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글쓰기]평택시 공익활동지원센터

5월 22일과 23일에는 평택시 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 📕활동가글쓰기를 진행했습니다.
활동가글쓰기는 문화공동체히응의 특별한 프로그램으로 시민사회단체 활동경험과 대변인 경험을 토대로 만든 프로그램입니다. 보통의 실용글쓰기와 다르게, 사업계획서, 보고서, 보도자료, 성명서, 홍보글쓰기에 이르기까지 활동가에게 필요한 기획력, 모집에 도움되는 구체적인 사업계획, 늘 쓰는 익숙한 언어를 해체하는 훈련을 합니다.
2시간씩 2회에 걸친 수업은 사실 시간이 부족해 여유있게 실습을 하긴 어렵습니다만, 활동지를 배포하고 향후 스스로 훈련할 수 있게끔 안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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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로 살다보면 사업과 활동에 매몰되어 그 외의 세상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습니다. 어휘력이 답답하다는 분들을 위해 우은주 시인이 참여한 앤솔로지 시집인 #창백한지구를위한시 를 , 사회대개혁을 위한 활동가의 마음을 담아 제가 공저로 참여한 #다시만날세계에서 를, 소설 읽어본 지 너무 오래라는 이야기를 듣고 황시운 작가가 참여한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앤솔로지 #내가이런데서일할사람이아닌데 를 선물로 드렸습니다. 활동가뿐 아니라, 우리가 살다 지칠 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문화예술이라 믿습니다. 평택지역의 활동가들의 연대와 활동 모두 응원하며, 다음에 또 좋은 자리에서 뵙겠습니다.


⏰#활동가글쓰기 는 최소 6시간 이상으로 구성하는 게 좋습니다. 관심있는 기관은 연락주세요. 기관 특성과 일정을 고려해 맞춤형으로 진행합니다.

[강좌후기]모두가 인간이라

“저는 병 때문에 그런지, 이렇게 조금만 신경을 쓰면 머리가 너무 아프고.. 쉬어야해요….”

문장의 끝에 숨어있는 두 번째 말, ‘나는 언제쯤 괜찮아질까요?’ 가 자연스럽게 붙어오는 듯 했다.

나는 화이트보드 앞에 일어서서 검은색 마커를 들고 무릎뼈의 연결지점을 그렸다.

“제가 관절염이 있어요. 15년 정도 됐거든요. 이게 무슨 병이냐 하면..

무릎과 무릎 사이에 연골판이라고 있어요.” 무릎과 무릎 사이에 공간을 띄워두고 사이에 판막을 그렸다. 병원을 오래 다니면 정형외과 의사처럼 그릴 수 있게 된다.

몇 명이 안다는 듯이 응응. 네. 하는 소리를 냈다.

“연골판은 무릎뼈끝의 연골과 다른 무릎뼈의 연골이 부딪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저는 여기가 찢어졌어요. 연골판.

연골판은 많이 찢어진대요. 운동하다가도 찢어지고요. 특히 축구하다가, 등산하다가, 앗! 하고 무릎이 팍 꺾일 때, 그때 많이 찢어진대요.

이게 딱 이렇게 금 그은 듯이 찢어지면, 다시 꿰매면 되겠죠. 운동선수들도 많이 그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여기가 딱 찢어진게 아니고 너덜너덜하게 올 풀린 걸레같다고 했어요.” 나는 연골판에 위아래로 죽죽 사선을 지그재그선을 그었다.

“의사가 한 말이에요. 올 풀린 걸레같다고. 그러면 이 조각들이 언젠가 떨어져 나와서 몸속을 돌아다닐 거니까…. 싹 다듬어서 도려내야 하죠. 그 수술을 한 게 12년쯤 됐고요. 앞부분, 뒷부분 찢어지고 터지고 뭐 그래서 수술을 세 번 했어요. 그리고 사람 몸이 희한한 게 회복은 안되는데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해서 여기 상한 부분, 연골 끄트머리에서 뼈가 다시 자라요. 아주 조그맣지만. 그래서 얘네들이 자라서 또 부딪혀요. 그러면.. 엄청 아프죠. 연골이 없이 속에서 뼈가 부딪히니까. 매일 아파요. 아픈 건 쉬지 않고 아픕니다. 아.. 가끔, 안 아플 때도 있긴 해요.”

나는 풉. 하고 웃었지만, 참가자들은 안타깝다는 듯이 여러 소리를 냈다. 질문도 있었다. 가볍게 몇 가지 답을 한 뒤에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처음 수술할 때, 지금 제 나이쯤 되면 못 걸어다닐 줄 알았어요. 휠체어 탈 줄 알았는데 걸어다니고 이렇게 수업도 하잖아요? 살은 많이 쪘지만. 근데 저는 다른 사람보다 무릎의 기능이 떨어지고 아프니까, 무릎이 건강한 사람들처럼 똑같이 걸어다닐 수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네. 천천히 걷고 자주 쉬어요. 가족이랑 같이 여행을 갈 때, 친구들과 어딜 갈때, 제가 건강한 사람과 똑같은 속도로 걸으면 어떻게 될까요? 금방 주저앉고 포기하겠죠?

그래서 같이 가는 사람에게 내 속도에 맞춰달라고 하고, 중간 중간에 쉬어요. 그러면 저도 건강한 사람과 같이 끝까지는 갈 수 있어요. 끝까지 같이 가긴 해야되니까.

중간에 나는 여기서 쉴테니까 너만 갔다와. 그러면 같이 뭘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많이 쉽니다. 뼈가 튼튼하지 못해서 근육을 많이 쓰는데 다른 사람에 비해 4배, 10배 정도 더 쓸 수 있을거래요. 그래서 집에 가면 뭉친 다리근육을 풀어주고 자야 다음 날도 걸을 수 있어요.”

“그럼 등산은 못 하세요?” 한 참가자가 물었다.

“안돼죠. 등산 하면 안됩니다. 관절염에 제일 안 좋은 게 등산이고 계단이에요. 저도 산을 좋아했는데 그건 이제 하면 안되죠. 큰일납니다.” 나는 웃었다.

이어서 말했다.

“선생님 머리 아픈 것도 저 다리 아픈 거하고 같아요. 남들보다 약한 상태니까 쉬어주는 게 맞아요. 다른 사람은 두 시간씩 집중하면 나는 20분 하고 쉬고, 30분 하고 자고, 그래야죠.

제가 산에 못 가는 것처럼 뇌신경이 약해졌으니 포기해야 하는 게 있을겁니다. 저는 뇌를 많이 쓰는 편이고 제 뇌는 튼튼하다고 생각하지만요. 저도 막 집중해서 몇 시간 뭐 하고 나면 자야됩니다. 그냥 팍 꼬꾸라지고 기절하듯이 잠들어요.

그러니까. 왜 나는 이게 안될까.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처음 발병했을 때에서 10년이 지났다고 하셨잖아요. 노화도 있을거에요. 저도 관절염이 일찍 왔지만 노화도 같이 오거든요. 그러니까 꼭 내가 아파서 생기는 일만 있는 게 아니고, 늙어가기 때문에 생기는 일도 있겠죠. 너무 좌절하지 않으셨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저는 매일 등산도 하고 산책도 해요.” 발병한 지 20년 넘은 참가자가 말했다.

“네 맞아요. 선생님은 다리가 튼튼하고 저는 다리가 약하고. 누구나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선생님도 약 먹어요?”

“그럼요. 관절염 약도 먹고, 가끔 병원가서 주사도 맞죠.”

머리가 자주 아프다는 여성은, 10년전 강도사건을 당한 직후 조현병이 발병했다. 환청과 망상에 시달렸고 10년을 누워지냈다. 이제는 약도 잘 먹고 관리가 잘되는 편이다. 석 줄도 못 쓸거라고 하더니 가장 단정하게 글을 잘 쓴다. 지난 수업 그의 노트를 사진 찍으며 글쓰기 교육할 때 보여줘도 되겠냐고 물어 허락을 받았다. 자기 이름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수업을 맡은 뒤에 조현병에 대한 다양한 글을 읽고 있다. 부산의 송곡클럽하우스 이야기도 읽고 일본의 베델하우스 이야기도 검색해봤다.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이다. 그만큼 사회가 너무 끔찍한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다수의 환자들은 명확한 가해자나 방아쇠 지점이 있었다. 인간은 강철처럼 단단하지 않다. 누구라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나 역시도 그렇다. 수업을 거듭하며 이들과 동료의식 같은 걸 느낀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이라서다.

#정신건강센터글쓰기

#조현병

[강좌후기]뇌신경장애

정신장애라는 말을 싫어한다.

한국어에서 쓰는 “정신”이라는 낱말은 ’스스로 의지를 일으키면 변화시킬 수 있는 얼‘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_ 정신차려

_ 정신일도하사불성

_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_ 정신줄 놓지마.

’정신장애‘의 정신과 ‘정신차려’의 정신이 과연 같은 ‘정신’일까. 정신장애는 이미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질병에 이르른 것인데 왜 정신장애라 말할까. ‘뇌신경장애’라고 하면 안될까. 오랫동안 그 생각을 했다. 좀 더 급진적인 말로는 ‘신경다양성’이 있다.

조현병으로 진단을 받았는데도 자신이 조현병인줄 잘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조현병이 정확히 뭐냐고 묻기도 했다. 복지사는 호르몬, 스트레스, 뇌신경의 문제 등 다양하고 복잡한 원인이 있어서 원인으로 말할 수 없고 그 증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말을 보태주었다.

환각, 환청, 환영등이 주된 것이라 했고, 망상이 일어나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고 했다.

복지사의 말을 듣던 나는 턱을 괴고 있었다.

무엇이 다른가.

”우울증도 그 증상 있는데요.“ 라고 내가 복지사에게 말을 건넸다.

2008년에 발병했던 내 우울증은 급성에, 중증이었다. 무기력이 시작되었고 환청이 들렸고 환영을 봤다. 증세가 심해졌을 때 환후도 있었다. 몸에 닿는 것들이 꺼끌거려 면으로 된 것 외에 다른 옷을 잘 입지 못했다. 2008년 첫 진단을 받고 바로 약을 먹었다. 사고위험이 있다며 의사는 복용량을 서서히 늘렸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눈에 초점을 맞추느라 30분 정도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고, 길을 걷다가 균형을 잃어 넘어지기도 했다. 내가 먹었던 약 중에 다수가 부작용이 있었다. 졸피뎀류는 6개월 정도 지나니 내성이 생겨 수면제의 효능을 잃었고, 쿠에타핀이나 자이프렉사는 부작용이 심했다. 쿠에타핀과 자이프렉사는 정신분열, 조현병 약으로도 쓴다는 걸 검색해 보고 좌절했다. 나는 결국 조현병 환자가 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가족력이 있다. 조현병 발병환자가 있었다고 들었다. 내 눈으로 확인하진 못했다. 그러니, 모든 조현병이 유전되지 않지만 가족력이 있으면 발병확률이 높아지는 건 사실이니까, 나는 이미 아이를 낳아버렸는데 조현병 환자가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 그 걱정에 우울이 더욱 깊어졌다.

우울의 끝에 조증이 오기도 했다. 2박 3일 잠을 안자고 뭔가를 읽고 써댔다. 그나마 책을 붙잡고 있어서 살 수 있었을 거다. 술이나 도박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떤 중독이 나를 거기서 구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의사는 나에게 우울증이 오래되면 성격으로 고착될 수 있으니 서둘러 집중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집착했다.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고 재빨리 복귀하고 싶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비웃고 있었고, 무시했다. 모두들 고의적으로 나를 괴롭혔고, 나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자이프렉사는 순식간에 30kg 정도를 찌웠고, 배란도 멈췄다. 갱년기 증후군을 그때 겪었다.

아이는 어쨌을까. 약으로 인한 섬망이 계속되어 중증이던 6개월의 기억이 없다. 아이의 사진도 일정기간 중단되어 있다. 매일 식탁에 앉아 무엇을 썼다. 앉은 자리에서 A4대학노트를 열 몇장씩 써내려갔다. 그냥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을 적었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장을 적었다. 샤워를 해도 길을 걸어도 계속 머릿속에 문장이 이어졌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신경끝에 말풍선이 달려왔고, 내 발은 땅을 딛지 못했다. 늘 허공에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양극성 장애를 가진 우울증과 조현병의 차이가 뭘까요.”

나는 ‘중증우울증도 환상, 환청, 환후가 있고 망상도 있다.’라고 짧게 말한 뒤 복지사와 참가자에게 되물었다.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면 망상의 빈도, 기간, 정도의 차이였던 거 같다”고 자답했다. 우울에서 조증삽화가 찾아오면 공격적이고 폭력적이 되었다. 남을 공격하거나 나 자신을 해치려고 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술이었다. 지하 27층 정도에 널부러져 있다가 술을 마시면 지상 20층 옥상에 올라가버리기도 했으니까.

그 터널을 어떻게 지나왔을까.

중환자실에서 3일만에 깨어나 폐쇄병동 입원을 거절하고 정신분석을 받는 게 2012년, 공황장애가 일어난 게 2014년, 그리고 정신분석이 끝난 게 2015년이고, 2017년쯤 다시 공황장애가 짧게 있었다. 그러니까 내 발병기간은 거의 10년정도다. 당시 나와 함께 일하면서도 눈치채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그저 좀 톡특하다, 강하다, 세다,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괴로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삶의 경로를 뒤틀고, 내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다시 잡고나서야 완전히 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 목줄을 쥐고 있는 어떤 것을 과감히 떨쳐버릴 수 있었을때, 다시 태어났다는 얘기겠다.

아니 어쩌면, 그냥 운이 좋았던 거다.

오늘은 한겨레6411의 목소리에 실린 “정신장애인 동료상담가”의 칼럼을 함께 읽었다. 어떤 부분이 맘에 와닿느냐고 물었더니 참가자들은 낙인, 배제, 억압, 고립, 망상, 가치없는, 정신장애, 와 같은 단어를 꼽았다. 그리고 ‘지도를 다시 쓰다’, ‘우정으로 확인하는’ 과 같은 문장을 짚어가며 다시 읽었다.

지도를 다시 그리는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당사자의 목소리는 중요하다고,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을 필요가 있다고, 우리는, 뭘 잘못해서 병에 걸린 게 아니라고 말했다.

관절염이 생기면 죽을 때까지 관절을 회복할 수 없고, 위장장애가 있으면 늘 먹는 것을 조심해야 하듯이, 조현병도 마찬가지라고. 그건 그저 병이니까. 잘 치료해야 하고 잘 낫지 않더라도, 어쨌거나 그 병과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으니까.

다음주부터는 주제를 정하고 좀 더 깊이 있게 써보기로 했다. 할 수 있을거다.

멀리서 보면 그 깊이를 모르는 바다도, 자꾸 가보면 내가 어디쯤 갈 수 있는지 알게 되는 것처럼.

우울증을 겪었던 10년은, 나에게 가장 큰 바다가 되었구나.

#정신건강보건센터글쓰기

#나와세상을잇는글쓰기

군포시공익활동지원센터 – 활동가 글쓰기 교육 3회차

공익활동가 글쓰기 수업 모집 시작합니다.

군포시 공익활동지원센터에서 기획했습니다. 문화공동체 히응의 이하나대표가 직접 강의합니다.

애초 2회차로 기획되었으나 3회차로 늘리고 2시간 30분씩 진행합니다. 9월입니다.

신청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gp4citizen.org/news/?mod=document&uid=851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 발달장애청년 생애사쓰기 네 번째 시간.

문장을 완성하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극을 줄이고 더 가깝고 촘촘하게 이야기를 붙여내는 것도 쉽지 않다.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다.

떠오르는 낱말과 낱말 사이을 이어붙이는 일, 그렇게 해서 만든 하나의 문장과 그 다음의 문장을 연결짓는 일.

이미 세 번의 글쓰기 시간을 마쳤다. 학생들은 단어와 단어를 나열하고 그 사이에 조사를 넣거나 서술어로 끝맺으며 짧은 이야기들을 만들었다. 나는 그 사이에 부사를 넣었다. 질문을 다시 던지면 한 줄을 더 쓸 수 있었다.

오늘은 “내가 가장 행복했을 때”와, “내가 가장 슬펐을 때”에 대해서 적어보기로 했다. 수행능력이 높아서 한 시간동안 두 개의 주제로 서너줄짜리의 글을 쓸 수 있다.

행복했을 때를 쓸 때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눈앞에 뭐가 보였는지, 날씨는 어땠는지, 내 얼굴에 쏟아지는 빛은 어느 정도였는지, 어떤 소리가 들렸는지를 적어보게 했다. 모두들 질문에 답하는 형태로 하나씩 하나씩 글자를 눌러적었다.

행복한 기억을 발표한 뒤 슬펐을 때를 적어보자고 하자 수빈이(가명) 중학교때 자기를 놀렸던 남학생의 이름을 적고 나에게 물었다. 수빈은 지적장애가 있는데 잘 설명하면 하나씩 하나씩 잘 따라오는 학생이다. 운동도 열심히 한다.

“선생님, 저 이런 얘기 써도 되요? 저 슬프게 한 아이요.”

“네. 써도 되죠.”

수빈은 중학교때, 고등학교때 자기를 괴롭힌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었다. 중학교 3학년때 누구, 고등학교 1학년때 누구, 고등학교 2학년때 누구. 아이들의 이름 옆에 괄호를 치고 고1, 고2, 중2라고 적었다.

“얘는요! 입 튀어나왔다고 못생겼다고 했어요.” 그 얘기를 듣자 웃음이 터졌다. 나는 수빈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한국사람은 다 입이 튀어나와있어요. 수빈씨.”

“정말요?”

“그럼. 선생님도 입이 좀 나와있어요.”

“그리고 얘하고 얘는요. 나보고 춤춰보라고 하면서 막 웃었어요.”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뒤통수가 싸늘해졌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너희 나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 라고 했어요.”

“잘했네요.”

“그리고 얘는요, 저한테요. ‘이 장애인새끼가!’ 라고 했어요.”

“헐. 그래서 수빈 씨는 뭐라고 그랬어요?”

“그냥 무시했어요.”

“잘 했어요.”

“얘는 장애인 아니거든요. 얘는 일반인이거든요.”

“수빈 씨. 일반인 아니고, 비장애인. 비장애인이라고 해요.”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비장애인.”

“수빈 씨는 본인이 장애인이라고 생각해요?”

“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장애가 심하지 않거든요.”

“네 그래요. 장애인을 놀려서도 안되고 비장애인을 놀려서도 안되죠. 나쁜 아이들이네요.”

수빈 씨가 초중고등학교때 앨범찍어놓은 사진을 휴대폰에서 찾아 보여주면서 이 앨범들을 모두 다 버렸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면서 숨이 빨라지길래 같이 쉼호흡을 했다.

“예전에 제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서요. 아빠가 한의원에 데리고 갔는데요. 한의사 선생님이 숨을 쉬라고 했어요. 쉼호흡하라고.”

“네 좋은 방법이예요.”

수빈은 학창시절 자기를 괴롭힌 아이들 이름을 모두 적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하나씩 다 적었다. 나는 수빈씨에게 앞으로도 화가 나면 글로 적어보라고 권했다.

이어서 각자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은지 발표했다. 학생들은 노래를 듣는다, 노래를 한다, 게임을 한다, 밥을 먹는다, 잠을 잔다, 메니큐어를 바른다, 치킨을 먹는다, 꽃에 물을 준다, 쉼호흡을 한다라고 적었다. 물건을 던지거나 술을 마시거나 소리를 지른다고 적은 사람은 없었다. 장애인으로 분류되어 살아가는 청년들은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행동교정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술을 마시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욕을 하는 건 아무도 가르치지 않으니까.

국가가 장애를 분류하고 구분짓고 선을 그어두었다면 그에 대한 차별도 장애등급 심사만큼이나 엄격하게 금지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2018년, 2019년에 걸쳐 진행한 발달장애청년생애사쓰기 수업을 코로나2년 휴식 이후에 재개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초대해 준 수리복지관관계자들께 감사드립니다.

2013.6.17.

어쩌다 노인복지관 수업을 맡게 되어 5주차의 강의를 끝냈다.
사실 강의라고 하기도 애매한 것이 내가 이 어르신들에게 뭘 가르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고 그 분들도 뭘 배울 형편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하는 일은 한 시간 가량 그 분들이 하나라도 기억을 살려내고 그 기억을 말로 표현하실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첫 시간에는 다른 사람의 말이 길어지는 것을 기다리지도 못하시던 분들이 차츰 차츰 순서대로 이야기도 하시고 남의 얘기도 듣기도 하시고 적당한 추임새를 넣게도 되셨다.
담당 사회복지사는 놀랍다고 했고 나 역시 빠르게 적응하시는 어르신들에게 가능성을 보았다.
처음엔 11시부터 40분 남짓 진행되다가 식사하러 가야된다고 자리를 떠버리시는 분들이셨는데 우리 한 시간 일찍 시작합시다 라는 어르신들의 제안에 10시에 시작에 30분은 워밍업으로 간단한 신체놀이를 하고 (이 부분은 다른 분께서 진행) 나머지 1시간 1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라는 질문에 글쎄요. 하고 어르신들이 말문이 터지던 순간의 몇 가지 사례를 들었더니 듣던 분께서 “자랑할 수 있는 걸 끄집어내셨군요.” 라고 하셨다.

오늘은 내가 맡은 강의의 마지막 날이었다.
어제 오후까지도 대체 내일은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되나 고민을 하다가
“자랑할 수 있는 걸 말할 기회” 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오늘 내가 준비한 것들은 사라진 직업에 대한 것이었고 “제가 잘 모르니 얘기해주세요” 라며 하나씩 하나씩 물어나갔다. 사실 정말로 몰랐다. 내가 똥지게가 뭐고 물지게가 뭔지, 신기료 장수가 뭐며, 가마니를 어떻게 짜는지 알게 뭐겠나.

오늘은 11시 40분이 될 때까지 이야기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한 아버님은 노래 한 자락 해주겠다며 해방때쯤의 가사로 추정되는 노래를 불러주시고 자리를 뜨셨다.
이가 거의 없어 가사를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지만 후반부의 가사는 이런 것이었다.

재주 좋은 제트기랑 (중략)
한시바삐 한국땅에서 주저앉고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자유의 평화를 이제 볼까

193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과의 괴리는 엄청났다.
세월의 차이뿐 아니라 문화적 차이도 엄청났다.
동시대를 살아온 나의 할머니와 무척이나 다른 분들이셨다.

집에 돌아와 나에게 “자랑할 수 있는 걸 말할 기회” 라는 힌트를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좋은 강사는 앉아서 수업을 듣는 사람을 ‘높이고, 그들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며, 그들의 숨은 가능성을 스스로 찾아내게 하는’ 사람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강의를 주로 할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자세로 임하면 실수가 적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듣자하니 거슬리고 거북했던 강의들의 원인이 무엇인가도 알아낼 수 있었다. 그저 칭찬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나를 보고 있는 당신이 나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재촉하는 것. 그런 자세는 마음에 든다.

혼자 전담했던 첫 강좌의 소회다.

[생애사쓰기] 목화솜 다래

– 나는, 아버지 어머니 잘 몰라요.
어려서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해서, 그냥 사방 팔방으로 떠돌아 다니느라. 그래도 잠깐 우리 집에서 살 때가 있긴 했지. 나는 그나마 우리 큰 이모하고 좀 친했고. 식구들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요.

– 우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도 없고, 그래서 사촌집으로 갔는데 우리 사촌 오빠가 그렇게 나를 때렸어요. 뭐 달라고 해서 안 해준다면 때리고 그렇게 걸핏하면 나를 때렸어요. 오빠한테 맞으면 이웃집 언니한테 갔는데 그 언니가 나한테 참 잘 해줬어요. 언니네 집에 뒷방이 하나 있어요. 거기 숨어 있으라고 하지. 그러면 언니가 고구마 같은 거 삶아 주고 그랬어요. 그러다 그 언니 엄마한테 걸려서 욕 먹고 그랬죠. 왜 자꾸 쟤 받아주냐고. 언제까지 그럴거냐고.
그래서 열 한살에 제주도를 나왔어요. 나와서 내내 남의 집 살이하고.

– 전쟁이 전쟁이.. 우리 엄마가 막내를 전쟁통에 낳았어요. 내가 그 때 여덟 살이었고. 우리 엄마는 산후조리고 뭐고 없었어요. 그냥 한달만에 일을 나간 거예요. 그러니 애기를 어떻게 해. 내가 봐야지. 내가 애를 업고 다니느라, 나도 앤데, 여덟 살짜리가 애를 업고 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여기 손가락 가운데 마디가 퍼렇게 멍이 들어. 깍지를 하도 껴서. 포대기고 뭐고 애기띠도 없죠. 내가 그때는 엄마 원망을 많이 했는데, 나도 이제 우리 엄마 돌아가실 때 나이가 됐단 말이죠. 이제 나도 곧 엄마를 만나러 가겠지. 그러면 내가 가서 엄마하고 또 잘 살아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 나는 우리 집이 그렇게 못 살지도 않았어요. 가끔 쌀밥도 먹었단 말이죠. 그런데 왜 나를 학교를 안 보내줬을까.
위로 우리 오빠가 하나 있고 언니가 둘이고 내가 막내딸인데, 우리 아버지가 난봉꾼이라 내가 두 살때부터도 집에 없었어요. 계속 딴살림을 했어요. 언니는 둘 다 여우고 오빠가 이제 장가를 가서 집에 들어왔어요. 올케언니랑 오빠랑 나랑 우리 엄마랑 사는데, 오빠네 조카가 여덟이예요. 애기들을 볼 사람이 없다고 나보고 애를 보라고 했어요. 내가 조카들을 키우느라 학교를 못 간 거예요. 나도 학교를 보내달라고 했더니 우리 오빠가 했던 말이 너무 가슴에 남아서.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요.
학교 가고 싶으면 니 아버지한테 가서 얘기하라고. 그 말이 나는 너무 슬펐어. 왜 나한테 그랬는지.

– 우리 언니는 수단이 좋았어. 어려서부터 자꾸 어디서 그렇게 쌀을 퍼와. 그럼 그거 가지고 엿 바꿔먹으러 가지. 쌀뿐이 아니야.아무튼 뭘 그렇게 어디서 가지고 왔어.
나중에도 잘 사셨겠어요.
어 잘 살았어요. 그 딸들도 잘 살고요.
지금도 계세요?
우리 언니 치매걸렸지.

자꾸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들 한다. 글이 맥락이 안 맞는다고 답답해했다. 모두들 쓰다가 학교 못 간 억울한 이야기로 빠져나간다. 복숭아 서리, 수박 서리, 먹고 살만한 제일 부잣집 밭에서 한 두개쯤 가져와도 괜찮던 시절이라는 건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얹어주는 공유의 개념일지도 모르겠다. 목화솜이 되기 전에 먹으면 아주 맛나다고 했다. 내가 아카시아 진달래 사루비아는 먹어봤다 했더니 그런 거보다 훨씬 맛나다고 했다.

수업을 하면서 나는 눈가가 자꾸 뿌얘졌다.
목울대까지 차오른 학교 못다닌 서러움을 언제 풀어야 할까.
가계도를 그리고 생물학적 가족사를 풀어낼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남의 집 살이”를 했다는 사람이 다섯 명 정도 되었고 “애보개” 하느라 자기 집에서도 살림살이를 했던 사람도 서넛이었다.

“글만 쓰면 눈물이 나.”
어쩌면 그건 글의 내용이나 지나온 세월에 묻힌 많은 이야기와 동시에, 한 글자 두 글자 꾹꾹 눌러 적으며 “내 이야기”를 써보는 것에 대한 애닮픔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2019. 6. 10.

[생애사쓰기]성수종합사회복지관 수업을 시작하며

내일부터 성수종합사회복지관에서 초등문해교육을 마친 어르신들과 생애사쓰기 수업을 시작한다.
초등문해교육을 마친 분들과의 수업은 처음이라, PPT를 손 보다가 접었다. 대신 다음과 같은 프린트물을 만들었다.
<나에게 보내는 편지>는 복지관에서 붙인 프로그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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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보내는 편지>> 수업에 함께 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글쓰는 사람 이하나라고 합니다.
앞으로 열 번, 여러분과 만나게 됩니다.

저는 2013년부터 어르신들 뿐 아니라, 중년층, 장애인가족들과 함께 생애사쓰기 수업을 해왔습니다. 생애사라는 것은 나의 삶을 돌아보는 역사를 뜻합니다. 이 수업을 할 때마다 많은 분들이 울고 웃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한 순간도 어렵지 않은 날들이 없었고 쉽게 지나간 시절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생을 열심히 살았는데 이룬 게 없다.”
“내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다.”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모두 허무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한 성공한 삶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가난은 왜 부끄러웠을까?
우리는 역사에서 늘 비껴나 있었을까?

우리 모두는 열심히, 정직하게 살았다고 믿습니다.
특히 자기 삶을 쓰겠다고 모이시는 분들은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 매 순간을 꽃을 키우듯 일궈오신 분들이었습니다. 이제 열 번의 수업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우리 삶의 아름다운 고갱이들을 캐내 보겠습니다. 생애사쓰기 수업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19.6.3.

[생애사쓰기]가난이 부끄러워서

“노조활동 한 적 없어요. 어용이었어요.”

수요일 생애사쓰기에 참여한 60대 여성의 말이다. 써온 목차에 “노조활동”이라 써 있어서 무슨 내용인지 물었을 때였다.

“무슨 노조를 했겠어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일자리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나는 바닷가에서 자랐어요. 재첩 따고 다시마 걷으면서 살았어요. 그게 너무 고되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공장이 얼마나 좋았는데요. 앉아서 손가락만 까딱까딱하면 돈이 나오는데요. 왜 노조를 합니까. 짤리면 방법이 없어요. 돈 벌 데가 없는데요. 거기 사무실 가면 회의한다고 빵도 주고 음료수도 줘요. 그냥 앉아있다가 오는 거예요. 쉬고 좋잖아요? 그렇게 지냈어요. 어용노조하면서. “

이 사람의 글은 서늘하다.
세상을 뒤에서 바라보는 습관이 묻어났다. 한 발 뒤에서, 언제나 객관화해야 한다는 삶의 강박이 있었다. 그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혀 온 흔적이다.

… 선생님, 이렇게, 누구 편을 들어서 같이 화내주고, 불합리하지만 내 사람이라 편들고, 뭐 그런 거 잘 못하시죠?

이 수업의 수강생들은 자꾸 나보고 점쟁이같다고 한다. “어머 다 들켰네.”라는 게 이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내 질문을 받은, 재첩 따는 게 힘들었다는 그 분은
“맞아요. 저는 끊임없이 저 자신을 담금질하며 살았어요. 그래서, 얼마 전에 아들에게 크게 혼이 났네요. 제가 편을 안 들어줬어요. 엄마는 왜 매번 그런 식이냐고. 아주 그냥.. 아주 크게 혼쭐이 났어요. 안 그러려고 노력해요. 잘 안되네요.”

네, 선생님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요. 저도 좀 그런 편이거든요.

나는 수업을 마무리하며 김은화 씨의 책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의 표지 뒷 면을 읽어내려갔다.

“이건 책을 만들 때 투자한 사람들에게 먼저 보내주는 건데요. 음.. 이런 내용입니다.
공장노동자부터 요양보호사까지, 40년간 가족을 먹여 살린 어머니의 삶을 딸이 인터뷰하다, 라고 써 있어요. 그런 내용이고요. 제가 좀 읽어볼게요.

‘엄마는 마치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새벽 6시면 일어나 할아버지 밥상부터 오빠 도시락까지 하루 열 끼를 챙겼다. 아침 9시에 집 앞의 물류 회사로 출근, 저녁 6시에 돌아오면 밥 먹고 설거지하느라 바빴고, 새벽에는 근육통으로 끙끙 앓았다. 주말에는 빨래하고 장 보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런 엄마가 육십을 넘겨 말했다. 자기는 인생에서 이룬 게 없다고. 도대체 엄마의 노동은 무엇이었을까? ‘ “

재첩이 지겨웠던 그 분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모두들, 지금은 평촌에 집 한 채씩 가지고 있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글에서 “가난의 부끄러움”을 매번 느꼈다.

이날은 내가 질문을 했다.

“그런데요. 가난이, 왜 부끄럽죠?
우리는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몇 주째, 선생님들이 써 오신 글을 보면 공통된 게 있는데요, 가난이 부끄러웠다. 가난해서 부끄러웠다, 거든요. 근데,이 가난이, 누구를 속이거나 남의 것을 훔치거나, 내가 도박이나 술에 빠져 가족들이 일궈놓은 것을 하루 아침에 날렸거나, 그래서 생긴 가난이 아니잖아요? 어린 데도 일을 했고, 모든 식구가 나가서 일했는데도 가난했던 거잖아요?
그러면, 음… 부끄럽기 보다 ‘화가 난다’면 모르겠는데, 대체 이게 왜 부끄럽죠? 우리는 왜, 언제부터,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했을까요? 왜죠?

저도 가난했을 때가 있었는데요.
저는 화가 났거든요. 선택에 제한을 받으니까.
부끄럽진 않았어요. 어쩌라고, 열심히 하는데. 하루종일 일을 하는데도 가난한걸.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 때문에 가난한데 어쩌라고. 그런 마음이었거든요.”

부끄러울 수도 있지.
굳이 내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 부끄러움이 죄책감이 되거나,자기 삶을 비하하는 일이 되지 않길 바라서였다.

눈물을 싹 닫고 일어선 재첩 이야기의 그 분은 서*이 씨. 글 뭉치를 나에게 내밀며 원고를 좀 봐달라고 했다.

이 수업의 내 강사비는 두 시간에 7만원.
담당자에게는 첨삭지도를 절대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어쩌겠는가.
서*이 씨의 이야기는 안 읽어볼 수가 없는 걸.

*
수업 전후 준비와 지도에 10시간이 넘게 드는 이 수업은 평촌도서관에서 주관한다. 안양시 평생교육원 기준으로 강사비를 책정하며, 경력과 저서에 무관하게 시간당 30,000원으로 책정했다. 내가 초등학교 수업보다 강사비가 형편없다 했더니 담당자는 시간당 30,000원인데 그보다 높지 않냐며 매우 당당하게 말했다.

동화로 쓰는 생애사 – 9월 4일의 기록

“나 고등학교 때” + 화난 얼굴 행복한 얼굴
수업 10분전, 대부분의 학우들은 그 정도 시간에 들어온다. 담당 복지사도 10분 전에 와서 오늘 결석자를 알려준다. 복지사 선생님과 한 청년이 같이 들어왔다. 건강하고 잘 생긴 청년이다. 자원봉사 선생님이라고 복지사샘이 알려주니 갑자기 교실에 환호성이 터졌다. 20대로 보이는 청년이 쑥스럽게 웃으며 자리에 앉자마자 갑자기 상민 씨가 일어나서 자기 소개를 하고 싶다고 했다. 편한대로 해도 된댔더니 춤으로 자기 소개를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휴대폰을 열어서 승민 씨가 원하는 노래를 틀어줬다. 씨스타의 Ma Boy라는 노래였다. 승민 씨의 춤은 동작이 조밀하지 않다. 전체적인 동작을 크게 확장하여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데 미세한 움직임은 잘 표현하지 못해도 충분히 흥이 났다는 것을 알릴 수 있다. 오히려 육감적인 동작을 표현하지 않아서 보는 나도 덜 쑥스러웠다. 승민 씨가 춤을 추고 나자 수정 씨도 춤으로 자기 소개를 하겠다고 나섰다. 수영 씨가 자기 노래를 부르고, 채영 씨는 어린이 찬양인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라는 노래를 불렀다. 혜은 씨는 다들 노래를 한 소절씩 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내가 혜은 씨도 노래 하겠냐고 물었더니 가스펠 곡 하나를 골라서 말해주었다. 나는 유투브와 음악 스트리밍 앱을 번갈아 열어가며 노래를 틀었다.
수영 씨가 작곡한 곡중에 “봄바람”이라는 곡이 있는데 나는 이 곡이 참 좋다. 재능 있는 누군가 수영 씨의 곡을 유명하게 만들어주면 좋겠는데 그게 또 좋은 일일까 싶기도 하고. 아무튼 여기 저기 알려보고 있다.
새로 온 자원봉사 청년에게 자기 소개를 하겠다는 의미는 채영 씨 차례에서 무색해졌다. 누군가를 위한 소개가 아니라 장기자랑을 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면 어떤가. 글 쓰기 시간이라고 글만 써야 하는 건 아니다. 노래도 괜찮고 그림도 괜찮다. 울고 웃으며 수다를 떨며 한 시간을 보내도 상관없다. 생애사 쓰기의 의미를 나는 자기 표현하기라고 본다.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글쓰기로 넘어가기 위해선 마음의 고갱이를 깊이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게다가 여러 명이 같이 한다면 서로를 표현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학우들이 춤으로 노래로 자기 표현을 하는 걸 보니 흐뭇했다.
지난 주에 썼던 글은 중학교때 이야기, 오늘은 고등학교때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했다. 다른 생애사쓰기는 생애주기별로 하나씩 훑어 나가지만 여기는 이야기의 연속성을 만들어내는 게 약간 어려워서 단편적으로 끊어서 진행한다. 옛 기억을 꺼내는 것에 능숙하지 못한 면이 있다. 비장애인들이나 언어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자기 기억을 재구성해 이미 스토리로 만들어 머릿속에 저장해둔다. 수시로 그 에피소드를 꺼내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주목을 끄는데 익숙하다. 인터뷰를 많이 해 본 사람들이 가진 특성이 이런 것인데 자기 서사가 확실해 오히려 그 안에서 한계가 생기는 경우다. 여기서 한 얘기를 다른 데 가서도 하기 때문에 우물처럼 고여버린 서사가 있다. 그 틀을 깨는 질문을 던지면 당황하고 그럴 때 자기 세계의 균열이 일어나는데 어떤 이들은 균열을 두려워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진지하게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기 위한 고민을 하기도 한다.
자폐와 지적장애의 특성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어렵지만 여기도 분명 자기 서사가 있다. 고정된 서사를 깨는데 비장애보다 어려운 면이 있다. 자폐가 있는 학우들은 자기 틀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고 내가 그 틀을 깨려고 망치를 들고 덤빌 일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다른 흐름을 타는 정도면 충분하다. 수영 씨가 바로 그런 케이스인데 평소에 해보지 않은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최선규 아나운서나 90살이 되어도 더 멋진 노래를 만들거에요, 최선규 아나운서와 듀엣을 할거예요. 라는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이다. 은혜 씨는 수현 씨와 다른 서사를 보이는데 은혜 씨의 서사는 다 독립적이다. 본인이 겪었던 불쾌한 정서가 모든 서사를 관통한다. 반짝이는 흰 바지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
학우들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혜은 씨도 비슷하다. 각자 일종의 테마를 가진 셈인데 혜은 씨는 “기분이 좋아 방긋방긋 웃어.”, “기분이 안 좋아 아침에 울었어.”가 자신의 테마다. 매번 이 문장이 들어가고 아마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다고 추측할 뿐이다. 혜은 씨에게는 불안이 느껴진다. 세상만물이 끊임없이 작동하고 움직이는 것에 대한 불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모든 것들이 쉴 새없이 변화한다는 것은.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나 역시 쉬지 않고 움직이는 건 아닐까. 작동하기 위해서. 지구가 뱅글뱅글 돈다는 것 자체만으로 인간은 불안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갈 수 밖에 없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기현 씨는 자원봉사선생님이 딱 붙어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이어나가게 도우니 긴 글을 쓸 수 있었다. 계속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 그랬냐고 추궁하는 것이 아니고. 자원봉사자들은 대부분 사회복지학과 전공학생이거나 자원봉사를 오래 해 본 청년들인데 숙달된 경험이 있어서 나도 많이 배운다. 자원봉사자들도 사실 글쓰기 교육이 필요한 경우가 보이긴 하지만, 타인의 마음의 문을 열어 열쇠 하나씩 꺼내는 것 같은 작업은 능숙하게 잘 해낸다. 비장애인 생애사 쓰기에도 이런 역할을 서로 해 보는 게 괜찮을 것 같다.
승민 씨는 요즘 모든 글의 마무리에 “사랑해”를 넣는다. 친구들아 사랑해, 동진아 사랑해, 우리 좋은 친구 되자, 은혜언니 사랑해. 사랑이 넘치는 승민 씨는 오늘도 열심히 글을 쓰려고 최선을 다한다.
수정 씨가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을 좋아한다고 적었다. 청년들이 왜 내 시대의 대중문화를 잘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부모님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부모님들은 아마 나보다 10살 정도 많을텐데, 수영 씨만 해도 홍학표, 장철웅, 최선규 아나운서를 말하고 혜은 씨는 자꾸 김병세 이야기를 한다. 지금도 활동하는 연예인과 방송인들이지만 9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이들이다. 어디서 봤냐고 물으면 TV에서 봤다고 대답을 하는데 누군가 90년대 취향을 가진 사람이 집안에서 TV를 틀어놨을 것이고 어릴 때부터 그 문화에 익숙하게 파고들었다는 이야기다. 지금 시대의 대중문화는 아이돌 음악에 집중되어 있다. 또래의 비장애인에 비해 20년전 대중문화에 모두 익숙해져 있는 게 특이하다. 나는 기억하는 이들이지만 20대 후반의 미술선생님은 잘 모를 이야기들인데 스물 네 살의 수 씨가 탤런트 홍학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웃음이 나올 뿐.
이날은 지난 주에 이어서 얼굴 그리기의 채색을 했다. 얼굴을 그려서 종이에 반절만 붙인다. 떨어져 있는 종이를 넘기면 얼굴이 두 개가 되는데 기분 좋을 때의 내 표정과 기분 나쁠 때의 내 표정을 그리고 색으로 표현했다. 은혜 씨는 기차와 전철을 탈 때 행복했다는 걸 표현하며 행복하면 얼굴이 초록색이 되고 화가 나면 주황색이 된다고 했다. 신종인플루엔자 주사를 맞을 때 기분이 나빴다고 하는데 지난 주에도 신종인플루엔자 주사 얘기를 했다. 무척 아팠던 모양이다. 수영 씨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그렸는데 “컵라면만 먹고 싸우고” 라는 말을 했다. 중고등학교때 음악학원 다닐 때 이야기인 것 같은데 학원에서 받은 교육이 좀 혹독했던 모양이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음악교육을 받다가 고등학교 졸업때쯤 그만두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수정 씨는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했는데 “미안하구나 얘야.”라는 할머니의 말을 말풍선에 그려 넣었다. 자기 얼굴에는 “할머니 가지마”라는 말을 적었다. 20대 쯤 되면 대부분 아무리 슬펐던 일이라도 자기 검열에 걸려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정 씨는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감정을 잘 표현한다.
승민 씨는 화가 나면 초록색, 칭찬을 받으면 하늘색이 된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반장이 뭐라고 했던 걸 기억해서 말했는데 행복한 건 “선”, 불쾌한 건 “악”이라고 말했다. 이분법과 대립은 가장 쉬운 학습법이라는 얘기가 떠올랐다.
혜은 씨는 화나면 보라색이 되고 기분이 좋으면 연두색인데, 연두색은 메로나 색깔이다. 혜은 씨는 대부분의 그림에 메로나 색깔인 연두색을 주로 칠한다. 화가 난 얼굴에 보라색을 칠하고 “엄마 혼나” 라고 적었다. 혜은 씨는 조사를 많이 쓰지 않는다.
채영 씨는 기분이 좋으면 살색, 화가 나면 까만색. 기현 씨는 재밌으면 살색, 화가 나면 파란 색이 된다. AOA에 초아가 탈퇴해서 이제 AOA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발달장애인들이 파란 색에 집착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그 역시도 낭설인 것 같다. 세상엔 얼마나 많은 낭설이 있나. 익숙하지 않고 낯선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쉽게 일반론을 찾아내려고 한다. 다양성을 이해한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어떤 규칙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 사실을 구겨넣으려는 이분법적 사고는 세상을 편협하게 만든다. 자폐는 세상밖으로 나가기 어렵고 자기만의 세상에 산다고들 말한다. 과연 자폐자만 그럴까. 비장애라는 사람들 중에 자폐보다 더 편협하고 더 좁은 자기 만의 세상에 스스로를 가두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을까.
2018년 9월 4일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