습관이 들었다. 두 편 세 편 넘어가고 유난히 시끄럽게 들리는 날엔 그만 보라고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래 너도 학교 댕겨왔으면 쉬어야지. 하고 냅두는 편인데 사실은 잔소리 하기 귀찮고 애하고 씨름하기도 귀찮아서 그렇다.

 

2.

 

친구 엄마의 얘기는 오늘 숙제로 가고 싶은 국내 여행지를 골라 사진을 프린트해서 선없는 종합장에 붙이고 그걸 발표하는 게 있다는데 집 프린터가 안되더란다. 몇 명이랑 통화를 한 끝에 다들 안된다 혹은 잉크가 떨어졌다 하길래 우리 집은 프린터가 웬지 잘 돌아갈 거 같아 도움을 구하려고 전화를 했단다. 안그래도 며칠전에 잉크패드도 갈고 프린터 점검을 마친 상태. 그러면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주면 내가 프린트를 해주겠다고 선뜻 대답했다. 세 명분을 부탁했는데 독도, 제주도, 불국사, 석굴암, 우도의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을 프린트만 해 주면 되는 일어었다. 친구 엄마는 집에만 있다 보니 컴맹 된 거 같다며 제대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다시 전화를 했길래 메일함을 열어보니 네이버 백과사전 링크가 걸려 있다. 사진은 따로 저장이 안되서 일일이 캡쳐를 떴는데 PNG로 저장했다가 프린터에 안 잡혀 다시 JPG로 다 돌렸다. 여섯장 정도 된다. 캡쳐 떠서 크기 조절해 프린트를 하고 있는데 내가 이게 남의 숙제를 해 주고 있는 꼴인가 싶었다.

뭔가 아닌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3.

 

내가 아이패드로 즐겨 하는 게임은 SIMS Play 라는 건데, 집 짓고 사람 캐릭터 만들고 마을을 꾸려가는 게임이다. 여러명이 공동으로 사는 집을 짓기도 하고 혼자 사는 집을 만들기도 한다. 공동주택, 즉 Share house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지 책도 한 권 나온 걸 봤다.

뭔가 아닌 거 같은데, 남의 숙제를 해주고 있는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드는 찰라.

그래 집집마다 프린터를 다 한 대씩 두고 있을 필요가 있나. 이런 게 나누는 거 아닐까. 어찌 보면 대행해 주는 거 같아 보이는 일과 누군가 물질적/비물질적 재산을 가지고 공유하는 것은 어디부터 어디까지 다른가 궁금해졌다.

 

오래전엔, 누군가 손으로 하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남의 옷을 지어주기도 했을 것이고 큰 일은 돈을 받았겠지만 친분이 있다면 단추 하나 달아주는 일 정도는 거저 해주기도 했을 것이다. 나에게 프린터가 있고 내가 화면캡쳐를 할 줄 알고 파일명을 변경할 줄 알고 사진크기를 변경할 줄 안다면 (업계에 계시는 분들은 모르겠지만 이런 작업도 꽤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그런 재주와 물적 자산을 공유한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신, 상부상조, 할 필요는 있을 거다.

 

4.

 

아들의 작아진 옷가지는 새로운 주인을 찾아 생명을 연장할 것이다. 보따리가 많아 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 프린트한 사진을 전해줄 엄마들을 만났다.

나까지 아이 엄마 넷. 학교 정문 앞에서 만나 얘기를 하는데 아이들의 숙제 이야기를 한다. 시 외우기, 쓰기 숙제, 수학숙제 얘기를 하다가 종합장은 원래 유선, 무선 두 가지를 챙기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나는 할 말이 없는 거다.

멀뚱하니 있다가

“나는 몰라. 홈페이지 보면 숙제가 뭔지 있지만, 뭐 알림장도 안 가져오는 놈 챙겨주면 뭐해. 지 말로는 쉬는 시간이나 아침에 가서 한다고 하던데. 확인은 안되고.” 라고 했더니 옆에 엄마가 우리 아들은 알아서 하는 스타일이니 뭔 걱정이냐며 좋겠다고 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아 글쎄 그 자식이 알아서 하는지 뻥을 치는지는 모르는 일이지.” 라고 했지만 아마 알아서 잘 할 거란다.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하긴 하냐고 물으니 검사는 다 하시고 스티커 받아오는 거 보면 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노무 스티커판이 알림장에 있는데 이 놈은 알림장을 안 가져온다니까. 그리고 이제 관심없대. ”

“예환이는 알아서 할 거야. 아침에 가서 한다는 생각을 하는 거 자체가 다른 거야.” 란다.

 

태권도 마칠 시간이랑 교묘하게 맞아 떨어져 먼저 가겠다 하고 도장 앞에서 아이들을 봉고차에 태우고 있는 사범에게 우리 아이가 나왔나 물었다. 2층에 있는 도장까지 젊은 사범이 올라갔다 오더니 어머님 오신다고 얘기 없었으면 아마 혼자 갔을거라고 한다. 나도 그럴 줄 알았다. 차 타고 다니면 빙 돌아서 오래 걸린다며 혼자 뛰거나 퀵보드를 타고 다닌 지 1년이 되어간다. 집에 왔더니 아들놈이 도복도 안 갈아입고 게임하고 있다.

 

“야. 니네 뭐 시 외우기 숙제 있다매?” 나는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어. 다 했어. 도토리. 근데 싸인받아야 되는데.”

“오올..다 했어?”

“어. 진작에 다 했지. 근데 싸인 안 받았어.”

“엄마가 알림장에 싸인해주는거?”

“응.”

“얌마 니가 알림장을 가져와야 싸인을 해주든가 말든가.”

“니네 뭐 쓰기 숙제도 있다매.”

이 자식이 말이 없다.

“너 안하고 엄마한테 얘기 안할라 그랬지!!” 했더니 아들놈이 씩 웃는다.

“너 숙제 안하면 선생님한테 안 혼나?”

“안 혼나. 스티커 뺏기면 돼.”

“그럼 스티커 많이 뺏겨라.”

“눼~~”

 

5.

 

잔소리 하기 귀찮고 싸우기도 귀찮다. 방치하는 걸지도 모르겠고 내 머릿속엔 아이 숙제보다 다른 것들이 더 많을 뿐이다. 내가 야단치지 않으면 밖에 나가서 흠씬 깨지고 올 것이고, 선생님한테 야단맞고 친구들한테 놀림받기도 할거다. 경험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다쳐보고 넘어져보고 틀려보고 울어보지 않으면 절대 절실하게 느낄 수 없다고 믿는다. 얼마 전 큰 애가 동생의 친구관계 문제를 얘기하며 동네 형들이 제 동생을 이용해 먹는 거 같지 않냐는 말을 했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만 놀게 해야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나는, 그래서 너는 내가 그만 놀으라 하니까 네 하고 그만 논 적 있드냐? 라고 되물었다.

지가 깨져보고 지가 당해보지 않으면 와닿지 않는 건데 그걸 뭘 지가 좀 당해봐야 아는 거 아냐? 라고 다시 물으니 큰 애는 에휴. 하며 돌아앉았다. 뭔 한숨인지 모르겠다. 복합적인 거겠지. 그렇다고 해서 큰 애가 그 때 나 좀 말려주지, 또는 말리지 말지라는 원망은 아직 한 적 없다.

6.

 

아이는 동네 형들이 놀러와 딱지치기를 하며 놀고 있고 아직 숙제 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배는 부른 모양이고 나는 앉아서 이런 글이나 쓰고 있다. 내가 어떤 원칙을 갖고 있는 것도 없고 그저 아이들은 모두 각자 역량과 기질이 다르다고 믿을 뿐이다. 집에서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밖에서 배우는 게 많고, 집에서 굳이 꾸짖지 않아도 밖에서 욕 먹는 일도 많고, 싸돌아다니고 아이들과 패를 지어 불량하게 껄렁거리며 돌아다니더라도 길바닥에서 쓴 맛 보는 일이 더 많다는 것도 안다.

내가 아는 것은 고등학교 때까지 성적이 좋다고 꼭 좋은 대학에 가는 것도 아니며 좋은 대학을 나온다고 좋은 직장을 잡는 것도 아니며, 좋은 직장을 다닌다고 그게 철밥통인 것도 아니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조건을 갖고 있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라는 거다.

공부는 내내 뒷전이다 이제와서 원서쓰기에 혈안이 된 큰 아이에게도 이번에 못 가도 그만, 대학 안나와도 그만, 니가 필요하면 서른에 가도 되고 마흔에 가도 되는 게 대학, 어딜 가나 너만 잘하면 그만, 그렇지만 네가 분위기에 잘 휩쓸리는 기질이 있다는 건 인정. 이 정도로 얘기하며 타협중이다.

그저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이는 닦아야 남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집에 와서는 무조건 손을 씻어야 감기에 덜 걸린다는 확실한 사실 두 가지다.

부담되는 교육비를 투자하는 대신 내 앞가림이나 잘 해 부양의 부담을 주지 않는 부모로 늙는 게 더 현명하다고 믿는다. 내가 내 앞가림 잘 하고 지내면 아이들도 그럭저럭 보고 배울 거라고도 믿는다. 이건 그저 믿음이다. 제도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도 대안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저 그럭저럭 무리하지 않게 살아가는 것, 그래서 부담되지 않는 부모가 되는 게 목표일 뿐이다.

 

7.

긴 이야기를 적은 것은 매일 매일 부모교육, 부모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가득한 기사와 글이 SNS에 차고 넘쳐서이다. 나 역시 외면하기 어렵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의 구성과, 나눔과 공유, 누군가의 몰빵 또는 독박쓰기, 혹은 대리자와 대표자의 역할, 상부상조와 품앗이, 그런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 굳이 첨언하자면,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온 지 2시간을 넘기기 전에 꼭 집에 도착하려고 한다. 혹은 대리인이라도 있도록 스케줄을 조정한다. 이유는 숙제 때문이 아니고, 배가 고프다며 울면서 전화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오후 2시쯤이 되면 어디에 있던 열심히 달려 집에 도착한다. 아직은 이 아이에게 엄마가 가장 필요할 때는 배가 고플 때이기 때문이다. 

 

 2013. 11. 13. 

 

거래의 시작과 끝

#1.

며칠 전 강의를 듣다가 과천이 지방자치제 자급율 1위의 도시라는 얘기를 들었다. 경마장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권수입에 대한 것이 지방세로 잡혀, 말하자면 사람들이 반대할 만한 장소인 경마장의 부지를 내주고 그만큼의 세수를 걷어가는 거래가 생겨났으며 그로 인해 풍족한 재정을 운영한다는 것이다. 예산낭비에 대한 이야기는 끊임없으나 대부분의 예산은 언제나 부족하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공무원 사회가 얼마나 부족한 예산때문에 쩔쩔매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경주에 방폐장이 생긴 것도 같은 이치일게다. 시설이 들어서지 않으면 세수가 줄어들고 세금이 걷히지 않는 지역은 기반시설 확충보수설립이 모두 어렵다. 사람들은 도시를 떠날 것이고 사람이 없는 도시는 더 황폐화되는 악순환이 예상되는 바, 지자체들은 반대를 무릎쓰고 뭔가를 지어 수입을 늘리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 성장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일까.
성장을 그만두고 함께 사는 신나는 마을을 만들려면 나의 편안함을 기꺼이 내놓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많지 않다. 가진 것을 움켜쥐고 저것이 뵈기 싫으니 반대하거나, 가진 것을 움켜쥐고 저것이 돈이 되니 강행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합리적 사고를 가진 중도들은 입을 다문다. 편을 들지 않으면 비난 받는 것이 나라의 질서인 듯 하다. 화해와 조정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한다.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럴 수 있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성장에 대한 비난도, 성장반대에 대한 비난도 아직 모두 성급한, 미성숙한 사회일 뿐이다.

#2.

EBS 인문학특강 최진석 교수의 첫 강의는 공감되는 게 많았다. 특히, 국가가 성립되기 시작할 때에는 법과 정치가 각광받는 학문이며 그 다음이 우리가 한 때 인기있었던 상경계열이나 사회언론쪽이 자리를 잡은 뒤, 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 나라로 진입하느냐의 문제는 철학과 인류학 등 인문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 꽃 핀다는 것이었다.
기업체가 인문학에 관심을 갖는 것은 생존과 연관이 있으며, 월급받는 사람과 기업을 움직이는 사람의 통찰력은 절대 같을 수 없다는 얘기를 했다.
기업체를 운영하는데에 단 한 사람의 결정권자가 있다면 그 한 사람의 결정에 적게는 백여명 많게는 수만명의 명운이 갈라진다.
기업총수의 가족과 직원뿐 아니라 대리점과 하청업체 거래처등 에지간한 중소기업 하나가 자빠져도 수백명이 타격을 받는다. 목숨을 걸고 걷는 사람들이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에게 생명을 걸고 일한다며 위험수당을 주지 않는다.

#3.

감기에 걸리지 않는 지 1년이 되어간다.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감기몸살이 오지 않는다. 식탁위에 줄지어 서 있던 항생제도 사라졌고 염증도 적당히 무시하고 넘어간다.
대신 전 날 술을 마시지 않아도 하루종일 정신없이 자는 날이 더러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그런 날은 다 저녁때 일어나 입에서 당기고 기운이 날 것 같은 음식을 사오거나 만들어 푸짐하게 먹고 다시 일찍 잔다. 자기 전엔 매일 챙겨먹지 않는 비타민과 프로폴리스와 오메가3 따위의 각종 의학적 논란이 분분한 영양제를 잔뜩 쑤셔넣는다. 방금도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다.
나름대로 버티는 방법이다.
내가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는 일이 몇 가지 생겼기 때문이며, 하루를 미뤄서는 이틀을 더 투자해야 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수백명의 생계를 걱정하는 나와 같이 사는 남자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모기 때문에 잠을 깨었다.
모기는 언제나 나를 물지 않고 남편과 아이들에게만 가니 집을 주로 관리하는 나는 집에 모기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모기에 물리더라도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참으로 둔한 통점 때문이기도 하다.

#4.

숭고한 일은 그닥 많지 않다. 대단해 보이는 일들은 대부분 그렇게 해야만 했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결핍이 원동력이 되어 독한 심성을 만들고, 지독한 외로움이 승부사가 되게 하기도 한다.
어린 아들이 학교에서 주는 상을 단 한 번도 못 받은 것에 불만을 토로한 것을 생각해봤다. 나는 상이 귀하던 그 시절에도 학교의 모든 상을 휩쓸던 아이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내가 받은 상장은 60개가 넘었다.
그건 내가 월등하거나 성실하거나 뛰어난 아이라서보다는 그렇게 되어야만 했고 상을 받아가야 엄마의 시선 한 번, 엄마의 칭찬 한 번, 엄마의 웃음 한 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겐 아주 간절한 일이었다. 나는 상을 가져가고 성적표를 가져가며 엄마와 거래를 했다. 내가 이만큼 해왔으니 이제 나를 좀 사랑한다는 표현을 해주는 건 어떤가 하고 말이다. 거래는 내가 먼저 제안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거래가 그렇듯이 거래는 깨지기 마련이다.
생일떡을 해주고 싶었다며 절편 한 박스를 해오고 그 투자비용의 몇배 되는 등산용품을 사가는 엄마와의 거래는 완벽하게 종료된 듯 보이나, 언제 다시 재개되지 않으리라는 법 없다.

#5.

세상의 대부분의 일은 시간과 돈의 문제라고 생각한 적 있다. 인간의 모든 분쟁은 돈과 치정(영역과 자존심)에서 비롯된다 생각한 적 있다.
지금은 그 생각들을 관철할 의지가 없다. 세상은 알 지 못하는 것들로 가득차 있고 나는 매일 매일 내가 얼마나 모르는가 절감하며 지낸다.
오늘도 나는 맛있는 식탁과 시간을 맞바꿨으며 아이의 웃음과 남편의 만족을 기대했고 업무를 잠시 잊는 고결한 노동이라 여겼다. 늘 대부분의 것을 맞바꾸며 산다.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내 것을 내어놓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지껄인 대신 밤에 아이의 손톱을 깍아주는 일이 너무 너무 힘들어진 것처럼.

2013. 10. 3.

어느 하루의 일기

#1.

힘들다. 힘들어.
죽겠다.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야. 너 그런 거 알아?
여기가 그냥 낭떠러지라고. 발 한 번 헛디디면 죽는 거란 말야.
#2.
언제 힘들지 않은 적 있었나 잘 생각해보아.
그런 일은 없었지. 그저 다른 것으로 덮으면서 지내왔을 뿐.
힘겨운 일들은 한꺼번에 몰려오기도 하고 드문드문 몰려오기도 했을 뿐.
그 때 그 때 그 일들을 덮을 수 있는 뭔가를 찾아내서 늘 덮으며 걸어왔지.
때로는 폭발을 했고 때로는 영원히 잊혀지는 듯 보였어.
뱃속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기억들은 안에서 썩어문드러지기도 하고 어떤 건 잘 익어서 튀어나오기도 했어.
꼭 나쁜 일들만 벌어지진 않았지만, 잘 감추고 있던 걸 거꾸로 토해내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야.
#3.
언제나 “힘”을 이용했군요.
그렇다.
물리적인 힘, 근력뿐 아니라, 언어가 통하는 세상에서는 언어를, 시선이 필요한 세상에서는 시선을, 권력이 필요한 곳에서는 권력을, 언제나 장악하고 지배하고 통제하기 원했다.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땅따먹기였으며, 물건이 제자리에 없으면 화가 났다. 내 통제를 벗어난 것들에 대해 참을 수 없었다. 물건을 배열하고 언제든지 내가 기억하는 장소에서 다시 꺼낼 수 있게 두는 것은, 나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이 일련의 통제과정이라고 봤을 때, 내 뜻대로 하겠다는 것인데, 과연 뜻대로 되는 게 있었나요?
절대, 하나도 없었다.
언제나 세상은 어긋나고 이지러졌다. 계획을 세우라 하면 웃기는 소리라고 비웃었다. 인생의 계획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 비아냥거렸다. 세상일은 절대 맘먹은 대로 되지 않으니 계획은 세우지 않는 게 현명하다 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은 박탈감을 가져왔고 최소한의 범위에서라도 통제를 해야 했다.
그것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끝없이 도전하고, 한계를 시험하고, “남다른” 자가 되어야 했어요. 눈에 띄어야 했고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라고 확신했죠.
세상이 우스운 것은 어쩌면, 그 어떤 도전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완벽하게 습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역으로 스스로를 속이며 그 무엇이 되더라도 바닥의 돌맹이라도 주워 던져봐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다가 가을이 되었다.
비슷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화가 나는 일은 덜하겠지.
문득 문득 영혼이 내 어깨를 친다. 이봐. 알고 있지? 라고.
2013. 10. 2.

설국열차

“허나, 민중은 대다수이니 그 사람들이 모두 다 일선에서 일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결국 대표자를 뽑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 대표자는 새로운 강자 집단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복수심에 가득 차서 훨씬 더 잔혹하게. 언젠가 자신의 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민중의 무서운 잠재 세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조직적인 말살까지 곁들여서… 종이 채를 잡으면 형문(刑門)부터 한다지 않아요? 종이 종한테 상전 노릇하는 것은 더 무섭지요. 형님의 혁명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약한 자들이 형성한 권력, 이들은 또 다른 계급을 형성할 게 아닙니까? 이미 그들은 어제의 약한 자가 아니라, 이제는 권력을 가진 집단으로 강자가 되었으니, 그들에게 탄압당하는 계급이 반드시 상대적으로 생겨날 것이고.

말하자면, 이름만 다를 뿐이지 그게 그것 아닙니까. 형님의 내심에는 이름만 바꾼 독재자적인 교묘한 야심이 숨어 있단 말씀입니다.“

(중략)

“그래서?”

“과연, 진정한 평등 사회가 이 땅 위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영원한 이상에 불과합니다. 하찮은 미물 곤충도 강한 놈은 약간 놈을 잡아먹습니다. 물론 사력을 다하여 강적과 싸워 내는 놈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것은 한순간에 불과한 것, 한 번은 이기겠지만 돌아서면 다른 놈한테 결국 잡혀먹힙니다. 하다못해 잡초, 들풀 한 포기를 보더라도 그렇지요. 번식력이 강하고 뿌리가 억센 놈은 생명력이 약한 풀뿌리를 죽게 합니다. 약한 놈이 살 수 있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연이고 인간 사회고, 약한 놈은 학대받아야 합니다. 학대받고 일찍이 죽어야 한다고요… 곤충, 미물, 잡초의 생리마저도 이러한데, 하물며 인간에 이르러 무슨 말을 더 합니까?”

“그렇지 않다.”

강태가 단호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어서 일어서자고 하던 때와는 달리 그는 차갑게 말꼬리를 내린다. 그의 말꼬리에 묻은 찬 기운이 시리다.

“너는 혁명의 아름다움을 아느냐?”

강태는 바늘 같은 눈빛으로 묻는다.

반대로 강모의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퍼져 오른다.

그는 지금 알 수 없는 열기에 말려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꿈꾸고 있는 세계는 나를 설레게 한다. 그것은 과거의 모반(謀反)같은 것이 아니지. 지난날의 반란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가 달성한 것, 말하자면 옛 권력층에 대한 새로운 권력층을 형성한 것이었어. 허나, 오늘날 우리의 혁명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대대수를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성취해야 할 명제이다.”

“과연 거기서 형님의 역할은 무업니까? 지도자를 따르는 민중입니까? 민중을 지도하는 지도자입니까?”

“나는 지도자로서의 소양을 기르고 있는 중이다.”

“거 보십시오. 벌써 형님은 하나의 계급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평등을 목표한다는 형님의 이론에서도 민중과 지도자라는 구분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명칭이고 역할일 뿐이지. 우리는 모두 동지야.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해방하고 전 민중을 해방한다. 그 해방을 통해서만, 인류 사회는 비로소 착취 없는 역사를 시작하게 되는 거다.”

“착취, 착취, 도대체 착취가 아닌 관계도 있을 게 아닙니까? 이 세상이 그렇게 극단적인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 집안의 할머니도 착취자란 말씀인가요?”

“그렇지.”

(하략)

최명희 – 혼불 제 3권 58쪽 – 60쪽

 

설국열차의 감상편은 이 것으로 대체한다. 영화 내내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알 수 없는 사람

명확한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건 본인의 신념이 갈 곳을 잃어서가 아닐까. 
자기 욕망에 솔직하지 못한 사람은 그 욕구가 부끄럽기 때문일까. 그래서 자꾸 덧칠하고 가면을 쓰려고 하는 걸까.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걸까. 
들여다 보이지 않는 사람은 알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사람들을 알 수 없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불안과 위협을 느낀다. 알 수 없는 사람, 모호한 사람에게 우리는 의심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곤 한다. 
신뢰를 얻지 못한 이 모호한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를 주목하라는 고양이처럼 꼬리를 바짝 세우는데, 거기에 달린 꼬리표에는 “알 수 없으니 조심할 것” 이라 적혀 있곤 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2013. 8. 20. 

마을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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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수많은 도시민들은 도시의 시스템에 기생하여 살아가지 않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처럼 밀려오는 시스템에 거부감만 느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엉겨붙어 기생하고 있지 않나.
기생하여 사는 것은 그만큼의 불편함과 수치심을 동반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늘 불평하지 않았던가. 도시가 나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고.
내가 사는 곳에 대해 주인이라 느낀 적 없다.
나는 언제나 도시의 세입자였으며, 내 땅 한 칸 주장한 적 없다. 꾸역꾸역 밀려오는 정책은 파도처럼 늘 도시를 에워싸고 돌았으며 나는 그 안에서 늘 밀려났다.
내 집이 무너진 적 없다. 내 집을 가져본 적 없으므로.
언제나 나는 어디에서부턴가 떠나온 사람이며, 떠나갈 사람이었다.
사람이 한 곳에 정착해야 할 이유를 느낀 적 없으며, 고향은 언제나 이동 가능했다.
내 의지가 아닌 이유로 이동해야 한다면 나는 이동하는 호모노마드가 되려 했다.
말하자면 나는 그 어느 곳도 깊이 사랑한 적 없다.
끊임없이 나의 오늘을 부정하고 나의 정체성을 지우기 바빴다. 나에게 의미있는 장소는 타인에게도 같았다. 구태여 내 것만 아름다운 적 없다.
이제 기억속에 남은 그 거리들이, 나에게 과연 콩알만큼의 안정이라도 가져다주었는가 알 수 없다.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가.
살아가던 공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새로운 적응과 질서를 요구한다. 뜯어내고 고쳐내고 바꿔가는 것은 인간에게 적잖은 스트레스가 된다 한다.
늘 그렇게 부대끼며 살아온 자에게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는 일은 익숙하다. 집의 유통기한은 2년이며, 언제든지 보따리를 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외롭다고 말할 시간조차 없었던 것처럼, 낯설어서 어렵다고 말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누가? 내가 나 자신에게.
삶의 일부분을 지우는 것, 끊임없이 나는 뒤돌아서서 내 그림자를 흙으로 덮었다. 삶의 공간을 잊고 끊임없이 떠도는 것, 천막 치고 사는 유목민의 고향은 땅이요 자연이지만, 1.5톤 트럭에 의지하는 도시민의 고향은 자고 일어나면 달라질 눈부시게 발전하는 조국의 빌딩숲이다. 모험과 도전은 돌아갈 곳이 있을 때만 즐겁다. 부유하는 불안정함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지운다.
새롭게 쓰기를 반복한다는 건 끊임없이 지워야 한다는 거다.
어느 날 문득 내 목덜미가 스산해 지는 것은 “나 자신”이 낯설어서이다. 나를 모두 잊기 위해 살아왔기 때문이다.
2013. 7. 7.

7시 42분

# 1.

뭐가 그렇게 힘들었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할 수 없다. 글쎄요. 라고 운을 떼기 시작할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았지요. 라고 시작할 것이다.
누구 때문이라고, 어떤 환경때문이었다고, 이제는 그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다.
모든 일들은 내가 원하지 않았어도 나에게 다가왔고 그 과정속에서 내가 한 생각, 내가 내뱉은 말들과 엉켜 사건이 되었다.
그런 하루 하루가 뒤섞여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세월의 때와 땀이 섞여 내가 되었다. 지금 여기, 세상 그 어떤 고통도 신음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평화로운 순간의 나.

#2.

미뤄둔 것들이 있다.
지금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다. 내 손길이 필요한 아이와 내가 반찬을 꺼내 뚜껑을 열어주어야만 하는 늙어가는 남자가 있다.
내 한 마디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돌아와 산책을 나가길 간절히 기다릴 늙어가는 개도 한마리 있다.
때로는 그 모든 것들을 미루고 싶다.
왜냐하고 물으면, 글쎄요. 라고 시작할 것이다.
나는 신이 아니니까요.
나는 때로 도망치고 싶으니까요.
나도 때로는 모든 책임을 던지고 싶으니까요.
나도 때로는 그 어떤 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3.

유모차에서 내려 아장아장 걷는 아기와
그 아이를 터질 것 같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혈육이 저녁을 즐기고 있다.
인조잔디와 기계적으로 서양음악에 맞춰 압력을 달리하는 사람이 만든 분수 앞에서도 사람들은 쉴 줄 안다.
내 어린 아이도 저 앞에서 춤추며 흠뻑 젖기를 좋아했었다. 이 곳은 그래서 늘 비현실적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분쟁, 오늘도 더위에 땀흘리며 지친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피부가 하얀 젊은 엄마들이 침을 질질 흘리는 아가들을 따라다닌다. 그 아이들은 때로 내 곁으로 와 낯선 존재를 빤히 바라보다 떠난다.
태초의 인간을 생각한다. 그 어떤 수치심도 책임감도 모르는 작은 인간들.

#4.
코오롱등산장갑을 낀 나이 먹은 여자 옆에 젊은 애기 엄마와 뽀얀 남자아이가 있다. 늘씬하게 키가 큰 애기엄마와 그니의 친정엄마일 것이다.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끼지만 나 역시 이 인조잔디에 앉아있다. 이건 사실이며 바로 지금이다.
다른 사람은 어찌 그 세월들을 견뎠는가 생각하기 전에, 나는 왜 여기 앉아 있는가 누가 묻는다면, 쉼없이 실패하고 끊임없이 좌절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해도 될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쩔은 내가 나는 허름하고 더러운 바에서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음악이 사치스럽지 않으나 과도하게 평화로워 낯선 숲속으로 퍼진다.
이렇게 나는 오늘 여기서, 금요일의 저녁 7시 42분을 흘리는 중이다.

2013. 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