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구역으로 가세요

노40대존 캠핑장이 뉴스소재가 되었다. 오늘자 JTBC뉴스였다. 업주는 “아무래도 40대 이상 고객들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많아서.”라고 하는 말을 듣고 혼자 킥킥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범죄율도 40대가 늘 제일 높다. (이건 몇 년전 포스팅을 한 번 한 적 있다.) 지명수배 전단도 잘 보면 항상 40대가 제일 많다.

뉴스는 노40대존에 이어 부산대 노교수존도 다뤘는데 그 역시 킥킥대고 웃을만했다. ‘다른 손님들을 불편하게 하니까’ 라는 게 그 이유였다.

처음 노키즈존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 차별과 배제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뿐이다. 아이를 데리고 매장에 방문하는 것은 매출은 적고 업주 입장에서 귀찮을 일이 많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치자. 그래 그렇다고 치자.

처음 특정 연령대를 배제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고 애 딸린 여성들이 “맘충”이 되어갔다. 이 사회에서 업장에 제일 민폐 끼치는 게 중년이상의 남성들인데 왜 “노아재존”은 없고 “노키즈존”만 있는가, 아무래도 구매력때문일거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가 만들어낼 매출액과 그 매출액에 상응하는 내 노동력의 가치만 생각한다면 차별과 혐오는 모든 곳에서 정당해진다. 허름한 옷을 입고 매장에 들어가니 쳐다도 보지 않더라, 는 경험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대놓고 “돈 없는 자 들어오지 말라”고 써 붙이는 정도는 아니었다.

80년대에 아들이 둘이거나, 아이가 둘 셋이면 집을 빌려주지 않는 임대업자가 있었다. 임대업은 자기 입맛대로 임차인을 고르려는 욕구가 강해서 요즘도 아예 “반려동물 안됨”, “싱글 여성만”, “혼자 사는 남자분 안됩니다.”라고 명시하는 경우도 늘어난다.

뉴스는 이어서 서울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을 인터뷰하며 한국은 연령대에 따라 즐기는 문화도 구분되어 있는 것 같다는 답변을 이끌어냈다. 20대는 헌팅포차, 30대는 감성주점, 중년은 나이트, 노년은 콜라텍이라는 거다. 안양만 해도 일번가는 10대, 범계는 2-30대, 평촌은 중년, 인덕원은 중년이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노키즈존을 그대로 두었더니 연령과 직업에 따라 배제하고 혐오하는 일이 익숙해졌다. 배제당하는 당사자인 나도 무감해졌다. 연령대에 따라 들어오지 말라는 암묵적인 매장분위기, 키오스크만 설치한 곳, 외국어로 된 매장이름, 영어로 된 아파트이름, 66사이즈 이상의 옷을 만들지 않는 기업, 끊임없이 이어지는 차별과 배제에 길들여지는 사람들, 어떤 매장에서 어떤 업종에서 누가 고객이 될 수 있을까. 소비에도 계급이 생기고 있다.

어떤 체격에 어떤 외모와 건강을가졌고 어떤 연령대에 어떤 소득수준에, 어느 정도의 학력을 갖췄는가에 따라, 돈을 쓸 수 있는 구역이 세분화되고 있다. 계급에 따른 구역설정, 새로운 제국의 등장, 자본이 지배하는 식민지의 탄생이다.

오늘도 죽는다

1. 안양에서 도로포장공사를 하던 인부 셋이 기어가 풀린 롤러에 깔려 숨졌다. 운전자는 p단에 기어를 놨는데 옷깃이 걸리며 기어가 풀렸다고 했다. 옷깃에 기어에 끼이는 일은 승용차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승용차는 그렇게 쉽게 기어가 바뀌지 않는다. 하물며 공사현장일을 하는 장비차가. 급발진했다고 한다.

2. 윤석열이 뭐더러 거기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주 52시간이 짧다고 개소리나 지껄이던 자가, 사람이 셋이나 죽은 자리에 나타나 했단 말도 가관이다. 시동을 끄고 내렸어야 한다. 운전자의 책임을 묻는 말이다.

3. 나는 사망사고에 대해 좀 의아했다. 막힌 공간도 아닌데 세명이 미처 몸을 피할 시간도 없었다는 얘기라, 그 구간이 경사가 가파른 것도 아닌데, 뭔가 다른 사연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4. 재해를 불러온 사고의 책임자는 이럴 경우 발주자인가 시행사인가. 사고현장인 안양시는 발빠르게 현장확인을 하고 해당구청에 대책반을 설치했고, 수장인 시장이 누구의 책임을 묻기전에 송구하고 안타깝다며 장례식장을 찾았다. 좋은 태도라고 본다. + 발주자는 LG U+. 지난 가을부터 안양 전역에 통신선을 다시 깔고 있다. 생각해보니, 가을에 우리 사무실 부근에도 저 공사를 한 적 있다. 내 사무실 근처에 공사 하러 왔던 이들과 같은 사람들일까.

5. 오래 전에, 난곡을 깎아지은 아파트에 산 적이 있다. 경사가 가팔라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경사진 아파트입구에 열선을 깔다가 비슷한 인원의 사람이 죽었다.

6. 지금 나의 동거인은 조선소와 건설현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조선소에서 용접불똥에 불이 나서 배 안에서 작업하던 노동자가 죽은 이야기, 제주도의 모 리조트 건설시 사람이 죽은 얘기를 가끔 한다.김포의 신도시를 짓다가 시행사의 하청업체가 2인 1조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 그가 현장일을 완전히 그만둔 것은 거기였다.

7. 안양 사고 현장에 윤석열이 나타났다는 속보에 이어, 강서구 아파트에서 창틀을 교체하던 40대와 30대 인부 둘이 추락사했다는 소식이 떴다. 예전에 아파트 외벽 청소를 하는 과정을 보고 관리사무소에 항의를 한 적 있다. 관리사무소에서는 발주자는 입주자대표회의와 아파트건설사이고 시행사가 하청을 준 것이라 관리사무소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변명했다.

8.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사이트에는 매일 무수한 사고의 기록이 올라온다. 오늘 하루만 해도 다섯 건이다. 살아있는 게 기적이다. 여기가 바로 지옥이다.

민주시민교육 공동학술회의 참석

대전 한남대학교에서 열린 민주시민교육 공동학술회의

풀뿌리 민주시민교육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학회에 참석했습니다.

이룸은 학교/청소년 교육세션에 토론자로 참석했습니다. 토론문은 추후 업데이트하겠습니다.

학교 내 불법촬영디지털성범죄 대응방안과 재발방지 대책수립을 위한 시민긴급행동

최근 교직원에 의한 학교내 불법촬영디지털성범죄가 밝혀져 큰 충격을 불러왔습니다.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과 안양여성연대는 그 책임과 대책방안을 수립하여 관계기관에 제안하고자 시민긴급행동을 진행합니다. 본 페이지에는 사건 관련한 여러 기사와 각 기관의 성명서를 게시합니다.

시민긴급행동에 관해 약속해주실 게 있습니다.

  1. 특정학교나 특정기관에 대한 비난을 자제한다.
  2. 특정학교나 기관 이름은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3. 학교의 문제는 모두의 문제라는 것을 주지한다.
  4. 모든 기관과 시민이 협력하여 건강한 대책을 수립하는데 집중한다.
  5. 해당 교육지원청의 학교정상화 노력에 관해 협조한다.

긴급간담회 신청링크 http://url.kr/oiyx69

★학교 내 불법촬영 디지털성범죄 대응방안과 재발방지 대책수립을 위한 시민긴급행동★

  1. 10(수)
    오후 2:30 안양여성연대 기자회견 (안양 범계역)
    오후 3:00 디지털성폭력 근절을 위한 대시민 캠페인 (안양 범계역)
    오후 6:00 긴급간담회 (온라인 ZOOM)
    긴급간담회 누구나 참여가능
    ■사전신청링크 https://url.kr/oiyx69
    ■시민행동 관련자료 모음 https://url.kr/f3jqdo

반짝이던 마을, 일곱 살의 샘내


1981년쯤이었을거다.
서울에서 살던 우리는 가산을 홀랑 말아먹고 트럭 한 대에 남은 세간을 싣고 북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당신이 군복무를 했던 곳 근처에 살만한 곳이 있을 거라 했다. 엄마는 그 마을의 입구에 표지판처럼 나란히 두 개의 가게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마을의 이름은 샘내였다. 맑은 샘에서 물이 솟아 마을을 가로지른다고 해서 샘내라 불렀다. 당장 입에 풀칠할 것도 없는데 낭만은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샘내상회(지금도 샘내상회 간판을 달고 있는 듯 하다. 당시에는 도로쪽을 바라보는 가게가 두 개 있었다.) 에서 사이다 한 병을 사 마시며 엄마는 살 집을 구한다고 말했다. 가게주인(장미빌라 2차 주변으로 추정 / 흰 대문이 있는 집 평화로 1257번길 62-5)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마을 한 복판에 넓은 마당이 있는 집에 도착했다. 그 집은 뒤채가 있었는데 거기 셋방을 얻었다. 작은 방 한 칸이었지만 앞마당이 넓었다. 담장도 명확치 않았지만 대문은 있었고 늘 열려 있는 대문 밖에 마을광장처럼 펼쳐진 공터가 있었다. 집은 샘내의 개천에 딱 붙어 있었는데 개천과 집 사이에 거대한 바위와 소나무가 개천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우리집은 서울에서 액자공장과 거기서 만든 액자를 파는 가게를 했다. 빈손이 되어 샘내로 갔지만 배운 도둑질이라고, 엄마 아빠는 액자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 갓난아이가 누워있는 단칸방에서 액자를 만들 수 없어, 샘내상회 바로 뒤에 작은 작업장을 얻었다. 아빠는 덩치가 큰 사람이라 몸 한 번 돌리기도 쉽지 않은 좁은 자리에 작업대를 놓고 러닝셔츠만 입고 액자를 만들었다. 엄마는 아빠가 만든 액자를 머리에 이고 39번 영종여객 버스를 타고 의정부에 갔다. 성화를 파는 서점에 한 두 개씩 액자를 납품해 생활을 이어갔다.
어릴 때 나는 피부가 유난히 흰 편이었다. “서울에서 온 백혈병 걸린 아이”라는 소문이 났다. 내가 집 앞마당에 나와 작대기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놀면 아이들이 나를 빙 둘러싸고 구경하기도 했다. 구경거리로 지낸 시간은 아주 짧다. 금세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천방지축으로 뛰어놀기 시작했다. 샘내상회에서부터 우리집 위쪽까지 또래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놀았다. 엄마는 가끔 나를 데리고 산마루 너머 어디를 가야 했다. 엄마를 따라 산길을 걷기도 했다. 봄이면 논바닥에 들어가 올챙이를 잡았다. 뒷다리가 나온 개구리를 보고 어쩐지 그만둬야 할 것 같아서 사이다병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산마루를 넘을 때 할미꽃을 꺾어와 냉장고 위에 올려두었다. 엄마는 할미꽃 함부로 꺾으면 나쁜 일이 생긴다고 하면서도, 할미꽃을 자꾸 꺾어다 두었다. 반딧불이도 많아서 몇 마리 잡아 유리병에 담아온 적도 있다. 할미꽃 옆에서 반딧불이가 밝은 빛을 냈다. 그날밤은 반짝이는 반딧불이 때문에 할미꽃이랑 자꾸 눈이 마주쳤다.
겨울에는 샘내가 꽝꽝 얼어붙어 그 위에서 썰매를 탔다. 엄마는 썰매타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보던 내가 안스러웠는지 서울을 다녀오는 길에 옛 영화를 못 이기고 빨간 스케이트를 사왔다. 아이들이 딱히 부러워하지 않아서, 뽐내려는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소나무가 있던 집에 살다가 월세를 밀렸다고 했는지, 큰 길 건너로 이사를 했다.
샘내상회앞에는 영종여객 39번 버스가 다니는 큰 길(* 평화로)이 있고 그 길이 남으로는 의정부, 북으로는 동두천으로 이어진다. 이 길을 건너면 또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마을의 느낌이 조금 달랐다.
길 건너 동네(* 현재의 개발지구 – 평화로와 철도 사이)에는 커다란 소가죽 공장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소가죽의 시큼한 냄새가 밀려왔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냄새였다. 냄새를 따라가면 색이 다 빠진 소가죽이 아기 기저귀빨래처럼 넓은 벌판에 널려 있었다. 소가죽은 무거워도 가끔 흔들렸다. 우리는 소가죽을 널어놓은 곳에 들어가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새로 이사한 집의 주인집엔 내 또래 아이들이 있었다. 주인아줌마는 소가죽 공장에 다녔다. 주인아줌마는 해지기 전에 집에 들어오곤 했는데 언제나 파란색 장화를 신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주인집에 들어가 그집 아이들과 넋 놓고 티비를 보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주인아줌마가 “너는 맨날 여기 와서 티비 보냐?”라고 꾸지람을 했다. 벽 너머로 그 소리를 들은 엄마가 주인집에 놀러가지 말라고 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월세를 밀렸던가, 우리는 처음 살던 집보다 조금 더 안쪽으로 이사를 했다. 처음 살던 마당이 넓은 집은 마을의 갈래길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그 집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들어가면 넓은 파밭이 있고 그 다음에 산길을 따라 집이 몇 개 있었다. 우리는 제일 끝집(* 평화로 1257번길 91-47로 추정- 인근에 묘지가 있었는데 로드뷰로 봤을 때 비슷해보임)으로 이사했는데 나와 동갑인 여자아이가 살았다. 집주인 딸의 이름은 신애였다. 신애네 집은 젖소도 키우고 돼지도 키웠다. 집의 뒤켠으로 가면 젖소 우리가 있었다. 너댓마리의 젖소가 느리게 돌아다니며 꼴을 먹었다. 아침마다 덕계리에 있는 서울우유 공장에서 우유를 받으러 왔다. 먹으면 크게 배탈이 난다고 절대 젖소의 젖을 먹으면 안된다고 했다.
우리가 세를 든 곳은 신애네 마당 오른쪽에 있는 돼지막사에 붙어 있는 가건물이었다. 돼지막사에서는 돼지를 꽤 많이 키웠는데 ‘꽤 많이’라고 해봤자 100여두 정도였을 것이다. 가끔 신애가 꼬마돼지들을 이끌고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신애는 작대기를 하나 들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돼지들을 몰고 다녔다. 커다란 어미돼지들은 파란 트럭에 실려가기도 했다. 돼지들이 차에 오를 때마다 꽥꽥대며 울었고 엉덩이에 붙은 더러운 똥과 진흙이 마구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는 차에 탈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소리 내어 울었다. 신애네 집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는 작은 집이 바깥 마당에 당근을 엄청 심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당근을 많이 심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집 아줌마는 우리들을 보고 아무 때나 당근을 뽑아다 먹으라고 했다. 매일 한 소쿠리씩 당근을 얻어다 먹었을 때는 바람이 서늘했던 것 같다.
그집은 화장실이 한참 밖에 있어 밤이 되면 휴지를 들고 뛰어갔다. 돼지막사 옆이라 쥐들이 들락거렸다. 독일에서 돌아온 큰 아빠가 귀국선물로 눕히면 눈을 감고 일으키면 눈을 뜨는 인형을 사왔다. 신기한 그 인형을 깜빡 잊고 마루에 놓고 잤다가 쥐들이 볼을 파먹기도 했다. 우리 집 바로 뒤에는 양봉장이 있었다. 그것도 신애네서 키우는 벌들이었다. 한번은 동생이 양봉통앞에 멍하니 서서 수십 방을 쏘이기도 했다. 서너 살인 동생은 늘 집안에 갇혀 있어서 말을 잘 하지 못했다.
신애하고는 싸우기도 했고 잘 놀기도 했다. 주인집 딸이라고 유세를 좀 부렸고, 나는 신애가 못하는 것을 뽐내면서 기싸움을 했다. 한번은 집 뒤에 언덕과 무덤가에서 불이 났다. 아빠가 소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몸으로 불을 껐다. 화상을 입어 밤새 끙끙대고 앓았지만 상처가 남을 정도는 아니었다.
신애네 집에서 산길로 돌아가면 옆 마을(평화로 1233번길 부근)로 갈 수 있었다. 그 길이 더 빠른 것 같진 않지만 큰차도로 다니면 위험하다고 엄마는 숲속 오솔길로 다니는 걸 좋아했다. 마을입구 큰도로에서는 사망사고가 자주 있었다. 숲길에는 까투리가 알을 품고 있는 걸 흔하게 봤다. 길 사이로 뱀이 스르륵 지나갔다. 뱀딸기와 산딸기가 지천으로 열렸다. 우리는 그 산길을 넘어 어떤 아이의 집에 다녔는데 엄마가 거길 왜 가끔 갔는지는 모르겠다. 나와 동갑내기인 딸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지적장애가 있었다. 엄마가 그 집 엄마한테 돈을 꾸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나중에 우리가 잠깐 키우던 메리라는 강아지가 큰 개가 되었을 때, 그 집에 주었다. 마을입구에 있는 샘물교회( 지금의 샘물교회)에서 선교원을 열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바로 전 해였다. 선교원에 몇 달 다녔는데 어느 날은 엄마가 수돗가에서 내일부터 선교원에 가지 말라고 했다. 돈이 없어서 못 보낸다고 했다. 신애는 노란 모자를 쓰고 선교원에 갔지만, 딱히 부럽지는 않았다. 나는 늘 내가 신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선교원을 다 다니진 못했지만 졸업식에는 오라고 해서, 교회에서 열리는 선교원 졸업식에 갔었다. 학사모 비슷한 걸 쓰고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서울 살 때는 사진이 많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파는 물건은 피아노나 카메라니까. 샘내에 살던 시절엔 카메라가 없었다.
이듬해 나는 덕산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는 두 정거장 북쪽에 있었는데 학교가 멀어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다. 샘내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매일 두 번씩 버스를 탈 만큼 돈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샘내에도 군부대가 있고 주변이 온통 군부대 천지인지라, 장갑차와 탱크와 서울우유 냉장차까지 지나다니는 길이라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 “모여서 걸어가라”는 것이었다. 가난한 부모들의 묘책이었다.
아침 8시에 샘물상회 앞에서 샘내에 사는 모든 덕산초등학교 아이들이 모인다. 이 시간에 늦으면 혼자 학교를 가야 한다. 6학년 1반 오빠가 맨 앞에 서고 학년별로 둘씩 짝 지어 줄을 섰다. 6학년들과 5학년들이 앞뒤로 나누어 동생들을 안으로 배치했다. 모두 모인 것이 확인되면 6학년 1반 반장 오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왼편에 산을 두고 오른쪽엔 큰 도로를 따라 학교로 걸어갔다. 가면서 봄에는 진달래꽃을 따먹었다. 걸음이 쳐지면 언니들에게 야단을 맞았다. 얼마쯤 걷는지 모른다. 고갯마루를 올라갔다가 조금 내려갈 때 서울우유 공장입구가 나타난다. 그쯤이면 학교에 거의 다 온 것이다. 한국일보에서 그림그리기 대회를 한다고 해서 이 장면을 그려 냈다. 1학년 때 상을 받아서 2학년 때도 똑같은 그림을 그렸는데 상을 또 받았다. 똑같은 걸 그려내도 상을 준다니 바보같이 느껴졌다.
담임선생님은 매일 네 바닥씩 글씨 쓰는 숙제를 내줬는데 동네 엄마들은 공책 값 든다고 불만이 많았다. 어떤 아이들은 공책 값을 아끼느라 지우개로 쓴 것을 다 지우고 새로 쓰기도 했다. 한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개천이 넘친 적 있다. 그때는 다리가 없이 징검다리만 있을 때라 학교를 가지 못했다. 학교를 다니기 직전이었던가, 엄마가 피아노를 배우라고 해서 어느 기와집에 다니기도 했다. 그 피아노학원 원장님이 선교원 원장이었으니, 마을의 유일한 사교육 전문가였달까.
나는 엄마가 결혼 전에 입던 바지를 잘라 입고 학교를 갔다. 그 동네에서 2학년이 된 뒤 신애네 집에도 월세를 밀렸던가. 아마 신애 엄마가 집을 빼라고 했는데 엄마가 버텼겠지 싶다. 비 오는 날 군인가족이 이사를 들어왔고 우리는 파란 트럭에 짐을 급하게 실어 의정부로 이사를 나갔다. 엄마는 신애엄마가 자기를 쫓아냈다고 저주를 퍼부었다.
우리는 의정부에 살다가 점점 남진했다. 엄마의 원대로 의정부에서 도봉구를 거쳐 서울의 성북구, 길음동 지나 삼선교까지 내려갔다. 엄마의 소원은 사대문 안으로 안착하는 것이었지만, 내가 고2가 되었을 때 다시 샘내로 들어갔다. 샘내 끝에 신애네 집 근처에 큰 빌라(* 천보빌라, 현재까지도 이름 그대로 유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엄마는 평수도 넓고 엄청 좋다고 말하면서 “신애네 집이 내려다보일 것”이라고 했다. 막상 이사를 들어가니 샘내의 물이 죄다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살던 빌라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옛날처럼 동네 위로 올라가 가재를 잡고 송사리를 잡으며 즐거워했다. 그 빌라는 내가 알던 샘내와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지나치게 호화로웠다. 그 집에서 2년 정도 살다가 엄마가 하던 일이 부도가 났고 우리는 다시 서울로 이사를 나왔다.
샘내에서 살았던 일곱 살 무렵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가난했던 때다. 하지만 그때의 샘내는 모든 것이 반짝였다. 햇빛을 받고 있는 파꽃이나,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 그 위에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잠자리떼, 처음 이사한 집에 커다란 소나무, 나무를 타고 놀던 동네 언니의 이마에 내려앉는 노을과,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던 소가죽까지. 샘물상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오면 모두 녹아내렸던 그 여름의 오솔길도, 모두가 찬란하게 빛났다. 가난하다는 건 충분히 슬픈 일인데, 알록달록한 지붕들 때문이었는지, 겨울에도 반짝이며 흐르던 냇물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2019년. 당시의 마을지형을 생각하며 적었던 글.

토요일, 어느 택시

제가 운전 12년 했거든요.

지난 주에 3일은 사납금도 못 채웠어요.

기본급 60만원이니까 거기서 까겠죠.

200요? 어휴. 이번 달은 백만원도 안 될 거 같은데요.

다들 힘드니까요. 나만 힘든 거 아니니까 버텨야죠.

제가 원래 선거 같은 거 안 했던 사람이거든요. 근데 지난 번엔 문재인 찍었죠. 이번엔 무조건 야당 찍을거예요.

이재명? 이재명 나오면 이재명 찍고. 근데 이재명 못 나올 거 같던데요.

토요일 10시 코로나 4단계. 어느 택시.

입이 없는 세상

사무실에서 300미터 정도 가면 한신냉면이 있다.

이 집은 냉면이 다른데보다 1천원정도 싸고 콩국수도 먹을 만 해서 점심시간에 자리가 없다. 가게 주인이 방역수칙도 철저히 지켜서 음식 나오기 전에 마스크도 못 벗게 한다.

오늘은 콩국수를 한 그릇 시키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손님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예닐곱살 쯤 된 여자아이가 들어와 주인여자에게 뭐라 뭐라 하는데 둘 다 마스크를 끼었고 손님들이 왁자하니 주인여자가 크게 망해서 내 귀에도 말이 다 들렸다.

“콩국수 포장? 응. 엄마가 사오래? 엄마 전화번호 알아? 여기 전화번호 적어야 해. 아줌마가 적어줄테니까 불러봐. 응. 공일공. 땡땡땡땡. 호계동 사는 거 맞지? 응. 금방 줄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인여자가 나에게 와서 앞좌석에 아이가 잠깐 앉아 있어도 되겠냐고 묻는다.

나는 그저 흐뭇한 기분이 들어 괜찮다고 했다.

아이가 기다리는 동안 먹으라고 주인여자가 요구르트를 하나 꺼내 빨대를 꽂아 주었다.

아이는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빨대로 요구르트를 마셨다.

콩국수를 입에 쑤셔넣던 나하고 눈이 마주쳐서 내가 슬쩍 웃었다.

“학교 다녀요?”

“네.”

“몇 학년이예요?”

“1학년이요.”

아이는 말을 할 때는 마스크를 올렸고, 요구르트를 먹을 때는 마스크를 내렸다.

“엄마가 국수 사오라 했어요?”

“네”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도 국수 먹을 줄 알아요?”

“네.”아이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뭐야?”

“윤아요.”

“응. 윤아. 착하네. 심부름도 잘 하고.” 나는 꼰대같은 말을 해버렸다.

써보니 귀찮게 많이도 물어봤네.

아이는 요구르트를 다 먹고 주인여자에게 다가가서 “아줌마. 요구르트 다 마셨어요.”라며 빈 병을 내밀었다. 주인여자는 빈병을 받아들고 금방 나올테니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아이의 포장 국수가 나오기 전에 내가 국수를 다 먹어버리면, 아이의 국수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이의 포장국수가 먼저 나왔다. 주인여자는 비닐봉투에 국수를 담아 아이에게 들려주고는 “조심해서 잘 들고 가라.”고 일렀다. 혼자 가는 길이 멀진 않겠지.

마스크 위로 반짝이던 아이의 까만 눈동자가 예뻤다. 말을 할 때는 마스크를 올리고, 요구르트를 먹을 때는 마스크를 내리던 아이의 얼굴이 오래 기억날 것 같다. 입이 없어진 세상에서 아이들의 언어는 얼마나 달라질까.

한 사람의 힘

몇 년전부터 각 지역에 도시재생사업이 시작되면서 도시재생센터가 마을기자단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외 공동체 사업에서 종종 아마추어 주민들을 중심으로 구성하는 기자단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기자단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외부로 나가는 글은 한 번 안 써본 사람도 있고, 블로그 정도 해 본 사람도 있다. SNS도 안 해본 사람이 다수였다.

인근에 있는 G시의 한 센터는 내가 2019년부터 기자단 지도를 하고 있다. 2019년에 처음 기자단을 구성할 때 담당자라고 연락을 해 와, 한 번도 안 해본 업무고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물론 누구 소개로 연락처를 알아내서 연락한 것이었다. 누가 소개를 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안난다. (소개해 준 사람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도 참 문제다.) 몇 가지 컨설팅 비슷한 조언을 해줬는데 특강을 부탁했다. 담당자도 구성원들도 맥을 못 잡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50대 이상의 지역주민이었고 봉사활동을 해 봤거나 통반장, 지역 무슨 협의회 회장도 있었지만 글을 써본 경험은 없었다. 다들 자기 생업이 있어서 수업시간은 늘 저녁 7시에 잡혔다.

담당자는 나에게 강의요청을 할 때마다 “7시에 수업을 하게 되면 어차피 식사를 하셔야 하니 한 시간 일찍 와서 저랑 식사 하시면 어떨까요?”라고 권했고, 나는 일찍 가서 그와 순대국이나 순두부를 먹었다. 그는 매번 아주 깍뜻했다. 솔직히 말해, 그런 공무원은 처음 봤다. 내가 늘 대접받는 기분이라 고맙다고 하면 그는 ‘강의비도 얼마 안되는데 잘 해주셔서 그렇다.’라고 답했다.

첫 특강 이후에 몇 가지 구성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 그가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이런 저런 의견을 전했다. 그는 나에게 기자단이 글을 제대로 쓰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느냐고 물었다.

공공기관 사업이 빤한 것이, 정해진 예산이 있고 상부에서 허락을 안 하면 담당자가 아무리 필요하다고 우겨봤자 성사 불가능하다. 이런 질문이 오면 나는 역으로 가용예산이 얼마나 있냐고 묻는다.

예산에 맞춰서 최대의 효율을 낼 방법을 찾아주면 된다. 대신, 가성비를 높이는 기준은 담당자의 태도에 따라 결정한다.

그가 말한 예산은 장기적으로 기자단을 지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제안한 것은 첫 소식지에만 기획회의를 나랑 하고, 원고를 써오면 그걸 놓고 편집회의를 하면서 강의를 곁들이겠다는 것이었다.

가능할까요? 그가 물었다.

– 가능하게 해봅시다.

첫 기획회의에서는 각자 뭘 쓰고 싶은지 어떤 걸 취재하고 싶은지 이야기를 들었다. 세금으로 만드는 소식지니까 관의 요구를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 하지만 최근엔 담당자에게 허용범위를 물어도 큰 규칙이 있는 건 아니다. ‘도시재생센터 쓰레기다!’ 이런 비난만 없으면 되고, 모인 사람들도 크게 의도와 엇나가는 아이템을 말하지도 않는다. 대부분 ‘도시재생센터에 도움이 되어야지!’라는 생각으로 모이기 마련이니까.

기획회의에서는 1. 서로 소재가 겹치지 않게 하고

2. 취재대상과 취재할 질문을 뽑아주고

3. 육하원칙으로 물어올 것

4. 정보는 어떻게 구성해올 것 정도를 지도한다.

이러면 구멍이 몇 개 나 있어도 얼기설기 기사를 만들어온다.

두 번째 편집회의에서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고

이들이 써서 제출한 한글파일을 프로젝터에 띄운다.

한글파일에는 변경기록 기능이 있는데 수정하는 내용이 다 교정기호 기록된다. 스크린에 띄운 상태로 그 자리에서 바로 글을 수정하면서 여기를 왜 고쳐야 하는지, 어디가 문제인지, 빨간 줄을 죽죽 그어가며 문장을 재구성해주고 문단을 앞뒤로 바꾸기도 하고 어느 정보가 더 필요하니 더 취재해오라고도 한다.

한마디로 쇼를 하는거다. 교정쑈랄까..

처음에는 마을기자들이 망신스러워했지만 누누히 당신들은 프로가 아니고 프로일 필요도 없으며 잘 쓰는 유려한 글로 기사를 만들거면 마을기자단의 의의도 없다고 강조하면서 도닥이니 붉은 비가 내리는 원고에 큰 불만도 없게 되었다.

매번 잘 썼다 훌륭하다 이만하면 되었다 이 부분은 아주 좋다고 칭찬을 곁들이는 것도 꼭 필요하다.

작년에는 코로나가 있었는데도 담당자가 어김없이 나를 네 번이나 불러줬고 편집회의를 끝내고 나서 기자들이 다시 보완을 해오면 윤문을 해서 다시 넘겨주는 형태로 일을 이어왔다. 윤문에 대한 비용은 책정된 바 없고, 1회 강의비로 이 기자단의 일을 계속해왔다.

이유는, 단 하나 담당자의 성의 때문이다.

항상 부족한 원고라도 자기가 다시 타이핑해서 넘겼고, 사진도 봐주겠다 하니 사진에 파일명도 다 일일이 수정해서 보여줬고, 내가 가면 노트북에 파일까지 다 깔아서 완벽하게 셋팅해놨고, 물과 커피는 물론, 일찍 와서 밥 먹자는 소리도 빼먹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은 전화를 해서 기자단 원고에 대해 물었는데 정말 성심성의껏 자기 일을 한다는 걸, 절절히 느꼈기 때문이다.

5월에 한 번 강의를 하고 원고를 수정해서 보냈는데 7월도 발행한다며 6월에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새로 담당자가 왔으니 잘 부탁한다고 자기가 인수인계도 잘 해보겠다고 했다.

오늘 새로운 담당자와 이전 담당자가 있는 자리에서 한 차례 수정쑈를 했다. 이번 담당자도 친절했다.

게다가, 이번엔 기자들의 기사도 많이 좋아졌다. 손 대지 않을 정도의 글도 있었고, 각자 잘 하는 분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인터뷰에 재능이 있었고, 한 사람은 탐방기사에, 한 사람은 기관 취재에 장기를 보였다. 나는 기자단에게 “이제 제가 안와도 되겠다”면서 한껏 추켜올렸다.

강의비 지급서에 사인을 하면서 나는 반농담으로 “이제 강의비 좀 올려줘요.”라고 말하고 껄껄 웃었다. 담당자는 머쓱해져서 어쩔 줄 몰라했다.

“농담이고요. 주무관님이 항상 성의있게 하셔서 제가 늘 기분이 좋습니다. 곧 제가 필요없어질 거 같긴 하지만.” 이라며 웃었다.

매번 수업이 2시간을 넘겼는데 오늘은 20분이나 단축되었다.

결국 공공기관 강의나 일은, 사람 때문에 한다.

그 한 사람의 마음이 여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C주무관, 참 훌륭한 사람이다.

어디 상 있으면 추천이라도 해야겠다.

이 담당자 때문에 기자단에 들어온 사람들은 ‘발전하는 자신’을 찾아갔고, 나 역시 내 역량을 발휘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입발린 소리 안하고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미덕은 긴 시간에 걸쳐 결국 빛난다고, 믿고 싶다.

지하주차장에 누워있는 사람들

공동현관이 통유리로 된 아파트에 산 적이 있다. 항상 통유리창과 복도를 반짝이게 닦아놓는 미화원에게 비타500을 한 병 건넨 적 있다.

그는 음료수병을 들고 울먹거렸다.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청소하는데 물 펑펑 쓴다고 방금 입주민에게 욕을 먹었다고 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하드냐고 물었지만, “우리가 쓰는 물은 지하수인데…..”라며 그는 울먹이기만 했다. 그 아파트는 비싸고 넓은 평수를 자랑했다. 반상회는 없는데 골프동호회가 생긴 아파트다. 그 아파트의 관리사무소는 지하에 있었다. 내가 그 아파트에 7년을 사는동안, 7년동안 근무한 직원은 늘 지하에 있었다.

모든 아파트에는 청소/미화노동자가 있다.

이들은 평일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주로 근무하고 토요일에 출근하는 곳도 있다.

한달 급여는 100만원에서 140만원 수준. 휴게시간은 하루 1시간에서 2시간 정도다.

주로 청소하는 곳은 계단과 복도, 엘리베이터지만 아파트 화단의 잡초를 뽑거나 분리수거를 돕고, 지하주차장을 청소하는 일에도 동원된다. 눈이 오면 눈을 치우고 비가 오면 미끄럽지 않게 헌 카페트 같은 것도 가져다 깐다. 이 업무는 원래 정해진 것이 아니지만 거부할 수 없다.

오래된 아파트의 계단마다 끄트머리에 반짝이는 금색테를 본 적 있는가? 그것을 신주라고 부른다. 신주는 아파트미화노동자들의 오래된 골칫거리다. 관리자가 이 신주가 반짝이는 걸 원하는 경우, 틈새에 낀 이물질까지 죽어라고 닦아내야 한다. 최근엔 신주전용 청소기가 나왔다는데 모든 아파트에 있는 것은 아니다.

월 급여 100만원 남짓. 이들은 밥 사먹을 돈을 아끼기 위해 휴게실에서 밥을 지어 각자 반찬을 가져와 먹는다. 코로나때문에 모여서 먹지 못하고 둘 셋씩 분리해서 먹어야 하지만, 그 시간도 공간도 여유롭지 않다.

주차장의 배관의 끝에는 비밀스러운 문이 있다. 이 문을 열면, 노동자들이 누워있다. 고된 노동 중간 잠시 쉬는 사이, 이들은 지하주차장에 눕는다. 시멘트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유리섬유에도 노출되어 있다.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스며들어오는 곳에서 고소한 밥을 짓는다.

사진은 경기중부아파트노동자협회의 활동가가 경기도 보조금으로 진행하는 미화원 간담회와 실태조사를 거치며 찍은 것들이다. 활동가들이 둘러본 내용을 정리해 적는다. 과천, 군포, 의왕, 안양의 아파트들이 대체적으로 이렇다. 주워온 소파, 주워온 냉장고, 주워온 선풍기가 지하주차장에서 요긴하게 쓰인다. 경기도의 예산으로 경비원 휴게실 개선사업이 시작되었으나 미화원 휴게실에 대한 언급은 없다. 청소, 미화노동자들이 꼭 가난하고 불쌍하고 못 배운 사람들은 아니다. 기업출신도 있고 공무원 출신도 있다. 평촌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노동과 노동사이 쉴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주어져야 한다. 내가 쉬고 싶지 않은 공간에서 타인에게 쉬라고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이것은. 공.정.하.지.않.다.

먹이 사슬의 맨 끝에 청소노동자가 있다. 지하주차장에 사람이 누워있다.

2021. 7. 10.

일요일풍경

일요일에 파스타를 먹을 만한 집은 세 군데정도.

그 중 두 곳은 오늘도 만석일게 분명해서 혼자 가기 저어했다. 한 곳은 음식맛이 좋은데 건물위치 때문인지 손님이 붐비지 않는 곳이다. 나는 붐비지 않는 곳을 선택했다. 들어가자 한 테이블이 있었고, 내 뒤에 두 팀이 들어왔다. 오늘도 서빙을 보는 중년남자는 분홍색 셔츠에 넥타이를 맸다. 이 집은 부부가 한다고 들었는데, 부인이 주방을 보고 남자가 홀을 맡는다. 비어있는 1인석을 가르키며 내가 저기에 앉겠다고 하자 남자가 약간 당황한 듯 주춤했다. 내가 앉으려고 한 곳엔 식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남자가 금세 테이블보와 식기와 앞접시를 가져다주었다. 내 옆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는 물이 아닌 연한 연두빛의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킁킁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간헐적으로 계속 어떤 소리를 냈다. 틱이구나.

수 년 전에 이 집에 왔을 때 주인내외의 자녀로 보이는 사내 아이 둘이 있었다. 동생은 똘똘한 말을 계속 내뱉고 있었고 형은 약간 굼뜬 모양새를 보였던 기억이 났다. 그게 언제였던가. 벌써 4년도 넘은 일이다. 그때 덩치가 큰 아이는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 그 아이가 자라 저 청년이 되었을수도 있겠다.

넥타이를 맨 남자가 뭔가 부탁하는 말을 하자 청년이 일어나 테이블을 치웠다. 청년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다시 킁킁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파스타를 먹는 사이 청년이 주방에 들어갔다. 주방에서 “안돼”라는 여자의 낮은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일어나니 청년은 기계적으로 일어나 자리를 치웠고 주방에 잠깐 들렀다가 테이블에 앉았다. 계산을 하러 계산대에 섰을 때 청년과 나는 마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파스타맛은 옛날과 조금 달랐다. 기름이 적어 뻑뻑했다. 한 때 평촌에서 제일 맛있는 파스타를 한다고 소문났던 곳이다.

파스타집을 나오는데 옆 식당의 주방이 엿보였다. 긴 비닐앞치마에 머릿수건 마스크를 쓴 여성노인 두 명이 식재료를 손질하며 어떤 이야기를 큰소리로 나누고 있었다. 한 사람은 화가 난 것 같았다.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가니 주차관리 아저씨가 앉아 있어야 할 곳에 보이지 않았다. 관리원 부스가 가까이 있었는데 주차관리원은 부스 안에서 반찬통을 꺼내놓고 밥을 먹고 있었다. 12시 50분이었다. 나는 차 앞에 꽂힌 쪽지를 들고 부스로 다가갔다.

식사 하시는 거 같아서 제가 왔어요.

주차관리원은 입을 닦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저쪽으로 가서 끊어드려야 하는데. 관리원이 입을 가리며 말했다.

식사 시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식사하셔야죠. 멀지도 않고.

관리원은 고맙다고 인사했다. 주차비 1200원.

그 구역의 주차관리원들은 모두 노인이다. 비오는 날, 눈 오는 날, 햇빛이 내리쬐는 여름에도 늘 자리를 지키고 늦게 나타난다고 화내는 운전자들의 짜증을 받아내는 사람들의 점심시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오늘부터 점심시간에는 전화를 받지 말라’고 지시하던 어느 중소기업사장이 떠올랐다. 내가 자주 가는 사무실 백반집에는 AS를 다니는 기사들이 자주 오는데 그들은 밥을 입에 물고 한참 이야기를 듣다가 이렇게 말하곤 한다. “네네 고객님, 제가 지금 밥 먹는 중인데요. 얼른 먹고 가겠습니다.”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는 것도 사치가 되는 건가.

온갖 차들이 쏟아져 나온 공원 부근을 지나 시험을 앞둔 아이들을 태우러 나온 학부모들의 차로 학원가의 정체된 도로를 지났다. 일요일. 누군가의 노동을 먹고, 나도 출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