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여섯에 보낸 편지

중 3이었다. 반장이었다. 매년 그래왔다. 학생회장이기도 했다. 남녀공학에서 여학생회장이 나온 것에 반발이 거셌다. 그 해에는 유독 리더십에 대해서 고민했다. 
체력장이 있었다. 오래달리기가 난코스였다. 심장이 안 좋다고 주장하는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시대마다 각광받는 로망의 병이 있다. 사춘기소녀들이 불치의 병에 걸려 사랑하는 연인의 품에 안겨 세상과 이별하거나, 따뜻한 사람들의 손길에 활짝 웃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병 말이다. 내 이전 세대에서는 그게 결핵이었다면, 내 시대에는 선천성 심장병이었다. 불경스럽겠지만, 그 때는 병에도 낭만이 있었다. 심장이 안 좋다고 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단 한 번도 쓰러지거나, 양호실도 가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그저 얼굴이 좀 희고, 매우 게으른 편이었다. 

실적주의였을까. 전체주의였을까, 아니면 계속해서 사내아이들에게 도전받는 내 리더십에 대한 확인을 위한 요식행위였을까. 나는 우리반은 800미터 오래달리기를 전원 완주 통과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만들겠다고도 말했다. 공부를 많이 하던 시대가 아니라 아이들의 체력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걸핏하면 쓰러졌던 건 나다. 내가 완주할 수 있으면 그 누구도 할 수 있을거라 믿었다.

체력장은 입시에 반영되었다. 적용비율은 매우 적었어도 나는 1점도 뺏길 수 없다고 여겼다. 모두가 20점을 받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우리반은 모두 20점을 받아야 했다. 

체력장 당일 오래달리기는 맨 마지막 순서였다. 체육부장이 뻔히 있는데도 그 학교에서는 반장이 모든 일을 다 했다. 나는 구령을 붙여가며 대열의 안쪽에 섰다. 두 팀으로 나눠 한 팀에 아마 스물 여덞명 정도였을거다. 첫 번째 팀은 아무도 문제없이 시간내에 동일하게 완주했다. 개별적으로 뛰어도 무방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으려면 같이 뛰는 게 가장 좋았다. 800미터을 구령 붙여가며 다 뛰고 난 다음 두 번째 팀이 뛸 차례였다. 

눈썹이 진하던 아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하나야, 나 안 뛰면 안돼?”
“왜?”
“자신없어.”
“다 했는데?”
“그래도 자신 없어.”
그 아이는 큰 눈에 서양아이처럼 속눈썹이 짙었다. 

“내가 같이 뛸께.”

나는 두번째 팀의 대오를 맞추고 다시 그 옆에 섰다. 그리고 처음처럼 구령을 맞추며 나에게 자신없다고 한 아이의 손을 꽉 쥐었다. 
정해진 시간이 있었다. 3분 20초 정도 됐을 것이다. 내 손을 쥔 아이가 뒤쳐지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꽉 쥐고 허리를 한 팔로 감쌌다. 한 명이 더 처지기 시작했다. 나는 부반장인지 체육부장인지에게 구령 붙이는 것을 넘겼다. 
나와 두 아이는 내 양손을 잡고 대열의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구령을 같이 붙이며 더 뛰었다. 나는 그 두 아이들의 손을 잡은 채로 800미터를 한 번 더 완주했다. 
담임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반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오래달리기를 완주했다. 정해진 시간내에. 

그 이후로 체력장을 하다가 아이들이 죽는 일이 있었다. 중3때의 내 행동이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일이 됬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소름이 끼쳤다. 

사람들을 본다. 
많은 사람들은 멀리 보지 않는다. 넓게 보지도 않는다. 그걸 멸시하는 건 옳지 않다. 내가 가는 길과 다른 길로 가는 것을 비난하는 것도 옳지 않다. 멀리 보거나, 올바른 것을 판단하는 것도 개인의 역량이다. 그 사람의 건강, 깜냥에 따라 시야는 달라진다. 
능력이 부족한 것은 차별받아선 안된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일을 그만둬서는 안된다. 그 사람을 봐야한다. 

손을 잡고, 내 속도를 늦추고, 설령 내가 잠시 멈추더라도. 같이 가는 게 옳다. 
떠나겠다는 자를 붙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걸음을 맞춰야 하는 것은 구령을 붙이는 자가 할 일이다. 

중 3, 과거의 나는 이미 없다. 나는 그 때의 내가 아니다. 그 때의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도덕적인 인간이었다. 다시 돌이킬 수는 없다. 그 때의 나를 떠올린다. 열 여섯의 내가 마흔에 나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꽤 많다. 

2014. 6. 21.

가지 않을 봄

더위가 시작되었다. 
귀한 사람과의 이별에 마음은 덕지덕지 끈끈하다. 
온 도시에 선거용 현수막이 펄럭인다. 예전처럼 노래하며 외치는 선거운동이 없다는 것도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다. 

선거에 나온 사람들의 프로필 사진을 유심히 본다.
사람들의 사진을 자주 찍게 된 게 2년여, 되었다. 
이전의 내 사진엔 사람은 단 한 명도 들어있지 않았는데. 
한 사람을 보내는 자리에 쓰인 내가 찍은 사진이 나에게 던진 파문은 크다. 

버스전용차선에 폐지를 잔뜩 실은 리어카가 움직인다. 
민소매에 붉은 색 등산조끼를 입은 할머니가 그 뒤에서 리어카를 밀고 있다.
날씨가 더워지거나, 추워지거나, 그런 것은 먹고 사는 것을 지체시키지 않는다.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기억하는, 더 또렷하게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오전을 보냈다. 저 노인은 누가 기억해줄까.

귀중한 사람이 갔다.
그 분이 들으면, 누구 하나 귀중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햇빛이 뜨거워도 쓸쓸함을 녹여주진 않더라.

얼굴과 손이 짭쪼름해져도, 스산함이 사라지진 않는다.
지치도록 잔혹한 이 봄, 징그럽고 지겨운, 이 봄이 간다.
사라진 사람은 영원해진다 해도, 이 봄은 사라지지 않을 모양이다.

 

2014. 5. 27.

만날 수 없던 사람, 만날 수 없는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모였다. 
추도 예배 내내 훌쩍이는 소리와 견딜 수 없어 터지는 탄식이 있었다. 
추도 예배임에도 불구하고 고인의 유족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모두들 가슴 속에 불 한 덩어리 크게 얹혀 있었을 것이다. 

뻔히 아는 길을 가면서 계속 직진만 하느라 길을 뺑 둘러갔다. 
어쩌면 그 장례식장에 영원히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다. 

어떤 소란이 있었다고 한다해도 
모두가 황망하고, 화가 나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소에 악수만 하고 지내던 사람들끼리, 팔을 쓰다듬으며 인사했다.
꼭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 큰 남자들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토해냈다.
누군가 무너질 것 같아 걱정만 더해졌다.

장례식장이 있는 그 병원 로비와, 고인의 장례식장에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키가 크고 안경을 쓰고, 자켓을 입은 남자를 볼 때 멈칫했다.

고인의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 속에서 고인을 찾고 있었다.
머리로, 괜찮다고 쓰다듬어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득 문득, 모두가 그렇게 얘기하듯이 나도 그 분이 저 멀리서 성큼성큼 걸어오며 환하게 웃어줄 것만 같다.

내가 2년전 찍어드렸던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었다.
원본이 필요하다는 말도 전해듣지 못했다.
얼마나 서로 경황이 없었다는 얘기였을까.

유족의 손을 잡고 이럴려고 찍었던 사진이 아니라고 했으나, 오히려 나를 위로하셨다.

괜찮다고, 나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10년을 같이 한 사람도, 33년을 같이 한 사람도 있는데 나의 황망함은 비교할 수 없다고 그러니 나는 금방 일어날 거라는 말은,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다.

내일까지, 통곡하고 울고 나면.
이 귀한 분을 보낼 수 있을까.

이 세상을 살면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분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없던 사람. 그래서 그 분은 하늘의 것이었나.

故 문홍빈 사무총장

아직은 명복을 빈다는 말도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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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일지

노후한 배가 있었다. 
정부정책이 바뀌어 사용기한을 늘려주었다. 
불법 증축과 개조를 했다. 
화물을 3배나 더 실었다. 
그 화물을 결박하지도 않았다. 
안개가 많이 낀 날이었다. 
그러나 출항했다. 
수학여행을 가는 아이들이 탑승했다. 
탑승자 정보가 정확하지 않았다. 

배가 기울어지면서 침몰했다.
선장와 선원들이 먼저 탈출했다.
구명정이 펴지지 않았다.
배가 급속도로 기울었다.
안내 방송은 없었다.
해경은 40분이 지나 도착했다.
신고한 아이에게 GPS 위치를 물었다. 아이는 GPS를 몰랐다. 

해경의 구명정은 선장과 선원을 구출하고 더 구조작업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구한 것은 민간인과 어업지도선이었다.
중대본부가 꾸려지지 않았다.
기자들이 몰려왔다.
친구가 죽은 걸 알고 있냐고 살아남은 아이에게 물었다.
안행부 장관이 와서 참모들과 치킨을 시켜먹었다.
밤이 되었다.
구출된 선장과 선원들은 해경의 개인소유 아파트에서 첫 날밤을 보냈다.

민간잠수사들이 몰려 왔으나 지휘체계가 잡히지 않아 내려갈 수 없었다.
선주와 해경이 계약한 업체가 독점업무를 수행하게 되어 있었다.
민간잠수사들은 “독점계약”에 가로 막혀 수중진입에 실패한다.
업체와 자원봉사, 그 사이의 해경은 타협하지 못한다.
한 쪽은 사람의 목숨을 우선시 하는데 한 쪽은 실적과 계약, 윗선의 눈치를 중시하니 타협점은 없다.
교육부 장관이 내려와서 사발면을 먹었다.
총리가 내려와서 물병을 맞았다.
대통령이 내려왔다. 어떤 부모들이 무릎꿇고 빌었다. 책임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천명하고 돌아갔다.
해경 대변인이 발표를 하던 중에 예비역 중령이 나타나 왜 입수를 방해했느냐고 따진다.
구조가 지지부진하자 부모들이 행진을 시작한다.
경찰 수백명이 나타나 잽싸게 가로막는다.

분향소가 차려진다.
정부주도 분향소의 이전 사실을 죽은 아이들의 단체카톡방에 통지한다.
대통령이 조문을 했다.
신원미상의 조문객이 대통령의 등뒤에서 접근했으나 안전사고는 없었다.

알바생의 장례비는 지원할 수 없다는 발표가 있었다.
구조작업중이던 잠수사의 바지선에 해경선박이 충돌했다.

한 번도 실종된 적 없이 갇혀 있던 아이들이 시신이 되어 4km 밖에서 발견되었다.
사고가 난 지, 17일이 지났다.

– 가만히 있으라, 기다리라고 말했다.
사고 발생 17일째 되는 날, 지하철이 부딪히는 사고가 있었다. 승객들은 안내방송을 기다리지 않고 침착하게 빠져나와 스스로를 구했다.
이제 그 어떤 재난이 닥쳐도 그 누구도 안내방송을 믿지 않을 터이다.
내가 살고자 한다면 가만히 있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 이게 국가를 바꿀 것이다.

용서하지 말아라

일주일간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책이 한 권 있다.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한 소년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살인범이다. 7년 전의 일이다. 7년 전의 그 밤이 갑자기 소년에게 밀려온다. 작가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을을 정확하게 설계했다. 책의 앞부분엔 이 마을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물론 가상의 마을이다. 이 마을의 중심은 저수지다. 소년은 저수지 근처의 삶을 살았다. 파도치지 않는 잔잔한 저수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모두 인간과 기계에 의해 통제되는 곳, 움직이지 않는 것은 썩기 마련일진대 소년은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보냈고 살인범의 아들로 살았다. 소년은 잠수를 했다. 검은 물결 속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소설은 내내 어두운 밤이었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밤만 가득했다. 검은 밤, 검푸른 물, 외로운 달 하나, 소름끼치는 누군가의 실루엣, 소년이 말하던 물의 이미지, 작가가 전해준 그 물의 기억은, 잔인한 마녀의 길고 더러운 손톱같았다.

 

진도는 아름다운 섬이다. 그 앞바다는 눈부셨다.

거센 풍랑과 파도가 그치고 바다는 길고 더러운 손톱을 감췄다. 비웃고 싶을 만큼 찬란한 햇살 아래 여유롭게 넘실대는 잔잔한 물결,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얼굴을 싹 바꾼 바다는 반짝이는 물살 위로 아이들을 하나씩 꾸역꾸역 토해냈다.

욕지기가 올라온다. 잔인한, 참혹한, 비참한, 무서운, 역겨운, 모든 것들이 저 배에 가득했다. 더러운 배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름답고, 생기발랄하고, 뽀얀 젊음의 곱디 고운 아이들은 그 배에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아이들은 물결에 휩쓸려 아름다운 땅 진도로 돌아오고 있다. 바다는 수천가지의 얼굴을 가졌는가보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다 잡아 삼키지만, 돌려주고 싶은 것들이 있었을 거다. 그렇게 믿고 싶다.

 

문득,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 처음 갖는 구체적인 생각이다.

호탕하게 웃고, 힘차게 걸으며, 술에 취한 듯 아무데서나 춤추고 노래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졌다. 빛나는 햇살을 보며 바다를 떠올린다.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려면, 눈을 감아야 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 누군가의 통곡,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도 따위, 눈 감고 귀 막고 안 보고 안 들으며, 오로지 오늘은 햇살이 좋아서 웃고, 내일은 비가 오니 시원해서 좋다고. 눈 꾹 감고 외면하면 가능한 일이겠다.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심은 고이 접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숨겨놓기로 했다. 매일 밤 꺼내서 한 번씩 읊어야 한다.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러나 사물이 명료하게 보이는 빛이 있는 한, 두 눈 똑바로 뜨고 두 귀를 번쩍 열고, 슬픔이 가득한 이 도시에 두 다리로 꼿꼿이 걸어야겠다. 잊지 말아야 한다. 깊은 곳에 숨겨둔 쪽지를 매일 꺼내 읽으리라.

 

우리를 용서하지 말아라. 나도 나를 용서하지 않겠노라. 

가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그냥 내 이야기

1. 가난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글쎄 이 글이 가난에 대한 이야기일까, 노동에 대한 이야기일까, 밥벌이나 경제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냥 내 얘기라고 치자.

 

오늘따라 자꾸 나에게 가난에 대해 묻는다.

사람들이 묻는다.

스치는 글이 그렇고, 읽는 책이 그렇다.

잠시 가족들이 본다고 켜둔 TV에서 나오는 프로그램이 그렇다.

고단함, 가난, 그리고 노동에 대해서 자꾸 말한다.

 

오늘은 “주우웬(朱文)” 라는 중국 작가의 소설 “가난한 자는 죄다 때려눕혀라” 라는 단편도 읽었겠다, 가난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가난을 알까.

누군가 나에게 가난해보고 싶다는 치기 어린 말을 했을 때, 내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가난이 뭔지 알고 감히, 네가 그런 말을, 그것도 감히, 내 앞에서, 어떻게 네가 나에게! 라고 발악을 했었다.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났던 걸까.

가난해보고 싶다는 말은 어린 아이의 말이었고, 그 아이는 마음이 빈한하기 짝이 없어 어떻게든 전일성을 맞춰보고 싶은 욕구였을거다. 그 마음은 몇 년이 지난 다음에 깨달았다. 누군가 나에게 가난에 대해 묻거나, 가난에 대해 언급할 때면, 먼저 분노가 일었다. 다시 말하고 싶지도 않은 것들에 대해서 다시 말할 수 있으려면 마음속에 깊이 가라앉아야 한다. 침잠하는 것. 오래 숙성된 간장은 짠맛이 아래에 가라앉고 깊은 감칠맛만 위로 떠오른다 하는 것처럼, 제대로 된 조선간장처럼, 묵어야 한다. 맛있게.

 

2.

그렇다. 가난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가난하지 않고 부자 소리를 들을 만큼 풍족하게 산적도 있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나의 부모님은 배울 만큼 배워 돈을 벌고 있었고, 둘 다 장사를 하다 만나 공동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전 국가의 경제 성장이 다 같이 이루어질 때라 조금만 움직이면 돈을 벌지 않는 게 오히려 어려운 시절이었을 거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는 할 수 있는 일도 벌일 수 있는 일도 무궁무진했으므로. 근대국가의 기초와 산업화를 동시에 만들어 내던 시절이었다. 모든 게 속도전이었고 빠르게 움직이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난 이후, 우리 집 가계는 불같이 일어났고 상당한 수준의 소득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 때 우리가 부자라는 걸 알았다. 나에게 없던 물건들, 그리고 남들에게 없던 물건들이 생겼으며 더 이상 걷지 않고 아빠의 차를 타고 다녔으며 글자로 모르는 나에게 풍족한 물자가 주어졌고 게다가 매일 종이인형을 사러 갈 수도 있었다. 매일 매일.

그리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몰락이 시작됐다. 이때부터 점점 하락세를 거듭해 결국 살던 동네를 떠나고 세간살이를 정리하고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시기가 열렸다. 이 가난은 계속되어 중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여러 가지의 사건들을 거쳐 아빠와 엄마가 헤어지고, 엄마가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에 뛰어든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없던 물건들이 생겼고, 있던 물건들이 바뀌었으며, 반지하방에서 연립주택으로, 연립주택에서 더 넓은 집으로, 그리고 아파트로 옮겨갔다. 아파트에서 고급세단을 타고 다닐 때, 그 때 다시 몰락이 시작됬다. 그 때 나는 성인이 되었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발생했다.

억울하기도 했다. 보호받을 곳은 아무 것도 없었고, 나는 자격증이나 기술도 없었다. 인문계를 졸업한 스무살 여자애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 종일 서 있어야 얼마간의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로 국한되었다. 세상 어디에도 나에게 땡전 한 푼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을 때, 나는 내가 알 수 없는 부채를 짊어지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고, 내가 10년을 넘게 죽도록 일을 해도 갚을 수 없는 액수라는 것도 알았다.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부채를 책임지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나와 내 동생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 감당하겠다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사업을 날려먹은 엄마가 속세에서 잠시 피신하며 나에게 남겨준 것 중 내가 꼭 해결해야만 했던 것은 동생의 밀린 등록금, 재산을 처리하기 위한 연체된 세금,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던 동생에게 필요한 돈 정도였다.

거기에 충실했다. 그 나이에 그 누구보다 많이 벌기 위해 주야로 뛰었다. 하루에 서너 시간을 자더라도 일거리가 있으면 덤볐고 나에겐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해서 안정된 직장에 지원해보지 못했다. 물론, 비정규직이거나 계약직이었지만 잘하면 정규직만큼의 대우를 받을 만한 것들에서는 내가 자격증도 기술도 없고 스무 살 보다 서너 살 더 먹은 아가씨는 채용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다.

주거지는 아파트에서 오피스텔로 오피스텔에서 고시원으로 전락했고 고시원에서 2년 반을 버틴 후 옥탑방으로 옮겼고 옥탑방에서 월세방으로 옮겼고 그 다음에 현관 안에 화장실이 있는 반지하방에 혼자 사는 직장 선배가 살고 있는 곳으로 더부살이를 자청해 들어갔다. 미술전문고등학교를 다니던 동생의 등록금은 당시 대학 등록금과 맞먹었고 때때로 붉은 고지서가 날아들어 작게나마 더 이상의 소송을 막는 정도의 기능을 했다. 그렇게 얼마 안됐던 보증금도 야금야금 줄어들었다.

몇 년간 정해지지 않고 일거리가 생기는 대로 했던 각종 아르바이트들은 순간순간 위기를 모면할 만큼의 돈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때 그 때 위기를 모면하다 보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체력소모도 심해 되도록 하루에 6시간 정도는 잘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한 달의 월세 정도는 보장받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게 스물네 살 무렵이다. 영업직보다 급여는 분명히 적지만, 묶여 있는 시간이 많아 지출이 덜하고 식대를 보장해 주는 곳으로 옮기려 애썼다. 가난했는가. 가난했다. 그렇지만 끼니를 굶는 일이 많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가 생각했던 가난은, 소나무 껍질을 벗겨 죽을 끓여먹는 정도의 가난이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아무리 열악한 주거환경이라도, 적어도 대문 안에 화장실이 있었고, 세탁기는 없어도 샤워는 할 수 있었다. 도시에서는 벗겨먹을 소나무 껍질 대신 라면이라는 게 있었고, 차비가 있으면 친구를 찾아가 한 끼를 배부르게 때우고 올 정도의 주변머리는 있었다.

혼자 설렁탕을 사먹다가 집에서 혼자 웅크리고 있을 동생을 생각하며 더 급하게 먹었던 기억도 있고 그 상황에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악이 뻗쳐 공중전화 박스에서 밤새 삐삐를 쳤던 기억도 있으며, 여름바지 한 벌을 가지고 겨울까지 내내 영업을 다니던 때도 있었다.

스물 네 살이었을 거다. 쥐꼬리만 한 기본급여가 보장되던 직장의 소득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 때 당시 120만 원 정도를 벌 수 있었는데 매달 30만 원 정도의 월세를 내고 집에 훼밀리 주스를 한 병 정도 사다 놓을 수도 있었다. 전기세도 낼 수 있었고 가스 요금도 낼 수 있었다. 나는 냉장고에 넣어둔 훼밀리 주스병을 보고 이제 어느 정도 고생이 끝나간다며 흐뭇해했다. 동생이 그 비싼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였다. 그 때부터 그 정도 수준에서 머물렀다. 다시 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하루에 12시간씩 서 있는 일은 없었고 앉아서 할 수 있는 일로 아르바이트의 종류가 변했다. 돈이 생기면 공부를 했고 앉아서 돈 버는 인간이 되기 위해 애썼다.

내가 처음 했던 아르바이트는 편의점이었고 그 다음엔 커피숍이었고 그 다음엔 호프집이었다. 여기까지는 그 때 스무 살 또래들이 했던 전형적인 알바의 변화다. 호프집에서 통기타 가수로 점프를 한 번 했고 이리 저리 행사와 업소를 다니며 노래를 하고 MC를 봤다. 12월 31일 남대문 시장 새벽 2시 무대 같은 건 일거리만 있으면 고마웠다. 그래도 더 벌어야 해서 아침에 일어나 지하철역에서 검표를 했고 오전과 오후엔 주유소에서 알바를 했다. 편의점보다 시급이 조금이라도 더 비쌌기 때문에 기름 냄새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밥도 잘 주었다. 통기타 가수 생활은 사기꾼과 협잡꾼의 난무와 누군가 본격적으로 나이트클럽으로 전향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을 때였다. 더 나가다가 어디까지 갈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전화번호를 바꾸고 이사를 했다. 신용카드 회원모집, 보험회사 영업, 옷가게 알바, 햄버거 스테이크 하우스의 웨이츄리스를 거쳤다. 한 번도 안정적인 직장을 갖지 못했던 것은 매달 받는 급여가 적다고 느꼈기 때문이며 나에겐 내 나이에 어울리는 연봉이 절대적으로 적은 액수였다.

 

스테이크 하우스는 이태원에 있는 곳이었는데 필수적으로 영어를 해야 했고 내가 가장 빠르게 습득할 수 있는 고급 기술이라는 걸 알아채고 영어공부에 매달렸다. 그 집을 나올 때 나는 초벌번역을 인맥을 통해 하게 되었고 영어 과외를 맡았다. 어학학원에 영어공부를 더 하기 위해 다니면서 영문법 책이나 문제집을 타자로 치는 일도 하게 되었고 누군가 워드 작업을 알바거리로 부탁하기도 했다.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가장 학비가 저렴한 중국대륙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웹사이트 기획, 기사취재, 어설픈 통번역, 유학원 가이드 등 주로 말과 글을 사용하는 돈벌이를 했다. 그러니, 앉아서 돈 버는 직업군이 되는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그 때는 그저 내가 어떤 거대한 파도를 만나 쓰러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전에, 혹은 그 과정에 나의, 혹은 나의 가족의 어떠한 요소가 가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한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은 분명히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결합되는데 우리가족은 언제나 외부에 원인을 돌렸다. 그게 습관적이며,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2.

나의 일에만 집중해서 생각해봤다. 설령 부모가 어떤 일을 벌려놓고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자녀인 내가 그 일들을 처리해야 했으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을 때 말이다.

나에게 그 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건전한 직업관이었다. 어떤 직군의 일이 결과적으로, 장기적으로 나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태어나서부터 스무살이 될 때까지, 나의 양육자였던 사람들은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의 경제는 매우 편협했다. 나와 가장 같이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은 생모인데, 우리 엄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개인사업자였다. 비정규직이거나, 계약직도 해 본 적이 없고 언제나 돈을 융통하거나 스스로 벌어 자영업을 고수해왔다. 지금도 그렇게 지내고 있다. 나는 회사라는 조직체가 뭔지 모르고 성인이 되었다. 회사라는 곳에 직원이 되면 상여금이 나온다는 사실을 이십대 후반에 알았다. 그리고 4대 보험이라는 것도 있고 직원이 일을 하다가 다치면 그에 대한 댓가도 치러준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몇 년을 다니다가 퇴직을 하게 되면 퇴직금을 준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회사라는 곳은 적어도 수개월의 고용보장이 되고 운 좋으면 몇 년까지도 고용보장이 된다는 것은 불과 몇 년 전에 깨달았다. 면접을 보러 가면 면접비를 준다는 것도, 결혼 후에 알았다.

회사를 다녔어야 했구나. 라고 후회하기도 했다. 모자라보여도, 점심을 해결해주고 보너스를 주는 곳에 다녔으면 그렇게 미친 듯이 밤거리를 헤매고 다니지 않았어도 조금 더 여유 있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스스로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영업직은 대부분 차비도 스스로 해결하고 밥도 스스로 해결하고 외부에 보여야 하는 본인의 외모도 깔끔하게 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어 지출이 상당하다는 것을, 이십대 중반 넘어서 알게 되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날품팔이 같은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영업직의 한계였다. 내가 능력이 더 뛰어나 고액을 벌어들이는 능력 있는 영업인이었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나는 그 때 고작, 스물 둘, 스물 셋. 경제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는 그 어떤 영업도 순탄하게 해내기 어려웠다.

매달 들어오는 돈이 다르니 저축도 요원했다. 갚아나가야 하는 돈이 있었고 언제나 무언가가 밀려 있었다. 들어오는 대로 해결하는 일의 반복은 저축은커녕 급할 때 단 돈 십만 원이라도 빌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다.

 

저축이 없고 늘 부침이 심하며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하고 주기적으로 업종을 바꾸는 환경에 익숙했다. 장기적 계획이라는 건 세워 본 적이 없다. 어떤 계획을 세울 때마다 허무했다. 또 어떤 일이 벌어져서 다 무너지겠지. 라고 한숨 쉬었다. 좋게 말해 노마드지, 실제로는 계속해서 밀려나는 도시 빈민에 불과했다. 내가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한 적 없고 당장 풀칠을 하기 위해 아무 데서나 일을 했다.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미처 하지 못했다. 집안의 경제 형편이 롤러코스터를 타다 보니 돈은 무척이나 허무하고 요망한 것이었다. 나는 백원의 가치가 무엇인지 몰랐고 만원과 십만원을 사용하는 법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으나 나는 돈을 경시했다. 돈은 어차피 사라지는 것, 내가 아무리 악착같이 벌어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남들에게 쉽게 들켰다. 그 성향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쟤는 돈보다 명예, 본인의 기쁨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아이라는 걸 알아챈 사람들이 많았다. 급여를 제대로 못 받은 적도 있고 약속한 돈을 떼어먹히기도 했다. 나는 세상이 험하고 그들이 나쁘다고 생각했으나, 셈이 빠르지 않고 돈에 대해서 철저한 개념이 없다는 것이 너무 빤히 들여다 보였다는 것, 그래서 그들에게 기회를 줬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누군가 나에게 돈이 뭐냐고 물으면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언제나 모자란 것이고 없으면 벌면 되는 것이라고 쉽게 대답했다. 성실하게 일을 하고 꾸준하게 참고 꼬박꼬박 모아오는 사람들은 이런 나의 퉁명스런 대답에 놀라곤 했다. 나는 돈이 뭔지 몰랐다. 늘 내야 하는 것들이었고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하는 교환수단, 나에게 머물지 않는 것들이라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모아야한다는 생각도 잘 하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에게 뜯길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런 일이 많았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축은 매우 허망한 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작은 것을 모아서 큰 것을 이루는 기쁨을 배우지 못했다. 작은 것들도 모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내 통장은 9000원이 남아 지갑에서 2000원을 꺼내 현금인출기에 넣었다가 10000원을 만들어 수수료 700원을 지불하는 통로였다.

 

3.

결혼을 하고, 생계를 책임져 주겠다는 사람이 생겼다. 물론 나도 그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돈에 대한 개념은 두 사람이 양극단에 서 있었고 나에게 돈은 모아봤자 얼마 되지도 않고 언젠가 털리는 것이었으나 남편에게 돈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아둬야 하는 것이었다. 비상상황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대처하는 방법이 달랐다. 나는 돈 떨어지면 이런 호사도 못 누리니 있을 때 실컷 먹는 사람이고 남편은 돈 떨어지면 이런 호사를 못 누리니 오늘 조금 덜 누리는 사람이다. 양쪽 집의 가계를 책임지고 있는 어머니들의 태도가 그러했다. 없을 때 생각해서 그 때가 너무 가슴 아파서 반지하 살던 거, 전기 끊겼던 거 슬퍼서 온 집안에 쓰지 않는 전등도 죄다 켜놓는 사람이 우리 엄마고, 없을 때 생각해서 그 때가 너무 가슴 아파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등불만 켜는 사람이 시어머니였다. 경제관념의 차이는 갈등을 만들었고 그 속에서 나는 내가 벌지 않는데 내 입에 밥이 들어가는, 그것도 아주 좋은 밥이 들어가는 상황을 참아내지 못했다.

모든 것이 억울했다. 내가 저 사람만큼 경제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것과, 내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냈는데 남은 게 없다는 것이,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피터지게 살았는데 저 사람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을 질투했다.

그 갈등을 극복하는데 8년이 걸렸다. 이제는 내가 남편의 경제관념에 매우 순응하며 지낸다. 은행 수수료, 소소한 주차비, 안내도 되는 몇 백 원을 아무 생각 없이 던져버리던 생활에 큰 문제점이 있었다. 오늘을 버티면 돈을 안 빌리고 이자도 안내도 되는데, 그 오늘을 버티지 못해서 돈을 빌리고 이자를 내는 생활이 내 가족의 경제생활에 가장 큰 줄거리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돈은 허망하고, 돈은 있다가도 없고, 아무리 많아도 언제나 모자라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런 이유로 이 쓸데없는 것들에 연연하지 말고 하루만 살기로 했던 것이 올바르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돈은 허망하고, 있다가도 없고 아무리 많아도 언제나 모자라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풍족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을 바꾼 것이다. 그 생각을 바꾸는 데 8년이 걸렸고, 이제 돈을 바라보는 시각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도 거의 사라졌다.

 

가난이 유전되는 것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회학자들이 있다. 물론, 사회적으로 절대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는 시스템이 존재하기도 한다. 가족 중에 누군가 갑자기 아프거나, 그에 대한 사회보장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배우지 못해서 안정된 직장을 가지지 못했고 제대로 된 경제관념을 들어본 적 없다. 고용이 불안정하여 위험한 일을 해서 재해를 당하거나 질병을 얻고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하지 못한 식사를 하고 그래서 건강을 해치고 그나마 있던 직장도 더 다닐 수 없는 일들이 반복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완전히 가난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나에겐 적어도 몇 가지 재능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물려받은 것인지, 자라면서 스스로 즐거워서 발달시킨 것인지 분명하지 않아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나라는 사람 하나가 소득을 일으킬 수 있는 몇 가지 힘이 있었다.

건강했고, 동작이 빨랐고, 기회를 잘 움켜쥐었고, 사람들 앞에 서는 일에 스스럼이 없었으며 무대공포도 없었고, 뭐든지 빨리 배웠다. 이런 것들이 내가 가진 자산이었다. 그 자산으로 아무 것도 없는 듯 보였지만 사실 꽤 많은 걸 가지고 있었고 그걸로 그 세월을 버텼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지 않다. 건강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 늘 주눅 들어 있고 평생의 가난으로 인해 빠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늘 불안정하여 빨리 배우지 못할 수 있다. (지속적인 가난은 뇌의 스트레스를 가중시켜 지능을 떨어뜨린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단적으로 생각해서 매달 연체고지서가 날아오거나 매 주 빚 독촉 전화를 받는다면 그 사람은 건강한 판단을 할 수 없다) 내가 말하는 건강은 단순히 팔다리와 근육의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건강도 포함한다. 무언가 배울 수 있는, 판단할 수 있는, 계산을 할 수 있는, 지속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뇌의 건강함 말이다.

이럴 때 사회의 개입이 필요하다.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 개입해야 한다. 전쟁 후 폐허가 된 나라에서는 불같은 경제성장이 일어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일어설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가의 기틀이 안정적으로 돌아선 다음에 각 계층은 점점 안정된다. 그리고 그 역전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부모로부터 후대에까지 물려받는 물적, 비물질적 자산이 축척되기 때문이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기운 차릴 수 있는 개입, 배우지 못한 사람이 글자라도 읽을 수 있어 조금 더 나은 일을 하게 만드는 사회적 개입, 아픈 사람이 가난할 때 가족들이 매달리지 않아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개입이, 절실하다. 개인이 해 낼 수 있는 역량밖에 있는 고난은 실로 엄청나다.

 

가난이라는 것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일이다. 라는 건 거짓말이다. 매우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며 오롯이 혼자서의 힘으로 절대 해 낼 수 없는 편에 가깝다. 가난한 자에게 고기를 주지 말고 그물을 주라는 옛말처럼, 그물을 주되 그 그물의 관리법과 좋은 어장과, 사물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까지 애써줘야 한다는 것, 가난한 사람이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지 않더라도 최대한 그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여러 사람의 힘이 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이제 누군가 나에게 가난해 보고 싶다고 이야기 한다면 허허 웃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가난을 극복하기 어렵듯이, 돈에 대한 애정도, 가난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한 개인의 환경도 하루 아침에 폭삭 소멸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제는 그렇게 곤고해졌을테니.

 

더 이상 서 있는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지 10년이 지나 이제는 앉아만 있는 일을 한다. 그래서 목이 아프고 어깨가 결리고 손가락이 저릿저릿하다. 살이 찌고 배가 나왔고 소화가 잘 안된다. 그렇다고 이제 다시 서 있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미 다리도 망가져서 오래 서 있지도 못한다. 어찌됬건 우리는 계속해서 품을 팔아 밥을 먹고 살고 가난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내가 파는 품엔 내 목의 근육도, 내 다리의 연골도 조금씩 갉아먹으며 내놓는 것 아니었나. 어쩌면 나의 생명의 일부를 계속해서 돈이나 밥으로 바꿔가며 소멸해가고 있는 느낌이다. 어쩌다 인간은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2014. 1. 19.

믿습니까!

1. 강신주의 글때문에 충격받았다는 글은 어제인가 그제 봤다. 그리고 그게 퍼져서 오늘 오후부터 여기 저기 담벼락에 걸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어떻게 이리 말할 수 있는가! 라는 반응이었다. 그 글은 2012년 어느 신문에 기고한 칼럼이고, 수치심에 대해 거론하며 노숙자를 끌어 들였는데, 그들은 ‘수치심도 모르는 존재’처럼 읽을 만 했다.

그 글에 대한 분노폭발은 강신주 개인에 대한 분노폭발로 이어졌고 인신공격도 이어지고 있었다.

이 분노의 대열에 쉽게 동참하지 않은 것은 일단 운전중이었고, 대부분의 반응이 ‘어떻게 철학자라는 사람이 이럴 수 있느냐’ 였기 때문인데 이 반응을 나타낸 사람들의 대다수가 나와 비슷하게도 평소, 닭그네나 귀태의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는 걸 기억하기 때문이다.

형평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권력을 가진 자, 즉 기득권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비난과 원색적인 욕설까지 할 수 있다. 때로 그런 것들은 정의로운 발언, 속시원한 이야기, 타인이 하지 못할 이야기를 대신 하여 카타르시스를 전해준다 – 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그러나 그 반대축에 서 있는 약자에 대한 비난은 무식한, 뻔뻔한, 엘리트 지상주의의, 인문학이 뭔지도 모르는, 저 딴 게 학자라고, 일컫는다. 매우 쉽게.

나는 아까 그 글을 보고, 왜,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해도 되고, 노숙자에 대한 비난은 하면 안되는가? 라고 생각했다.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약자의 정의는 무엇이며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내가 그랬다. 약자 앞에 약하고 강자 앞에 강하자는 주장아래, 강자를 씹어내어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대신 약자는 언제나 사회적 피해자라 “나를 투사하여” 맹목적으로 그들의 편을 들었다.

여기에서 내가 제시하고 싶은 것은 왜, 약자는 객관적으로 평가하거나 비판해서는 안되는 대상이냐는 것이다. 그게 과연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가?

어제 나이지리아의 한 소설가인 치마만다 아다치가 한 말이 생각난다. 단편적인 이야기의 위험성. 우리는 가까이 다가가보지 못한 약자계층에 대해 너무 단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2. 가난하다는 건 벼슬이 아니다. 부자인 것도 벼슬이 아니다.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그 모든 것도 단편적이지 않다.

권력과 부를 가진 누군가의 삶은 평생 폭력에 노출되어 이미 정신적으로 좀비(오늘 회자된 낱말이므로 활용해보도록 하자)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돈과 명예보다 삶과 행복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 쉽게 불행한 부자를 시기하고 비난한다.

적어도, 이 글을 읽을 정도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가난이 몸에 익은 사람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에서 좋게 말해 자유롭다. 쉽게 말해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구걸을 하거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은 자존감이 바닥에 가닿은 것이 맞다. 그게 항상 그의 의지때문도 아니고 항상 사회적 구조 문제 때문도 아니다. 이야기는 단편적이지 않으므로.

20년전 동자동 뒷골목에서 만난 사람들은 주변에 피해를 입히며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담배를 피우며 앵벌이를 해서 냉장고를 바꾸고 보일러를 바꿨다. 싸움을 하다 가스통을 열어 불을 질러 버리기도 했다. 아침 10시에 소주병을 들고 돌아다니다 행패를 부리기도 했고, 새벽부터 출근하여 하루 종일 그들의 오줌을 닦아야 하는 경비원과 청소노동자가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몇 백원을 달라고 생짜를 쓰기도 했고,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 이불이나 옷을 훔쳐 가기도 했다. 그들에게 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오늘 여러사람들이 비난한 강신주의 표현에 의한 ‘좀비같은 노숙자’이거나 그보다 조금 형편이 나아 쪽방 한 칸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만큼 법의 외부에서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부류들은 또 있는데 바로 고위 권력층이다.

3. 경제적 약자를, 노점상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타당한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세금 한 푼 내지 않는다. 당신이 며칠 동안 애를 써서 겨우 접속한 국세청 홈페이지에서 소득공제 자료를 찾고 어떻게 10원이라도 더 환원 받을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일을 그들은 안 한다 말이다. 그들이 받는 혜택이 없기에 세금도 내지 않으며, 때로는 어느 학교의 담벼락에 무단으로 조립식 건물을 짓고 통행을 방해하며 몇 년씩 재산권리를 주장하다가 관공서에서 철거를 해서 세금 잘 내는 시민들에게 돌려줄 공원을 만들겠다고 하면 드러누워 폭력경찰 물러가라 ㅇㅇ시장 자폭하라. 등등의 말을 내뱉을 수 있다는 거다.

물론 이런 예시도 단편적이다. 우리는 항상 이 단편적 이야기의 반대편도 살펴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긴 걸 여기까지 읽은, 혹은 강신주가 누구인지 아는 바로 우리- 나를 포함하여) 약자를 비난하기 꺼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출발선이 달랐거나 혹은 같은 선에서 출발했더라도 여러가지 개인적 사회적 이유 때문에 많은 기회를 박탈당했을 거라고 잠재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때로 그들 중의 일부가, 스스로 그 기회를 계속 해서 거절해왔거나, 마음에 맺힌 상처 때문에 스스로를 주변인으로 규정하고 계속 사회에서 겉돌았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들을 어떻게든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내부의 인물로 끌어당기기 위함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 암묵적 동의 안에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법 안의 테두리에 존재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법과 사회란, 그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은 보호할지라도 그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내던지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정당해보이는” 사회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4. 어쩌면 강신주의 “좀비같고 강시 같은 노숙자들”에 대한 반응이 과한 것은 아닌가 경계해본다. 무릇 학자라면, 더구나 인문학 학자라면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인문학이란 인간의 무늬를 곱게 아로 새기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혜택받은 지식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설령 시궁창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더라도 어찌됬건 그들은 문자 해독 능력을 부여받았고 남들보다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좋은 뇌를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므로. 때로는 그들이 선택하지 않은 타고난 혜택 때문에, 혹은 주변의 환경 덕분에 그렇게 될 수도 있으나 절대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의해 지식인이 될 수도 있다. 의지도, 타고난 힘이라, 그 역시 혜택이라 쉽게 말해도 되는 걸까.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사회적 공적 자리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모두 “그러면 안돼” 라고 쉬쉬하며 동의하는 어떤 규칙에 대해서 과감히 아니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오늘 나는 강신주의 글을 읽고 한 개인의 의견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는가 우려한다. 혹은 잘나가는 대중철학자를 자칭한 그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전혀 없었는가 확인하고 싶다. 몇 달전 서점에 갔다가 강신주의 책이 비소설, 인문 부분 베스트셀러 대열에 다수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어… 이 양반 심하네. 라는 생각을 한 적 있다. 게다가 그는 모 방송국의 예능프로그램에까지 출연했으며, 공중파에서 강의도 한다. 적어도 대중들에게 매우 알려진 사람이며 알려지고 있는 중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의 역할은 인문철학계의 공지영쯤이다. 공지영에 대한 문학적 성취나 작품성, 언어조탁성을 떠나 공지영을 인정하게 된 계기는 1년에 책 두 권 읽을까 말까 한 사람이 공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본 다음부터다. 그래 때로 저런 역할을 해내는 사람이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말하자면 예전에 MBC 방송국에서 했던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에서 책을 소개할 때 있었던 논란과 같은 거다. 그 프로그램은 도서시장을 분명히 부흥시켰다. 신동엽이라는 이름은 개그맨의 이름으로만 알던 사람들에게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를 사 읽게 했다. 아무리 좋은 글도, 사람들에게 읽히지 못하면 일기와 다름없다. 세상 가장 평등한 전달 수단이 글자이며 책이라 하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 마당에 대중적 철학자 하나 있으면 좋지 아니한가.

공지영이나, 강신주 같은 대중적인 지식인들은 위험하지만 그들의 순기능도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이 또 한 번의 단편적이지 않은 접근이겠다. 그가 말한 노숙자에 대한 표현도 내가 읽기엔 달을 보랬더니 손가락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가 노숙자를 비난하기 위한 글을 썼던가. 그 글에서 노숙자는 장치였다. 물론 사람의 삶을 놓고 대상화 한다는 비난은 면하기 어렵겠으나 어떤 삶을 대상화하지 않고 글을 이끌어 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강신주가 그만큼이나 되는 사람인가는 세월이 더 흘러봐야 알겠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수치심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리너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왜, 그가 말한 글의 장치에 대한 비유 하나에 이렇게 화를 내는가.

만일 그가, “대통령이랍시고 눈알은 비어 있고 영혼이 없는 미소를 내뱉으며.” 라고 썼다면 뭐라고 답했을 것인가. 그리고 그가 만일 “대통령이랍시고 영혼이 없는 미소를 내뱉는” 이라는 수식어를 2011년에 썼을 때와 2003년에 썼을 때라면 얼마나 다른 평가가 나타나겠는가. 내가 믿는 진실과 내가 믿는 상식이 절대적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그게 지식인의 자세일까? 정말?

2014. 1. 16.

그의 원문글은 다음 링크다.

http://pdf.joins.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2201204080056

2012년 4월의 글이다.

응급실의 치유

애가 코 골고 잘 자길래 영화나 하나 볼까 하고 마루에 앉아 있었더니 보채는 소리가 들려 방으로 다시 가봤다. 귀가 아프다고 아기처럼 울며 보채는데 애 얼굴이 귀까지 붉고 약간 부어 올랐다. 일으켜 세워 뿌우 다시 해보라 하니 물만 찾고 뿌우 하면 귀가 더 아프다한다. 어지럽다고도 하고 양쪽 귀를 잡아당겼을 때 한 쪽에만 극심한 통증이 오는지 자지러지게 울었다. 열은 38도 정도 되는 거 같고 (이제 체온계 없어도 칼 같이 맞춤. 오차범위 +_0.5) 오한이 나는지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춥다고 하길래 아무래도 급성중이염이 의심되는데 응급실 가는 게 꺼려져서 가만히 보다가 이부프로펜이 있어서 7mg정도를 먹였다.

거나하게 대취하신 애 아범이 귀가하시고 애가 꺼이꺼이 울자 응급실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이 30kg짜리 들처업고 병원 가자고 혀꼬부라진 소리로 말한다.
붉으죽죽 달아오른 아이 옷을 입히고 외투를 목까지 잠궈준 다음 대취한 아버님까지 싣고 응급실에 갔다.
참 오랜만에 온다. 하고 주변을 둘러본다. 익숙한 침대, 낯익은 병원로비의 어둑함. 아이는 병원에 오니 갑자기 신이 났는지 조잘대기 시작한다.
소아과의사가 보고 급성중이염 소견을 내리고 이비인후과 올라가서 다시 검사하기로 한다. 이비인후과 외래에 올라가서 의사가 어떻게 어지럽냐고 아이에게 물으니 뱅글뱅글 도는 건 아니고 롤러코스터 타는 느낌이에요. 라고 말한다. 작은 카메라가 달린 기구로 제 귀를 들여다보니 아이는 신이 났다.
으 귀지 으아 귀지 하면서 까르르 웃는다. 한 쪽 귀에 씨벌겋게 점막이 부풀어 오르고 핏방울이 맺힌 채 고막옆에 작은 수포도 생겼다. 아이는 고막을 보고 눈알이다 눈알! 이라고 외쳤다.
귀의 감기같은 거죠. 라고 말하는 의사가 뒤통수만 보이다 고개를 돌리는데 코 크기가 예사롭지 않다.
‘그대는 축농증이 심해 이비인후과를 선택했는뇨’ 묻고 싶었다.

차트를 들고 응급실로 내려가는데 뭔가 소란스럽다. 엄마가 너 응급실 데려오고 싶지 않았는데. 밤에 응급실 오면 교통사고 환자도 있고 무서운 일이 있거든. 이라고 말하며 코너를 도는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휠체어에서 누군가 일어나려 하고 119 구급대원과 보호자 남녀 2명이 휠체어에 앉은 남자를 우격다짐으로 주저 앉히는데 결국 벌떡 일어나서 욕설을 하며 뛰쳐나가려 했다. 얼굴이 벌건 것이 거기도 대취한 분이었다. 젊은 남자는 힘으로 자기를 제지하는 모든 팔들을 무너뜨리려 애를 썼고 그 와중에 구급대원이 얼굴을 맞았다. 만취한 채 뭔가 분노가 가득한데 머리가 노란 여자만 열심히 남자를 뜯어 말리고 있다.
우리집에서 온 대취한 아버님은 대기의자에 앉아 애 잠바를 끌어안고 숙면중이다.

처방전을 받고 서 있는데 기분이 좋아진 아이가 술취해서 난동피는 남자를 보며 히죽히죽 웃다가 제 아빠를 깨워서 저것 좀 보라 한다. 이내 남자를 구급대원과 보호자가 대기의자에 쓰러뜨렸는데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예환아 이리 나와!”
하는 동시에 아 토해요. 하는 여자의 목소리 우웩 우웩 하는 소리, 내 옆에 서 있던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만취해 난동부리는 것을 왜 구급대원이 책임져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진료비와 약값은 79,000원이 넘게 나왔고 나는 눈만 꿈뻑거리는 남편의 가방에서 지갑을 빼서 결제를 했다. 현금영수증 처리는 남편 번호로 해주는 아량도 베풀었다. 어젯밤의 아리랑치기는 알고보니 마누라.

우웩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귀는 여전히 아프다는 데 엄마 아빠 손잡고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병원에 와서 기분이 갑자기 좋아진 아들과 그 아비를 데리고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주차장은 비어 있고, 이제 이런 시린 밤, 이 병원 응급실에 대한 기억도 새로 써나가는 거다. 인체탐험한다고 즐거워 하는 아이와 함께.

2014.1.14.

침묵과 말

꽤 긴 글

1.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암묵적 동의, 내지는 규율이 존재한다. 성문법은 아니지만 보편적 상식이라고 하는 것들이다. 그 주된 것은 “침묵하라” 는 것이다.

특히 이 나라에서는 “침묵하라” 가 매우 쓸모있는 삶의 지침이 되었다. “국으로 가만히 있어.”, “입 닫고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나대지 마”.

중학교 2학년 초에 환경미화를 하다가 학교 학급신문을 대자보 형식으로 만들어 교실뒤에 붙였다. 그 내용이 “왜 학생회 간부는 교사들의 회식을 책임져야 하는가” 였다. 물론. 내가 썼다. 그리고 이미 반장이었던 나는 간선제 투표를 통해 학생회 부회장이 되었지만 1년간 일부 교사들에게 시달렸고 별 거 아닌 일로 체벌도 심하게 받았다. 이 사건은 나에게 낙인이 되어 어떤 교사는 나에게 “너는 교칙을 위반하지 않고 나쁘거나 틀려먹은 짓을 하지 않지만 교묘하게 교사를 골탕먹이는 골치아픈 아이” 라는 이야기도 직접 들었다. 89년의 일이고 당시 전교조가 생겨 몇 몇 교사는 해직 당했고 학교에 남은 교사들은, 그러니까 투쟁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에게 “내가 너한테 밥 빌어먹는 거지새끼냐” 라고 했던 가정교사는 3학년 때 학생회장이 되어 교무실에 인사를 갔을 때 일부러 그랬는지 “이하나 우리 회식 언제해?” 라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회식 없습니다. “라고 대꾸했다.

2.
그런 말을 하면 안되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았다. 적당히 하고 넘어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주변에 있었다. 그러나 여태 내가 성인이 된 이후 살아온 세상은 사실 어떤 발언을 할 기회도 별로 없었고 그래봤자 대충 기업의 부당한 소비자에 대한 태도를 끈질기게 물고 넘어져 이겨내는 정도의 소비자 행동 정도였다. 예를 들면, 부당하게 청구된 전화,인터넷 요금에 대해 6개월을 싸워 결국 승복을 받아낸다던지, 차일피일 미루는 보상문제를 한 방에 해결한다던지. 그러나 이런 것들은 매우 개인적이고 나의 주머니 사정을 우선한 소비자의 행동에 불과했다.

3.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언제나 각인되어 있는 기억이 있다.

실은 엊그제 작은 아이 학교에서 토론회를 빙자한 1년간의 성과발표회가 있었고 학부모 단체장 대표의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학부모들 부터 발표 를 시켰는데 어쩌다 보니 자리 순서대로 내가 제일 마지막이 되었다. 앞에 여덟명정도의 학부형들이 차례대로 소감을 얘기했는데 90%의 칭찬과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10%의 아쉬운 점이 있었다. 물론 모 단체의 대표는 내년도에는 자기가 속한 단체가 취지에 맞는 일을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돌직구도 날렸다.

마이크를 제일 늦게 잡은 게 사달이었다. 쓸데없이 발동하는 이 사명감.
그런 건 개나 주면 좋지 아니한가.

내가 주절주절했던 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모든 선의의 시스템은 수많은 행정절차를 거치며 왜곡되고 변질된다. 시스템, 즉 제도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도 제도여야 한다.

2. 사명감과 봉사정신, 애정으로 교직을 유지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폭력적이다. 수많은 혁신을 외치는 학교에서 교사들이 지치지 않도록 예산을 투입해 정확한 행정보조 인력을 지원하는 것을 제도화 하는 일이 필요하다.
– 이건 과잉의욕에 넘쳐있는 교장을 겨냥한 셈이 되었고, 일부 평교사들은 눈을 마주치며 소리없는 박수를 치기도 했다.

3. 우리 학교 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 대부분의 교육정책의 문제이기도 한, 리더십 강화, 글로벌 교육 이런 거 보다 낮은 자리에서 봉사와 협동, 자치적 능력을 키우는 아이들이었으면 좋겠다. 왜 아이들이 스스로 교실청소를 잘 하지 못하는 지 이해할 수 없다. 난 우리 학교가 청소 잘 하는 아이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오늘에서야 생각났는데, 학년초 전체 학부모 대회의 때 교감이 절대 학부모 동원 교실청소를 엄단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 4학년까지는 매주 혹은 격주 엄마들이 당번을 맡아 교실청소를 해 주고 있다)

4. 진로적성 교육에 대해서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상당히 돋보였다. 그러나 국가 전체적으로 진로 교육정책이 너는 어떤 인간이 되고 싶으냐고 묻는 게 아니라 너는 뭐 해 먹고 살거냐고 묻는 건 아닌지 늘 우려된다.

5. 앞서 말했듯이 제도의 문제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것에서 발생한다. 문제가 발생해도 최소화 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은 확고한 의지가 있는 굳건한 신념과 철학이다. 조금 더 고집있게 한가지의 통일된 방향성을 가지고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을 때, 내 옆에 있던 교감샘이 “너무 많이 생각하셨어” 라고 말을 건넸다.
사실 순간, 아차 했다.

4.
그리고 오늘 내가 페이스북에 우습게 포스팅을 했지만 오후에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잠바가 안 벗겨진다며 울먹이며 전화를 했다. 나는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귀여운 마음에 웃음이 터져 속상해 하지 않고 집에 갔다. 학교 끝나고 점퍼를 입다가 그랬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아침에 등교해서 옷을 벗으려 할 때부터 안 벗겨지더라는 것이다. 그거야 뭐 지퍼에 안감이 물려서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긴 하다.

학교에서 점퍼가 벗겨지지 않아 담임선생님에게도 세 번이나 얘기했는데 선생님이 잘 못 들으셨다며 하루 종일 혼자 두꺼운 오리털파카를 입고 교실에 앉아 있었던 일이 과연 우연일까 의심이 드는 것이다.

이 사안을 담임에게 질문할 일도 아니고 아무리 1학년이라고 해도 나는 절대 담당자에게 왜 내 아이를 조금 더 배려해주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 없다. 그저 다른 아이들은 모두 겉옷을 벗고 있는데 혼자 겉옷을 입고 앉아 있는 아이를 의심스럽게 챙겨보지 못했겠구나. 라는 결과만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미루어 짐작하여 소설을 쓴다면 이야기가 너무 방대해 지지 않겠는가. 남의 속도 모르고. 내가 그 속을 어찌 알겠는가. 연말이라 업무가 많을 수도 있고 아이들에게 친절한 선생님이라 늘 아이들이 선생님 주변에 달라붙어 있으니 내 새끼가 하는 말이 모기 소리처럼 들렸을 수도 있는 거다.

5.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것을 미루어 짐작하면 치졸해지기 쉽다.
그러나, 대신 설정을 하여, 만약, 내가 학교에서 엊그제와 같은 돌직구를 지속적으로 날려 어린 나의 아이가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긴다해도 나는 이런 말하기를 지속할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엄마의 돌출행동으로 초중등 시절 불이익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큰 아이의 경우 나의 돌출행동으로 외려 이득을 본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여름이 지나 아이의 머리가 자외선에 자연탈색 되었는지 약간 갈색으로 변했는데 학교에서 무조건 검은 색으로 염색을 하고 오라 해서 전화를 한 적이 있다. 교칙이 어떻게 되느냐고. 일괄적으로 순도 100%의 흑발이 규칙이냐고.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답변을 들었고 아이는 염색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또 한 번은 융통성 없는 정책, 날이 갑자기 추워졌는데 동복착용 금지를 시켜 학교에 전화를 했었다. 오늘 지금 전화 받으시는 선생님은 뭘 입고 나오셨냐고 물었다. 그날 종례시간에 아이들에게 추우면 겉옷 입고 오랬다는 답을 들었다.

학부모라는 집단과 학교라는 집단은 기이하기 그지 없다. 아이들은 아무리 학습을 많이 시켜도 수준이 월등히 우수하지 않다. 내가 다년간 지켜본 바로 적어도 이 지역의 아이들은 내가 자랄 때 아이들보다 대단하게 우수하지 않다. 외려 타고난 재능발휘, 특기, 발표 부분는 그 때 의정부나 도봉구 땟골 아이들보다도 후지다. 아이들도 그대로, 학부모도 그대로, 학교도 그대로. 그리고 나도 그대로다.

또한, 어떤 집단이거나 나 같은 인간이 한 둘은 있을텐데 나처럼 늘 세상에 탈이 많은 거 같아 말이 많은 인간이 한 둘 이상이 조직은 과연 똑바로 굴러갈까 하는 의심과, 그렇다면 나는 과연 매사를 너무 예민하게 탈많은 세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과, 이런 나의 비판적 태도가 진실한 비판인지 혹은 그저 불만의 습관인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거다. 왜냐면, 남들은 괜찮아 보이니까. 내가 한 말을 하지 않고 살아도 별 문제가 없어 보이니 말이다.

과연 세상은 달팽이 오줌만큼이라도 움직인걸까. 그리고 나는 과연 얼만큼 자라온 걸까.

2013. 12. 20.