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내 어리석은 낱말들을 모아
미련한 문장 하나를 만들어
뽑혀나갈 나무 뿌리 아래에
숨겨두고 싶었다

부끄러운 연필을 부러뜨리고
운동화 끈을 꼭 묶고 달릴 수 있다면
사다리를 타고 척척
달에 갈 수 있을까

흩어질 꽃잎을 모아
주인 잃은 의자 위에 뿌리면
오늘이 조금 짧아질까

해가 너무 길다고
네가 말했다

170319
경기도 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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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

– 숨막히게 그리운 사람 하나 없는 인생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 숨막히게 그리운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했던 나의 한 시절,
어쩌면
그 때의 나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모르겠다.

–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분명히 알기 때문에.

– 밤에 삼각대를 놓고 벚꽃을 찍고 있으면
술에 취해 흔들흔들하면서도 가만히 서 있던 그 사람,
그 때의 그,
그 때의, 나.

2016년 4월 4일의 살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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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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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지는 시간이 늦어진다.

하루가 추웠다. 나만 추웠겠는가. 그도 추웠을 것이고, 당신도 추웠을 것이고, 우리 모두, 조금씩 시린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따듯한 것이 생각나서 나는 설렁탕을 사러 간다. 검은 나의 차를 타고 어스름이 내리는 거리에, 네온사인이 들어오는 광경을 본다. 가족들과 밥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이 식당에 삼삼오오 앉아 있기도 하고 야근을 하기 전 허기를 달래려는 남자들이 신발을 반쯤 벗은 채 앉아 설렁탕을 훌훌 먹고 있다.

외롭다고 말을 하면 그 뒷모습이 초라해보일까봐

쓸쓸하다고 말을 하면 내 신발의 뒷축을 감추고 싶을까봐

아프다고 말을 하면 앞선 자의 눈이 아련해 질까봐

오늘도 가면을 쓰고 하루를 지내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긴 한 숨을 쉰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

그 모든 대답은 나에게 있는데 애써 들여다 보는 시간이 엄습해오는 걸 느끼는 바로 그 때가 어스름.

침대맡에 앉아 일기를 쓰는 그 한적한 시간에 물밀듯이 밀려드는 안타까움에 대하여.

그럴 나이와 그럴 때가 따로 있다는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밀어내면서

최백호의 신보를 뒤적거리는 밤들이 이어지더라도,

그래 내일은 또 무슨 할 일이 산적해 있다는 것이 다행인 시절.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여름은 멀리에 있다.

 

뒤틀리는 무릎의 통증을 느끼며 삐딱하게 서서 창밖을 바라본다. 휴대폰을 꺼내 그 어스름을 담는 시간. 그저 내가 기억하기 위해, 내 눈보다 다른 것에 의존하는 시간. 그런 시간들이 촘촘히 이어져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고, 나이를 먹고 아이는 자란다.

2013. 4. 10.

 

비오는 밤

기억이 잊혀지는 게 구슬프다.
내가 잊어가는 것도 구슬프다.
빗소리는 더 이상 양철지붕을 때리지 않는다.
곱게 화단에 내려 앉아 값비싼 향나무를 적시고 비싼 개밥을 먹고 사는 개들의 똥무덤을 적실 것이다.

하나씩 잊혀져 가는 게 구슬프다.
온 몸을 감싸던 외투를 벗는 계절이라 슬프다.
태양이 빛나고 꽃이 피더라도 답답하던 옷에 배어 있던 체취가 그리운 날이 있더라.
갑자기 눈이 왔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날이 흩어진다.

올 겨울은 너무 길었지. 올 겨울은 너무 힘들었지, 그래서 빨리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하면서도 꽃은 기다릴 수가 없네.

그 겨울의 시작부터 믿기지 않았으니까. 결국은 그래도 겨울은 가고 봄은 오는 건데, 이렇게 쉽게 가고 이렇게 쉽게 와도 되는 건가..
이렇게 쉽게 가고, 이렇게 쉽게 올꺼면 왜 그렇게 잔혹했나.. 싶은게지.

곧 저 멀리 남쪽 마을엔 산수유가 핀다는데, 삼중창 유리밖에 잘 들리지도 않는 빗소리가 들린다고 우기면서, 갈 봄 여름없이 꽃피네 꽃피네. 라고 중얼중얼.
개 한마리 애기 하나 드르렁 거리는 애매한 계절의 비오는 밤이다.

2013. 3. 13.

봄 밤

밤벚꽃 아래 남자고등학생 애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덩치에 안 어울리는 놀이기구를 타고 놀고 있다. 공기는 차가운데 아이들의 목소리는 뜨겁다. 별 것 아닌 농담에 깔깔대는 앳된 사내의 목소리에 사춘기와 변성기를 지낸 여물지 않는 수컷의 성성함이 낯설다.
그저 아이들은 웃고 있을 뿐인데, 그 소리들을 제어해 본 적 없는 치기에 아파트 단지가 우렁우렁하다.
줄여입은 교복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작은 아파트 단지를 겅중겅중 달려가는 아이들의 기다란 종아리 뒤에 숨어버리는 이 공간이 이다지도 좁은 줄 처음 알았다.
나의 개는 끊임없이 생명이 움트는 땅의 냄새를 맡고, 하루종일 메말라 있던 나의 눈에는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다. 어느 순간 저 아이들이 성년이 되어 스스로 목소리를 제어할 줄 아는 그런 날이 오면, 오늘은 단 몇 걸음에 달려가던 이 아파트단지가 갑자기 거대한 괴물이 되어 버릴 것이다.
봄밤은 미친년 옷고름 씹어먹듯 흥야흥야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