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노랑의 미로 – 이문영

서울역 뒤에 동자동이라는 곳이 있다. 그 곳에서 2년 반을 살았다. 거기 살았을 때의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여러 번 했고, 작은책에 연재한 분량에도 있어서, 더 이야기하는 건 지루한 일이 될 것이다.

이문영이라는 한겨레 기자가 있다.
몇 년전에 가난의 경로라는 시리즈물을 토요판에 연재했다. 토요일 아침마다 신문을 기다렸다. 그리고 공유하고 싶어서 한겨레 페이스북 계정을 오전 내내 들락거렸다. 문영의 글은 유난히 늦게 인터넷에 업로드 되곤 했다.

그 이문영이,
<웅크린 말들>에 이어 가난의 경로에서 출발한, 동자동 쪽방촌 건물의 사람들의 5년간의 삶을 추적해 두툼한 책으로 묶어냈다.
신랄한 르뽀가 힘든 사람들은, 아마 다 읽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이문영이 어떻게 기자생활을 지속하는지 잘 모르겠을 만큼, 한 문장 한 문장, 진을 빼며 쓰는 것 같다.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읽으면서 쓰는 사람의 땀방울이 느껴지는 글은 딱히 많지 않다.

이문영이 이 이야기를 기획한 건 아마 그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사실상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다는 것.
멀리 갈 수 없다는 것.
동자동 쪽방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기껏 가봤자 몇 백미터라는 것. 그리고 죽어야 그 가난에서 벗어난다는 것.

책을 읽으며 내내 피곤하고 괴로웠던 것은
내가 90년대 후반의 동자동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살던 고시원의 옆 집에는 앵벌이가족이 살았고, 내가 살던 고시원의 앞 집에는 포장마차를 하는 부부와 소매치기 아들이 살았다. 고시원을 오르는 길목에 알록달록한 이불을 구해오는 노숙자들이 자리 잡고 살았고, 벽산빌딩 앞에는 지린내가 진동했으며 아침 9시, 골목길엔 초록색 소주병이 굴러다녔다.
<노랑의 미로>의 배경이 되는 그 쪽방건물은 내가 살던 고시원과 약 300m 가량 떨어져 있다. 내가 살던 장학고시원은 지금은 근사한 놀이터가 되었다.

나는 그곳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20대 초반을 보냈다. 그 이후에도, 샤워를 할 때마다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껴야 하는 반지하에서도, 다시는 지상으로 올라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나는 자칫하면, 다시 고시원으로 쪽방으로 지하로 떠밀려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다. 어쩌면 가난에 대한 공포가 나의 근원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소중한 기록을 읽었다.
디자인과 편집도 정성스럽다. 가난의 경로를 추적하느라 쪽수를 넣은 본문을 여러 번 수정했을 것이다. 이 무거운 이야기를 기록해 준 이문영기자와, 오월의 봄에 진심으로 고맙다.

<노랑의 미로> 이문영 지음 / 오월의 봄 펴냄

갈고 팔고 버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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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의 키가 작은 남자는 남씨였던가, 그 사람은 화가라고 했다. 그는 키가 작으니, 창문 없는 고시원 방이 작지 않을 거 같았다. 키 작은 사람을 부러워하는 일도 생긴다. 유화에 쓰는 특유의 역한 기름내 풍기며 그가 그리는 그림을 7호실 오 씨는 “나까마 그림”이라고 불렀다. 그는 두어 달 고시원에 있다가 떠난 것 같다. 낮에는 막노동을 했고 가끔 일이 없는 날, 그러니까 비가 오거나, 노동을 팔지 못하고 봉고차에 실려 가지 못한 그런 날, 그는 고시원 방에서 물감과 테라핀 냄새를 풍겨가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연장이 들었을 거 같지도 않은 반달모양의 가방을 메고 새벽에 고시원을 나섰다. 남대문 경찰서를 지나 퇴계로쪽 남대문 시장 앞 육교 아래 가면 드럼통에 군불을 땐 사내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인력시장이 짧게 형성되면 거기 모인 사내들은 차례도 순번도 맥락도 이유도 없이, 자기 자신을 가장 늠름하게 내보이려 애쓰다가 봉고차에 실려 품을 팔러 갔다. 하루를 먹고 살 수 없는 날, 나까마 화가는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어디론가 또 팔려간다 했다.
 
품을 팔고, 그림을 팔고, 생명을 박박 갈아 하루를 버티면 또 다시 하루가 왔다.
우물에 빠져 둔탁한 머리통이 그 바닥에 닿을 때, 운 좋게 다른 세상에 펼쳐지면 좋겠다고, 그가 이사나가는 짐을 보며 생각했다.
 
1995년쯤의 이야기와 2005년쯤의 사진을 가지고
2017년에 쓴다.
사진은 용산구 동자동.

커피 한 잔 하러 와

멀리서 날아온 친한 동생을 만나기 위해 남산에 있는 모호텔에 갔다. 비행기 도착하고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그런 거 없이 그냥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방에 들어가 차 한 잔을 마시는데 그 비싸고 유명한 호텔방이 얼마나 클래식하던지.. 1980년쯤 되는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남산타워로 수십년을 버티는 호텔임이 분명했다.
걸어서 남산을 돌아 명동까지 내려가 아주 오랜만에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노점을 기웃거리며 뭔가를 주섬주섬 사기도 했다. 각자의 기억에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는 커피집에 들어가 커피도 한 잔 마셨다. 음악이 사라진 명동에서 우리가 다시 잡은 세월은 아마 12년이 넘었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온 동생은 만날 사람이 있어 거기서 헤어지고 나는 가방을 호텔 로비에 맡겨두었기 때문에 다시 택시를 타고 호텔로 올라갔다. 가방을 찾으면서 투숙객이 아니라 하니 찾아가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달라고 한다. 이름을 적고 전화번호를 적은 다음 주차권을 내밀어 동생방 호수로 얹어달라고 했다. 직원이 다섯 시간 무료주차 도장을 쾅 찍어주었다. 돌아서서 묵직해진 가방을 들고 주차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방향을 찾아보고 있는데 누가 어정쩡한 자리에서 나를 자꾸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정복을 입은 호텔 직원인데, 아까 가방을 찾는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고 회전문 앞에 서 있을 일은 없는데 가방 찾는 데스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나를 보고 있으니 뭔가 이상해보였다. 가만히 쳐다보니 어디선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최근 들어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이름도 자꾸 잊는 통에 한 10초 정도, 정말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연두색 등산점퍼에 주황색 가방을 거의 둘러메다시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 사람은, 1995년부터 1997년경까지 내가 살던 서울역 뒤 동자동의 장학고시원에서 그 시절을 같이 보낸 사람이었다. 나보다 늦게 고시원에 들어와 나보다 일찍 고시원을 떠났다. 그 때 그의 나이는 스물 여덟 정도 되었고, 고시원을 나가 고시원 바로 앞에 쪽방을 하나 얻어 살다가 차근차근 돈을 모아 월세방으로 나갔다는 것까지만 안다. 곱상한 얼굴이고 피부가 참 흰 사람이었데 그 당시에 그 호텔에서 벨보이를 하고 있었다.
“어머. 웬일이야. 세상에 아직도 여기에 있어?” 나는 반갑게 그의 팔을 툭 치며 인사를 했다.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서로 묻는 것은 뻔했다. 잘 살지? 결혼은 했지? 애 몇 살이야? 와 우리 몇 년만이지? 한 15년 됐나? 그래 15년 된 거 같다고 이야기하고 돌아나오니 15년도 더 된 일이었다.
“우리는 여기 오래 있어. 25년 30년까지도 근속을 하니까. 오래된 사람들은 잘 안나가.”
평덕이오빠. 전라도 어디메에서 올라왔었다. 느릿하고 구수한 사투리를 쓰던 그는 말투는 조금 빨라졌고 머리숱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가 본 나는 피부가 매우 거칠어졌고 살이 많이 쪘겠지. 알아보기 어려웠을거다. 내가 가방을 찾으며 이름을 적지 않았으면 그는 알아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여기 있으니까, 커피 마시러 와.”
오빠가 그렇게 말했다. 반갑다고 하면서 또 보자고 하고 돌아나왔지만 나는 그에게 가방에 있는 명함을 건네지도 않았고 전화번호를 주고 받지도 않았다.

그런 시절이 있다. 나에게는.
내가 힘껏 밀며 버티는 거대한 벽. 고통과 가난이 가득한 영혼들이 아우성치며 나를 잡아채가려고 하는 거대한 검은 벽. 무너지면 절대 안된다고 내 등뒤로 힘껏 밀어대며 사람들 앞에서 하하호호 웃고 있는 거대한 벽. 그 시절의 사람들을 만나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그 벽이 다시 내 등을 후려치며 와르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벽.

많이들, 변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며 사는데 나 혼자 너무 멀리 도망온 것 같은 느낌. 죄책감은 아닌데, 내가 누군가를 배신한 것만 같고, 내가 너무 동떨어져 온 것 같고, 어딘가 모르게 빚을 진 것 같은 느낌.

말하자면, 가만히 서 있는 기차에서 혼자 내려 뚜벅뚜벅 걸었다가 운 좋게 누군가의 승용차에 무임승차를 한 것 같은 느낌. 절대로 나는 무임승차 하며 살지 않았는데 자꾸만 그렇게 느껴지는 불편함. 그리고, 내가 앞서 달려왔다는, 내가 남들보다 무언가를 더 얻었다는 오만함도 외면할 수 없는 불편함. 더불어 밀려오는 불길함. 그 벽이 무너질까봐. 다시 그 때로 돌아갈까봐.

6층이나 되는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호텔뒤의 골목으로 우회전과 좌회전을 해서 맞딱뜨린 곳은 다시 그 서울역, 벽산빌딩 앞이었다.
아무리 돌고 돌아도, 과거는 다시 오고 또 재현되고 골목어귀에 숨어 있다가 어깨를 툭툭 친다. 낙엽 하나 떨어지는 무게에 놀라 죽을 수도 있고, 그것 참 곱다 하며 책갈피에 끼울 수도 있을텐데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 호텔에 전화를 하여, 오늘 그 사람이 근무하는 날이냐 묻고 커피 한 잔 하러 가겠다고 그래서 “추억”이라는 걸 나눴을 때 내 벽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2014. 10. 25. 141025_iphone5s 1093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그 해 여름, 아르바이트를 해서 탄 첫 월급으로 리바이스 청바지를 샀다. 헐렁하고 여기저기가 찢어진 바지를 85,000원이나 줬다. 내 손으로 돈을 받으면 꼭 하고 싶었던 일이 리바이스 청바지였다. 리바이스 청바지는 광활한 대지를 가르는 카우보이와 개척자의 유니폼이었다. 채찍을 휘두르며 땅따먹기를 하는 서부의 폭력성 따위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살아남아야하는 절실함은 폭력 앞에 눈을 감기 좋다. 헐렁한 리바이스 청바지에는 딱 달라붙는 민소매티가 제격이었다. 나는 그 해 내내 소매가 없고, 매우 짧아서 배꼽이 드러나는 회색 티를 입었다. 물론 다른 옷을 입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회색 배꼽티를 입고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명동거리에 서면, ‘활보’할 수 있었다. 현실은 시궁창이었으나 쏟아지는 시선은 쾌감으로 꽂혔다. 거리에 붉은 햇빛이 길게 늘어지면 맥주 썩은 내가 진동하는 300평짜리 대형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서빙아르바이트였다. 오후 6시까지 출근하여 12시까지 쉴 새 없이 맥주와 안주를 날랐다. 5000cc짜리 맥주통을 한 손에 들고 330cc짜리 맥주컵 6개를 다른 한 손에 들었다. 3000cc짜리 맥주피처는 한 손에 든 채 330cc짜리 맥주컵을 여섯 개까지 같이 끼워들 수 있었다. 여섯 개다. 내 손이 더 컸더라면 한 손에 여덟 개까지 끼울 수 있었겠지만 내 손은 여섯 개가 한계였다. 다른 한 손엔 낙지볶음과 골뱅이무침을 같이 들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나 외에 다른 알바생들은 3000짜리 맥주피처를 들면 한 손에는 맥주컵만 들었다. 한 번에 많은 일을 하기 위해 나는 기술을 익혔고 머리를 굴렸다. 다리가 안 보이도록 뛰어다닌다 해도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성취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맥주잔과 맥주피처, 안주를 동시에 들고 300평짜리 호프집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건너가는 일. 대학은 떨어졌고, 재수할 돈은 없었다. 예비합격자 통지서는 내 손으로 찢어버렸으며 엄마가 사는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는 동생은 기숙사에서 그림을 그리며 매일 눈두덩에 풀로 쌍꺼풀을 그렸다. 새아버지는 간간히 집에 들어왔고 엄마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스스로 벌어 재수를 하겠다는 핑계를 그럴싸하게 둘러댄 나는 그 무렵 서울역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누우면 끝나는 자기만의 방. 벽의 끝에 독서실 책상이 있고, 그 벽의 다른 끝엔 문이 있었다. 책상아래 머리를 집어넣고 자는 일은 영원히 산 채로 나올 수 없는 관 속에 들어가는 일 같아서 모두들 머리를 문에 대고 잤다. 새벽녘 화장실을 가기 위해 가냘픈 베니어합판에 조각조각 둘러붙인 문이라는 것을 열고 나오면 복도엔 여자들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문틈을 뚫고 나와 늘어져 있었다. 환기를 위해 문은 약간 들뜨게 되어 있었다. 조밀하게 밀어붙인다 해도 베니어합판은 견고한 틈새를 만들 수 없는 자재니까. 책을 넘기는 소리, 삐삐를 확인하는 소리까지 들리는 고시원에서 한 숨을 쉬거나 재채기를 하는 일은 쉽게 용납되었다. 마른기침이 터져 나오면 밖으로 나가야 했다.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면 복도엔 폐혈관 곳곳에 박힌 니코틴 냄새가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단 하나 좋은 것은 냉난방이 잘 된다는 것이었다. 여름엔 복도에 놓인 에어컨이 강력한 바람을 내뿜어줬고, 겨울엔 시멘트 바닥위에 홑겹으로 깔린 얇은 비닐 장판으로 찜질을 할 수 있는 보일러도 뜨끈했다. 서울역 고시원의 정확한 주소지는 용산구 동자동이었다. 서울역사가 새로 생기기 전이니 서울역 광장엔 밤마다 포장마차들이 국수를 말아 팔았다. 그 포장마차의 주인들이 고시원 골목에 모여 살았다. 사람들의 과거를 굳이 들추고 싶지 않았으나 앞집에서 부부싸움을 할 때는 그 부부가 혼인관계가 아니며, 여자의 아들은 소매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옆집에 거대한 냉장고가 들어올 때는 얼마 전 지하철에서 마주친 반짇고리를 파는 아줌마가 거기 산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아침 10시부터 소주병이 굴러다니는 동자동 골목의 시작엔 벽산빌딩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든 청소부가 있다는 벽산빌딩의 벽에는 노숙자들이 갈겨놓은 오줌 지린내가 진동했고 가을이 되면 골목마다 알록달록한 이불들이 깔렸다. 때로는 벽산빌딩쪽이 아닌 반대편으로 나가기도 했다. 울퉁불퉁한 계단을 내려가면 엄지만화방이 있었다. 붉은 바탕에 노란색으로 엄지, 라고 쓰인 서너 평짜리 만화방엔 재수생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들이 드글드글했고 엄지만화방에서 고개를 들면 어쩌다 알게 된 계집애에게 돈을 꿔주고 돌려받지 못한 내가 돈 갚으라고 악다구니를 쓰며 삐삐 메시지를 남기던 공중전화박스가 있었다. 공중전화박스는 대일학원의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나도 그 학원에서 수학강의를 들었다. 대일학원 앞에는 매일 300원만 달라는 아저씨와 담배 두 개비만 달라고 하는 사내도 매일 서성였다. 한 때 힘깨나 썼다는 조폭출신 총각은 내리막길의 끝에서 어머니와 떡볶이를 만들어 팔았다. 창문달린 고시원 끝방을 쓰던 목사아들 정용이녀석은 생활비가 떨어지면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떡볶이 집에 들어가 아양을 떨며 하루 이틀 일을 하고 담뱃값을 벌어내곤 했다.

한 번도 차가 끊기는 적이 없을 서울역 앞길을 걸어 남대문 경찰서를 지나 대우빌딩을 지나 남대문 시장의 양갈래 길을 골고루 건너가며 명동으로 갔다. 고시원으로 옮기는 사이 해가 지기 전에 출근을 하여 홀을 청소했다. 4시까지 출근하면 두 시간을 더 일할 수 있고, 두 시간을 더 일하면 시간당 2500원씩, 매일 5천원을 더 벌 수 있었다. 그 호프집은 왕년에 대한민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가수가 운영하던 곳이고 내가 일할 때는 연극영화를 전공한 사람이 사장으로 있었다. 매일 홀이 미어터지게 들어차는 호프집에 얼마나 많은 이권이 걸렸는지 스물 한 살짜리가 알 바는 아니다. 이름은 영스타였다. 촌스럽기도 하지.
저녁 5시 반부터 30분씩, 그리고 30분 쉬는 시간 간격을 두고 통기타 가수들의 공연이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과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 기타를 들고 노래를 했다. TV에 나오던 사람도 있었고, 라디오에만 나오던 사람도 있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디제이가 얼굴과 전혀 안 어울리는 근사한 목소리로 멘트를 날렸다. 넥타이를 맨 남자들이 환호성을 외치며 신나는 노래에 맞춰 덩실덩실 일어나서 춤도 추었다. 거친 목소리로 노래를 하던 가수들은 기타 하나를 들고 맥주잔을 든 술 취한 사람들을 뒤집었다 엎었다.

그 날은 4시에 나와 같이 출근해 100개쯤 되는 테이블과 400개쯤 되는 의자를 같이 닦는 두 살 위의 아르바이트생과 벽에 기대 마감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9시에 무대에 올랐던 밴드의 리더는 그 날 매니저까지 앉혀 놓고 늦도록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적당히 취한 그가 화장실을 가다가 벽에 기대어 당신들이 빨리 집에 가기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말했다.
“느그 오늘 우리 가게 가서 술 한 잔 하지 않을래?”
뚱뚱하고 변죽좋은 내 옆의 언니는 반색을 하며
“아저씨 가게가 어딘데요?” 라고 물었다.
“마포에, 서교호텔 뒤에 내가 오늘 가게 오픈이야. 단란주점을 하나 열었거든. 무대도 있다 아이가. 그냥 내 놀이턴데, 오픈날이니까 여기 식구들하고 다 같이 가서 회식이나 한 번 하자. 오늘은 내가 기분좋게! 한 잔 살꺼거든?!”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나란히 서 있던 알바생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손님이 몇 명 남지 않았고 평소에는 뭉기적거리던 알바들이 갑자기 잽싸게 움직여 순식간에 영업이 끝났다. 서교호텔이 어딘지도 모르던 나는 택시를 탄 여러 사람들과 부산 사투리를 억세게 쓰는 밴드리더가 차렸다는 단란주점으로 갔다. 무대가 있었고 칸막이만 되어 있는 낮은 소파들이 들어차 있었다. 손님은 없었고 술을 마시다가 예의 한국 사람들이 모이면 그렇게 되듯, 돌아가며 노래를 했다. 고등학교 때 중창단에서 2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노래를 했고, 중간에 성악레슨도 받아봤다. 노래를 한 곡 부르고, 술 취한 동료들의 박수를 받고 또 한 곡 노래를 끝내고 내려오자 가게 주인인 밴드리더가 나를 따로 불렀다.
“니 키보드 칠 줄 아나?”
“어릴 때 피아노 쳤는데요. 코드는 잡을 줄 알아요.”
“코드 잡을 줄 안다고?”
“예.”
“니 내일부터 무대 함 서볼래?”
“예?”
“우리 밴드에 그 노래하는 딸아 안있나. 갸가 오늘 갑자기 그만 두겠다고 하는기야. 내 그래서 아까 느그 매니저하고 한 참 그 얘기를 한기다. 갑자기 가스나가 그만 두겠다고 하면 내는 낼부터 으찌냐. 니 낼부터 내랑 무대 함 서볼래? 요새는 기계가 반주 다 한다. 엠알이라카거든. 다 된다. 키보드 코드만 잡고 흉내만 내면 된다. 함 해볼래? 니 쟁반 들고 맥주 나르는 거보다 수입은 훨 날끼다. 내 그보다는 훨씬 더 쳐주꾸마. 니 한 달에 얼마 받노?”
“4시부터 12시까지 해서 60만원 정도 되는데요..”
“우리가 요새는 업소를 세 군데 뛰거든? 한 군데 30만원씩 해서 내 90주께. 시간도 짧고 안 좋나? 해봐라 마. 이런 기회 쉽게 오는 거 아이다. 니 소리 참 좋다. 해라. 좋제? 어떻노?”

그 다음날 오후 2시까지 서교호텔 그 가게로 갔다. 소리를 맞춰보고 작년에 팔려나간 피아노와는 완전히 다른 야마하 키보드를 잡았다. 리더는 악보를 몇 개줬고, 오늘은 소리만 맞춰보자 했다. 당시 성행했던 라이브호프집에서 키보드를 치는 여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뻔했다. 우순실, 심수봉, 손현희, 흘러간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의 수상곡과 햇빛촌의 유리창엔 비, 그리고 박미경의 빠른 신곡들이 주를 이뤘다. 목을 아끼며 노래를 하기 위해 애썼지만 거친 소리를 내기 위해 담배를 빠르게 피워댔다.

하루 일과는 서교동 단란주점에서 시작되었다. 느지막이 모여 다같이, 때로는 나 혼자 키보드를 두들기며 연습을 하기도 했다. 리더의 그랜저를 타고 노원역에 도착해 개업한 지 얼마 안된 집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리더는 기타를 쳤는데 주법은 촌스러웠고, 목소리는 조용필 모창가수임이 선명했다. 아무래도 음악을 한다고 말하기도 곤란했고, 내가 뭘 배울 수 있을 지도 애매했다. 노원역에서 30분 무대를 마치고 바로 명동으로 이동했다. 내가 맥주를 나르던 그 집에서 매니저, 아르바이트생들과 인사를 하고 나는 무대로 올라갔다. 가장 손님이 많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종로에 가서 마지막 무대를 닫았다. 종로의 둘리호프는 라이브가수들에 대한 평가가 철저한 편이라 매니저가 자주 내 건반실력에 대해 타박을 했다. 리더는 매니저와 내가 직접 얘기하지 않게 했고 나름대로 보호해주는 차원이라고 여겼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던 풍경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해 여름,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었던 것처럼 느낀 것은 서교동까지 가는 길엔 버스를 탔는지, 택시를 탔는지 그 때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졌다. 어떤 남자가 우리 밴드가 가는 길에 어슬렁거렸고 가끔은 리더의 그랜저를 그 남자가 운전하기도 했다.

어느 저녁, 상계동의 일이 끊기고 난 다음이었던 것 같다. 아마 겨울의 시작이었을 거다. 고시원에서 어스름을 타고 미끄러지듯 명동에 들어섰다. 넘어가는 햇빛이 아닌 네온사인과 간판 불빛에 길어진 내 그림자를 보았던 기억은 그 날이 아닐 수도 있는데, 땅바닥 치고는 요염했던 보도블록에 깔린 내 그림자는 그 시절의 배경이다. 영스타에 들어서자 무대 위 내 옆에서 베이스기타를 치던 필리핀사람 미스터봉이 대기의자에 구부정한 허리로 앉아 있었다. 작은 키에 눈썹이 짙고 눈이 크던 매니저가 들어서는 나를 보고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업무에 충실하고 능청스럽지만 지저분하지 않은 사람이라 적잖이 신뢰하던 사람이다.
“연락 없었어?”
“누구요?”
“니네 리더.”
“없었는데요?”
매니저는 뒷짐을 지고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내 앞 순서인 쌍둥이 남자 듀오가 노래를 마치고 있었다.
매니저는 그들이 무대를 정리하는 것을 보고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날랐네.”
“예?”
“니네 리더. 돈 떼먹고 도망갔어.”

미스터봉은 집으로 갔다. 나는 혼자 빈 무대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매니저는 나에게 물었다.
“너 기타 칠 줄 알지?”
“잘 못 쳐요.”
“내일 다섯 시에 나와. 너 혼자서라도 올라가봐. 노래로 카바하면 될 거야.”

매니저의 배려로 그 무대에 이른 시간에 일주일 정도 섰다.
밴드가 차지했던 시간은 업소의 골든타임, 밤 9시였다. 그 시간에는 3인조 이상의 밴드가 서는 것이 규칙이었다. 가장 손님이 많은 시간, 흥겹고 시끄러운 소리가 필요했다. 매니저는 홍대에서 활동하던 5인조 재즈 밴드를 불러왔다. 나는 6시 타임을 채우고 그 자리에 앉아 5인조 재즈밴드의 노래를 들었다. 내가 있던 밴드와 차원이 달랐다. 내가 속했던 밴드는 마치, 아무도 찾지 않는 지방의 온천장에 어울리는 팀이었다면, 매니저가 새로 불러온 그 밴드는 바로 그 자리가 차고도 넘치는 팀이었다.
저런 팀에 들어갔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저런 사람들에게 배웠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며칠을 내가 딱히 할 일 없는 저녁시간에, 이미 공연을 끝낸 무명가수가 되어 그들의 연주를 들었다. 장난감 병정을 부른 키 작은 가수가 3천만 원짜리 수제 기타를 샀다며 나에게 보여줬다.

우리 밴드가 세 군데 업소에서 벌어들인 돈이 매달 천만 원이 넘고, 내가 아무리 적게 받아도 세 배는 더 받았어야 했다는 사실은 영스타의 사장이 알려줬다. 리더가 대형 행사를 준비하다 잠적했고, 수천만 원의 빚을 졌다는 것은 영스타의 매니저가 알려줬다.

길어진 그림자를 배경으로 기타를 메고 서울 시내를 헤맸다. 라이브호프라는 간판이 있는 곳에 무작정 들어가서 오디션 안 보냐고 물었다. 더러는 그 자리에서 오디션을 보기도 했고 더러는 자리가 찼다고 했으며 더러는 라이브를 더 이상 하지 못한다고 했다. 수유역에 한 군데 자리를 잡았다. 영스타에서 7시 공연을 하던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그 사람이 은평구에 한 군데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영스타를 다시 찾아갔다가 꾸준하지 못하고 들락날락거린다고 10시 공연 대선배에게 통박을 듣기도 했다.

남대문 시장에 연말 세일 행사가 있어서 노래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일자리를 소개해 준 것은 스크래치를 배우지 않아 디제이 생명이 곧 끝날 것이라고 말하던 대머리의 영스타 디제이였다. 나이 많은 디제이는 영스타의 일이 끝나면 남대문 대형상가에서 노래를 틀어줬다. 그의 작은 디제이박스에 앉아 시장에서 유통되는 대중음악의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해줬다. 무명가수가 유명해지는 과정에 시장 디제이의 역할도 만만치 않다고 강조했지만 자신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다.
나는 그의 작은 디제이박스에서 나와 남대문 한 복판의 의류종합상가 앞에 설치된 가설무대에서 노래를 했다. 12월 말이었다. 손가락이 곱았다. 추위로 얼어버린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숨을 뱉을 때마다 수증기가 뽀얗게 뿜어져 나왔다. 실수가 있어도 박수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30분에 10만 원짜리였다. 게다가 내가 거처하던 곳과도 가까워 택시비도 들지 않았다. 30분을 쉬는 동안 앞머리가 긴 아이들이 힙합바지를 입고 나와 얼어붙은 몸으로 춤을 췄다. 그 아이들이 쉬는 동안 나는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랐다. 2시쯤 되어 일당이 담긴 봉투를 들고 키보드를 어깨에 메고 아직도 밝은 불빛을 헤쳐 고시원으로 몸을 돌렸다. 내 등 뒤 조명에 길어진 내 그림자가 길바닥에 놓였다.
그 해 겨울, 남대문 행사가 끝나고 녹번동에 있는 지하 호프집에서 30분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30분 키보드를 치며 노래를 하고 1시간은 취객들의 노래자랑의 사회를 봤다. 영화의 OST를 불러서 이름을 알린 선배를 다른 업소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그림자가 길어지던 시간에 지하철에서 만났던 어느 선배는 얼마 전에 앨범을 냈다고 했다. 네가 막노동꾼이냐고 나무랐다. 노래하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굴면 안 된다고 했다. 음악을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했다. 제대로 따위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고, 나는 고작 스물 두 살이었다.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일주일을 굶을 수도 있었다. 내가 지하 호프집에서 취객들을 웃기며 사회를 보는 사이 동생은 기숙사에서 쫓겨났고 엄마의 집은 사라졌다. 고시원 창문달린 방에 처박힌 동생은 학교를 간다고 나갔다가 이제는 우리 집이 아닌 양주 산골짜기의 그 건물을 찾아가 하루 종일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다.
기타와 키보드를 누구나 쓸 수 있는 고시원 휴게실에 펼쳐놓았던 것은 더 이상 취객들 앞에서 노래하지 않을 때였다. 퇴근 후 고시원 식구들과 늦도록 술을 마시고 새벽엔 노래방에 가서 아무도 개의치 않고 엉망진창으로 노래를 불러댔다. 삐삐번호를 두어 번쯤 바꿨을 때 고시원에서 나와 이대앞 옥탑방으로 이사했다. 고시원에서 끄집어져 나온 나와 내 동생의 짐은 엄지만화방으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가득 찼다. 천장까지 꽉 맞게 쌓아올려 꺼내 볼 수 없었고 자다가 무너지면 바로 압사할 것 같던 책들과 엄마가 한 번도 쓰지 않은 딱지 붙은 코렐그릇이 담긴 아이스박스까지 모두 2.5톤 트럭에 실렸다. 명동에서부터 서울역까지 태양의 어스름에, 내 등 뒤 늘어선 번쩍이는 조명등에 길게 늘어졌던 그림자를 보고 걷지 않을 줄만 알았다. *‘아직도 해거름에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은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새벽이면 남몰래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길이 운명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숨 쉬는 순간마다 돈이 필요했고 벌 수 있었고 가장 빨리, 치욕적이지 않게 벌 수 있는 수단을 운 좋게 거머쥐었을 뿐.
영스타는 사라진 지 오래됐고 그 자리엔 건강식 샐러드바를 자랑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세월을 굽이돌아 아이를 안고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는 길엔 사보이호텔 뒷문을 지난다. 그 코너에 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어스름의 길이 놓여있다. 슬리퍼를 신고 기타를 들어다 주던 키만 크던 옛 애인의 발이 부끄러웠다.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갔던 것이다. 96년도에서 97년도쯤의 일이다.

2014년 6월 25일
이하나

*부분은 도종환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 글은 <이야기너머>문학치유강좌의 일환으로 적습니다.

그저 꿈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는 고3이 되는 꿈을 꾼다. 그 꿈속에서 나는 졸업을 하지 못해서 다시 학교를 다녀야 한다.
나보다 어린 아이들과 교복을 입고 노원구 월계동에 위치한 (갑자기 주가를 올리게 된 바로 그 지역) 그 학교로 돌아간다. 담임선생이 나를 아이들에게 소개한다. 이제는 아이들에게 언니라고 부르지 않아도 좋다고 얘기할 수 있는 나이는 지났다. 나는 때로 그 아이들의 담임보다 더 나이가 많기 때문이다.

새해 첫 날
갑자기 스무살 무렵의 여러가지 공기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잠이 들었다.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그저 나는 남들이 사는 이십대을 지내지 못했을 뿐이다.
매일 출근을 해야했고 더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더 구해야했고 한 달에 한 번씩 구치소에 면회를 가야 했다.

그런데 어제 꿈에는 난데없이 내가 살던 서울 용산구 동자동의 고시원이 나타났다. 빨래를 들고 세탁실 앞에 순서를 시다리고 있었다.
고시원의 낡아빠진, 혹은 낡아빠질 수밖에 없는 세탁기 앞에서 우리는 빨래를 줄을 세워 다른 사람의 빨래가 끝나길 기다렸고 축축한 빨래들을 창문이 없는 방에 널곤 했다.

냄새나는 냉장고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가스레인지가 있는 휴게실도 등장했다.

잠에서 깬 나는 내 마음 어디가 아픈가를 하루종일 생각했다.

시간이 가서 그렇다.
나이를 먹어가고 아이들이 자란다.
아이들은 자라면 떠난다.
내가 부모를 떠난 것처럼.

큰 아이는 성인식을 할 것이고 더 이상 인생이 버겹지 않은 날 술도 마실 것이다. 작은 놈은 어느 날 밥상머리에서 나에게 조숙한 잔소리를 해댈 것이다.

남편의 귀밑머리는 더 이상 하얗게 될 자리조차 남아있지 않다.
싱그럽던 스물 셋의 후배들이 서른을 넘겼다. 아이들이 엄마가 되고 시간은 지난하게 흘러간다.

삶이 지리멸렬하다고 불평할 시간따위도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분주하게 일상을 살아내야 하고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소원하며 버티고 있다.

그리하여
흙을 밟은 지 너무 오래된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모두가 잠든 한 밤에 궁색해지는 신체를 탓하면서도 깨어있는 것이다.

사람은 겪어야 할 일이나, 먹어야 할 음식이 정해져 있다는 글을 읽었다.

정말 나는 너무 오래 걷고 뛰고 서 있었다. 이제는 앉아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쉬고 싶다.

2012.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